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앙서적의 요약

철저히 승리케하시는 하나님 -오스왈드 샌드스

미션(cmc) 2010. 6. 19. 11:18

철저히 승리케하시는 하나님 -오스왈드 샌드스

 

▣ 추천사1

▣ 서문2

제1장 / 지도자의 준비 과정3

▣ 서론4

제2장/ 당황스러운 도덕적인 문제9

제3장 가나안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13

제4장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위기17

-적절한 광야 경험18

-부적절한 광야 경험20

제5장 성공의 원리24

● 사유(私有)의 원리25

● 소유를 위한 준비26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보증을 얻었다.26

●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28

제6장 요단강 도하(渡河)29

● ”요단 이 편 해 돋는 편”-대가를 계산하는 것(수 1:15)30

● ”요단 물가”-믿음의 발걸음(수 3:8)31

● ”요단 가운데”-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33

●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34

 

제7장 보이지 않는 지휘관37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표시인 할례가 다시 행해져야38

둘째, 유월절이 지켜져야 했다(수 5:10).39

세째, 여호수아 그 자신에 대한 정복이 선행되어야 했다.40

 

제8장 여리고 정복42

● 그들은 믿음으로 무조건 복종했다43

● 그들은 믿음으로 훈련을 받았다44

● 그들은 믿음으로 인내했다44

●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의 외침을 외쳤다46

●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47

 

제9장 약속의 땅의 위험들49

● 주제넘음의 위험-아이(수 7:1-26)50

-타협의 위험 -기브온(수 9:1-27).53

● 나태의 위험55

 

제10장 소유의 원리들57

● 정찰의 원리(수 2:1-24).57

● 몰아냄의 원리58

● 사유(私有)의 원리(수 1:3/ 엡 1:3/ 벧후 1:3)59

● 점진(漸進)의 원리(출 23:29-30/ 신 7:22)60

● 단념의 원리(신 7:2)60

 

제11장 노년에 관한 낙관적 견해63

여호수아 14장 6-13절, 15장 14-19절63

● 열성적이었던 청년기64

첫째로, 그는 커다란 용기를 보였다.64

둘째로, 그는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였다.64

● 일관성이 있었던 중년기65

● 모험적이었던 노년기66

갈렙은 신체적으로 강건했다.67

갈렙은 영적으로 대담했다.67

 

▣ 추천사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llders)의 책들은 주님의 사역을 하는 나에게 여러 해 동안 영적인 보고(寶庫)가 되어 왔고 큰 격려가 되어 왔다.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A Spiritual Clinic)과 「영적 지도력」(A Spiritual Leadership)은 한 위기의 때에 내 손에 들어왔고, 그 책의 내용은 내가 꼭 필요로 하던 것이었다. 샌더스를 개인적으로 만난 후, 나는 그의 책들을 더욱 훌륭한 것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귐과, 사람들의 필요에 대한 밝은 이해를 드러내는 영적인 진실과 같은 것을 그에게서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믿기로는 본 책(원제 Promised-Land Living)도 샌더스의 가장 뛰어난 저서 중 하나이다. 나는 어느 날 매우 이른 아침 경건의 시간을 갖고 나서 이 책의 원고를 읽었는데, 각 장에 담긴 진리는 새로운 힘으로 내 마음을 파고 들었다. 나는 저자가 극도의 영적인 의미를 구하려고 하지 않은 것을 칭찬한다. 그러한 시도는 실상 많은 여호수아서 주석들의 질을 떨어뜨렸다. 나는 또한 그가 이 진리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 진리들을 오늘날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 준 것을 크게 평가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이 책의 멧세지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인기와 통계 수치를 자랑하며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상 자신의 영적인 기업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며, 영적인 대적이 무엇인지 파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무지하다.

 

만일 모든 목회자와 주일학교 사역자, 그리고 교회 직분자들이 이 책을 읽고 믿음으로 여기 담긴 진리들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되 붙잡기는 어려운 한 가지 축복을, 곧 교회의 부흥을 경험하기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그 부흥이 나로부터 혹은 당신으로부터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워런 위어스비-

 

 

 

▣ 서문

 

 

이 책의 내용은 저자가 일련의 설교로 사용해 오던 것이며, 일부 내용은 지금과 같은 책의 형태로는 아니지만 유인물의 형태로 선을 보인 바 있다.

본 책은 여호수아서의 주요한 특색들을 전부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 책의 주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생활과 관련된 영적 교훈들을 가르치는 데 여호수아서보다 더 도움이 되는 책은 구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어떤 저술가는 몇몇 설교가들과 주석가들이 여호수아서에 대해 영적 해석과 예표적인 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그 책의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 책을 더욱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올바로 논평했다.

 

나는 신약성경에서 근거와 전례(前例)를 제시한 후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로부터 영적인 교훈을 끌어냄으로써 그 점에 있어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가나안 족속들을 온전히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야기되는 심각한 도덕적인 문제는 이 책에서 현실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에베소서와 히브리서에 비추어서 해설될 경우에 여호수아서는 영적인 삶에서 하나님의 가장 좋은 것을 얻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에게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또한 여호수아서는 그리스도인이 접하기 쉬운 함정들을 아주 절실하고도 뚜렷하게 보여 준다.

 

만일 어떤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하여 격려를 받고 좌절의 연속인 광야생활을 뒤로 하고 안식과 승리가 기다리는 가나안 생활로 나아가고자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면 이 책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라 하겠다.

 

-오스왈드 샌더스

 

 

 

제1장 / 지도자의 준비 과정

 

 

모세 밑에서 여호수아는 섬기는 법을 배웠다. 이것은 그를 훈련시키는 데 꼭 필요한 한 과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 그 자신이나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여호수아를 더 잘 아셨기 때문에 그를 모세의 수하에 두셨고, 혈기왕성하고 참을성이 없는 그 종으로 하여금 명령에 순종하며 지시를 이행하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 그는 일생의 황금기인 것같은 때를 타인의 명령을 받으면서 보낸 후에야 비로소 명령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명령을 내리도록 허락되었다. 천부적인 지도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말은 본래 독단적이며 거만하다는 것 이외의 아무 뜻도 아니며, ”하나님의 선민을 다스리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경우가 흔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강점과 약점을 아시고 그들을 순종의 학교에 입학시킴으로써 쓸모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신다. 여호수아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자격을 갖추기 전에 친히 양을 인도한 반면,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지휘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되기 전에 모세에게 복종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A. W. 토저

 

 

세상사람들이 바보로 취급하는 사람들이지만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고

당신의 은밀한 훈련소에서 양육된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영원하신 계획은 이루어져 갑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시야에서 가리웠지만

미디안 광야에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이시여, 당신께서는 거느리십니다.

당신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당신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우리의 밤을 비추며

오순절 불꽃이 활활 타오를 때

당신의 이름을 높이려는 갈망으로

내 마음에 불이 붙어 터 오를 수 있다면 좋으련만,

 

선지자들이 말씀을 선포하자

수천 명이 듣고 받아들였지만

그리스도를 보좌에 앉히는 일에

자그마한 일이라도 담당할 수 있다면 나는 만족할텐데.

-프랭크 휴톤-

 

 

 

▣ 서론

 

 

신약성경의 어떤 말씀들은 애굽에서 시내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간 이스라엘 민족의 여행과 그 후에 그 땅을 정복한 것이 단순한 역사적인 의미 이상을 내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는 듯하다. 그 사건들에 관한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의 언급은 이 사건들이 영감을 주시는 성령의 작정이었음을 확증하는 것 같다. 그 기자들은 구약성경 내에서의 선별된 역사적인 사건으로부터 영적인 교훈들을 이끌어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인 관계가 있다고 두차례나 주장한다.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고전 10:6).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 10:11).

'거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투포이」(tupoi)인데, 이 말은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서처럼 '본'을 뜻하거나, 혹은 '어떤 사실의 예표나 영적인 진리 '를 뜻한다. 마빈 빈씬트(Marvin Vincent)는, 가장 훌륭한 헬라어사본이 고린도전서 10장 11절에서 「투포이」 대신에 채택한 단어는 '비유의 목적으로'라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역시 이스라엘의 체험으로부터 오늘날에 적용되는 영적인 교훈들을 끌어낸다.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 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3:16-18/ 4:1).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사건들을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회피되어야 하지만 여기에서 소개된 몇몇 구절들과 그 외의 다른 구절들에서 우리는 이 역사적인 사건들로부터 영적인 교훈들을 끌어낼 수 있는 성경의 권위와 그렇게 했던 전례(前例)를 발견하게 된다. 터너(G. A. Tur-ner)는 열성적인 설교자들과 주석가들이 풍유(allegory)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옳게 지적했다. 왜냐하면 풍유란 환상적이고 무책임한 상상을 쉽게 불러 일으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중하게 사용한다면 풍유적 해석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주석」(Westminster Commentary)에서 것지(H. L. Goudge)는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바울이 이 구약성경의 사건들을 유익한 예화로서 뿐만 아니라 또한 기독교의 신비에 대한 미리 계획된 예표(type)로 간주했다는 것을 거의 의심할 수 없다. 그러한 견해가 현대인에게는 공상적인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성경을 보다 깊이 이해한다면 그 견해가 옳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관계에 다른 민족들과 이 관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면, 이러한 관계를 기록한 진실된 이야기는 당연히 특별한 교훈적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다.”

 

비록 사건의 배경은 시대마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법의 기저(基底)가 되는 위대한 영적인 원리들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각시대마다 실패와 퇴보에는 비슷한 원인들이 있고 진보와 승리에도 비슷한 조건들이 있다. 신구약 성경에는 믿음과 용기에 관한 놀라운 실례(實例)들이 후대를 위하여 보존되어 있으며, 또한 불신과 배교에 대한 강력한 경고도 담겨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건 신자의 영적인 역사에서건 동일하게 적용된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히브리 민족의 삶에 있어 결정적 순간에 역사의 장(章)으로 들어왔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도록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이 사람은 주전 1500년 경,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때에 태어났다. 그가 공사 감독의 채찍 맛을 직접 보았는지의 여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노예들이 운명적으로 겪는 한계와 좌절 등을 그도 대부분 경험했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그의 이름은 출애굽 때(주전 1446년 경)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하며 그의 민족의 운명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의 공적은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유명한 지도자들 틈에 끼게 하는 영광을 주었다. 하워드(O. O. Howard)장군은 그에게 이러한 찬사를 베풀었다.

 

”군사적인 통솔력에 있어서의 자질에 관한 한, 그는 조직화하고 계획하며 출정을 전략적으로 지휘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그러한 재능은 전투를 하고 부하들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유지하는 면에서도 보여진다. 그는 자신의 대의를 확신했고 패전할 때나 승전할 때나 여호와의 팔을 의지하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다.”

 

모세와 같은 분별력 있는 영적 지도자는 측근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 지극히 신중할 것이고 기도로 준비할 것이다. 차후의 여호수아의 경력은 모세의 선택이 옳았음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의 지도자 모세를 돋보이게 한 것과 같은 뛰어난 인격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여호수아는 우리의 수준에 더 가까운 사람이 되었고, 악의 세력과의 휴전없는 싸움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신실하고 변함없는 사람의 전형이 되었다.

성경과 역사의 장(章)에 돌연히 나타났을 때의 여호수아는 군대 지휘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후에 그는 그 역할을 훌륭히 감당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르비딤에 도착하자마자 아말렉 족속의 잔인하고도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격을 받게 되었다. 아말렉 족속은 가나안 남방 네게브(Negev)에 살며 약탈을 일삼는 유목민이었다. 성경은 그 공격이 비겁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의식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겨냥한 것이었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러한 태도는 아말렉 족속의 전 역사를 통하여 줄곧 그들의 특색을 이루게 되었다.

 

 

”「여호와의 보좌를 치려고 손이 들렸으니」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출 17:16, 강조 부분은 난외주의 번역을 따른 것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 17:14).

 

후에 모세는 이 사건을 회상하고, 그분의 심판을 집행할 것을 이스라엘에게 지시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반역을 묵인하시지 않으며, 이유없는 잔인함에 대하여서는 심판을 하실 것이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신 25:17-19).

 

이 일의 후편이라 해도 좋을 한 건의 중요한 사건이 사울 왕의 생애에 발생했다. 사울 왕은 아말렉 족속이 이스라엘을 요격했던 일에 대한 보복으로 그들을 진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그 지시에 따라 그들을 공격했으나,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그를 죽이지 않았다(삼상15:7-9). 후에 사울의 친아들이 죽임을 당한 것은 한 아말렉 사람의 손에 의해서였다(삼하 4:1-10).

 

르비딤 전투(출 17:8-16)는 가나안 땅에서 당신의 백성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사람을 훈련시키고 준비시키는 과정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단계가 되었다. 거기에서 그는 두 가지의 값진 교훈, 즉 기도가 검보다 힘이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전념하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분께서는 당신께 도전하고 까닭없이 당신의 백성을 괴롭힌 사람들을 심판하시지 않은 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 이 교훈들은 여호수아에게 매우 귀중한 것이라는 사실이, 장차 있게 될 장기간의 출정에서 입증되게 되어 있었다.

짧은 두 문장, 즉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싸우니라”는 말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는 말 사이에는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 꼭대기에서 서리라”는 또 한 마디의 말이 있다(출 17:8-9, 13). 바로 이 말이 승리를 좌우하는 열쇠가 되었다.

 

영적인 싸움에서의 승리를 위한 하나님의 전략을 보여 주는 이 사건을 시인 윌리암 카우퍼(William Cowper)는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싸우기를 중단하는 것,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병기를 번쩍이게 만드나니.

사단이 보고 두려워하는 것은 가장 연약한 성도가 무릎을 꿇은 모습.

 

모세가 팔을 넓게 벌리고 서 있는 동안,

승리는 이스라엘 편에 있었으나

피곤한 나머지 손을 내렸을 때 그 순간은 아말렉이 우세했도다.

 

모세는 군대의 통솔권을 그의 젊은 측근자 여호수아에게 맡기고, 자신은 손에 지팡이를 들고 아론과 훌을 동반하여 격전지를 바라볼 수 있는 산꼭대기로 올라갔다. 모세에게 있어서, 그가 오래 전 홍해 위로 내밀었던 그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였으며 이제 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었다. 그것은 요술을 부릴 수 있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위임하셨던 권능과 권위를 상징했다(출 4:1-5).

 

대적과의 싸움에 참여한 사람들은 두 부류로 구분되었다. 그 두 부류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 부류는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산꼭대기에서 움직이지 않았던 세 명의 80대 노인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골짜기에서 혈전을 벌였던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였다. 그 선택된 지도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지팡이를 높이 치켜드는 것이었고, 선택된 군사들의 역할은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각 부류마다 독특한 역할을 맡았고, 만약 그 역할이 바뀌었었더라면 두 부류 모두 실패했었을 것이다. 그 전세의 추이를 볼 때, 승리의 열쇠는 산 위에 있는 중보자들의 수중에 있었다. 무기를 들지 않은 기도의 손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했던 것이다.

모세의 팔에 힘이 빠지게 되었을 때 그의 두 친구가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다(출 17:12). 아무런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산 위의 행위에도 골짜기에서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정력이 필요했다. 모세가 자신의 위임받은 권위를 발휘하는 동안 아말렉은 패퇴를 거듭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영원한 진리를 사실로 만드는 증언이자 행위가 믿음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은 모세도 아니었고 지팡이도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

여호수아는 높이 들린 지팡이가 없는 것같이 싸워야 했고, 모세는 뽑아 든 칼이 없는 것같이 지팡이를 높이 쳐들어야 했다.

높이 들린 지팡이는 그 싸움터에 제 3의 힘이 있음을 보여 주었고 여호수아는 곧 이 점에 대하여 좀더 배우게 될 것이었다. 후에 그 청년은 ”사람이 그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실 때 그 회막에 함께 있는 특권을 누렸고(출 33:11) 모세가 진(陣)으로 돌아갔을 때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임재를 나타내신 장소에 있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 그는 또한 자신의 지도자를 수행하여 시내 산 위의 그 잊지 못할 만남의 장소로 나아갔고, 거리가 얼마간 떨어져 있긴 했지만 모세와 하나님 간의 그 경외감으로 가득찬 만남을 지켜보았다. 그러한 경험들은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킨다.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보고도 변하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유명한 음악가 아이작 스턴(Isaac Stern)은 관현악단에 사용되는 모든 악기 중에서 제 2바이올린이 가장 숙달하기 어려운 파트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이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놀라운 기교를 나타냈다. 그는 모세를 이은 제 2인자로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고, 우리가 후에 알게 되듯이,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되자마자 그의 지휘권을 포기하고 여호와의 군대의 새로운 총사령관을 보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강등(降等)을 즐겁게 받아들이고 지휘권을 쾌히 넘겨줄 수 있을 만한 인품을 가진 사람은 흔치 않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기꺼이 그 자신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기보다 차라리 여호와의 군대의 제 2인자가 되려 했다. 여호수아처럼 이렇게 이런 시험을 당당하게 통과한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은 거의 없다.

 

위대한 사람들이 도달했던 정상은

순간의 비행(飛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동료가 잠자는 동안

밤새껏 땀을 홀리며 위로 올라갔었다.

 

어깨를 굽히고 눈을 내리깐 채

우리가 오래동안 짊어졌던 것 위에 오르면

우리는 분별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에는 안 보이던

보다 높은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H. W. 롱펠로우

 

하나님의 전략은 시대마다 다르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람이 준비되는 과정은 대체로 동일하다. 여호수아는 모세 밑에서 견습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은 아닌 독특한 훈련을 받았다.

홍해에서의 하나님의 개입, 광야에서의 음식 공급,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을 통한 기적적인 인도-이 모든 것들이 그 청년의 민감한 마음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그래서 그의 안에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신뢰감이 생겨났다. 그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러나 또한 그는 심판이라고 하는 그분의 이상한 사역을 목격했으며 그로 인해 하나님 안에는 두려워할 만한 그 무엇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서 주도하신 임직식을 거친 지도자는 거의 없다(수 1:1-9). 그 임직식에서 그분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의 형통과 성공을 위한 변하지 않는 원리들을 선언하셨다. 여호수아에 대한 부르심은 지극히 분명했고 그의 임무는 명백하게 제시되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께서 행정 면에서 모세를 도왔던 70인의 위원회를 임명하여 그 민족을 인도하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중요하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비시키셨으며 그 불멸의 과업을 수행할 천부적인, 그리고 영적인 자질을 구비한 것으로 알고 계셨던 한 사람을 선택하셨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로서 전술 전기(戰技)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일에서도 분명한 결단력을 보였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이라면 그는 순종을 주저하거나 망서리지 않았다. 그 자신이 결단력 있는 사람이었듯이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자기와 같이 될 것을 촉구했다.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이 말이 그가 자기 민족에게 던진 도전이었다. 그가 알기로, 여호와와 가나안 신들 간의 싸움에서 온건하게 중립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많은 지도자들이 전쟁에서는 승리하고 평화를 놓친다. 아마도 윈스턴 처어칠(Winston Churchill)은 이 점에 있어서 가장 불운한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진정한 외교술, 즉 원칙을 양보하지 않은채 상반된 견해들을 화해시키는 능력을 익혔었고 그것을 실천했다. 이러한 그의 기술은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 그 땅을 백성들에게 할당하는 어렵고도 난처한 일을 처리하는 그의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간의 탐욕과 이해관계가 얽힌 상황에서 이 일을 성경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천부적인 재치와 지혜 이상의 것이 필요했다. 그가 르우벤과 갓과 다른 지파들 간의 폭발할 가능성이 있는 오해를 해결한 방법은 현명한 외교의 걸작이었으며, 그것이 하나님과의 빈번한 교제의 결과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성실하고 경건한 사람의 지도자적 자질은 자기 민족에게 한 그의 고별사에서도 드러나는데, 그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칭송했다.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수 23:14).

클라런스 맥카트니(Clarence E. Macartney)는 이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인간을 다음과 같은 말로 칭찬했다.

 

”이 거인(巨人)에 대한 찬사 중 하나는 그가 내일을 생각했으며 자기 뒤의 세대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그 자신의 경주가 거의 끝나가고 있으며 자신의 마지막 싸움을 끝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그는 민족의 지도자들을 불러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굳게 잡으라고 권고했다. 생(生)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을 때에도 그의 믿음이나 하나님을 위한 그의 열심은 결코 식어지지 않았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라...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고 그는 말했다(23:8, 10).

미래를 계획하고 우리 다음에 오는 사람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 이것은 항상 가장 훌륭한 믿음과 가장 뛰어난 용기의 표지이다.

 

 

 

제2장/ 당황스러운 도덕적인 문제

 

 

가나안 족속의 멸절은, 그 옛날의 대홍수처럼 여호와 자신의 직접적인 심판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그 심판은 그분의 택하신 백성과 또 온 세상을 축복하기 위한 길을 예비할 목적으로, 그분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 그분의 백성의 손을 빌어 행해졌다. 그들은 불의는 결코 행하실 수 없는 ”온 세상의 심판자”의 명령을 집행하도록 임명된 자들이었다.

그분의 방법을 비난하는 자들은 무거운 책임을 떠맡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야기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어떤 해석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대한 오늘날의 견해에 조금이라도 동조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만일 이스라엘 족속이 절대적으로 순종했었다면 그들을 부르신 목적에 있어서,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 숭배와 또 다른 여러 죄악들이 얼마나 가증하게 보이는지에 관하여 그 민족에게는 지울 수 없는 인상이 남지 않았겠는가? 과연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러한 교훈이 그렇게 잘 전달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런 깨우침을 얻지 못했다.

-W. S. 후톤

 

 

긍휼과 심판으로

나의 시간의 거미줄을 그분께서 엮으셨고

진정 슬픔의 이슬은

그분의 사랑에 의해서 빛났다.

 

나는 그분의 인도했던 손을 찬양하리라.

나는 그분의 계획했던 마음을 찬양하리라.

영광이 머무는 곳, 보좌에 앉았던 곳

임마누엘의 땅에서

-앤 로스 카즌즈-

 

 

창세기 15장 13-16절, 신명기 18장 10-12절, 20장 16-18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팔레스틴 땅을 선물로 주심에는 거기에 거주하는 가나안 일곱 족속, 즉 가나안 족속, 히위 족속, 헷 족속, 브리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야 한다는 분명하고 명료한 명령이 수반되었다.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는다면 그들은 멸절되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받은 지침은 아주 구체적이었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있는 자는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신 20:16-18).

 

이 요구는 가혹하고 강경한 것 같지만, 역사를 읽어 보면 그 당시의 전쟁은 냉혹하고 잔인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소위 문명 국가들이 전쟁에 사용하는 무기들, 이를테면 네이팜 탄(강렬한 유지(油脂) 소이탄-역자 주), 독가스, 원자 폭탄 등에 비해 본다면 그 당시의 전쟁은 대담한 것이 아니었고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그러한 요구를 하셨다는 것은 모세 오경을 읽는 독자에게 심각한 도덕적인 문제를 야기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수아서를 공부하기에 앞서 그 문제를 먼저 다루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명령을 사랑의 하나님이란 개념과 조화시키는 문제는 쉽게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 족속들에게 불의하시고 잔인하신 분이었던가, 아니면 그러한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한 이면적인 이유들이 있었던 것인가?

