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예배의 회복

예배의 회복

미션(cmc) 2010. 8. 28. 10:07
예배의 회복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의 저서 중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자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하나님의 부흥과 각성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저자는 부흥과 예배와의 관계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비롯되는 기쁨과 진정한 예배는 이후에 따르는 회개의 역사를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건하게 만든다

  즉, 회개를 통해 부흥이 오는데, 이 때 예배는 하나님의 부흥을 예비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지적합니다. 그렇습니다. 예배는 부흥이 오는 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따라서 부흥이 오면 예배가 회복됩니다. 예배의 회복은 부흥을 예비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길에 서면
개인적인 신앙회복과 개교회적인 부흥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부흥이란 한 지역이나 한 나라에 또는 여러나라에 동시에 하나님의 성령이 오순절날 부어진 것처럼 대규모로 부어져서 교회가 회복되고 불신자들을 주님께로 이끌고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고 더 나아가서 그 나라의 문화, 사회, 법, 사고까지도 바꾸어놓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흥은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오는 것이지만 부흥이 오기 전에도 각개인이나 개교회는 하나님의 길에 서면 부흥의 조짐이라고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신앙의 회복과, 개교회적인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도 회복되면 개인적인 회복과 교회차원의 부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부흥이 전체적으로 오기 전에도 말입니다. 이와같이 예배는 부흥과 관련하여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그런데 미리 말씀드리면 쉬운 길은 없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쉬운 길을 찾곤합니다.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금방 쏟아지듯이 우리는 뭔가를 하면 모든 것이 형통해지는 길을 찾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런 길은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부흥을 예비하고 기다림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담대해야만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살펴볼 부분은 예배의 회복이 부흥을 예비하는 중요한 길이라는 부분과신앙이 타락할수록 예배가 형식화되어지는 부분입니다. 신앙의 타락과 예배의 형식화는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와관련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부흥’이라는 책자를 많이 인용할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예배의 형식화에 대해 죽은 정통주의를 많이 연관시킵니다. 형식화된 예배는 죽은 정통주의에서 나옵니다. 죽은 정통주의란 보수적이지만 실제가 없는 교리입니다. 교리적으로는 맞지만 실제가 없습니다. 하나님에 관한 이론은 정통인데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교제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없습니다. 이것이 죽은 정통주의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우리가 이렇습니다. 한국의 형편이 그러합니다. 교리적으로는 보수이지만 문제는 실제가 없다는 겁니다. 죽은 정통주의는 절대로 부흥의 길을 예비할 수 없습니다.

죽은 정통주의 예배의 특징은
형식화된 예배, 보편적인 메시지, 성령의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부흥’이란 책에서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들을 나열하면서  예배와 관련하여 세 가지 특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특징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과 같아서 이 시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 면에서 바뀌어야 예배가 회복됩니다. 이것들이 바꾸어지면 아까 말씀드린대로 개인의 신앙이 회복되고, 교회가 회복되어집니다. 죽은 정통주의의 예배의 특징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생명력이 없는 형식적인 예배, 둘째는 보편적인 메시지, 셋째는 성령님의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부흥을 예비하는 예배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세 가지요소가 회복되어야 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형식적인 예배 대신에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야 하며, 보편적인 메시지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야 하며, 성령님의 자리가 없는 대신에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충족되면 예배는 회복되어집니다. 포도나무 교회가 경험했고, 선교회에 속한 여러 교회가 경험하고 있으며 국내외적으로도 경험된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위 세 가지 요소가 모두 회복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질이 있고, 메시지가 바뀌어야 하고, 성령님이 주도하셔야만 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세 번째 요소인 성령님의 주도하심만을 구합니다. 그러나 본질과 메시지 부분이 그대로라면 절대로 예배는 회복되지 않습니다. 이제 자세히 살펴볼텐데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보편적인 메시지 부분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보편적인 메시지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은 보편적인 메시지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죽은 정통주의는 특별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으로 약간 고무시켜주는 것을 원하며 보편적으로 자기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신앙관의 특징은 「행복한 가정을 꾸미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과 같은 제목으로 대변되어질만큼 우리에게 부분적으로 도움이 되어주는 것을 듣기 원합니다. 죽은 정통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입니다. 그들은 보편적인 생각들에 관심을 가집니다.... 그들이 느끼기에 종교란 선한 관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보편적인 생각들과 관점에 국한시킵니다. 그들은 종교가 “얼마나 흥미롭고 얼마나 고무시켜 주는가” 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문학에서 원리를 찾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가를 봅니다. 그들은 간섭 당하고 탐사 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종교란 사람이 종교를 필요로 할 때 가서 사용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뒷전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즉 종교가 내 뒷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종교가 사람을 어지럽혀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종교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죽은 정통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성경구절로 다음을 인용합니다. 이사야 30:10 입니다.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또한 그는 예레미야 6:14을 인용하면서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이 구절은 오늘날 교회가운데 팽배해 있는 보편적인 메시지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 구절입니다. 당시에는 거짓 선지자가 훨씬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게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보편적인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예레미야 6:12-13 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예레미야 당시는 국가적으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이 바로 목전에 다가온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차례 경고했음에도 돌이키지 아니하였기에 이방나라를 들어 저들을 치기 일보직전이었습니다. 13절은 그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걷혔고 하나님은 분노하시고 계십니다. 이러니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승리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실재는 걷혀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이기지 못합니다. 죄의 억압이 끊기지 않습니다. 사탄의 억압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에서 끊기지 않습니다. 세상의 억압이 끊기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상황인대도 불구하고 당시의 선지자들이 외쳤던 메시지를 보십시오. 이 상황에서 선지자들이 외치는 메시지는 “평화라! 평화라!” 였습니다. 이게 보편적인 메시지의 특징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축복이라! 축복이라!” 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 어떠합니까? 교회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걷힌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눌립니다. 이런 애기를 듣고싶어 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서와 목회자들의 가정에 있는 억압을 보시나요? 수많은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깨어집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억압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습관적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엄청난 사탄의 궤계와 다툼과 후욕과 시기, 질투, 미움이 성도들 삶 속에 가득합니다. 성도들이 세상과 죄를 이길만한 힘을 빼았겼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경험되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을 보십시오. 그곳에는 성령님이 임하니까 일어났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2:42-47 입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교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말입니다. 또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재와 승리와 생명과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이런 일이 있나요? 걷힌지 오랩니다. 성경에서나 찾을 뿐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죄의 억압이 있음에도 그럼에도 여전히 축복을 외칩니다. 이것이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입니다.

