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영적 강자의 조건/전병욱 지음

미션(cmc) 2010. 6. 19. 09:27

영적 강자의 조건

전병욱 지음

규장 / 2003년 7월 / 278쪽/ 9,800원

▣ 저자 전병욱

실천적이며 목표 지향적인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집중하는 신차원의 목회 리더. 출석 교인의 90퍼센트가 40세 이하인 삼일교회를 리드하는 담임목사.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저서로는 「파워 크리스천」의 2005년 개정판 「거룩한 야성의 회복」을 비롯해 「청년리더의 조건」, 「지금 미래를 결정하라」, 「약해도 쓰임받을 수 있다」, 「영적 강자의 조건」, 「굿뉴스」, 「강점으로 일하라」, 「히스기야의 기도」, 「어린이 굿뉴스」,「하나님사람의 선명한 기준」, 「기적이 상식이 되는 교회」, 「새벽무릎」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와 「꿈」, 「파워인생」 등의 오디오북이 있다.

▣ Short Summary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잘 무장하면 마귀와의 전투에서도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천하무적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성도들을 위한 신앙 지침을 하나님의 전신갑주 6가지로 간결하고도 명확하게 요약하고, 성도들의 머리와 가슴 속에 말씀이 뜻한 바가 뿌리내려 풍성한 삶의 줄기와 열매로 자라나도록 이끌고 있다. 우리의 야전사령관인 예수님은 무력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다. 높아짐이 아니라 낮아지심으로 승리하셨다. 지름길이 아니라 대가를 치르는 희생으로 마귀를 제압하셨다. 우리도 세상에서 들려오는 큰 음성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거기서 삶의 단서를 찾아내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겠다.

▣ 차례

1부 천하무적의 영적 무장을 하고 싸운다

1장 비무장으로 전투에 나설 수 없다

2장 한마음을 품으면 세상이 벌벌 떤다

3장 자기 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의로 항전한다

4장 하나님의 심정으로 복음의 선무전을 수행한다

5장 빗발치는 화살도 방패 뒤에 숨으면 피할 수 있다

6장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세상을 이긴다

7장 신령한 검술로 마귀를 제압한다

2부 야전사령관 예수님의 영적 전술전략으로 승리한다

8장 문제에 착념치 않고 변화됨으로 승리한다

9장 과시욕을 버리고 낮아짐으로 승리한다

10장 지름길을 거부하고 대가를 치름으로 승리한다

영적 강자의 조건

전병욱 지음

규장 / 2003년 7월 / 278쪽 / 9,800원

1부 천하무적의 영적 무장을 하고 싸운다

1장 비무장으로 전투에 나설 수 없다

한동안 교회 역시 기본보다는 이미지, 포장, 평판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교회의 기본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영성 외에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비본질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결국 기본으로 돌아갈 때 생명을 되찾을 수 있게 됩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예수살렘 교회에 위기가 처하자 사도들이 내린 결정이 무엇이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기도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행 6:4).

이스라엘은 르호보암 이후에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노역의 짐을 덜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르호보암은 젊은 신하들의 말만 듣고, 그 짐을 한층 더 무겁게 과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이에 열 지파는 여로보암을 지도자로 한 혁명을 일으킵니다. 분명히 여로보암 혁명은 르호보암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 여로보암 혁명은 본질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벧엘과 길갈에 우상을 만들었으며 영적으로 더욱 음란해졌습니다.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더욱 악해졌습니다. 악을 이기겠다고 출발했으나 자신들이 더 악해진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진리가 있습니다. 말씀이 없는 개혁은 더욱 악하게 진행된다는 점입니다. ‘개혁’이 아닌 ‘개악’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위기에 처했을 때 우리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붙들고 처음 말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고유의 프로그램 하나쯤 만들어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에 성경을 보다가 에베소서 6장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이 여섯 가지를 점검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별다르게 대단한 프로그램을 실시하지 않아도 영적으로 건강한 교회, 부흥 성장하는 교회가 되어 갔습니다. 마귀의 주요 공격 루트는 여섯 군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꿰뚫어 보시는 우리의 대장 되신 주님께서는 유비무환의 무장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전신갑주 여섯 가지입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입니다.

