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교/수원L.M.T.C.

탄자니아 선교 LMTC 강의10.10.23일제일교회.hwp

미션(cmc) 2010. 10. 28. 07:58

탄자니아 선교

  탄자니아 선교 LMTC 강의10.10.23일제일교회.hwp

동부 아프리카의 선교역사

독일의 루터교 선교사인 존 루드윅 크라프 가 1884년 동부 아프리카 해안에 있는 항구 도시인 몸바사에 상륙하여 복음을 전하므로 시작 되었습니다.

그는 소명감이 뛰어나고 열정적인 선교사로서 선교사역 초기에 부인과 새로 태어난 어린딸이 열병으로 죽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내륙으로 들어가며 복음을 전했다.

또한 언어적 재능도 가지고 있어서 해안 지역에 도착한지 4주만에 스와힐리어를 이해하고 말할수 있을 정도로 통달 하였고 1년만에 신약성경 전체를 스와힐리어를 혼자서 번역할수 있을 정도로 언어가 능숙 하였다.

 

탄자니아의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사역은 1992년 케냐에서 선교하던 그루터기 선교사 손광주 선교사가 첫 번째 가정으로 5살 3살된 자녀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살필 힘도 없는 털털 거리는 길을 케냐에서 버스를 타고 들어와서 초창기 들어오는 많은 선교사들의 정착을 도왔고 지금도 달에살람에서 사역하고 있으며

아루샤에 최재선 선교사가 두 번째로 들어왔고 이진섭 선교사 ,감리교 김정임 선교사, 본인은 다섯 번째인가 여섯 번째로 들어갔다.

현재는 탄자니아 전체에 129 가정중 32가정이 사업이나 공부를 하고 있고 97가정이 선교사이다. 싱글 여선교사 22명이 포함되어 있다.

목사 선교사는 교회개척과 제자훈련 ,학교 사역등을 하고 있고 평신도 선교사는 우물파기,자동차 정비, 기술교육 (가구),의사, Youth with Mission에서 행정과 초등학교 교사 DTS훈련학교 등의 사역들을 하고 있다.

 

박은순 선교사의 :

 

93년-97년까지

1.열정의 시기

2.하나님이 나를 사용 하신다.

3.일을 시작 해야겠다.

4.가방을 잡아 당겼으나 힘이 부족하여 뺐겼다.

주변에 공장 사람들이 점심시간 이어서 점심을 먹고 앉아서 쉬고 있었으나 아무도 도와 주지 않았다.

탄자니아를 알아가는 시기.

5.레시라 교회 개척

팀의 다른 누구보다 먼저 일을 시작.

다른 선교사들은 아직 시작 하지 못했고 준비 단계 였으며 이진섭 선교사가 6개월후에 칼빈 신학교 시작.

6.모시 중고등학교에 도서 대여.

학생들이 읽을 서적이 아무것도 없었다.

본인의 100불 이면 콘테이너 서적 센터의 모든 서적을 다 살수 있었다.

스와힐리어로 번역된 책이 없기도 했지만 책방 주인이 돈이 부족 하여 책을 많이 구입하지 못했다.

영어로 된 책 구입도 힘들었다. 89년도에 탄자니아가 나라문을 열었을 당시에는.

현재는 여러 가지 번역된 서적이 많다. 그러나 아직 부족 하다. 왜냐하면 번역을 해야 하니까. 주로 케냐에서 번역된 책들을 사용하고 있다.

 

 

안식년 97.7.19-97.12.23일

7월19-10.30일은 교회에서

11.1-12.22은 영국에서 언어연수

OM 수련원

 

98년-2002

1. 2차 사역을 시작해야 한다는 부담감.

그러나 사역비가 없었다.

본인은 그때 까지는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선교를 한다는 생각 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사역비를 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2.성경학교를 시작

GMS 탄자니아 지부는 각자 신학교를 설립할수 없고 달에살람 신학교를 통해서 만 전도사를 공급 받을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신학생이 턱없이 부족했다.

더군다나 달에살람 가까이에 있는 선교사들이 다 차지하고 먼곳인 아루샤에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자기들이 미안한지 한 사람을 보내왔다.

그런 형편이어서 대책을 강구하게 되고 각자 지회에서 2년의 전도사 과정 성경학교를 개설해서 학생들을 모으고 2년코스를 마치면 달에살람 신학교를 보내서 4년의 목사과정을 밟게 하는 안이 통과되었다.