죄의 억압이 가득한대도 평화와 축복을 외친 이유는
그래야 대중에게 인기가 있고, 사람들이 자기에게 모여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심판을 앞에 두고도 왜 축복을 외치는 걸까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모습을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암말기가 되어 온 몸이 썩어가고 있는데 환부에다 소독약이나 바르고 반창고를 붙여주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죄의 억압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소독약 발라주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억압과 세상의 억압과 죄의 억압이 큰 반면 우리는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탐심”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당시의 선지자들이 평화를 외쳤던 가장 주된 이유는 그래야 인기가 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좋아하고 모이니까 그랬던 겁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축복을 외치는 이유는 그래야 성도들이 모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쓴 글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글의 주제는 “어떻게 하면 교회가 성장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말하기를 교회가 성장하려면 치유적인 설교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는 이어 말하기를, 한 잡지사가 조사한 통계자료를 인용하면서 최근 급성장하는 교회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징은 그 교회들이 치유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가 인용하고 있는 통계자료에 의하면 치유적인 설교를 하지않고 있는 교회는 성장이 둔하거나 도리어 성장이 퇴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이 글을 인용하고 있는 이유는 통계자료가 잘못되었다거나 그 목사님을 비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다만 오늘날 대부분의 목회자들에게 있어서 목회적인 관점이란 사람들이 뭘 원하는가를 보는 것이라는 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목회자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그것을 그들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마음의 중심 배경에는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는 야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타락한 신앙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이 있는 곳에는 부흥이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면 타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보편적인 메시지 즉 축복의 설교를 왜 선호하는지 아시나요? 우선 목회자의 입장에서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이유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함이고, 사람들이 보편적인 메시지를 듣고자 하는 이유는 역시 탐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니까 축복을 들으려고 합니다. 이 상태로는 절대로 신앙이 회복되지 않습니다. 교회는 절대로 회복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많이 모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함께 하시며, 하나님의 통치가 함께 하시는 역사는 없습니다. 경외함도 있을 수 없으며 순전한 기쁨과 죄를 이기는 승리가 없습니다. 영적인 의로움과 거룩함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해가시는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수단이 되어버린 곳에는
순전한 기쁨과 하나님의 통치, 경외함은 없습니다