 

이러한 질문과 또 이른바 구약성경의 모순점 내지 도덕적인 문제들에 직면한 어떤 성경학자는 이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기억하고 위안을 얻었다. 지상에 계실 때 우리 주님께서도 성경에서 이와 동일한 곤경과 문제들에 직면하셨다. 틀림없이 그 문제들은 그분의 민감한 성품에 비슷한 문제를 야기시켰을 것이지만 그분께서는 그것들로 인해서 괴로움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하신 적이 없었다. 이 명령이 기록되어 있는 신명기가 주님께서 좋아하셨던 책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분께서 많이 언급하셨던 책이었다는 사실을 그저 우연한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예수께서는 당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자유로이 공박하는 데 주저함이 없으셨다. 그러나 최근 들어 격렬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구약성경의 몇몇 부분에 대하여 회의를 품으셨던 적은 단 한번도 없으셨다. 오히려 그분은 구약성경 전체의 권위를 두둔하셨다. 사실이 이러하기 때문에 우리는 안심하고 구약성경 전체의 권위를 주장할 수 있다.

 

또 하나, 제기되어 온 질문이 있다. 하나님은 왜 유독 가나안 일곱 족속들만을 지적하셨는가? 그들 외에도 사악한 족속들은 많이 있었지 않았는가? 유독 가나안 족속들만을 지목하여 심판의 대상으로 삼으실 어떤 이유라도 있었는가?

여기에는, 민족들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태도와 관련된 중요한 영적 원리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가나안 족속들 가운데 하나)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 15:13-16).

 

이 말씀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과 인내를 다소 알게 된다. 그분께서는 민족들의 행위에 따라서 그들을 대하시며, 어떤 민족을 심판하실 때는 그들의 불의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에만 심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는 것이 그분의 백성의 미덕에 대한 보상이 아님을 그들에게 분명하게 밝히셨다.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신 9:4).

성경상의 역사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역사도 가나안 족속들은, 다른 이교도 족속들도 용납하지 않는 행위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그들의 죄악은 이제 하나님 편에서 더 이상의 관용을 베푸시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상태에 도달했다. 그들은 이제 온 인류에게 병폐가 되었던 소돔과 비슷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가나안 족속들에 대한 판결의 엄중함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가차없는 적개심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하나님의 지침은 합법적인 판결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이유없이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무차별 공격과 대량 학살은 고려되지 않았다. 프란시스 쉐퍼(Francls Schaeffer)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많은 가나안 성읍들이 발굴되어 왔는데, 이 시대에 가나안 족속들이 섬긴 우상들은 끔찍할 정도로 사악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들에 대한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반항과 온갖 종류의 성적인 죄로 얼룩져 있었다. 그 우상들은 오늘날의 가장 노골적인 춘화(春畵)처럼 음탕했다 ! 그리고 그 불경스런 면에 있어 그들의 문화는 우리의 문화와 하등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모세의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좋다, 이제 심판의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문화에도 '도시 안의 죽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이 문제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몇몇 요인들에 주목해 보자.

 

-그 족속에게는 이스라엘과 화친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 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신 20:10-11). 기브온 족속에게 바로 이런 일이 있었다.

 

-그 족속에게는 오랜 유예 기간이 주어졌고 여러 차례 경고를 받아 왔다.

그러나 그 경고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의 간증으로 인한 혜택을 누렸다. 그들은 소돔에 내린 심판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변경에 도착한 후에도 그들은 40년이란 유예 기간을 더 얻었다. 그것은 회개를 위한 기간이었지만 그들은 무시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시피, ”하나님께서는 돌아설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오래 참으시며 기다리신다.”

 

-멸절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신 것은 영토 획득, 또는 군사적 이익 때문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영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귀신 숭배자들이었고, 그들의 도덕적인 타락상은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증스런 행위를 방관하셨다면 우주의 도덕적인 주재(主宰)로서의 그분 자신의 책임을 어떻게 모면하실 수 있었겠는가?

 

-그들 중 한 사람인 라합은 하나님의 경고를 주의깊게 듣고 회개했으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의지했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은 목숨을 건졌다. 동일한 긍휼하심이 그들 모두에게 베풀어졌다. 진지한 회개, 그리고 하나님께로의 돌아섬은 그들이 언제라도 택할 수 있는 길이었다.

 

-가나안 족속들을 멸절시키는 것은 예방적인 조치로 취해진 것이었다.

즉, 도덕적이며 영적인 부패가 전염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지극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도록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그들이 죄악에 감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셔야 했다.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하나님의 지침은 가나안 족속들의 귀신들린 끔찍한 행동들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중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0-12).

 

”썩은 사지를 절단하는 것은 지금도 시행되고 있는 안전한 외과 수술이다. 절단한다는 것은 가혹한 치료일지 모르지만 생명을 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행해져야 한다. 이렇게 썩은 사지를 절단하는 것이 안전한 수술이라면 하나님께서 사회의 유익을 위하여 타락한 민족을 제거하시는 것 역시 정당한 것이다. 그 행위는 마치 사람에게서 암 세포를 제거하는 것만큼이나 유익한 것이었다”고 린들 쇼트(Rendle Short)박사는 말했다.

절단은 두려운 수술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수술이었지 살인이 아니었다. 반쯤 치료된 질병은 전혀 치료되지 않은 질병이나 마찬가지라는 의학적인 답변을 상기한다면, 어느 누구도 다소 부드러운 방법으로 그들을 벌하기에 충분하지 않았겠냐는 식의 질문은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비상수단을 채택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다.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스라엘의 소유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합법적으로 그들에게 속한 영토를 차지하였던 것 일 뿐이다.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행한 설교에서 말했듯이, 하나님께서는 ”저희와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다”(행 17:26).

 

모세가 예언했듯이, 차후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행동이 옳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명령을 받은 대로 순종하여 그 족속들을 진멸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속하게 그들의 우상 숭배와 부도덕한 행위를 본받았고 결국에는 그들의 죄로 인하여 가나안에서 쫓겨났다. 만일 순종했더라면 그들의 부르심에 관하여, 그리고 하나님 보시기에 이 죄악이 얼마나 가증한지에 관하여 그 민족은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혹하다는 문제는 구약 시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회개치 않는 것과 돌이킬 수 없는 죄악에 대하여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심판이 구약 시대의 그것보다 결코 덜 가혹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 점에 있어서 가장 엄숙한 경고는 바울의 입에서가 아니라 사랑의 주님으로부터 나왔다.

 

도덕적인 수술을 감행한 이 행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오늘날을 위한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죄와 악의 세력과의 싸움에는 휴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했던 교훈, 곧 우리의 영적 대적들에게 한 치의 땅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제3장 가나안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

 

 

거기에 약속의 땅이 있었으니 우리는 그 땅을 내가 누리기를 원하는 삶의 땅, 그리고 내가 누릴 수 있을 것이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삶의 땅이라는 말로 묘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누리도록 하시는 삶, 즉 승리의 삶, 평안의 삶을 누려야 한다. 이 평안은 무위(無爲)가 아니라 영혼의 평안이며 행복과 기쁨의 삶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고통받는 가련한 세상 사람의 필요에 관하여 매정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영적 번영의 삶이다. 세상 가운데서 행할 때마다 나는 반드시 빛을 보일 것이고 축복의 발자국을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콜린 커

 

 

황금 빛 햇살이 비취는

산 위에 나는 거하고 있다.

그 땅의 놀랄 만한 아름다움은

나의 소중한 꿈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곳의 공기는 맑고 영묘하며

결코 시들지 않는 나무 그늘 아래

샘곁에서 피어나는

꽃들의 숨결로 가득하다.

 

이것은 뿔라의 땅이 아닌가?

복되고 복된 빛의 땅.

꽃들은 영원히 피어 있으며

태양이 항상 밝게 비취는 땅.

-작가 미상-

 

 

창세기 12장 1-7절, 13장 14-15절, 신명기 11장 10-12절, 에베소서 1장 13-14절

 

이스라엘의 그 잊을 수 없는 여행과 정복에 대한 영적 해석과 적용의 열쇠는 우리가 가나안의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 땅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겪는 체험에 있어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에 대한 해답은 성경을 성경과 비교함으로써 얻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의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그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창12:1) 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리고 롯이 그를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선물로 주셨다. 그것은 놀라운 전망이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비록 아브라함은 묘실로 쓸 수 있을 만큼의 넓이 외에는 약속의 땅을 소유했던 적이 없었지만, 그 선물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순간부터 완전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실현되고 그분의 백성이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는 수백 년이 지나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를 행하심으로 당신의 백성을 애굽 밖으로 이끌어내셨고 홍해를 통과하여 술 광야로 안전하게 이끄셨다. 거기서부터 그들은 팔레스틴으로의 관문 중 하나인 가데스 바네아로 나아갔다. 그 곳에서 마침내 그들은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찬송가의 가사나 일반적인 용례가 모두 요단강은 육신의 죽음을, 가나안은 천국의 복락을 상징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비유는 이차적인 의미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다. 가나안의 일차적인 의미는 천국에서의 생활이 아니라,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하늘에 속한” 생활이라고 지칭했던 바로 그것이다. 에베소서는 여호수아서에 상응하는 신약성경의 책이며 여호수아서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가나안은 천국이 아니라 천국의 근교(近郊)이다. 그것은 현재 이 땅에서 알고 즐길 체험을 상징한다. 여호수아서에서 역사적으로 나타난 것, 즉 광야에서의 패배의 삶이 약속의 땅에서의 기쁨과 안식과 열매 맺음의 생활로 바뀐 것이 에베소서에서는 영적으로 적용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에 기름지고 축복된 가나안이 있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알 수 있는 땅이며

여기 지상에서 사는 동안

헌신된 성도들이 소유했던 땅이라.

 

거기 죄에 대한 승리가 있나니

마음의 투쟁으로부터의 안식이며

내 속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다 깊이 깨달음이며

보다 풍성한 삶이라.

-백스터

 

가나안이 천국과 동일시될 수 없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분명해진다.

첫째, 가나안은 수많은 싸움이 벌어진 장소였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싸움이란 것이 없다.

둘째, 더러운 것은 어떤 것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중대한 죄를 범했다.

세째, 천국에는 패배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 패배를 맛보았다.

네째, 천국에는 추방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가나안 신들을 섬겼기 때문에 가나안에서 쫓겨났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천국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생활을 상징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것은 노예들로 이루어진 오합지졸을 승리의 군대로 변모시킨 것처럼 급진적이고 결정적인 영적 경험의 변화를 상징한다.

 

이와 비슷하게 요단강도 육신의 죽음과 동일시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비교해 본다면 그것 역시 이차적인 의미에서만 그렇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단강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4-5).

 

 

여호수아의 권위 있는 통솔을 받으며 이스라엘은 삭막한 광야에서의 실패와 좌절의 생활을 뒤로 하고 지상의 기업인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다. 상응하는 내용이 담긴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여호수아인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황폐하고 만족하지 못한 생활에서 벗어나 하늘에 속한 그의 기업인 약속의 땅, 즉 풍족하고 만족스런 삶에 이르게 되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엡 1:13-14).

 

그리스도와 함께 사니

더 이상 거론되지 않으리.

지금 내 진정 부끄러워 하는 것들이.

나는 굴레로부터 온전히 벗어났노라.

참으로 자아를 죽은 것으로 여긴 까닭이니

하나님께 영광이로다.

-라이더

 

고향도 없고 나라도 없이 광야에서 목적없이 방황하며 세월을 보낸 이 백성에게 가나안에서의 삶은 마음을 끄는 전망이 되었을 것이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땅이 이상적인 고향 땅의 모든 특징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정경으로 그 땅을 묘사해주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에든지 산지에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너의 먹는 식물의 결핍함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신 8:7-9).

 

그들의 상상을 좀더 자극하기 위해서이기라도 한듯,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이 동경하는 애굽의 상태에다 그 땅을 대조시킴으로써 그 땅을 보다 자세하게 묘사하셨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 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신 11:10-12).

 

이런 까닭에, 이스라엘 족속에게 있어서 가나안을 소유하는 것은 거의 뿌리칠 수 없는 선택안이 되었다. 그 땅에 들어감으로써 얻는 이점(利點)들은 명백하고 압도적이었다.

 

-속박 대신 자유

노예 말고 어느 누구가 자유의 온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있는가? 이 종되었던 족속에게 가나안이 약속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죄에게 여전히 종노릇하는 신자에게 약속하시는 것이기도 하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 6:14, 18).

 

-방황 대신 안식

마침내 그들은 자기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집을 가지게 될 것이었다. 더이상 지친 몸을 이끌고 뜨거운 모래 사막을 횡단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이와 비슷한 전망이 펼쳐져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히 4:3, 9).

 

-단조로움 대신 다양함

그들의 고질적인 불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의 백성이 고통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았다. 만나 공급이 중단되거나 물이 끊어졌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광야에서 지낸 40년 동안 그들의 의복이 해어지거나 발이 부르트는 일은 없었다(신 8:3-4). 그러나 그들은 생활이 단조롭고 먹는 것이 항상 같다는 이유로 불평을 했고 애굽에서 얻을 수 있는 맛있는 것들을 갈망했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고 말하며 그들은 불평했다(민 21:5).

그러나 가나안은 기쁨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식물, 즉 젖과 꿀, 곡물과 포도, 그리고 그 외에도 다른 많은 것들을 제공해 주었다. 이와 비슷한 영적 음식의 풍요와 다양함이 약속의 땅에서, 그 땅을 동경하는 신자를 기다리고 있다. 어떤 것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엄청나게 많이 주신다. 그분께서 주시는 것들은 지식을 능가하는 사랑, 영광으로 가득찬 말할 수 없는 기쁨,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평안 등이다.

 

 

-약속 대신 소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수 세기 동안 실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던 그 약속은 이제 성취될 단계에 이르렀다. 그 민족은 과감한 믿음의 일보(一步)를 내디뎌야만 했다. 그리하면 이 모든 영광스러운 전망은 현실이 될 것이었다.

믿음으로써 영적인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약속들은 현실로 변하고 교리는 체험으로 변할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그는 자기 믿음대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낙담 대신 기쁨

하나님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는 기뻐하는 백성이 되고 광야에서의 낙담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의도였다. 이것은 그들의 연중 절기들에 대한 규정에 명시되어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절기를 지킬 때에는... 연락하되...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신 16:11, 14-15).

신자를 위한 비슷한 전망이 주님에 의해 약속되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우리가 우리의 소유를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제4장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위기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은 이 정도까지 확대되었고 일방적으로 치달았다. 그러한 기질은 모든 고상한 생활이나 일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며, 예상했던 대로 재난을 불러 일으킨다. 상대방과 비교해 볼 때 자신들은 메뚜기 같다고 느낀 이 겁장이들이 만일 그들과 싸우기 위하여 올라갔다면 그들은 당연히 패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 두려움은 싸움에 임했을 때보다 가데스에서 드러나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베푸시사 정탐꾼들을 보낼 것을 허락하셨고, 이로써 숨어 있는 불신이 겉으로 드러나게 하셨다. 그래야 비로소 그 불신이 처리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맥클라렌

 

 

 

 

가데스 바네아

 

그들은 가나안의 관문에 이르렀으나

결코 들어가지 못했다네,

그들은 그 문지방에까지 이르렀으나

죄 가운데서 멸망했다네,

그 이튿날 그들은 들어갈 수 있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문을 닫으셨다네,

그들은 울며 성급하게 모험을 시도했지,

아, 그러나 안타까워라! 때는 너무 늦었다네.

 

이처럼 우리도 항상 이르고 있다네.

두 갈래 길이 있는 장소에.

한길은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길.

다른 한 길은 강퍅한 마음에 이르는 길이라네.

오, 형제여 그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오늘 그분의 음성에 순종하오.

성령께서 그대를 부르고 계시나니

오, 그분으로 근심하며 떠나지 말게 하오.

 

오, 완전히 복종하며 나아오오.

오, 그대의 의심과 죄로부터 돌아서오.

가데스로부터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면류관과 나라를 얻으오.

-켈소 카더-

 

 

민수기 13장 17-20, 25-33절, 14장 1-35절, 히브리서 3장 7-19절, 4장 1-11절

 

지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광야의 경험, 즉 하늘에 속한 가나안에서 누리게 될 더없는 행복의 미래 생활과 대조를 이루는 황량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생활로 간주하는 것이 몇몇 기독교계에 흔히 있는 일이다.

그렇게 비교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을지 모르지만, 많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천국에서 장차 우리 주님과 함께 가지게 될 기쁨에 넘치는 경험과 비교해 볼 때, 괴로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광야 경험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에 이르는 과정에 대한 교훈이 아니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굽의 잔인한 굴레로부터 벗어나

우리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그분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우리는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고 있다.

 

황량하고 거친 광야를 지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올바로 인도하리라.

보라. 여기에 그분의 임재를 입증하는

낮의 구름과 밤의 불을.

 

그분의 능력이 두들겨진 반석을 주관하시니

맑은 시내가 우리의 갈증을 채우며

그분께서 굶주림에 시달린 우리 영혼을 먹이신다.

매일 하늘로부터 내리는 만나로써.

-H. G. 잭슨

 

-적절한 광야 경험

 

우리는 이스라엘의 적절한 광야 경험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광야 경험을 분별해야 한다(여기서 적절한 광야 경험이란 그들이 가나안 지경에 이르기 위해 광야를 지나야 했었음을 의미한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홍해에서 요단강에 이르는 처음의 여정은 정당한 것이었고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새 신자의 생활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함을 받고 사단에게 매여 있던 종살이에서 벗어났더라도, 어린 그리스도인은 엘림에서와 같은(출 15:27) 유쾌한 경험과 마라에서와 같은(출 15:23) 비통한 경험을 통하여 승리의 삶을 영위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광야에서의 생활은 애굽에서의 종살이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가나안에서의 기쁨에 넘치는 생활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 민족은 이미 탄생했지만 아직 영적인 유아 상태에 있었다. 그 백성은 가나안에서 직면하게 될 가혹한 전쟁에 대비한 훈련이나 준비를 아직 갖추지 못했다. 광야에서의 역경은 바로 그러한 훈련과 준비를 갖추게 하기 위해 의도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하늘로부터 내린 떡”을 먹으면서도 종종 애굽의 진미를 동경했다. 그들은 홍해에서 구원의 노래를 불렀었으나(출 15:1-18),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노래는 사라졌고 그들은 자신의 모진 운명에 대하여 불평하게 되었다.

광야에서 그들은 지나치게 인간 지도자에게 기대는 경향이 있었다. 모세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가느라 잠시 백성의 곁을 떠나게 되자 그들은 유순한 아론을 설득하여 금 송아지를 만들도록 했고, 그래서 주위에 있는 다른 민족들이 하는 대로 그것에게 절하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 진(陣)에 가담한 비(非)히브리 인들의 ”중다한 잡족”에게 민감히 영향을 받았다. 요컨대 그들은 바울이 세상적인 혹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부른 사람들에 해당했던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고전 3:1).

 

이스라엘에 관한 이 묘사에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영적 자서전을 발견하게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로 가는 도상에서 이스라엘이 겪은 광야 경험은 하나님께서 비축해 두신 것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시키는 적절한 단계였다.

혹자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처럼 아름답게 묘사했던 약속의 땅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 모든 무리가 앞을 다투어서 광야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고향에 발을 디디려 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발걸음을 옮겨 가나안에 상응하는 영적인 경험 가지기를 꺼리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의 기업을 차지하는 것을 꺼려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상반된 보고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12명의 지도자를 선택했고, 가나안 땅을 탐지하여 그 땅과 그 땅의 경계 상태를 보고하는 임무를 맡겼다(민 13:17-20). 40일 동안 그들은 그 땅을 세밀하게 탐지했다. 정탐 결과 그들은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른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였지만 그 일치는 거기에서 그쳤다.

그 정탐조의 보고는 둘로 나뉘어졌다. 다수의 보고는 비겁한 열 사람이라고 불릴 수 있는 시각과 이성의 사람들에 의해 제출되었다. 소수의 보고는 신실한 두 사람, 즉 믿음과 비젼의 사람들인 여호수아와 갈렙에 의해서 제출되었다. 그들의 보고는 얼마나 대조적이었는가 !

 

열 사람:”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민 13:32).

두 사람:「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민 14:9).

열 사람:”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민 13:28).

두 사람:「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민 14:9).

열 사람:”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민 13:32-33).

두 사람:「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민 13:30).

열 사람:”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민 13:31).

두 사랑:「능히 이기리라」(민 13:30).

 

소수(小數)는, 시간이 생긴 이래

사람의 보다 좋은 면을 나타냈고

시간의 목록 안에서 종종

한 사람의 어떤 주장이 빛나는 적이 있었다.

-P. L. 던바

 

 

이 대조적인 견해가 나타나게 된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전적으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보고를 제출했던 다수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신이라는 돋보기로 그들 대적의 힘을 바라보았고, 낙관적인 소수는 이미 능력을 나타내신 바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참된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 열두 사람 모두가 똑같은 것을 보았다. 열 사람은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을 평가했다. 두 사람은 능치 못함이 없는 하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평가했다.

 

의심은 장애물을 보고

믿음은 길을 본다.

의심은 어두운 밤을 보고

믿음은 낮을 본다.

 

의심은 발걸음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믿음은 높이 치솟는다.

의심은 ”누가 믿겠느냐”고 속삭이고

믿음은 ”내가 !”라고 대답한다.

-작가 미상

 

그들의 보고에서 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고 그들에게 거짓말하실 수도 있는 사람인 양 그분을 취급했다. 그 자그마한 일곱 족속이 그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짐이라도 되는 양 그들은 그분의 권능을 모독했다. 그분께서 자신을 멸절시키려고 역사하시기라도 하는 양 그들은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했다. 불신은 기억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시력도 나쁘게 만든다.

그 보고가 나오자마자 공포가 그 백성을 엄습했고 ”온 회중이 그들(여호수아와 갈렙)을 돌로 치려”고 했다(민 14:10).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하며 그들은 울부짖었다.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민 14:3).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4).

 

이 메뚜기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들은 가나안으로 들어 가는 것을 완강하게 거절했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마지막으로 감동적인 호소를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죽이려고 했다. 그들의 그런 시도를 막을 수 있었던 것은 두려운 「쉐키나」(Shekinah) 영광의 나타남뿐이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열 사람은

난공불락의 높은 성읍들을 보았고

하나님께 눈을 돌렸던 두 사람은

그 성읍들 위에 다가 오고 있는 재앙을 보았다.

 

하나님을 보지 못한 열 사람은

그들의 동료들을 낙담시켰고

두 사람은 도처에서 하나님을 감지했다 !

그대는 두 사람 편인가 아니면 열 사람 편인가?

-작가 미상

 

그 열 사람의 부정적인 태도에 상응하는 것을 오늘날에도 찾아 볼 수있다. 다른 사람들을 낙담시켜 ”땅을 차지하러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은 항상 존재한다. 그들은 그러한 승리의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러한 생활이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산상수훈은 아름다운 이상일 뿐 오늘날에는 적용될 수 없고, 그 기준들은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에게 너무 높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도래하는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설정해 놓으신 기준은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과 그 기준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이 거짓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회심하는 순간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받았다는 사실은 옳게 강조한다(엡 1:3).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은, 그 결과 우리가 그 모든 것을 경험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도덕적인 노력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일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잠재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 그 영적 축복들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것들을 차지할 때에만 체험적으로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과 또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아무 근거도 없이 극단적으로 가르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그 중요한 주제를 탐구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 결과 성령이 그들에게 의미할수 있는 모든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들의 노력을 가로막기도 한다.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만 애석한 손실을 초래하게 된다.

