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영성의 파워
스티브 맥베이 지음 / NCD편집부 옮김
NCD / 2002년 9월 / 233쪽 / 6,800원
▣ 저자 스티브 맥베이
스티브 맥베이(Rev.,Dr.Steve MCVey)님은 현재 미국 애틀란타에 있는 Grace Walk Ministries라는 세계적 선교 단체를 이끌며 미국, 유럽, 인도, 중국 등에서 은혜운동(Grace Movement)을 주도하고 있다. 그는 아내 멜라니(Melanie)와 네 명의 자녀와 함께 애틀랜타에서 살고 있다. 저서로『Grace Rule』,『Grace Land』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느라고 바쁘다. 온갖 봉사활동으로 교회에서 분주하다. 그러나 그 모든 충성스런 섬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급함과 허전함이 남아 있다. 무언가 빠져 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생명나무가 없다. 율법적인 삶은 우리에게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사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예수님은 헌신하라고 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내 의지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항복하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이다.
▣ 차례
1. 은혜의 삶
2. 육의 삶
3. 깨어진 삶
4. 의로운 삶
5. 자유의 삶
6. 승리의 삶
7. 생명의 삶
8. 감정을 초월하여 사는 삶
9. 영의 삶
10. 진리의 삶
은혜 영성의 파워
스티브 맥베이 지음 / NCD편집부 옮김
NCD / 2002년 9월 / 233쪽 / 6,800원
1. 은혜의 삶
나는 27년 동안 주님을 믿어 왔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불과 5년밖에 되지 않는다. 5년 전에야 비로소 주님이 나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진리는 우리의 삶에 영원한 변화를 일으킨다. 나에게도 하나님이 은혜 안에 사는 삶을 가르쳐 주셨고 그 진리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믿는 자에게 예수님은 그저 구세주요 주님으로만 머물러 계시지는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부르심의 이유가 있다. 예수님이 주님(Lord)으로만 계신다면, 신약성경에 나오는 주님은 단순히 주인(Boss)이라는 의미만 지닐 뿐이다. 이처럼 그를 주인으로만 알 때 우리에게는 종의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한 어조로 우리가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명으로 여길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바로 예수님의 본질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주인을 기쁘게 하려는 종의 마음과는 달리, 자녀로서 아버지와 같은 마음과 생각을 품게 된다.
대부분 그리스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문제는 ‘선과 악’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옳은 일만 한다는 것은 너무 단순한 목표이다.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도 대부분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애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옳은 일 몇 가지 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의롭게 사는 데 있다. 그런 목표를 가질 때 우리는 기적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주 하나님이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을 일구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창 2:8-9)
두 나무는 하나님 안에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삶의 형태를 보여 준다. 생명나무란 예수님을 상징한다. 신약 성경에는 예수님이 바로 생명이라고 거듭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다. 바로 생명이신 예수님과 연합하여 사는 삶이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분과 함께 거하고 그분과 함께 경험하고 그분을 즐기는 삶이다. 이것이 태초부터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한편 이 동산에는 다른 나무도 있었다. 그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로서 율법을 나타낸다. 하와가 그것을 먹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두 사람 모두 선악과를 먹었을 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갑자기 그들의 눈이 밝아져 처음으로 자기들이 벗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전에는 이들이 벗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나는 이들이 그 전에는 벗었다는 것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선악과를 먹기 전 그들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런데 타락이 시작되는 이 시점부터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인류는 계속해서 자신에게만 집중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즉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선택했기 때문에 선악과의 기준이 그들의 삶에 들어 온 것이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선과 악의 잣대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삶 속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것이 그들 삶의 중요한 가치가 되면서 도덕적인 행위를 갈구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인류를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그분 안에 거하고 그분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선악을 초월하여 도덕적인 삶뿐만 아니라 기적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는 바로 하나님 안에서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인 삶을 선택한 것이다. 행위를 선하게 바꾼다고 해서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성도들에게 승리를 경험하도록 가르친다.