  죽은 정통주의는 보편적인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다 보니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밀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등등에 관심을 가집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것도 문제이고 그렇다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도 문제이고 해서 하나님과 적당히 거리를 둡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필요하면 하나님을 끌어다 씁니다. 적당히 고무시켜주는 메시지를 선호합니다. 목회자들은 적당히 그것을 부추겨줌으로서 그들로 교회에 머물게 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보편적인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메세지가 회복되려면 보편적인 메시지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어야 합니다. 혹 이런 말을 할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교회가 어디있어? 말도 안되는 얘기야!”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세 구절을 보겠습니다. 이 구절들을 보시면 교회가 전해야 할 메시지를 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전해져야 삶이 변합니다. 그래야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됩니다. 교회 가운데 임재와 활력이 회복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를 본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16:13-18 입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우선 이 말씀의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에 제자들과 함께 여행하였던 시점은 예수님의 공생애중 마지막 6개월 남짓 남았던 시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그의 공생애 가운데 마지막 6개월은 제자들과 보내는 시간이 주로 많았습니다. 이 구절의 배경은 바로 그 때입니다. 여행중에 에수님은 사람들의 자기를 향한 이야기를 물으셨고 제자들이 대답을 하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이 때 베드로가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16절에서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는 17절에서 “이를 네게 알게한 이는 아버지시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설명하겠습니다. 이 시점까지 베드로는 약 3년 정도 같이 주님과 함께 다녔습니다. 같이 다니되 24시간 주님과 같이 살았습니다. 놀라운 기적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5병2어 기적때에는 기적에 동참하기도 하였습니다. 5병2어의 기적에 동참했을 때 베드로는 밤에 할 얘기가 많았을 것입니다. 잠도 안자고 말입니다. 여러분이 베드로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날 밤에 잠이 왔겠습니까? 아마 뜬 눈으로 지새웠을 겁니다. 몇 년 전 우리 모임에서 금니로 변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때, 어떤 목사님은 아내의 이가 금니로 변하자 너무 좋은 나머지 수지지역을 돌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가정을 방문한 사실에 감격했다고 하는데 지금 베드로의 경우는 그런 정도가 아니라 5병2어로 5천명 이상을 먹인 그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같이 살았음에도, 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모르고 있다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예수님 안에서 메시야를 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시점부터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씩 주님을 따라다니느라 굶기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감격했으며 그 수 많은 기적들을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감탄을 했었고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면 자기 나라의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고,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주리라고 믿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하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 부분을 잘 들으셔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들 모두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설교를 들었으며 기적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니고데모의 경우에는 밤중에 주님을 찾아와서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당시의 대부분의 관원들이 주님을 귀신들렸다고 욕하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여기는 관원들에게 이르기를 귀신들린 사람이 어떻게 그런 기적을 베풀 수 있느냐고 반문하기도 하였습니다.

표면적으로 예수를 보는 것과
성령의 조명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을 만지고 주님의 기적을 보고, 병이 낫기도 하였는데 그러나 베드로처럼 예수 안에서 살아계신 메시야인 하나님의 아들을 본 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열린 마음으로 온 자도 있었고, 예수를 왕삼으려고, 메시야로 추대하려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베드로처럼 본 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아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를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보았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즘 지식인들은 성경을 많이 읽습니다. 상식과 지식을 위해서 읽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자기들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는 못합니다. 주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알고 기적을 체험하는 것과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이 예수를 발견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만이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를 발견하면 자기의 모든 것으로 그 분께 헌신하게 되어집니다. 성경을 통해 내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면 우리의 모든 삶을 그 앞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는 우리들이 오늘날 하는 것과 같은 이론적으로 고백한 게 아닙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당연히 예수님을 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분이고, 하나님의 본체시고 하는 부분을 다 안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이와같은 것을 이론적으로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 상황 속에서 예수 안에서 메시야인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보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고백을 통해 자기의 모든 것으로 주님께 헌신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천주교에서는 여기 구절의 “반석”을 베드로라고 하는데, 이 구절의 “반석”은 베드로가 아닙니다.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입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으로 보게된 고백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본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입니다. 이게 반석입니다. 교회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인데 단순히 이론적인 예수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게하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신 그 예수입니다.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둘째는 고린도전서 3:10-11입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여기서 “터”는 교회의 터를 말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기 소명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한 사도였으며, 바울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 중에서도 터를 닦는 즉 씨를 뿌리는 사도였으며, 아볼로는 물을 주는 사도였습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이 각기 달랐습니다. 우리 역시 자기 소명을 이렇게 발견하여 그 가운데 서는 게 중요합니다. 바울이 만약 물을 줄려고 했더라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는 같은 사도라도 교회를 세우되 교회의 터를 닦는 사명인 것을 알았습니다. 이방인중에서도 씨를 뿌리는 사도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되 남이 세운 곳에는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기 소명이 아니기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달랐습니다. 소명이 다르니까요.

