험한 십자가
존 피셔 지음 / 정진환 옮김
죠이선교회 / 2005년 1월 / 204쪽 / 7,000원
▣ 저자 존 피셔 (John Fischer)
선구적인 음악가, 작사작곡가, 그리고 인기 있는 강연가인 존 피셔는 많은 책을 저술한 수상 작가이기도 하다. 휘튼 대학을 졸업한 그는 몇 년 동안 월간 Contemporary Christian Music 잡지에 통찰력 있는 칼럼을 싣기도 했다. 존과 그의 가족은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다.
▣ Short Summary
역사적으로 볼 때 십자가는 복음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인의 일상에 머물러 있는 증거이지만 교회의 한쪽 벽에 걸린 장식물이 된 지 오래이다. 현대 신생 교회의 시장논리와 교인들의 “일차적인 욕구”에 치중한 나머지 십자가는 뒷전으로 물러나 과거의 기억이 되어 버렸다. 저자는 십자가를 역사의 중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의 현장으로 되찾아오기 위해 이 책을 썼다. 1부에서는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인 십자가와 복음의 불일치를 해소하고 재구성했다. 2부에서는 신자의 삶과 십자가의 역할을 다루었다. 이를 통해 십자가처럼 험하고 고통스런 것이 일상에서 죄와 구원을 경험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은혜가 되는 현실을 만드는지 알 수 있다.
▣ 차례
서언
1부
1. 올드그리니치 십자가
2. 하나님의 색
3. 신비스러운 십자가
4. 대속제물
5. 감춰진 그림
6. 하나님의 숫양은 없다
7. 나의 죄
8. 새로운 가능성
2부
9. 자기부인
10. 자아의 참된 죽음
11. 그레이스 핫라인
12. 아삽의 고백
13. 유행을 타지 않는 본질
14. 험한 십자가
15. 우주의 별무리
후기
험한 십자가
존 피셔 지음 / 정진환 옮김
죠이선교회 / 2005년 1월 / 204쪽 / 7,000원
1. 올드그리니치 십자가
코네티컷 주에 있는 올드그리니치 마을에 한 교회가 있다. 보통 강단 뒤쪽 벽에 십자가를 걸어두는 일반 교회와는 달리 이 교회는 강대상 1미터 앞 콘크리트 바닥에 십자가가 박혀 있다. 전통과 상식과 예술감각을 뒤집는 엉뚱한 자리이다. 보기도 흉하다. 거친 원목으로 만들어진데다 자세히 보면 군데 군데 갈라지고 딱딱해서 무척 무거워 보인다.
누구도 이 십자가를 무시할 수가 없다. 나는 교회 앞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걸어다니면서 무의식적으로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다. 나는 십자가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십자가를 기준으로 내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교회당 안으로 들어와서 십자가의 위치를 보는 순간 놀랐지만 정말 중요한 것을 발견했다. 교회의 정중앙에 십자가가 떡하니 버티고 있듯이 주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언제나 역사의 중앙에 있고 진실한 마음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사는 사람의 삶 중심에 존재한다. 그리고 교회의 정중앙에 놓인 십자가가 눈에 거슬리듯이 주님의 십자가 역시 그렇다. 아니 그래야 한다. 십자가는 안락의자가 아니다. 예배당 중앙의 거친 나무 십자가는 십자가가 주는 충격을 완화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거부한다. 우리가 대하는 십자가는 일반적으로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대개 귀걸이, 팔찌, 목걸이로 쓰인다. 예배당 지붕 위나 본당 벽에 걸려 있다. 십자가는 감성이 녹아 있는 종교적 상징이나 장신구이다.
이 십자가의 범상치 않은 자리가 21세기를 시작한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현대 교회는 점점 십자가 없는 기독교의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기독교를 대중화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은 희생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 편리한 복음을 창조했다. 복음의 좋은 부분만 전하려는 현대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의 고초를 간과해 버렸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십자가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무능력한 죄 문제는 어디로 갔는가. 현대인에게 원죄는 역기능과 알코올중독에 대한 관심의 그늘에 가려 뒷전에 물러난 지 오래다. 교인들도 사고기능을 회복하는데 십자가의 능력보다는 정신과 의사의 능력을 신뢰하는 편이다.
죄의 대가를 요구하는 의롭고 거룩하여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을 생각해보자.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 때문에 수백 년간 제단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소와 염소를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가 아는 제사의 본질이 무엇인가? 제사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 현대 복음이 전파하는 하나님은 하늘에 사는 친구일 뿐이다.