어느 날 빌립이 나를 찾아와서 자신이 포르노의 유혹에 빠져 있다고 고백하며 상담을 요청해 왔다. 나는 먼저 교회를 꾸준히 나오고 매일 아침 성경을 읽으라고 권면했다. 또한 하루에 30분 정도 기도하고, 이와 더불어 정욕과 유혹에 관련된 성경 구절들을 암송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나 사실 빌립에게 했던 상담은 “당신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악이라는 가지를 가지고 있군요. 그러니까 선이라는 가지로 바뀔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정말 빌립이 나아지겠는가? 우리는 모두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성경을 읽으며 기도생활을 한다.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좌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는 빌립에게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 안에 있는 정체성, 즉 예수님의 본질과 성품이 그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어야 했다. 예수님이 그에게 역사하실 때만이 그는 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다. 승리의 삶을 사는 비결은 행위를 바꾸는 데 있지 않다. 승리의 열쇠는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만약 기적의 삶을 살기 원한다면,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할 때,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삶 가운데 흐르게 된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에 싸여 나타날 것입니다.”(골3:4)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17:28)
믿는 자가 삶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그것은 낮은 영성을 가지고 선악을 기준으로 하여 사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사는 것은 은혜의 영성이다. 우리의 행위 중심의 삶에서 인격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은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매일 아침 “하나님을 위해서 제가 무슨 일을 할까요?”하고 묻지 않았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거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나를 통해 일하신다.(요 14:9-10)
누가복음 10:40-42절을 보면 유명한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가 나온다. 마리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녀는 예수님의 발 아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리아는 좋은 것, 즉 그 분 안에 거하는 편을 택했다. 이것이 섬기는 일을 무시한 것인가? 예수님이 마리아와 함께 있다가 마리아에게 목마르다고 속삭였다면, 마리아가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마 단숨에 일어나 물 한 컵을 가지고 왔을 것이다. 한편 마리아는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바빴고, 졸립지도 않은데 잠자리를 준비하느라고 바빴기 때문이다. 진정한 섬김이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느라고 바쁘다. 온갖 봉사활동으로 교회에서 분주하다. 그러나 그 모든 충성스런 섬김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갈급함과 허전함이 남아 있다. 무언가 빠져 있다. 그것은 우리의 행동이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는 생명나무가 없다. 율법적인 삶은 우리에게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율법에 따라 사는 한 우리는 결코 만족을 느낄 수가 없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항상 무엇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율법주의다. 은혜는 나에게 스스로 하고 싶다는 소원을 불어넣는 반면, 율법은 결코 만족을 주지 않는다.
2. 육의 삶
수년 동안 나는 하나님께 새로운 헌신을 약속하곤 했다. 어떤 동기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정죄감을 느끼면 다시 새롭게 헌신하고 또 다시 침체에 빠지는, 그런 악순환을 반복했다. 그렇게 열심을 내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지치곤 했다. 자족(스스로 만족하는 삶, 즉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말함-역자주)하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섬기는 행위를 줄이게 한다.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뒤로 물러설 때 죄책감을 느낀다.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어. 나 같이 일관성 없고 부족한 사람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아’ 그러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들려온다, 우리는 점점 깊어져 비참한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이것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영적인 침체이다. 급기야 ‘하나님, 나를 죽여주세요’라고 외치며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그러나 새로운 동기가 주어지면 또 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자, 이제 나는 그분 앞에서 새로운 삶을 사는 거야’ 반복하여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는 삶의 형태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사실 성경 어디에도 우리에게 재헌신을 요구하는 곳은 없다. 예수님은 이것과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마16:24;막8:34;눅9:23)
예수님은 헌신하라고 하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내 의지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께 항복하고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육의 삶’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육이란 말은 자족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성경적 용어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각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발전시켜 온 기술, 혹은 능력을 말한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리가 그분께 온전히 내어 드림으로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육은 삶을 자신의 능력으로 관리하여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라고 한다.