  그럼 여기서 “터”는 분명히 교회의 기초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나요? 물론 사람들은 다 이 사실을 인정합니다. 문제는 이 말의 의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으로 교회의 기초가 그리스도라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의미를 알려면 고린도전서 1장부터 보아야 합니다. 17-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구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 복음을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도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고 합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에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로 안한 이유는 말의 지혜로 하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소멸될까봐 그랬다는 겁니다. 보편적인 메시지를 전하면 십자가의 능력이 소멸됩니다. 그것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서도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다른 말로 십자가의 도라고 하고, 십자가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말의 지혜로 하지아니함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헛되지 않게 하려하기 위함입니다. 즉 십자가에서 능력이 소멸되지 않게함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4 절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여기 구절에 보니 바울이 누구를 전한다고 쓰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무엇이 능력이고 지혜라고 하고있습니까? 그리스도가..... 잘 들으십시오.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몇가지 사실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해야할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몇가지 사실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관한 몇가지 교리는 초신자 공부할 때 한 시간이면 끝납니다. 십자가에 관한 사실에 관한 공부는 아무리 길어도 신학교 한 학기면 다 배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일들을 배우려고치자면 금방 배울 수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에 관한 역사적인 배경, 십자가란 단어가 나오는 배경, 십자가에 관한 유대인들의 문화인식, 십자가와 관련한 근동아시아의 역사, 십자가란 단어가 쓰인 문헌들을 조사하자면 더 많은 시간을 들이겠지만 일반적으로 십자가에 관한 일들은 그렇게 긴 시간을 들이지 않아도 배울 수 있습니다.

교회가 전할 메시지는 십자가에 관한 몇가지 지식이 아닙니다

  교회가 전할 메시지는 십자가에 관한 몇가지 사실들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능력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사실이 능력이 아닙니다. 뭐가 능력인가 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30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사실이 아니라 인격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바로 우리의 지혜요, 의로움이요, 거룩함이요, 구속함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분이 말입니다. 복음은 인격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먼저 인격체되신 예수님만을 알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5 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 바울은 아마 이 편지를 3차 전도여행 때 썼을 것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철저하게 구약성경을 연구했었습니다. 구약성경의 모든 내용을 알았고 그 가운데 살았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사용하셨던 성경은 구약성경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관한 지식이 많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부활하신 주님 직접 만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삼층천에 다녀왔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니까 그는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배웠습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나타난 것만해도 성경에 여러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를 통해서 나타났던 능력이 참으로 엄청났었습니다.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고,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세워졌습니다. 이같은 사실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이 지금 원하는 것은, 그가 지금 현시점에서 원하는 것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주님만을 알기로만 작정합니다.

우리가 전해야할 복음은 인격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 베드로의 경우처럼 하나님이 보게하심으로 그 예수님만을 알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처럼 주님을 좇아 다녔고 기적을 보았지만 예수님안에서 아들이신 메시야를 보지 못하였지만 베드로가 보았듯이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예수님만을 알기로 작정했다고 합니다. 또한 전할 때에도 그 예수님만을 전한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도움으로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본 것처럼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면 근본적으로 사람들이 변할 것이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고백이 단순히 이론이 아니요 성령의 도움으로 한 것처럼 성도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예수를 발견하면 그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니까 예수님만을 알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인 것을 다들 압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 아는 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보이십니까?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마는 교회의 터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코 다른 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다른 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를 원했는데,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론이 아닌데, 바울은 성도들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에게 중매하기를 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바울은 베드로가 보았듯이 먼저 그리스도 예수를 알기 원했고 그 분만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게 우리가 전해야할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터 위에 교회가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메시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을 아시겠습니까?

  성도들이 예수를 듣고 예수를 만나면 모든 것으로 그 분께 고백하게 되어있고, 모든 것으로 사랑하고, 헌신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경우에서처럼 말입니다.그렇게 되어지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은혜와 승리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이 넘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넘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십자가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않는다” 고 하는 겁니다. 또한 말의 지혜인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방법”,“사업에 성공하는 기독교적인 법칙” 등과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들은 보편적인 법칙으로서 십자가에서 능력을 소멸하는 것이기에 말의 지혜로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보편적인 메시지로는 절대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기독교적인 법칙”등은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위로와 격려는 되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능력이 쏟아질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자, 메시지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보이시나요?