그러나 만물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는 우리의 가면을 깨부순다. 우리의 교만과 죄 때문에 주님이 치른 대가인 십자가를 보고도 겸손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십자가는 시대의 변화에 거의 반응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세대가 자신만의 차별화 된 문화를 꽃피울 때도 십자가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본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십자가를 시류에 맡기지 않으셨다. 시류에 거슬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독생자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셨다. 죄를 위해 피를 흘리는 제사에 대한 노래를 어느 누가 좋아할까? 그러나 현대 교회는 친구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고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고자 시류에 맞는 매력적인 모습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와 같은 교회는 만물의 중심에 타협하지 않고 서 있는 십자가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올드그리니치 십자가는 모든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한다. 십자가는 결혼, 장례, 공연, 세례, 봉헌, 기도, 예배의 중심에 있다. 장례식 때 관을 두기도, 결혼식 때 신랑과 신부가 붙어 있기도, 음악회 때 악단을 배치하기도 불편하다. 올드그리니치 교회는 마치 십자가를 기준으로 지어진 듯하다. 벽보다 지붕보다 먼저 십자가를 세운 것 같아 보였다. 십자가가 그렇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2. 하나님의 색
하나님은 첨단 문화의 기수처럼 전국에서 새롭게 지어진 교회와 너무나 잘 어울린다. 신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복음과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모브(mauve)빛깔로 치장되었다. 과거에 비해 세련된 모브빛 하나님이 우리 문화에 더 잘 어울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새로운 하나님은 구원의 길이 열려 있는 교회 근처에도 오기 싫어했던 사람의 관심을 끌게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고 있다. 역사상 최초로 교회가 사람들의 실제적인 필요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재정관리, 인간관계 개선, 이성교제, 자녀양육, 중독치료, 치유, 알코올중독, 다이어트, 건강 등 사람들의 필요를 채웠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치유하고 삶에 소망을 주셨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보다 나의 필요에 가 있다. 이제 교회가 거의 정신과 의사 행세를 하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그저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되고 문이 열리면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신다. 이렇게 친절하고 멋진 하나님이 문 밖에 계신데 누가 문을 꼭꼭 닫고 있을까?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다. “모브빛” 하나님을 성경에서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찾고 있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대신 핏자국은 선명하게 보인다. 피와 같은 붉은 색, 진홍같은 죄의 색이 보인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1:18). 사실 구약성경 대부분이 그리고 신약성경도 동일하게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 유행을 따르는 “모브빛” 복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다.
올드그리니치 교회에는 키가 높은 십자가가 하나 더 있다. 이 십자가는 교회당 밖 입구 쪽에 있어서 거리에서나 기차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뉴욕 시를 왕래하는 기차가 하루에도 수차례 사람들을 태우고 십자가 곁을 지나간다. 녹슨 십자가는 비를 맞으면 녹빛 물이 떨어진다. 이것이 이 십자가가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외침이다. 십자가가 박혀있는 콘크리트에 물들인 녹빛은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리고 비가 올 때마다 시멘트는 반복해서 녹빛에 물든다. 눈보라가 지나간 겨울 어느 날 모습을 드러낸 태양이 십자가를 달구면 녹슨 십자가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하얀 바닥에 핏빛 구멍을 낸다.
예수 그리스도는 엄청난 고통 속에 죽어갔다. 성경은 피로 물든 책이다. 유쾌한 이야깃거리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십자가의 실체를 경험하지 않고는 이 강력한 십자가의 모습 뒤에 숨은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는 레위기에 대한 설교나 간증은 자주 듣지 못하는 편이다. 누군가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라며 레위기 4장4절을 소개하는 장면을 상상해보자.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예배가 끝나면 이 별난 사람을 구경하려고 너도 나도 몰려갈 것이다.
나는 소, 염소, 양을 죽일 준비를 하고 하루를 맞는 제사장이 되는 상상을 했다. 가죽을 벗기고, 내장과 지방을 제거하고, 각을 뜨고, 비둘기라면 머리를 비틀고, 날개를 찢어내고, 그런 다음 여기저기 제단에 다른 제사장들의 발가락과 귓불에 계속 피를 뿌린다. 그 냄새와 낭자한 핏자국과 파리 떼와 쓰레기를 상상해 보라. 게다가 이런 일은 끝이 없다. 제사장이 방금 황소를 죽이고 막 제사를 마쳤는데 한 사람이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저를 위해 희생제물을 드려 주십시오. 제가 이웃집 부인과 동침하고 말았습니다.” 내가 제사장이었다면 소를 잡는 대신에 그를 잡을 것 같다. “그런 수작을 부리러 다니면서 이런 때가 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느냐?”고 호통을 치겠다.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면 한번쯤은 제사장 중에 누군가는 끈적끈적한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소와 양과 비둘기들이 우는 가운데 크게 소리치지 않겠는가? “이놈들아, 제발 죄 좀 짓지 마라!”
많은 사람들이 피를 보기만 해도 기절한다. 우리 대부분은 피 냄새를 맡지도 않고 피를 볼 일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그런데 오늘 나는 레위기를 읽고 나서 그것이 과연 다행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고통스런 객관적 교훈을 떠나 살게 되었고 이제는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 십자가가 무엇인지 잊어 버렸다.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정말 무엇을 지불했는지, 죄를 짓는 일의 대가로 무엇을 지불했는지를 우리는 몰랐다.
