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1
제 1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 이 두 사이는 어떻게 서로 상호관계가 있는가2
1.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지혜, 곧 참되며 건전한 지혜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다.3 그러나 이 두 지식은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쪽이 먼저이며, 어느 쪽의 지식이 다른 쪽의 지식을 만들어 내는가를 구별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먼저, 자기 생각을 돌려, 자기가 "힘입어 살며 기동"(행 17 : 28) 하고 있는 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아무도 자신을 살펴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받은 은사들 중 그 어느 하나도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없으며, 심지어는 우리의 존재 자체도 오직 한분 하나님 안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에서 이슬처럼 떨어지는 이러한 축복들로 말미암아 우리는 마치 시내를 따라 샘 근원으로 올라가는 것처럼, 그 축복의 근원에까지 인도함을 받게 된다. 실로 우리 자신의 빈곤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을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내 준다. 특별히 최초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빠지게 된 그 비참한 파멸은 우리들로 하여금 위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굶주림과 배고픔 때문에 우리의 결함을 찾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에 눈을 뜨게 되어 겸손을 배우게 된다.4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참으로 비참한 세계가 있으며, 따라서 우리가 신적 의상을 빼앗긴 후부터 우리의 벌거벗음의 수치는 수없이 많은 추행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도록 자극을 받아 적어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다소나마 얻게 된다. 이와 같이 우리 자신의 무지, 공허, 빈곤, 허약, 이보다 더한 타락과 부패를 자각함으로써, 지혜의 참된 광채, 건전한 덕, 차고 넘치는 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 안에만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악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자신을 미워하기 전에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할 수가 없다. 인간이 자신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곧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알지 못하거나, 잊어버리고 있는 한,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을 사람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손으로 끄는 것처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2.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자아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한편 인간은 분명히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고 나서, 다음으로 자신을 자세히 검토하지 않는 한, 결코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을5 얻지 못한다.6 왜냐하면 명백한 증거에 의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 더러움, 어리석음, 불결함을 스스로 확신하기 전에는, 우리는 항상 자신을 의롭고, 바르고, 현명하며, 거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만은 온 인류에게 본래적인 것이다). 더우기 우리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이러한 판단의 유일한 표준이 되시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와 같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위선으로 치우쳐져 있어서,7 일종의 공허한 의의 형상이 의 그 자체를 대신하여 우리를 충분히 만족시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속과 주위는 너무나 타락하여 오염되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신이 인간 부패의 범위한도에서만 보게 되면, 적게 오염된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이 마치 가장 깨끗한 것처럼 우리를 즐겁게 한다. 그것은 마치 검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눈이 희끄무레한 것이나 검으스레한 물체를 볼 때 완전히 횐 것으로 판단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영혼의 모든 능력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크게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의 감각을 통해서 더욱 명백하게 깨닫게 된다. 만일 우리가 대낮에 땅을 내려다보거나, 주위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본다면, 우리는 자신이 가장 강하고 가장 예리한 시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눈을 들어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게 될 때, 우리의 시력은 당장 그 큰 광채로 말미암아 눈이 부시고 혼란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구상의 사물을 볼 때에는 그렇게 예리하던 시력도 태양을 쳐다볼 때에는 아주 흐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우리의 영적 은사를 평가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이 지상 너머를 바라보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고 있는 한 우리는 자신이 가장 훌륭한 존재인 양 우쭐대며 자신을 거의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착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 앞으로 향하며, 그의 속성을 생각하며, 마땅히 우리의 규범이 되어야 할 하나님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절대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전에 의라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즐겁게 하던 것은 가장 사악하고 추한 것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신기하게 감동시켰던 것은 가장 어리석은 것으로 역겨움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전에 능력의 가면을 쓰고 있던 것은 가장 비참한 무력자로 증명이 될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가장 완전하게 보이는 것도 하나님의 순결에 비하면 그 자체가 사악한 것이다.
3.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의 인간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하심를 느낄 때마다 충격을 받으며 압도 당한다고,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그 두려움과 놀라움은8 바로 여기에서 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생각할 때에는 보통 안전하게 또는 확고하게 서 있지만, 일단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면, 죽음의 공포로 쓰러질 만큼 마음이 흔들리며 비참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사실 그들은 죽음의 공포에 압도되어 거의 혼비백산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자신을 하나님의 위엄과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깨닫거나 충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추론할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이러한 놀라운 사건의 많은 실례를 사사기나 여러 예언서에서 자주 보게 된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말이 자주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공통적으로 표현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삿 13 : 22, 사 6 : 5, 겔 2 : 1, 1 : 28, 삿 6 : 22-23). 욥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을 표현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능력, 그리고 부패를 인식케 하는 가장 강력한 논증을 사용한다(참조 욥 38 : 1이하).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위하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자신이 "티끌과 재"(창 18 : 27)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했으며, 엘리야도 자기 얼굴을 겉옷으로 가리우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감히 견뎌낼 수가 없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매우 두려운 것이다(왕상 19 : 13). 그룹들까지도 두려움을 피해 그들의 얼굴을 가리우지 않으면 안 되었거늘(사 6 : 10) 하물며 부패하고,(욥 13 : 28) 버러지에 지나지 않는(욥 7 : 5, 시 22 : 6)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왕이 되시고‥‥‥"(사 24:23)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광채를 나타내시며 보다 더 가까이 발하실 때에는, 가장 빛나던 광채들도 그 앞에서 어두워지게 된다는 것이다(사 2 : 10,19).
그러나 하나님에 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먼저는 전자에 대해 논하고 다음 후자를 논하는 것이 정당한 순서일 것이다.
제 2 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무슨 목적에 이르게 되는가
1.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실제로는 경배이다
내가 알고있는 바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그의 영광에 얼마나 합당하며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사실 바로 말해서 종교(religion) 또은 경건(piety)1이 없는 곳에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간이, 중보자 그리스도를 구속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아담이 자기의 무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더라면,2 우리는 자신의 참된 질서에 따라 살게 되었을 것이라는 그 근본적이며 단순한 지식에 대해서만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성이 오늘날 같이 파괴된 상태에서는,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화목시키지 않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거나 구원의 창시자로 알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며, 또한 어떤 면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하여 호의를 경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며, 섭리로 다스리시며, 선하심으로 양육하시며, 각종의 축복으로 우리를 채워 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화목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하나님은 먼저 우주의 창조와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나타내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의 얼굴을 안에서(고후 4 : 6 참조) 자신을 구속주로 보여 주셨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에 관한 이중의 인식이 생기는데3 우리는 여기서 전자를 먼저 생각하고, 후자는 적당한 곳에서 다루고자 한다.4
더욱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는 그를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시며, 그 분 밖에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믿지 않는 한, 단순히 하나님을 경외와 찬양의 대상으로 주장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하다. 내가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상을 무한하신 권능으로 유지하시며, 지혜로 그것을 다스리시며, 선으로 보존하시며, 특히 인류를 의와 심판으로 지배하시며, 자비로 참으시며, 보호하심으로 지켜 주실 뿐만 아니라 지혜, 빛, 의, 권능, 공의, 참된 진리 등 그 어느 것 하나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으며, 하나님을 그 원인으로 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그에게서 바라고, 그에게서 찾으며, 또한 이미 받은 것들을 감사한 마음으로 그에게 돌리기를 배워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을 의식하는 것은,5 종교를 낳게 하는 경건을 우리에게 올바로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경건"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결합된 것을 말하는데, 이 사랑은 그의 은혜를 깨달아 앎으로써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것,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으로 양육을 받고 있다는 것, 자기가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찾아서는 안된다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결코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봉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들이 완전한 행복을 하나님 안에 두지 않는 한, 진정으로 중심에서 그들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할 것이다.