신앙의 본질과 육체를 신뢰함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빌립보서 3:1-4, 7-9 입니다.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2절에서 “손할례당”이란 “할례를 받아야 참다운 성도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가르켜 “개”라고 합니다. 바울은 참으로 담대했던 사람인 것을 봅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을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3절에서는 참다운 성도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성도의 특징 세 가지는 성령으로 봉사함 즉 성령으로 예배하는 것,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참 성도의 특징은
성령으로 예배하며, 예수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육체란 5절 이하에서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물론 돈이나, 미모, 육체미 등도 육체이지만 그런 것들은 너무나 타락한 것이기에 언급조차 하기싫은 것들이고 여기서 육체란 5절과 6절에 잘 나와있습니다.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라는 말은 오리지널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유대인이라도 개종한 유대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베냐민지파라함은 왕의 지파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이라함은 가장 정통주의적인 신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면에서 수석이다는 뜻입니다. 또한 열심으로는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육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까 교회의 터가 무엇이라고 했나요? 네,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만약 어떤 분이 “우리교회는 몇 만명이 모이니까 좋은 교회야”,“나는 삼대째 믿고 있어”,“나는 큰 교회에서 장로야”,“나는 보수정통 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했어”,“우리 교회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단에 속한 교회야” 라고 한다면 이게 육체를 신뢰하는 겁니다. 이렇게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을 바울은 개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말로는 에수를 자랑할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예수를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예수가 교회의 터라고 말하지 모르지만 그 가치와 사고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육체를 신뢰할뿐 절대로 예수가 터가 되지 않고 있는 겁니다.

가정 사역도 내적 치유도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터가 된 토대위에서만 의미가 있습니다

  인격체이신 예수님이 교회의 유일한 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자신이 그 분만을 알기를 구했으며 그 예수님만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전해야할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 교회의 터가 되어야할 가장 기본적인 메시지를 말씀드렸습니다. 복음이 빠지면 예배의 회복은 없습니다. 아무리 기법을 동원해서 그럴듯한 예배를 드린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예배의 회복은 없습니다. 복음이 빠지면 모든 것은 형식적인 예배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예수 외에는 어떠한 터도 없고, 예수 외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없습니다. 이 외의 것은 아무리 성경에서 인용되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어도, 또 사람들을 부분적으로 도울지라도, 사람들이 듣기 좋을지라도, 의미가 없습니다. 이 토대 위에서만 모든 것이 의미를 가집니다. 가정사역도 이 토대 위에서만 의미를 가지고, 내적치유도 이 토대 위에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자, 이제까지 우리는 예배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보편적인 메시지가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메시지로 바뀌어야 한다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2
형식적인 예배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형식적인 예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입장에서 어떠한 일들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흥미가 있습니다. 예배의 형태가 형식적일수록 형식적이 될 때에 성령께서는 덜 나타나시며 예배의 형태가 형식적이 될 때 성령의 역사가 줄어듭니다. 여러분은 신약에서 떠나게 된다는 것을 언제나 주목할 것입니다. 신약교회의 매우 중요한 특징은 즉흥성, 삶, 살아있는 친밀감, 활력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과 성령의 감화에서 떨어지게 되면 모든 것이 형식적이 됩니다. 침체에 빠진 교회는 예배가 형식적입니다. 예배의 형식을 채용하여 기도문 등을 낭독하는 것으로 돌아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형식적 종교에 의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침체기에 빠지면 의식적으로 돌아갑니다..... 반면에 여러분이 부흥을 만날 때마다 그러한 모든 일이 멈추게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의 단순 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어떤 의식이나 공기도서나 어떤 절차나 예복의 문제를 떠나 성령께 속한 자유와 일어나는 일들이 있을 뿐입니다. 마음 사람들은 마음 속으로부터 찬양을 부릅니다. 각성과 부흥이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 부흥이 떠나면 성가대를 강조합니다. 돈을 주고 성가대를 사오기도 합니다. 그들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 찬양 좋았어 하면서 평가합니다. 성가대가 성도들 위해 노래합니다.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날 생각도 안합니다.

  처음 교회개척할 때에 사람들이 교회에 구경하러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배드리러 왔음에도 “날 설득해 봐” 하는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교회가 자기를 설득시키기를 바랍니다. 마치 음식 맛보러가듯이 말입니다. 목사가 설교 잘 하나 못하나 구경합니다. 지극히 타락한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방문은 기대조차 안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마음도 없습니다. 예배 시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도 안합니다. 아니 우리는 주일아침마다 언제나 이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이게 습관입니다. 그리고 마치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들에게 찾아오셔서 임하시고 하나님의 존전에서 사람들 전체가 사로잡힘을 당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느낄 수 있는 것등의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지도 않습니다. 모든 것이 형식적으로 잘 되어가는 것같은 자만에 빠집니다. 이게 형식화된 예배의 특징입니다. 오늘날 예배가 이렇습니다. 이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옷을 잘 차려입고 예배에 오고, 또 늦지 않게 늘 빠지지 않고 오니까 우리는 예배를 잘 드리는거야” 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들으십시오. 예레미야 시대 때에도 그렇게 예배를 잘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나님은 수단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 제사, 헌금을 드렸던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알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부흥이 오려면 신앙의 본질이 반드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없이는 아무리 그 예배가 예배다운 모습을 가지고 드려진다 할지라도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아름답게 드려도 형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흥을 예비하는 자들의 예배를 바꾸십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부흥이 올 때 담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형식적인 예배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바른 예배가 되려면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로 바뀌어야 합니다. 호세아 6:6은 본질이 무엇인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질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는 겁니다. 그 분을 성령의 조명으로 발견하면 그 분 앞에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그 분이 가장 소중하기에 그렇습니다. 의식은 담는 그릇일뿐입니다.