우리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되는 생활을 하고 있다. 죄, 자백, 용서의 과정은 모두 피를 흘리듯 고통스런 일이고 진심으로 회개한다면 고통 뒤에는 기쁨이 찾아온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이 대부분을 추상적으로만 받아들인다. “갈보리 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우리 자신의 죄를 저 멀리 두고 노래로만, 예배 의식으로만, 신학적으로만 죄를 생각하지 개인적인 것으로는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면 그가 죽으신 다음에 지은 죄들도 이전에 지은 죄들과 마찬가지로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인이 된다. 이런 진리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기가 어렵다. 이는 마치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 등에 칼을 꽂는 것처럼 모순이다. 현대의 죄와 그리스도의 과거의 죽음 사이의 인과관계를 살펴볼 때,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반복되는 죄에 대해 무엇인가 결단을 해야 한다.
3. 신비스러운 십자가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중요성과 목적은 우리의 생각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실인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말고 할 일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사실로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복음을 듣고 감정적인 경험을 해야 구원 얻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죄를 위해 험한 언덕 위의 나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당신도 나도 그 자리에서 이 사건을 목격하거나 무슨 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보셨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예수님을 불쌍히 여기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 전하려고 갖은 수단을 다 쓰시는 하나님도 안 됐다는 식으로 바라본다. 우리가 척박한 십자가를 부드럽게 만들든지 아니면 아예 치워버리지 않고는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추기가 쉽지 않다. 물론 하나님은 이런 놀음이나 흥정에 조금도 관심이 없으시다. 단지 우리가 기독교를 오해한 것이지만 사람이 제아무리 머리를 써서 하나님을 안다고 해도 여전히 기독교를 제대로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어찌됐든지 하나님의 아들은 숲 속에서 나무 하나가 쓰러지듯이, 그리고 주위에서 그 쓰러지는 나무 소리를 아무도 듣지 못했다 해도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
오늘날 기독교가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할 가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이 현대문화를 수용하면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쉽고 그리스도인이 될 확률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인기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증을 하고 다니면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만약 대중문화 가운데 복음적인 요소가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만약 복음이 이 문화와 함께 존속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지금 우리가 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복음을 사람들이 듣고 있다고 어떻게 확신하겠는가? 복음보다 문화의 목소리가 커서 사람들이 복음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복음을 상황에 연관시키려고 하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위배되는 행동을 하고 진리의 효용성을 잃을 수 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의 메시지를 세상과 어울리지 않게 제시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은 자주 메시지를 반문화적으로 선포하는 경향이 있다. 그분은 우리 문화에 역행하여 역사한다. 자기들끼리도 바로 그 사람을 죽여 버리는 무리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는 계획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든지 말든지 그의 죽음을 통해 그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선포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갑자기 유행처럼 인기 있는 일이 된다면 과연 이 기독교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것인지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특정 시대가 낳은 인물이 아니다. 그는 언제나 존재하였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신다. 그를 1세기의 로마 문화로 정의할 수 없다. 그의 삶과 메시지는 그 시대의 문화를 초월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문화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변화와 초월이 가능한 복음의 능력, 문화의 안과 밖을 아우르는 복음의 특징을 구현하려는 노력을 현대 기독교는 게을리 하고 있다. 우리는 너무 ‘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지 못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도 이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싫어했던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바보!’라고 말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날 오후 골고다 언덕에서 이 처참한 광경을 보면서 어떤 식으로든 사랑을 느낀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역겨운 기분이 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기분이 어떤지 묻지 않으셨다. 그분은 그냥 그렇게 하셨다. 그는 독생자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고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전체를 통하여 이 사건이 중요하다고 선포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내가 구속할 만한 가치가 있어서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죽으셨나, 아니면 나를 통해 은혜를 보이시고 더 나아가 온 세상에 은혜를 보이시려고 죽으셨나? 만약 하나님의 구속이 나의 가치에 따른 것이라면 하나님은 유능한 사업가에 지나지 않으며 투자에 상응하는 수익을 거두었다. 그러나 만약 이 구속 사업이 하나님의 전체 계획을 하늘에 속한 정사와 권세에게 알리려는 목적이라면 우리는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큰 그림의 일부가 된다. 핵심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 나타난 은혜와 자비이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이 영광을 돌리는 것, 모두가 무릎 꿇고 만입이 찬양하며 그에게 예배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러한 내용이 빌립보서 2:5-11에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일을 기록하면서 무릎을 빼고는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 그의 아들과 그리스도의 태도에 대한 것뿐이다. 우리는 그의 사역의 목적이 아니며 함께 예배에 참여하게 될 피조물이다. 중요도를 따져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죽으시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위해 죽으셨다고 믿는다.
4. 대속제물
한 세대를 대표한 전도자요 하나님의 대변자로 헌신적인 사역을 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는 미국 4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기도를 하게 되었다. 반세기를 복음 전파에 쏟아 부었지만 이 세상은 그가 사역을 시작할 때보다 더 큰 혼란에 빠져든 것 같아 보였다. 그는 이 일에 일말의 개인적인 책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단상에 올라서서 온 국민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다. “오, 하나님 우리는 죄인입니다.” 혼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던 나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기도를 듣는 순간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천년을 관통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 아침 혼자 문제의 핵심을 찌르는 빌리 그래함 목사의 기도에 미국의 내면에 흐르는 죄악을 보고 죄책감을 느꼈다. 취임식이란 원래 밝은 희망의 미래를 제시하는 날이다. 그러나 아무도 빌리 그래함 목사를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의 진실한 말 한마디에 나라 전체가 머리를 숙였다.