2.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신뢰와 경외를 포함한다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다만 헛된 추측으로 장난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보다는 "하나님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그의 본성과 일치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6 에피큐로스(Epicurus)가 말한 것처럼, 세계를 돌보지 않고 다만 안일에 빠져 있는 그런 종류의 신이 있다고 고백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7 간단히 말해서 우리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하나님을 안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오히려 우리의 지식은 먼저 두려움과 경외를 가르치는 데 이바지해야 한다.
둘째로는 우리의 안내자요 교사가 되는 이 지식으로 우리는 일체의 선을 하나님에게서 찾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으므로 또한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 자기의 생명은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의 계획과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사실 등을 즉시 인식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인간의 마음을 점령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생활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바쳐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극도로 부패해져 있음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 되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분명하게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의 부패성이 그의 마음을 유혹하여 하나님을 올바로 찾지 못하게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매달리고자 하는 욕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마음은 처음부터 오직 한 분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할 뿐, 어떤 공상적인 신을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공상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더우기 그는 길을 잃고 방황하거나, 혹은 경솔하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의 의지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항상 최선의 열심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인식하는 사람은 만물이 그의 지배하에 있음을 알고, 그가 만물의 안내자요 보호자이심을 믿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를 신뢰하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모든 축복의 창시자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스러울 때나 궁핍할 때에는 즉시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의 보호를 구하며, 그의 도우심을 기대하게 된다.
그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알고 있으므로 그를 완전히 신뢰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사랑으로 자신의 모든 재난에 대한 구제책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을 주(主)와 아버지로 인정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그의 취임을 경외하며,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힘쓰며, 또한 그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을 공의로우신 심판장이시며 죄를 엄하게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 까닭에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이 자기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그를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자신을 억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지식은 매우 무서운 것이기는 하나 그러한 사람은 비록 피할 길이 열려져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하나님께서 경건한 사람을 축복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분으로 알고 그를 사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건한 신자에게 영생의 상급을 주시고 경건치 못하며 사악한 자를 벌하시는 것이 다같이 하나님의 영광에 속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그가 죄를 억제하는 것은 다만 형벌에 대한 공포에서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경외하기 때문에 그를 주로 예배드리며 찬양하는 것이다. 만일 지옥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배반한다는 생각은 그에게 있어서 있을 수 없는 몸서리나는 생각일 것이다.
여기에 실로 순수하며 참된 종교가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엄숙한 두려움과 결합된 신앙인 것이다.8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이란 자발적인 경외를 포함하고 있으며, 율법에 규정된 것과 같은 정당한 예배를 수반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하되 아무뜻 없이 하고 있으며, 다만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를 진심으로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의식이 화려한 허식으로 있는 곳마다 마음의 진실성을 찾아보기는 매우 힘들다는 사실이다.
제 3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적으로 뿌리 박혀 있었다1
1. 이 자연적 은사의 성격
인간의 마음속에 타고난 본능에 의하여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각이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 논란할 어떤것도 없다.2 아무도 무지를 구실로 삼아 도피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신성한 위엄을 어느 정도나마 깨달아 알 수 있는 이해력을 모든 사람 각자에게 심어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에 대한 기억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계속적으로 신선한 물방울을 떨어뜨려 주신다.3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과, 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창조주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배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생활을 바쳐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증거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게 된다. 만일 하나님에 대한 무지가 어디선가 발견된다고 하면 이에 대한 실례는 분명히 보다 시대에 뒤진, 문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유명한 이교도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뿌리깊은 확신을 갖지 못할 만큼 미개한 국민이나 야만적인 종족은 없다.4 비록 다른 면에서 볼 때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항상 무엇인가 종교의 씨앗을 그 속에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공통적 관념은 인류의 정신을 깊이 점령하고 있으며, 집요하게 사람들의 가슴속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존재하던 날부터 종교없이 지낼 수 있었던 나라, 도시, 간단히 말해서 종교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가족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이 사실은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하나의 무언의 고백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우상 숭배도 이 관념에 대한 풍부한 증거가 된다. 인간은 본의 아니게 다른 피조물을 자기 이상으로 높이기 위하여 기꺼이 자신을 낮춘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갖지 못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무 조각이나 돌 조각에 예배 드리기를 더 좋아한다. 이 사실은 신적 존재에 대한 가장 생생한 증거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에서 이 증거를 지워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오히려 타고난 성격을 변경시키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사실 이 타고난 성격은 인간이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의 본래적인 교만을 잊어버리고 가장 열등한 것에 대해서 까지 스스로 자신을 낮추게 될 때 변화되는 것이다.
2. 종교는 임의적 발명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사람들이 순박한 민중들을 속박하기 위해 교활하고 교묘한 간계로 종교를 창안해 내고, 이 하나님 예배를 만들어 낸 그들 자신은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이라 하겠다.5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속박시키기 위해, 교활한 사람들이 종교에 필요한 여러 가지 것들을 조작해 내서 이것으로 일반 대중에게 존경심을 일으키며, 공포심을 갖게 하였다는 사실은 나도 인정한다. 그러나 씨앗에서 싹이 움트듯이 인간의 마음에 종교적 영향을 낳게 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없었다면 아마 그들은 결코 이 일을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교라는 명목으로 소박한 민중들을 교활하게 속인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사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과거에도 더러 있었고, 오늘날에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지만, 그들은 좋든 싫든 자기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바로 그것에 대하여 항상 어렴풋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가이우스 칼리굴라(Gaius Caligula)6 보다 더 대담하고 방자하게 하나님을 멸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자 그 보다 더 비참하게 떤 사람도 없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자기가 공공연히 멸시하던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또한 칼리굴라와 같은 사람들에게 자주 일어나는 것을 볼수 있다. 가장 대담하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 일수록 나뭇잎이 떨어지는 소리에도 가장 심하게 놀라는 것이다(레 26 : 36 참조). 이렇게 놀라게 되는 것은, 그들이 피하려고 하면 할수록 더 강한 힘으로 그들의 양심을 때리는 하나님의 복수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어디서 오겠는가? 실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감추며 하나님의 임재를 자기 마음에서 지워 버리기 위하여 온갖 구실을 찾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항상 두려움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 가끔 이러한 공포는 잠시 동안 사라져 없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즉시 돌아와서 새로운 공격를 취한다. 그들이 만일 양심의 불안에서 잠시나마 놓이는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아마 술에 취했거나 흥분한 사람의 수면과 조금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술에 취한 사람은 잠자는 동안에도 평화로운 휴식을 즐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속해서 무섭고 떨리는 꿈으로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경자, 그 자신이 바로 인간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어떤 관념이 항상 실재한다는 사실을 예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3. 실제적으로 신을 믿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의 마음에 결코 지워 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인식이 새겨져 있다는 것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항상 확신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어떤 신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태어나면서부터 고유하다. 그리고 이 신념은 선천적으로 모든 사람의 골수에까지 깊이 고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하나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 사악한 자들의 완고함 자체가 바로 충분한 증거가 된다. 디아고라스(Diagoras)와7 그 동료들은 모든 시대가 믿어 오던 종교들을 희롱하였고,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8 하늘나라의 심판을 조롱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냉소적인 비웃음에 지나지 않는다.9 왜냐하면 양심이라는 벌레가 쇠를 부식시키는 어떤 무엇보다도 더 예리하게 그 속을 파먹고 있기 때문이다.