마귀는 치밀한 작전회의를 거쳐 그리스도인을 공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귀의 궤계를 물리칠 수 없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잔재주나 잔꾀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사람은 신앙의 속 실력, 곧 보이지 않는 뿌리를 강화시키는 부분에서 1등 되기를 두려워하지 말며, 겉으로 드러나는 자세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능력과 은혜 주실 때, 그분은 그때마다 엎드릴 줄 아는 자를 중용하십니다.

2장 한마음을 품으면 세상이 벌벌 떤다

진리의 허리띠를 띤다는 것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 즉 흐트러지지 않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실성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베드로전서 1장 13절에 이와 비슷하게 유추해 볼 수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여기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와 ‘근신하여’는 동의어입니다. 삼가 마음을 모아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준비하는 모습을 ‘허리를 동인다’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진리의 허리띠를 띤다’는 것은 한 가지에 집중하는 것, 즉 성실성을 의미합니다. 너풀거리는 옷자락을 단단히 여미기 위해 허리띠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나라 안에서 활동적으로 집중력 있게 일하려면 ‘진리의 허리띠’로 허리를 단단히 조여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신령한 군사가 스타트라인에 선 자세입니다.

그러려면 싱글 포커스의 인생을 사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에 비해 훨씬 강한 것은 항상 초점이 하나인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만 바라볼지라”라고 찬양하며 “오직 주밖에 없네”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일 초점의 인생을 삽니다. 향방 없이 총을 쏘면 산탄만 허비할 뿐입니다. 인생에서 조준의 시간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리 분주합니까? 속도보다 중요한 것이 방향이 아닙니까? 기도 못할 정도로 바쁘게 살아간다면 초점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마지막으로 통합 능력을 키우십시오. 세간에 저희 교회에 엘리트들이 많이 모였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엔 참 살기 힘든 젊은이들만 모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다. 말없이 기도하고 준비하고 계속해서 의견을 좁혀나갑니다. 의견이 하나로 모아질 때까지 계속 그렇게 합니다. 그 과정을 참 잘해나갑니다. 몸에 배어 있습니다. 무슨 일을 시키든지 간에 계속 하나로 모으는 힘을 발휘하여 주어진 일들을 해냅니다.

요즘 인터넷의 위력이 얼마나 막강합니까? 그런데 불꽃 튀는 공방이 벌어지는 사이트의 게시판에 들어가 보십시오. 속성상 그 논쟁이 분열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논쟁을 할수록 분열에 분열만 거듭될 뿐 통합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인터넷상으로 의견을 개진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의견을 통합시킬 수 있습니까? 잘 통합되지 않습니다. 통합 지향적인 시스템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조직이나 하나 되게 만드는 통합 능력이 있어야 그 조직이 제대로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 통합 능력이 무엇인지 속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기도와 말씀입니다. 가정에도 통합 능력이 필요합니다.

제임스 돕슨은 그의 책 <내 아들을 남자로 키우는 법>에서 오늘날 수많은 가정이 깨어지는 것은 아버지의 부재 때문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아버지의 부재로 가정의 통합 기능이 마비되자 가정이 해체되어 가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이혼이 다반사가 되고 어린 자녀들은 정신적 지주를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국가나 교회, 가정 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입니다.

성경에는 도처에 그런 통합 능력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내 심령을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 인간과 인간을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 사회를 통합시킬 수 있는 능력, 그 능력들을 키우면 우리는 승리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분열시키고 헷갈리게 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은 말씀과 기도로 통합을 도모해 나가야 마귀의 분열 기도를 제압할 수 있습니다.

3장 자기 의가 아니라 십자가의 의로 항전한다

의의 흉배로 무장한다는 것은 내 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 십자가의 의를 붙드는 것입니다. 마귀가 맹공격해 올 때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면 박살납니다. 예수의 십자가 의로 말미암아 내가 의롭게 되었음을 선포하고 담대히 맞서면 마귀를 꺾을 수 있습니다.