본인도 바로 시작 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같이 동역하던 아담 운전사가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 1명을 더 데려오면 시작 하자고 하고 곧 2명이 성경학교 공부를 시작 하였다.

그들은 앵글리칸 인스티튜트에서 과정을 마친 사람들 이었다.

2년과정을 잘 마치고 1명은 레시라교회 사역을 3년 잘 하였다. 모세 전도사 였는데 세례 문제로 오순절 교회를 개척 하여 떠났다.

다른 1명은 시골에 가서 개척을 하는 것을 부인이 반대하고 JESUS필름에서 오라고 하여 갔다. 필름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요즈음에는 앵글리칸 목사 안수를 받고 여러곳을 다니며 JESUS 필름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JESUS 필름 사무실이 앵글리칸 본부 사무실 안에 있다. 책임자는 미국 선교사이다.)

 

성경학교는 지금 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졸업한 인원은 많지 않지만 그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동역을 하고 있다.

외국 사람이 성경학교를 하니까 무엇을 바라고 많이 공무를 시작 하지만 생활에 도움이 안되니까 거의 떠나고 남은 사람도 자기들의 생활을 보장해 달라고 하여 공부를 시키는 것이 항상 많이 고민이 된다. 그러나 공부를 시키지 않으면 전도사가 없고 교회도 시작할 수 없으니 머리가 너무 아프면 몇 개월 쉬고 한다.

지금도 성실하고 소명감 있는 학생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사회 분위기 자체가 나라에서 모든 것을 공급하여주던 사회주의 하에서 자란 사람들 이어서 그 생각을 바꾸기에는 지금 시작해도 1세대 25년은 지나가야 하는데 아직 시작도 안했으니 언제나 공짜를 아니 나라에서 다해주던 생각이 바뀔런지 모르겠다.

사회주의를 시작한 초대 대통령이 선생으로 불리운다. 그래서 선생인 본인도 자기들을 책임져 달라는 것이다.

 

레시라 투마이니 교회 이외에 카라투교회, 므왕가교회, 일케리 지역에 교회를 시작했다.

한국에 아이엠 에프 사태가 터진 뒤여서 사역비가 700불이 오기 시작했다.

교회5곳을 운영할 수가 없었다.

2년여를 버티다가 카라투 땅을 판 주인이 땅을 내놓으라고 할 때 그래 땅을 도로 주마하고 교회문을 닫았다.

탄자니아 사람들은 고발 고소를 잘해서 고발 당하는 것이 골치 아프기도 했고 두려웠고 돈도 없던 나는 문제가 생기자 곧 철수하고 말았다.

물론 이런 경우를 전혀 용납할수 없었던 본인은 마음이 무척 아팠다.

땅주인은 돈을 좀 주겠거니 했지만 본인은 탄자니아 지부에서 매달 가불해서 쓰던 형편이라서 한푼도 없는 상태였다.

일케리 지역은 전도사가 없어서 레시라 교인들이 열심히 전도하여 개척한 곳이지만 더 지속되지 못하고 말았다.

다른 3곳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2002-2005년 2월18일

1. 개척한 교회 계속 돌봄

2. 투마이니 교회 건축 시작.

학생들이 2학년이 되면 교회를 개척한다.

2002년 어머니가 소천 하시고 남은 돈을 형제들이 본인에게 주었다.

그 돈으로 엘루아이 땅을 사서 교회를 시작 하였다.

6개월쯤 됐을 때 마을 유지가 차를 막고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자기에게 돈을 좀 달라는 행동 이었지만 무시했다.

그런데 에마이레테에서 응가리 아푸시가 자기가 땅을 10 에이커 줄테니 유치원과 교회를 개척 하라는 것이다.

몇 개월을 기도해 보자고 하며 지내다가 전도사들이 졸라서 가보니 마음에 들었다.

기증한다던 10에이커는 4에이커로 줄었지만 개인적인 기증이 아닌 마을에서 기증한 것으로 하여 서류를 만들고 마을로부터 동의를 받고 투마이니 교회를 시작 하였다.

엘루아이에 지었던 함석을 옮겨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 하였다.

골짜기가 밑에 있어서 코뿔소가 올라오는 경험을 우리 전도사들이 하였다.

엘루아이 교회의 함석을 옮기는 첫날밤에.

그래서 본인차의 헤드라이트를 키고 경적을 울려서 쫓았다고 했다.

 

교회건축이 문제였다.

탄자니아에 처음오는 선교사들은 오리엔테이션을 받는 제도가 있다.

영국에서 금방 박사학위를 받으신 배 선교사님이 도착 하셨다.