우리는 종종 죄를 우리 힘으로 극복하려 애를 써 본다. 그리고 옳은 일을 해서 승리하려고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서 두 가지 길, 곧 ‘육의 길’과 ‘영의 길’이 있다고 말했다. 육은 자족하는 삶이며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 삶이다. 한편, 영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이다. 예수님이 나를 통해 사시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빌립보서 2장 5-8절에서 바울은 타고난 자원과 능력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누구든지 자신과 겨뤄 보자고 말한다. 소위 바울은 종교적으로 탁월한 육적인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은 긍정적인 요소이기는 하나 여전히 육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에게 육을 뛰어넘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기 전까지, 그가 해 왔던 일들은 종교행위에 불과했다.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복음 15장에 두 아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큰아들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지만 내면은 비참한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상징되어진다. 큰아들은 집을 떠나지는 않았지만,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라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돌아오는 둘째 아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섬겼고 바른 일만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더 사랑하실 거야‘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반응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얘,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다 네 것인데 너는 살찐 송아지 몇 마리로 잔치를 베풀었다고 화가 났구나! 네가 송아지를 원하느냐? 저기 들판을 보아라. 수천 마리의 소가 있지 않느냐? 저것들이 다 네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오늘날 교회 안에도,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사랑 받는 존재인지, 얼마나 용납 받는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주님을 열심히 섬기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큰아들처럼 불만이 자리잡고 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육의 삶은 옳은 일을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예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님을 처음 영접했을 때를 기억해 보라. 그 때가 우리 삶의 이정표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잊어버렸다.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대신 규율과 법칙에 얽매이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보다 행위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그렇다면 육체를 어떻게 끊을 수 있겠는가? 바로 십자가다. 주님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십자가를 주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도 함께 못 박혔다. 우리가 할 일은 또 다시 새롭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 이제 저는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더 잘해 보려고 애쓰는 것에 진력이 납니다. 저 자신의 힘으로 해 보려는 몸부림을 끊어버리고, 이제는 더 이상 발버둥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두 손 들고 나아갑니다. 저의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행하소서, 그래서 내 육의 삶을 끊어주옵소서.”
3. 깨어진 삶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삶은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말씀하셨다. 그 강은 우리의 가장 깊은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약속한 생수의 강을 경험하지 못하고 산다. 게다가 그 중요성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한계를 넘는 곳까지 인도하셔야 한다. 자족의 한계에 부쳤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깨닫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의 육적인 생활, 즉 혼자 살아가려는 삶을 회개하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육의 삶을 정리하도록 하시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기 전에 깨어짐(brokenness)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깨어지는 자리로 나아오기 전까지 하나님은 우리를 온전히 사용하실 수가 없다. 깨어짐과 절대적인 순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깨어짐은 우리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을 포기할 때 생긴다. 절대적인 순복은 주님께 나를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내게(to me), 나와 함께(with me), 내 속에(in me), 혹은 나를 통해(through me) 주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도록 나를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구할 것이다.”(막8:35)
이 말씀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나뭇가지에서조차도 손을 떼는 것이다. 하나님이 쓰신 믿음의 사람은 모두 깨어짐의 쓰라린 과정을 겪었다. 그것은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깨어짐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필수과정이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12:24)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다. 그는 생애 초반 40년을 애굽의 궁정에서 보냈다. 거기서의 40년은 화려한 세월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육을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삶을 관리하고 헤쳐나가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유능한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모세는 광야에서 또 40년을 보냈다. 거기서 그는 과거의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목자의 삶을 살았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양들을 돌보는 초라한 목자로 전락한 것이다. 모세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훈련의 장이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를 찾아와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셨다. 그 지팡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부였다. 그것은 목자로서의 능력과 기술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것이 뱀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가 자족하고 신뢰하던 그 지팡이를 버리도록 말씀하셨다.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뱀을 다시 잡으라고 하셨고, 그가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다. 출애굽기 4장20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하는 구절이 나온다. 이 날 이후로 그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지팡이가 되었다.