마귀의 사명은 밤낮 정죄하고 참소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송사와 마귀의 참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죄를 깨닫게 하고 반드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여 마침내 우리를 회복시킵니다. 성령이 송사하는 근거는 사랑입니다. 반면 마귀의 참소는 우리를 절망하고 낙망케 하여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분노와 감정에 호소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을 앓고, 자살을 생각하고, 좌절하고, 마약에 손대고, 허랑방탕에 빠지는 것은 다 마귀의 참소 때문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며 달려들 때, 우리는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그보다 더한 죄인이라고 하십시오. 그러나 그런 다음 “예수님이 나를 구속해 주셨는데 네가 어쩌겠느냐?”며 배짱 있게 나가야 합니다. “내 죄는 전부 사해졌고, 하나님께서는 더러워도 아쉬운 대로 나를 사용하고 계신다!” 하는 믿음으로 나가야 합니다. 집에 있는 조금 더러운 그릇도 주인이 필요하면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 6:14). 당연합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어야 합니다. 의의 흉배를 붙인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전가된 의를 붙들고 마귀와 맞서야 합니다. 전가된 의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19-20).

내가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나에게 전가되어 내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칭의’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는 내 삶이 과연 그렇게 의롭기만 합니까? 신분상으로는 의인이지만 실제 내 삶은 결코 의롭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나의 실상을 어떻다고 파악해야 합니까? 분명 현실에서 내 삶은 의롭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의롭게 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주께서 의롭다고 믿어주시니 점차 의롭게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되는 과정을 가리켜 ‘성화’라고 합니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뛰어난 기독교 변증서에서 주기도문의 첫 문장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를 분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시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죄꾸러미인 우리가 이렇게 성부와 한마음을 품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명령을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미리 행세하라는 뜻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아들로서 미리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끊임없이 비판하는 것은 아무리 사실에 근거해서 하는 비판이라 해도 복음의 본질을 간과한 율법주의입니다. 복음은 현재의 모습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리 지금 엉망으로 살고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아도 예수만 믿으면 의인이 될 수 있음을 믿어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너는 베드로다. 반석이다. 너는 장차 회복될 것이고 헌신할 것이다”라며 끝까지 믿어주자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대하는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믿고 기대하면 정말 그렇게 됩니다.

의의 흉배는 악한 마귀의 궤계에서 우리를 지켜줍니다. 뿐만 아니라 이 원리를 사용하면 우리 가정이 살고 주변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복음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역사하는 교회 교인들은 얼굴이 밝습니다. 다 죄인들이기는 한데 ‘밝은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건져주셨기에, 붙들어 주셨기에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뜨거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자기 공로, 자기 의를 의지합니다. 교회에 십자가의 능력, 복음의 능력이 사라지자 자꾸만 세상 앞에 다른 것을 가지고 나가 승부를 보려고 합니다. 얼마나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지 보이려 하고 얼마나 긍휼을 베풀고 구제에 힘쓰는지 드러내려 합니다. 또 얼마나 정직한지 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복음의 열매일 뿐,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아닙니다. 교회는 다시금 십자가의 능력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의 공로로는 교회가 일어설 수 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만 붙들고 십자가의 의로 악한 마귀의 모든 궤계를 물리쳐야 합니다. 십자가 기치 아래 나머지 것들을 세워야 합니다. 개개인의 신앙과 한국 민족 전체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붙들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전할 복음이 없습니다. 십자가 외의 대체물로 세상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 하지 마십시오. 사이비 복음을 전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묻은 십자가만이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4장 하나님의 심정으로 복음의 선무전을 수행한다

악한 마귀는 성도의 발을 묶으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무장을 잘해도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다면 제대로 활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어야 합니다. 복음은 이동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이동해야 합니다.

복음을 열심히 증거하면 그것이 곧 무장이 됩니다. 저는 삼일교회가 시험을 뚫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비결이 전도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1년에 3, 4주는 선교하느라 몰려다닙니다. 그러다보니 교회는 항상 전투 체제를 갖추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희 교회는 10개의 진(캠프)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언제든지 쉽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1천 명이 움직인다고 해도 아무 소리 없이 일사불란합니다. 이렇게 조직적으로 복음을 증거하자 교회는 어느새 건강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신을 신고 복음을 증거해야 하는데, 그 출발점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체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심정으로 불타오르면 전도 안할 수가 없습니다. 전도는 테크닉이나 훈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만난 감격이 있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흘러넘치자 이를 증거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으면 탕자의 아버지처럼 기다릴 수 있는 마음도 생깁니다. 남을 지배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종의 마음, 섬기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왕이 아닌 종으로 다가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53장은 예수님의 모습을 고난당하는 어린 양으로, 연약한 종의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숭배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종의 마음을 깨달으면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패러독스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하여 영혼을 건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출발한 복음의 예비한 신이 움직이기 시작해야 그 사랑으로 우리의 발걸음이 가벼워집니다.