 

요청을 받고 어떤 미국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을 때, 나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의 영광스러운 가능성을 포함하는 성령의 사역에 관하여 멧세지를 전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날 무렵 한 노신사가 눈물을 흘리며 팔을 뻗은 채 통로를 따라 나아와서는 말했다. ”나는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했으면서도 성령이 나의 생활에 의미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열 명의 정탐들과 같이 단순히 무지나 두려움, 혹은 편견으로 말미암아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 땅에 대하여 나쁜 보고를 퍼뜨리는” 사람에게는 엄중한 책임이 뒤따른다.

 

-부적절한 광야 경험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그 땅에 들어가지 않고 등을 돌린 순간 적절한 광야 경험은 그 본연의 취지를 상실했다. 그 시점부터 줄곧 그들의 태도는 무엄한 반항의 태도였다. 그들은 결정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으려 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광야 생활로 되돌려 보내심으로써 그들의 숙명적인 결정을 인준하셨다.

그들은 불신과 반항심을 가지고 소리쳤다.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민 14:3).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두려워하던 것은 그들에게 임했다. 하나님께서 엄중한 선언을 하신 것이었다.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 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민 14:29-31).

 

이십 세 이상인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오직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살아 남아서 가나안의 기쁨과 승리를 맛보았다. 그 나머지 사람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졌다. 이것은 불신의 심각함과 참담함에 대한 훌륭한 무언(無言)의 증거이다.

신약성경에서 이에 상응하는 것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스도인은 조만간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될 때 그 자신의 가데스 바네아 위기를 맞게 된다. 그는 비록 고난이 따른다 할지라도 가나안의 승리의 생활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목적없고 불만족스런 광야 생활로돌아설 것인가? 그 두 가지 대안은 각각 멀리까지 영향을 미친다.

후자의 방도를 취하는, 저항하는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다음과 같은 좌절과 부족을 겪게 될 것이다.

 

-안식이 없음

광야에서 그들은 정착된 거주지를 갖지 못했다. 하루는 상재한 오아시스 근처에서 진을 쳤고 그 다음 날에는 열사(熱沙)의 사막을 횡단하곤 했다. 광야 생활을 선택하는 그리스도인의 몸에는 안식이 없고 마음도 안정을 얻지 못할 것이다. 광야에서는 평온한 그리스도인을 찾아 볼 수가 없다.

 

-불만족

하나님과 또 그분께서 선택하신 지도자들에 대한 불평과 불만은 일종의 풍토병같은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를 주셨을 때 그들은 애굽의 고기와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고 싶어 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해도 혹독한 종살이를 했음을 잊어 버리고 그 땅의 쾌적한 공기를 한 번더 들이마시고자 했다. 광야 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은 그 자신의 곤고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싸움을 하려는 마음을 가지지 못한다. 광야에는 만족하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다.

 

-열매를 맺지 못함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몇 차례 싸워 승리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승리로 말미암아 그들이 어떤 이익을 얻은 것도 아니고 어떤 영토를 얻은 것도 아니었다. 그 승리로 인하여 얻은 것이 있다면 대적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권리가 고작이었다. 거의 40년 동안 행군하며 싸웠지만 그들은 출발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난했고 땅도 얻지 못했다. 광야 그리스도인이 싸운 싸움은 정복의 싸움이라기보다 반항의 싸움이다. 광야에는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다.

 

-소극적임

이 단계에 이른 이스라엘 민족의 주된 미덕은 애굽인의 일들을 하고자 하는 은밀한 갈망을 분명히 가졌지만 그것들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생활에서는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면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 그들은 주로 그들이 하지 않는 일들에 의해서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피우거나 춤을 추거나 여자와 같은 차림을 하는 일이 없다. 그들에게서 다른 특징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그들의 생활은 그들이 성취한 것보다는 자제하고 금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광야에서는 적극적인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다.

 

-망설임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애굽을 이스라엘로부터 빼어내는 것은 무척 어려웠다. 여행을 하는 중에 그들은 홍해와 요단강 사이에서, 애굽과 가나안 사이에서 망설였다. 그들은 애굽의 쾌락을 동경하다가도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탐내는 듯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세상적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있을 때 광야에 거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며 무엇이라고 말할 것이지만 두렵지 않다면 그들의 세상적인 일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할 것이다. 그는 때때로 집에서 멀리 떠나 있거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보지 않을 때 애굽으로 은밀하게 소풍을 가기도 한다.

다른 한편, 보다 나은 상태에 있거나, 특별집회나 전도집회가 있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약속의 땅의 지경으로 나아와서 들어가기를 갈망하지만 희생이 따르기 때문에 주춤한다. 광야에는 견실한 그리스도인이 한 명도 없다.

 

만일 이러한 진단에서 당신 자신의 경험의 일부 측면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훨씬 더 좋은 것을 예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항상, 세상적이고 자아를 기쁘게 하는 낭패의 생활에서 우리를 구출하시어 끊임없는 승리의 생활로 인도하고자 하신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실패와 갈망과 탐욕의 옛 생활에 등을 돌리고 가나안에서의 만족한 생활을 향해 전력질주할 수도 있다.

 

바로 이 사건에 근거하고 있는 다음의 말씀은 그 선택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고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히 3:7-12).

 

이스라엘에게는 마지막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을 놓쳤다. 그 성인(成人) 세대는 두 번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우리도 역시 하나님께서 ”오늘”이라고 말씀하실 때 ”내일”이라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내가 돌아서지 않도록 도우소서 !

나의 손이 쟁기 위에 놓여 있나이다. 나의 떨리는 손이

그러나 내 앞에 있는 것은 모두 경작되지 않은 땅뿐입니다.

광야와 고독한 장소이며

텅 빈 공간이 있는 외로운 사막입니다.

내가 거둔 수확은 이 하찮은 곡식, 이 속이 빈 겨와 마른 곡식 한 줌이며

이 야위고 보잘 것 없는 줄기뿐이니 나는 용기를 잃었습니다.

내가 돌아서지 않도록 도우소서 !

쟁기의 손잡이는 눈물로 젖었고

보습은 녹이 쓸어 못쓰게 되었습니다-그러나, 그러나

나의 하나님, 내가 돌아서지 않도록 도우소서 !

-작가 미상

 

 

 

 

제5장 성공의 원리

 

 

하나님의 율법은 결코 사람의 영혼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없다. 이는 그 안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허약과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우리에게 실망과 불안, 끊임없는 갈등과 영속적인 실패를 안겨 주는 것은 우리 지체 안에 있는 바로 이 죄의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여호수아”께서 우리를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도록 외적 생활 규정으로서의 율법을 우리 뒤에 치워 두어야 한다.

-F. B. 마이어

 

 

이스라엘 군대의 대장이시며

위에 있는 땅을 추구하는 모든 자의 안내자이시여.

당신의 가호 아래 우리가 거합니다.

당신의 보호하시는 사랑의 구름은 우리의 힘.

당신의 은혜는 우리의 규례,

당신의 말씀의 그 한 가지 목적은 주님의 영광,

 

오류를 범치 않는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므로

우리는 광야에서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완전한 방향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제시된 섭리의 길을 놓치지도 않을 것입니다.

두려움뿐만 아니라 위험도 느끼지 않으니.

사랑이, 전능하신 사랑이 가까이 있는 동안.

-찰스 웨슬레이-

 

 

여호수아 1장 1-11절, 고린도전서 2장 14절-3장 1절, 에베소서 1장 3-10절

 

이스라엘 족속은 목적없는 방황을 하며 40년을 보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은 다시 한번 가나안의 지경에 이르렀다. 요단강 동편에 진을 침으로써 그들은 마침내 오랫동안 약속되어진 기업으로 건너 갈 준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돌아섰던 성인 세대 중에서는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생존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예언하셨던 대로 광야에서 죽었다. 민족을 위한 희생적인 봉사로 생애를 바친 모세와 아론조차도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 존귀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교훈이 된다.

 

민족사의 이 결정적인 때에 여호수아의 나이는 80세였으므로 더 이상 젊은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라는 사명을 주셨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 1:2).

이 구절의 순서가 약간 이상한 것은 아무 의미없는 것이 아니다. 두 문장 사이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가라”)에는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 교훈이 암시되어 있다. 율법과 거의 동의어가 되어온 이름(도움을 받지 않은, 인간의 최선의 노력을 뜻하는)을 가진 모세는, 도움을 받지 않은 우리의 최선의 노력이 우리를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로 인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을 가나안의 안식과 승리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의 여호수아만이 우리를 거기로 인도하실 수 있다(히 4:8).

 

로마서 7장에 예리하게 묘사된 것과 같은 광야 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각성을 얻어 우리가 자력으로 거룩함을 얻으려는 일에 대하여 절망감을 느낄 때까지는 약속의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실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공통된 영적 경험이다.

”모세가 죽었다!” 이 말은 여호수아의 마음에 얼마나 어두운 전망을심어 주었을 것인가 ! 그는 더 이상 연장(年長)의 훌륭한 지도자에게 의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에게는 하나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누가 그처럼 뛰어난 능력과 인격을 가진 사람의 후임자로 들어앉을 수 있겠는가? 그는 자신은 적임자가 아니라는 무력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뛰어난 지도자가 죽을 때마다 우리는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는 것으로 흔히 생각한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목적에 절대로 필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이 몹시 겸허한 방식으로 곧 입증된다. 그분께서는 어떤 사람이 아무리 위대하고 아무리 재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그 한 사람에게 의존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죽으면 땅에 묻히지만 그분의 일은 사람이 바뀌더라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계속된다. 모세는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직분을 맡도록 여호수아를 준비시키셨다.

 

한 지도자를 천천히 부각시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통 택하시는 방법이다. 토저(A. W. Tozer)가 말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택하신 종들에게 갑작스럽게 공적인 중책을 맡기시는 일은 거의 없다. 사전 준비없이 세상에 갑자기 알려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중책을 맡기 전 어디에선가 하나님 밑에서 오랫동안 견습(見習) 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 장(章)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도록 하는 불변의 원리들을 밝혀 줄 것이다.

 

먼저, 여호수아에게는 분명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이 부르심에는 하나님께서 능력을 부여하신다는 확신이 늘 수반된다. 이 사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에게, 그를 녹초가 되게 하는 책임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라고 촉구하는 과정에서 설득력 있게 표현되었다.

”그대가 만일 이 일을 하고 하나님께서도 그대에게 인가하시면 그대가 이일을 감당하리라”(출 18:23).

그 부르심은 가나안 땅을 소유하리라 재차 약속하신 것에 의하여 보강되었다(수1:2-3).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선물을 하실 수 있는 충분한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 그분은 ”천지의 주재”(창 14:19)이시기 때문이다. 그 선물에 대한 법적인 ”고찰”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3).

오늘날의 법적인 용어로 표현한다면 ”자연스러운 사랑과 애정을 고려하여”가 될 것이다. 어떤 법률가도 그러한 권리를 무효로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대한 나무랄 데 없는 권리를 가졌다 할 것이다.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선물로서 법적으로 그들의 것이 되었다.

 

● 사유(私有)의 원리

 

그 땅은 법적으로 그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땅은 경계를 긋고 발로 밟음으로써, 하나님께서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라고 말씀하신 대로(수 1:3) 차지했을 때에 비로소 실제로 그들의 것이 되었다.

이와 동일한 원리가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니, 예수에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마 9:29)는 말로 소경에게 확신을 주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 원리를 선언하신 것이었다.

바울은 약속의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있는 영적 축복들을 살피는 도중 갑자기 하나님을 찬송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엡 1:3).

 

이것은 소유를 주장할 수 있는 약속이 아니라 믿고 받아들여야 하는 성취된 사실이라는 점에 주목하라. 모든 신령한 복이 가장 연약한 신자에게 이미 주어졌다. 이는 그에게 어떤 내세울 만한 공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유(私有)하는 만큼의, 우리가 믿고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만큼의 축복들만을 경험하며 누린다.

중국에서 사역하는 한 젊은 선교사가 그 어려운 중국어를 익히려고 몹시 애쓰고 있었다. 하루는 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커다란 중국어 문법책을 바닥에다 놓고 그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 발바닥으로 밟는 모든 곳을 다 제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중국어 문법 책을 밟고 서 있습니다. 중국어를 저에게 주시옵소서 !”

그의 상징적인 믿음의 행위는 아무 효과가 없지 않았다. 부지런히 공부하고 적용함으로써 그는 능숙하게 중국어를 구사하게 되었고 급기야 그 언어 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좇아 단순히 그분을 취한다.

나는 내 기도를 들으심으로 인해 그분을 찬양하며

주님으로부터 응답을 받는다.

나는 취하고 그분께서는 떠맡으신다.

-심프슨

 

● 소유를 위한 준비

 

형세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무척 불리했다. 최근의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의 하나인 헷 족속은 앗수르나 애굽에 능히 대항할 수 있는 강력하고 문화가 발달된 족속이었다고 한다. 이전에 노예들이었던 이 훈련되지 않은 무리가 고도의 훈련을 받고 체계가 잘 잡힌 그러한 민족동맹을 몰아내고 그들을 전멸시킨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가정에 불과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앞으로 있을 싸움을 위한 준비를 갖추기 전에 먼저 용기가 북돋아져야만 했다. 그의 준비는 하나님과 사람의 차원에서 공히 이루어졌다.

하나님 편에서 준비하신 일은 하나님의 능력과 권위를 부여해 주실 것을 보증하는 일이었다.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수 1:5).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위임하신 책임에 상응하는 권위를 항상 주신다. 여호수아는 내심 두려워했을지라도 그 임무에 적합한 능력을 부여하시겠다는 보증을 얻고 안정을 되찾았을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보증을 얻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수 1:5).

여호수아의 굴하지 않는 용기와 침착한 신뢰의 비결은 이 약속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또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단언이 있었다.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 1:5).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내가 너를 해고시키지 않겠다”로 번역했다.

어떤 것도 능치 못함이 없으며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에의해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경우라면 전망이 그렇게 어둡지는 않을 것이다.

 

믿음, 강한 믿음은 약속을 보며

하나님 만을 바라본다.

불가능을 비웃으며

외치기를,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한다.

-찰스 웨슬레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여호수아는 네 차례나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는 도전을 받았다. 월등하게 힘이 세고 보다 훌륭한 장비를 갖춘 대적과 싸움을 하려고 하는 군대 지휘자에게 힘과 용기는 필수적인 것이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해야 할 책임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전세가 불리한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여호수아에게 그렇게 촉구하셨던 것이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수 1:9).

 

그러나 낙심하고 연약함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마음을 강하게하고 담대히 하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조롱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빈 말이 아닌가? 그것은 온갖 것을 걱정하는 신경 질환 증상 환자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처럼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호수아가 어떻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만을 명령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을 모두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우리를 실망시키거나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의 두려움 모르는 용기는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음으로부터 솟아난 것이었다. 그 용기는 자신의 약함에 대한 자각과 꾸준한 신뢰의 공동 산물이었다. 영적인 싸움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신실하심에 대한 자각에 기초를 두지 않은 용기는 용기라기보다 만용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다소 비슷한 상황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라는 말씀으로 디모데에게 확신을 주었다(딤후 1:7).

 

 

그러나 우리가 특히 생활과 또 주를 섬기는 일에서 성공을 거두게 될 때 웃시야 왕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너무 강하게 하는 사람이 많다. 그 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그 이름이 원방에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더라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대하 26:15-16).

그 강력한 군주는 자신의 교만과 죄악 때문에 심판을 받아 흉칙한 문둥병자가 되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율법을 항상 묵상하라는 지시 또한 받았다.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싸움에서의 그의 지침서가 되어야 했다. 물론 그에게는 모세 오경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상 그 말씀을 참고하며 순종하는 것이 번영과 성공의 비결이 될 것이었다. 그 말씀 안에서 그는 진군 명령과 작전 계획을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검(劍)이 아니라 이 책이 지휘를 위한 그의 주요한 장비가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말씀에 몰두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을 등한히 한다면, 경험 많은 대적과 부딪히게 되었을 때 그의 용기는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었다.

 

묵상은 몽상이 아니라 부지런한 사고와 성숙한 숙고이다. 바울은 빌립보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을 하도록 권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색다른 종류의 책들에 몰두하거나 텔레비젼화면 앞에서 엄청난 시간을 소비하거나 라디오를 하루종일 틀어 놓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진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할 시간은 거의 없다. 따라서 우리의 영적 생활은 경박하게 된다. 성경 묵상을 소홀히 하는 것은 영적 생활에 빈혈 증세를 초래한다. 사실상 약속의 땅에서 승리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보다 적게가 아닌, 보다 많은 성경 공부가 요구된다.

 

 

에베소서 5장 18절을 골로새서 3장 16절과 비교해 보고,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충만될 때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인간 관계에 나타나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성령으로 충만될 때에도 나타난다는 점에 주목해 보라. 이 말이 함축하는 의미는, 성경을 꾸준히 묵상하는 때에만 우리는 성령 충만을 받은 채 있게 된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낱낱이 순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

이 지시는 앞의 지시들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왜냐하면 주어진 빛에 불순종하는 것은 그 이상의 빛을 받는 것을 효과적으로 가로막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이 ”그분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말을 듣는다. 불순종은 마귀가 게릴라 전을 펼 수 있는 요지(要地)를 제공하는 것과 같다.

 

주여, 광야에서 먹고 지내셨던

영혼을 지탱해 주는 하늘의 떡이며

당신에게 고기와 음료가 되었던 말씀들-

오 그것들로 날마다 나를 보양하게 하소서 !

 

그리고 지옥의 권세와 싸울 때

당신을 잘 섬겼던 그 검이

지금 내 곁에 있으니

나를 도와 그것을 사내답게 휘두르게 하소서 !

-프랑크 하우톤

 

● 백성에게 주어진 명령

 

오늘은 항상 내 일을 위한 준비의 날이다. 지도자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싸움을 위해서 준비되어야 한다. ”양식을 예비하라”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었다. ”삼 일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을 얻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라”(수 1:11).

이 시점까지도 만나가 매일 공급되었지만, 삼 일이 지나면 만나 공급이 중단될 것이었다. 광야에서 그들은 노력하지 않고도 음식을 얻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양식을 마련해야 했다. 이제 그들은 여리고 사람들의 버려진창고에서 양식을 얻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이 사실은 재미있는 교훈을 제시한다. 광야에 거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충분했던 영적 양식은 힘드는 싸움을 해야 하는 약속의 땅에서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그 생활을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그 땅의 오래된 곡식”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필요로 하게 될 것이다. 가나안에서 우리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날마다 더해가며, 그분이 가지신 전투 계획의 세부 사항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가질 필요가 있다.

 

”세상적인” 혹은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신령한”(영적인) 신자와 다르다(고전 3:1). 전자는 소화하기 쉽게 조리된 영적 음식을 제공하는 인간 설교자들과 교사들에 주로 의존한다. 그러나 후자는 성경으로부터, 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식을 얻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다른 신자들과 교제하거나 설교를 통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막힌다 할지라도 영적인 빛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자신의 양식과 발을 돌보는 법을 모르는 군인은 곧 현역에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성경을 공부하며 거기에 담긴 위대한 진리들, 즉 위안을 주는 약속뿐만 아니라 명령과 경고와 책망으로 우리 영혼을 먹여야 한다.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히 5:14).

 

 

 

제6장 요단강 도하(渡河)

 

 

요단강을 건넌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분과 함께 장사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뚜렷하게 묘사해 보여 주는 사건이 다. 무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간주되어서 그분 안에서 십자가에 못박혔다(롬 6:4)... 우리가 그리스도와 동일시된 것의 두 가지 측면이 이 돌들의 두 가지 상태에 의해서 생생하게 묘사된다. 열두 개의 돌이 강물 속에 묻혔고 또다른 열두 개의 돌이 강 바닥에서 취해져서 하나님께 구별된 그들의 생존의 기념물로 가나안 쪽으로 옮겨졌던 것같이, 우리도 우리 주님의 생명 속으로 취해지고, 죄와 이 세상에 관한 한 거기에서 장사되며, 그 죽음의 강 바닥으로부터 부활과 승리의 생활로 옮겨지는 것이다.

-J. P. 루이스

 

 

요단강 도하

 

넘치는 요단 강물 곁에 나는 서 있다.

굽이치는 조류는 깊고 넓어서 나는 어떤 길도 보지 못한다.

나는 약속의 땅에 이르기를 갈망한다.

내적 투쟁의 광야 생활을 나는 오늘 청산한다.

오 주여, 죄로부터 온전히 구원하시고

내게 당신의 완전한 평안을 주소서.

 

그 기둥이 강렬한 빛을 비춘다.

곡식과 포도 위에, 가장 멋들어지게 차려 입은 들판 위에

그러나 칠흙같이 어두운 밤의 구름은

나의 광야, 지루한 세월의 한숨과 눈물 위에 드리운다.

뒤에 계신 하나님, 앞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나는 보다 먼 강변에 도달할 것이다.

 

나는 모세의 지팡이를 헛되이 바라본다.

그러나 물가에서 나는 주춤하지 않을 것이며

조류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다.

영원한 말씀, 하나님의 궤가

강 이편에서 저 편에 이르기까지

앞서 행하시니 강물이 갈라진다.

죄에 대하여 내가 죽었다고 간주하자.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에 평안을 준다.

 

나는 곡식과 포도와 기름을 발견하다.

애굽의 풍미도, 광야의 황무지도, 만나도 여기에는 없다.

나는 탈취물 중 가장 좋은 것을 거둔다.

나의 발이 지금 그 땅위에 놓여 있으니

나는 어떤 적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여호수아가 말한 것을 믿고

믿음의 싸움을 싸운다.

-켈소 카더-

 

 

여호수아 2장 8-11절, 3장 1-17절, 4장 16-18절, 로마서 6장 1-14절, 8장 13절

 

이스라엘의 진은 싯딤에서 떠나 이제 요단강가에 이르렀다. 정탐꾼들은 정찰을 마치고, 가나안 족속들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하여 듣고 사기가 저하됐다는 고무적인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수 2:8-11).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승리를 받아들였고,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수 3:5)는 말로 백성을 안심시켰다.

가나안 생활과 광야 생활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도 어느 세대에 살건, 스스로의 노력과 실패와 좌절이라는 광야 생활과, 승리와 성취라는 약속의 땅에서의 생활 중에서 택일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게 된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건너야 할 요단강이 있는 것이다.

 

이 사건과 관련해서 사용된 다섯 어구들은 그 가르침을 간결하게 제시해 준다.

 

● ”요단 이 편 해 돋는 편”-대가를 계산하는 것(수 1:15)

 

이제 약속의 땅을 눈 앞에 두고 있지만 넘치는 급류 때문에 그들은 그곳에 도달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기 때문이었다(수 3:15). 그들 앞에는 대담무쌍한 사람의 기백도 충분히 꺾어 놓을 수 있는 어려움이 가로놓여 있었다.