키케로(Cicero)가 말한 것처럼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잘못된 것들이 없어지며, 종교심은 날이 갈수록 성장하며 개량된다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10 왜냐하면(이제 뒤에서도 곧 말하겠지만)11 세상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에 관한 일체의 지식을 없애버리려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파괴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만 주장하고 싶은 것은, 사악한 자들이 하나님을 부정하기 위해 열심히 만들어낸 마음의 그 완고함이 다 쇠약해지더라도 그들이 강하게 말살하고자 했던 그 신의 인식은 도리어 무성해지고 있으며, 현재에도 싹트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짓지 않을 수 없다. 곧 이것은 학교에서 비로소 배워야 하는 교리가 아니라, 우리 각자가 모태에서부터 터득하며 많은 사람이 전력을 다하여 이것을 잊어버리려고 할지라도 본성 그 자체가 아무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우기 만약 모든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목적이 하나님을 인식하는 데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여기에 도달하지 못할 때 그것을 불안정하고 허망한 것이라고 본다면, 자신의 모든 사상과 행동을 맞추지 않는 사람은 창조의 법칙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철학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영혼의 최고 행복은 하나님을 닮는 것이며, 그리고 이 영혼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붙잡을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모양으로 변하게 된다고 플라톤(Platon)이 자주 가르친 것도 다만 그런 의미의 것이었다.12 그릴루스(Gryllus)도 역시 플루타크(Plutarch)의 저서에서 매우 능숙한 이론으로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곧 종교가 생활에서 상실되면 인간은 짐승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러 면에서 훨씬 더 비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많은 형태의 죄악에 붙잡혀 그들은 끊임없는 혼란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13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만이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보다 더 뛰어나게 하며, 이 예배를 통해서만 인간은 불멸을 추구하게 된다.14
제 4 장
이 지식은 부분적 무지, 악의로 말미암아 소멸되거나 부패되었다
1. 미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 안에 신앙의 씨앗을1 심어 주셨다는 사실은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이 씨앗을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백의 한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다. 더우기 그것을 성숙하게 해서 때가 되어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시 1 : 3 참조). 더우기 어떤 사람은 미신에 사로잡혀 있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지만, 어떻든 이 사람들은 모두다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저버린 사람들이다. 그 결과 이 세상에는 진정한 경건이라는 것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한 때 어떤 사람들이 잘못으로 미신에 빠진다고 말한 바 있거니와, 그 뜻은 그들의 단순함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맹목적으로 수고하고 있지만, 이 맹목은 거의 항상 거만한 허영 그리고 완고한 것들과 결탁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로 교만과 결탁되어 있는 허영은, 비참한 인간이 마땅히 자기 수준 이상에서 하나님을 찾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육적인 어리석음을 표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판단하고 건전한 탐구를 게을리 하며, 호기심에 따라 공허한 사색의 길을 달리고 있는 사실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 하나님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억측에 따라 하나님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심연의 문이 열려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방향으로 발을 내디든지 간에 그들은 필경 파멸을 향해 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 후에는 아무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봉사한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에서 만들어 낸 허구와 망상에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2
바울은 이와 같은 사악함에 대하여 설득력 있게 말하고 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 : 22). 그는 또한 바로 앞 절에서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롬 1 : 21)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죄에 대하여 변명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해 바울은 그들이 바르게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곧 그들은 절제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분에 넘치는 것을 요구하여 제멋대로 어두움을 자초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공허하고 완고한 교만으로 우둔해졌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로 눈이 어두워졌다고 부언하였다. 그들의 어리석음은 이와 같이 허망한 호기심에서뿐만 아니라, 거짓된 신뢰에 따라 제한된 인간의 지식을 넘어 서 보려는 지나친 욕망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조금도 변명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2. 의식적으로 하나님을 외면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 : 1, 53 : 1)라고 말한 다윗의 이 말은 다른 곳에서도 곧 찾아볼 수 있겠지만 먼저 자연의 빛을 꺼버리고, 고의적으로 자신을 무감각하게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본능적인 감각에 의하여 아낌없이 내적으로 이미 부여받았으나 오만하고 상습적인 죄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미친 듯이 쫓아버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윗은 그들의 광란이 한층 더 증오스러운 것임을 설명하기 위해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 본질을 제거하지는 않으나 그 심판과 섭리는 박탈하여 하나님을 하늘에 있는 게으름뱅이로 가두어 버림으로써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단호하게 부정한다고 말하였다.3 그런데 세계의 통치를 포기하고 이것을 운명에 맡기며, 인간의 악한 행위를 묵과함으로 인간이 형벌을 받지 않고 육욕에 빠져 살게 한다는 것보다 더 하나님의 본성과 불일치한 것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말살시키고 무분별한 욕망에 빠지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자이다.4 그리고 사악한 자들이 눈을 감은 후,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인 것이다(마 13 : 14-15, 사 6 : 9-10, 시 17 : 10 참조). 다윗은 다른 구절에서 "악인의 죄얼이 내 마음에 이르기를 그 목전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 하니"(시 36 : 1)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신의 악행을 도도히 자랑한다고 하였다(시 10 : 11).
비록 그들이 어떤 신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의 능력을 제거함으로써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이다. 바울이 증거한 대로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한 분이시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신 분"이시다(딤후 2 : 13). 그러므로 하나님을 공허하며 죽은 우상으로 만드는 자들은, 실은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그들이 아무리 그들 자신의 의식을 거스려 싸우며 하나님을 이 의식에서 몰아내고 천상에서 파멸시키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대 앞에 가끔 불러내지 않는다고 생각할 만큼 어리석음이 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어떠한 공포로도 하나님을 맹렬히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맹목적인 충동에 사로 잡혀 있는 한, 그들은 무감각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이 망각은 계속 그들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3.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변덕에 따라 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미신에 대하여 버릇처럼 변명한 그 공허한 변론이 전복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종교에 대한 열심만 있으면,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 없는 것이라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참된 종교는 마땅히 우주 법칙에 관한 하나님의 뜻에 따라야 한다는 것,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망상에 따라 변질되는 그런 망령 또는 환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미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할 때에도 그것이 가면을 쓰고 얼마나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는가를 또한 명백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미신은 하나님께서 관심조차 없다고 입증하신 것만을 붙잡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 그가 기뻐하시는 것들은 멸시 또는 공공연히 거절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거짓된 의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모두 자기 자신의 망상을 예배하며 찬양한다.
만일 그들이 처음에 어리석고 경박한 생각에 알맞는 신을 만들어 내지 않았더라면,5 결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우롱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하나님에 대하여 애매모호하고 거짓된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무지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더니"(갈 4 : 8)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에베소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엡 2 : 12) 지낸 자들이며, 그때에는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외인이었다고 하였다. 적어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는 유일신을 생각하든 다신을 생각하든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다같이 참되신 하나님을 떠나고 이 하나님을 저버렸으며 또한 그를 버림으로써 저주받을 우상 외에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락탄티우스(Lactantius)의 말과 같이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종교는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단정해야 한다.6
4. 위선
여기 또 두 번째 죄가 있다. 그것은 어떻게할 수 없이 강요당하지 않는 한 그들은 결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반항하며 끌려가기 전에는 절대로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도 그들은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는 데서 생기는 자발적인 두려움에 감동을 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강요당하는 노예적이며 강제적인 공포에 사로잡힌다. 이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혐오하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다. 공포는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신들을 만들어 냈다고 한 스타티우스(Statius)의 말은7 이런 종류의 무신앙에 대하여, 그리고 이에 대해서만 잘 들어맞는 말이다.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의 의를 멀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벌하기 위해 심판대가 마련되어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그 심판대가 무너지기를 열심히 원하고 있다. 이러한 심정으로 그들은 심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으신 하나님과 대항하여 싸운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능력이 가해짐을 깨닫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멀리할 수도 피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서워서 후퇴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서나 그들을 위압하고 있는 하나님의 위엄을 멸시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어떤 종류의 종교적 행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들은 여러 가지 죄악으로 자신들을 부패케 하기를 그치지 않으며 악에 악을 더하고 마침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하여 그 모든 의를 파괴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하여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체 위장함으로써, 죄의 탐닉을 제재하지 아니하고 자기로 만족하며 또한, 자신의 육체적인 방종을 성령의 고비로 제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방종에 빠지기를 더 좋아하는 무리들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종교의 공허하며 거짓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거의 종교의 그림자라고 부를 가치조차도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해 이런 혼란한 지식과 종교의 기원인8 경건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가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는데 이 경건은 오직 신자의 마음속에만 있다. 그러나 위선자들(hypocrites)은 이러한 왜곡된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이 멀리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처럼 보이려고 한다. 전생애를 바쳐 시종 일관 하나님께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의 모든 행위에서 대담하게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찮은 제물로 하나님을 회유하려고 열중한다. 또한 그들은 마땅히 성결한 생활과 완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함에도 천박한 것들과 무가치한 의식들을 날조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한다. 아니, 그것뿐인가. 그들은 더욱 방종하여 자신을 불결한 데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속죄의 어리석은 행동으로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다할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만을 신뢰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피조물인 그들 자신을 신뢰한다. 마침내 그들은 그러한 거대한 오류에 그들 자신을 얽어맴으로써 한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기 위해 번쩍이던 그 섬광을 우매한 죄악으로 질식시켜 마침내는 꺼지게 한다. 그러나 그 씨앗은 그대로 남아 있으며 결코 근절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신성에 대한 어떤 관념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씨앗은 매우 부패하였기 때문에 가장 나쁜 열매를 맺을 뿐이다.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관념이 본래부터 인간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하는 나의 지금의 주장은 보다 더 명백해진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신들도 이에 대하여 고백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안할 때에는 익살스럽게 하나님을 희롱하며 허튼 소리로 수다를 떨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격하시킨다. 그러나 일단 절망이 그들에게 엄습해 오면 그들은 자극을 받아 하나님을 찾게 되며 형식적이나마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게 된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이 하나님께 대해 전혀 무지한 것이 아니며 벌써부터 나타났어야 할 것이 완고함으로 말미암아 억제되어 있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제 5 장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주 창조 속에서 빛이 비추어 지고 그리고 우주를 계속 지배하신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1-10)
1. 하나님이 스스로 명백히 모습을 드러내시므로 우리는 모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축복된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요 17 : 3 참조).1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2 인간의 마음속에 이미 말한 바 있는 종교의 씨앗을 심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매일 자신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실로 하나님의 본질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어서3 그 신성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초월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영광의 명백한 표적을 새겨 놓으셨으며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무지를 구실로 삼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시 104 : 2)라고 아주 적절하게 외쳤다. 말하자면 이 말은 우주 창조이래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시기 시작하신 이후부터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는 말과 같다.
