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제10회 세계 칼빈학회 참관기-④ 주요 발표와 한국신학 과제

미션(cmc) 2010. 11. 3. 17:46

“세계개혁신학 풍부한 흐름에 동참하자”
특별기고/ 제10회 세계 칼빈학회 참관기-④ 주요 발표와 한국신학 과제

세계적 칼빈학자 다양한 칼빈신학 주제 발표·토론 ‘인상적’
한국신학계, 원자료 수집·인재 양성 위한 장기적 투자 시급


   
  ▲ 황대우 목사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진주북문교회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칼빈학회(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는 16세기 종교개혁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연구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학회이다. 지난 8월 22일부터 27일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이하 남아공)에서는 제10회 세계칼빈학회가 진행됐다.

이번 학회에서는 참석자 전원이 참여하는 플레너리(Plenary) 발표가 10개, 그리고 참석자들이 자신이 원하는 주제를 선택하여 참여하는 세미나(Seminars) 발표 5개와 소논문(Paper) 발표 20개 준비되어 있었다. 플레너리 발표와 세미나에 할애된 시간은 각각 1시간 30분이며 소논문 발표에는 각각 40분씩 할애되었다. 본래 계획은 세미나 발표가 6개이고 소논문 발표가 19개였는데, 라일 비르마 교수(Prof. Lyle Bierma)에게 배정된 세미나 발표가 소논문 발표로 변경되어 진행되었다.

다양한 주제의 발표 진행

발표된 글들은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없는 매우 다양한 내용이었다. 주강의에 해당하는 플레너리 발표 주제들만 해도 그렇다. 칼빈탄생 500주년이었던 2009년에 거행된 칼빈기념행사와 발표된 논문들을 소개한 글, ‘칼빈 2009: 그 결과들’로부터 시작하여 칼빈의 윤리와 정치와 화해 사상, 이성적 신앙에 대한 루터와 멜랑흐톤과 칼빈의 사상 비교, 보편성과 보편교회에 대한 칼빈의 사상, 16세기 제네바의 금요성경공부모임과 목사회에서 논의되었던 신학주제들 연구, 19세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설교에 나타난 칼빈의 유산, 루터주의자들과 긴장과 대립관계 속에서 살펴본 칼빈 신학, 노예에 대한 칼빈의 사상, 불링거와 칼빈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되 특별히 교회와 시정부의 관계와 이슬람에 대한 그들의 사상을 비교 연구한 글,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칼빈의 화해 신학 등의 주제들이 발표되었다.

세미나에서 다루어진 5개의 주제들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었다. 즉 칼빈과 후기 개혁 신학이 원죄의 결과인 전적 부패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지, 칼빈의 기도에 대한 개념은 정확히 무엇인지, 칼빈과 카피토(Capito)의 창조론이 어떤 점에서 유사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칼빈에게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칼빈의 회심 문제가 문자적 역사적 정황을 고려할 경우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등의 문제들을 다루었다.

세분화된 20개 소논문 발표

   
  ▲ 세계칼빈학회는 한국교회의 신학발전을 위해 원자료 수집과 인재양성을 서둘러야 함을 깨우쳤다. 사진은 셀더하위스 세계칼빈학회 회장(가운데)과 브리즈 교수(오른쪽)가 토론하는 모습..  
20개의 소논문 발표에서는 더 다양한 주제들이 선보였는데, 성상 제거에 대한 칼빈의 입장, 칼빈의 성찬론, 첫 성찬론에 관한 논쟁,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교육서에 나타난 칼빈의 영향, 디지털 세대에서 칼빈 연구의 장점과 한계, 16세기 서구유럽 종교개혁가들의 이민과 신앙고백, 칼빈이 스페인에 끼친 영향, 적응된 계시의 역동적 성격, 1542년 교리문답교육서에 나타난 개혁신학, 신학의 통일성을 지향한 대표자 칼빈, 섭리와 자유의 관계, <기독교 강요> 초판부터 최종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 이해의 발전, 환자에게 성찬을 베푸는 문제에 대한 칼빈과 베스트팔(Westphal)의 대립과 일치, 세계적 칼빈주의의 선구자들, 일본에서의 칼빈 유산,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에 대한 칼빈의 최종 판단, 당대의 선지자로서의 칼빈, 네덜란드 신학자 시몬 오미우스(Simon Oomius)와 칼빈 비교 연구, 목회자로서의 칼빈, 1563년 앙부와즈(Amboise) 평화조약에 대한 칼빈의 자세를 통해 본 그의 전쟁론 등의 주제들이 발표되었다.

35명의 발표자들 가운데 영국, 독일,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등 유럽 학자들과 미국 학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와 미국 학자들이 가장 많았다. 그리고 남아공, 일본, 대만 출신 학자가 각각 한 명씩 발표했다. 한국 발표자는 2명이었는데, 총신의 교회사 교수이며 한국칼빈학회 회장인 안인섭 박사가 ‘칼빈의 설교에 나타난 화해 신학’이라는 주제로 마지막 날 10번째 플레너리 발표를 장식했고 필자가 ‘칼빈의 <창세기 주석>과 카피토의 <하나님의 6일간 창조>에 나타난 창조론’을 비교 연구한 논문을 둘 째 날 세미나 시간에 발표했다.