강에는 다리도 없고 그들에게는 배도 없었기 때문에 우선 그들은 요단의 거셀 물결을 헤엄쳐 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단강의 폭은 통상 48m, 혹은 55m가량이지만 추수기에는 헤르몬 산의 눈이 녹아 수량이 불어나기 때문에 급류가 된다. 강을 건너는 데 이보다 더 부적절한 때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인간적으로 볼때 도하(渡河)는 불가능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미처 고려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3일간의 여유를 주셨는데, 이는 틀림없이 그들로 앞에 놓여 있는 어려움을 현실적으로 직면하며 그 대가를 계산해 볼 수있는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트리스트램(H. B. Tristram)은 그의 저서 「이스라엘의 땅」(Land ofIsrael)에서 요단강을 방문한 소감을 적었는데 그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이 직면했던 암담한 전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요단강 언덕에 서 있었다... 진흙 투성이에다 물이 불어나 혼탁한 강물은 보기에도 너무 무섭고 물살이 세서 가장 용기 있다는 사람도 애당초 의도한 대로 물에 뛰어들지 못했다. 며칠 일찍 도착했더라면 강에 접근할 수조차도 없었을 것 같았다... 측정을 해 본 결과 우리는 최근 그 강의 수위가 현재 수위보다 4.2m 더 높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수위도 정상적인 수위보다 몇 m나 높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번째 문제 못지 않게 백성들의 기를 꺾는 것은 멀리서도 볼 수 있는 여리고의 위협적인 성벽이었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3:16).

흰 성벽과 푸른 잎이 무성한 종려나무가 있는 이 성은 가나안으로의 관문이었다. 거의 난공불락이라고 할 정도로 튼튼하게 축조된 이 성이 가나안지경 안으로 이르는 모든 통로를 보호했다. 이스라엘이 넘쳐 흐르는 강물을 두려워했듯이 요단강 저편에 있는 것을 두려워했다 해도 우리는 그 백성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지척에 있는 우리 자신의 요단강과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낸 위협적인 여리고, 즉 인생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지릿대가 될 수도 있는 여리고를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공개적인 시인, 반드시 해야 하는 사과, 반드시 해야 하는 어떤 배상, 써야 할 화해 편지, 어떤 가정 불화의 종식, 부부간의 불일치의 시정, 오랫동안 품었던 어떤 반감을 버리는 것, 혹은 반드시 이행해야 하는 어떤 경시된 의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우리가 가나안의 안식을 맛보고자 한다면 자신의 개인적인 여리고에 직면하여 그것을 정복해야만 한다.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로 향하든가 아니면 불필요하고 좌절감을 안겨 주는 광야 생활로 돌아가든가 둘 중에 택일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그 외에 택할 수 있는 다른 방도는 없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초자연적인 인도를 받아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인도함을 경험해야 했다.

 

 

 

 

이제부터 그들은 동료가 운반하는 거룩한 언약궤의 인도를 받게 될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 초자연적인 현상은 신령한 마음과 순종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다. 그들은 강물이 어떻게 갈라질 것인지에 대해 어떠한 암시도 받지 못했다 그것은 봄(sight)으로써 해결될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결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작전을 여호수아에게만 계시하셨고, 강을 건너는 날 아침에 그는 준수해야 할 절차를 간단하게 밝혔다.

 

우선 그들은 스스로 성결케 해야 했다(수 3:5). 그들의 준비는 군사적이나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 되어야 했다. 그들이 받은 지시는 그들의 검을 예리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도록 스스로를 구별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영적 원리가 암시되어 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은 우리가 책임을 완수할 때에야 나타난다. 우리가 그분의 권능이 나타나는 때를 정하는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 기사를 행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변덕스러운 분이 아니시다. 우리가 ”성령의 법”(롬 8:2)을 준수할 때 그분의 무한하신 능력이 우리를 돕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일 기사를 행하시는 것은 우리가 오늘 스스로를 성결케 하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다. 축복의 창문은 사람 쪽에서 빗장이 걸려 있다. 문이 열리지 못하게 하는 그 빗장을 우리의 성결이 제거하기 때문에 축복의 소나기가 쏟아지게 된다.

 

성결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권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성결케 해야 할 한 가지 의미가 실제로 있다고 답변할 수 있다. 바울은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 7:1).

거룩한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모든 권능과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신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실 수 없고 하시지도 않을 일들이 몇가지 있다. 솔선해야 할 쪽은 우리이다.

 

우리의 솔선은 소극적으론 성령께서 밝혀 주시는 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과 조화되지 않는 모든 것을 떨쳐 버리는 것이고, 적극적인 면에서는,그분과 그분을 위한 봉사에 새롭게 헌신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성결케 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죄를 버리고 그들 자신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 것이었다. 그들은 그분의 신실하심을 의지했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들이 곧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의 성결은 장차 얻게 될 승리에 필수적인 인간적 요건이었다.

요단강을 건너는 순서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고, 그 뒤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열두 지도자들이 따르고, 마지막으로 백성들이 뒤따라야 했다.

 

● ”요단 물가”-믿음의 발걸음(수 3:8)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임명하신 지도자들에게 항상 성실하시고 신실하시다. 그래서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종 여호수아를 존귀하게 만드시는 것을 우리가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로 알게 하리라”(수 3:7).

고위 지도자의 직분에 오르는 것은 그 자체에 위험을 안고 있다. 모든 사람이 그 시험에 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여호수아가 그러한 존귀에 반응을 보인 방식은 그의 겸손과 그의 품격 있는 삶을 한층 더 깊이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홍해에 이르렀을 때 그들 앞에는 물 가운데로 난 길이 있었다. 그때에는 그들의 믿음에 어떤 것도 요구되지 않았다. 그들이 할 일은 그 길로 걸어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요단강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여기서는 그들 앞에 길이 열려질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이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행해야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나안 생활에서 성숙함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눈에 보이는 것들로부터 떼어 놓으시고 믿음만을 의지하도록 하신다.

 

길을 볼 수 없을 때에도

의지하고 계속 순종하자.

우리에게 전진하라고 명하신 그분께서

그 길을 보여 주시지 못하는 일은 없다.

 

 

바다가 깊고 넓을지라도

길이 막힐지라도

두려워 말고 계속 전진하자.

주님께서 인도해 주시니

 

그분과 함께라면 밤은 결코 밤이 아니라

그분이 계신 곳은 어디나 빛이 있다.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왜 지체하느냐.

순종하는 자들은 행복하도다.

-토마스 켈리

 

여호수아의 지시에 따라 흰 옷 입은 제사장들은 백성들과의 거리가 900m가량 될 때까지 전진했는데, 이는 경외심의 표현이기도 했겠지만 모든 무리가 언약궤를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을 것이다. 덮개로 씌워지고, 금으로 덮인 언약궤를 멘 채 제사장들은 범람하는 요단강가에 다다랐다. 거기에 섰을 때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었을 것 같지는 않다. ”강물 속으로 발을 디뎠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떻할 것인가?” 이런 것이 항상 불신의 도전이다. 그러나 강물로 발길을 내딛자마자 흙탕물은 갈라졌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내디 딘 믿음의 발걸음에 응답하셨다.

 

요단강을 안전하게 건넌 것은 한 가지 이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타이밍(timing)의 정확성, 강물의 범람 시기에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 강물이 거의 하루 동안 멈추어졌다는 사실, 수 많은 사람들이 건널 수 있을 만큼 강바닥이 단단했다는 사실과 같은 여러 요소가 포함된 다각적인 이적이었다.

1906년과 1927년의 지진과 같은 자연 현상도 산사태를 일으켜 강물을 막으시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이 었을런지도 모른다. 방법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와 조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강물이 막혀진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 일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일어났고, 비상 사태가 수습되자마자 강바닥에 놓였던 장애물은 사라졌다.

 

성경이 완전하게 영감받은 기록임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들을 설명하려고 자연적인 원인들을 들먹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도하(渡河)에 성공한 비결은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나니”(수 3:11)라는 말씀에 담겨져 있다. 십계명이 새겨진 두 개의 돌판이 담겨 있는 언약궤는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것에 대한 눈으로 볼 수 있는 유형적인 표적이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당신의 불가시적인 인도하심에 주의를 돌리도록 하기 위하여 그 언약궤를 사용하셨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언약궤를 보라 온 땅의 주가 너희 앞서 요단으로 들어가려 하신다.”

금으로 덮여진 궤가 아니라 여호와 자신이 직접 그들을 인도하기 위하여 함께 계신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는 분명히 보여졌다. 각 단계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 믿음의 승리로 보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언약궤가 의미했던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것과 같다. 아니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으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사망의 강에 발을 디디셨을 때, 그분 안에 있는 우리가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도록 강물이 막혀졌다. 그분께서 사망의 강물 속으로 내려가셨을 때,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교회를 그 사망의 강물 속으로 옮기셨다. 하지만 그분의 사망과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혜택과 축복 중에서 개인적으로 우리의 몫을 주장할 때에만 비로소 성령께서 그것을 경험하게 하실 수 있다.

하나님과 보다 밀접히 동행하기를 바라고 온전한 가나안 경험을 동경하는 그리스도인 앞에는 건너야 할 요단강이 항상 흐르고 있다. 이스라엘도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광야 경험에서 자동적으로 벗어나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가나안 경험은 빈틈없고 결정적인 믿음의 발걸음으로 인한 결과이다.

 

● ”요단 가운데”-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17).

이 상징적인 행동에는 영적인 의미가 가득 담겨 있다.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내려선 것에 상응하는 내용들이 다음 구절들에 나타난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 6:3-4).

 

주님의 죽으심의 두 가지 보완적인 측면, 즉 대속의 측면과 그분과 동일시되는 것의 측면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속적인 측면은 죄로 인한 형벌과 죄책으로부터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우리 대신에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이것들로부터 구제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아는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실을 밝히고 있고 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려 주는 그 밖의 다른 어떤 근거도 가지고 있지 않다.

 

동일시의 측면은 죄의 압제와 그 지배로부터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가 그분과 동일시되었다고 믿음으로써 이것들로부터 구원받는다. 우리가 이 점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동일한 진리의 말씀이 주는 확신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말해 주고 있는 바로 그 성경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도 확신시켜 주고 있다. 우리가 첫번째 진술을 믿고 약속된 축복을 받았다면 당연히 두번째 진술도 사실이라고 믿어야 한다(롬 6:6). 그것이 일관성 있는 태도이다.

위의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분 혼자 죽으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아담이 죄 중에서 타락했을 때 전 인류가 그의 안에 잠재적으로 있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세상 사람들의 죄를 속하시고 그 죄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전 신자들은 그분 안에 있었다.

 

아담의 육신적인 후손들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죄의 성품을 물려받았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영적인 후손들은 모두 그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보장된 모든 혜택을 물려받는 후사가 된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이 사실을 믿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이 뛰어난 특정한 그리스도인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울의 어떤 행동이나 태도로 말미암아 그의 신앙 경력의 어느 시점에 발생한 위기가 아니었다. 우리가 그것을 믿건 안 믿건,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그것은 우리에게 사실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도록 하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주인이 둘 있는 집은 없다. 우리의 옛자아는 바로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하며 그리스도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찬탈자를 철저하게 다루셔야 했다. 그분께서는 그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셨고 그 선고는 갈보리에서 집행되었다. 그리고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을 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은 실상 다음과 같다고 할수 있다. ”내면에 있는 배반자요 너의 모든 근심의 원인인 너의 옛 자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혔다. 이 성취된 사실을 믿고 그것이 사실인양 행동하라.”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체험에서는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권고한다. 이것을 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할 수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중생되지 못한 자신의 자아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죽기로 작정할 때, 우리에게 사형을 집행하시도록 성령께 자기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요단강을 건너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간주하는 것”(reckon) 혹은 ”여기는 것”(count)(롬 6:11)은 원래 사실이 아닌 어떤 것을 사실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실인 어떤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은 법률상의 가정과 같은 것도 아니고 우리의 감정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계산하다”를 뜻하는 수학적인 단어이다. 그것은 둘에다 둘을 더하면 넷이 되는 것과 같이 확실한 이유 때문에 어떤 것을 사실이라고 평가하는 마음의 태도이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 말은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간에 성경이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을 사실로 평가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하나님에게나 사람에게 봉사를 하지 못한다. 자신을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는 것은 사실에 있어 꼭 필요한 측면이긴하지만 아주 부정적인 측면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요단강 가운데 그대로 있지 않았다는 사실에 의해 설명되었다.

 

●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

 

”증거궤를 멘 제사장들을 명하여 요단에서 올라오게 하라...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수 4:16, 18).

이것과 상응하는 내용도 역시 신약성경에서 나타난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한 그분과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니

네게 남겨진 일이 무엇인가.

갈등과 번민을 그치고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뿐.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나의 영광스러운 머리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킴을 받았으니

거룩함이 이제 내가 걸어갈 길이네.

나는 속박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으니

자아를 정말 죽은 것으로 여긴다네.

하나님께 영광이 있을지어다.

-라이더

 

우리가 그분의 부활에 연합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같은 대답인데, 우리는 단순히 믿음으로 확실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이 특별한 경우에도 그 말씀이 사실이라고 믿음으로써이다. 갈보리로부터 흐르는 두 갈래의 시내가 있다. 그 하나는 우리를 지배하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는 죽음의 시내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로 하여금 새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생명의 시내이다.

 

요단강 도하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총의(總意)에서 비롯된 명확하고도 결정적인 행동이 수반되었다. 각 신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을 보시고 그 손을 내밀라고 하셨을 때 그 사람은 손을 내밀 힘이 없다고 말하면서 반대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하지 않고 주님을 의지했고 손을 내밀어 보려고 했다.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에 대한 응답으로, 손을 내밀어 보고자 하는 행동(의지)과 내민 행동사이로, 손을 내밀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방법도 이와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쉽게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 중요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실례(實例)가 미국의 노예들을 해방시킨 아브라함 링컨의 노예 해방령이다.

링컨이 그 역사적인 문서에 서명을 한 순간 미합중국의 모든 노예는 법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어떤 주인도 더 이상 노예를 속박할 권리나 권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노예가 법적으로 자유롭게 되긴 했지만 당장 경험적으로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그 일이 성취되기 전에 여러가지 일들이 먼저 일어나야 했다.

-노예들은 해방 소식을 들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이었지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그 다음에 그는 그 좋은 소식을 믿어야 했다.

-그는 그 소식이 전체 노예들의 경우에 뿐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자신의 경우에도 해당된다고 믿어야 했다.

-그 후에 그는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고 이전 주인의 노예가 되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더 이상의 노역을 거절할 때 그는 그 뒤에 있는 미합중국 입법부의 모든 권한을 의지할 수 있었다.

 

신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해방시키는 법령에 서명하셨다. 이 좋은 소식을 듣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소식을 믿고 나의 경우에 해당된다는 것을 확신하고 더 이상 사단과 죄의 지배를 받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자유를 주장하고 죄의 요구를 거절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우리 뒤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권능을 의지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더 이상 무기력하게 있을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는 그분과 연합했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 즉 기도와 증거와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 ”요단 너머”-새 생명”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수 3:17).

제사장들이 강에서 나오자마자 전처럼차갑고 접근하지 못할 정도로 세찬 강물이 다시 흐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 중 행방불명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모든 사람이 강을 건넜던 것이다.

 

그 모든 행동에는 명확함이 있었다. 요단강은 이제 광야와 가나안 사이의 분명하고 뚜렷한 경계가 되었다. 그들은 ”우리가 요단강을 건넜는가 ?”라고 물을 필요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분명한 믿음의 발걸음을 옮겼을 때 그런 질문을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그 모든 행동에는 궁극성이 있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와 광야에서의 실패와 좌절로 점철된 그들의 옛 생활과 그들 사이에는 소용돌이치는 요단강이 놓여 있었다. 그들은 대적으로부터 벗어 났고, 따라서 퇴각할 일이 없게 되었다. 가나안 생활에 들어선 사람들은 그들과 죄의 옛 생활 사이로 흐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이라는 강을 뒤돌아 볼 수 있다.

 

그 모든 행동에는 새로움이 있었다. 이스라엘 족속은 전적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더 좋은 음식이 있었다. 만나 대신에 포도와 젖과 꿀과 곡식이 있었다.

거기에는 보다 나은 안식이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황무지에서 목적없이 방황하지 않고 자기 소유의 아늑한 집에서 살았다.

그들의 입술과 마음에는 더 좋은 노래가 있었다.

 

오 즐겁고 복된 나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고향!

오 즐겁고 복된 나라,

사람들이 마음으로 열망하는 곳!

예수께서 긍휼로써 우리를 이끄시네

그 사랑스런 안식의 땅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찬양받으실 그분께서.

-클루니의 버나드

 

 

 

제7장 보이지 않는 지휘관

 

 

여호수아는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생각하며 홀로 있었다. 그때 갑자기 그의 앞에 ”칼을 빼어 든 사람”이 나타났다. 여호수아는 그에게 정체를 밝힐 것을 요구했고...

이것은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의 다음 여섯 가지 사항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 나타난 사람이 전사(戰士)였다는 점, 둘째, 여호수아가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는 점, 세째, 여호수아가 적군과 아군 두 편만을 알고 있었다는 점, 네째, 그 전사가 자신은 사람을 능가하는 존재라고 말했다는 점, 다섯째, 그가 다름아닌 하나님의 군대장관이었다는 점, 여섯째, 이제 시작될 싸움을 염두에 두고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싸우고 그들과 함께 싸우기 위해서 그가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의 세부 사항은 하나님의 교회와 각 그리스도인과 관련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리고 항상 그 상황과 그 시간의 필요에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신다.

-G. 스크로기

 

 

들으라, 파수꾼의 외치는 소리를!

나팔 수리에 귀를 기울이라!

무기를 잡을 태세를 갖추라, 적이 가까이 왔으니,

지옥의 권세가 둘러쌌으니

하나님을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여,

너희 무기와 마음을 준비하라!

격전의 날이 다가왔다!

영광스러운 싸움을 위해 나아가라.

 

너희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올라가라.

너희 대장의 발자국을 보라.

 

너희 대장을 따라서

확실한 승리를 얻으라.

모든 권세가 그분에게 주어졌으며

그분께서 항상 변함없이 통치하신다.

구원, 행복, 그리고 천국은

모두 예수 이름 안에 있다.

 

예수의 놀라운 이름이

우리의 모든 대적을 패주시킨다.

예수, 온유하되 격노한 어린 양.

사자가 싸우고 있으며

모든 지옥 군대의 저항을 받는다.

우리는 모든 지옥 군대를 타도한다.

그리고 예수의 보혈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복하며

계속 정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진군한다.

-찰스 웨슬레이-

 

 

여호수아 4장 4-8절, 5장 2-10절, 13-15절, 골로새서 2장 11-13절

 

가나안에서의 모든 전투의 승리의 열쇠는 요새성(要塞城) 여리고를 정복하는 데 있었다. 그 흰 성벽은 멀리에서도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

요단강 둑 위에서 여호수아와 그의 민족은 배나 다리도 없이 물살이 세고 수위가 높아진 강을 건너야 하는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결코 그에 뒤지지 않는 또 다른 장애물, 즉 난공불락의 여리고를 직면하게 되었다. 그 성을 정복하는 것은 요단강을 건너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장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은 안전하게 그들의 루비콘(큰 내전을 치를 결심을 하고 줄리어스 씨이저가 주전 49년에 건넜던 조그마한 강-역자 주)을 건넜다. 이스라엘은 이제 대적의 영토에 갇히게 되었기 때문에 죽기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다. 불어난 요단강 때문에 퇴로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보수하여 사용할 수 있는 집이나 요새도 없었다. 나이많고 경험많은 전사들은 모두 죽었다. 이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은 상상하기조차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견고한 성벽과 종려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여리고는 튼튼하게 축성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레이빌(J B. Graybill)은 이 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리고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성일 것이다. 요단의 한 여울 곁이라는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그 도시는 동방으로 이르는 고대 무역로를 관장하고 있었다. 강을 건너고 나면 이 무역로가 갈라지게 된다. 하나는 북쪽의 벧엘과 세겜으로 향하는 길이고, 또 하나는 서쪽으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남쪽으로 헤브론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와같이 여리고는 요단 동편(Transjordan)으로부터 팔레스틴의 산지에 이르는 통로를 통제했다... 그 도성의 그러한 위치로 보아 중앙 산지로 침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도시를 점령해야 했다.”

여호수아 당시의 여리고의 정확한 규모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성이 대도시가 아니었다는 데에는 대부분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 여리고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도시라기보다는 큰 요새라고 하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다. 일부 학자들은 그 성의 면적이 약 40,000m2를 넘지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성은 만만찮은 요새였으며 오래 동안 포위되어도 견딜 수 있는 성이었다.

 

여호수아는 어떤 공격 방법을 채택해야 할지에 관해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지 못했다. 모세가 죽었기 때문에 그가 상의하고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 요새의 강점과 약점을 발견하기 위하여 직접 정찰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그는 민족의 생존이 위태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패배는 곧 멸절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이 그를 무겁게 짓눌렀고,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어떤 해결책을 발견해야만 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공격하는 전형적인 방법은 공성용(攻城用) 망치와 공성용 사다리를 사용하는 것이었지만, 그들은 그러한 전쟁 장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지지 않는 한 그 땅은 침입을 받을 염려가 없었다. 따라서 어떤 대응 전략을 세워야 했다 틀림없이 한밤중이었을 시각에 여호수아는 곧 생애의 어떤 전환기에 봉착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채 여리고를 향해서 나아갔다. 그러한 위기는 사전에 예고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를 점령할 수 있기 전에 세가지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야만 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표시인 할례가 다시 행해져야

했다(창 17:9-14/수 5:4-8).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그 의식은 소홀히 되었고, 그 결과 언약이 파기되었다. 그 폐지된 언약은 모든 백성의 만장일치로 다시 체결되어져야 했다. 38세 미만인 남자들 중에서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의 말을 빌리자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벗어 났고, 그런 까닭에, 그분께서 긍휼을 베푸시긴 했지만 그분의 보호는 상실했던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첫번째 야영지였던 길갈에서 이 구별의 표시가 갱신되었고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았다.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수 5:9)가 여호와께서 하신 이상한 말씀이었다(길갈이란 지명은 ”굴러감”을 뜻한다). 이것은 노예라는 낙인이 제거된 것, 또는 그들을 따라 다녔던 애굽인들의 비웃음을 가리키는 것일런지도 모르지만, 그보다는 그들이 언약을 파기한 것과 애굽의 우상 숭배에 대한갈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이제 그들은 자유를 누리는 민족이 되었고 다시 한 번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관계가 되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판정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셨던 언약을 따를 결심을 새롭게 했다.

 

이 일에 대한 그들의 순종이 믿음의 시험을 내포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간과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군대의 지휘관이 그의 전병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경우를 상상해 보라. 여러 날 동안 대다수의 남자들이 기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따라서 그 민족의 생존은 중무장한 사나운 여리고 사람들의 처분에 내맡겨졌다. 군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여호수아가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한 것은 모든 계획을 위태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처가 아물기까지 남자들은 여러 날 동안 고통을 느끼며 무기력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손쉬운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민족의 믿음은 요단강을 건널 당시에 하나님께서 간섭하신 것에 의하여 크게 굳세어졌기 때문에 그들은 이 위험한 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이 할례 의식은 생활 가운데 승리를 체험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호와께서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여호와께 속하라”고 예레미야를 통하여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렘 4:4).

그러한 마음의 할례는 로마서 12장 1절에서 묘사된 바 주님께 대한 우리의 구별을 상징한다.

 

둘째, 유월절이 지켜져야 했다(수 5:10).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말했듯이, 이 역사적인 순간에 두가지 성례가 함께 등장했다. 유월절은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백성에 의해서만 지켜질 수 있었기 때문에 광야 생활을 하던 동안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유월절이라는 연례 행사는 차후 세대들에게 그들이 피로써 구속받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목적으로 제정되었다. 그러나 온 세대가 이 중요한 사실의 의미를 상실했고, 언약이 길갈에서 갱신되었기 때문에 그 의식을 한 번 더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유월절이 지켜진 세번째 경우였다. 두번째 경우는 그 절기가 제정된 지 1주년 되던 때였다(민 9:5).