5장 빗발치는 화살도 방패 뒤에 숨으면 피할 수 있다

에베소서 6장 16절을 보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라고 했습니다. 화전은 불화살을 말합니다. 마귀는 지금도 우리에게 불화살을 계속 쏴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불화살이 사정없이 날아올 때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방패 뒤에 숨는 것입니다. 믿음의 방패로 마귀의 불화살 공격을 막아내야 합니다.

화살들이 우리의 인생 여기저기에 날아와 꽂히면서 우리는 두 종류의 인생으로 나누어집니다. 첫째, 화살이 방패에 꽂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둘째, 밤낮 화살이 몸에 꽂혀서 끙끙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꽂힌 화살을 겨우 빼내면 또 다른 화살이 날아와서 그 화살을 맞고 또 쓰러집니다. 이럴 때는 “믿음의 방패!”라고 크게 외치십시오. 그러면 몸이 아니라 믿음의 방패에 화살이 꽂힙니다. 그 화살을 모아서 마귀를 향해 다시 쏘십시오. 그러면 마귀는 마치 고슴도치같이 온몸에 화살을 맞고 쓰러질 것입니다.

그러나 빗발치듯 쏟아지는 불화살은 한 사람의 방패로 막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네트워킹되어 형성한 견고한 진은 철옹성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모여야 합니다. 모이면 힘이 커집니다. 서로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간의 네트워킹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또한 책상물림이 되지 말고 현장에 직접 들어가 보십시오. 현장에 들어가면 자기 능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과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한계를 깨닫고 팀을 짜서 팀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현장에 있는 사람이 강한 법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팀으로 일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합니다. 강력한 교회란 팀으로 일하는 법을 아는 교회입니다. 특별히 저희 교회에서 일하는 과정을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어떤 과제가 부여되면 준비위원장은 바로 팀 짜는 작업부터 시작합니다. 그 일을 성취해낼 수 있는 최적의 인물들로 팀을 짜나갑니다. 어쩌면 팀을 구성하는 것으로 모든 일이 다 끝났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팀을 짜놓으면 일을 해내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팀을 짜는 것이 관건이자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팀을 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팀 운영 능력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팀을 이루어 일하면 큰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를 보면 팀으로 일하는 것이 뭔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도자가 팀을 짜주고, 지도자가 팀을 임명합니다. 그러나 팀이란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팀 구성은 현장에 있는 사람이 제일 잘 아는 법입니다. 지금이 바로 교회 안에서, 성령 안에서, 말씀 안에서 팀으로 일할 때입니다. 교회가 팀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면 젊은이들은 미치기 시작합니다. 밤낮 팀을 짜는 데 골몰하고 시간을 쪼개어 일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로마시대 방패에는 특징이 있습니다. 긴 직사각형(무릎에서 턱까지 이르는)으로 되어 있으며 방패마다 빗각이 있어서 마치 집짓기 블록을 꽂듯이 서로 맞물리도록 끼울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로마에는 맨 앞줄에 선 군사들이 방패를 연결하여 행군하는 전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적군이 아무리 활을 쏘고 창을 던져도 전부 막아내면서 행군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방패로 연대해야 합니다. 방패를 빗각으로 연결시켜 적을 섬멸하는 전법, 여기에 팀워크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믿음의 방패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성도들의 믿음을 의미합니다. 믿음의 진정한 가치는 믿음을 소유한 자에게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27절은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을 알고, 성경 속에 계시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당신의 믿음의 원천을 성경에 두십시오. 또한 당신과 함께 하시며 당신을 보호하고 당신을 위해 싸우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6장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세상을 이긴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8). 여기서 구원의 투구는 구원에 대한 확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이시며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주신다는 의미의, 그분 자체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 확신이 우리를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삶은 다릅니다. 확신은 기도의 열매입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계속 기도하다보면 가슴에 확 불이 붙습니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생깁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일을 맡길 때 저는 한 가지 원칙을 지킵니다. 그 사람에게 일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먼저 보는 것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지성은 의지의 시녀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바꾸어서 “지성을 확신의 시녀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성만 품고 있으면 시간이 갈수록 그 확신은 죽습니다. 대단한 지성인이라 해도 확신의 불이 꺼졌다면 그런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이 확신이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 확신을 가지면 세상을 뒤집어엎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기자는 삶에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위기 가운데서 “온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여!”라고 하며 특별히 창조의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창조의 하나님이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자꾸만 현실 문제에 매달려서 사람들과 대화하지 마십시오.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아브라함은 종의 몸에서 이스마엘을 낳아 결국 세상을 어지럽히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머리로 수를 쓸수록 이렇게 수습할 수 없는 문제만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내가 변화되는 데 있지 나를 고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변화되면 시험은 사라집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문제 속에 매몰되면 밤낮 걱정만 하게 됩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들의 백합화를 바라보고 공중의 새를 바라보면서 문제 밖으로 나오면 문제의 실상과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자신의 문제를 응시하게 됩니다. 말씀 하나로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 역시나 “이 문제는 말씀 한 번이면 끝난다”라고 하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투구를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야말로 ‘대충 살게’ 됩니다. 저는 진짜 대충 삽니다. 내가 계획하거나 무엇인가를 억지로 이루려고 애쓰면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면 주시는 대로 받아서 비우는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기회를 주시면 “아!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라고 최선을 다합니다. 내가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어주시는 결대로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저는 삼일교회에 대한 계획이 없습니다. 비전이 무엇인지 물으면 사실 대답해줄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이 없어서 없는 게 아닙니다. 이제까지 계획을 세운 대로 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입니다. 삼일교회는 하나님께서 이끌어오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을 바꿨습니다. 가장 큰 목표를 복음 증거, 선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로 정해놓고 세부적인 것은 주께서 이끌어주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예배가 무엇입니까? 높아진 마음, 내가 무엇을 만들어 내겠다는 마음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온전히 자신을 비우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알았고 빌립보서 4장 11-13절에서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미 자신이 비워졌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이든지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일의 열매와 가치 창조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인 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하나님께서는 절대 우리 계획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지 않습니다. 걸음대로 인도하십니다. 걸음대로 인도함을 받는 삶이란 하나님께 자꾸 달라고 손 내밀지 않고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들을 비우는 인생, 쓰임 받은 인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일만 하는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시고 인격체로 만드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만드시고 자기 자신의 인생을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강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께서 왜 나를 만드셨는지, 왜 이 땅에 보내셨는지 그 목적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을 알기 원하십니다.