격의없는 토론·교제 ‘행복’

세계칼빈학회에 처음 참석한 필자는 책으로만 알고 지내던 세계적인 칼빈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진지하게 토론하며 격의 없이 교제하는 일에 동참할 수 있어 행복했다. 발표는 대부분 영어로 이루어졌으며 혹 독어나 불어로 발표해도 영어로 번역된 강의안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런대로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가장 부담스럽고 힘들었던 시간은 역시 토론이었다. 아시아 사람들 외에는 영어, 독어, 불어로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이 아무런 장애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독어나 불어로 발표하면 영어권이나 네덜란드어권에서 온 학자든 독어나 불어권에서 온 학자든 독어나 불어로 비평하고 질문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럴 때는 꿰다 놓은 보리자루마냥 신기한 듯 그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잠을 자는 것도 그런 시간을 땜질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지만 학자의 품위유지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그럴 용기가 나질 않았다.

또한 학자들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 토론이 전혀 흥분 없이 차분하게 이루어지면서도, 한 치의 양보 없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흥분 잘 하는 나의 모습이 몹시 부끄러웠다. 필자가 어쩌다 학회에 참석한 다른 나라 학자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줍지 않은 영어 실력이라 사실상 긴 대화가 어려웠다. 영어로 몇 마디 내뱉고 나면 그 다음 말이 쉽게 이어지지 않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쌓아야할 실력이 한참 남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이 자리까지 온 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신학의 다른 분야는 잘 모르겠지만 역사신학 즉 교회사 분야는 아직도 동양 학자들이 가야할 길이 멀다. 그것은 대부분 언어 장벽 때문이다. 필자와는 달리 영어를 거의 완벽하게 구사하는 한국 학자도 물론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조차도 독어나 불어 강의를 60~70% 정도 알아듣고 그들과 토론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것은 아니다. 이뿐 아니라 모든 유럽 언어의 조상언어라 할 수 있는 라틴어 실력을 그들만큼 갖춘다는 것은 훨씬 더 힘겨운 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왜 우리가 굳이 그들처럼 그렇게 되어야 하는가? 우리도 우리 자신의 신학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토착화 신학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진정 우리 자신의 신학을 하길 원한다면 먼저 신학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정확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보다 먼저 신학을 하고 그 신학의 자료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과 동등한 실력을 갖추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계칼빈신학에 투자하라

세계칼빈학회 회장인 헤르만 셀더르하위스 박사(Prof. Dr. Herman Selderhuis)는 현재 네덜란드 아뻘도른(Apeldoorn)에 소재한 기독개혁신학대학교(De Universiteit van de 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에서 교회사와 교회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필자와 같은 지도교수 밑에서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키뿐만 아니라 덩치도 크다. 무엇보다도 그가 지금 서 있는 위치, 그리고 감당하고 있는 역할이 필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대단하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모국어인 네덜란드 외에도 영어 사용이 거의 완벽했고, 독어와 불어도 알아듣는데 거의 장애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라틴어로 된 고서들을 읽어내는 실력도 대단하다. 이런 사실은 필자가 세계칼빈학회에 참여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와 같은 대단한 실력자가 그만 아니라 세계칼빈학회에 참석한 유럽 학자들과 미국 학자들 가운데 다수가 그렇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한 마디로 충격이었고 그들의 실력이 부러웠다.

우리는 언제쯤 그런 위치에 설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너무나도 실망스럽다. 왜냐하면 인문학 분야의 인재를 키우려는 열정, 그 분야의 기초인 사고훈련과 언어습득에 대한 열정이 수면 깊이 가라앉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 일을 위해 투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교회조차 먼 곳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꾸기보다는 실리를 따지고 당장 눈앞에 내보이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신학의 발전을 위해 요청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두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필자는 원자료의 수집과 원자료를 다룰 수 있는 인재 양성이라고 생각한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실리와 결과만을 추구할 경우 그 두 가지 요소는 모두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원자료 수집을 위해서는 많은 재정이 필요하고 실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심정으로 재정을 투자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실력을 한 단계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해 지난한 세월을 견디는 인내심이 없다면 세계적인 학문의 대열에 당당하게 서는 일은 아마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일본 교회보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덩치가 크고 한국 신학자 수도 일본 신학자 수에 비해 절대적으로 많지만 아직 한국 신학이 일본 신학보다 한 수 아래인 이유는 바로 원자료와 인재 양성에 대한 안목과 투자의 차이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한국 교회의 근시안적 안목과 단기적 투자로는 결코 한국 신학이 일본 신학을 앞서지 못할 것이다. 한 세대 전에는 유럽 신학의 꽁무니만 따라 다니던 미국 신학이 지금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서 유럽 신학을 앞지르고 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딱 하나, 바로 원자료 수집과 인재 양성에 엄청난 재정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세계칼빈학회가 4년마다 학회를 개최하는 것 외에 가장 비중 있게 진행하고 있는 일은 칼빈의 저술들을 비평편집판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루터 저술의 비평편집판은 이미 거의 완성된 반면에 칼빈 저술의 비평편집판은 이제 겨우 초기 단계이며 수년 내에 완성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칼빈주의를 따르는 대형 교회들이 세계 도처에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관심의 부재와 빈약한 재정, 그리고 세계적인 칼빈 학자의 감소에 있다. 부디 칼빈과 개혁 신학과 신앙, 그리고 개혁교회를 사랑하는 분들과 교회들이여, 세계칼빈학회에 투자하시라. 이 투자는 분명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내게 될 것이다. 선교에 투자하는 것 못지않게 선교적인 일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