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칼빈의 예배관 : 예배의 형태를 중심으로 (황성철교수)

미션(cmc) 2011. 7. 25. 10:48

칼빈의 예배관 : 예배의 형태를 중심으로

 

황성철 교수

 

Ⅰ. 문제의 제기

오늘날 현대교회의 예배는 그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스필버그 감독의 “트랜스포머”(transformer)에 나오는 유기체적인 인공지능 로봇처럼 그 변신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아무도 짐작할 수 없다. 이러한 포스트모던이즘이 만개한 상황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의 실천 형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특히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교단의 교회들은 세계적 기독교의 주류인 ‘복음주의’(evangelicalism)와 접목되면서 예배 형태의 다양성에 관한 논의는 시점 면에서 때가 지난 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칼빈이 어떻게 말했느냐라는 것과 정말 칼빈이 말한 대로 그 실천의 길을 가느냐의 문제는 너무나 실천적 괴리감이 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한국 장로교회의 실천신학자로서 칼빈이 어떻게 말했느냐를 다시 재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조금이나마 그 실천적 괴리감을 좁혀 보고자하는 의도도 있지만 한국 장로교회의 정체성을 칼빈의 예배 형태론적 측면에서 살펴봄으로 본 교단의 교회들의 예배 형태를 가늠해보고 미래의 예배 형태의 방향성을 제시해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에서는 칼빈의 예배관 자체를 전체적으로 다루지 않고 예배의 형태론에 집중하여 논지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예배를 ‘자유’(freedom)와 ‘형식’(framework)이라는 양자 구도를 놓고 어느 한 쪽을 지향하는 전제론적 방법(pre-suppositional method)으로 논지를 전개하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Ⅱ. 칼빈이 이해한 예배의 본질

칼빈 신학의 권위자 B. A. Gerrish는 칼빈이 이해한 예배의 본질을 “제사”(The Sacrifice)로 보았다. 이 개념은 칼빈의 표현대로 하면 “θυσια" 혹은 “πρσφορά” “τελετή” 라고 부르는 제물을 드리는 것을 말하는데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실제로 칼빈은 이 ‘제사’가 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 요소로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누가 무엇을 드리느냐이다. 칼빈은 여기서 “속죄 제사” (the sacrifice of expiation)와 “감사 제사(a sacrifice of thanksgiving”를 구분하고 전자는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성취되는 진정한 제사로 본 반면, 후자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찬양과 경외의 제사(a sacrifice of praise and reverence)이다.

따라서 칼빈은 예배를 그리스도만이 드려지는 희생(제물) 부분과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 부분을 동시에 말하였는데 후자의 부분에서 기도, 찬양, 감사 등 인간의 모든 예배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특히 후자는 사랑의 의무를 포함하는 감사 제물이다. 칼빈은 우선 “제사”를 “모든 거룩한 의식과 종교적 행동” 자체만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외적인 행동으로써 모든 행위 자체를 예배 개념 속에 부분적으로 포함시키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했다. 칼빈은 인간이 드려지는 외적인 제사는 “더 큰 제사”(the great sacrifice) 개념에 의존한다고 했다. 그것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성별하여 드리는 “영적 예배”(a reasonable worship; 롬12:1)를 전제로 전제한다. 이 예배는 선을 행하며 서로 나눠 주는 제사이다(히13:16). 그에 의하면 신자들의 모든 선행은 영적인 제사인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예배 개념에서 감사 제물은 “찬미의 제사”이며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히13:15)이다. 그는 성만찬에 이 감사 제물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성찬시에 주의 죽으심으로 선포하고 감사를 드림으로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고 했다. 즉 찬미의 제사도 우리 자신에서 나온 제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예물인 동시에 제단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예배 개념이 보여주는 바는 오늘날 현대 예배신학자들이 정의하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봉사로서 “하나님의 봉사”(Gottesdienst)로서 예배의 신학적 개념도 일부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간 신자의 성별된 선행을 기초로 한 감사 제물을 예배의 핵심 개념으로 인식함으로 결국 예배에 있어서 인간적 파토스(human pathos)와 신적 에토스(divine ethos)의 요소가 분리되지 않고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칼빈의 예배관에 의하면 인간적 파토스(human pathos)는 인간 자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과 몸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에토스(divine ethos)에서 이끌어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결국 칼빈의 예배 개념은 하나님의 에토스의 두 축인 말씀과 성만찬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주심”(self-giving)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칼빈의 예배신학의 기초는 창조의 목적과 관계가 있다.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 예배와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에게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예배는 분리할 수 없다. 그는 예배 없이 그 분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칼빈이 예배에 대한 원리적 관심을 표현하는 말로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즉 soli Deo gloria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 라는 표현이다. 전자는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의미이며, 후자는 ‘유한은 무한을 포함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가톨릭의 우상적인 예배관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칼빈의 우선적인 관심은 인간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는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의 관심은 예배에서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들을 혼합해 버린 것에 대한 공격이다.

칼빈은 예배의 본질에 대하여 1543년 그의 논문『On 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에서 논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 예배의 중요성에 집중하면서 당시 교회의 예배가 타락하여 더 이상 개혁을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논문에서 예배에 대한 적절한 지식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것과 예배는 인식론적 순서로 볼 때 구원 이전에 위치되어진다는 것이다. 바른 예배가 의보다 선행하며 진정한 구원의 지식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종교 지식과 예배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하나님의 지식의 “존재론적 모습”이 무엇인지에 우선적인 관심을 갖도록 한다.

칼빈의 예배관은 하나님께서 제공하신 유일한 예배 형태는 ‘영적인 예배’(spiritual worship)이다. 그 의미는 두 가지로 물질적인 버팀목이나 인간적으로 고안한 의식을 의지하는 것으로부터 분리를 의미하며, ‘영적인 예배’는 하나님으로부터 명령되어졌다는 것이다. 영적 예배의 본질은 인간 행위와 열망의 원천과 끝 지점으로서 하나님 위에서 완전한 독립된 태도를 보인다. 예배에서 하나님은 영적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에 대하여 세속적이거나 중심적인 개념으로 형태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수준에서만 만날 수가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적인 보이는 상징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거부한다.