우리가 에이즈 치료법을 발견하는 데는 성공할지 모르나 동성애자들이나 보통 사람이거나 상관없이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악의, 편견, 교만 등에 대하여는 속수무책이다. 우리가 배고픈 자들에게 음식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나 우리 영혼의 허기를 채우기 위한 음식은 한 숟갈도 넣지 않는다. 자가당착의 우리의 모습은 연구 대상이다. 그 결과는 고스란히 우리 몫이다. 우리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고 배불렀으며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한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십자가가 이것을 말하고 있다. 무엇인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십자가가 필요 없다.
예수님은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요 밖으로 나오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 등이 사람의 내면에서 나왔다면 본래 마음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 근원이 문제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임을 알면서도 다른 곳에서 문제점을 찾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 나는 이 구절을 읽고 크게 놀랐다. 그리고 지금도 읽을 때마다 놀란다. 자신을 죄인의 ‘괴수였다’라고 말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지금도 죄인의 ‘괴수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는 이 사실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상기시켜 주는 십자가가 날마다 필요했다. 나의 문제는 바로 나 자신이다. 우리는 지금 모두 죄인의 괴수이므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 바울은 이렇게 외쳤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롬 7:24)
5. 감춰진 그림
나는 아들과 함께 거의 반시간이나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을 보니 작은 숲 오른편에 긴 옷을 입고 서 계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흰 바탕에 검은 점들뿐이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7)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십자가를 누구나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구원하는 능력이 없는 것이라고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의 능력은 인간의 지혜에 역행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해결책이 아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아무리 오래 바라보아도 아니 평생을 바라보아도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십자가와 복음을 모든 사람에게 명확하게 설명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복음을 방해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인간의 지혜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이상 복음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 의미가 숨겨진 그림처럼 튀어나올 수도 없고 우리가 설명할 의무도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분명히 설명해 주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십자가의 메시지는 의도적으로 문화를 거스르며 그 의미는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하기로 택하신 자들에게만 이해된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그림을 높이 들고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에게 그림이 보이도록 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망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만큼 이 일을 잘 해낼 수가 없다.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진리를 감추었는데(마13:11-12) 하나는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이끌어 오시는 아버지의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었고(“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 또 하나는 진리를 알고 추구하려는 개인의 지능과 욕구를 믿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게 되는 길은 항상 쌍방 통행이다. 하나님은 진리를 항상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으셨다.
하나님이 감추시는 것 중에 가장 깊이 숨겨두신 것이 십자가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는 참으로 약해 보이지만 이것이 바로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2:14-15). 언뜻 보기에 패배의 상징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승리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십자가 처형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 공포를 일으켜 그런 불법을 저지르는 죄인이 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힘이 강했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보통 기준이 오히려 반대 효과를 가져왔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골2:25) 이것이 십자가의 위력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이 놀랍고 영광스러운 천재적인 계획을 마련하신 주님을 만날 때 우리는 흥분한다. 이것이 이 땅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드라마이며 우리 모두는 이것을 보고 그 그림의 의미를 궁구한다.
“아, 보인다. 보여! 세상에 이럴 수가!” 다음 날 다시 한 번 그림을 꺼내 보던 내 아들은 드디어 선명하게 보이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느낌을 알 수 있었다.
6. 하나님의 숫양은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들을 대신할 숫양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없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위에 올라가서 못이 박힐 때 수풀에 걸린 숫양은 없었다. 예수님을 대신할 제물이 없었다. 아들뿐이었다. 독생자와 피를 흘려야 할 제사뿐이었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시며 아들을 향해 칼을 꽂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의 처지는 이삭과 달랐다. 이삭은 버림받지 않았다. 한순간 혼란스러웠으나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다. 수풀에 걸린 숫양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는 버림받았다. 단절되었다. 천천히, 고통스럽게, 수치스럽게 죽어갔다. 자신이 수풀에 걸린 우리들의 양이었다.
정말 굉장한 사실이 하나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삭은 바로 나다. 이것은 하나님과 나의 이야기이다. 목숨을 구한 것은 바로 나다. 결박되어 장작 위에 놓여 있다가 목숨을 구한 것은 바로 나다. 그런데 나를 위해 수풀에 숫양이 걸려 있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걸어서 산을 내려왔다. 짐은 가벼웠고 죽음은 뒤에 두고 왔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로 깊은 평안 가운데 마음껏 웃었다.
7. 나의 죄
죄가 그렇게 나쁜 표현만은 아닌데도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선한 의미로서 죄는 문제를 올바로 진단했다는 뜻이며 문제가 제대로 진단되었을 때 우리는 평안을 느낀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하다. 우리는 본능을 제어하고 죄성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성적인 존재로서 훈련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가장 선한 의도조차도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인생은 계획한 대로 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죄성이다. 우리가 죄를 인정할 때라야 문제의 본질을 깨닫게 된다.