  따라서 예배를 통해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에 왜 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그 분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인격체이신 예수님을 더 알기를 원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을 좇아다니던 백성들 모두가 다 “할렐루야” 외쳤지만, 다 감격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사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주님을 아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랬지만 베드로처럼 예수님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던 것처럼 치유나 기적이나 감격을 위해서 오면 주님을 아는게 아닙니다. 큰교회에서는 한 시간 전에 와야 교회당 안에 입장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렇게 열심을 내어도 그 목표가 주님을 알기 원하고 전존재로 사랑하는 일에 맞추어지지 않고는, 주님과의 살아있는 교제가 없으면 언젠가는 떠납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목적이 달성되면 얼마가지 않아 떠납니다.

  우리나라 성도들 보십시오. 전에는 참으로 기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리 많이 기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살만큼 살기 때문입니다. 어려웠을 당시에는 얼마나 많이 사모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 나오는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와 수많은 군중들의 차이가 보이시나요?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그 분을 찾아서 오는 게 예배입니다. 그 분을 만나러 오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 분을 만나 경배하고, 그분의 행하심을 감사하고, 찬사하기 위해서 오는 게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인하여 기뻐하는게 예배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게 찬양과 경배입니다. 사실 부흥 때마다 찬양이 넘쳤습니다. 부흥때에는 찬양을 멈추라고해도 멈출 수가 없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니까 그렇습니다. 밤새도록 찬양합니다. 그런데 찬양하되 5대독자가 자식을 낳았기 때문에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기뻐하며 찬양하는 겁니다. 열린예배를 목적으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이 없는 예배는 아무리 그럴듯한 형식을 갖추었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전존재로 사랑하는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께 찬사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을 높이며 사모하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놀라웁게 임하실 것입니다.

  타락된 신앙일수록 예배는 형식적이 됩니다. 요즈음은 예배순서만 달라도 이단이라고 정죄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사람들이 주일날 찬양과 경배를 하면 "아니, 주일 대예배 시간에 무슨 복음성가를 부른단 말야. 이 교회 이단 아냐?“하면서 손가락질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는 작곡 당시 대부분 복음성가라고 일컬어졌던 곡들입니다. 찬송가들의 대부분이 그 당시 부흥이 임했을 때 작곡된 곡들입니다. 작곡 년대를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 포도나무교회를 개척하고난 후, 약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 남은 자는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제게 찾아와서 ”이곳에 장로교회 없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장로교, 침례교 따지는 것이 다 육체인데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200명씩이나 찾아왔었는데 왜 5명도채 남지 않았는가 하면 메시지가 보편적이 아니고, 껄끄러웠으며 예배형식이 그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묵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끝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않으니까요.