고통은 반갑지 않지만, 때론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한다. 위기에 빠졌을 때 이것을 명심하라. 고통은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다. 모세도 광야에서 최상의 시간을 보냈고, 사도 바울도 광야에서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훈련 학교를 졸업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힘에 겹게 너무 짓눌려서, 마침내 살 희망마저 잃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음을 선고받은 몸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우리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고후1:8-9)
나는 16세 때부터 설교를 시작하여 19세에 목사가 되었다. 나는 대형 교회의 목사는 아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가 섬기는 교회를 늘 축복해 주셔서 나로 하여금 충분히 성공했다는 느낌을 갖게 하셨다. 나는 목회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를 부르신 하나님보다 일 자체를 더 사랑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께 온전히 집중하기보다는 예수님을 섬기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것이 목사에게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교회가 놀랍게 성장했고, 내가 자란 동네에서는 그것이 큰 성공이었다. 새로운 건물을 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모든 일이 잘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몇 년 뒤 주님은 나를 알라배마에 있는 한 교회로 부르셨다. 새로 부임한 그 교회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목회 현장이었다. 그럼에도 교인들과 나는 좋은 관계를 맺었고 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그 지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회의 목사로 여러 곳에서 초청을 받아 설교하기 시작했다.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잠깐, 여기까지 말하는 동안 내 안에 일종의 경쟁의식이 잠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었는가? 그것이 당시 나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좋지 않은 어떤 일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문제가 생긴 것이다. 나는 생명을 억지로 쥐어 짜내는 단계에까지 가 버렸던 것이다. 나는 업적과 성취, 즉 목회에서 얻은 성과에만 의미를 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상은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수년 동안 이렇게 교회를 섬기던 어느 날 마침내 애틀란타의 한 교회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교회에서는 교회 성장에 은사와 능력이 있는 목사를 찾고 있었다. 하나님이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는 그동안 성공적으로 증명된 모든 계획, 프로그램, 그리고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허사였다. 성장은커녕 교인수는 줄어만 갔다. 바로 이것이 나의 깨어지는 삶의 시작이었다. 결과를 추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우리 삶에서 결과를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은 삶의 초점이 잘못 맞추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우리는 초점을 예수님께 두어야 한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출 때 그 분은 우리를 통하여 살게 된다.
나는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주님은 나를 도와주시는 것 같지가 않았다. 하나님은 내가 더 약해지기를 원하셨다. 1990년 10월 6일 밤이었다. 새벽2시에 나는 사무실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울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이 지나면, 부임 일 주년 기념으로 성도들 앞에서 교회 상태에 대한 설교를 해야 한다. 성공이라는 허수아비를 하나 만들어 내거나, 사실 그대로를 말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만 했다. 한밤중에 얼굴을 바닥에 댄 채로 화가 나서 하나님께 울부짖었다. “하나님, 도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이게 뭐예요? 여기까지 부르셔서 이 지경에 이르게 하시다니 너무 하십니다. 이 교회와 함께 죽으라는 겁니까? 뭐예요, 도대체?” 이렇게 따지자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셨다. “스티브, 나는 너를 원한다.”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만약 하나님이 당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미안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다만 하나님은 당신을 원하신다(not need you but want you). 나는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 그분을 알고 싶은 소망이 더욱 뜨겁게 타 올라, 주님을 온전히 아는 것이 내 삶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 되었다. 그때 적은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다. “오늘 밤 자정과 새벽 두 시 사이에 하나님의 성령이 내 마음에 임하셔서 나를 사로잡고 구속의 은총을 베푸셨다.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기에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성스러운 사건이다. 과거 18년 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은혜를 경험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내 인생이 바뀌는 이와 같은 순간적인 체험이 나의 에벤에셀이 되기를 원한다.”