불치병이라는 진단이 나오면 환자는 처음에 자기 병을 부인하지만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병과 싸우기 위해 병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있는데 우리가 죄를 직면하고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도리어 기쁠 수도 있다. 내 죄가 구원을 위한 토대가 되고 구원받을 자격을 부여한다면 죄도 영광의 일부가 된다. 내가 죄를 몰랐다면 용서도 몰랐을 것이다. 내면에 문제를 안고 살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아무 문제없는 척 살아가는 모습이야말로 현대인의 모습이다. 수많은 소설, 연극, 영화가 이러한 현대인의 모습을 주제로 삼는다. 예를 들면 우디 앨런 영화를 보면 등장인물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불분명한 내면의 죄책감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인정하듯 이러한 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바로 이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딜레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그의 영화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지 못한 이유가 있다면 관객은 너무나 현실적인 장면에서는 위로를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치 스크린이 현실 속의 나를 비추는 거울 같은데다 복잡한 현실에 대한 해답이 없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나서도 희망을 찾을 수가 없다. 이런 영화에서 얻을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유익은 자신에 대하여 한바탕 웃고 그냥 살아가면서 또한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와 위로를 얻는 것이리라.
대부분 사람들은 죄를 생각하면서 즉시 벌을 연상한다. 어두운 생각, 컴컴한 방과 밀담, 화가 난 두목, 벌, 심지어 폭력 등을 생각한다. 우리가 저지른 모든 나쁜 행동, 그 결과로 생긴 모든 일들이 죄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궁극적으로 용서와 연결되어 있다면? 만약 내가 불려가 그 앞에서야 할 사람이 이미 나를 용서했다면? 죄에 대한 생각을 바꾸겠는가? 그리고 만약 용서를 받아들여야만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 시점에서 내 인생의 죄는 다른 의미를 갖지 않겠는가? 나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갑자기 죄는 아주 값진 소유물이 되어 버린다. 자유로 향한 티켓처럼. 그러나 조심할 것이 있다. 이 과정은 죄에 대한 개인적인 깨달음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이것을 추상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의미하는 죄는 일반적인 죄가 아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죄, 곧 나의 죄이다. 하나님과 참된 관계가 여기서 시작된다니 얼마나 아이러니인가? 십자가의 가치는 내가 내 죄를 얼마나 깨닫느냐에 정비례한다. (눅7:47)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십자가나 복음에 대한 이해부족이 아니라 죄에 대한 지식부재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죄가 그렇게 나쁜 단어로 들리는 이유는 그들이 용서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평생에 설교자가 ‘나의 죄’라고 말하는 것을 거의 들어 본 기억이 없다. 사실 나 자신도 그런 설교를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상적인 죄인이 따로 있고 멋쟁이 죄인이 따로 있고 정말 악질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 같이 죄인이고 우리는 똑같이 영광스럽게 구원받았다.
8. 새로운 가능성
첫 부활절 아침이 밝았다. 어제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빛나는 천사가 물었다. “왜 살아 있는 사람을 무덤에서 찾고 있느냐?” 천사의 질문은 그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왜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 왜 인과법칙이라는 고전적인 생각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고 하는가? 왜 향유병을 들고만 있는가? 손에 든 작은 향유병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죽은 사람의 몸에 향을 바르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 분은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
나의 믿음은 언제나 부활절 아침에 나타난 천사와 같이 나타난다. 보통 내가 하나님을 망각하고 있을 때 나는 뻔한 사실을 두고 갈등한다. 어떤 때는 늘 듣던 율법주의에 붙잡혀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 없이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따져보기도 한다. 한마디로 불가능이다. 내가 나만의 작은 세계를 유지하고 통제한다면 그것은 마치 시신도 없는 무덤가에 서서 작은 향유병을 들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천사는 왜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고 물었다. 천사는 새롭고 밝은 영광스러운 사실을 말하면서 여인들의 슬프고 어둡고 부정적인 생각을 물리쳤다. 믿음이란 항상 이렇다. 새로운 세계관이 믿음을 완성하면 우리는 늘 경이를 느낀다. 우리는 왜소하다.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맞이한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예수님을 찾았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불합리한 사람의 이성으로 그리스도를 찾는다. 우리는 불신으로 그와 단절되어 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죽은 시체와 같은 모든 핑계와 죄를 감싸고 있는 세마포에 향유를 바르도록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가 매어있는 일상에 예수님은 매어있지 않다. 그는 살아 계신다. 그는 무덤에서 나와 우리 옆에 계신다. 그의 나라가 임했고 사람들의 삶은 변했다. “깨어나라! 매일 아침이 내가 부활한 부활절 아침이다. 나는 네가 상상치 못했던 새로운 가능성이다!”
