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칼빈과 위그노 삶의 현장들/③ 꼴레쥬 몽떼규와 비밀교회

미션(cmc) 2010. 11. 3. 17:53

기획특집/ 다시 찾아가는 칼빈과 위그노 삶의 현장들
③ 꼴레쥬 몽떼규와 비밀교회

고삐로 길들여 개혁의 길로 인도하다

교조주의 요새 같던 학교에 인생 흐름 바꿀 중요한 인물들과 교우
최고의 지성인 ‘위그노’, 가톨릭 중심지서 목숨 건 예배·말씀 실천

   
  ▲ 권현익 선교사(GMS 프랑스 선교사)  
 
중세 프랑스는 권력과 종교가 밀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명문가문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 권력까지 장악해야 했으므로 자녀 한 둘을 사제를 시켜 추기경 가문으로 만들곤 했다. 칼빈의 아버지 제하흐도 장남에 이어 차남 칼빈까지 사제가 되므로 명문 가문을 이루고자 했으며, 이런 아버지의 꿈을 안고 파리로 온 칼빈이 장차 개혁자의 길을 가게 될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대장간을 운영하는 큰 아버지 집에 머물면서 꼴레쥬 막쉬(College de la Marche)에서 5 개월 동안 학업하다가 꼴레쥬 몽떼규(College de Montaigu)로 전학을 한다. 꼴레쥬 막쉬에서의 짧은 기간 동안 잊을 수 없는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스승 마튀랭 꼬흐디에(Mathurin Cordier)와의 만남이다. 그는 ‘현대 교육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엉(Rouen)의 사제였으며, 칼빈에게 이상적인 아버지 상을 남겨준 따뜻한 사람이었으며, 칼빈이 <기독교 강요>를 라틴어로 쓸 수 있는 기초를 쌓게 해주었다. 그는 당시 엄격한 교사들과는 달리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위해 작은 시상품들을 준비하였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상하게 설명해줄 뿐 아니라 실천을 통해 모범을 보였다. 얼마 후 르페브르의 신약성경을 출판한 호베흐 에스띠엔느(Robert Estienne)의 전도를 받아 1528년에 가톨릭 사제로서 회심하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그는 피신을 다녀야 했고, 훗날 쥬네브에서 목회하던 파렐과 칼빈의 청빙으로 1536년 쥬네브 꼴레쥬 드 히브(college de Rive)로 와서 목회자 양육 학교인 아카데미의 기초를 만든다. 1550년에 칼빈은 그의 데살로니가전서 주석을 그에게 헌정하면서 “내 저서들은 학업의 첫 출발 때 당신의 인도와 충고 아래에서 나온 것이며, 하나님의 교회에서 유용하게 쓰임 받도록 하셨습니다. 교육의 첫 길에 당신을 만난 것은 하나님의 진귀한 특권이었습니다.”라고 서문을 쓴다.

   
  ▲ 꼴레쥬 몽떼규가 있었던 장소. 왼쪽으로 가톨릭 신학의 본거지인 소르본느 대학, 오른쪽 뒤쪽으로 파리 노트르담 성당이 보인다. 학교 오른쪽 골목길 옥탑 방은 칼빈이 만성절 설교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들의 급습을 피해 지붕을 타고 도망갔던 곳이다. 멀리 프랑스에 복음을 전하다 죽은 ‘순교자의 산’인 몽마르뜨르가 보인다. 도서관 건물 외벽에는 유럽에서 배출된 인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칼빈이 전학하게 되는 꼴레쥬 몽떼규는 인문주의의 대가 에라스무스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명문교였으나 칼빈이 입학할 당시는 학생들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교조주의의 요새와 같은 곳이었다. 숙식은 무료였으나 포도주와 고기를 먹을 수 없었고 채식주의자들처럼 익힌 과일과 채소 그리고 청어와 계란과 같은 음식만 먹으므로 고행과 금욕주의 수도원이 되고 있었다. 칼빈은 이 기간 동안 치명적으로 건강을 잃게 되는데, 딱딱한 침대에서 생활하며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미사, 공부, 기도로 이어지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며 규칙을 어기게 되면 회초리로 심한 처벌을 하는 등 죽음 직전까지 몰아갔다.

이런 엄격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스코틀랜드 출신인 논리학의 대가 존 메이저(John Major)를 만나 사고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그는 위클리프(Wyclif)와 후스(Hus), 특히 루터를 반대하는 가톨릭 교리의 철저한 옹호자였기에 칼빈은 그를 통해 중세 초기 신학과 어거스틴의 사상을 접하게 되므로 가톨릭 신학을 정통적으로 배우게 된다. 또한 스페인 출신의 안토니오 코호넬(Antonio Coronel)을 통하여 고대 철학에 입문하게 된다.

   
  ▲ 프랑스 가톨릭의 상징인 파리 노트르담 성당 근처에 있었던 비밀 교회의 거리  
 
하나님은 이 시절에 또 하나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므로 개혁자의 기틀을 만들게 하셨다. 친구인 니꼴라 꼽과 그의 형제 미셀과 그들의 아버지 기욤 꼽(Guillaume Cop)이었는데, 기욤 꼽은 왕의 주치의이며 인문주의 학자들과 거대한 인맥을 갖고 있었다. 그는 개혁 사상을 갖고 있던 인문주의자와 개혁의 대가들을 만나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하였다.