 

Ⅲ. 칼빈의 예배관의 방향성

형태(form)는 방향성의 결과이다. 결국 방향성이 일정한 모델(model)를 만들고 그 모델은 실천의 길이 되고 형태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예배의 형태 문제를 단순히 역사적으로 타나났던 종교문화적 스톡(stock) 개념으로 보기보다는 역동적 방향성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칼빈이 이해한 예배의 형태론도 그 방향성에서 규정되어지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역동적 의미를 갖는다.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칼빈의 방향성을 우리가 따르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예배관의 방향성은 크게 보면 성경의 권위에 관한 방향성이다. Keith C. Sewell에 따르면 예배관은 4가지 방향성을 가진다. 즉 ‘교정주의’ (Corrective), ‘열거주의’(Exemplary), ‘규정주의’(Regulative), ‘지향주의’(Directive) 등의 방향성이다. '교정주의‘(Corrective) 방향성은 루터교가 따르는 관점으로 성경이 과도하게 반대하지 않는다면 전통적 예전 형태의 모든 것을 보존하려는 입장이다. ‘규정주의’(Regulative) 방향성은 츠빙글리(Zwingli) 계열과 퓨리탄(Puritan)들이 따르는 관점으로 성경에서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교리나 실천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열거주의‘(Exemplary) 방향성은 재세례파(Anabaptist)가 따르는 관점으로 초대교회와 현대적 상황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초역사적인 방식으로 성경으로부터 형태적 사례들을 열거하려는 입장이다. 마지막으로 ‘지향주의’(Directive) 방향성은 부써(Bucer)와 칼빈의 개혁파 교회들이 따르는 입장으로 성경을 주의 깊게 해석하여 발견되어진 예배의 형태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일반계시의 인도 아래 적용하여야한다는 입장이다. 최근 보수적 장로교단 안에 있는 ‘규정주의’(Regulative) 관점에 관한 긴장감이나 논쟁들은 대부분 ‘지향주의’(Directive) 입장을 얼마나 엄격하게 혹은 느슨하게 적용하는냐의 문제로 요약된다.

칼빈이 예배 형태론에서 성경관 다음으로 다루는 문제는 교회법과 영적 자유의 문제이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강요』4권 10장에서 다루었는데 “교회가 법으로 양심을 속박할 합법적 권리가 있느냐”는 교회의 입법권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교회 정치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결국 “어떻게 하나님이 세우신 규범에 따라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보는 우리의 영적 자유가 손상당하지 않을까”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칼빈은 성경 말씀과 별도로 사람들이 제시한 모든 명령을 “인간적 전통들”이라고 하고 그것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물론 예배의 형식을 무시하는 재세례파나 신령파에 대해 거부하면서 교회법의 필요성을 역시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교회법이 교회의 거룩한 규례가 되려면 “예절”과 “질서”의 원리를 견지하여야 한다. 즉 의식을 행할 때 예절이라는 보조수단에 의해 경건한 마음이 자극 받아야 하며, 교회의 화평을 이루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칼빈은 이러한 원리에 따라 예배의 형태의 진정성이 확보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공적 예배의 형태는 단순하며 예법에 합당하고 위엄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배에서 “헛된 즐거움”과 “허식”을 피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칼빈에게 당시 가톨릭교회의 예배 형식에서 보여지는 “연극적 도구”와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가면”은 거룩한 신비에 대해 경외를 표시하는 경건의 합당한 훈련이나 장식이 아니라고 보았다. 칼빈은 예배에서 “일시적인 화려함에 불과한 허식”과 “혼란, 야만성, 불순종, 소란과 다툼” 등은 진정한 예법과 질서의 원리에 위배되는 것임을 강조했다. 결국 칼빈에게 있어서 예배의 형태를 규정짓는 것은 위에서 말한 ‘지향주의’(Directive) 방향성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즉 성경과 전통을 모두 끌어안고 가려는 교정주의’(Corrective) 예배 형태나 성경과 전통을 무관하게 무한정한 자유를 구가하는 ‘열거주의’(Exemplary) 예배 형태, 그리고 성경에 안 나왔다고 무조건 못하는 ‘규정주의’(Regulative) 예배 형태 등을 반대한다고 볼 수 있다.

예배의 형태에 대한 칼빈의 입장은 Directive 방향성을 갖는다. 칼빈은 성경에서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교리나 실천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기보다는 보다 예배 형태에 대한 어떤 중심적 규범으로부터 접근하여 하나님이 명령한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원리는 보다 탄력적인 입장으로 해석되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칼빈의 예배 형태에 대한 입장은 어떤 부분에 무한정한 탄력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적 원리에 위배되는 행태에 대해서는 정통실천의 입장에서 보다 분명한 입장을 견지했다.

 

Ⅳ. 예배의 형태에 관한 칼빈의 이해

 

1. 예배의 구성요소에 관한 문제

예배의 형태에 관한 가장 중심적인 규범은 예배의 근본적 구성요소에 관한 문제이다. 결국 예배의 형태란 스타일의 문제로 예배의 각 구성요소의 다양한 결합과 변화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칼빈은 1542년에 두 권의 책인『고대교회의 관습에 따른 성례집행과 혼인예식의 방법을 포함한 교회찬송과 기도형식』(La Forme des prières....)과 『방법』(La Manyère de faire prières....)으로 시작하는 책을 통해 공예배의 예전적 구성을 제시했다. 여기에서는 공예배의 구성요소로 설교, 찬송을 포함한 기도, 성례 등 세 가지를 들었다. 그러나 R. J. Gore에 의하면 칼빈이 예배 구성요소에 관하여 사도행전 2장 42절에서 4가지를 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이다. 여기에는 말씀, 기도, 식사, 교제(시혜)의 요소가 있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 구절을 이렇게 평가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신자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다”고 했을 때, 이것은 사도적 교회의 실천이었다【Acts 2: 42, cf. Vg.】. 그리하여 말씀, 기도, 성찬, 구제 없이 교회의 모임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 되었다. 이것은 고린도교회에서도 확립된 질서였다는 점은 바울 서신에서 충분히 추론해 낼 수 있다(고전11:20. 그 후 여러 세기 동안 이 질서가 계속되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주일예배를 위한 패러다임을 개발해내었다. 즉 성경봉독과 설교, 일반 청중언어의 기도, 성만찬, 시혜의 나눔 등 4가지 예배 구성요소를 제시했다. 이것은 제한적 환경을 초월하는 중심적 규범임을 제안하는 명백한 경우이다.