 

 

우리는 이 두 의식이 그리스도인의 세례(침례)와 성찬과 상응한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는 개별적인 것이며 후자는 단체적인 것이다. 하나는 입문적인 의식이고 다른 하나는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거룩한 예식이다. 신약성경은 세례(침례)가 그리스도인의 할례라고 언급한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하나님께서는 갈보리가 우리의 생각에서 떠나지 않도록 계획하신다는 것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다. 십자가는 늘 우리 생각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 십자가는 우리 구원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어둠의 권세를 누를 수 있는 승리의 무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 을 인하여 저(사단)를 이기었으니”(계 12:11).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주장하면서 이 최우선되는 일에 대한 자신의 결심을 표현했다.

유월절 다음 날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의 소산을 먹었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여리고로 몰려든 사람들이 버려 둔 곡물 창고에서 취한 것이었을 것이다. 이틀 후, 40년 동안 그들의 음식이었던 만나는 처음에 내렸을 때처럼 갑자기 그쳤다. 이것은 타이밍(timing)과 관련된 중요한 이적이었다.

 

만나와 곡식은 둘 다 신약성경에서 주 예수의 예표로서 인정된다.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시다(요 6:51), 만나에서 곡식으로 바뀐 것은 그리스도인이 구주의 인격과 사역을 이해하게 될 때 그에게 나타나는 변화와 상응하는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즉, 전에도 그분을 구주로서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 그는 그분을 주님과 주인으로 알며 인정한다는 것이다.

 

세째, 여호수아 그 자신에 대한 정복이 선행되어야 했다.

 

자신의 계획을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며 성벽 주위를 걷고 있을 때 그는 곧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리라는 생각은 조금도 가지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손에 칼을 빼어 든 정체불명의 사람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여호수아는 훌륭한 군인답게 자기 칼을 신속히 손으로 잡으며 물었다.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이제 왔느니라」가 그 사람의 답변이었다(수 5:13-15). 협력자도 아니고 대적도 아닌 장관(지휘관)이었다.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고 가로되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나님의 계시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통회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게 하며, 큰 이상(理想)은 항상 나 자신의 사소한 선입견을 버리고 영광의 주님을 바라볼 때 얻게 된다.

엎드리는 것이 여호수아에게 요구된 것의 전부는 아니었다. 동양에서는 지극히 존엄한 사람에게 나아갈 때 신을 벗는 것이 존경의 표시였다. 여호수아가 그 장관에게 전적으로 굴복하고 자신의 지휘권을 양보했을 때에 비로소 그분께서는 자신의 작전 계획을 밝히실 수 있었다. 이후로 그는 하늘에서 족하게 마신 칼로 싸울 것이었다(사 34:5).

 

여호수아가 겪은 이 체험과 불타는 떨기나무 곁에서 모세가 겪은 체험(출 3:5) 사이에는 유사한 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제각기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떠맡기 시작할 때에 개인적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깊은 경외의 표시로서 신을 벗었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영적 지혜를 모두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발에 세상과의 접촉으로 인해 달라붙은 오물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존전에 서게 될 때는 모든 불결한 것들과 세상적인 것들은 제쳐 두어야만 한다”고 커크비(R. W. Kirkby)는 말한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22).

 

여호수아는 하늘의 방문자가 자신의 군사 작전을 돕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대신에 지휘자가 되기 위하여 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만한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 돕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주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이제 눈에 뵈지 않는 새로운 총사령관(Supreme Com-mander)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주님을 단지 우리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협력자로서만 생각해서는 절대 안된다. 우리는 그분을 지휘관으로 인정하고 그분과 상의해야 한다. 그분께서는 다른 역할은 맡으려고 하시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인 힘과 지혜를 가지고는 죄가 많은 우리의 대적을 당할 수 없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 대적의 패배를 의미한다. 여호수아가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고 말했을 때처럼, 우리가 그리스도께 합당한 자리를 내어드릴 때에야 비로소 그분께서는 능하신 일을 행하실 수 있다.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의 관심은 자신의 명성이 아니라 민족의 안녕과 여리고 함락이었다. 새로운 지도자에게 굴복하는 것을 거절했다면 그는 여전히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것이었다. 그 상황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방책만으로 그 상황에 마주 서야 했을 것이다. 그는 군사 전략을 공부하고 성벽을 오르는 방법에 대하여 배웠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지휘권을 이양하고 전락과 전술을 지시하는 사령관에게 접촉하며 그분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특정한 때에 그들이 필요로 하는 분이 되신다는 것은 흥미있는 사실이다. 순례자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여행자로 나타내셨으며, 저항하는 야곱에게는 씨름꾼으로, 군인이었던 여호수아에게는 검을 빼어 든 전사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고난당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위로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의 현재 필요를 보충하시는 분이 되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휘관은 이제 무방비 상태의 민족을 보호할 책임을 지게 되었다. 여호수아는 자신을 억누르던 짐을 벗고 홀가분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지휘권을 양보하는 것과 행동으로 그것을 이행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머지 않아서 그 시험은 닥치게 되었다. 그 시험은 결코 시간이 오래 지난 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 지휘관이 제시한 비정통적인 전략은 상식에도 어긋나고 전쟁 경험상으로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난공불락의 성벽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행진하며 고함을 치라는 전략에 대하여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 주님의 명령은 때때로 이상하게 여겨진다. 그리고 그 명령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그런 명령을 하신 이유나 그 명령을 따를 경우에 나타나는 결과를 항상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때로 그 명령은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 한 예로, 손 마른 사람에게 그 손을 내밀라고 명령하신 것이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그러나 믿음은 '불가능한 것들을 비웃으며' 순종은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는다.”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새로운 시험에 부딪치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 여호수아는 발을 내딛는 곳에서 승리를 얻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는 더 이상 심적인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걱정이 사라졌고 승리의 확신이 그의 마음 속에 자리잡았다.

 

우리는 이 사건에서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여러 가지 귀중한 교훈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대적 앞에서 용감하게 설 수 있기 전에 여호수아는 먼저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서 있어야 했다. 그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임무로부터 시선을 돌려 능치 못한 일이 없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방해가 되는 힘에 너무 몰두하다 보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여호수아는 그의 지휘권을 양보래야 했고, 통솔권을 타인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즉 자신의 전략과 전술이 지휘관의 전략과 전술과 일치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것들을 포기해야 했던 것이다. 이 개인적인 결정의 여부에 전반적인 전쟁의 승패가 달려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순간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revelation)는 점진적이며 그분께서는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그리고 그 새로운 계시는 각기 새로운 필요를 충족시킨다. 새로운 순종의 행위는 그 이상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지휘권 이양과 함께 여호수아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할 책임도 넘겨 주었다. 이 시점까지 그는 만사를 자신의 지혜와 기술에 의존했다. 그러나 그 결정적 순간 이후에 그는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고 믿음을 가지고 낙관할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여호수아는 여전히 지도자였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통솔하는 것을 지원하셨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볼 때 그는 순종하는 자세로 사령관의 작전 계획을 구하며 그 계획을 신중하게 수행하는 종이었다.

 

여리고와 같이 만만치 않은 장벽이 있는 곳마다 우리에게는 경험이 많고 패배한 적이 없는 지휘관이 계신다. 우리는 홀로 싸울 필요가 없다. 그분께서는 제 3세력, 즉 그분께서 지휘하시는 하늘의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이실 수 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난공불락의 여리고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지 말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쉼을 얻자.

 

 

 

제8장 여리고 정복

 

 

여리고 정복에서 찾아 볼 수 있는 한 가지 궁극적인 교훈이 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전쟁의 진짜 상대는 가나안족속이 아니었다. 그 싸움은 하나님의 백성과의 싸움이었다... 나팔을 부는 것과 일곱이라는 수의 목록은 작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정말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여리고를 파괴시키기 위하여 온 몸의 힘을 집중시키고 계셨던 것은 아니었다. 그분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여리고를 없애 버릴 수 있으셨을 것이다.

진짜 여리고 전쟁은 인간의 마음을 상대로 한 것이지 한 도시의 성벽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족속을 정복하려고 하셨다기보다 이스라엘 족속을 정복하려고 하셨던 잣이다.

-폴 톰스

 

 

일격을 가하지도 않고

 

나는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네.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나는 하나님의 방패 아래 안식한다네.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나는 나라를 얻기 위하여 간다네,

나는 그분을 통하여 승리를 얻을 것이니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전투 대열이 펼쳐지기 전에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떠벌리는 대적이 죽기 전에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 나는 승리를 거둔다네.

나는 계속 진군하며 믿으오 외칠 것이라네.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나는 더 이상 보게 해 달라고 요청치 않을 것이네.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그분의 약속은 나에게 충분하다네,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대적은 강하고 성벽이 높을지라도

나는 외치리라, 그 분이 승리를 주신다고.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왜 하나님으로부터 표적을 구해야 하는가?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나는 보혈을 신뢰할 수 있지 않은가?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그분 말씀 굳게 잡고 나는 대적 앞에 선다네.

그리고 일격을 가하지도 않고 외침으로써 승리를 거둔다네.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조셉 파커-

 

 

여호수아 6장 1-20절, 시편 44편, 에베소서 6장 10-18절, 히브리서 11장 30절

 

여호수아는 틀림없이 그의 총지휘관과의 상의를 거쳐 전반적인 작전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나누어서 정복하라”는 고대 전투 전략을 채택하여 그는 예루살렘 서쪽인 그 땅의 중심부에 쐐기를 박을 작정이었다. 그 후에 그는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그곳의 적을 격멸하고, 다음에 남아 있는 북쪽의 군대를 쓸어 버릴 계획을 세웠다. 이와 똑같은 전략을 채택함으로써 알린비(Allenby)장군은 제1차 세계 대전 때 팔레스틴을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은 그의 탁월한 군사적 재능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목적을 염두에 두시고 현재의 상황을 계획하셨다.

첫째, 그 상황은 그 반항적인 민족이 하나님께 순종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시험이 될 것이다.

둘째, 그 상황은 그 땅 족속들의 마음 속에 이미 자리잡은 두려움을 고조시킬 것이다.

세째, 군사적인 무용이나 개입없이 승리를 얻게 될 때 그 상황은 여리고를 정복한 것이 전적으로 믿음의 승리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신시켜 줄 것이다.

그 사령관이 제안한 동키호테식 전략의 타당성에 대하여 그들이 의문을 제기했다고 하더라도 잘못이라고 나무랄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온전히 순종했다. 믿음으로써 비이성적인 계획처럼 여겨지는 것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은 그들의 영예이다.

 

이 믿음의 모험과 승리에서 우리는 사단과 어두움의 권세를 상대로 하는 우리의 영적 싸움을 위한 중요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의지한 믿음이 있었다. 전반적인 작전은 극도의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믿음의 모험이었다. 형세가 불리한 상황에서 그들은 분명히 입증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고 있었다. 제안된 전락은 수단과 목적 사이에 어떤 명백한 연관이 있는지 밝혀 주지 않았다. 어떤 무기도 사용하지 말아야 했고, 성벽의 밑에 갱도를 팔 목적으로 공병을 투입하지도 말아야 했으며, 어떤 공격도 감행해서는 안 되었다.

 

 

”믿음으로 여리고 성벽이 무너졌다”(히 11:30).

승리는 오직 하나님의 개입만을 통하여 주어졌다. 그들이 뒤에 있는 다리들을 불사르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모든 것을 걸었을 때 그분께서 비로소 그들에게 승리의 약속을 되풀이하셨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수 6:2).

강조체로 된 ”붙였으니”의 시제에 주목하라. 하나님 입장에서 볼 때 승리는 이미 성취된 사실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요새를 둘러싼 것은 단순히 군사적인 행동이라기보다 종교적인 행동이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히브리 사람들이 여리고 군대보다 더 용감했거나, 숫적으로 우세했거나, 더 뛰어난 장비를 갖추었거나, 혹은 더 뛰어난 편제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었으며 그분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결과였다. 여호수아의 고무적인 통솔하에, 새로 발견된 민족의 믿음이 역사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그들은 보상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되게 하라, 하나님의 힘으로.

우리는 닥칠 싸움을 대비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시는 그분 안에서 강하고

불경건한 세력과 싸울 때

우리는 그분께서 주신 무기를 잡는다-

하늘의 빛과 진리와 사랑을.

-J G 휘티어

 

● 그들은 믿음으로 무조건 복종했다

 

보이지 않는 지휘관의 명령은 엿새 동안 매일 한 번씩 성 주위를 돌고 제 7일에는 일곱 번 돌라는 것이었는데(수 6:3-4), 이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는 데 상당한 부담이 되는 명령이었다.

하나님께서 하신 그 날의 명령을 백성들이 직접 듣거나 새로운 지휘관을 그들이 직접 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지도자 여호수아가 솔선해야 했고, 자신의 믿음과 낙관적 전망을 그들에게 주입시켜야 했다. 하급자에게 믿음을 심어 주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책임 가운데 하나이다.

불신과 불순종은 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방해한다. 예수께서는 고향에서 ”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마 13:58)고 기록되어 있다. 믿음은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경신(輕信)이 아니다.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여호와의 명령이 아무리 불가사의하고 무분별하게 여겨질지라도 여호수아는 의심하지 않고 순종하는 본을 보였다. 그리고 목적을 이루는 데 수단이 부적절한 것처럼 여겨졌지만 주어진 약속을 의지하는 본도 보였다. 그가 독창성이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었지만, 믿음과 순종을 보일 수 있는 기회는 한이 없었다. 백성들이 그의 인도를 따라 이 기괴한 일을 했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능을 부여하셨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포위과 행진이라는 일의 비군사적인 성격은 은 나팔 대신에 어울리지 않는 양각 나팔을 불었다는 사실에 의해서 드러났다. 은 나팔은 전쟁하기 위하여 백성을 소집하는 데 사용되는 반면, 양각 나팔은 백성들에게 경배하라고 알리는 것이었다. 이로 보아, 그 싸움은 사람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성경에서건 그리스도인의 체험에서건 하나님께서 미리 자신의 명령의 정당함을 주장하시거나 그것을 설명하시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그렇게 하는 것은 믿음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요 13:7)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께서는 믿음 생활의 원리를 밝히셨던 것이다.

 

● 그들은 믿음으로 훈련을 받았다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수 6:10, 14).

그들의 이러한 행진은 틀림없이 그 도시의 성벽 위에 있는 군대의 조롱을 받게 될 일이었다. 사람은 자신이 행하는 길이 지혜로운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타인의 조롱을 견디기가 힘들다.

 

불평하기로 유명한 민족에게 가장 좋은 시험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침묵의 훈련이 아니겠는가? 비웃거나, 조롱하거나, 전술이나 전락에 대해서 비난하는 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는 것 말이다. 만일 이 요새를 탈취하기 위하여 채택된 전략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제각기 자기의 견해를 자유롭게 말한다면 어떤 혼란이 일어났을지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억제하지 않고 비난과 의심을 발설하는 것은 곧 믿음의 신경을 마비시킬 것이다. 그들은 첫날부터 믿음없는 말을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불신은 엄청난 전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불신의 표현도 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영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을 고려한 뛰어난 지혜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대적은 그 점을 교묘히 이용하여 교두보를 구축했을 것이다.

 

여리고 거민들로 말한다면, 이삼 일이 지나자 행진하는 군대는 이미 사기가 저하된 거민들에게 이상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이스라엘의 용맹한 청년들은 그들의 전능하신 하나님을 마음으로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하게 지낼 수가 있었다. 그분께서는 매우 설득력 있게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셨다. 오늘날과 같은 전자 시대에는 조용한 장소를 발견하는 것이 어려울지라도 그리스도인의 생존에는 그러한 장소가 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2:20).

 

● 그들은 믿음으로 인내했다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제 칠 일 새벽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여전한 방식으로 성을 일곱 번 도니”(수 6:14-15).

열세번째로 성 주위를 도는 일이 거의 끝나갔지만 그 성벽은 여전히 견고했고 가까이 하기 어려웠다 ! 그 성벽이 조만간에 무너질 것 같다는 생각을 갖도록 해주는 시각적인 증거는 털끝만큼도 없었다.

이것은 가나안 사람들과 힘을 겨루어 보고자 안달하는 청년들에게 견디기 어려운 시험이었음에 틀림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은 우리 자신의 힘으로 매사를 처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이 사건은 오랫동안 응답되지 않는 기도에 관하여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응답되지 않는 기도가 많은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인 여리고 주위를 열세번째 도는 것을 아직 마무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펠리아 브라우닝(Ophelia Browning)은 이 진리를 매우 아름다운 말로 시에 옮겨서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아직 응답되지 않았는가, 그대가 이 여러 해 동안 마음 아파하며

입술로 간구했던 기도가?

믿음이 없어지기 시작하는가? 소망이 사라지고 있는가?

그리고 그대는 그 흘린 눈물들이 모두

헛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버지께서 그대의 기도를 듣지 못했다고 말하지 말라.

그대는

갈망하는 것을 언젠가 어느 곳에서 받게 될 것이다.

 

아직 응답되지 않았는가? 그대가 처음에

아버지의 보좌에 이 한 가지 간청을 드렸을 때

그대는 간청하는 시간조차 기다릴 수 없을 듯했다.

그것을 알리려는 그대의 마음이

너무 급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로 수년이 지났을지라도 실망하지 말라.

주님께서 언젠가 어느 곳에서

그대에게 응답하실 것이다.

 

아직 응답되지 않았는가? 아니,

응답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지 말라.

아마도 그대가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

그대의 기도가 처음에 발설되었을 때

사역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시작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니

만일 그대가 거기서 향을 계속 피운다면

그분의 영광을 언젠가 어느 곳에서 보게 될 것이라.

 

아직 응답되지 않았는가? 믿음은 응답되지 않는 일이 없다.

믿음의 발은 반석 위에 굳게 붙어 있다.

가장 거센 폭풍 속에서도 믿음은 겁내지 않고 서 있으며

가장 시끄러운 천둥 소리에도 떨지 않는다.

믿음은 전능자가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언젠가 어느 곳에서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라고 외친다.

 

● 그들은 믿음으로 승리의 외침을 외쳤다

 

그들이 열세번째로 성 주위를 도는 것을 완전히 마친 후에도 성벽은 그들이 믿음으로 외칠 때까지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이에 백성은 외치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매 백성이 나팔 소리를 듣는 동시에 크게 소리질러 외치니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수 6:16, 20).

그 요새는 그들의 눈 앞에서 무너졌고 여리고는 하나님의 심판에 노출되었고 무기력하게 되었다.

 

현실로 나타나기 전에 이미 기뻐하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여리고 성 주위를 돌던 발걸음 하나하나는 믿음에 의한 소유의 발걸음이었다. 그 사건은 오래 가둬 둔 감정을 마음대로 발산하여 힘차게 외침으로써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들의 외침은 하나님에 대한 내적인 신뢰의 외적인 표현이었다. 믿음의 외침은 벽에 붕괴의 조짐이 보이기 전에 있었던 것이지 그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사후에 외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두번째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들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모든 것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위협하는 벽을 에워싸라

조용한 기도로써, 그리고 부르라-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승자의 찬양 노래를.

그것은 이루어질 것이다 ! 믿음은 확신한다.

주님 안에서 그대의 태산에 도전하라.

-작가 미상

 

믿음의 외침에 관한 뛰어난 실례(實例)로써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의 장인 로버트 모제트(Robert Moffatt)를 들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모페트는 베추아나랜드[Bechuanaland:영연방의 하나로 남아프리카에 있는 공화국이며 현재는 보츠와나(Botswana)라고 불린다

 

 

 

 

-역자 주]에서 선교 사역을 했지만 눈에 띄는 결과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에 그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우편물을 보내고 받는 데는 6개월이 걸렸다. 어느 해는 그의 모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에게 무엇을 보내는게 좋을지 문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 때까지 단 한 사람의 영혼도 구령(救靈)하지 못했지만 모페트는 뛰어난 믿음으로 ”성찬기”가 필요하다는 내용의 답장을 써 보냈다. 성찬기는 크리스마스에 도착되었는데 그것이 사용되었겠는가? 물론 그것은 사용되었다 ! 그 편지는 그가 칠 년동안 그의 여리고를 에워싼 후에 외친 믿음의 외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신뢰한 종을 실망시키실 수 없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에 많은 새신자들이 그 선교사와 함께 참여했다.

 

전투 대열이 펼쳐지기 전에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떠벌리는 대적이 죽기 전에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싸움이 시작되기도 전 나는 승리를 거둔다네.

나는 계속 진군하며 믿으며 외칠 것이라네.

예수가 지금 나를 구원하시네.

-죠셉 파커

 

그 성벽이 붕괴한 정확한 원인은 기록되지 않았으나 한 가지 점만은 불명하다. 대부분의 하나님의 이적이 그러하듯이 그것은 이적일 뿐만 아니라 수수께끼였다.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 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3).

그 사실은 또 다른 사항, 즉 여리고를 이스라엘에게 붙이심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성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도시의 히브리어 이름은 ”노란”(yellow)을 뜻하는데, 그것은 달과 달의 여신을 숭배한다는 것과 같은 뜻으로 생각된다. 이 여신은 페니키아인의 아스다롯(Apshtoreth 혹은 Asstarte), 헬라인의 아프로디테(Ahrodite), 그리고 로마인의 비너스(Venus)와 같은 것이다. 각 나라마다 이 여신 숭배는 '음탕'이란 말과 동의어가 되었다.

 

성벽 붕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어 왔다. 성벽이 그 위에있는 사람들의 무게를 감당치 못했다는 견해, 군대가 보조를 맞추어 성주위를 행진한 결과라는 견해, 오페라 가수가 어떤 노래를 부를 때 유리창이 흔들리는 것같이 음파의 진동 때문에 무너졌다는 견해가 그 중 일부이다. 그 곳에서 1930년에 발생한 지진도 비슷한 결과를 초래했다면 그 외관상의 이적은 하나님께서 자연 현상을 초자연적으로 사용하신 결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현상에 대하여 어떤 설명을 제시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기록을 믿는다면, 그것이 순종하는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강력한 개입이었다는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이 반드시 설명되어야 한다. 첫번째는 성벽이 무너질 것에 대한 예언(수 6:5)과 그 성벽이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던 방법대로, 그리고 정하신 순간에 무너졌다는 사실이다. 무엇이라고 말하건 간에 그것은 타이밍(timing)의 이적이다.

두번째로 설명되어야 할 것은 기생 라합의 집이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든 성벽이 무너졌다는 사실이다(수 6:20-25). 지진이 성벽 붕괴의 원인이 될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진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비록 그 원인이 지진이었다고 하더라도 라합과 그녀의 가족, 그리고 그 집에는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

 

● 그들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여호와께서는 승리를 거둔 군대에게 여리고로부터 탈취한 물건들은 조금도 가지지 말라고 명시하셨다. ”너희는 바칠 물건을 스스로 삼가라 너희가 그것을 바친 후에 그 바친 어느 것이든지 취하면... 화를 당케 될까 두려워하노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수 6:18-19).

그러므로 그들은 순종하여 ”은금과 동철 기구는 여호와의 집 곳간에” 두었다(수 6:24). 마치 그들이 승리를 거두기라도 한 것처럼 그 승리에 의해 덕을 보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들은 그 저주받은 도시에 속한 것으로 부요를 누리지 말아야 했다. 그들은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은 믿음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히 11:30).