시편 기자는 또한 같은 곳에서 능란하게 광대한 하늘을 왕궁에 비교하여 다음과 같이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 : 2-4)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영광이 위에서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에, 흔히 하늘을 하나님의 궁전이라고 부른다(시 11 : 4). 더욱이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에는 어느정도 하나님의 영광의 섬광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그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우며, 광대한 이 우주의 구조를 그 광채의 무한한 힘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4 히브리서 기자가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히 11 : 3)이라고 우아하게 표현하였던 이유는,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 말로 일종의 거울(mirror)이요, 바로 이 거울로 달리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가 천체에다 만민이 다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한 이유는(시 19 : 2이하), 그 천체가 너무도 명백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 관찰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명백하게 밝혀 주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 : 19-20).
2. 하나님의 지혜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 주는 수많은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엄밀한 연구 대상으로 정해진 심원한 것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들이기도 하다.5 사실 이러한 학문을 다소나마 수학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다.6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히 더 한층 나아가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기술과 정밀한 수고가 필요하다.
이러한 것을 연구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그 자체를 보여 주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오로지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그 기술의 탁월함은 깨닫게 마련이다. 그것은 특수하면서도 질서 정연한 천체의 무수한 다양성이 그 자체를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풍부하게 보여 주지 않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7 곧 우리가 갈렌의 노련한 기술로8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탁월한 재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정묘하기 때문에, 그 창조주가 당연히 놀라운 일꾼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것이다
3. 인간이 신의 지혜로우심을 최고로 증명한다
따라서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의 소우주9라고 한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9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며,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싫증만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로움을 그 안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행 17 : 27)10라고 첨가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 사람이 자신을 깨우쳐 주는 하늘나라의 은혜를 내적으로 지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의 그 게으름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11 이와 똑같은 이유로 다윗은 도처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름과 영광을 간단히 찬양하고, 곧 이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시 8 : 4)라고 외쳤다. 그는 다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시 8 : 2)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다른 웅변가를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고 그는 선언했다. 그래서 다윗은 악마적인 교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없애고자 하는 자들의 그 광란을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아니하고 어린아이를 여기의 논전에 끌어내 온 것이다. 따라서 바울도 또한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 : 28)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와 같은 훌륭한 탁월성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심으로써,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교의 시인들도 상식과 경험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사람들의 아버지"라고12 불렀던 것이다. 진실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맛보고 다음에 자기편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드리지 않는 한, 아무도 자기를 바쳐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이다.
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께 반항한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의 파렴치한 배은망덕이 드러난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공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에 부풀어 스스로 잘난 체한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그들은 깨닫고 있다. 그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배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만다. 실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기괴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을 도말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널리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신의 영육에서 수백 번이라도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인가?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분을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린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킨다.13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운동, 그 탁월한 기능, 그 특수한 은사, 이러한 것들은 특히 쉽게 감춰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 주는 것들이다. 그러나 에피큐로스 학파는 키클로페스(Cyclopes)와14 같이 그러한 고귀성을 이용해서 더욱 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전우주에는 이러한 특권이 없어서 인간이라고 하는 겨우 5척밖에 안 되는 버러지를 다스리기 위하여 하늘나라의 모든 지혜의 보화가 한 곳에 다 동원되었단 말인가? 첫째, 그 영혼 안에 육체의 각 부분과 부합하는 어떤 기관이 있다고 먼저 주장하는 것은 조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을 더 빛나게 하는 것이다. 에피큐로스로 하여금 다음의 질문에 답하게 하자. 곧 원자의 집합이 어떻게 식물과 음료를 분해하여 한 부분은 배설물로 다른 부분은 피로 변하게 하는가? 그리고 마치 많은 영혼이 상의하여 한 육체를 다스리기나 하는 것처럼 무엇이 각 지체로 하여금 열심히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가!
5. 창조주와 피조물의 혼동
그러나 나는 지금 그런 돼지 떼와15 같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다. 오히려 해괴한 것들에 끌리어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그 권리를 박탈하기 위하여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의 그 냉소적인 교설을16 부정한 방법에 따라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은 유기적인 여러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하며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한다.17 그러나 영혼의 여러 능력이 지체를 돕는 기능에만 국한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천체를 관측하고 별의 수를 계산하며, 그 크기를 결정하고 별과 별 사이 거리를 알며,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의 기울기의 정도를 아는 일에 있어서 도대체 사람의 육체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실로 나는 천문학의 유용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연구에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위에서 제시한 한 실례로 인해 독자들은 나머지 문제들도 쉽게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영혼의 그 다방면의 민첩함 그리고 훌륭한 것들을 발명해 내며 많은 놀라운 발명품의 어머니인 영혼의 그 다방면의 교묘함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이다.18 이 외에도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기 저기 배회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시하기까지 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영혼 불멸의 흔적은 지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을 말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신적 존재인 인간이 창조주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에서인가? 실로 우리가 받은 판단력에 따라 정과 사를 분별할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없을 수 있겠는가? 수면 중에도 우리에게는 지능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자신을 그렇게 많은 예술과 유익한 것들의 창안자로 자처하면서 하나님은 그가 받으실 찬양을 빼앗겨도 좋단 말인가?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무엇이나 다 다른 근원으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주어 졌음을 경험이 풍부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더우기 전 우주에 생명을 주는 것은 은밀한 영감이라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의 말은 설득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불경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버질(Vergil)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를 좋아하고 있다.
최초에 한 영이 있어
하늘과 땅, 해면, 빛나는 달
그리고 타이탄의 별들을 부양한다.
이 영은 모든 부분에 고루 퍼져서
그 덩어리를 움직이며 또 그것과 융합한다.
이 영으로부터
인류, 짐승, 창공을 비상하는 날개 달린 아름다운 새들
그리고 유리같이 빛나는 대양 밑의 고기들이 나온다.