4. 의로운 삶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이 규정하시는 내가 존재한다. 나의 정체성은 하나님에 의해 규정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혀 주실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된다. 믿는 자로서 정확한 정체성을 깨닫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확실한 승리를 가져다준다.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묘사하기 위해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성도(saint)라는 말이다. 교회에서 흔히 우리는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바울은 자기 편지의 수신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고전1:2)라고 묘사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를 생각해 보라. 이 사람들이 성자의 삶을 살았는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성도라 칭하며 정체성을 명확하게 보여 주고 그런 다음에 성도답게 살아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한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살려고 노력한다. 성경은 우리를 뭐라고 말씀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엡2:10)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 아담 속에 있었던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이제 새로운 창조물이 된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고후5:17)
종종 사람들이 와서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거룩하지 않아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거룩할 뿐이에요.” 그러나 고린도전서 3:16-17절의 마지막 구절을 보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정과는 상관없이 그것은 사실이다. 그 진리를 선포하라. ‘나는 거룩하다’라고 크게 외치라. 이 말에 얼마나 커다란 능력이 있는지 아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엄청난 능력이 있듯이 우리의 말에도 능력이 있다. 그냥 단순히 믿고 말하라. 그러면 그 믿음대로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항상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이미 거룩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것들이 있다. 우리의 존재와 행위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누구인가’와 ‘우리가 하는 일’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우리는 거룩하다. 승리의 열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 그 거룩함은 이제 우리의 것이다. 문제는 그 거룩함을 삶에서 얼마나 적절하게 나타내느냐에 있다. 고린도전서 6장에서 바울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라고 하였다. 베드로후서 1장에서 사도 베드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의인이 되었다. 하나님은 더러운 집에 거하지 않으시므로 우리를 재창조하셨다.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 즉 의인으로 만드셨다.
우리가 의로운 존재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행동을 보기 때문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우리가 의로워지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에덴 동산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말한 최초의 거짓말이다. “이렇게 하면 당신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같이 된 사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그분 안에서 의로운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이다. 이제 우리에게 주신 신적인 능력을 받아들이고 의로운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그것이 은혜로 사는 길이다.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선행을 안 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예정하셨으므로 우리는 선행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님 안에서 재창조하셨고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신다. 이 때 선행은 우리의 본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부산물이다.
5. 자유의 삶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갈2:20) 이 말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 몸에는 아직도 죄의 영향력이 남아 있다. 때때로 우리는 육의 능력을 의지하겠다고 선택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면, 우리는 그 즉시로 죄를 짓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승리를 위해 애쓰는 가장 흔한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힘으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쓴다. 성경은 이제 우리가 그런 법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가? 율법주의자는 법을 지킴으로써 영적 성장을 이루려고 하는데,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우리가 은혜로 사는지 율법으로 사는지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를 보라. 의무감으로 하는가 소망으로 하는가?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때 주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이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된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율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말을 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만 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결혼한 여자는, 그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여 있으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풀려납니다.”(롬7:1-2) 이 말씀에서 율법과의 결혼 생활이 어떤 것 같은가? 그는 얼마나 요구가 많은 존재인지... 내가 하는 모든 일을 계속해서 비판한다. 내가 실패하는 모든 일을 지적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모두 알려 준다. 이런 완벽주의 남편과의 결혼 생활은 지치고 짜증나게 한다. 최선을 다한 다음 이 남편의 인정을 바라면서 쳐다보기라도 하면, 그는 어김없이 “아직도 충분치 않아, 좀 더 해야지, 이것은 했는데 저건 안 했잖아.”라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기 전까지 우리는 이렇게 율법과 혼인한 상태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더 불행한 소식은, 율법은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 결국 아담 안에서 율법과 결혼한 옛사람은 죽었다. 율법이 결코 죽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우리에게 청혼하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이다’(고후5:17). 은혜와의 결혼은 율법과의 결혼과 차원이 다르다. 은혜는 우리를 보며 기뻐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쏟아 붓는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며 감탄한다. 무서운 짐을 진 우리를 보면, 번쩍 들어올려 안아주실 것이다. 우리는 은혜와 결혼했다. 그러나 진리를 모르면 율법을 다시 찾게 된다. 그에게 할 일을 말해 달라고 하며 다시 그와의 관계를 그리워하게 된다. 그러다가 그를 찾아간다. 이것을 간음이라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대신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게 되면 율법은 우리의 죄를 더욱 부추긴다 (롬 7:5-7). 나는 천로역정(Pilgrims Progress)에 나오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큰 방에 들어간다. 그 방은 죄를 나타내는 먼지로 덮여있다. 그가 법을 상징하는 큰 빗자루로 먼지를 쓸어내려고 비질을 한다. 그런데 오히려 더 먼지를 일으킨다. 죄를 쓸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자극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죄에 대해 죽었다고 말했는데 그 말은, 율법은 우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딤전 1:9). 율법은 의로운 사람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롭다. 이제 우리는 죄를 지을 때 본성 때문에 짓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지을 때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어떤 국가이든 형법에 자녀를 돌보는 책임에 관한 수천 개의 법 조항이 있다. 우리가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자녀를 빼앗길 수도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잇는 법률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런 법률 조항을 알았다고 해서 자기 아이들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하는 부모들이 있겠는가? 그러한 법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고 지키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법을 지키며 산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사신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룩한 삶을 살게 된다.