어떤 남자가 좋은 남자입니까? 자기에게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남자는 좋은 남자가 아닙니다. 좋은 남자는 내가 여자임을 깨닫게 해주는 남자입니다. 좋은 남자를 만나면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여자들 가운데 자기가 여자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별로 보면 여자인데 여자만의 독특성, 하나님께서 여자에게만 허락해주신 기쁨, 여성 고유의 감칠맛, 여자의 그 섬세함, 이런 것을 전혀 모르고 그저 덤덤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좋은 남자를 만나면 자기가 여자임을 만끽하게 됩니다. 모성애를 발견하고 애정을 느끼며 남자를 품어줍니다. ‘이것이 여성이 할 일이구나’라고 자각하면서 그 남자를 통해 여성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어떤 여자가 좋은 여자입니까? 자기에게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늪과 같은 여자는 꽃뱀입니다. 그 여자를 만나면 내가 남자임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여자가 좋은 여자입니다. 남자는 희생할 줄 알아야 하고, 남자는 책임질 줄 알아야 하고, 남자는 신사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게 해주는 여자입니다. 영적으로 이 여자를 품어줘야 하고 이끌어줘야 하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해 죽은 것같이 이 여자를 위해서 죽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하는 여자입니다. 그 여자 때문에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여자를 제대로 만나면 진정한 사나이가 됩니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그 스승에게 빠지지 않습니다. 좋은 스승이란 제자가 자기 자신의 잠재력과 재능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스승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도 성경에 빠지는 게 아니라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 앞에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깨달아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나를 즐기십시오. 열심히 즐겨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고난도 즐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마귀의 시험과 도전이 있을 때에도 즐겁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귀를 이기는 길입니다. 마귀는 즐겁게 일하는 사람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7장 신령한 검술로 마귀를 제압한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이 다섯 가지 모두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면 성령의 검은 유일하게 공격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성령의 검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임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에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찬양에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사가 왜 허구헌날 앉아서 기도하는지 아십니까? 설교는 테크닉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강대상에 섰을 때 성령의 기름부음을 강렬히 느낄 때가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느껴질 때는 대단한 설교도 아닌데 그 말씀 때문에 인생이 뒤집히는 일들이 보입니다. 반드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있어야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신 말씀으로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숫자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무장한 소수가 오히려 큰 능력을 발휘합니다. 참 진리가 선포되면 기도온의 300명 용사처럼 수가 줄어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점검받고 그 다음 단계로 전진해야 합니다. 성도는 군중이 아니라 하나님의 군사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불이 있는 설교를 하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래서 불이 전달되고 불꽃이 튀는 것입니다. 현재 20대 초반 젊은이들은 교실 붕괴, 교실 해체를 경험한 세대로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 모르는 해체주의적인 성향이 짙습니다. 이런 세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이들의 내면의 부르짖음을 아는 것입니다.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싶다. 흔들 수 있는 깃발을 가지고 싶다. 가치 있는 일 앞에서 전율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죽고 싶어 합니다. 죽을 가치를 달라고 외칩니다. 이런 이들에게 생명의 말씀이 주어지면 이들은 기꺼이 그들의 삶과 젊음을 바칩니다. 변화됩니다. 말씀과 더불어 방자함이 남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 해 전 연세대에서는 ‘성정치학 축제’라고 해서, 공개적으로 음란비디오를 보고 동성연애를 다룬 영화 ‘부에노스아이레스’(해피투게더)를 상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이화여대에 고스란히 옮겨놓고 이대 교정에 3천 명을 모이게 만든 주역이 있습니다. 그 형제의 고향은 부산입니다. 그가 부산에 내려가다가 <파워 로마서>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 책이 그의 가슴에 믿음을 심어주었고, 회개의 영을 부어주었으며, 마귀의 유혹을 이길 힘을 주었습니다. 이제 그는 견실한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마귀의 유혹과 함정, 이 시대의 난제를 해결할 길은 오직 말씀밖에 없습니다. 말씀의 검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전사만이 이 시대를 이깁니다. 마귀를 이깁니다. 지금 신앙의 슬럼프에 빠져 있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붙들고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여섯 가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잘 무장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2부 아전사령관 예수님의 영적 전술전략으로 승리한다