이 영은
만물에서 불의 열과 생명의 기원을
나오게 했다.19
이 시는 하나님의 영광의 장관(壮观)으로 세워진 이 세계가 마치 그 자체의 창조주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시인은 다른 곳에서도 헬라 사람과 라틴 사람의 공통적인 견해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기 때문이다.
꿀벌은 하늘나라 마음의 한 부분
천상에서 어떤 힘을 발아 들인다.
그것은
신이 땅과 바다와 하늘
그리고 만물에 편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양과 소
사람, 짐승들이 태어날 때
실낱같은 생명을 받는다.
그리고.
만물이 그에게로 돌아가서 해소되고
또 회복된다. 다시는
죽음이 없다. 그러나 별 많은 하늘나라
높이 올라가 거기서 살리라.20
세계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그것을 움직인다는 우주 정신에 대한 그 빈약한 사색이 인간의 마음에 경건을 일으키며 키우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다는 말인가! 이러한 사상은 또한 위와 같은 원리에서 연역해 낸 추악한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의 그 모독적인 시구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21 이 시는 실로 우리가 마땅히 두려워하고 찬양해야 할 참되신 하나님을 몰아내기 위하여 영광적인 신격을 고안해 낸 것이다. 물론 경건한 마음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고 하면 자연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은 경건하게 말해질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귀에 거슬리며 부적당한 말이다. 왜냐하면 자연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경건을 요하는 중대한 과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그 사역의 열등한 과정과 혼동하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22
6. 창조주는 자신의 주(主) 되심을 창조에서 나타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성을 고찰 할 때마다 한 분 하나님이 존재하셔서 바로 이 분이 자연 전체를 주관하시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를 바라보게 하시며, 우리의 신앙을 자기에게 향하게 하시며, 또한 자기에게 예배를 드리고 자기의 이름을 부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우리 안에 신적인 본성을 증거해 주는 그 놀라운 은사를 향유하면서도, 우리가 이 은사를 풍부하게 주신 창조주를 멸시하는 것처럼 더 불합리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님의 권능은 얼마나 명백한 증거를 통하여 우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우리가 일부러 모르는 척하지 않는 한 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감추어질 수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무한히 거대한 이 천지를 지탱하신다. 때로는 단순한 그의 고개짓 신호 만으로도 천둥을 일으켜 하늘을 뒤흔들어 놓으시며, 번개로 모든 것을 뒤 흔들고, 불꽃으로 대기 전체를 태우신다. 때로는 여러 가지 폭풍우로 대지를 휘저어 놓으시며 그가 원하실 때에는 순식간에 그것들을 잔잔케 하신다. 그리고 파도가 높게 일어 계속 땅을 파멸할 것같이 보이는 큰 바다를 마치 공중에23 매달려 있는 것처럼 그것을 견제하시며 때로는 심한 폭풍을 일으켜서 그것을 놀라운 방법으로 격동시켰다가는 다시 잔잔하게 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연의 증거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찬양이 성경 여러 곳에서 기록되어 있지만, 특별히 욥기와 이사야서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이에 대하여는 고의적으로 생략하려 한다. 왜냐하면 성경에 근거하여 우주 창조를24 논할 때 더 적절하게 소개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제시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살아 계신 모습의 그 윤곽을 높게 추구하고, 낮게 추구하는 것이라면 교회에 속하는 사람이나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나 다같이 하나님을 찾는 방법은 공통적이라는 사실이다.25 하나님의 이 능력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원성을 생각하게 한다. 왜냐하면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분은 필연적으로 영원하시며 자존하셔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만물을 보존하시는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만일 그 유일한 이유라고 하면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데 충분히 남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의 선포한대로 피조물 중에 하나님의 자비를 넘치도록 받지 못한 자는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시 145 : 9 참조).
7.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
하나님의 사역의 제2의 종류, 곧 자연의 정상적인 과정 밖에서 일어나는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증거는 모든 점에서 똑같이 명백하다. 하나님께서는 인류 사회를 다스리실 때 섭리를26 잘 조절하셔서 무수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지만, 그러나 명백하고 일상적인 지시에 따라 경건한 자에게는 관대하심을, 악하고 범죄한 자에게는 엄격하심을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흉악한 행위에 대하여 형벌로 보복하신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이 무죄자의 보호자요, 변호자이시며, 선한 사람들을 축복하셔서 그들의 생활이 번창하게 하시며, 그들의 궁핍함을 도우시며,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그들을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시며, 그리고 이 모든 일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심을 명백하게 보여 주신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악한 자와 행악자가 일시적으로 벌을 받지 않은 채 날뛰도록 허용하시며 일시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많은 역경 속에서 괴로움을 당하고, 심지어는 불경한 자들의 불법과 악의로 압박까지 받게 하신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하나님의 그 불변적인 의의 법칙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오히려 이와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곧 하나님께서 한 가지 죄를 벌하실 때 그의 진노를 명백히 하시는 것은 그가 모든 죄를 미워하신 바는 뜻이요, 그가 많은 죄악을 벌하지 아니하시고 그대로 두는 것은 앞으로 심판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그 형벌을 연기하신다는 뜻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의 긍휼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시기 위해 얼마나 풍부한 기회를 주셨던가! 곧 하나님께서는 지칠 줄 모르는 사랑으로 비참한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은혜를 나누어주시고, 아버지의 사랑 이상의 것으로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셔서 그들의 행악을 산산이 부숴 버리지 않으셨는가!
8. 하나님의 통치가 인간의 생활을 좌우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선지자는 절망적인 곤경에서 거의 멸망 직전에 빠져있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갑자기 기적적으로 또는 예상 밖으로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상기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을 사나운 짐승으로부터 보호하여 마침내는 바른 길로 인도하시며(시 107 : 4-7), 궁핍하고 주린 자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시며(9절), 사로잡힌 자들을 음침한 토굴과 쇠사슬에서 놓아주시며(10-16절), 파선 당한 자들을 항구까지 무사히 돌아오게 하시며(23-30절), 병으로 거의 죽게 된 자들을 고쳐 주시며(17-20절), 뜨거운 열기와 한발로 땅을 태우기도 하시며, 은밀한 자비의 단비로 그 땅을 비옥하게도 하신다(33-38절).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자들을 높이시며 혹은 높은 자들을 그 위엄 있는 위치에서 떨어뜨리기도 하신다(39-41절) 이러한 실례를 제시함으로써 선지자는 우연한 사건으로 간주되는 것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요, 특별히 그의 부성적인 사랑을 여러 모양으로 증거해 주는 것임을 보여 준다. 여기서부터 경건한 자들은 기쁨의 근거를 얻게 되고 불경자와 유기자(遗弃者)들은 그 입을 다물게 된다(42절). 그러나 사람들은 대다수가 잘못에 빠져들어 그와 같은 눈부신 극장27 안에 있으면서도 눈먼 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은 희귀하고도 특수한 지혜의 문제요(43절), 그리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가장 예리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도 이를 생각하는 데는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아무리 찬란하게 빛날지라도 이를 참으로 보는 사람은 백 사람 가운데 겨우 한 사람28 있을까 말까 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는 흑암 속에 가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억제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불경자의 그 흉악함이 순식간에 정복되고, 그들의 오만함이 꺾이고, 그들의 강한 요새가 무너지며, 그들의 무기와 갑옷이 산산 조각나며, 그들의 힘이 무너지고, 그들의 음모가 실패로 돌아가고, 그들이 스스로 거꾸러질 때, 또 하늘 위에까지 높이 오른 그들의 뻔뻔스러움이 땅 한가운데에 내던져질 때 하나님의 권능은 그 자체를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이와 반면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시 113 : 7), 눌린 자와 슬퍼하는 자를 궁지에서 구해 내시며, 절망자로 하여금 선한 소망을 다시 찾게 하시며, 소수이며 약한 비무장자가 많고 강한 무장자에게 승리할 때에도 또한 하나님의 권능은 명백하게 나타난다. 실로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맞춰 처리하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혼란하게 하시며(고전 1 : 20 참조), 그리고 "지혜 있는 아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고전 3 : 19, 욥 5 : 13 참조) 하실 때, 그의 탁월성을 나타내신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이 최선의 방법으로 다스리시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본질을 다 꿰뚫어 보려고 하지 말고 그 하신 일을 보고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을 설명하며 주장하는 데 필요한 증거를 얻기 위해 이 이상 더 장황하고 수고로운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미 위에서 닥치는 대로 말한 것들은 비록 적은 것이긴 하지만 눈으로 쉽게 분별할 수 있으며, 손으로 가려낼 수 있을 만큼 어디서나 분명하고 명백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상고하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것을 주의 해야 한다. 이 지식은 공허한 사색으로 만족하며 단순히 뇌리에서 맴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지각하며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만 한다면 반드시 건전한 것이 되며 풍성한 열매을 맺는 지식이다.29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권능으로 자신을 나타내시므로, 그 능력을 우리 속에서 느끼며 그 은사를 우리가 향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지식을 통하여 한층 더 깊이 감동을 받아야 하고, 우리의 인식을 통해 파악할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공상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완전한 방법이요 가장 적절한 순서는 다음과 같은 것임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은 주의깊게 탐색해야 할 분이기보다 경배 받으셔야 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친 호기심에서 하나님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시도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사역에서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가까이 하시며 친밀히 하시며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을 전달하신 그 사역에서 하나님을 숙고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은 권능으로 우리 각자 안에 거하시므로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행 17 : 27-28). 이러한 이유로 다윗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라고 먼저 고백하고(시 145 : 3), 곧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언급하면서 "나도 주의 광대하심을 선포하리이다"라고 고백하였다(시 145 : 5-6, 시 40 : 5 참조).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특별히 하나님에 관한 탐구에 열중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력을 감탄케 할뿐만 아니라, 우리를 깊이 감동시킨다는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이 말한 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압도당하여 하나님을 파악 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새로워지기 위하여 그의 사역을 다시 소생해야 하는 것이다.30
