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과 경배로서의 예배
계4:6-11
개인과 교회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임하기 위해서 예배가 회복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출애굽기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마18:20 예수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일 때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편 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 1)하나님을 추구하는 예배, 2)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3)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드리는 예배, 4)하나님과 친밀함의 예배가 중요합니다. 오늘은 7번째로 찬양과 경배로서의 예배가 회복되어야합니다.
1.찬양과 경배의 예배는 최고 형태의 예배입니다.
우리는 찬양을 예배의 순서를 매끄럽게 하고, 설교 시 은혜를 받기 위해 마음을 준비하는 깍두기 정도로 생각해 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찬양을 준비찬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찬양과 경배는 그 자체가 예배입니다. 절대 부수적인 것이 아닙니다. 찬양과 경배 그 자체가 곧 예배입니다. 찬양과 경배를 워십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곧 예배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계4,5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4,장은 하늘나라의 예배의 뚜껑을 열고 우리에게 조금 보여주고 있는데 계4,5장의 천상의 예배의 핵심은 찬양과 경배인 것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 찬양과 경배가 예배자체요 본질이요 핵심인 것입니다.
행15:16-18절 “16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18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특히 행15:16절을 보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세우시겠다고 했는데 그것의 성취가 바로 신약시대 교회인 것입니다.
다윗 시대의 장막은 2개였습니다. 하나는 전부터 내려오던 성막이었고, 또 하나는 엘리 제사장 때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는 다곤신을 부서뜨리고 그곳 지경에 독종을 발하사 다시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법궤가 돌아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25년이 넘게 있었습니다. 그 후 다윗이 왕이 되고 하나님의 궤를 그렇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 생각하고 3만의 무리들과 함께 다윗성으로 모셔오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오다 소들이 뛰어 웃사가 손으로 법궤를 붙잡자 하나님께서 그 잘에게서 웃사를 죽이십니다.
이일로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으로 메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드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냅니다. 거기서 석 달을 있다 다윗 성으로 옮겨 가게 됩니다. 이때 제사장들이 6걸음을 행할 때 마다 소와 살찐 것으로 제사를 드렸던 것을 봅니다. 이때 그 법궤를 모신 곳이 다윗이 친히 준비한 다윗의 장막에 두게 됩니다.
그런데 이 다윗의 장막은 특징은 언약궤는 있는데 휘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그대로 노출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찬양대를 조직하여 24시간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찬양과 경배를 그리고 중보기도를 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26:8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즉 다윗의 유일한 한 가지 소원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때 이러한 예배의 교회를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2.찬양과 경배는 전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찬양과 경배는 신6:4-5의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는 말씀의 표현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것입니다.
그저 입에서 나오는 찬송을 부르는 게 아닙니다. 머릿속으로 딴 생각하면서 하는 게 아닙니다. 행사에만 관심이 있는 태도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찬양을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이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거나 혹은 그렇게 실천하지 않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먼저 우리의 찬양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찬양과 경배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은혜 받기위해 찬양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고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와 임재로 채워주심으로 우리에게 소위 하나님의 은혜가 넘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성도들이나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 신앙이 타락할수록 찬양이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한 것으로 흐르게 된다고 말씀하심.
2)계시나 기쁨이 예배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찬양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셔서 그 능력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적은 어느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성령이 역사하게 하기 위해서 찬양과 경배를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는 찬양과 경배가 수단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찬양과 경배로 드리는 예배는 감동을 받기 위한 것도, 계시를 받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물론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이러한 은혜가 주어질 수는 있지만 이런 요소들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찬양과 경배의 유일한 목작은 하나님의 영광이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과 헌신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부어주시면 부어주시는 대로 감사하고 부어주시지 않는 하더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하나님 그분 자신을 높이고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실로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3)직접화법으로 부르는 찬양과 경배의 중요성을 알아야합니다.
직접화법이란 직접 대면하여 말하는 것처럼 말하는 화법입니다.
예를 들어 “다 찬양하라 주님께 영광 돌리세” 강은 가사는 간접화법입니다. 사람들에게 찬양하자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나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 합니다”같은 찬양은 직접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부르는 찬양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 합니다”라는 가사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여호와만이 힘이 되어주시는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의 찬양이나 계시록의 스랍들의 찬양은 하나님의 보좌를 바라보며 하나님과 대
화하듯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인격체 되신 하나님께 찬사를 보내고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식으로 드려졌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찬양에는 우리의 마음이 실려 있어야합니다. 마음을 다라고..의 의미는 내 마음 중심에서부터 그 가사의 내용을 고백하고 동의하며 마음을 실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찬양을 보면 우리의 마음이 전혀 실려 있지 않아요. 이것을 앵무새 찬양이라 부릅니다.
3.찬양과 경배의 방법
찬양과 경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보내는 것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찬양과 경배는 두 요소를 지닙니다. 찬사와 기뻐함입니다.