6. 승리의 삶
“우리는 율법이 신령한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육정에 매인 존재로서, 죄 아래에 팔린 몸입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롬7:14-15) 바울은 자신이 행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자신이 미워하는 일을 행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 7:16-20에서 그 자신과 그 속에 거하는 죄의 힘을 구별했다. 그는 거듭하여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우리의 본성(nature) 때문이 아니라 성품(character) 때문이다. 우리가 죄에 복종하면 이 힘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과는 상관없이 행하도록 한다. 그는 죄의 힘이 그의 안에 있다고 했다. 즉 죄를 지을 때 잘못이 ‘우리에게’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고 본 것이다. 기도를 할 때 가끔씩 마음에 끔찍한 생각이 떠오른다. 그럴 때 나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곤 한다. “오 하나님 용서해주소서. 제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너무 죄송해요.” 우리가 갖고 있는 모든 생각이 다 우리 것은 아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어떤 생각을 심어 주는데, 그때 우리는 그 생각을 어떻게 할지 선택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본성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의인이다. 불의한 생각들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탄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갖는 모든 생각은 나의 것인가, 예수님의 것인가?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이다.
믿는 자의 본성은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에게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은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지 진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한다. 믿는 자는 그 안에 예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베드로후서 1장4절은 말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 없는 생활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는 종종 후회할 일을 한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대신 자아를 좇아 살 때, 우리는 어리석게도 죄를 짓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우리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한다면, 그 비결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율법을 다 지킬 수 없을 것임을 알았음에도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을까? 하나님은 율법을 행함으로, 의가 성취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원했고 결국 우리가 원하던대로 율법이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할 수가 없지만 나는 할 수 있다. 네가 나의 생명을 받아들이면, 너를 통해 내가 할 것이다.”
바울은 “너희는 법에 대하여 죽었다. 그런데 너희 교회 안에 왜 지켜야만 하는 법을 만들어 놓고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다. (골2:20-22) 그리고 23절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것들은, 꾸며낸 경건과 겸손과 몸을 학대하는 데는 지혜를 나타내 보이지만, 육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골2:23) 종교적인 규칙을 잘 따르며 살면 스스로에게 영적이라는 느낌이 들고 다른 사람에게도 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 행위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자유가 왔다. 더 이상 우리는 율법의 멍에를 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율법에 얽매이는 삶을 산다. 죄의 삯으로부터 자유해진 것은 이해하면서도 죄의 권세로부터도 해방되었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자아로부터 자유케 되는지를 알지 못했다.
그런데 로마서 5장10절의 후반부가 그 답을 준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일 때에도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에 와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하지 않은가?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되었다. 우리 안에 있는, 우리를 통해 나타나는 예수님에 의해 우리는 삶 속에서 날마다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받는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당신을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하여 주었기 때문입니다.”(롬8:2)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탱시켜 준다. 성령은 매순간마다 그분 안에 거하기만 하면 우리가 죄에 대해서 승리할 수 있도록 힘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으로부터 독립하여 살기로 작정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죄와 사망의 법이 작동할 것이다.