10.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목적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마땅히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도록 자극시킬 뿐만 아니라, 내세의 소망을 갖도록 일깨우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야 한다.31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의 자비하심과 엄격하심에 대한 표본은 지금 막 시작되었을 뿐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도 의심 없이 이러한 표본이 위대한 사건들의 서곡이며, 따라서 이것의 완전히 드러남은 그 충분한 제시는 미래의 생활에까지 연기된다고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는 경건한 사람이 불경한 자로부터 고통을 당하며 해를 받고, 중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며, 능욕과 비난으로 상처를 받는 것을 본다. 이와는 반대로 악한 자는 번영하며 부요하게 되고, 엄연히 안정을 누리고 조금도 벌을 받지 않고 지내는 것을 본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가 여기서 즉시 결론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이 세상 밖에 또 다른 세상이 있어서 거기서 불의는 벌을 받게 되고, 의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자들이 자주 주님의 징계를 받는 것을 보게 될 때, 불경자들이 언젠가는 하나님의 형벌을 전혀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매우 확실하게 믿을 수 있다. 실로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유명한 말이다. "만일 공개적으로 형벌이 현재 모든 죄에 대하여 가해진다고 하면, 최후 심판에 남을 것은 하나도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만일 하나님께서 지금 어떠한 죄에 대하여도 공개적으로 형벌을 가하지 않는다고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없다고 믿을 것이다."32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각 사역에서 특히 그 전체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권능이 그림에서처럼 실제로 표현됨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는 하나님을 알도록 초대되고 유인되며, 여기서부터 인류는 참되고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은 그가 하신 사역에서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그 능력의 주요한 목적, 그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하여 우리가 숙고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자신의 생명, 지혜, 능력을 보이셨으며 우리를 위해서 의, 선, 자비를 행사하셨는가를 깊이 생각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불신자들이 인류의 통치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그 심원한 계획을 생각하지 않으므로 다윗이 그들의 우매함을 탄식한 바 있지만(시 92 : 5-6), 그러나 다른 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는 우리들의 머리털 보다 많다고 말하였다(시 40 : 12 참조). 그러나 이 논의는 후에 더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기 때문에33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경배 드리지도 않기 때문에 마침내 미신과 혼란에 빠진다. 11-12)
11. 창조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증거가 우리에게는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역이라는 거울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영원한 왕국을 아주 명백하게 보여 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는 그 명백한 증거들을 보면서도 점점 더 우둔하여져서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한다.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구조와 질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거나 온 땅을 두루 바라볼 때 마음을 기울여 창조주를 기억하는 자가 우리 중 과연 몇이나 있는가? 오히려 창조주를 무시하고, 나태하게 앉아서 그의 사역을 바라다보고만 있지 않은가? 사실, 자연의 통상적인 과정 밖에서 매일같이 발생하는 사건들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간이 하나님의 섭리로 지배를 받는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맹목적이며 무분별한 운명에34 의하여 회전된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우리 중에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는 때때로 이러한 것들의 안내와 지도에 따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필연적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신성에 대한 개념을 경솔히 파악하고, 즉시 자신의 육적인 망상과 광란에 빠져 들어가서 마침내는 공허한 것으로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를 부패하게 만든다. 우리는 어떤 점에서 서로 동일하지 않은 데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자신의 특수한 오류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괴하고 어리석은 것들을 위해서 유일하신 참된 하나님을 버리는 데는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동일하다. 범인이나 둔한자 뿐만 아니라 가장 탁월하고 다른 일에 있어서는 예리한 식별력을 가진 자라도 다같이 이와 같은 질병에 걸려 있다.
이 점에 대하여 모든 철학자가 얼마나 그들의 우둔함과 어리석음을 여실하게 드러내었던가! 가장 미련한 자처럼 행한 다는 철학자들은 그만 두고라도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종교적이며 가장 신중했던 플라톤 역시 자신이 생각해 낸 둥근 구체(球体)35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맸다. 사람들에게 길을 비추어 주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지도적인 인물들도 이렇게 방황하고 비틀거리고 있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들이야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사의 통치가 너무도 명백하게 섭리를 증거해 주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보고도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만사가 생각 없는 운명의 의지에 의하여 뒤죽박죽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공허와 오류에 크게 기울어져 내가 항상 말하는 것은 가장 탁월한 사람에 대해서이지 하나님의 진리를 모독하는데 그 광기가 지나친 천박한 자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2. 하나님의 현현은 인간의 미신과 철학자들의 오류에 의해서 질식 되었다
온 세상을 채우고 뒤덮은 그 무한히 더러운 오류의 진창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 왜냐하면 각자의 마음은 미궁과36 같아서 민족마다 여러 가지 허위에 각각 끌려 갔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이것뿐만 아니라 거의 각 사람마다 자신의 신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경솔함과 천박함이 무지와 흑암으로 더불어 결합되어 하나님 대신 자신을 위해서 우상과 환상을 만들어 내지 않는 사람이 거의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분명히 거대하고 풍부한 샘에서 물이 분출되어 나오는 것처럼 무진장한 신들이야말로 인간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그들은 각자가 극단적인 방종으로 흘러 하나님에 대해서 이것 저것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여기서 세계를 혼란의 와중에 빠지게 하는 미신의 목록을 구태여 작성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끝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 정신의 그 맹목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는 미신에 대하여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많은 부패를 통하여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는 여기서 미개하고 교양이 없는 천박한 사람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이성과 교양으로 하늘나라를 통찰하려고 애쓰는 철학자들이 서로 불일치하니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37 지혜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 예술과 학문이 세련되면 세련될수록, 그러한 사람은 자기 의견에 더 아름다운 색채를 입혀 위장해 보려고 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엄밀히 조사해 보면 그것들은 모두가 다 허무한 그림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스토아 학파(Stoics)는 자연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여러 가지 명칭을 끌어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이러한 자신들의 사상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말은 마치 우리가 각종의 제신에 속아 점점 더 심한 오류에 끌려 들어가는 일만 없으면 공허한 것에 기울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수법이다. 