2부
9. 자기 부인
사람은 얼마나 빨리 잊어버리는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연약함을 깨달았으나 구원을 받고 십자가의 능력을 의지하는 대신 십자가를 내던지고 스스로 삶의 주인행세를 되풀이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기도를 하고 나면 새사람이 된다고 생각한다. 옳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러나 우리 몸 안에서 죄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라는 바울의 절규는 평생 한번만 외치는 절규가 아니요 거듭되는 외침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성도가 죄와 씨름해야 한다고 증거하고 있으며 이러한 죄성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이 구원받았다고 죄가 단번에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고, 의심하고, 죄와 씨름한다. 만약 이와 같이 우리가 인성과 죄성과 씨름하는 것이 매일 부딪히는 현실이라면 십자가도 또한 손에 잡히는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좇으려면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삶에서 역사하는 십자가의 역할을 쉽게 잊어버린다.
사도 바울은 사람이 구원 받은 후에 십자가를 쉽게 잊어버리는 존재임을 잘 알았다. 그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바로 이 문제를 경고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 3:1,5).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믿음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말이 복잡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실천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직감적으로 그 의미를 알지만 이것을 의도적으로 복잡하게 만드는 이유는 개념 자체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도 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아가 죽는다는 의미는 실제로 내가 죽는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현실이어야 한다. 나의 숨이 끊어지고 내 몸은 시체가 되고 나는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나는 더 이상 내 존재의 이유가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내 행복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무슨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상에서 나를 찾을 수 없다. 나는 더 이상 스스로 창조한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내 생활을 통제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존 피셔가 살았던 곳에 가보라.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는 죽었다. 그러나 그 자리가 비어있는 곳에서 빛나는 옷을 입은 누군가가 대문 옆에 서서 당신에게 왜 산자를 무덤에서 찾느냐고 물을 것이다.
정말 모든 일이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될 수 있다. 내가 있던 곳에 와 보라. 나는 없고 대신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셔서 항상 그랬듯이 자신은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계실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믿는 자의 삶이 이렇게 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아직도 옛 자아가 살아서 염려하고 궁리하고 주인행세를 한다면 이는 내가 별 볼일 없는 은사의 동전을 짤랑거리며 안락의 치마 자락을 붙들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나는 사망을 붙잡고 그리스도보다 살아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이런 관점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하는 구절이 바울이 말한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는 권고에 잘 나타나 있다. “남편들이여,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그 몸을 줌과 같이 하라”(엡 5:25-26). 아내와 나의 관계를 보면 내가 이런 죽음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 알 수 있다. 어떻게 내가 나 자신을 “아내에게 주어!” 아내가 온전케 된단 말인가? 우리를 살리려고 그리스도는 죽으셨다. 나도 아내를 살리려고 죽은 적이 있는가? 오히려 나는 아내가 나를 위해 자신을 포기하기를 여러 번 바랐다. 다들 그러지 않는가? 아내는 남편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남편은 다니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한다. 예수님은 내게 오히려 반대로 하라고 명하신다. 내가 이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이 정도라면 나는 아직도 멀었다.
일상의 중심에 십자가가 존재하면 성령 충만한 삶을 촉발한다. 십자가는 살아있는 이정표이다. 십자가는 내 죄를 보여주고 용서와 구원을 위해 치른 대가를 상기시킨다. 의식적으로 죄를 도모할 때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보면 죄를 짓고 한 번 더 예수님을 죽여야 할 지 고민할 수밖에 없다. 십자가가 중심에 있는 삶을 살면 우리는 두 가지 덫을 피할 수 있다. 첫째, 무감각한 죄인의 삶으로 늘 되돌아가는 덫(그리스도의 희생을 조금이라도 감사한다면 불가능한 일이다)과 둘째, 반대로, 성도는 죄와 무관해서 완벽하게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덫이다.
“실제 인간의 삶”이란 선택의 연속이다. 현실은 죽은 것을 살아있다고 말하고 부활의 참 생명은 손에 집히지 않는 곳에 있는 듯하다. 더군다나 인생은 너무 산만해서 문제에 집중할 수 없고 선택할 시간마저 빼앗아 버린다. 우리의 시야를 문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은 만물의 중심에 박혀있는 십자가 밖에 없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스스로 모진 면이 있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이나 생각이나 태도가 조금이라도 잘못되었다는 암시를 주면 가차없이 못과 망치를 들어야 한다. 절대 자아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의 죽음에 버금가는 혈투가 될 것이다. 결코 낭만적인 모습이 아니다.
10. 자아의 참된 죽음
자아가 죽기 위해선 적어도 세 가지 싸움을 치러야 한다: 첫째, 죽음이란 언제나 고통스럽고 비참하기 때문에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에 항거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누구나 천국 가기를 원하지만 아무도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죽기 위해선 이러한 본능과 싸워야 한다. 둘째, 현대문화는 물론이고 대부분의 성도조차 자기부인을 거부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철학을 숭상하고 있다. 80년대를 풍미한 “자기중심” 세대와 90년대를 휩쓴 “자기시대” 정신이 지금까지 흐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과 싸워야 한다. 셋째, 사단과 그의 부하들도 성도의 자기 부인을 막으려고 혈안이다. 그들은 자기부인이 오직 한 가지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질색하는 성령 충만한 삶, 기쁨과 사랑과 자비의 삶, 희생과 절제와 포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옛 사람”, “옛 자아” 또는 “죄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는 말을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성경에 나오긴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대면하고 싶지도 처리하고 싶지도 않은 무의식의 죄를 듣기 좋게 표현하는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죄가 실제로 드러나는 것은 치욕이다. 죄가 드러나면 자아가 무너진다. 결국 자아가 죽을 수도 있다. 이것이 진리이다. 자기부인은 의식, 계획, 하루 일과, 인간관계에 일어나는 현실적인 죽음이다. 더 이상 자아는 없다. 세상과 시간과 인간관계의 중심이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무의식이 아닌 내가 자각하는 자아가 죽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결코 이 죽은 몸을 떨치고 일어나 성령 안에서 새 삶을 입지 못할 것이다.