8장 문제에 착념치 않고 변화됨으로 승리한다

예수님도 시험 당하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내가 범죄해서, 내게 문제가 있어서,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해서 시험 당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시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또한 시험은 인생의 바닥에 처할 때나 어려움의 심연에 처할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최정상의 자리에 도달했을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도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한 후 광야시험을 당하셨으며, 엘리야도 갈멜산의 승리 후에 영적 침체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대해 전천후로 경계하는 신앙을 가지십시오.

예수님께 임했던 시험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물질적인 시험, 둘째, 정신적인 시험, 셋째, 영적인 시험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패턴을 알고 나면 시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이길 수 있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고통이 심해지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됩니다. 의심이 생기면 진리의 허리띠를 띠는 것, 곧 하나님만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의심이란 무엇입니까? 의심이란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 오락가락하는 것, ‘더블 포커스(double focus)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6-8).

물질적인 시험이 올 때 의심을 이겨내지 못하면 마귀에게 속고 넘어집니다. 더 독해져서 길길이 날뛰고 더 악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 묘하게도 어떤 사람은 동일한 물질적 시험 앞에서, 그 시험으로 더 멋진 인생을 살게 되고 더 빛나는 인생,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인생이 됩니다. 같은 햇빛이라도 한편으로는 그 빛으로 진흙이 굳고 한편으로는 얼음이 녹는 것처럼 똑같은 현실에 대해서도 그 반응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은 얼음처럼 녹아지면서 회개하는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시험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장하고 다시 일어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물질적 시험의 목적은 첫째, 우리의 시야를 좀더 넓게 열어주는 데 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장밋빛 세상밖에 모르다가 물질적 어려움을 겪고 나면 비로소 세상 보는 눈이 넓어지게 됩니다. 고난이 주는 최고의 유익은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통해 큰 사람이 됩니다.