이러한 중심적 예배 요소를 고려하여 칼빈은 4가지 점을 분명히 했다. 첫째로 예배에서 설교를 분리시키는 비대중적 언어를 배제하고 일반 사람들의 언어를 예배의 중심적 위치에 놓았다는 점이다. 둘째는 “떡을 떼며”(breaking of bread)를 그리스도와 그가 주는 유익을 신자들에게 전달해주는 “보이는 말씀”(visible)으로서 성만찬으로 이해했다. 이것은 말씀과 성례가 예배에서 중요한 형태임을 의미한다. 셋째는 찬송을 포함하는 기도이다. 비록 어떤 기도는 목사에게 재량권으로 남아있지만 역시 기도문 형식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코이노니아(koininia)를 “상호 교제, 시혜, 또는 그 밖의 형제간의 사귐의 의무”로 이해했다. 칼빈은 주님의 만찬과 성도간의 교제를 연관시켰다. 칼빈은 예배에서 성만찬과 우리 자신의 봉헌에서 주어지는 축복 사이에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에게 드려지는 거룩한 봉헌은 헐벗고 굶주린 자들에게 시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은 예배 형태에 대한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2. 우상숭배적인 예배 형태의 문제

두 번째로 예배의 형태에 관한 중심적인 규범은 반 우상숭배적인 예배의 형태이다. John, H. Leith는 반 우상숭배 신학이 칼빈의 중심적인 신학이라고 했다. 칼빈에게 우상의 기원은 인간의 타락이다. 결국 우상 숭배적인 예배는 인간의 타락에서 오는 것으로 보았다. 칼빈은 “하나님이 인간에 만든 법에 의해 경배될 때마다 그의 나라는 빼앗기게 되는데 이는 그가 예배에 관한 유일한 입법자이시기 때문이다”라고 말함으로 당시 이스라엘 백성과 로마교회의 예배의 타락을 지적했다. 반우상적 예배의 형태를 유출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예배의 프락시스(praxis)를 하나님보다는 인간의 방법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그 근거 구절로 이사야29:12-14절과 마태복음15: 9절을 들고 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29:12-14). 또 다른 구절에서는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 15:9). 실로 이스라엘 자손이 많은 우상숭배로 부패되었을 때, 모든 악의 원인은 불순한 혼합에 있다고 하였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새로운 예배의식들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예배의식들”(new rites)이란 우상숭배적인 "이상한”(étrange) 예배 형태를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칼빈은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경외는 “우리의 인위적인 것(inventions of our own)을 섞지 않고 그가 명령하신 대로만 예배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고 강조하면서 “인위적인 예배(some contrived worship)에서는 비록 불경건한 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의 교훈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그것을 엄중하게 비난하신다”고 했다. 칼빈이 말한 "이상한“(étrange) 예배 형태들은 대표적으로 구약 교회의 놋뱀, 아론의 금송아지, 여로보함의 송아지 등이며, 로마교회의 경우 성상숭배, 종부성사 또는 성유, 면죄부와 사죄, 푸닥거리식의 마술적 성수, 혼례와 사죄, 죽을 자를 위한 기도와 부활절의 고해성사 등을 들었다. 칼빈은 가장 큰 우상숭배는 미사로 보았고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 빵에 대한 경배, 그리스도의 잘못된 임재, 제단과 마술적 행위 등을 극도의 가증한 예배 형태로 신랄하게 비난했다.

 

3. 예배 형태의 단순성의 문제

마지막으로 칼빈의 예배 형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규범은 단순성(plainness)이다. 그에 의하면 이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옴으로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참된 예배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이다. 그에게 “진리는 신령한 예배의 단순한 본질이다.” 칼빈은 진리를 거짓과 대조하지 않고 외적인 형상과 대조하고 있음을 주지시키고 있다.

칼빈은 예배에서 영이 본질이고 “의식은 우발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강요』에서 로마교회가 그리스도께서 폐지하신 유대교적 의식들을 부활시키며 그리스도를 숨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무지한 자들을 도와줄 의식들이 필요하다는 로마교회의 주장에 대해 “지금은 이런 의식들을 폐지하고 ... 하나님은 보다 더욱 단순하게 예배를 받으신다”고 주장했다. 칼빈은 “경험이 없는 무식한 자들을 위해 도와줄 의식들을 무조건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드러내는 방법”을 사용하라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수를 적게 하고 지키기 쉽게 하며 표현을 위엄 있게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예배에서 단순성의 추구는 당연히 교회법과 충돌하는 문제가 있다. 칼빈은 당시 로마교회가 교회법에 근거한 예배의 형태를 추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반박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합당한 예배법을 인간의 결정에 예속시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제정한 법 가운데서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예배의 유일한 입법자라면 인간이 그 명예를 탈취할 수 없는 이유를 알면 인간이 제정한 법이 주의 말씀에 위해되는가의 여부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첫째는 모든 의와 거룩의 완전한 기준이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우리 영혼에 대하여 권위를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보다 구체적인 예배 실천에서 나타난다. 예배의 형식에서 단순성의 원리는 늘 교회법이나 관습에 의해 그 구체적인 예배 실제에서 부딪히는 면이 있는데, 칼빈은 이 문제를 교회법에 의한 속박과 자유의 문제로 풀었다. 예를 들어 기도할 때 엄숙히 무릎을 꿇는 행위와 같은 “어떤 인간적 전통”(a human tradition)은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예배의 형태는 “예배의 모든 측면과 구원에 필수적인 모든 것이 그의 거룩한 말씀에 충실히 포함되어있고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예배의 실천은 “주님의 말씀만 들어야 한다”고 말함으로 ‘규정주의’(Regulative) 예배 형태를 지지하는 듯하다. 하지만 칼빈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성경이 명하지 않은 부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외형적인 규율이나 의식(ceremonies)으로 자세하게 기술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이 시대의 상태(the state of the times)에 의존한다는 것을 아시고 한 형식(one form)이 모든 시대를 위하여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주신 일반적 법칙(general rules)으로 도피해야만 한다. 예절과 질서를 위해 교회에서 그 법칙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법칙들에 반하는 것들을 시험하라는 것이다.