찬사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기뻐함이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요소가 합해진 것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1)찬사
찬사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미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렇게 찬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송축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높입니다. 이것이 찬양과 경배입니다.
시104:1-6 “1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2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4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5땅에 기초를 놓으사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6옷으로 덮음 같이 주께서 땅을 깊은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로 솟아올랐으나”
보십시오 여기서도 직접화법으로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송축하라” “나의 하나님이여” 와 같은 표현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을 찬사하며 노래하는 시입니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시편 기자는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 되심을 인해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물의 창조주 되신다는 사실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깨닫는다면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찬양과 경배를 드릴 것입니다.
계5:11-14 “11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13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14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하늘에서 스랍들(오늘날 찬양인도자)과 24장로들과 셀 수 없이 많은 천사들의 찬양의 모습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찬양과 경배의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2)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13)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이들은 모두 어린 양의 보좌 앞에 모여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을 찬양하고 있고, 동시에 하나님이 구원자 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실제 하나님의 관점에서 구원을 본다면 우리의 찬양의 자세는 달라질 것입니다)
이와 같이 찬양과 경배의 한 부분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인하여 하나님께 찬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의 창조주 되시고, 우리의 구원자 되시며, 날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운행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행하시는 그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 이것이 찬양과 경배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2)기뻐함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의 행하신 이들로 인해 찬사를 보내는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그분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빠가 좋아, 왜? 아빠가 우리를 위해 ...도 해주시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인하여 그분께 찬사를 보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인하여 그분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이유는 단순히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에 그분이 나의 아버지 되시기에 그분 자신이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하기에 그분을 기뻐하며 그분을 인하여 감격하는 것, 그분께 우리의 사랑을 고백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찬양과 경배입니다.
삼하6장에 보면 다윗이 언약궤가 돌아오는 날 너무 좋아서 춤을 춥니다. 춤을 추다가 바지가 벗겨졌지만 대신들과 부하들 하인들 앞에서 개의치 않고 기뻐하면서 춤을 춥니다.
여러분 왜 다윗이 그토록 기뻐하고 즐거워했을까요?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언약궤가 돌아오면 그 언약궤로 인하여 큰 승리가 있을 것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언약궤가 금으로 싸여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나라가 부강해진 증거로 언약궤가 들어오니까 그랬을까요? 이 모두가 아닙니다.
언약궤는 임재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 성물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 다윗에게는 너무나 좋았습니다.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춤을 추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그분이 다윗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소중했습니다. 그 임재의 상징이 돌아오니까 그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시편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여기 기뻐한다는 말의 의미는 마치 전셋집에 살던 사람이 새 집을 삿을 때의 기쁨, 수험생의 합격의 기쁨, 장사가 잘되어서 돈을 셀 때의 기쁨, 그렇게 기뻐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기뻐하며 예배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찬양과 경배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예배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그곳에 하나님은 찾아오실 것입니다. 방문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4.찬양하는 삶에서 자라 가십시오.
우리가 이런 찬양이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자동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찬양의 삶을 통해 하나씩 자라나는 것입니다. 다윗이 어느 날 갑자기 찬양과 경배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찬양의 삶을 통하여 그 정점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찬양은 기도와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처음부터 입을 열자마가 유창하게 기도가 되어지고 잠깐 기도한 것 같은데 1시간이 훌떡 지나가고 그러던가요? 정반대로 한참을 기도한 것 같은데 시간을 보면 5분도 안 지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필수이기에 지속적으로 기도했더니 기도가 더욱 길어지고, 더욱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찬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양은 분명 곡조 있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이기에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힘쓰면 궁극적으로 다윗과 같이 찬양을 드릴 수 있는 날도 있게 될 것입니다.
찬양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찬양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여러분의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찬양할 때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성령의 감동이 임하여 찬양할 마음이 생길 때만을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평생에 찬양을 한 번도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의지로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나는 기도하고 싶어서 기도하는 분계시나요? 나는 기도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 나는 기도하고 싶어 죽겠어 이런 분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왜 기도하시나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하니까 하는 거죠. 찬양과 경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찬양과 거리가 멀어요. 잘 안되니까요. 난 마음이 와 닿지를 않아요.”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여러분의 마음에 와 닿는 대로 신앙생활하면 아무 것도 되지를 않습니다.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가 드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해야 하는 필수요건이듯이 찬양과 경배도 예배이기에 싫든 좋든 해야 합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예배의 핵심이기에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본질이기에 원하든 원치 않던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드리게 되면 하나님을 더 알게 되고 하나님을 더 알게 되면 찬양과 경배를 통해 하나님을 더 기뻐하게 됩니다.
찬양과 경배는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관계 중심적이시지 일 중심적이시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십니다.
정말 길을 걸으며 청소를 하며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느껴지실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의 찬양과 경배가 회복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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