애굽인들의38 신비주의적 신학은 아무 이유 없이 헛소리를 한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자기들 모두는 용의 주도하게 이에 대하여 생각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단순하고 부주의한 사람은 그럴 듯하게 보이는 것을 처음 볼 때에는 이에 속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들어 낸 것 치고 종교를 기본적으로 부패하게 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와 같이 극히 혼란한 다양성은 에피큐로스(Epicurearts) 학파와 그 외 경건을 경멸하는 자들을 대담하게 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관념을 버리도록 하였다.39 그들은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가지고 싸우는 것은 의견의 불일치와 심지어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가르침 때문이라고 보고, 존재하지도 않는 그런 신을 탐구하기 위해 사람들은 공허하고 어리석게 스스로를 괴롭힌다고 주저 없이 추단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하고도 아무 형벌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불확실한 신들을 날조하여 끝없는 논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을 공공연히 부정하는 것이 더 나은 일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참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린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불경을 감추기 위해서 인간적인 무지의 연막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결코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식인이나 무식한 사람이나 똑같이 불일치를 일으킬 만한 문제가 하나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탐구하는데 그렇게 많은 잘못을 범하는 인간이니 만큼 하늘나라의 신비에 대하여는 한층 더 어리석고 눈이 멀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시모니데스(Simonides)는40 폭군 히에로(Hiero)에게서 하나님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이에 대하여 하루 동안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사람들은 이 답변을 칭찬하였다. 다음날 다시 그 폭군이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자 그는 이틀 동안의 여유를 더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였다. 그는 여러 번 날수를 배로 연기하고 나서 마침내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래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희미해집니다." 그가 그렇게 희미한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는 일을 중단하였던 것은 지혜로운 일이었다.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인간이 본성으로만 가르침을 받는다면 확실하고 건전하며 분명한 지식을 갖지 못하고 오히려 혼란한 원리에 매여 마침내는 알지 못하는 신을 숭배하게 된다는 사실이다(행 17 : 23 참조).41
(인간은 오류를 고집하는 한 핑계할 수 없다. 13-15)
13. 성령은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종교 행위를 거절하신다
우리는 이제 순수한 종교를 부패하게 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자신의 견해에 집착하는 자는 모두가 다 필연적으로 이런 데에 빠지게 된다-한 분이신 유일신으로부터 멀리 떠나는 자라고 우리는 주장해야 한다. 정말 그들은 마음에 그러한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자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의도가 무엇이며, 그들의 확신하는 바가 무엇인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먼 마음속에 하나님 대신 마귀를 두는 자는 모두 다 배교자라고 성령께서 선언하시기 때문이다 (고전 10 : 20 참조).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이 복음에서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방법을 배우기 전에는 "하나님도 없이" 지내던 자였다고 말한다(엡 2 : 12-13). 그리고 이 말은 한 국민에게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도 주장한 대로 사람들은 모두가 다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위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롬 1 : 21).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참되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들어가실 여지를 만들기 위하여 전에 이방인들 사이에 신으로 경배받던 것은 어떠한 신도 어리석고 거짓된 신으로 정죄하는 한편,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계속 번창하던 시온산 외에는 어떠한 하나님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합 2 : 18,20). 확실히 예수님 당시의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참된 경건에 거의 접근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하신 말씀을 듣는다(요 4 : 22).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익하며 잘못된 망상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모든 사람이 비록 큰 죄악에 빠져 있지 않고 혹은, 공공연하게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은 공통적인 이해에 근거한 순수하고 공인된 종교는 가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들이 일반 대중의 광란에 감염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라고 한 바울의 주장은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고전 2 : 8). 그러나 가장 탁월한 자가 오류라는 어둠 속에서 헤매인다고 하면 민중의 찌끼와 같은 존재들에 대하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만들어 낸 모든 예배 형식을 성령이 속된 것으로 거절한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하늘 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인간의 방법으로 얻어진 의견은 비록 그것이 항상 막대한 오류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오류의 산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배드리는 것이 비록 나쁜 결과를 수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다(행 17 : 23 참조). 이에 대하여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하나님에 대해 율법의 가르침을 받지 못한 자도 모두 죄를 범한 것이라고 하였다(요 4 : 22). 그리고 가장 훌륭한 입법자들은 종교가 일반의 여론을 근거로 하고 있다고 말하였을 뿐, 그 이상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 크세노폰(Xenophon)에 의하면 소크라테스(Socrates)까지도 사람은 누구나 조상으로부터 받은 의식과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의 관습에 따라 신들에게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명령한 아폴로(Apollo)의 신탁을 예찬하였다고 한다.42 그러나 세계를 멀리 초월하고 있는 것을 그들 자신의 권위로 정의할 수 있는 이 법칙은 어디서부터 인간에게 왔는가? 혹은 인간적으로 전해진 신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받아들이기 위해 조상들의 법규나 민중의 제정을 누가 그렇게 감수할 수 있겠는가? 인간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다른 사람의 결정을 따르기 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따르는 법이다.43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한 도시의 관습이나 전통의 여론에 따르는 것은 경건의 띠로서는 너무도 약하고 부서지기 쉽기 때문에, 이제 남은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스스로 자기 자신을 증거하시는 일뿐이다.
14.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증거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주의 구조에서 창조주의 영광을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도 많은 등불이 우리를 위해 비춰 주고 있지만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이다. 비록 그 광선이 우리의 온 둘레를 비춰 준다 하더라도 결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분명히 약간의 섬광을 발하기는 하나 그것은 충분한 빛을 방사하기도 전에 사그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사도는 세계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한, 바로 그 구절에서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 : 3)라는 말씀을 첨가하였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곧 보이지 않는 신성이 이와 같은 거울 안에서 나타나게 되지만 하나님의 내적 계시에 의하여 믿음으로 조명되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세계의 창조에서 명백히 보여졌다고 말한 곳에서도(롬 1 : 19) 바울은 그러한 현현을 인간의 통찰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으로서는 변명할 수 없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 주셨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그를 멀리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행 17 : 27), 다른 곳에서는 이러한 접근의 결과가 무슨 유익이 있는가를 가르쳤다. 곧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 : 16-17)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증거가 부족 하지 않는데도 자기를 알리시기 위하여 각종의 풍부한 인자하심으로 인류를 친절하게 이끄시는데 인간은 자기의 길, 곧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다.
15. 우리의 무능함이 죄이다
그러나 아무리 순수하고 명백한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할 본래적인 능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 우둔함의 죄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리고 실로 우리의 양심이 나태와 배은망덕을 항상 깨우쳐 주지 못하더라도 무지를 구실로 내세우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다음의 변명들, 곧 잘 못하는 피조물까지도 가장 아름다운 음성으로 전해주는 그 진리를 들을 만한 귀가 자기에게는 없다고 인간이 변명하는 것과, 눈 없는 피조물이 보여 준 것을 자기에게는 눈이 없어서 볼 수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과, 그리고 비이성적인 피조물까지도 교훈을44 주는데 정신 박약이라 더 이해할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것들이 당연히 용납되기라도 한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만물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가르쳐 줄지라도 우리가 방황자요 방랑자로서 길을 잃고 헤맨다면 어떠한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연의 놀라운 구조 속에서 그들의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씨앗을 즉시 부패케 하여 훌륭하고 완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하고 있는 사실은 마땅히 그들 자신의 태만에 돌려야 한다. 그러나 한편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찬란하게 보여 주는 그 단순한 증거만으로는 우리가 충분한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것도 거짓 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주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어떤 가벼운 신성(神性)을 맛보게 되자 우리는 즉시 참되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대신 머리로 만들어 낸 꿈과 환상을 세우며 마땅히 참되신 근원에 돌려야 할 의, 지혜, 선, 권능에 대한 찬양을 그 밖의 어떤 무엇에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매일 하시는 역사를 그릇되게 판단함으로써 그 역사를 희미하게 하거나 뒤집어 엎거나 하여 그 사역 자체로부터 영광을 빼앗으며 창조주에게서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찬양을 박탈하고 있는 것이다.