칼빈은 성경에 예배의 참 형태가 충분히 규정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인간적 전통”(a human tradition)에 대해 ‘규정주의’(Regulative)를 넘어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인” 예배 전통에 대해 각 예배 문화에 따른 예배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규정주의’(Regulative)를 기초로 하고 더 나아가 실천적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들에 대한 목회자 칼빈으로서의 사려 깊은 배려이다. 여기서 칼빈은 주께서 특별히 명령하지 않으셨고 구원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면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각각의 민족과 시대의 관습에 다양하게 적응하여야 한다고 했으며, 특히 그와 같은 일은 교회가 요구하는 유익한 쪽으로 전통적인 관습을 변경 또는 폐지하고 새로운 것을 세워나가는 것이 합당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충분한 이유 없이 경솔하고 급작스러운 혁신(innovation)을 서둘러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무엇이 해가 되고 덕이 되는가는 사랑이 가장 잘 판단해 줄 것이고, 또한 사랑이 우리의 인도자가 된다면 모든 것은 안전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따라서 예배 일시, 예배 시간, 예배 장소의 건축물, 시편 찬송의 선곡, 자리 배치, 여성의 가르침 등은 교회훈련(church discipline)과 공공의 질서의 원리에 따라 결정하여야 하며, 저속한 술잔치 성격의 성만찬, 모자를 벗는 문제, 헤어스타일(특히 여성)의 문제, 기도의 자세 등은 경건을 지향하는 예절(honêteté)에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Ⅴ. 칼빈의 구체적인 예배의 형태와 평가

 

위와 같은 칼빈의 예배 형태에 관한 세 가지 관점은 평생 목회자로서 예배 실천자로서의 삶에 그대로 담아내었다. 즉 칼빈은 예배신학 자체를 위한 이론가나 단순한 종교개혁가가 아니라 목회의 실제에 적용하고 실천한 목회자였다. 먼저 칼빈의 예배의 구성요소의 문제와 예배 구조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오늘날 현대 교회의 목회실제에 있어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을 예배의 형태를 중심으로 해서 진단해 보기로 한다.

 

1. 예배의 구성요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칼빈은 예배의 근본적인 구성요소를 말씀, 기도, 성만찬, 시혜의 나눔 등 4가지 예배 구성요소를 제시했음을 살펴보았다. 예배의 구성요소의 문제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는 각 구성요소 간의 균형적 실천과 그 다음 혼합적 배열의 문제이다. 이것은 예배의 역동성과 관련을 갖고 있다. 현대 예배에서 보여주는 각 예배 요소들의 혼합과 배열의 문제이다. 각 예배 요소들 간의 균형과 혼합과 배열에 따라 예배의 분위기가 달라진다.

첫째, 예배의 구성요소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말씀과 성례전 리듬의 파괴를 칼빈이 정말 의도하였고 후에 말씀 중심예배가 개신교의 예배 원리로 자리잡았느냐이다. 프로테스탄트적인 예배냐 전통적인 예배냐의 문제에서 칼빈은 어떤 입장을 지지했느냐이다. 즉 칼빈이 성만찬을 예배의 다양성의 차원에서 다루었느냐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성만찬을 예배 의식에서 하나의 본질적 요소로 보았지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님의 만찬을 예배 가운데로 재통합하는 일을 포기한 채로 예배를 드릴 권리가 우리에게 있느냐 문제에 대해 칼빈의 견해는 철저히 반대 입장이다. 그에게 예배는 말씀 예전과 성만찬 예전이 하나가 되는 예배이다. 이것은 예배 형태의 다양성의 문제와 별개의 문제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기 시대에 이루어지지 못함을 보고 “내 이후로 오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다 자유롭고 용이하도록 고쳐나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둘째, 예배 구성요소들 간의 혼합적 배열이 가능한가이다. 영상기도문과 설교와의 결합, 찬양과 기도의 결합, 설교와 찬양의 결합, 봉헌과 성찬의 결합 등 현대의 예배의 다양성에 대해 칼빈은 어떤 입장일까? 칼빈은 이 점에서 예배 시간과 장소 등 교회법과 관련한 속박과 자유의 문제를 말하면서 두 가지 원리를 기준으로 제시했다. 첫째는 “모든 일에 있어서 우리는 각자 자유를 지키며 동시에 예법과 사람에 대한 고려가 요청되는 범위 내에서 자유에 대한 제한을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규율들을 지키더라도 미신에 빠지지 않고 타인에게 너무 엄격하게 준수를 강요하지 않으며 많은 의식이 하나님께 더 좋은 예배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외형적인 차이로 교회끼리 서로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는 기준이다. 이러한 원칙에서 보면 예배에서의 다양성에 대해 칼빈은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열려있다고 보여진다.

 

2. 예배의 구조(순서)

예배의 구성요서의 배열인 예배의 구조의 문제는 예배의 구조를 어떻게 짤 것인가의 문제로 예배 순서의 문제이다. 종교개혁 당시 루터는 중세 서방교회에서 사용한 용어인 ‘오르디나리움’(ordinarium)과 ‘프로프리움’(proprium)으로 예배 순서를 나누고 전자는 변경할 수 없는 순서이고 후자는 변경할 수 있는 순서가 있다고 보고, 후자의 경우만을 부분적으로 개혁하였다. 그러나 칼빈의 예배 형식에서의 단순성의 추구는 그의 예배 순서가 루터가 추구한 것과 비교하여 보다 예배의 자유로운 성격을 추구함으로 “비교적 자유적인 예배의 실현을 관철시켰다”거나 “예배 순서는 법적인 의미보다는 언제나 자유로이 바꿀 수 있다 있는 가능성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칼빈이 “규정주의”의 제한을 완전히 벗어났다고 평가하기는 무리가 있다. 칼빈의 제네바 예배 구조는 전형적인 말씀과 성례전 예전의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이 제시한 예배의 순서는 1541년 제네바로 돌아오기 전 스트라스부르그 예전과 돌아온 후의 제네바 예전으로 구분하여 그 예배 형태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칼빈은 제네바로 돌아와서 스트라스부르그 예전을 사용하기를 희망하였지만 츠빙글리와 자유방종파의 영향 아래 있던 제네바 시 행정관의 개입으로 제네바 예전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제네바 예전에서 없어진 것은 사죄의 선언, 십계명과 자비송, 목회기도와 성찬 기도의 구분 등이다. 제네바 예전은 후일에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으로 이어져 장로교 예배 모범의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장로교회의 예전이 칼빈이 선호한 예전을 따르진 않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3. 예배의 말씀 요소

개혁교회가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설교만을 강조하여 설교 중심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말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칼빈의 예배관에서도 말씀 요소는 설교 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예배 순서가 말씀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즉 그의 예배관에 따르면 속죄 제사와 감사 제사가 말씀과 성례전을 통해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배의 구성요소로서 직접적인 말씀은 역시 설교이다.