둘째, 집중하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넓혀야 할 부분이 있는가 하면 좁혀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 우리는 집중하게 됩니다. 의심과 같이 나누어졌던 마음을 하나 되게 하고, 진리의 허리띠를 띠게 하고, 쓸데없는 것들에 분산되었던 마음을 정말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집중하게 하는 것, 싱글 포커스(단일 초점)를 갖게 만드는 것이 고난의 목적입니다.

우리에게는 오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풍요로움 속에서는, 평탄함 속에서는 그 감각을 다 잃어갑니다. 좋아도 좋은 줄 모르고, 슬퍼도 슬픈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하기 시작하면 그 감각이 살아납니다. 후각이 살아나고, 촉각이 살아나고, 시각이 살아나고,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으로 되살아납니다.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을 보십시오. 인간미가 물씬 풍깁니다.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막 눈물이 납니다. 감각이 살아납니다. 똑같은 찬양을 해도 덤덤하고 졸리게 부르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가슴 저리게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고난을 통과하면 그런 능력이 임합니다. 그것을 ‘영적인 능력’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능력이 우리 삶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고난을 통과한 성도들은 충만의 특징입니다. 고난을 통과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는 능력이 뭔지 아는 성도의 특징입니다. 감각이 살아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들은 냉소적이지 않습니다. 따뜻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품어줍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돌로 떡을 만들어서 먹으라고 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습니까? 우리가 돌로 떡 만들어 먹는 게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는 것이 시험의 목적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문제를 만들어서 자꾸 싸우지 말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9장 과시욕을 버리고 낮아짐으로 승리한다

첫 번째가 육체적인 시험이라면 두 번째는 정신적인 시험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가서 뛰어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물론 안 죽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한번 인기를 얻어보라는 이야기입니다.

인간만큼 과시욕이 많은 존재도 없습니다. 육체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만족하게 되면 곧 정신적인 허영으로 치닫습니다. 이럴 때는 첫째, 무조건 낮은 곳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낮은 포복을 해야 합니다. 이 진리를 붙들면 시험에서 이깁니다. 높은 곳은 시험의 자리이기 때문에 위험한 반면 낮은 곳은 안전합니다. 정상의 자리는 잠시 머무르다가 사명을 다하면 곧장 내려와야 할 자리입니다.

성도들이 늘면 교회 지도자는 그들을 모두 품는 데 한계를 느낍니다. 이것은 지도자가 자기 위치를 너무 높게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예 낮아지면 극과 극을 완전히 포용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가난한 사람부터 대단한 부자까지 다 품게 됩니다. 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낮은 곳에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는 ‘잘 나가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쉽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꽤 오랫동안 버텨온 것은 낮아짐의 원리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낮아진다는 것은 해석이 분분하지만, 남을 존귀하게 여긴다는 뜻입니다. 강할수록 낮아지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사니까 대단히 안정적입니다. 무게 중심이 낮은 데 위치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아무나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기도 드리는 성도, 날마다 기도하는 성도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둘째, 자꾸만 과시하고 높아지려고 하는 성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철저한 성경연구에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동시에 교만해지기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연구하다보면 높아졌던 무게 중심이 어느새 자꾸만 낮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겸손을 낮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렵지만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서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발견하면 겸손하게, 아니 아예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마귀는 성경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균형 잡힌 성경 연구를 해야 합니다. 말씀이 들어가면 낮으면서도 강한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 포퓰리즘, 즉 인기영합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믿음과 도박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마귀의 방법은 대안이나 정책이 아닙니다. 마귀는 항상 모략, 선동, 흥분을 사용합니다. 무엇이든 뿌리가 중요합니다. 말씀에 뿌리를 두지 않고 사람의 인기나 호기심에 뿌리를 두면 다 죽습니다. 기도라는 잔뿌리 하나, 말씀 훈련이라는 잔뿌리 하나가 모두 강해져야 합니다. 롱런하려면 사람 눈에 띄려고 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동행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시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극복하는 법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스스로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초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까? 초월이 무엇입니까? 버리지 않아도 되는데 기꺼이 버리는 것이 초월입니다. 초월의 영광을 체험하는 인생, 그런 사람들이 몇 명 나오면 기운이 싹 바뀝니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10장 지름길을 거부하고 대가를 치름으로 승리한다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영적인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마귀는 예수님께 자기를 경배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그렇게 우리가 추구하고 얻기 원하는 것을 모두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에 이 말보다 더 유혹적인 것은 없습니다. 마귀는 지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서” 환경을 바꿔가며 계속해서 시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해병대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환경에 관계없는 ‘전천후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귀가 우리를 영적으로 시험하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마귀는 합리성으로 유혹합니다. 마귀는 논리로 접근해옵니다. 일종의 괴변이지만, 사고하는 훈련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쉽게 넘어갑니다. 한 번 양보하고 두 번 양보하다가 결국 마귀에게 넘어가 완전히 빠져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가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제하라’, ‘섬기라’는 식의, 기독교가 아니고도 얘기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들을 말할 때는 납득하지만 기독교에서 말하는 근본적인 진리를 얘기하면 황당해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처녀가 애를 낳았다’라고 합니다. ‘죽음에서 부활한다’라고 합니다. ‘행위가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고 합니다. ‘내 공로는 하나도 없고 하나님의 공로로 구원받는다’라고 합니다. 잘 보십시오. 마귀는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반면, 성경의 주장은 대단히 시대착오적이고, 고루해 보이고, 비합리적으로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인간이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이 만든 불교철학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는 신론에서부터 걸리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으로 계시는데 셋이 아니라 하나랍니다. 하나냐 하면 그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성부는 성자와 다르고 성자는 성령과 다르고 성령은 성부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고 하면 그대로 믿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논쟁이 벌어질 것이 뻔한 일을 인간이 만들었을까요? 기독교의 근본 진리는 인간의 합리성과 전부 충돌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우리가 믿는다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믿음을 주십니다. 그리고 변화시켜 주십니다. 교회는 합리적이어야 하지만 성경을 떠나 합리성만 붙들고 나가는 것은 유혹입니다.