오리엔테이션중에 아루샤에 오셨는데 부지를 보시고 수원제일교회 목사님에게 메일을 보내셔서 당회가 교회 50주년 기념 교회를 탄자니아 아루샤에 건축하게 되었다.

건축하기 위하여 자재를 싣고 가서 밤을 보내기도 했는데 새벽에 2시쯤 안개가 올라오고 추워지기 시작한다.

자동차 바닥에 누웠는데 등이 시려서 잠을 잘수가 없었다.

새벽기온은 11도쯤 되었지만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이라서 체감온도는 10도 미만이지 않았나 싶다.

덜덜 떨려서 얼마나 추워서 떨었던지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다.

 

본인은 수원제일교회 목사님에게 메일을 보냈는지도 알지 못했었다. 후에 들었다.

 

땅을 기증 받은 투마이니 교회 시작과 건축은 일사천리로 하나님이 역사 하신 것을 간증한다.

 

초등학교 설립

케냐행사에 오시면서 아루샤에 오신 김영상 목사님이 계셨다.

투마이니 헌당식에 참여하러 오셨던 최문철 장로님과 같이 참석을 하셨다.

그 자리에서 초등학교를 지어 달라는 주민들의 간청을 들으신 목사님이 생각을 해 보겠다고 답하셨다.

현지인들은 그것을 학교를 지어주겠다는 말로 받아 들였다. 통역은 지부장이 했었다.

김영상 목사님이 한국에 가셔서 아프리카 선교회를 조직 하시고 초등학교 건립을 위한 호소를 하셔서 우리교회도 알고 있었다.

 

2005년 2월-2005년6월30일 안식년

한국에 나와서 보고를 하고 우리교회에서 헌금의 시간이 있었다.

많은 성도님들이 헌금을 해 주셔서 학교를 건축하게 되었다.

본인이 계획을 한 학교는 유리창이 없는 상태였다.

안식년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새로운 대통령이 학교 유리창을 해 주겠다고 약속한 상태였고 미국의 원조를 받아 도시 학교들은 유리창을 많이 끼운 상태였다.

그때 까지는 학교에 유리창이 거의 없었다.

일모리죠 학교도 유리창을 끼워야 했다.

바닥도 흙바닥으로 계획 했었는데 시멘트 바닥으로 수정했다.

학교 건축 인가가 나기에는 부족하지 않았다.

규정상 물이 있어야 하는데 원래 물이 없는 지역 이어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교육청에서는 교사 숙소와 부엌은 외국 사람이 짓는 것이니까 차츰 지을 것으로 믿고 학교 허가를 내 주었다.

탄자니아 초등학교는 7년제이다. 일모리죠 초등학교는 6년이 되어서 6학년까지 350여명이 공부하고 있다.

본인은 하나님이 설립하신 투마이니 교회와 학교를 통하여 하나님이 탄자니아의 큰 일군을 배출 하시리라 는 믿음을 가지고 기대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학교 건축은 아직 절반정도 되었다고 얘기할수 있다.

교실2개와 부엌, 교사숙소 강당...이 꼭 필요한 상태다.

교사들의 복지 시설은 고사하고 물도 자기들이 멀리서 길어 와야 한다. 8킬로 떨어진 곳에서. 전기 시설과 TV를 볼 수 있는 세틀라이트 설치도 필요하다.

건물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고 보면 된다. 미안한 마음이다.

이렇게 있다간 교사들이 시골인 일모리죠 학교로 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청소년 센터

아루샤는 탄자니아 제3의 도시다.

주변의 도시들에서 젊은이들이 몰려온다.

제가 사역을 하는 레시라 마을의 젊은이들도 소를 기르는 후계자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도시로 나갔다. 아이들과 어른만 남아있다.

도시로 나간 젊은이들은 무엇을 하는가?

산업이 없으니 할 일이 없다.

다른 사람의 가게에서 점원을 하거나, 밤에 집을 지키는 일을 하거나 공무원이나 교사가 직업의 대부분이다.

일이 없어서 마약 성분이 있는 풀을 씹어먹고 훔치거나 강도가 되거나 한다.

이 젊은이들 중에 교회를 통해 추천받은 신실한 일군들을 키우는 것이 저의 남은 시간의 해야 할 일 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학교를 통해 전도사들을 키워 교회를 세우고 기술교육을 할 것입니다.

쉴수 있는 공간도 필요하고.

땅을 4에이커 5000평을 사 놓았습니다.

이곳에 건축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합니다.