칼빈의 설교관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칼빈의 설교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설교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설교란 한 마디로 신적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다.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으시고 가까이 오신다. 둘째, 설교는 하나님의 임재의 표식이다. 그의 설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자신의 나타나심이다. 셋째, 목회자의 설교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이다. 설교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속에 그의 ‘질서’를 세우는 그리스도의 통치 수단인 것이다.

이러한 말씀의 요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설교에서 성령의 임재이다.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로서 예배의 두 중심축은 내면적으로는 성령의 현존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예배 형태론에서 말씀 부분은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역사하는 부분임을 인식했다. 따라서 소위 칼빈주의 설교가 예배에서 그 역동성이 떨어진다는 말은 역사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설교 시간의 문제는 칼빈이 말한 단순성의 원리와 예절과 질서의 기준에 따라 청중의 상황을 고려하여 ‘지향주의’(Directive) 방향성을 갖고 결정하여야 한다. 반드시 설교를 길게 한다고 지루한 것도 아니요, 반대로 짧게 한다고 역동적인 것도 아님을 칼빈이 제시한 기준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다. 모든 예배의 형태는 청중의 예배 환경과도 연관된다.

그 다음 말씀 요소에서 특히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간접적인 말씀” 형태인 도입부분의 인사, 목사의 사죄선언, 축도 등 세 가지이다. 첫째, 도입 부분의 인사의 문제이다. 이것이 종래 도입 부분이 경직된다고 판단되어 현대 ‘열린 예배’에서 이 부분을 ‘경배와 찬양’ 순서에서 막 바로 예배 도입 부분이 없이 진행하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도입 부분이 없는 순서는 칼빈의 예배관에 의하면 정당한가? 칼빈은 이런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좋은 예배와 관련하여 교회끼리 의견 불일치 기준에 문제가 없고 “만일 교회를 필요하다면 아무 거리낌 없이 일부 규정의 변경뿐만 아니라 준수해오던 규정까지 폐기하는 것이 용납될 것이다. 다른 상황 하에서도 불경건하지도 않고 예절에 어긋나지도 않는 의식일지라도 오늘의 상황에서 기회를 보아 폐기하는 것이 합당하리라는 것은 우리 시대는 증명해 준다.

즉 칼빈에 의하면 ‘열린 예배’나 구도자 예배‘는 교회 전통과 관련되어 결정하여야 하지만 불신자들에게 행하는 구도자 예배, 전도집회 예배 등에 너무 경직된 예배 질서를 요구하는 것은 칼빈의 의도가 아니라고 보여 진다. 그렇다고 칼빈의 말씀과 예전을 무시하고 ’열린 예배’를 공예배로 드리는 것은 칼빈의 예배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둘째, 목사의 사죄 선언의 문제이다. 칼빈의 공예배에서의 사죄의 선언(absolution)은 17세기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는 아주 독특한 예배 요소이다. 예배신학자 폰 알멘(von Allmen)에 의하면 이것은 예배의 구성요소인 말씀에 대한 간접적 형태인 문안인사, 사죄선언, 축복 중에 하나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성직자적 선포에 해당하는 ‘용서의 선언’으로서의 사죄는 교인들에게 참회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개인적 참회를 공적이고 교회적인 훈련이 되게 하기 위하여 개인적 참회를 없애려는 칼빈의 노력의 결과라고 평가했다. 폰 알멘은 칼빈의 해결방식은 강력한 교회훈련의 실천이 뒷받침되어야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셋째, 목사의 축도(benediction)의 문제이다. 예배에서 목사의 축도 문제는 말씀의 간접적 형태이긴 하지만 이것을 기도 형식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예배에서 사용하는 실천이 목회신학적인 면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즉 목사의 직무를 단순히 기능론적으로만 보지 않고 존재론적으로 보게 되면 말씀 행태의 축복의 선언인 셈이지만 단순히 기능론적으로 보면 목사의 축복기도는 예배를 마치고 세상으로 파송되는 구조에서 목사가 축복을 빌어주는 기도에 불과한 것이다.

예배의 역사에서 축도가 기록상으로 나타난 것은 루터의 예배요소에 나타나고, 부써, 칼빈, 낙스(John Knox)에게서 아론의 축도(민6:24-26)가 동일하게 나타난다. 칼빈이 행했던 아론의 축도는 후일 장로교 예배서에서 사라진다. 칼빈은 아론의 축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축복하실 것으로 선언하는 것이 헛되고 쓸모없는 의식이 아니었다는 점을 확실히 해주고 있다. .....여기서 교회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는 일은 모두 실제적으로 확고한 결과를 통해서 비준을 받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그의 제사장들에게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면서까지 축복의 임무를 양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하면서 축도의 효력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만의 일로 주장하신다고 해석하였다.

현재 장로교회에서 사용하는 축도의 종결 부분의 “있을지어다”와 “기원합니다” 중 복을 선언하는 기능보다 하나님의 중보적 기능을 가지기 때문에 후자를 사용하는 장로교단이 있으나 필자의 소견으로는 축도 본문에 대한 단순히 문자적 해석보다는 목사에 대한 전반적인 목회신학적 위치와 예전적 위치를 고려할 때 “있을지어다”의 종결어미를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본다. 칼빈은 목사가 “연장”(tool)이라는 사상과 더불어 존재론적 직무관을 가진 “하나님의 동역자 직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의 위격을 대표하는 권위자”로 인정한다고 여길 때 복을 선언하는 의미가 없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 위치는 도구적 존재로서의 선언자일 뿐이다.

 

4. 예배의 기도(찬송) 요소

칼빈의 제네바 예전의 공중기도는 말씀의 요소에서 조명기도와 설교 후의 목회기도 그리고 성만찬 전후의 기도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러나 스트라스부르그 예전의 공중기도는 조명기도와 성만찬에서의 목회기도, 주의 기도, 성별기도, 성만찬 후 기도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찬송은 칼빈의 경우 시편찬송을 불렀다.

조명기도(illumination prayer)는 예배 구조에서 성경봉독 전의 기도로 세상적인 생각과 육신의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게 해달라고 드리는 기도로서, 이것은 칼빈의 스트라스부르그 예전이나 제네바 예전에서 모두 시행되었다. 이 칼빈의 조명기도가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에서는 ‘대표기도’로 둔갑하고, 목사의 설교 후 ‘목회기도’(pastoral prayer)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세계 교회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다. 특히 일부 장로들의 판에 박힌 기도로 예배의 역동성을 방해하기까지 하는데, 한국교회는 장로가 독점(?)하고 있는 ‘대표기도’를 칼빈의 실천에 따라 ‘조명기도’와 ‘목회기도’로 분리시켜야 할 것이다.