자기부인은 내가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는 고백이다.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의식적인 자아는 끊임없이 나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이 존재는 점점 더 지겨워지고 나는 이 이기적인 나로부터 해방되기 원한다. 해방의 출구는 오직 하나이다. 자아의 죽음이다. 무의식 깊이 숨어있는 나도 모르는 자아가 아니라 내가 자각하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한다. 내가 의식적으로 삶의 중심에 두는 나 말이다. 반드시 처리해야 할 내 안의 죄가 드러나기 위해서라도 의식적인 자아가 죽어야 한다. 죽어야 할 것은 바로 내 자아가 붙잡고 놓지 않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이상주의가 깨져야 하고 그 멍에를 풀어야 하며 족쇄를 깨뜨려서 나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융이 지적했듯이 보통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경험해야 사람이 겸손해진다. 그러나 내가 온전케 되기 위해 국가적인 재난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은 우스운 생각이다. 우리가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그 자체로 충분한 재난이다. 그리스도에게 십자가는 우주적인 재난이며 우리에게는 우리 죄의 참상을 억지로라도 보여주는 개인적인 재난이다. 십자가를 제대로 만나면 우리의 죄가 표면으로 드러난다. 우리가 죄를 자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드러났지만 우리가 온전케 될 가능성이 열린다. 우리가 죄를 직면해야 용서받을 가능성도 열린다. 융은 또한 이렇게 자신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두려워하는 어두운 부분과 대면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곳에 그리스도와 십자가와 용서가 없다면 부활도 없다. 누구나 십자가 앞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 이제 무서울 건 없다. 죽음은 정복되었고 죄의 값은 치러졌다. 십자가 앞에서 걱정할 것이 있다면 오직 자만심과 체면의 상실이다. 이런 것을 버릴 수 없는 사람은 십자가로 행복할 수 없다. 십자가의 실존은 나를 깨뜨리고 나는 그 앞에서 무너진다.
11. 그레이스 핫라인
“안녕하세요, 목사님. 그레이스입니다. 지금 로비에 와 있습니다.” 그날 아침 그녀의 메시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녀는 모를 것이다. 그녀는 내가 전날 밤 집회했던 교회 교인이었고 자원해서 나를 공항에 데려가는 봉사를 해주기 위해 온 것이다. 아침에 그녀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는 이름도 몰랐다. 나는 전화가 오기 30분전에 잠이 깨었지만 그 짧은 시간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점점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나를 초청한 분이 음악집회가 끝나고 교회 어른들과 함께 자리를 같이 하자고 했지만 나는 다음날 비행기를 일찍 타야 하니까 그냥 호텔로 돌아가 쉬겠다고 말해놓고 텔레비전을 시청했다. 나는 그 자리가 하나님이 원하신 자리가 아니었는지 걱정이 들었다. 사실 돌아와 두 시간 넘게 텔레비전을 시청했으니 거짓말을 한 셈 아닌가? 아침부터 수면부족으로 후회하고 어제 밤으로 부족했는지 아침까지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그때 전화벨이 울리고 생소한 음성이 들렸다. “안녕하세요, 목사님. 그레이스(사람의 이름인 동시에 은혜라는 뜻이 있다-역자주)입니다. 지금 로비에 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은혜에 비견할만한 것이 없다. 은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호의로 전혀 그분의 뜻이지 우리가 받을만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은혜라는 말을 붙이고 정의도 내리지만 결코 그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다.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다.
우리는 부지불신간에 율법교사나 바리새인처럼 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라고 꾸짖으셨다. 만약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훼방 놓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래층에 기다리고 있는 것도 모른 채 위층에서 염려하며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은혜가 아래층에 기다리면서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려 하는데 우리는 스스로 징계하고 자신의 죄 값을 치르려고 애쓰고 있다. 대통령 관저에는 24시간 열려있는 핫라인이 있고 자동차에는 핸드폰이 있고 회사에는 수신자 부담 전화가 있다. 은혜 핫라인은 없을까? 하나님과 통화하고 싶은가? 수화기만 들어라. 전화벨은 지금도 울리고 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 전화를 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언제나 원하는 대로 원하는 만큼 수화기를 들 수 있다.