물도 끌어와야 하고 전기도 수 킬로나 되는 곳에 전봇대도 세워야 합니다.

 

해야 할 일 들을 생각하면 한숨이 나올때도 있지만 마음을 다잡고 하나님께 호소 합니다.

눈물이 먼저 앞서고 마음이 복잡해 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면 편안해 지기도 합니다. 충만할때는.

별 뾰죽한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하나님에게 맡겨야만 해결이 나니까요.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사실 못하는 것입니다.

소원을 주신 하나님이 이루실 줄로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슬람

마사이들은 이슬람을 싫어 합니다.

마사이들이 살고 있는 아루샤에는 모스크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막강한 자금력으로 학교를 짓고 구제를 하면서 모스크를 짓고 있습니다.

마사이들이 카이로에서 나올 때 술탄이 우리에게 협조하면 너희들을 잘 대우해 주겠다는말을 노우(마아) 하고 탈출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노우피플 마아아사이입니다.

중고등학교를 세우고 기숙사를 짓고 이슬람식의 교육을 합니다.

지금은 학교에 학생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학생들이 가득차고 이슬람 교육을 받은 마사이들이 배출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제 마음이 급하고 답답 합니다.

마사이들이 살고 있는 시골에 모스크들이 자리를 잡아 갑니다.

급속도로 이슬람들이 쓰는 모자가 유행 합니다.

우리 마을의 체어멘도 그 모자를 썼길래 이슬람으로 개종했냐고 물어 보니까 좋아 보여서 썼다고 대답했지만 그 사람들과 가까운 친분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밀고 들어오는 이슬람의 세력이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o. 제가 사역 하면서 기록해 두었던 몇 개의 글들을 읽어 보겠습니다.

2010.2.4(목)

화장실 거울에 비친 오른쪽 눈의 흰자위가 아직도 발갛다.

지난주일 세례식을 했다.

아루샤 사람들은 세례 받는것을 인생의 중요한 예식으로 생각해서 세례를 받는날은 음식을 준비하고 마을 사람들을 초청해서 같이 즐거움을 나눈다.

모두 6명이 세례를 받았다.

2명은 침례를 받겠다고 물을 뿌리는 세례는 거절했다.

어쨌든 무사히 잘 마쳤다. 세례 문제로 비록 청년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지만.

 

2가정에서 잔치를 하니 오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첫 가정은 나를 초청 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갔다.

반갑게 맞이한다.

집안의 어른이 울타리 까지 나와서 내손을 잡고 의자까지 안내한다. 물론 남자 어른이다.고맙다.

차이를 마시면서 생각하니 다른 가정에서 오라고 한 것이 생각이 난다.

음식은 먹지 않고 다음 가정을 위해서 가야하니 이해해 달라고 하고 일어선다.

다음 가정은 식사를 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사를 시키는데 보니까 첫째 부인과 셋째 부인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남편 이름은 미타라미 이다.

마을의 초상집 집에서 많이 보던 얼굴이다.

몇몇 이웃의 남자들과 함께 앉아 있었는데 모두 반갑게 맞아주고 인사를 한다.

이곳에서 필라우 라는 식사를 하고 다음집을 향해 떠났다.

이 집은 내가 밥을 가져 오라고 부탁 하니까 3분 이내에 가져와서 고마웠다.

다른 집들은 모두 자기들의 행사가 끝나야만 가져왔다.

 

다음 집으로 이동 하는데 집이 산위에 있어서 산길로 가야한다.

처음에는 로즈네 집을 가려고 하다가 비가 많이 와서 길이 모두 패여 차가 갈수 없어 사람들 모두 내려서 걷는 바람에 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하여 가까운 집부터 가자 하고 교회로 다시 돌아가 크리스토퍼 집으로 갔었다.

산길을 걷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전혀 힘들지 않았고 현지인 아줌마들 보다 내가 앞서 걸었다.

내 몸이 나는것 같았다.

나는 살이 조금 빠져서 힘이 없을 줄 알았다.

지금 이글을 쓰는 이유도, 쓰게 했던 이유도 모두 기적 같은 몸의 힘 이었다.

왜냐하면 6집을 순방하는 동안 전혀 피곤치 않았고 즐거웠다.

돌아오는 길은 몸이 축 늘어져서 잘 걸을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즐거움으로 일을 하면 이렇게 힘이 나는 것 을 다시 한 번 체험 할수 있었다.

내가 즐겁게 일을 한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즐거운 마음을 주셨고 몸이 가벼워서 나는것 같았고 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내몸은 기적을 체험하고 있었다는 생각이다.