‘목회기도’(pastoral prayer)는 ‘중보기도’(intercessory)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총회가 이 용어의 사용을 금하였음으로 ‘목회기도’로 부르고 실제로 칼빈도 이렇게 불렀다. 이 기도는 칼빈뿐만 아니라 청교도,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 등에서 실천되어진 것으로 목회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주로 세계, 국가, 교회, 직장, 병자 등을 위해 기도한다. 칼빈은 ‘목회기도’를 성만찬 예전 순서에 넣음으로 성만찬의 공동체성을 기도 가운데 들어가게 하였지만 그 후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은 칼빈의 견해를 따르지 않았다.

성만찬 기도(Eucharistic prayer)는 분병 분잔 이전의 성령임재기도(Epiclesis), 혹은 ‘성별의 기도’(Prayer of Consecration)와 이후의 감사의 기도(Thanksgiving after the Supper) 등이 있다. 특히 ‘성령임재기도’는 칼빈의 스트라스부르그 예전에는 있었으나 제네바 예전에서는 사라졌다. 이는 칼빈의 성만찬에 대한 영적 임재설이 실천적으로 좌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도 성찬식 때 성령의 임재를 강하게 소원하는 기도를 대부분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 다음으로 예배에서 악기를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은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오늘날 예배에서 음악적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룹은 신약성경에서 예배시에 음악적 도구를 사용한 예배가 없다고 주장한다. 구약 성전에서의 악기 사용은 희생제사에 기초한 의식법에만 묶여있는 경우라고 한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교회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고 한다. 악기에 대한 이러한 ‘규정주의’(Regulative)의 견해는 자연스럽게 시편 찬송만을 허용하는 경향이 있다. 초기 칼빈주의자들은 예배에서 음악적 도구를 피했으며, 시편 찬송만을 회중이 부르는 것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1800년대 이후부터 개혁파 교회들은 이러한 ‘규정주의’ 입장을 떠나 예배에서 악기와 다른 찬송을 도입하게 되었고 오늘날 주일예배 시에도 CCM를 부르는 것까지 허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칼빈은 교회음악에서 과연 ‘규정주의’의 입장을 취했을까? 그는 ‘교회의 노래’ (churching singing)를 기도론의 차원에서 논한다. 칼빈은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관습’은 어거스틴(Augustine)의 견해에 따라 밀라노(Milano) 교회에서 암브로스(Ambrose) 때 최초로 시작했다고 한다. 이때의 노래는 성찬식 때 시편에 있는 성가를 노래하는 것이다. 칼빈은 ‘교회의 노래’가 고대교회가 사용한 것이고 “사도들 사이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일지라도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칼빈은 ‘교회의 노래’를 기도에 대한 진실한 열정을 불붙이는데 가장 큰 가치를 가진다고 하면서도 멜로디에 더 귀를 기울이고 가사의 영적 의미에는 관심을 적게 갖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함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감미로운 느낌과 귀의 즐거움만을 위하여 작곡한 노래는 교회의 위엄에 합당치 못한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을 지극히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예배시의 악기 사용의 문제는 칼빈이 후대의 칼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극단적인 ‘규정주의자’가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음악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말씀 중심의 가사의 효과를 무시하는 멜로디의 중심의 위험성을 지적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칼빈은 음성을 포함 악기의 멜로디 자체를 부정하는 ‘규정주의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악기 멜로디만의 연주 가능성은 멜로디 자체에 영적 메시지와 경건을 담아낼 수 있느냐의 문제로서 여기에 대해 칼빈의 전체적인 논조는 부정적인 듯하다.

오늘날 예배가 쇼나 공연이 되어가는 현상을 칼빈은 염려한 것일 것이다. 필자는 21세기 감성시대의 교회 환경에서 교회음악계의 전문적인 멜로디 검증과 목회자들의 영적 점검 하에서 제한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것이 칼빈의 견해를 전혀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실천적인 면에서 보면 칼빈 자신도 종교적 음악을 위해 세속음악 선율을 사용하는 콘트라팍툼(Contrafactum)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칼빈의 찬송음악이라도 세상음악 문화와 완전히 단절할 수 없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5. 예배의 성만찬 요소

칼빈이 말씀 중심의 강단 예배를 강조하기 위해 성찬예배를 소홀히 했다는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 칼빈은 예배 가운데 주님의 만찬이 완전히 정착될 수 있기를 원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시행하려고 했던 예배 구조의 특징은 성만찬 예전의 참된 의미를 회복하여 “축제로서의 예배의 성격”을 되찾으려는데 있었다. 칼빈은 일주일에 한번 성만찬을 집행해야 된다고 했으나, 일 년에 네 번 집행하는 절충안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제네바로 돌아오기 전에 쓴『기독교강요』에서 한 번만 성찬을 강요하는 로마 가톨릭의 미사를 악마의 술책이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태도는 1555년 베른시 행정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도 자신이 네 번 시행하는 것을 포함, 세 번, 한 두 번의 시행이 사탄의 궤계의 의한 것임을 강조하였고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들의 본을 따르지 못하는 것을 잘못으로 솔직히 시인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비판했다. 특히 성만찬 집전 시 무릎을 꿇고 받아먹도록 했는데 취리히 예배에서 최초로 의자에 앉아서 먹는 성찬식이 거행되기 시작되어 이 예전은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청교도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이후 장로교 예배의 성격을 반 예전적 반역사적인 것으로 변질시켰다는 결과를 낳았다. 사실 주일 예배에서 성만찬을 분리함으로 더 이상 성만찬이 주일예배의 정규 순서가 아니라 비주기적으로 거행하는 기념의식이 되었다는 점이 츠빙글리 예전의 가장 큰 비극적 영향이다.

 

6. 예배의 교제(시혜) 요소

마지막으로 칼빈이 말한 예배의 4가지 요소에서 교제(koinonia) 혹은 시혜(almsgiving)의 요소는 칼빈의 신학이 유기체적으로 통합되는 놀라운 의미를 가지고 있다. 칼빈은 예배 요소로서 성만찬과 교제의 관련성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것은 성만찬의 공동체성을 확보하는 것으로서 칼빈의 성례관이 그의 디아코니아 사상과 연계됨을 보여준다. 즉 진정한 예배 속에는 형제를 위한 참 봉사와 섬김이 있으며, 그것은 가난한 자와 약한 자들을 돌보시는 구제적 성격의 하나님의 사역이다.