아마 이 시기에 칼빈은 루터의 저술들을 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느와용 출신으로 파리에서 학업을 하며 개혁 그룹에 속해 있던 사촌형 삐에르 호베흐 올리베떵(Pierre Robert Olivetan, 1506-1538년)과의 친밀한 교제도 이루어진다. 그는 칼빈에게 성경을 읽을 것과 로마 교회의 잘못된 의식에서 벗어날 것을 권고하였으며 칼빈으로 하여금 성경에 눈을 뜨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1535년 발도파의 요청으로 올리베떵이 성경을 번역했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열어주는 열쇠이며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거울, 그의 선하신 의지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라틴어 서문을 칼빈이 쓰게 된다.
칼빈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희망과 기대를 따라 파리로 왔지만,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거대한 개혁의 물줄기 한 가운데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칼빈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절대 불가항력적 은혜”를 고백한다. “하나님은 그의 신비한 섭리로 나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나를 고삐로 길들여서 하나님의 길로 가게 하는 그를 발견했을 때, 마치 빛이 나를 비추는 것을 보았다. 나는 하나님의 그 뜻을 저항할 수 없었다.”

만약 개혁 그룹의 친구들과 그의 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노엘 베다(Noel BEDA, 삐까흐디 출신이며 몽테규를 졸업한 가톨릭 신학의 대표자)나 이냐스 드 로욜라(Ignace de Loyola, 칼빈과 비슷한 시기에 몽테규에서 학업한 예수회 창시자) 처럼 개혁신앙을 반대하는 일에 앞장서는 가톨릭 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칼빈으로 하여금 가톨릭의 중심지에서 가톨릭 신학을 접하게 함과 동시에 개혁자들을 만나게 하시므로 신학의 균형을 이루게 하시고, 5년 후에 아버지 제하흐의 파면 사건을 통해 이젠 개혁주의를 배우게 하도록 오흘레앙으로 이주하게 하신다.

   
  ▲ 세라믹 박물관의 베흐나 빨리시(Bernard Palissy, 1510-1590) 동상. 그의 동상은 생제르망 성당 정원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도자기와 관련된 그 어떤 전시장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프랑스 최고의 도기공이며 학자적 재능을 겸비한 자연 과학자로 왕실 도공으로 도예가이자 자연 과학자였다. 위그노 대학살 때에도 개종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요청 하지만 체포와 석방을 여러 번 거듭하다가 1589년에 바스티유에서 옥사하였다.  
 
도망자 칼빈의 가르침을 나누었던 위그노들의 비밀 예배 장소들

개신교 신앙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위그노들의 신앙의 모습은 편안함을 추구하려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많은 도전을 던져 준다.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은 말씀을 바로 배우고 실천하는 삶이었다. 그들은 칼빈이 망명의 길을 떠나 도망자의 삶을 살 때에도 수도 파리에서 비밀 교회로 모여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들은 이미 의학, 문학, 미술, 건축, 조각, 음악 전반에 걸쳐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올라선 유명인들로서 프랑스 역사에 오늘까지 중요한 인물로 기록된 최고의 지성인들이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순교를 당하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심한 핍박으로 인해 해외로 30만 명 이상이 망명하였다. 이로 인해 프랑스 경제가 흔들릴 정도였고, 그들이 망명한 지역에서는 그들의 성실함으로 지역 경제와 학문이 활성화 되었기에 많은 나라에서 그들을 유치하려고 했다면 그들의 영향력을 가히 짐작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500년이 지난 현재 프랑스의 개신교인이 60만 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심히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죽어서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하늘의 영광스러움에 참예하는 것이었다. 삶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헌신하여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행복으로 삼았던 사람들이었다. 이런 이유로 목숨 연장을 위하여 구차한 삶을 살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감옥 문이 열리고 지진이 일어나는 기적들이 없었음에도 오직 말씀을 따라 살다가 애써 이룬 그들의 업적들을 포기하며 하늘의 영광을 몸소 보여준 사람들이었다.

아쉬운 것은 위그노를 또 하나의 다른 종교로 인정했던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이 1685년 10월 앙리 4세의 손자인 루이 14세에 이르러 칙령이 취소되면서 위그노들의 건물들은 대부분 파괴되어 현재는 그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비밀 교회들의 대표적인 장소로는 루브르 궁 바로 맞은편 파리 오하투와흐 뒤 루브르 (Oratoire du Louvre) 교회가 있는 장소와 그곳에서 좀 더 떨어진 로뗄 드 스와송(l’hôtel de Soissons) 그리고 파리 노트르담 성당 근처의 장소이다.

   
  ▲ 포펠 스와송  
 
루이 7세의 딸 페하흐(Ferrare) 공주의 집이었던 로뗄 스와송(l’hotel de Soissons)은 현재는 증권 거래소로 사용되고 있다. 공주인 그녀는 그리스도에게 매료되어 개혁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이탈리아에서 칼빈과 만나기도 했으며 개혁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16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시인이며 프랑스 전역에서 사용하고 있는 시편을 찬송가 가사로 작사한 끌레망 마호 (Clement Marot 1496-1544)를 이탈리아에서 돕기도 했다. 망명에서 돌아와서도 그의 집은 비밀 교회 장소로 사용되었고, 성 바돌로메 학살 사건이 발생하던 날에 앙리 4세를 비롯한 위그노 지도자들이 피신한 곳이기도 하다.

무엇이 위그노들로 하여금 권력의 상징이었던 루브르 왕궁과 가톨릭 신앙의 상징이었던 파리 노트르담 성당 가까운 곳에서 생명을 내어놓고 예배를 드리게 하였을까? 위그노 역사의 현장을 찾을 때마다 부끄러움과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던 복음의 능력에 강한 전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