예배 회복에 있어서 왕도는 없습니다

  지금 이 설교는 목사님들이 들으시고 본교회로 돌아가셔서 바로 적용하는 방법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방법은 없습니다. 사람들의 관점에서 사람들 끌어모으는 방법은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의 임재와 진정한 은혜가 임하는 쉬운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수를 보기 원하여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소수를 통해서 한 나라를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사에 나타난 부흥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 소수는 사람들의 평가가 어떠하든, 사람들의 취향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기에 타협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전하고, 하나님의 임하시기를 사모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들어가기를 열망하고,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백성을 치유하시고 이땅을 구원해주시기를 원하는 그 열망을 가지고 주님과 동행하는 소수의 성도들을 발견하기 원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기도’를 지은 리챠드 포스터라는 분이 계십니다. ‘기도’라는 책에 보면 하루는 그가 오래곤주를 지나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해변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느껴졌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와서 해변을 따라 거닐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입에서 “하나님, 너무 아름답군요”라는 소리가 툭 튀어 나왔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것을 기대하고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나님께서 또렷한 음성으로 대답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 때 리챠드 포스터는 자기의 일생을 걸쳐 특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리챠드 포스터는 그 때를 회상하며 하나님의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고 합니다. “리챠드 포스터, 저 거대한 고목나무를 보느냐? 저 속은 썩었단다. 오늘날 내 교회가 저런 모습이 저런 모습이란다” 정확하게 그렇습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거대한 고목처럼 규모가 있습니다. 예산도 있고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도 없습니다. 사람 앞에 잘보이는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어떠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평가를 소중히 여기는 담대함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리챠드 포스터의 책 “기도‘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또 지나다가 커다란 바위를 보았는데 하나님께서 또렷하게 ”너희 교회가 저렇게 되어야 한다“ 말씀하시더랍니다. 리챠드 포스터는 그 일 후, 사람들에게 굴복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의 압력에 무릎꿇지 않고, 엘리야와 같은 자세를 가진 리이더를 세워달라고 그 날부터 기도하기 시작했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 소수만 붙잡으셔도 한국을 바꿀 수 있습니다.

예배 회복에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예배회복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최상의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아가 인격체이신 그 분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중심에서부터 그 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분께 찬사를 드리는 찬양과 경배. 그러나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죽은 정통주의자들은 도리어 그것을 역겨워합니다. 얼굴을 붉힙니다. 예배시간에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타협합니다.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 때 유념해야 할 것은 100% 중 10%만 타협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90%가지고 되질 않습니다.

3
성령님의 자리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말을 좋아합니다. “질서대로 해야지, 질서대로 말이야”. 오늘날 교회는 마치 질서의 노이로제에 걸린 것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질서대로 해야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 부분에 있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의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은 그 당시 고린도 교회가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감에 있어서 혼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내에서 질서대로 하라는 말씀이지 성령님께 자리를 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차서를 따라 순서있게, 질서있게 해야합니다. 또한 동시에 성령님을 소멸치 않아야 합니다.

  모든 일을 순서를 따라 하는 것과 성령님을 소멸치 말아야 하는 이 둘은 같이 가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둘이 조화를 이루는 예배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흥분, 거짓된 의식. 이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질서를 따라 행하는 것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감정주의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소위, 영성사역 한답시고 이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자, 여러분, 이제부터 찬양하겠습니다. 일어서십시오. 힘차게 부르세요. 자, 박수칩시다. 더 세게 치세요. 더 세게 치세요. 자, 기쁨의 춤을 추셔야지요” 이것은 예배를 조장하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상관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성령을 소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이 임하시면 춤을 추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그 춤은 조작된 춤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서 그 분의 은혜가 너무나 감격스러워 그 분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추는 춤이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가 돌아오니까 너무 좋은 나머지 바지가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추었던 춤과 조작된 춤과는 다릅니다.

감정과 감정주의는 다릅니다

  어떨 때에 우리는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뇌와 같습니다. 이것은 감정주의입니다. 물론 성령이 함께 하시는 예배에는 감정이 따라갑니다. 그러나 감정은 있지만 감정주의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감정에 빠져들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물론 감정은 있게되어 있지만 감정주의가 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쁨이 있어 감정이 솟구치는 것과 감정을 조장하는 것은 달라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만나 포옹할 때 “포옹은 천천히 하는 거야. 너무 오래 있어도 안되는 거야. 일어서. 앉어”. 이렇게 하는 연인들은 아마 없을 겁니다. 사랑하니까 만나면 감정이 솟구치는 것과 감정을 조장하는 것은 다릅니다.

  우리 예배 가운데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감격과 기쁨은 주님과의 만남에서 나와야 합니다. 기법을 동원하고 사람들을 동원하고 감정을 조장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흥이 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집을 방문하셨기에,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찾아오셨기에 그곳에는 감사와 감격이 있게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져주시니까 감사와 감격 가운데 눈물을 흘립니다. 때로는 애통합니다. 감정과 감정주의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든 일을 차서를 따라 순서있게 하는 축이 있습니다. 또 한 축은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질서있게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일을 능란하게 할지라도  문제는 그 요점에 있어서 너무 명확하게 하려다가 그만 성령을 소멸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것을 막는다는 구실 아래 엉뚱하게 거짓된 다른 입장으로 넘어가버립니다. 성령을 소멸하면.