 

 

잔치에 초청을 해서 가겠다고 약속했던 로즈네 집으로 갔다.

청년들이 이곳에 다 있었다.

예배는 안드리고 음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예배보다 음식준비가 중요하냐고 청년들에게 이야기 하고 예배에 참석 하라고 한후 사진을 찍고 소다를 마셨다.

마을의 반장이 극진히 챙겨준다.

삶은 염소 다리1개를 내것으로 남겨 두었다가 내온다.

 

로즈네 집은 큰 잔치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지금오지 않은 사람들도 저녁 시간까지 꾸준히 올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6집을 다돌고 나니 뿌듯하다.

안 갔으면 계속 기다리고 있을 뻔 한 집도 있었다.

 

나는듯 이 다닌 것 같았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울을 보니 오른쪽 눈 흰자위가 실핏줄이 조금 터졌고 그것이 오늘까지 낫지 않고 그대로 발겋다.

빨갛지는 않고 조금 강도가 약한 표현이 맞는 발겋다는 말이다.

 

마칠말을 찼는다.

하나님 일은 하나님이 직접 하신다.

그런데 왜 나는 미리 걱정을 하는 것일까 ?

언제나 이 걱정을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길수 있을까?

오늘도 이문제의 해답을 찾는다.

 

므왐팜바의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어제 오늘 수업이 없어서 지금 여유를 갖는다.

2010 2.4일 아침 10시 35분에 씀

 

2010. 2.4. 목

 

오늘은 내가 탄자니아에 도착한지 17년 되는 날이다.

93년 2월4일 아루샤에 도착 했었다.

이제는 내가 여기서 나고 자란것 같은 착각이드는 때도 있다.

아니 여기가 내 곳이라는 생각이다. 가끔 드는것이 아니라, 항상 무의식적으로 내 땅이라는 말이다. 한국이 내 국적이라는 생각은 가끔든다. 나도 깜짝 놀랄때가 있다.

지금 생각한 건데 , 아 오늘이 내 생일과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내 생일은 9월달 이지만 탄자니아에 와서 선교사로서 시작한 내 생일과 같은 날이다.

혼자 이 날을 기념하며 나는 탄자니아 사람이 되었구나 라고 생각 한다.

 

 

 

 

세 번째 이야기

 

어느날 아침 문득 나 자신에게 질문해 보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많은 불평 없이 지냈던 이유들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떠 오르는것이 내가 이곳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사람들이다.

조금 순진하다. 그리고 잘 웃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 생각만을 주장하면 힘들다.

탄자니아는 국어인 스와힐리어부터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반바퀴쯤 돌려서 자기가 원하는것을 나타낸다.

 

화장실 가는 이야기.

kujisaidia라고 하는데 뜻은 나 스스로 돕는다. 이다.

내 몸을 내가 스스로 돌보러 간다, 스스로 도와주러 간다 라고 말한다.

 

아침에 길을 가면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를 한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끼리도 인사를 한다.

하바리? 은주리.

맘보? 사피.

이렇게 인사들을 하는 모습에 내 마음이 더욱 감동을 받는다. 선교사도 못하는 것을.

 

잘 웃는다.

입들이 커서 웃는 모습이 확실하게 보인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잘한다.

진심일까 하고 느껴질때가 간혹 있기는 하지만 그만큼 웃는 것이 생활화 된 것 같다.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는 그들의 모습이 예쁘다.

웃지 않고 있으면 오히려 이상하리 만큼 감사하고 잘 웃는다.

 

2.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주셨다.

자동차로 5시간쯤 걸리는 바바티 가는 길은 절반은 비포장도로다.

그리고 황량한 지역을 많이 거쳐 간다.

나무들이나 푸른 숲이 있는 곳은 그것대로 멋있다.

먹지 못하는 야자가 달리는 야생야자 나무가 있는 곳은 그곳대로 아기자기해서 좋고 가시나무가 많이 있는 숲은 사슴들과 원숭이들이 나와서 좋고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은 탁 트인 장면과 모래가 멋있고 자연 그대로의 풍경 자체가 카메라에 담기에 좋다.

마사이부족들이 있는 지역은 드문드문 있는 가시나무가 있는것이 풍경에 양념같고

그 옆에 소나 염소들이 노닐며 마른풀을 뜯거나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모습이 나를 즐겁게 한다.

시내를 벗어난 모든곳이 자연 그대로의 거친 모습들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에게 주셨다.