12. 아삽의 고백
우리가 하나님과 십자가 앞에 나아가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정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 이것이 회개이다. 시인이며 음악가인 아삽은 시편에 기록했듯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시편 73:1-2) 오늘날 이렇게 정직한 그리스도인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심장이 찔렸나이다 내가 이같이 우매무지하니 주의 앞에 짐승이오나”(21-22절). 아삽의 고백이 바울 사도와 같지 않는가?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롬 7:21). 아삽과 바울은 십자가를 전후로 수천 년 차이가 나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성도가 매일 부딪히는 오랜 갈등이다. 아삽이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로 시편을 시작했으나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28절)로 끝낸다. 얼마나 다른가! 이분이 바로 하나님으로 그는 짐승 같은 나의 오른손을 잡고 나와 함께 걸으시고 내 영혼의 애통하는 소리를 들으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심판을 방해한다. 하나님은 연약한 내 영혼에 힘을 주신다. 이 불안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다.”
13. 유행을 타지 않는 본질
기독교는 죽지 않았다. 현대적인 신앙고백이 타격을 입은 것도 아니다. 도리어 튼실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죽은 것은 세상에서 현대 기독교가 의미할 수 있는 희망이다. 이제 모든 것이 현대적이므로 현대적이란 말은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한다. 아무리 교회가 현대적이라고 해도 사람들은 꿈쩍도 안 한다. 이제 현대 기독교 문화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도리어 마케팅 플랜의 틈새시장이 되었고 타깃 캠페인의 목표가 되었고 보수 정치 정책의 금맥이 되었고 데이터 뱅크의 메일링 리스트가 되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현대 기독교는 현대문화에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동화되고 말았다. 죄는 역기능 행동으로, 죄책감은 나쁜 감정으로, 십자가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노래로, 부활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 변질되었다.
십자가가 모든 것의 중심에 우뚝 서 있으면 우리는 개인적으로든지 집단적으로든지 보다 정직한 생활을 영위하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예배의 중심으로 돌아와야 한다. 진정한 예배는 우리를 위로 끌어올리기 전에 아래로 끌어내린다. 예배는 언제나 십자가에서 시작한다. 예배는 십자가에 있는 나 자신을 보면서 은혜와 용서의 자리로 나아간다. 나는 성도이기 이전에 용서받은 죄인이다. 그리고 나의 참 모습을 알고 나면 놀랍게도 성도로 하나님 앞에 선다.
성도에게 있어서 참된 간증은 십자가를 통해서 온다. 우리를 용서받아야 할 죄인으로 보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다름 아닌 복음을 알아야 할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 이야기를 듣고 소망을 찾을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성공이나 업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불신자들이 기독교인 앞에서는 선하게 행동하려고 한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성취한 것이 겨우 불신자들을 불편하게 만든 것뿐이라면 십자가의 메시지를 올바로 해석하지 못한 우리가 복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4. 험한 십자가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을 처형하는 형틀을 사랑할 수 있을까? 피로 얼룩진 나무기둥이 어디가 그렇게 아름다울까? 어차피 잘 설명할 수 없는 십자가이니 이상한 것이 이상하지 않다고나 할까? 그러나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하기만 하면 거칠고 평범한 나무기둥이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변한다.
우리가 이미 죄사함을 받았다는 말이 또 죄를 지을 기회를 갖는다는 의미도 되지만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기회라는 뜻도 된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고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죄를 짓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우리에게 맡겨진 아주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악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바울이 말했듯이 자유가 남을 섬기는 종이 되도록 나를 이끌었다. 죄에서 해방되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자기 인생의 비참한 모습을 발견했지만 십자가는 우리를 박대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소중히 품고 사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경험하는 사랑이 바로 십자가 형틀에서 연유한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주님이 치르신 대가가 엄청나지만 그 값이 얼마인지는 알지 못하고 그저 아버지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 들였다.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거절할 만큼 교만하지 않다.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가 왜 우리의 삶에 필요한지 더 분명히 발견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소중히 여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 알아간다. 알면 알수록 우리는 모르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충만하기 위해 자신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죽음과 생명의 순환을 반복해서 경험한다.
15. 우주의 별무리
우리는 빛나는 별무리요 황금이다. 조니 미첼의 말이 맞다. 인류의 오류와 영혼의 가치는 별개의 문제이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다. 실은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류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우리의 가치 때문에 죄는 비극이다. 죄는 궁극적으로 우리를 파괴하고 우리를 무가치하게 만든다. C.S 루이스가 말했듯이 우리 각자는 영혼의 가치로 인해 영원한 공포를 맞이하든지 영원한 영광을 맞이하게 된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놀라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시는 일이나 인간이 스스로 하는 일이나 모두 놀랍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말해주고 있다. 잃어버린 인간을 구원하고, 그 아들 예수의 피로 구속하여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다.
사도 바울은 이 목적을 에베소서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엡 3:8-11). 하나님은 언젠가 이러한 청사진을 모든 만물들에게 밝히실 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계획으로 구속한 당신의 백성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밝히실 것이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마치 우주의 별무리처럼 하나님의 보좌 주위를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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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강자의 조건/전병욱 지음 (0) | 2010.06.19 |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레오나드 스위트 지음 / 윤종석 옮김 (0) | 2010.06.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