칼빈의 예배 형태에서 매우 두드러진 것은 이 시혜의 예전 순서로 성만찬 예전 속에 포함하되 바로 3-4세기 이후부터 칼빈 시대를 넘어 청교도 시대까지 예배의 요소로서 헌금 순서가 없었던 것을 칼빈이 최초로 성경의 원리에 따라 예배 요소로 도입하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시혜(almsgiving)를 성만찬의 예전 순서에 넣음으로 성만찬의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이 교제(koinonia)를 구제의 차원으로 이해함으로 교회의 봉사(디아코니아)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봉사가 되게 하였다. 따라서 예배에서의 봉헌은 칼빈에게 있어서 주님과 형제와 하나 됨을 나누는 교제요 섬김이요 봉사인 것이었다.

오늘날 예배시 졸고 있는 부모에게 “엄마, 아빠 졸지 말고 빨리 요금 내고 집에 가자”라고 말할 정도로 헌금이 교회에 내는 ‘요금’으로 타락한 시대에 우리는 이러한 칼빈의 예배 요소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이교적인 예배 개념을 바탕으로 한 구복적 예배가 성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봉헌을 통한 샤마니즘적인 축복기도는 칼빈의 예배관에 비추어볼 때 예배 요소에 심각한 왜곡이 있어 보인다. 적어도 칼빈의 예배 요소로서 이것이 오늘날 국가와 교회가 분리된 상황에서 다소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실제로 예산의 집행 면에서 교회 안에서의 형제간의 구제 더 나아가 대 사회적 봉사로 드러나게 될 때 칼빈의 거시적 안목의 참 예배가 드려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7. 예배의 인도

예배의 인도는 거시적 관점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예배의식을 가질 권리를 가질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예배의 인도에는 예배의 구조와 순서를 집례하는 예배 인도자의 안내서인 예배서의 사용 문제가 있다. 이것은 칼빈 이후 “예배모범” (directory for worship)과 “예배서”(service book)의 문제는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주제였다.

그러나 칼빈은 예배모범보다는 예전서(liturgie)의 전통을 이어왔다. 16-17세기 미국의 초기 청교도들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의 정신을 살려 예배서 없는 예배모범만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지만 1894년 미국의 장로교회들은 “예배서”(service book)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해 남장로교에서 예배서가 출간했다. 이어 북장로교가 1906년 공동예배서(Book of Common Worship)를 출간함으로 예배에 있어서 예전적인 순서(order)와 예식문(text)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예배 인도에 관한 한 현대의 장로교회는 웨스트민스터 전통보다는 칼빈의 입장으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예배의 역동성의 면에서만 보면 예배의 자유보다는 형식 쪽으로 갔다고 할 수 있다.

 

8. 예배의 환경과 매체

예배 환경은 공간 및 장소, 시간, 소리, 문화 등의 문제가 있다. 이것은 결국 예배 환경과 매체에 관한 것이다. 제일 먼저 예배 장소의 문제가 있다. 그 다음 이미지의 문제가 있다. 첫째 문제는 예배 공간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디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이다. 둘째는 예배의 표상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이다. 여기에는 예복의 문제와 현대예배에서의 ‘몸으로서 예배’를 포함한다. 예배신학자 폰 알멘은 냄새로서 향의 문제까지 거론하지만 이 부분은 생략하기로 한다. 예배 환경과 매체는 이미 모세 오경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예배 매체법에 대한 칼빈의 입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출애굽기의 ‘예배 매체법’은 십계명에 대한 하나님의 적용인 ‘율법서’(출20:22-23)의 서사(출20:23-26) 부분으로써 참 예배를 위한 우상 매체, 희생 매체, 반인본 매체, 몸 매체 등 4가지를 명령하였는바, 반우상매체와 희생 매체는 예배의 근본 원리로 먼저 서술한 것으로서 이 원리는 모든 예배 환경의 영향에 적용되어야 할 법칙이다. 칼빈은 특히 반인본 매체에 대해 인간들의 “타락한 예배 양식”을 경계하기 위해 인본적으로 가공한 예배 장소를 만들지 않도록 하여 미신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한 명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몸 매체에 대해서는 예배 시에 “더 없이 순결하고 더 없이 정숙하게 행동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속바지를 입어 제단을 오르내릴 때 하체가 드러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고 주석하였다.

오늘날 몸 찬양 등 공예배시에 워십 댄스 등은 거의 공연 수준으로 심지어 섹스 심볼까지 대두되는바 칼빈이 교회 음악을 인정하되 악기만의 사용을 금한 점을 고려해 보면 음(音)의 타락과 색(色)의 타락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한국교회가 공예배시나 또는 부활절 기념 연합예배시와 같은 때에 과도한 몸 찬양 등은 지양해야 할 과제다.

또 예배의 공간과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서 말씀과 성찬의 이미지가 잘 드러나도록 예배 공간을 배치하여야 할 것이다. 최근 컴퓨터 영상 기술의 발달로 영상예배가 대폭 증가되고 있는데 무조건 반대만을 할 일은 아니지만 언제나 칼빈이 제시한 기준에 따라 성경과 질서와 예절의 원리에 따라 사용하여만 할 것이다. 예배에서 “헛된 즐거움”과 “허식” “연극적 도구”와 “아름답고 사치스러운 가면” “일시적인 화려함에 불과한 허식”과 “혼란, 야만성, 불순종, 소란과 다툼” 등은 진정한 예법과 질서의 원리에 위배됨을 강조했던 칼빈의 경고를 현대 교회는 경청해야 할 것이다.

 

Ⅵ. 한국 장로교회에 대한 적용과 한계

칼빈의 예배의 형태에 관한 관점은 영국의 퓨리탄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미국의 선교 교회로서 칼빈의 예배에 관한 관점에 영향을 받았다. 한국 장로교회에 대한 적용에 앞서 우리는 칼빈 전문가 뒤메르크(Doumergue)가 평가한 칼빈의 예배 의식을 보자.

정말로 칼빈의 예배의식이 그 본질에 있어서 냉냉하고 빈약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예배 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자신들의 감정과 기쁨의 눈물을 억제할 수 없었다고 가끔 말합니다. 찬양과 기도, 경배와 감화, 죄의 고백과 용서, 예배 의식과 자발적 참여를 위한 예배의 필수적 요소들이 다 거기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순서들이 간단하면서도 유연하고 강한 유기체적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 개혁가 중 칼빈은 예배가 두 부분으로 나뉘는 것에 대해 가장 확고하게 반대했던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칼빈의 예배 의식은 하나입니다.