더 나아가서 오늘날 여러분은 교회 생활에 있어서 매우 두려운 성향을 띠고 있는 것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주목하셨습니까? 모든 것이 다 짜여져 있습니다. 어느 한 시점을 향하여 모든 일들이 행해져야 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모든 항목이 미리 정해져 있고 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시작하여 어느 시점에 마쳐야 하는 것이 다 되어 있습니다. 목회를 하는 제 친구 가운데 어떤 이들은 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순회 설교를 하면 할수록 이러한 일을 더 많이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적인 교회에서마저도 강사로 오는 목사에게 순서가 적힌 종이를 준다는 것을 저는 반복적으로 듣습니다. 그리고 그 문자 그대로 그 앞에다 그 순서지를 놓고 그대로 행할 것을 종용합니다. 11시에 시작합니다-성경을 봉독하고 또 거기 순서지에 적힌 모든 것을 다 진행하여 12시가 됩니다-그런 다음에 축도가 이어집니다. 제가 볼 때 이건 아주 심각합니다. 그처럼 길지 않은 설교가 덕이 될 것이 없다는 것을 저는 압니다. 설교의 길이를 위해서 설교를 길게 늘어뜨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프로그램에 너무 매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이처럼 묶어놓는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과 똑같습니다. 11시 시작해서 12시가 되면 마칩니다. 너무나 똑같습니다. 시간이 정해져 있어 좋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성령을 소멸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까 우리는 빌립보서에서 참다운 성도의 특징 중 하나가 성령으로 예배하는 자였다고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라디오 설교도 하지 않았습니다. 라디오 설교를 하다가 성령이 임하면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라디오 설교는 정해진 시간에 마쳐야 하는데 성령이 임하시면 어떻하느냐 하는 이유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의 한 모습을 고린도전서 14:26에서 보겠습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 “모일 때”는 예배를 일컫습니다. “계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예언을 뜻합니다. 이 구절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셨습니다. 찬송시도 있고, 설교가 있고, 예언이 있고, 방언도 있고, 방언 통역함도 있었습니다. 이 토대 위에서 질서있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을 감당하되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하라는 말입니다. 순서지에 정해진 순서를 따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십시오. 그 분의 사역에는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갔습니다. 사도들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의 사역에도 말씀과 성령이 같이 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성령의 자리를 마련해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성령님이 통치하시며,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과 연관이 있습니다. 즉, 예배 가운데 본질이 있고, 메시지가 회복되어 하나님을 알고자 함이 추구되면 그곳에 성령님이 임재하십니다. 반면에, 두 부분이 회복이 안되면 성령님께서 임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령님을 구해도 회복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세 부분이 함께 가는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둘째는 성령님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올 때에 주님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또 성령님의 임재를 환영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셋째, 성령님이 주권자이시기에 그 분이 원하시는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 분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지 환영하는 것입니다.

  외국의 어느 세미나를 갔을 때입니다. 예배 시간에 갑자기 강사목사님이 몇몇 분과 의논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자리에 선교사로 나가실 분들이 계시다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분들을 축복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로 나가실 분들을 나오게해서 축복해드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놀라웁게 함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행하시는 일을 환영한 것입니다. 만약 인도하시던 목사님이 생각하기를 “아이구, 다음 순서 진행해야지” 했더라면 성령님의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예배의 주권자이시기에 그 분의 움직이심을 환영해야 합니다. 어느 예배에서는 인도자를 통해서 “여기 이 자리에 구원받을 사람이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게 하여 구원을 베푸는 역사도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에는 그 사람의 이름까지도 떠오르게 하셔서 역사하시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의 현실은 사데교회와도 같습니다

  지금까지 죽은 정통주의의 특징 세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의 예배가 정확히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의 사데교회같습니다.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있습니다. 교리적으로는 정통이고 살았는데 실제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목회자들과 장로들이 더 살아있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합니다. 저 역시 목사이지만 성도들을 보면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성도들이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같아서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형식적인 예배, 보편적인 메시지, 성령님이 없는 예배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실제가 경험되질 않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에는 뿌듯해하지만 이틀을 못가서 쏟고 또 교회에 와서 채워야 하는 게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람쥐 챗바퀴돌 듯 신앙생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하셨지만 생명이 없습니다. 생수의 근원을 따라 날마다 살아가야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교회에 가서 생수 한 모금 주면 그것 마시고 와서 며칠 견디다가 또 목마르면 교회에 또 가서 마시고 와야만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본질이 살아있는 예배,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예배, 성령님이 주관하시는 예배로 회복되어야 합니다. 담대하십시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담대하셔야만 바꿀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게 아닙니다. 회복이 안되면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분위기나 전통, 주변 사람의 평가 때문에 주님의 길에 서지 못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리챠드 포스터가 기도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교회회복과 다가오는 하나님의 부흥을 위해 쓰임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라며, 예배의 회복을 위해 힘쓰시는 목회자님과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