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다시 찾아가는 칼빈과 위그노 삶의 현장들
④ 인간의 길,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
칼빈 지나간 도시마다 강력한 부흥
개혁사상 ‘우물’된 오흘레앙 거쳐 ‘강물’ 흐르는 부르쥬로 인도하셔
건물·외형 치중 경계했던 칼빈 가르침 되새기는 귀한 계기 만들어야
▲ 권현익 선교사(GMS 프랑스 선교사) |
인생의 절망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시작이라 하였던가... 하나님은 그를 개혁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점점 개혁 사상의 용광로 안으로 밀어 넣고 계신다. 당시 오흘레앙은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인 독일 유학생들이 학교 채플 홀에서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릴 정도로 개혁사상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 프랑스 최고 법학자인 쟈크 큐자스(Jacques Cujas)가 강의했던 칼빈 당시 중세 부르쥬의 한 대학의 모습. | ||
그것만 아니었다. 하나님의 위로도 함께 있었다. 칼빈의 집 근처에 살면서 함께 법을 공부하였던 참사원 프랑수와 다니엘(Francois Daniel) 가족이 가난하고 힘든 칼빈을 자주 대접했고 휴식을 갖게 했다. 이 가족은 종교 개혁의 필요성에는 동의하였으나 가톨릭에 계속 남게 되며, 칼빈이 쥬네브로 갈 때까지 계속 연락하고 지낼 정도로 친밀하였다.
▲ 이 돌 위에 올라가 칼빈은 복음과 개혁의 필요성을 외쳤기에 ‘칼빈의 돌’이라 부른다. | ||
부르쥬에서 칼빈은 루터 사상의 권위자인 볼마르와 알치아 두 교수를 통해 개혁자로서의 삶을 본격적으로 살게 된다. 베즈의 칼빈 전기에 의하면 칼빈은 이곳에서 이미 회심한 것으로 언급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역사를 책을 통해서 찾으려 하기 때문에 부르쥬에서 보다 훨씬 뒤에 칼빈이 회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프랑스 교회사 학자들도 칼빈의 회심을 부르쥬라고 단정하고 있으며, 500주년 부르쥬 논문에서 칼빈은 이곳에서 개혁교회를 시작했다고 못 박고 있다. 이외에 이곳 부르쥬를 방문해 보면 칼빈이 회심했던 너무나 확실한 흔적을 많이 볼 수 있다. 고흐덴 광장(Place Gordaine)에 가면, 시장 한 복판에서 상인들이 물건을 팔기 위해 올라가 외쳤던 그 돌 위에서 칼빈은(이) 복음과 개혁의 필요성을 알리는 설교를 외쳤다하여 ‘칼빈의 돌’이라 부르는 돌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리고 칼빈이 살았던 미흐보 거리 (rue Mirebeau) 23번지에서 멀지 않은 칼빈 홀(Salle Calvin)이 있는데 그곳은 어거스틴파 수도원으로 칼빈이 말씀을 증거하고 수사학을 가르쳤다. 또한 칼빈이 예배를 인도했던 꼴라동의 집(Maison Colladon)이 지금까지 남아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아니에흐 레 부르쥬(Asnieres-les-Bourges) 방향으로 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1530년 만성절에 칼빈이 이곳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신앙에 관해 처음으로 말한 곳이기에 몇 세기 동안 ‘칼빈의 다리’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칼빈의 개혁 운동에 어거스틴파의 일부 수도사들과 성 엉부와(Saint - Ambroix) 수도사들이 참여하였는데, 수도사 쟝 미셀(Jean Michel)은 부르쥬에서 좀 떨어진 도시 성세흐(Sancerre)에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파리에서 화형 당한다. 이처럼 칼빈이 부루쥬에서 회심한 개혁 역사의 흔적들과 기록들을 볼 수 있다.
▲ 이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멸망시킬 것이다. | ||
칼빈이 지나간 부르쥬
칼빈이 지나갔던 도시들은 그 어느 도시보다 위그노 교회의 부흥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아마 그 이유는 원색적인 복음을 그대로 증거하므로 말씀이 능력이 되어 드러났기 때문일 것이다. 1559년 부르쥬의 위그노들은 레 프레 피쇼(Les Pres-Fichaux) 공원에 모여 다윗의 시편으로 여름 내내 찬양을 하며 예배를 드리는 영적 재건 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칼빈이 죽은 후 1572년 9월 8일에서 10일까지 파리에서 시작된 성 바돌로메 축제일의 위그노 대학살이 이곳에서도 진행되어 수많은 위그노들이 가톨릭교도들의 칼과 총에 죽어 갔다. 중세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여 감탄하는 이곳 부르쥬 대성당의 웅장한 건물은 개신교도 학살의 가장 고통스러움을 증거하는 기념물임에 틀림없다.
칼빈이 지나간 오흘레앙
▲ 한국 모 교단에서 만든 오흘레앙의 칼빈 동상.
칼빈의 가르침을 가장 왕성하게 지켜 온 이곳은 위그노의 수도라 불리울 정도로 프랑스 전역에 개혁 사상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위그노들의 세력이 얼마나 대단하였으면 오흘레앙의 대성당인 성 십자가 성당을 위그노들이 점령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종교 전쟁에서 패함으로 성당을 포기해야만 했다. 이때 위그노들이 성당을 훼손하기도 하였는데, 특히 성당 건물의 많은 성상들을 파괴하였다. 성당 건물을 다시 찾은 가톨릭 교인들은 성상을 복구하지만 완벽하지 못하였기에 성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른 재질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성당의 파괴를 경험한 가톨릭교회는 성당 외벽에 사도 바울의 이름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훼손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실 것”이라는 문구를 적어 놓은 것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칼빈 출생 500주년을 맞이한 작년에는 칼빈을 연구하는 한국 학자들이 칼빈의 동상을 유난히 많이 만든 해이며, 프랑스 오흘레앙에도 한국인에 의해 세워진 칼빈 동상이 버젓이 있다. 프랑스 교회가 가난 한 것은 사실이나 돈이 없어 그 동안 칼빈의 동상을 만들지 못한 것은 아니다. 이웃 부자 나라 스위스 역시 수백 년에 걸쳐 수차례 칼빈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만들려고 했다가 칼빈의 유언을 따라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를 기념하는 외형적인 기념물들이 자칫 칼빈이 그토록 드러내고자 했던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부각될까 염려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쥬네브에 있는 ‘종교 개혁자들의 벽’ 역시 처음에는 칼빈 400주년 기념으로 거대한 칼빈 석상을 만들려고 했다가 칼빈의 유지를 중시하여 종교 개혁을 기념하는 조형물을 만들었던 것이다.
칼빈에 대한 한국인들의 이런 잘못된 열정은 이제 자제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개혁사상을 따른다는 우리 역시 개혁자의 정신을 살리기보다 개혁자의 이름만 걸고 건물과 외형에 치중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칼빈도 교회 건축물을 계획한 적이 있었다.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였지만 그 어디에도 사치스런 치장이나 고급스런 악기는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공간도 특별히 강조하거나 돋보이게 하지 않았다. 단 한곳, 강대상만 유난히 높았다. 그것은 설교자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멀리 있는 대중들도 잘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칼빈이 부탁하였듯이 우리는, 칼빈이라는 인간은 잊더라도 그의 가르침과 정신만은 잊지 말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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