우리는 먼저 칼빈주의를 따르는 장로교회들의 예배가 냉냉하고 빈약하다고 단정하고 칼빈의 예배의 형식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제단하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실천의지에 있다. 장로교단으로서 공교회 총회가 과연 현실적으로 츠빙글리적 예배 형태를 칼빈의 예전적 방식으로 바꿀 의지가 있느냐이다. 교단의 개혁 아젠다(agenda)로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노회 산하 교회들이 헌의안을 내놓을 수 있느냐이다. 결국 이 문제는 교단의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요 더 나아가 개교회적으로는 대형교회와 소형교회와의 관계 등 교회성장신학과 맞물려 매주 성만찬 예전은 아니더라도 년 4회마저 시행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대형교회들의 입장일 것이다.

적용의 문제에서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예전의 관료화’(The bureaucratization of the Liturgy)이다. 예배의 기획에서부터 실천까지 교단과 교회가 관료화되면 개혁하기가 어렵다. 한국교회에 칼빈의 예배 형태관을 적용하고자 할 때 세 가지 예배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예배의 다양성을 추구하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유스러운 예배’(free worship model), '계획된 예배'(planned worship model), '공식 예배 모델’(formal worship) 등 세 모델로 나누고, 칼빈이 지향한 성만찬 중심의 예전적 실천을 각 예배 환경과 장소에 따라 차등있게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일 공예배 만큼은 칼빈이 말한 말씀과 성만찬이 통합되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 칼빈이 말한 대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주일 공예배 때 오순절 교회에서처럼 목사가 설교를 하다가 갑자기 교인의 좌석으로 이동하여 안수기도를 하거나 설교 후에 강단으로 사람을 초청하거나 갑자기 통성기도를 하는 예배의 ‘역동성’은 무리라고 생각되어진다.

마지막으로 세계교회가 성만찬 참여 나이를 낮추는 추세임으로 성찬 참여 나이를 헌법에서 낮추어야 할 것이다. 현재 과학계에서도 만12세 나이에 성인과 같은 두뇌 인식을 하는 것으로 파악되는 바 총회가 의논하여 현재 만14세 나이를 낮추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칼빈이 그렇게 강력하게 주장한 성찬 회수에 관한 헌법상 “1년에 2회 이상 거행함이 적당하고”(헌법적 규칙 제6조 4항)는 예배모범에 나온대로 “성찬은 종종 베푸는 것이 좋으나 1년에 몇 회 하든지 당회가 정할 것”(예배모범 11장)으로 그 내용을 일치시켜야 오해가 없을 것이다. 기타 개혁 사항에 대해서는 전항의 각 예배 요소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음으로 생략하기로 한다.

 

Ⅶ. 결론

 우리는 이제까지 예배의 형태를 중심으로 칼빈의 예배관을 살펴보았다. 먼저 문제 제기에서 오늘날 현대교회의 예배는 그 형태가 다양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예배의 실천 형태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 실천 방안을 논하고자 하였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자유’(freedom)와 ‘형식’(framework)이라는 양자 구도에서 결코 어느 한쪽만을 편향되게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정통실천인 말씀과 성례전의 통합의 문제만은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았다.

칼빈이 이해한 예배의 본질은 “제사”(The Sacrifice)였다. 그는 제사를 “속죄 제사”와 “감사 제사”로 구분하고 예배를 그리스도만이 드려지는 희생(제물) 부분과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제물) 부분을 동시에 말하였는데 후자의 부분에서 기도, 찬양, 감사 등 인간의 모든 예배 행위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칼빈은 인간이 드려지는 외적인 제사는 “더 큰 제사”(the great sacrifice)와 ‘영적인 예배’(spiritual worship)에 의존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칼빈의 예배관을 바탕으로 칼빈의 예배관의 방향성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하였다. 칼빈의 예배관의 방향성은 크게 보면 성경의 권위에 관한 방향성이다. 즉‘교정주의’ (Corrective), ‘열거주의’(Exemplary), ‘규정주의’(Regulative), ‘지향주의’(Directive) 등의 방향성이다. 칼빈의 입장은 ‘지향주의’(Directive) 방향성으로 성경을 주의깊게 해석하여 발견되어진 예배 형태는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일반계시의 인도 아래 적용하여야한다는 입장이다. 칼빈은 성경 외에 보조수단으로서 “예절”과 “질서”의 원리를 제시하였다.

칼빈의 예배 형태를 규정하는 중요한 세 가지 관점은 그가 제시한 예배의 구성요소와 우상숭배적인 예배 형태의 문제, 그리고 단순성(plainness)이다. 칼빈은 성경이 명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어떤 인간적 전통”(a human tradition)에 대해 ‘규정주의’(Regulative)를 넘어 “인간적이며 동시에 신적인” 예배 전통에 대해 각 예배 문화에 따른 예배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규정주의’(Regulative)를 기초로 하고 더 나아가 실천적 문제에서 발생하는 것들에 대한 목회자 칼빈으로서의 사려깊은 배려이다.

그 다음 우리는 칼빈의 구체적인 예배의 형태와 평가를 논하였는데 예배의 구성요소, 예배의 구조(순서), 예배의 말씀 요소, 예배의 기도(찬송) 요소, 예배의 성만찬 요소, 예배의 교제(시혜) 요소, 예배의 인도, 예배의 환경과 매체에 관한 칼빈의 입장을 살펴보고 한국교회의 상황과 연결지어 평가해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인한 것은 예배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대해 칼빈의 입장은 ‘규정주의’의 입장만이 아니지만 보다 철저히 성경 중심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였고 이것은 한국교회의 예배 형태의 다양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보겠다.

끝으로 한국 장로교회에 대한 적용과 한계에서 우리는 먼저 한국장로교회가 예배의 형태에 관한 관점은 영국의 퓨리탄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살펴 보왔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전적 입장에서만 본다면 역사적 의미에서 칼빈의 전통에 서 있지 않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먼저 우리는 먼저 칼빈주의를 따르는 장로교회들의 예배가 냉냉하고 빈약하다고 단정하고 칼빈의 예배 형식을 무조건 부정적으로 제단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츠빙글리 전통의 예배 형식을 어떻게 칼빈 전통의 예배로 개혁하느냐는 교단의 정체성과 실천의지에 달려 있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