둘째, 마귀는 대가 없는 지름길로 가라고 속삭입니다. 마귀의 유혹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공짜란 없습니다. 뭐든지 헌신하지 않으면 절대로 얻을 수 없습니다. 쉬워 보이는 것도 막상 자신이 직접 해보면 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해본 사람들은 해보지도 않고 말하는 사람의 말에는 별반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항상 말한 대로 걸음을 옮기느냐, 그런 다음 그 행보를 계속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섬기는 일은 이처럼 결단과 그 다음의 행보가 따르는 어려운 일입니다. 기도의 대가를 치르십시오. 서재에서 말씀의 대가를 치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뜻을 이루어낼 수 있는 말씀의 약속과 그것을 이룰 수 있는 실력을 기르는 종들이 되면 우리는 마귀의 영적인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지름길은 없습니다.

셋째, 마귀는 세속적인 방법을 쓰라고 합니다. 정직보다는 술수를 권합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대를 훔치는 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얘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방법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증거하는 방법은 죽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사랑과 힘은 반비례합니다. 교회가 써야하는 방법이 뭔지 아십니까? 기다리고 죽는 방법입니다. 열매를 거두려면 죽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아는 것보다 훈련이 더 필요합니다. 원리를 아는 것은 순간일 뿐입니다. 원리를 메모하면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그 메모 한 줄을 체득하려면 정말로 엄청난 훈련이 필요합니다. 훈련이 되었다면 중간 중간에 이정표만 꽂아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길을 이끌어가실 때 정답까지 쭉 한 길로만 가게 만드시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이정표를 몇 개 주셨습니다.

저는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매순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매뉴얼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중간중간 점검할 수 있는 이정표만 주면 됩니다. 어디까지 왔는지 알려주면 나머지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악한 마귀는 계속해서 ‘원리만 있으면 된다. 원리를 이루기 위해서는 훈련도 필요 없고 세속적인 방법을 모두 동원해도 된다’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결국 영적으로 타락하기 쉽습니다. 세상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너무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물리쳐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방법을 붙들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된 백성이 이 땅에서 마귀의 육체적인 시험, 정신적인 시험, 영적인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원리를 배웠습니다. 훈련을 통해 이 원리가 삶 속에서 그대로 체득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피곤한 인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도저히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 심령은 비가 내리지 않아 먼지만 날리는 사막같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수가 교회와 가정과 각 심령 가운데 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큰 음성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고 거기서 삶의 단서를 찾아내어 우리 사역에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