 

그 이적은 두 가지 목적을 이루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감을 심어 주었고, 그로 말미암아 그들은 장기화되고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 분명한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 또한 그 이적은 이미 사기가 저하된 대적의 마음에 더 큰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들의 패배에 심리적인 원인이 되었다.

여리고에 닥친 그 혹독한 심판은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 쌍방에게 하나님께서 다신교(多神敎)와 그것에 수반되는 모든 도덕적인 타락을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시각적인 증거가 되었다. 데이비스(J. J. Davis)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가나안 족속과 같이 된다면 그들도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여러 차례에 걸쳐 받았다. 그러므로 이 명령과 그것의 성취는 신약성경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따지고 보면 성경 전체의 신학적이며 도덕적인 원리들을 보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분께서는 죄가 처벌되기를 요구하신다. 주님께서는 죄가 어디에서 발견되건 죄를 심판할 권리를 가지고 계신다. 그 심판은 한 도시의 조속한 멸망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최후 심판의 날에 죄인을 정죄하는 것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어떤 죄인이 수명을 온전하게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 덕분이다.”

 

이 고무적인 승리를 둘러싼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인 여리고를 향해서 믿음의 외침을 외치는 일만 남았다. 일단 우리가 우리의 요단을 건너 우리 자신의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당장 마귀와 또 굳게 방비하고 있는 그의 무리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과 싸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의 방법뿐이다.

무엇이 우리의 개인적인 여리고인가? 자백하지 않은 죄인가? 가족이나 친구들을 위한 응답받지 못한 기도인가? 어떤 어려운 교회 문제나 전도 문제인가? 해결될 것 같지 않은 부부간의 어떤 불화인가? 어떤 잘못된 관계나 억누를 수 없는 죄인가? 심리적인 결점인가? 어떤 배상 행위인가? 두려움의 여리고인가?

 

당신의 여리고는 노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가? 고향에서 전도집회를 했을 때, 깊은 죄책감에 사로잡힌 어떤 청년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이 어떤 소송에서 거짓 증거를 하여 상당한 배상금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그 일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에 대해 조언을 요청했다.

나는 당신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기를 원한다면 자기 죄를 자백하고 반환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그에게 말했다. 그는 무척 두려워했고망설였다. 그러나 내가 함께 가주겠다고 하자 그는 피해를 본 보험회사 사무실에 찾아가겠다고 했다.

보험회사의 담당자는, 이 일이 다른 도시에 있는 본사와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상의해 보아야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 청년은 가능한 범위 내에서 상환을 하겠다고 제의했다.

 

며칠 후에 우리는 보험회사로 나오라는 소환장을 받았다. 그 책임자는 본사로부터 경고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 청년에게 한동안 잊지 못할 그런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그는 상환에 대해서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무실을 나가려고 일어나자, 그 청년을 세게 걷어차며 ”또 다시 그런 일을 하면 이처럼 쉽게 벗어나지 못할 줄 알아”하고 소리쳤다. 그 청년은 이 일을 통하여 교훈을 얻었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자 존경받는 시민이 되었다.

당신은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가 ?

 

실현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습니다

여기 내 안에서 죄의 지배가 그친다는 것은.

그러나 그것은 실현될 것이며, 나는

그렇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여, 나는 당신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만일 당신에게 하기 어려운 일이 하나도 없다면

내게도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는

또한 사람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께는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내가 완전히 새로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또 다시 지음을 받고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때

모든 일이 내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는

또한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 그리스도께는

모든 일이 가능합니다.

이제 당신의 권능을 널리 발산하시어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이 살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이 시간 나에게 입증하여 주소서.

사랑의 유쾌한 전능을.

-찰스 웨슬레이

 

오늘 당신으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당신의 여리고에 직면한 채 서 있다면, 거기에서 시선을 돌려 당신의 지휘관을 바라보라. 그분께서는 당신의 문제를 알고 계시며 승리를 약속하셨다. 바울이 자신의 여리고를 직면했을 때 말했던 것같이 말하라.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하나님께서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라고 명하고 계시는가? 그러면 우리는 그 총지휘관에게 새롭게 복종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실 수 있는 일들에 대하여 우리가 믿음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평범이라는 저급한 수준에서 지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자.

 

우리 함께 윌리암 캐리(William Carey)의 비젼을 되찾도록 하자. 그가 최초에 품었던 꿈은 성경을 벵골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성경을 인도의 주요한 언어들로 번역하라”고 말씀하시는 것같이 여겨졌다.

근대 선교 사역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그의 유명한 노팅엄(Nottingha-m) 설교가 생생하게 머리 속에 떠오른다. ”너는 이보다 더 큰 일을 볼 것이다. 너의 장막 터를 넓히라!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라! 너의 줄을 길게 하라!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하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일들을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 큰 일들을 시도하라 ! 보다 과감한 계획을 세우라! 보다 넓은 세상에서 지내라! 깊은 곳으로 나아가라 !”

 

그 음성은 그를 통하여 울렸다. 그 비젼은 마음을 이끄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 비젼을 보고 그 음성을 들었는가? 당신은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겠는가 ?

 

 

 

제9장 약속의 땅의 위험들

 

 

아이의 함락 과정에서 사건의 전개는 여리고에서 벌어졌던 것과 아주 딴판이었다. 여리고에서는 성벽이 무너져 내린 이적이 있었다. 그러나 아이에서는 어떤 이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족속은 전쟁이라는 정상적인 과정을 통하여 그 성을 정복해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기계적인 분이 아니라 인격적인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을 똑같은 방법으로 처리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어떤 특정한 방법으로 행하셨다고 해서 다른 때에도 기계와 같이 똑같이 행동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유 의사대로 행하신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하신다. 여리고에서는 이적이 나타났지만 아이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프란시스 쉐퍼

 

 

내 영혼아, 정신을 차리라.

수만 대적이 나타났다.

죄의 군대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너를 하늘에서 끌어내리려고.

 

오, 깨어 싸우고 기도하라.

전쟁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

매일 담대하게 싸움을 재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라.

 

결코 승리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너의 갑주를 벗어 놓지도 말라.

믿음의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네가 면류관을 얻을 때까지.

-조오지 히드-

 

 

여호수아 7장 1-26절, 8장 1-23절, 9장 1-21절, 10장 1-15절, 사도행전 5장 1-10절

 

히브리인들은 새로운 고향땅의 현저한 특징이 투쟁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이 결국에는 승리로 끝날 투쟁이라는 것이었다. 가나안 족속과 부딪힐 때까지 그들은 싸움이라는 것을 거의 몰랐었다. 광야에서 자그마한 충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본격적으로 그리고 대규모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따로따로 떨어진 싸움이 아니라 하나의 장기전이었다.

약속의 땅에서의 생활이 투쟁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곧 실망하게 될 것이다. 약속의 땅에서도 시험(temptation)의 횟수는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교묘하고 더 강력한 어떤 시험이 있다.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은 이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어렵다.

그것은 인간 영혼의 한 가지 목적을 실현하고

온전하게 하는 단순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늘 하기 힘든 일인 것이다.

 

차이점이라면, 가나안에서는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의 지휘 하에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투쟁으로부터의 안식의 생활이 아니라 투쟁 안에서의 안식의 생활이다. 가나안에서 보낸 처음 칠 년동안 이스라엘은 오직 한 싸움에서만 패배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과실과 불순종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의 약속의 땅에서 신자는 광야에서 세상적인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들어 보지도 못했던 영적 대적들을 곧 만나게 된다. 바울은 그들을 다음과 같이 생생한 말로 묘사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엡 6:12-13).

 

신약의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상징을 사용한다면, 애굽에서의투쟁은 세상을 상대로 한 것이다. 광야에서 아말렉 족속과 투쟁한 것은 육신을 상대로 한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에서의 투쟁은 마귀와 그의 무리를 상대로 한 것이다. 마귀와 그의 무리는 신자가 그리스도인의 경험에서 하늘의 영역에 들어가거나 계속 그 영역에 머무르는 것을 완강하게 방해하며,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이스라엘이 봉착했던 특별한 위험들은 어떤 것이었는가?

● 주제넘음의 위험-아이(수 7:1-26)

 

아이는 여리고에서 31km정도 떨어진 곳의 조그마한 요새였다. 그러나 아이성은 그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전략적인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 도성은 북부 도로를 보호하며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승리를 기대했던 것은 아주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초자연적인 지도자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수혜자(受惠者)들이었다. 그들은 요단강과 여리고에서 두 차례나 주목할 만한 승리를 이미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서 당신의 권능을 나타내셨다.

이러한 성공들로 우쭐해졌기 때문에 그들은 아이성도 손쉽게 점령할 수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쓰디쓴 경험을 통해서, 불순종과 죄가 승리를 얻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교훈을 깨우쳐야 했다.

 

정찰을 위해 미리 파견된 정탐들은 아이의 군사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군대의 일부만 보내 그 성을 공격할 것을 권고했다. 여호수아는 그들의 충고대로 행했다. 그것은 정당한 권고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나중에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은 옷을 찢고 티끌을 머리에 무릅쓴 채 땅에 엎드렸고, 아이로부터의 퇴각로에는 서른 여섯 사람의 시체가 널려 있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대적 앞께서 후퇴했다.

하나님의 거듭된 약속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시는 것으로 느껴졌다. 그 비극적인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그 약속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들은 우리처럼, 하나님이 없이는 가장 작은 난관도 감당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얻어야 했다.

 

여호수아는 당황하고 낙심한 나머지 믿음이 흔들리게 되었고, 절망에 빠졌다. 그들의 대적은 그 패배 소식을 듣고 사기가 오를 것이 아닌가 ! 한번 패하게 되면 다음에도 패하게 될 것이다.

 

 

”주여 이스라엘이 그 대적 앞에서 돌아섰으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가나안 사람과 이 땅 모든 거민이 이를 듣고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 이름을 세상에서 끊으리니 주의 크신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하시려나이까”(수 7:8-9).

이렇게 심리적인 충격을 받고 있을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일어나라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렸느냐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곧 그들이 바친 물건을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 자기 기구 가운데 두었느니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자기 대적을 능히 당치 못하고 그 앞에서 돌아섰나니... 그 바친 것을 너희 중에서 멸하지 아니하면 내가 다시는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수 7:10-12).

 

요컨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너희는 행동해야 할 자가 바로 나인 양 말한다. 행동해야 할 자는 내가 아니라 바로 너희이다! 일어서라! 백성을 정결케 하라. 죄를 찾아내서 처리하라!”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앉아서 엉뚱한 비난을 받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겸손과 기도는 그 자체로서는 좋고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개인 생활의 죄나 민족의 죄를 심판하고 처리하는 것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이 패배가 민족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면서 거둔 영광스러운 승리를 바로 뒤따랐다는 사실은 무척 중요하다.

 

신약성경에서 이 사건과 상응하는 것은 새로운 교회 시대가 도래했을 때 비슷한 죄를 범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임한 심판이다(행 5:1-10). 이 두 경우 모두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관점에서 본 탐욕과 불순종의 심각성에 대하여 간담이 서늘할 정도로 교훈하셨다. 그분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행동의 심각성이나 심판의 확실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깨닫도록 하셨다. 70인역 여호수아서에서 아간의 죄를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단어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나타내는 데 쓰인 단어와 동일하다는 점은 흥미가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진 것에서 일부를 취했으며, 그들의 죄는 비슷한 심판을 초래했다.

 

여리고를 공격하기 전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여서 그 도시로부터 얻게 될 약탈물을 전부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했다. 아간도 그결정에 동의했다. 그러나 은금과 멋진 바벨론산(産) 외투를 보자 그의 태도는 돌변했다.

”그는 보고... 탐내고... 피하고...-숨겼다.”

바로 그 네 개의 동사는 그 이후로도 다른 많은 사람들의 파멸을 초래했다. 금과 은은 항상 탐심의 초점이 된다. 멋진 의복이 남에게 돋보이고자 하는 아간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의복은 진보와 성공의 상징이었다.

 

그의 죄로 말미암은 비극적인 결과는 외견상의 심각성에 비례한 것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건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이 패배한 원인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여리고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쭐해졌다. 대적을 과소평가한 나머지 그들은 지휘관과 상의하지도 않고 군대 일부만을 보낼 것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가장 위험한 때는 이렇게 최근의 승리로 우쭐하고 있을 때이다.

또 다른 패인(敗因)은 기도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여호수아가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부적당한 때에 기도했다는 것이다. 그가 여리고를 위해서 준비했던 것같이 아이를 위해서 준비했었더라면 사정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패인이 전적으로 아간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호수아도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싸움을 하기 전에 그의 총지휘관과 상의하여 그의 전략을 전달받는 것을 무시했다.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보다 주변형세와 정탐꾼의 충고에 따라 행동했다. 그는 기도했지만 부적당한 때에 기도했던 것이다.

정탐꾼들도 잘못을 저질렀다. 그들의 임무는 정탐하고 그 결과를 여호수아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지휘관의 특권을 가로채고 전략을 제시했다. 약탈물 중에서 지극히 적은 일부만을 취했기 때문에 그의 죄는 가볍게 여겨진다. 그러나 그 자신과 민족에게 끼친 영향으로 판단해 볼때 그 죄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마음과 자신의 장막과 자신의 가족에게만(만일 가족이 공모했다면) 국한된 은밀한 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죄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은밀한 죄의 결과 또한 널리 알려지게 된다.

 

 

아간의 장막 안에 있는 땅과 아이로부터의 퇴각로에 널려진 서른 여섯사람의 시체 사이에는 외적으로는 어떤 분명한 연관이 없었지만, 사실상 그것들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그것은 민족 전체의 사기가 저하되게 만든 한 숨겨진 원인이었으며, 그 민족은 그의 은밀한 죄 때문에 일시적으로 기동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아. 나로다! 은밀한 죄가

유혹하며 역사하는 곳은.

그것에게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는 지극히 잘못된 마음 !

그것은 정녕 불행을

초래하리라.

한밤중에 내리는 차가운 서리처럼

봄의 꽃봉오리를 시들게 하리라.

 

오, 숨겨진 소중한 욕정이여

칼집에 꽂혀진 칼 위에 생긴

소량의 녹처럼-하나님과 나에게만 알려져 있구나.

무슨 소용이 있는가.

칼집에 들러 붙어

전쟁 날에 쓸 수 없는 무기라면?

그리고 나는 너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지 않았는가?

-월터 스미스

 

그것은 계획적인 죄였다. 왜냐하면 그는 그 죄의 심각성과 결과에 대하여 적절한 경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고립된 채 죄를 범할 수 없다. 아간의 죄는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범한 것이었지만, 또한 그의 가족, 그의 족속, 그리고 그의 민족에게 범한 것이기도 했다. 그 죄는 그의 가족에게 비극을, 그의 족속에게 치욕을, 그의 민족에게 부끄러움을, 그리고 하나님께 불명예를 안겨 주었다. 새끼 손가락에 주입한 한 방울의 독은 몸의 각 지체에 영향을 끼친다.

 

부정하건 공정하건 한번 행해진 행동은

반드시 어디엔가 남긴다.

축복이나 저주로서 그리고 대개는

매우 약하거나 매우 강하게그 뒤에 올 행동들에 대한,

유령의 손가락으로 쓴 기록을.

-H. W. 롱펠로우

 

죄사함과 회복과 새로운 승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완전하고 굴욕적인 패배는 없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어떠한 실패도 최종적인 것이 될 필요는 없다. 이스라엘이 초기의 패배로부터 회복하여 계속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을 알면 죄와 사단을 상대로 하여 싸움을 하다가 패배를 맛보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격려가 된다.

이제 회개한 여호수아는 그가 일시적으로 무시했던, 보이지 않는 지휘관보다 낮은 지위로 신속하게 다시 돌아갔다. 한번 더 그는 그분의 전투전략을 구했다.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지휘권을 잡으셨고,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승리를 위한 제반 여건이 조성되었다. 죄를 범한 사람이 정죄되었고, 그는 자백을 했지만 심판을 모면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대상이 누구였는가에 대해서는 성경 해석자들 간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심판 집행에 관한 상경 구절들을 살펴보라.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세라의 아들 아간을 잡고 그 은과 외투와 금덩이와 그 아들들과 딸들과 소들과 나귀들과 양들과 장막과 무릇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고 아골 골짜기로 가서 여호수아가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하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치고 그것들도 돌로 치고 불사르고 그(아간) 위에 돌무더기를 크게 쌓았더니”(수 7:25-26).

 

아간이 돌에 맞은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족도 모두 돌에 맞았고 화형을 당했는가? 본문은 몇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 위대한 히브리 학자 알프레드 에델샤임(Alfred Edershelm)박사는 반드시 그의 아들들과 딸들도 그와 함께 돌에 맞고 화형을 당했다고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25절의 3인칭 복수 ”그것들”(”그들”로 번역될 수도 있음-역자 주)은 짐승들만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외 다른 소유물들은 24절에서 언급되었다고 그는 주장했다. 본문의 기록은 그의 가족도 돌에 맞았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고, 다만, 이스라엘사람들이 그를 돌로 치고 그 위에 돌무더기를 쌓았다고 말한다 그 기록은 그의 가족이 관련되었다거나, 또 그가 가족들의 눈에 띄지 않게 훔친물건을 장막에 숨기는 것이 어려웠을 터이므로 그들이 그의 행동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일 그의 가족이 그와 똑같이 죽음을 당했다면 그들도 그의 행동에 관련되어 죄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간의 비극은, 만일 며칠만 더 기다릴 수 있었다면 그는 도적질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아이의 모든 약탈물을 취하라고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때가 이르기 전에 가로채려고 애쓰는 것은 비극으로 끝날 수가 있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비록 한 사람만 죄를 범했다고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축복과 승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죄는 교회의 발전과 승리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스스로 심판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든가 택일해야 한다. 참된 회개와, 죄 문제를 처리하는 것은 새로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타협의 위험 -기브온(수 9:1-27).

 

만일 아이에서의 패배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 주제넘음에 대하여 주의하라는 것이라면, 이스라엘과 기브온 거민이 얽히게 된 사건의 교훈은 함정과 타협을 주의하라는 것이다.

 

조용한 바다는 나름대로의 위험을 가지고 있다.

선원들아 주의하라 !

 

타협은 ”양립할 수 없는 것들로 최선을 만들려는 노력”(W. G. 스크로기) 또는 상호간에 원칙의 희생을 포함하는 양보를 함으로써 분쟁을 해결하는 것이라 정의되어 왔다. 그것은 대적이 사용하는 무기로서 교회에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아이 사람들을 대파한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승리로 우쭐해졌다. 침입자들의 거침없는 진군은 이제 인근 족속들로 하여금 부족 간의 싸움을 중지하고 그들의 공적(共敵)을 무찌르기 위하여 연합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동맹을 맺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개별적인 도시들을 상대했지만 이제는 강력한 동맹군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꾀가 많은 기브온 거민(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과 정면 충돌하는 것이 아무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고 계략을 쓰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만(歎滿) 전략을 채택했다.

그들은 먼 나라에서 온 것처럼 꾸민 화친(和親)의 사신을 보냈다. 해어진 전대, 해어진 가죽 포도주 부대, 낡은 옷과 신, 곰팡이 난 떡과 같은 물증은 그들의 이야기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같았으면 그들은 그 훌륭한 연기로 오스카 상이라도 받았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지도자들은 처음에는 의심을 품었지만, 시각적인 증거는 너무도 분명했다. 바로 여기에서 그들은 치명적인 실책을 저질렀다.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 어떻게 할 것을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수 9:14).

 

사단은 공개적으로 공격할 때보다 계교를 쓸 때 더 위험하며, 우는 사자로서 공격할 때보다 빛의 천사로서 올때 더 위험하다. 그의 공격은 다양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초대 교회는 네로의 박해를 받으면서도 번성했으나 콘스탄틴의 아첨에는 굴복했다. 여호수아는 또 하나의 고통스러운 교훈을 얻었다. 그는 아이 사건의 교훈을 충분히 체득하지 못했다.

기브온 거민이 한 이야기는 매우 타당하며 조리가 있었고, 여호와에 대한 그들의 언급은 매우 경건했으며, 그들의 외모도 그들의 주장과 매우 일치했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먼저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상황 증거를 받아들였다. 그의 확신은 하나님께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뛰어난 판단과 분별력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교회 지도자들이 범하는 실책이다. 그는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을 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을 하는 실책을 범했다(참조-사 11:3). 싸움을 할 때에는 모든 것을 의심하며, 대적의 계교를 탐지하기 위하여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사흘이 지난 후에 여호수아는 먼 곳에서 왔다는 그 여행자들이 바로 이웃에 사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그 당황스러움이 어떠했겠는가 ! 그러나 그 발견은 너무 늦었다. 그는 이미 그들과 엄숙한 언약을 맺은 후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미 맹세했던 말은 반드시 지킬 것을 당신의 백성에게 엄격하게 요구하신다. 몇년 후 하나님의 예언은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기브온 거민이 여호수아에게는 짐이 되었고 이스라엘에게는 지속적인 골치거리가 되었기 때문이다. 죄악과의 타협은 항상 문제와 불편을 초래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 더 자비를 베푸사 여호수아의 실패를 번복시키시고 저주로부터 축복을 이끌어 내셨다. 기브온 거민은 나무 패며 물긷는 자들이 되었다(수 9:23). 그들이 하는 일에는 번제를 위해 나무를 패고 전제를 위해 물을 긷는 것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세속적인 목적을 위하여 그러한 일들을 하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족속은 그러한 비천한 일들로부터 벗어나서 가나안 족속과의 싸움에 전념할 수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빈번히 우리가 한 타협의 결과가 그대로 나타나게 하시지만, 우리의 영적 발전을 돕기 위하여 그것을 사용하신다.

 

이 난처한 상황을 처리하심에 있어 또 한번 하나님의 은혜가 빛을 발한다. 그분께서는 기브온 족속들의 기만을 그들이 참 신앙과 접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드셨다. 기브온 성은 아론 자손에게 주어졌다. 후에 다윗은 거기에 성막을 세웠다. 느헤미야 시대에 기브온 족속은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하나님의 지혜는 그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 일은 성격상 이스라엘과 그들과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악한 행실에 물들게 될 가능성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

 

타협의 위험에 대한 또 다른 실례는 에브라임 지파의 행동에서 발견할수 있다. 그들은 대적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긴 했지만, 그들이 머무는 것을 허용하고 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훨씬 쉬웠던 것이다.

”그들이 게셀에 거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가나안사람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가운데 거하며 사역하는 종이 되니라”(수 16:10).

타협에 내포된 위험들은 에브라임 지파가 가나안 족속의 우상 숭배를 받아들이는 데 앞장을 섰다는 사실에서 보여진다.

 

의도적으로나 또는 무지 때문에 타협의 올무에 빠졌을지라도 회개와 회복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것은 사업 관계에서의 타협인가, 불신자와의 결혼인가, 아니면 어떤 다른 타협 관계인가? 그래도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아니다. 당신의 실수로 하여금 당신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도록 하라. 자신의 죄에 대한 기억조차도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끄는 데 사용될 수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신 23:5).

 

● 나태의 위험

 

”너희가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땅을 취하러 가기를 어느 때까지 지체하겠느냐”고 여호수아가 재촉했다(수 18:3).