인간의 손이 가지 않은 자연 그대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즐거워하게 하신다.

 

선교도 그렇다.

처음에는 이 커다란 나라의 아주 작은 한부분이라는 사실이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풍년이 들어서 곡식이 풍성할때는 뚱뚱한 아줌마들이 보기에 좋았고 흉년일때는 마른 모습들에 마음이 아팠지만 주일날 교회 뒷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기쁘고 교인들을 만나는 것이 즐거웠다.

교회를 개척하고 성경학교를 시작하고 학생들을 만나며 가르치는 것에 은사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사역을 기쁘게 감당하게 한다.

얼마전에 느끼게 된 것인데

 

하나님은 나를 당신의 뜻대로 변화 시키신다.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

나는 원래 불평하는 마음이 많았다.

자라온 환경이 그랬다.

학생때는 선생님을 비평하고

자라서는 정부의 하는일과 윗 사람과 상대방을 비평하고 살았다.

나 자신이 이렇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내가 앞으로 이 모든 것들을, 이런 생각들을 극복하고 잘 할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도 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대부분 감사하고 있다.

어려운일 들이 왜 없겠는가?

물질이 항상 부족하다.

우리 집에 오는 사람들의 99퍼센트는 물질이 필요해서 오는 사람들이다.

현지인들이 나에게 하는 말은 자기들의 필요다.

꼭 물질이 아니더라도 부족함을 이야기 한다.

날마다 베풀어야 하는 상황이 힘들게 한다.

정해진 예산이기에 어쩌다 주게 되는데 그럴 때 주지 못하는 나의 마음은 사흘 정도는 아프다.

아픈 마음이 계속 생기면 힘들다.

아프고 상처받은 날들이 계속되면 맛있는 것이 먹고 싶을 때도 있는데 먹으러 갈 곳이 별로없고 같이 나갈 사람도 없다.

그러나 성경학교 학생들과 만나서 가르치면 잊어버리게 된다.

또한 아침(새벽) 기도회가 끝나면 마음이 개운하다 힘이 난다.

우리 성경학교 학생들과는 아침에 기도회를 합니다.

해가 뜨기 전 어두울 때 다니면 강도들이 있어서 위험하기 때문에 새벽 기도회는 어렵습니다.

해가 6시 30분에서 50분쯤 뜨는데 6시 10분에도 깜깜 합니다.

그래서 6시반에 기도회를 하고 하루를 시작 합니다.

 

이것은 다른 문젠데 한번 생각해 보려한다.

1997년 첫번째 안식년을 한국에 갔을 때 나는 새벽 기도회에 거의 참석을 하지 못했었다.

일어나야 하는데 못 일어났다. 무엇인가 나의 가슴을 꽉 짓누르고 있어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선교사가 교회가까이 있으면서 새벽 기도회에 참석을 못하니 부끄러웠지만 나를 누르는 힘이 무거워서 내 힘으로 밀칠수가 없었다.

그때 누워서 느낀 것은 내가 많이 두려워하면서 살았구나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탄자니아에 도착했을 때에 열심히 일했고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뿐이었지 힘들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었다.

누가 평생을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수 있겠는가?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나의 몸과 마음은 힘들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은 치안에 더욱 두려움을 느낀다.

밤에 지키는 사람 없이 한4년 살았었다.

GMS 탄자니아 선교사 총회를 위해서 수도인 달에살람에 간 새 도둑을 2번 맞았고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밤에 도둑이 들어와서 사무실의 컴퓨터를 가져갔다. 지금도 비오는 밤이면 신경이 곤두서있다. 지키는 사람이 있는데도 작은 소리에도 민감하다.

어디를 가든지 가방을 꼭 끼고 다닌다.

언제 뺏길지, 차문을 고장내고 들어와 물건을 가져갈지 항상 신경이 곤두서있다.

안식년을 가야할 때가 된 것이다.

 

그러나 지내온 것이 모두 감사한 지금이다.

무사하게 지내온것.

감사한 마음을 주신것.

자연을 보고 즐겁게 하신것.

사람들이 좋게 느껴 지는것.

가난하게 보여서 도둑들이 많이 오지 않는 것 까지도.

더욱더 감사하며 살으련다.

하나님께, 이 나라에 ,이웃들에게 ,후원자들에게

 

본인의 기록을 중심으로 나누었습니다.

그 동안에 저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웠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삶을 배웠으며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직도 저 자신이 부족함을 느낍니다.

날마다 생각하며 변해 가야할 과제입니다.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 드리고 기도해 주심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