7. 생명의 삶
율법적인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볼 때 죄책감과 정죄감을 느낀다. 그러나 은혜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온다. 성경을 읽을 때 하나님의 계명을 발견하고 그때 예수님이 나를 통해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한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요5:39)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17:3)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하여 성경을 읽는 것이 아니고 계시를 받기 위해 읽는다.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 은혜의 관점에서 이루어져야할 또 다른 중요한 영역은 기도생활이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다. “늘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이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 내가 반응하면서 그분 안에 거하는,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천국에 있는 아버지께 말할 수 있는 기회다. 기도의 주된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있다.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고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알 때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로 그분을 경험한다.
전도는 어떤가? 나의 의문은 우리가 왜 그토록 전도를 부담스러워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전도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의무감이 아니라 예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하고 싶도록 만든다. 나는 오늘날 교회가 전도를 강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일이다. 사도행전 4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을 선포한 것 때문에 매를 맞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그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행4:19-20) 이들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면서 예수님에 대해 말하고 싶은 동기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8. 감정을 초월하여 사는 삶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 8:32)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면 거짓은 우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를 묶는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나님과 우리의 원수인 사탄은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참소와 유혹과 같은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한다. 그 중에서 교회를 향한 그의 가장 큰 무기는 속임수이다. 사탄은 우리에게 진리가 아닌 것을 믿도록 만든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가가 하나님이나 자기 자신,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사실이 아니라고 속삭인다. 우리는 잘못된 믿음을 가져 왔고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황폐해 졌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모른다. 그것은 사탄이 우리를 속여 왔기 때문이다.
우리는 감정에 정직하게 맞서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정은 얼마든지 우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갖는 것은 정상이지만 그 감정이 우리를 수렁으로 끌고 가지 않도록 하라. 우리의 감정이 믿음을 흔들도록 허락하지 말라. 우리의 감정 때문에 하나님께 맞춘 초점이 흩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음 속에 잘못된 생각을 품을 수 있다. 우리가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틀릴 수도 있다. 우리가 그런 거짓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진리가 드러날 때이다. 그 거짓이 우리에게 드러나는 유일한 때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실 때이다.
이제 진리를 말하겠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인 우리를 있는 그대로 용납하신다. (롬5:8) 믿기도 전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믿고 난 지금은 얼마나 더 우리를 용납하실 지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풍성하신 사랑의 본질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스바냐서 3장 17절에서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희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고 했다. 우리에 대한 열정 때문에 흥분하셔서 웃으시며 손뼉을 치시며 잠잠히 있지 못하시는, 약간 제정신이 아닌 그 하나님. 이것이 바로 진리이고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진리를 말하자면, 하나님은 강한 사람보다 약한 사람을 더 들어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신의 힘을 믿지 않도록 우리를 더 약하게 만드신다. (고전1:26-29)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내가 무언가 자랑할 게 있다면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겠다고 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이미 필요한 성품을 갖추고 있다.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내 안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9. 영의 삶