이스라엘 민족이 전쟁에 지쳤고 게으름과 나태에 빠졌다는 사실은 이 구절의 상황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대적을 몰아내기 위하여 분발하는 것을 싫어했다. 광야에서의 생활과 비교하면 그들의 현재 상태는 엄청나게 좋아졌다. 그들은 점령한 도시들로부터 취한 약탈물로 부요하게 되었고 편안하고 아늑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안락과 풍부는 믿음의 친구가 아니다. 그들은 현재의 쾌락이라는 제단에 미래의 성취를 제물로 바쳤다. 이와 같이 그들은 그들의 기업을 경멸했고, 그들이 가진 특권의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생존에 그대로 만족해 버렸다.

 

동일한 유혹들이 약속의 땅에 있는 그리스도인을 괴롭히지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부드러운 일들에 대한 기묘한 사랑으로부터

손쉬운 선택들과 나약한 것들로부터

당신의 갈보리를 어둡게 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여, 나를 구원하소서.

-A. W. 카마이클

 

이상의 것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전쟁에서 직면했었고, 또 그리스도인이 그의 약속의 땅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기대해도 좋은 대표적인 위험들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벧호론 싸움(수 10:10)은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와 기브온에서의 교훈들을 충분히 숙지(熟知)했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이번에 그는 그의 지휘관이 명령을 내리셨을 때에만 공격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면 가나안 전체를 주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는 신중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의 기습 공격은 멋지게 성공했다. 그는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면서 그들이 그를 피하는 것을 보았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명예가 이 싸움에 걸려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대담하게 기도했다. 하나님께서는 낮의 길이를 연장하시고 파괴적인 큰 덩이 우박을 내리셔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정복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많은 승리를 쟁취하긴 했지만 그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은 결코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았다.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의 통솔력에 대하여 논평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8-9).

이스라엘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이상에 줄곧 미치지 못했다. 그들이 자신의 모든 기업을 다 소유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사실상 희년(禧年)은 한 번도 지켜지지 못했다. 그들이 그 땅에서 경험한 ”안식”은 항상 일시적인 것이었다. 참 안식, 즉 ”믿음의 안식”을 위해서는 하늘의 여호수아의 나타나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분만이 홀로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안식은 더 이상 미래로 미루어지지 않으며, 지금 여기에서 믿음의 응답으로 얻고 즐길 수 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 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히 4:1-3).

 

주여, 나는 믿습니다.

알려진 당신의 모든 백성에게 안식이 남아 있음을.

순수한 기쁨이 만연하고

당신 홀로 사랑받는 안식이.

 

그 안식 안에서, 우리 영혼이 갈망하는 모든 것은

위에 있는 것에 고정되고

그 안식 안에서, 두려움과 죄와 슬픔은 소멸되고

또 완전한 사랑에 의해서 쫓겨나리.

 

 

오, 지금 내가 이 안식을 알 수도 있다는 것을.

믿고 들어가라 !

구주여 어서 지금 권능을 주시고

나를 죄로부터 끊어지게 하소서.

-찰스 웨슬레이

 

 

 

제10장 소유의 원리들

 

 

요한복음에서 ”믿다”라는 단어는 50회 모두 ”영접하다”라는 단어로 대치할 수 있는데,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 사유(私有)하는 것은 영접하는(받는) 것이며 자신의 소유로 취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한 가운데에 있는 구절은 시편 81편 11절이라고 일컬어진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이 구절은 새 둥우리에서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입을 크게 벌린 조그마한 새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의 태도는 믿음의 기대와 사유(私有)이다. 어미새도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는다.

누가복음 15장에 묘사된 놀라운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12절). 탕자는 그의 뚜렷한 잘못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아버지의 말을 믿고 자신의 몫을 사유했다. 그러나 그의 형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염소새끼 한 마리 자기에게 주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비난하기까지 했다. 깊이 상처를 받은 아버지가 답변했다. ”얘야,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염소 새끼 한 마리조차 사유하지 못했었다. 차이점은 주었는가, 주지 않았는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유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있었다.

-오스왈드 샌더스

 

나는 곡식과 포도의 땅에 이르렀고

그 모든 부요가 값없이 내 것이 되었다.

여기 행복한 낯이 흐려짐 없이 빛나니

나의 모든 밤이 지나갔기 때문.

 

나의 구주께서 오셔서 나와 함께 걸으시고

달콤한 교제를 여기에서 우리는 나눈다.

그분께서 부드럽게 내 손잡아 이끄시니

이것이 천국의 국경 지이기 때문이다.

-에드가 페이지-

 

 

출애굽기 23장 27-33절, 민수기 32장 1-27절, 여호수아 2장 1-24절, 13장 1, 13절, 15장 63절

 

가나안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행위를 주관한 원리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적용되는 데 부족함이 없다. 이 서사시적(敍事詩的)인 전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으로서 우리의 영적 싸움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 정찰의 원리(수 2:1-24).

 

여호수아는 신중한 군대 지도자였다. 여리고는 가나안의 깊숙한 곳으로 향하는 통로를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도시는 그의 전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격 목표였다. 그래서 그는 정찰하여 그 결과를 보고하도록 두 명의 정탐을 보냈다. ”가서 그 땅, 특히 여리고를 엿보라”고 그는 지시했다. 그가 그들을 보낸 목적은 공격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공격할 방법과 시기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군사적인 전략에 의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답변은 믿음은 부주의함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소유했다는 것은 경계 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참된 믿음은 적절한 수단을 채택하는 것을 무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을 빙자하여, 신중히 경계하는 것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주제넘음이다.

두 사람의 정탐은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에 잠입했다. 그러나 그 요새에는 자체 보안 체계가 확립되어 있어서 그들의 잠입은 곧 발각되었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들이 라합의 집을 은신처로 선택했다는 것은 그녀와 그들 쌍방에게 뜻밖의 일이었다.

 

그 이야기의 중심 인물인 라합은 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녀는 기생이자 능란한 거짓말장이였다. 그러나 장래성이 없는 이 생활을 하는 그녀에게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믿음,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하나의 자질을 발견하셨다.

여기에서 자연히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 상황에서 라합의 거짓말은 정당한 것이었는가? 과연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가? 상황 윤리는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이 정당화될 수도 있다고 주장하곤 한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진리의 절대적인 기준을우리에게 전혀 제시하지 못하는 견해이다. 심판자는 누가 되어야 하는가?

 

이 상황과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것은, 라합이 거짓말과 부도덕을 일삼는 타락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났다는 점이다. 그녀는 거짓말을 두 가지 악행 사이의 선택으로 간주했다. 동양 윤리는 손님의 생명을 보호하는 것을 환대(歡待)의 행위이자 가장 고귀한 미덕의 하나로 간주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거짓말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는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도 정탐꾼들의 생명을 보호하실 수 있었다.

성경의 증거는 일관성이 있다. 모든 거짓말은 죄이며, 하나님께서는 결코 죄를 허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버리고...참된 것을 말하라”(엡 4:25)고 우리에게 권고하신다.

 

야고보는 라합에 대하여 좋게 언급한다.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약 2:25).

그러나 그녀를 칭찬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라합의 그런 행동은 죽음의 위험을 무릅쓴 것이었다. 그녀는 조국에 대한 충성과 새로이 발견한 하나님에 대한 충성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거짓말하는 것이 발각된다면 그녀는 그 즉시로 목숨을 잃게 되어 있었다. 야고보가 칭찬한 것은 그녀의 동감성과 비이기적인 행동이었지, 그녀의 거짓말과 속임수가 아니었다.

 

라합이 가나안 족속의 사기에 대하여 정탐꾼들에게 준 정보는 여호수아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수 2:9).

그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털어 놓았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11).

라합과 마찬가지로 다른 가나안 거민들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들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었고 똑같이 회개할 기회를 가졌지만 그것으로 인해 믿음을 가지지는 못했다. 라합만이 홀로 믿었고, 자비를 구했으며, 그것을 받았다. 비록 적대적(敵對的)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었을지라도 그녀는 자신이 이전에 경배하던 신들과 완전하게 다른 하나님을 믿었던 것이다.

 

라합은 참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고, 유다의 한 방백과 결혼하여 메시야의 선조가 되었으며, 히브리서 11장의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명부에 실린 믿음의 용사들 틈에 끼었으니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이보다 더 놀랍게 설명해 주는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신자들에게도, 정찰을 하며 대적의 전략에 말려들지 않도록 정신을 차리고 있으라는 권고가 주어졌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 몰아냄의 원리

 

가나안 족속과의 공존은 명백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 땅을 도시와 집들과 함께 소유할 수 있으려면 먼저 현재의 거주민들을 몰아내야 했다. 그것은 단호한 투쟁을 의미했다.

”내가... 그 땅의 거민을 네 손에 붙이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좇아낼지라”(출 23:31)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의 쓰라린 경험으로 입증되었듯이, 그들을 몰아내지 못할 경우 이스라엘은 끝없는 고난에 처해야 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3:55).

단 한 치의 땅도 양보해서는 안 되었다.

 

우리 각자는 마음 속에 가나안 일곱 족속과 상응하는 것을 품고 있다. 예수께서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라는 말씀으로 직선적으로 진단을 내리셨다. 만일 우리가 이 죄들이 머물 수 있는 지역과 방을 내어 주고 갈보리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룩하신 강력한 승리를 이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이스라엘 족속과 똑같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엡 4:22).

 

 

그러나 이 일은 우리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수백여 번 시도해 보았지만 번번히 실패하지 않았는가? 이 죄들은 전보다 더 완강하게 방어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는 이 일을 아무 도움도 없이 혼자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이스라엘과 우리에게 하신 그분의 약속이 있다.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그 땅으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출 23:23).

이스라엘은 그분의 도구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목적 성취를 위하여 힘을 공급하셨다. 그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을 몰아낸 만큼의 땅만을 소유했다.

 

● 사유(私有)의 원리(수 1:3/ 엡 1:3/ 벧후 1:3)

 

이 원리는 앞서도 언급했었지만, 이 문맥에서 좀더 살펴보는 것이 적절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긴요한 비결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단조롭고 좌절된 생활을 하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유의 기술을 깨우쳐서, 약속을 현실로 변화시키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것을 생활 가운데 그들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급격한 변화를 체험했다.

그 땅은 이미 주어진 것이었지만 한평 한평을 모두 개인적으로 소유해야 했다. 그 도성들은 전부터 거기에 있었지만 점령해서 얻어야 했다. 집들도 건축되어 있었지만 들어가서 살아야 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광활한 땅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농장에는 필요한 때에 가축에게 시원한 물을 공급하고, 동시에 가뭄 때에 낭비를 방지할 목적으로 마련된 구유가 있다.

그 구유는 단단한 강철 스프링이 밑에 깔린 단의 중앙에 세워진다. 가축이 그 단을 디디면 용수철이 눌리게 되고, 그 결과 밸브가 열려서 물이 구유 속으로 자유롭게 흘러서 들어간다. 그러므로 가축이 그 단 위에 머물러 있는 한 물은 계속 흐르게 된다. 반면에 가축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밸브가 닫히고 물의 흐름이 멈추게 된다. 물은 항상 거기에 공급될 수 있지만 가축에 의해 사유될 때에만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부요를 취할 수 있게 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언제라도 쓸 수 있는 무한한 공급품이지만 우리가 그 위에 발을 디딜 때에만 실제로 우리의 것이 된다.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1장 3절에서 엄청난 주장을 한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우리가 거룩한 생활을 하고 승리의 생활을 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중에서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되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 축복들 위에 믿음의 발을 디디지 않는다면, 그것을 부여받는 것만으로는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

 

펜실바니아 주의 이름은 윌리엄 펜(William Penn)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 그는 그 주의 인디언들에게 몹시 우호적이었고 그들의 비위를 잘맞추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가 하루 동안 걸을 수 있는 모든 땅을 그에게 선물로 주겠다고 약속했다. 펜은 그들의 말을 믿고 다음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어두워질 때까지 하루종일 열심히 걸었다. 황혼 때가 되어 그가 캠프로 돌아오자, 인디언 추장 중의 한 사람이 ”얼굴이 창백한 것을 보니 오늘 꽤 많이 걸었나 보군요”라고 짓궂게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기분이 상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의 신뢰심을 존경했다. 그가 그 날에 일주했던 땅이 지금의 필라델피아 도시이다.

 

정녕히 우리가 우리의 신실하신 하나님을 그 합당한 정도보다 더 적게 신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셨다고 확신시켜 주시는 축복들을 우리의 것으로 주장할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믿음대로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능력이 많으시고 아무리 하시고자 하여도 우리에게 신뢰가 부족한 것은 보충하실 수 없다.

 

● 점진(漸進)의 원리(출 23:29-30/ 신 7:22)

 

이스라엘 족속은 그 땅 전체를 한꺼번에 소유하라는 요구를 받지는 않았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좇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신 7:22).

얼핏 생각하면, 한꺼번에 혹은 적어도 빠른 시일 내에 가나안 족속들을 쫓아내거나 멸절시키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수적(數的)으로 적기 때문에 들짐승들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하리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그분께서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고 말씀하셨다(출 23:29-30). 하나님의 기대는 현실적이다.

 

신자의 생활에서의 성화(聖化) 작업도 역시 점진적이다. 영적인 성장에는 단계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룻밤 사이에 요한 웨슬레이(John Wesley)나 머레이 맥체인(Murray McCheyne)과 같은 거룩함의 단계에 뛰어오르는 것을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기대하신다(히 6:1). 땅의 소유에 대한 약속은 한 번에 한 걸음씩을 위한 약속이었다.

우리의 생활에는 정복되어야 하고 우리 주인에게 지배되어야 할 미개척지가 끝까지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성화(聖化)의 갈림길은 끝없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우리가 그분을 뵙고 그분과 같이 될 때(요일 3:2) 비로소 끝나게 될 것이다. 은혜 안에서의 성장은 중생(重生)과 같이 순간적인 것이 아니며, 그 때문에 우리는 항상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승리를 체험할 준비를 갖추었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 승리의 영역을 넓히실 것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말지니, 갑자기 일 분만에

모든 것이 성취되며 그 일이 끝날 것이라고,

이른 새벽에 시작할지라도

해질 때까지 끝내지는 못할 것이다.

-마이어즈

 

● 단념의 원리(신 7:2)

 

히브리인들은 애굽의 노예 생활을 영원히 뒤로 하고, 새로운 생활을 요구하는 새로운 땅에 들어가고 있었다. 요단강 바닥에서 취해진 열두 개의 돌(수 4:8)은 옛 이스라엘이 죽었다는 것을 상징했으며, 요단강 서편 즉 가나안 쪽에 쌓여진 새로운 돌 무더기는 그들이 새로운 백성이 되었다는 것을 증거했다. 바울이 표현한 것처럼 그들은 죽음을 쳐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다. 애굽의 옛 생활은 그 속박과 나쁜 영향과 함께 영원히 그들의 뒤에 놓여지게 되었다. 다시 흐른 요단강은 그들과 옛 생활을 분리시켜 놓았다. 만약 애굽의 죄악들이 스며들 수 있었다면 가나안의 죄악들을 쫓아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애굽에 대한 단념은 완전하고 최종적인 것이어야 했고, 가나안 사람들과 어떤 새로운 언약도 맺지 말아야 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신 7:2).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기라”(롬 6:11)는 명령이 주어졌다. 옛 생활의 요소가 남아 있도록 허락하는 것은 영적 진보를 지연시키는 것일 뿐이다. 기준을 낮추어서 주위 환경과 타협하는 세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 타락한 세상에서 결코 소금과 빛의 특성을 발휘할 수 없다. 우리의 세대에게 영적 영향력을 끼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단호한 단념의 표시로서 애굽과 가나안의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족속의 세력이, 완전하게는 아니더라도, 효과적으로 무너질 때까지 많은 싸움에서 자신의 백성을 승리로 이끄셨다. 그러나 그 주목할 만한 전쟁에 대한 기록은 우울한 반복구 때문에 손상되었다.

 

”그술 사람과 마아갓 사람은 이스라엘 자손이 쫓아내지 아니하였으므로 그술과 마아갓이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더라”(수 13:13).

”예루살렘 거민 여부스 사람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이 오늘날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하니라”(수 15:63).

”므낫세 자손이 그 성읍들의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매 가나안 사람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하였더니”(수 17:12).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의 남은 것은 매우 많도다”(수 13:1).

 

믿음과 노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가나안 사람들을 이스라엘 중에 남아 있도록 허락한 것은 재난을 초래한 실수였음이 입증되었다. 우리는 죄악에 대한 갈보리에서의 승리에서 우리의 몫을 주장하지 못할 때 우리도 비슷한 실수를 하며 비슷한 문제를 경험하게 된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라”(롬 6:14)는 확신 뒤에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든 권능이 놓여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굉장한 선물과 그들의 처분에 맡기셨던 자원을 고려해 볼 때, 그들이 자신의 온전한 기업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다.

 

우리의 영적인 특권 역시 우리가 실제적으로 누리는 부요보다 훨씬 큰 것이다. 우리가 용서와 죄사함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만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 상속인으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리려고 노력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의롭다 칭함 받았음에 대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면서도 실질적이고 점진적인 성화(聖化)를 경험하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우리는 거룩한 불만족을 나타내도록 할 것이며 우리의 영적 기업을 부분적으로 소유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도록 하자.

 

이스라엘이 부분적으로 기업을 소유한 것도 그릇된 것이었는데,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는 그보다 더 나쁜 위험에 빠져 하나님의 이상에 훨씬 미치지 못하게 되었다.

이 지파들은 현저한 승리들을 목격하고 난 후에도 줄곧 약속의 땅 근처에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요단 동편, 즉 광야 쪽에서 선택한 쾌적한 목축지를 달라고 모세에게 간청했다(수 1:12-15). 가나안 족속들이 진압될 때까지는 다른 지파와 함께 싸우겠다는 동의를 받아낸 후에 모세는 비로소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민 32:5-7, 16-37).

얼핏 보면, 그것은 무척 만족스러운 행동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형제들과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가나안이 아닌 애굽에 접한 땅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변경시키지 못했다. 오늘날 축복과 성취의 생활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세상과 더 가까운 곳에 살기로 작정하고 세상과 짝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나안을 향해 먼 여정을 떠나 그 경계 지방에 이른다. 그러나 완전한 복종과 순종의 요구가 너무 엄중하다. 약속의 땅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너무 많은 단념과 자기 부정을 포함한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으며 그들은 홍해를 건넜고 광야를 횡단했다. 그들은 그 땅의 열매를 맛보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발걸음을 떼어 놓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요단강을 안전하게 건너서가나안에 영구히 정착하지 못하고 가나안 근처에 정착하라는 유혹을 강하게 받는 것이다.

 

경계 지방에 거주한 이 사람들의 역사는 동일한 유혹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엄숙한 경고를 준다. 그들은 침략한 앗수르 군대의 수중에 제일 먼저 떨어져서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잡혀갔다 그 후에도 줄곧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걱정과 곤혹을 안겨 주었다. 가나안 땅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 땅 밖에 있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며 빈번하게 논쟁을 벌였기 때문에 서로 다른 두 민족처럼 되었다. 경계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은 항상 그의 방언 때문에 정체가 탄로나기 마련이다 ! 그는 순수한 가나안 언어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그리스도인 생활의 수준을 결정하는 자는 바로 우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두 지파와 반 지파에게 요단을 건널 것을 강요하지 않으셨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했고 그분께서는 그들의 선택을 재가(裁可)하셨다. 또한 그분께서는 축복을 우리에게 억지로 떠맡기시지도 않는다. 만일 우리가 결정적인 행동을 취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심은 대로 거두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지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시106:15)라고 기록되었다.

 

 

 

제11장 노년에 관한 낙관적 견해

 

 

갈렙은 광야에서의 곤고한 세월 동안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 여러 차례의 전진과 후퇴,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 백성들의 불평과 반항을 경험하고 목격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뜻만을 행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며 다른 어떤 지도자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어떤 목소리에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실천했다.

그는 완강한 사자 새끼라고 불리는 것이 그의 이름에 걸맞을 것이다. 모세와 아론에게 대항하는 어떤 음모에 그를 가담시키려고 해보았자 쓸모 없었다. 그는 모세에 대한 미리암의 비난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모압 여인들의 계교에 빠져들지 않았다. 항상 강하고 순결했으며 진실되고 고결했다. 그는 변덕스러운 바다 가운데 묵묵히 자리잡고 있는 바위와 같았으며, 변화무쌍한 구름이 덮이고 폭풍이 몰아치고 햇빛이 비취는 중에서도 항상 눈이 덮여 있는 산봉우리와 같았다. 그는 자신의 강한 성품으로 연약한 사람들을 감싸줄 수 있었고, 이스라엘의 선두에 서서 지휘하게 된 새로운 젊은 세대에게 정신적인 지주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F. B. 마이어

 

그리스도인이 두려워해야 할

숨겨진 힘을 가진 대적이 있나니

동종(同種)의 죄보다 더 교묘하고

마음에 더 소중히 여겨지는 것.

그것은 이기심의 힘이며

그것은 강퍅한 나(我)이다.

그래서 나의 주님이 내 안에 사실 수 있도록

나의 자아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옛날 아낙 자손과 같은

거인족이 지금도 있나니

자기 영광과 자기 신뢰와

자기 추구와 자기 의지이다.

이 힘센 아낙 자손들은 지금도

갈렙의 칼로 도륙되어야 한다.

하늘의 사랑이라는 헤브론 산지를

정복하여 얻을 수 있기 위해서는.

-A. B. 심프슨-

 

 

여호수아 14장 6-13절, 15장 14-19절

 

 

가나안은 대체로 정복되었다. 가나안 족속들의 동맹군은 남김없이 격파되었다. 그 영토를 전쟁에 지친 지파들에게 분배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의 기업에 들어가서 그것을 누릴 수 있게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자신의 기업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여호수아의 신실한 친구 갈렙이었다. 그의 아버지 여분네는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혈통을 이어받은 에돔족속의 일원 그나스사람이었다(창 36:11). 그는 유다지파에 합류했음이 분명하며, 훌의 딸과 결혼했다. 그러므로 갈렙은 어머니를 통하여 그 지파의 특권을 상속받았던 것이다.

그가 출생으로 말미암은 차별의 장벽을 부순 외국인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가 이스라엘 테두리 너머로 멀리 미쳤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스미쓰 사전」(Smith's Dictionary)은 그가 이드로, 라합, 룻, 나아만,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이방인 추수의 첫열매라고 말한다.

 

갈렙의 이름은 ”전심”(全心)이란 뜻이며, 그는 존 번연(John Bunyan)의 책에 나오는 '큰 마음'(Mr Greatheart)에 해당하는 훌륭한 구약성경상의 인물이 되었다. 그의 중요한 특징은 결코 퇴보한 적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상대적으로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비례하여 그의 성품은 더 훌륭해지며 명성도 높아졌다. 그의 이름은 충성과 순종, 그리고 주인의 뜻을 분별하려는 경계심이라는 개념들과 연관되는 히브리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그와 성품을 고려해 볼 때 이는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모든 자질 면에서 남보다 뛰어 났었다.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시킬 수 있는 그의 일대기(一代記)는 두 가지의 유쾌한 진리를 밝혀 준다. 하나는 인생의 가장 위대한 성취를 노년에 이루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는 은퇴해야 하는 나이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의 어떤 단계에서도 그분께서는 우리의 가장 큰 기대를 무산시키지 않으신다.

 

모세처럼 갈렙의 생애도 세 시기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는 사십 세까지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그 후 그의 지파의 지도자로서 가나안을 정탐할 열두 사람 중의 하나로 선택되었고, 그 이후 또 다시 사십 년을 광야에서 보냈다. 그가 가장 위대한 공적을 이룩했던 때는 그의 인생 제 3기였다.

 

● 열성적이었던 청년기

 

성경에서 처음으로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을 때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였다(민 13:6).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 관한 차후 이야기를 통하여 젊었을 때의 그의 인격과 행동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그의 젊은 시절에 관한 유일한 실마리는 민수기 13장 1절에서 발견된다. ”사람을 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가나안땅을 탐지하게 하되 그 종족의 각지파 중에서 족장된 자 한 사람씩 보내라”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이야기는 그 자체로써 설명이 된다. 족장들(지도자들)은 우연히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그들은 고된 훈련을 받았으며 훌륭한 인격을 쌓았던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우리 주님의 30년 간의 행적 중에서 오직 한 가지 사건만이 기록되었지만, 차후에 보이신 거룩한 삶과 비이기적인 봉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분께서 어린 시절에 어떠하셨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위기는 그 사람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 주기만 할 뿐이지, 그를 만들지는 않는다. 파선(破船)의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행 27:1) 바울은 ”다른 죄수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막상 위기가 닥치자 그는 그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갈렙이 가나안을 탐지할 자로 선택되면서부터 그에게는 위기가 닥쳤다. 훌륭한 성품과 타고난 재능으로 말미암아 그는 자기 지파와 민족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불평하는 자들 틈에 끼인 적이 없었으며, 또한 잃어버린 애굽의 진미를 먹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의 목표는 약속의 땅이었으며 그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은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훌륭한 자질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두 가지가 특히 두드러진다.

첫째로, 그는 커다란 용기를 보였다.

 

그의 도전적인 용기가 두드러진 때는 여호수아와 더불어 여론의 거센 물결에 외로이 대항했던 때였다. 용기있는 사람만이 홀로 서 있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인기를 좋아하는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시험거리이다. 동년배의 압력은 두려운 것이 될 수 있으며, 누구나가 하고 있는 어떤 행동을 반대하는 것은 때때로 번민을 일으킨다. 오늘날에도 비뚤

 

 

어진 신학 풍토에 떳떳치 못하게 침묵을 지키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믿음의 태도를 견지하고, 열 사람의 정탐이 보고한 다수 의견에 반대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심리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고 했다(민 14:10). 그러나 갈렙은 겁내지 않았고, 생명을 걸고 자신의 확신을 밝혔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째로, 그는 좋지 못한 상황에서도 강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였다.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가치 척도에서 높게 평가되는 자질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수 없기 때문이다(히 11:6). 그의 믿음은 비관적인 다수의 보고에 의해서 나타난 불신의 독기(毒氣) 한 가운데서 번성한 것이기 때문에 더욱 훌륭한 것이었다(민 13:28-14:9).

그러나 그가 이처럼 놀랍게 믿음과 용기를 보였지만, 슬프게도 백성으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른 열 사람이 본 것을 모두 보았다. 그들은 대적의 힘을 과소평가하지도 않았고 그들 앞에서 그 일의 막중함을 축소시키지도 않았다. 전망(展望)의 차이는, 열 사랑이 그들 자신의 메뚜기와 같은 힘을 거인들의 힘에 비교함으로 사기를 잃은 반면에 두 사람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대적의 힘에 비교했다는 사실에 있다. 그들은 거인들을 바라보았고,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의 확신의 근원인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씩씩한 믿음 앞에서 어려움들이 점점 줄어서 없어졌다. 그 땅에는 무시무시한 거인들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가나안 사람들은 그들의 밥이었다. 어떤 작가가 흥미있게 표현했다시피, ”거인이 크면 클수록 밥은 더 많아지는 것이다.” 그들은 거인들보다 무한히 힘이 세신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을 신뢰했다. 믿음은 참된 전망을 갖게 한다.

불신은 기억력이 몹시 나쁘다. 열 사람이 백성들에게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민 14:4)고 재촉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애굽에서 구출되기 전에 맛보았던 감독들의 채찍과 노예 생활의 괴로움을 그들은 얼마나 빨리 잊은 것인가 ! 그러나 갈렙에게는 되돌아간다는 것은 없었고 오직 전진만이 있었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는 말로 그들의 두려움과 불신에 도전했다.

 

 

● 일관성이 있었던 중년기

 

최근의 어떤 시사 잡지에 ”중년기 -가장 좋은 때인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중년층 미국인들의 외관상의 안전은 이혼, 돈 걱정, 실직 등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위협받고 있으며, 그것들은 그들로 하여금 미국경제에게 배반당했다고 느끼게 하며, 그 결과 미국의 꿈이 불쾌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 그 기사를 쓴 사람이 지적한 내용이었다.

중년기는 신체적인 영역과 영적인 영역 양면에서 그 자체의 독특한 시험을 내포한다. 그 시험은 청년기의 시험과 같이 격렬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강도(强度)가 떨어지는 대신에 그만큼 더 교묘한 것이 된다. 젊었을 때 로케트처럼 치솟았던 많은 사람들이 중년기에 접어들면서 타버린 나무 막대기처럼 변한다.

 

인생의 이 단계에 이르면 누구나 분명한 이점들을 얻게 된다. 우리의 힘은 절정에 다다르게 된다. 경력, 친구들, 결혼, 가정과 같은 인생의 중요한 결정들은 이미 이루어졌다. 지위와 영향력을 이상적으로 확보했고, 재정적인 형편도 다소 나아졌다. 이제 우리는 당면 문제들에 대한 해답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좀더 객관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은 위험들도 있다. 인생의 이 단계에서 열심을 잃게 되고 개인적인 헌신이 미지근해지는 일이 종종 있다. 열렬한 사랑은 사라지고 미온적인 의무감만이 남게 된다. 사라지는 젊은 시절의 열심이 가치있고 흥미진진한 목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무미건조해지고 쇠약해진다. 자기 부정의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여유를 가지라는 유혹에 힘없이 굴복하게 된다. 이러한 인생 시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이시여, 나 자신에 대항하게 하소서.

애처로운 음성을 가진 겁장이 나는

안일과 쉼과 기쁨을 갈망합니다.

나 자신은. 나에게 있어 제일의 반역자이며

나의 가장 불성실한 친구이며

나의 가장 치명적인 대적이며

어느 길로 가든지 나의 방해물입니다.

-A. W. 카마이클

 

 

 

결혼과 가정 생활에 있어 실현되지 않은 이상(理想)들이 종종 불가피한 것으로 묵과되고 인정된다. 생활의 경향과 습관을 고정시키다 보면 환멸과 냉소까지도 생활 양식(樣式)이 된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교묘한 퇴보가 나타난다. 여호와께서도 에브라임의 이러한 상태를 지적하셨다.

”백발이 얼룩얼룩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호 7:9).

보다 나은 영적 성장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중단하고 마음대로 즐길 수있는 권리를 얻었다고 느끼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갈렙은 젊은 시절의 시험들을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그러나 더 힘들고 오래 걸리는 중년의 시험들을 그는 어떻게 맞이했는가? 고든 칠버즈(Gordon Chilvers)는 중년에는 젊었을 때보다 더욱 하나님의 자원들을 필요로 하거나 그것들을 다시 필요하게 되기 쉽다고 주장했다. 갈렙은 과연 그 자원들을 의지했는가?

 

그가 겪었던 것처럼 어렵고 모진 운명을 겪은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동시대 사람들의 죄와 불신 때문에 그는 인생의 황금기가 되었어야 할 향후 사십 년을 좌절과 실망 가운데 보내게 되었다. 그의 믿음과 용기에 대한 외관상의 대가는 그의 힘이 절정에 다다른 때에 황량한 광야에서 목적없이 떠돌아 다니는 것이었다. 그 기간 동안 날마다 몇 건의 장례식이 치루어졌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갈렙이 성내고 분개했더라도 탓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적 고결함을 유지했고, 오점을 남기지 않은 채 오래 지속된 시험을 통과했다. 그는 속을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처사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들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한 사람의 수는 얼마되지 않는다.

 

모세가 죽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택하신 사람은 갈렙이 아니라 여호수아였다. 그러나 이 위대한 사람의 마음에는 여호수아에 대한 질투심도, 하나님께 대한 적개심도 없었다. 그는 충성스럽게, 그리고 기꺼이 열등한 직분을 맡아 봉사했다.

어떤 작가는 말하기를, 여행에서 가장 힘든 것은 중간 지점을 통과하는 것이라고 했다. ”출발 지점에서는 새로운 모험에 대한 열정이 있고, 도착지점에서는 목표를 성취한 데 대한 쾌감이 있다. 그러나 주자(走者)의 원기를 시험하는 것은 출발 지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목표까지는 아직도 까마득한 중간 지점이다. 삶의 여정의 중간 지점에서 신자는 끈기있게 계속 갈 수 있는 은혜가 가장 필요하다.”

갈렙은 젊었을 때 독수리처럼 날개를 치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제 그는 믿음의 활력으로 안정을 얻으며 지치지 않고 달리는 기술을 터득했다. 그러나 그는 노년기에 접어들어서도 기진하지 않고 걸을 수 있었는가?

 

● 모험적이었던 노년기

 

다른 어떤 성경상의 인물도 노년에 이처럼 씩씩하고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지는 못했다. 그의 생애 최고의 도전은 그가 여든 다섯 살이 되었을 때 나타났다. 그 나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전과 편안한 은퇴만을 꿈꾸는 나이이다. 마흔 살의 영웅은 여든다섯 살이 되었어도 영웅이었다. 그는 흔히 노년의 비극이라고 간주되는 것이 영광스러운 위업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여든 세 살이지만 여전히 자라는 당신의 친구”라는 문구로 맺어진 편지를 받은 것에 대하여 말했던 적이 있다. 그 편지를 보낸 사람도 갈렙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노년은 쇠하여 가는 때가 아니라 뛰어난 업적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하는 때였고, 천천히 산을 내려가는 때가 아니라 또 다른 산봉우리를 오르는 때였으며, 노쇠의 때가 아니라 모험과 성취의 때였다. 그의 삶은 소멸이 아니라 절정을 향하여 꾸준히 전진했다.

 

인생의 각 단계에서 그는 동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청년기에 그는 홀로 서 있었다. 중년기에 그는 홀로 걸었다. 노년기에 그는 홀로 올라갔다.

 

나이는 젊음 그 자체에 못지 않은 기회이다.

단지 다른 옷을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저녁 미광(微光)이 사라질 때

하늘은 낮에 보이지 않던 별들로 가득차게 된다.

-H. W. 롱펠로우

 

사십오 년 동안 갈렙은 인내를 가지고 모세를 통하여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수 14:9)이 성취되기를 기다렸다. 땅 분배 시 여호수아와 가진 접견에서 그는, 가나안에서의 기업 소유에 대한 보증이며 그 지겨운광야 세월 동안 자신을 지탱시켜 준 지주였던 약속을 다섯 차례 언급했다. 지나간 세월은 조금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식게 하거나 그의 열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믿음은 사람으로 긴 안목을 가질 수 있도록 한다”고 러셀 하우든(J. Russell Howden)은 말했다.

 

”그것(믿음)은 사람을 덧없고 일시적인 것으로부터 이끌어 내서 영원하고 영구한 것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것은 수평선 위에서 영원을 보기 때문에 그의 전망을 바로잡아 준다.

먼 훗날의 약속에 대한 갈렙의 믿음은 날마다 그 성취를 조금씩 맛봄으로써 새로와질 수 있었다. 그는 두 가지 약속을 받았는데, 하나는 그의 수명이 연장될 것이라는 약속이며, 다른 하나는 그가 탐지했던 지역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다(민 1:30). 날마다 첫번째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두번째 약속에 대한 계속적인 보증이었다.”

 

갈렙은 신체적으로 강건했다.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날 오히려 강건하니 나의 힘이 그때나 이제나 일반이라”(수 14:11).

그처럼 운이 좋은 80대 노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 그러나 그의 승리는 몸의 승리가 아니라 정신의 승리였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바울은 후년에 이와 같은 신체적인 강건함을 누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60세나 60세가 채 못되었을 때 그는 자신을 ”나이 많은 나 바울”이라고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지력(知力)과 기개 면에서는 끝까지 젊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한 신체적인 건강의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기개 면에서는 모두가 강건할 수 있다. 슬리퍼나 끌고 다녀야 했을 이 노인 갈렙은 철로 만든 신을 신고 산에 올라가서 소심한 열 사람들이 두려워했던 거인들을 물리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갈렙은 영적으로 대담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가 그의 요구였다. 비옥한 강변 평지나 쉬운 장소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거인들이 있는 산지를 요구했던 것이다. 그는 그 민족이 생각하기에 가장 어려운 임무를 요구했던 것이다 ! 그 요구는 그 사람의 재능을 나타내 주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오지 않을 장소로 자신을 보내 달라고 선교 기관에 요청하는 젊은 선교사 지망생의 태도와 얼마나 다른가 ! 갈렙의 대단한 용기는 노년기에 들어서서도 사라지지 앉았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의 요구 사항을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발로 밟는 모든 땅을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 (수1:3). 갈렙이 밟았던 산지가 어느 산지였는가? 대적의 가장 튼튼한 요새였던 헤브론이었다 !(민 13:21-22).

 

산지에 위치한 전략적인 도시 헤브론은 아마도 그 땅에서 가장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그곳은 비옥한 고원 지대였으며 전망이 좋은 곳이었다. 족장들이 거기에서 대부분의 생애를 보냈기 때문에 갈렙에게 있어서 그곳은 거룩한 땅이었다. 그곳에 있는 상수리 나무 아래에다 아브라함은 장막을 세웠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의 장막을 방문한 하나님의 아들이 밟았던 땅이었다. 그곳에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묻혀 있었다.

갈렙은 위험한 싸움을 치르더라도 그 땅의 가장 좋은 것을 얻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한다. 가장 좋은 것을 위하여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가장 좋은 선물은 가장 비싼 것이기 때문이다. 사단이 가장 완강하게 우리를 저지하는 곳은 보통 축복의 평지가 아니라 고원 지대이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갈렙의 야심적인 요구는 나이 많은 그리스도인을 위한 위대한 표어이다. 우리가 노년에 점점 접어든다고 해서 모험과 공격의 정신을 잃어 버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또 다른 믿음의 발걸음을 떼어놓는 것을 주저해서야 되겠는가? 싸움의 위험을 생각하며 움츠려서야 되겠는가? 우리 역시 슬리퍼를 벗어 버리고 하나님의 대적들이 방어하고 있는 위협적인 산지를 공격해야 할 것이다.

 

나를 당신의 행복한 등산가로 만드소서.

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여

산을 오르는 나의 영혼이 시련도 환영하게 하소서.

주여, 못박으소서.

바위나 산 비탈, 얼음 절벽이나 눈 덮인 들 위에

저 아래에 있는 것들로 향하는 연약함을.

 

우리를 당신의 등산가로 만드소서.

낮은 언덕에서 지체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를 소망으로 새롭게 채우소서, 소망의 하나님이시여

보이지 않는 분을 보면서

물러서지 않고 산을 오를 수 있도록.

-A. W. 카마이클

 

갈렙은 격려와 고무를 끊임없이 주는 근원이다. ”가장 좋은 것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그의 삶이 주는 멧세지이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헌신이 식어진 적이 없었기에 그는 성장을 멈춘 적이 없었다. 딘즈데일 영(Dinsdale Young)은 다음과 같이 갈렙을 평가했다. ”여든다섯 살에도 기운이 솟구쳤던 놀라운 노인 ! 아낙 자손들을 몰아낼 것을 예기하며 기뻐했던 노인 ! 갈렙은 노년에도 청년의 힘과 활력과 낙관적 전망을 가졌다.”

 

노년에 놀라운 업적을 이룩했다는 것이 과거에 국한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고(故) 캐논 내쉬(Canon C. H. Nash)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 신학대학(Bible College of Victoria)을 설립하여 수천 명의 젊은 남녀를 기독교 사역을 위하여 훈련시켰다. 일흔 살에 학장직에서 은퇴한 그는 여든 살이 되었을 때 새로운 십년간의 풍성한 사역이 그의 앞날에 놓여 있다는 확신을 주님으로부터 받았다. 그 확신은 풍성하게 실현되었다. 그 기간 동안에 그는 교역자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중요 집단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사역으로 특이한 축복을 받았다. 그 기간이 그의 생애에서 가장 풍요로왔던 때였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나는 그가 아흔 살이 되었을 때 토인비(Toynbee)의 불멸의 역사서 제 6권을 완독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갈렙처럼 그는 자연 순리에 도전했고 끝까지 계속해서 역량을 키워나갔던 것이다.

 

벤자민 라이리(Benlamln Rlrie)는 일흔 살이 되었을 때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의 선교사 직분에서 은퇴했다. 여든 살이 되어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자 그는 신약성경 헬라어를 배우기로 작정했다. 전에는 그렇게 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지 못했었기 때문에 뒤늦게나마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능숙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아흔 살에 그는 토론토에 소재한 어떤 신학 대학원에서 헬라어 보습과(補習科)를 청강했다. 백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내가 설교하는 한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의 주머니에는 집에서 집회 장소까지 지하철을 타고 오가는 동안 헬라어 지식을 검토하기 위하여 사용하던 낡은 헬라어 소사전이 있었다. 그는 갈렙의 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갈렙의 승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의 어느 젊은이도 그들의 영토로부터 거인들을 포함한 대적을 완전하게 몰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한 상황에서 그가 그 일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동년배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에 여기 해당되지 않는다.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곧 그 세 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수 15:14).

그 땅을 할당받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에 관해서는 우울한 반복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그들을 온전히 몰아내지 못했다... 가나안 사람들이 그 땅에 거하였다... 얻을 땅의 남은 것이 매우 많다.”

 

갈렙에게는 타인을 격려할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용기를 잃은 세상사람들은 그러한 낙관적인 전사(戰士)를 몹시 필요로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는 나이 때문에 희망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타이터스 죤슨(Titus Johnson)박사는 ”우리 늙은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낙심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젊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패하여, 그 후에 끊임없이 그들 중에 거하는 대적으로 말미암아 재난을 당했는데 갈렙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으며 그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그 비결은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수 14:8)라는 여섯 마디 말에 담겨 있다. 그 비결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는 그 말이 성경 기록에 반복되어진 횟수를 통해 알 수 있다. 여호와에 대한 그의 온전한 충성은 한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딘즈데일 영(Dinsdale Young)은 이 부분의 원어의 표현이 항해에 관한 비유라고 말한다. 그 의미는 돛을 모두 올리고 똑바로 전진하는 배와 관련된 것이다. 그 배는 직선 항로로부터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갈렙은 깨끗한 양심으로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증거할 수 있었다. 그것은 교만하게 뽐내는 말이 아니라 참된 말이었고 한결같은 목표를 밝히는 평범한 말이었다.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

모세는 그런 갈렙에 대해서 위와 같은 증언을 덧붙일 수 있었다(수 14:9). 민족의 지도자로서 모세는 갈렙의 인격과 하나님에 대한 헌신을 평가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증거는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것이었다.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민 14:24).

이보다 더 좋은 찬사가 어디에 있겠는가?

결론은 분명하고,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도 명백하다.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기 때문에 거인들을 포함한 대적들을 완전하게 물리치고 쫓아낼 수 있었다. 그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는 평생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시에 꾸준히 순종했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서둘러서 이행하시지 않았지만, 갈렙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했다. 신약성경의 표현을 빈다면, 그는 필연적인 예배 행위로서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사로 드렸던 것이다(롬 12:1). 이와 현저히 대조를 보이는 것은, 그런 제사를 드리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갈렙은 하나님과의 교제의 장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주셨던 바로 그 장소인 헤브론에 거하게 되었다. 그 땅에 마침내 전쟁이 그쳤다.

 

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교훈들이 여럿 있다.

-주님을 온전히 좇은 사람은 성품과 관점 면에서 그분을 계속해서 닮아가게 될 것이다.

-주님을 온전히 좇는 것은 희생적인 봉사를 포함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업을 주장한다는 것은 새로운 투쟁에 임하게 된다는 것이다.

-꾸준한 순종에는 종종 희생이 따르지만 앞으로의 투쟁과 순종을 위한 도덕적인 힘을 증가시킨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충성은 생활 전체를 살찌게 한다.

 

또한 우리는 믿음에 전염성이 있어 식구들에게도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갈렙으로부터 배운다.

갈렙이 헤브론에서 거인들을 몰아낸 후의 일이다.

”거기서 올라가서 드빌 거민을 쳤는데 드빌의 본 이름은 기럇 세벨이라갈렙이 말하기를 기럇 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하였더니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그것을 취하므로 갈렙이 그 딸 악사를 그에게 아내로 주었더라”(수 15:15-17).

갈렙은 딸에게 결혼 지참금으로 남방에 있는 땅을 주었다. 그러나 악사는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물이 적당하게 공급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래서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에 그녀는 아버지에게 요청했다.

”내게 복을 주소서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 땅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하매 갈렙이 윗 샘과 아랫 샘을 그에게 주었더라”(수 15:18-19).

”아버지께서 나를...보내시오니”(영어 성경에는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셨으니”로 번역되어 있음-역자 주).

”... 도 내게 주소서.”

”갈렙이 ... 주었더라.”

 

악사의 아버지는 딸의 요구를 기쁘게 들어 주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큰 것들을 기대했고 그것들을 받았다. 악사는 아버지로부터 큰 것들을 기대했고, 실망스럽지 않은 결과를 얻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께 기도할 때 위와 같은 유쾌한 공식을 따라서 영적 야심을 밝히는 것을 기뻐하신다.

우리가 지금 점령하여 즐기고 있는 영적 영토보다 훨씬 더 넓은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는가? 우리의 생활 안에는 움직이려 하지 않는 대적들, 그들을 몰아내려는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노력을 비웃는 거인들이 여전히 있지 않은가? 만일 있다면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기업을 사유하는 데 실패했거나, 혹은 어떤 내적 비밀, 즉 영적 능력을 차단하고 활력을 빼앗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갈렙의 비결을 알았다. 온전한 승리는 차분한 신뢰와 전적인 순종의 결과로 나타난다.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롱펠로우의 시 「모리투리 살루타무스」(Morituri Salutamus)에서 발췌한 다음 시행(詩行)이 활력을 불어 넣어줄 것이다.

 

 

너무 늦었다니 ! 아아 어떤 것도 너무 늦은 것은 없다.

지친 심장이 박동을 멈추게 되기 전에는

여든 살에 카토는 헬라어를 배웠고

소포클레스는

그의 장엄한 오이디푸스를 썼다.

그리고 시모니데스가 동료들로부터 시상(詩賞)을 차지했던 때도

모두 팔십 년을 넘게 살았을 때였다.

데오프라스투스도 아흔 살에 「사람들의 성격들」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초서는 우드스틱에서 나이팅게일과 함께 지내면서

예순 살에 캔터베리 이야기를 썼다.

괴테는 바이마르에서 최후까지 땀흘리면서

여든 살이 지나서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게으르게 앉아서 말만 하고 있을 것인가

밤이 찾아와서 이제는 더 이상 낮이 아니라고?

 

나이는 젊음 그 자체에 못지 않은 기회이다.

단지 다른 옷을 입었을 뿐이다.

그리고 저녁 미광이 사라질 때

하늘은 낮에 보이지 않던 별들로 가득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