우리가 몸을 입고는 있지만 우리 존재의 본질, 핵심은 우리 몸에 있지 않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육체를 통해 채우려고 한다면 좌절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은 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몸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을 보면 우리 안에 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혼(soul)은 다르게 표현하면 인격(personality)라고 할 수 있는데, 혼은 자아를 의식한다. 우리는 혼을 통해서 서로 성품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우리를 동물과 구별되게 하는 부분은 실제로 세 번째 부분이다. 이것은 영이라고 부른다. 혼은 사회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부분이다. 영은 영의 일을 의식한다. 우리는 영 안에서 주님과 관계한다. 그래서 영에 우리의 본질이 있는 반면, 혼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하는 영역이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은 우리가 혼의 영역, 즉 성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영으로 사는 것이다. 인간은 사랑받고 용납받고 가치를 부여받는 세 가지의 기본적인 필요를 갖고 태어난다. 주님은 우리의 영을 통해 이러한 필요를 채우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올 때 우리의 영은 죽어 있었다. 성경은 우리의 죄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엡 2:1) 하나님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죽은 채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다루어 주셨다. 그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켰던 죄라는 문제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루심으로써 우리에게 그분의 생명을 주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영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우리 존재의 본질이 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죄가 우리의 영을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정체성은 죄인이었다. 이제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을 채우고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성품이나 신체적인 특성을 내세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거나 그들의 사랑, 용납함을 받아내려 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우리가 쓰는 기술을 성경에서는 ‘육’이라고 한다. 육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부정적인 육이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의미 있는 사람에게 거절당함으로써 형성된다. 부정적인 육을 갖고 있는 사람은 왜곡된 자아를 형성한다. ‘나는 잘하는 게 없다. 하나님은 항상 나를 판단하고 벌을 줄 것만 같다.’는 느낌이다. 이처럼, 부정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은 ‘나 자신에 대해 좀 좋은 느낌을 갖고 싶다’고 말한다. 다른 하나는 긍정적인 육이다. 먼저 그의 감정에 대해서 얘기해 보면 강하고, 성공했고, 유능한 그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기뻐한다고 믿는다. 그는 유능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자원이나 도구로 본다. 이 사람도 여전히 육체로 사는 것이다. 그의 육체는 교만, 판단, 자기 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바울이 신약성경에서 ‘이제부터는 육체대로 나를 알지 못하노라’고 했는데, 그것은 이제부터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이나 눈에 보이는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육체의 이면에 있는 영을 보겠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이다. 그분이 우리를 통해 생명을 나타내실 때, 사람들은 우리 안의 예수님을 보게 된다.
10. 진리의 삶
현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주님 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부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신약의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작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부유함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이 스스로 빈곤 속에서 살고 있다.
everlasting(영원)은 현재에서 무한한 미래로 계속되는 영원, 즉 ‘시작은 있지만 끝이 없는 영원’이라면 eternal(영원)은 과거로부터 미래에 걸치는 영원 즉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이다. 이 세상 존재 중에 유일한 영원(eternal)은 오직 주님뿐이다. 영원한 삶에 대한 유일한 답은 그리스도의 삶이다. (골1:15-17)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고 영원을 다스리신다. 유일한 영생은 바로 예수의 생명인 것이다. 그는 영원하고 그의 삶은 영원한 삶이다. 우리가 거듭날 때 영원이 시작된 것은 아니다. 영원은 시작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영원, 즉 그의 생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으면 영생도 소유한 것이다.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요일5:11)
썩은 달걀이 하나가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쨌든 노른자를 추출해 낼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노른자가 영을 상징하고 흰자는 혼이나 성품을 상징하고 계란 껍질은 몸을 상징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계란의 생명을 상징하는 썩은 노른자를 분리해서 제거할 수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리고 그 알이 성장하여 부화될 수 있도록 그 자리에 새로운 건강한 노른자를 집어넣는다. 여기서 질문 하나를 하겠다. 그 계란은 전과 똑같은 계란일까? 생명의 핵심인 노른자를 바꾸었기 때문에 같은 계란이라고 할 수 없다. 바꾼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교환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다. 그분은 오래된 죽은 본성을 끄집어내고 우리에게 신성을 주셨다. 옛사람은 죽었다. 죄된 옛 본성은 죽었다.
예수님 안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나서부터는 내 삶에 진정한 변화가 생겼다. 당신이 처음으로 예수 안에서 정체성을 깨닫고, 우리가 의인이고 그분께 사랑스럽고 용납 받은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분이 당신의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나 중심의 삶을 회개하는 기도에 동참하기를 원한다. “주님! 제가 그동안 자신을 위해 살아왔던 것을 인정합니다. 제 능력만으로 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는 자신을 주님께 드렸지만 나의 자아는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오늘 나 중심으로 살아온 것을 회개합니다. 제 옛사람을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아주시고 저를 새사람으로 만들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순간부터 주님이 저의 생명으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믿음으로 예수님이 당신을 통해 나타나는 은혜의 삶을 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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