제 6 장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안내자로 교사로서 필요하다
1. 하나님은 오직 성경 속에서 우리에게 자신에 관한 실제적 지식을 부여하신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모든 사람의 눈에 선명하게 비치는 광채는 인간들에게 배은망덕에 대한 일체의 변명을 못하게 하는 데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동일한 죄의식 아래에 두시기 위해 피조물에게서 생생하게 표현된 자신의 임재를 그들 하나 하나에게 예외 없이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정확히 우리를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다른 훌륭한 조력자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의 빛을 더하셔서, 이 말씀으로 구원을 알게 하셨던 것은 조금도 헛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에게 더 가깝고 더 친밀하게 모으고자 하셨던 자들을 이 특권을 누리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하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마음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방황하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을 자기 백성으로 정하신 후, 다른 백성들처럼 하나님에게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한 울타리 안에 둘러싸셨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와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에 대한 순수한 지식 안에 우리를 묶어 두시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모든 사람들 앞에 견고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까지도 곧 넘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노인이나, 눈이 흐린 사람 또는 시력이 약한 사람에게 가장 아름다운 책 한 권을 내보이면 어떤 종류의 책인지는 겨우 알 수 있겠지만 거의 두 낱말도 해독할 수 없는 것이다.1 그러나 안경의 도움을 받으면 정확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혼란한 지식을 우리 마음에서 바로잡고 우리의 우둔함을 쫓아 버리며 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를 교훈하기 위하여 말없이 교사들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장 거룩하신 입을 여시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시다. 하나님께서는 택함 받은 자들이 어떤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지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교회를 위하여 이 계획을 세우시고, 일반적인 증거들 이외에도 자신의 말씀을 첨가하셨다. 이 말씀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보다 더 확실한 표준이 되는 것이다.2
(성경에서 얻어지는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지식)
아담과 노아, 아브라함과 그 밖의 다른 족장들이 불신자와 구별짓게 하신 하나님에 관한 그 깊은 지식에 도달한 것은 의심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도움으로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영생의 소망을 가지도록 그들을 조명하여 준 그 특수한 신앙 교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알되 창조주로서만이 아니라 구속주로서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조금도 의심 없이 말씀을 통하여 이 두 지식에 다같이 도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순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요, 통치자로 파악하는 그런 종류의 지식이 먼저 오게된다. 다음으로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는 다른 내적 지식이 여기에 더하여져서 이 지식에 의해 하나님을 우주의 창조주요, 지음 받은 만물의 유일한 창시자, 통치자로 알뿐만 아니라, 증보자의 위격을 가지신 구속주로서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세계의 타락과 자연의 부패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구제책에 대해서도 다루지 않기로 하겠다.3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양자로 삼으신 언약에 대하여, 그리고 신자들을 항상 불신자에게서 성별(圣别)하였다는 일부의 교리에 대하여 논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독자들은 염두에 두기 바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우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확실한 특징에 의하여 모든 허망한 잡신들의 무리와는 구별된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에 대해서만은 논의를 할 것이다. 그 일련의 문제들을 앞으로 적당한 시기에 구속의 문제로 우리를 이끌어 갈 것이다.4 우리는 신약성경과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하여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여러 가지 증거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증거의 목적은 미로에서 어떤 불확실한 신성(神性)을 찾지 않도록 하나님에 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 성경에 설명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데 있다.
2. 성경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
말씀이나 환상으로 나타내셨는지 혹은 인간들의 사역이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족장들에게 계시하였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자손들에게 전승하여야 할 것을 그들의 마음에 알리셨다. 하여튼, 그들의 마음에 교리에 대한 견고한 확실성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배운 지식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확신하고 이해하였던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5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씀을 통해 일체의 인간적인 견해를 확실한 신앙, 곧 영원히 불변하는 신앙을 주셨기 때문이다. 마침내는 진리가 계속적인 교훈을 통하여 대대로 이 세상에 영원히 남겨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족장들에게 맡기셨던 그 말씀을, 말하자면 공적인 기록으로 엮으실 것을 결심하셨다. 이러한 계획 아래에서 율법이 공포되었으며 그 후에 율법의 선지자들이 해석자로서 또한 첨가되었다. 율법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해 논하게 될 때 더 명백하게 볼 수 있겠지만 그 유용성이 다양할지라도6 특별히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에게 맡겨진 것이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롬 10 : 4)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다시 한 번 반복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증보자로 삼는 신앙과 회개의 특수한 교리 외에도 성경은 하나님과 많은 거짓 신들의 무리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명백한 특징과 증거들로써 우주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유일하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장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다 이 가장 영광스러운 극장의 관객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눈을 돌려 하나님의 사역을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겠지만, 그러나 그 보다 더 월등한 유익을 얻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흑암에서 태어난 자가 점점 더 둔감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한계를 잘 지켜서 순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은 극소수요, 오히려 자신의 허망에 부풀어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된 종교의 빛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하늘의 교리에서 그 시초를 건전한 교리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고자 하신 것을 경건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참된 이해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하고 모든 면에서 원만한 신앙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일체의 올바른 지식은 다 순종에서 나온다.7 확실히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에 걸쳐서 자신의 탁월한 섭리에 의해 인간을 특별히 고려하셨던 것이다.
3. 성경을 떠나면 우리는 죄악에 빠지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며, 얼마나 심하게 각종 오류에 기울어지고 있으며, 또한 얼마나 맹렬하게 계속 신기하고 인위적인 종교를 날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그 하늘의 교리가 망각으로 파멸되지 아니하고, 오류로 사라지지 아니하며, 인간의 방자한 행동으로 부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록된 증거로 남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형성(形成)에 찍혀진 자신의 모습이 충분한 효과를 나타내지 못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그가 유익한 교훈을 주시기를 기뻐하셨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말씀의 도움을 마련하셨던 것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성실하게 명상하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갈망한다면 이러한 올바른 길을 추구하여 정진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바로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그가 하신 사역을 통하여 진실하게 또는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이 하나님의 사역은 우리의 부패한 판단에 따라서가 아니라, 영원한 진리의 법칙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가 만일 이 말씀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무리 빨리 달린다 하더라도, 그 길에서 탈선했기 때문에 목적자에게는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는"(딤전 6 : 16) 그 하나님의 광채는 말씀의 실(丝)로 인도 받지 못하면, 우리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迷宫)과 같은 것이라고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길 밖에서 벗어나 전속력을 다해서 달리는 것보다는 오히려 절름거리며 이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이 더 낫다.8 그러므로 다윗은 순수한 종교가 번창하기 위하여는 이 지상에서 미신을 쫓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통치하시는 분"으로 자주 소개하였다.(시 93 : 1, 96 : 10, 97 : 1, 99 : 1). 그런데 다윗은 이 "통치"라는 말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소유하시는 권능, 또는 전 세계를 통치하심에서 행사하시는 그러한 권능이란 의미로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신의 정당한 주권을 주장하시는 교리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사람의 마음에 심겨지기 전에는 결단코 그 마음에서 오류를 근절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4. 성경은 창조의 계시가 전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전할 수 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시 19 : 1-2). 다윗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계속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시 19 : 7-8). 다윗은 여기서 또한 율법의 다른 유용성도 이해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일반적으로 말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명상하는 일을 통하여 모든 백성을 자기에게 초청하신 일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말씀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별한 학교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와 똑같은 내용이 시편 29편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언자는 뇌성(3절), 바람, 소낙비, 회오리바람, 폭풍우 속에서 땅을 뒤흔들고, 산들을 떨게 하며(6절), 백향목을 꺾으시는(5절) 하나님의 그 위엄있는 음성에 대하여 말하고 나서 마침내는 "그 전에서 모든 것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이는 공중에서 울리는 하나님의 모든 음성을 불신자들은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다른 시편에서도 바다의 무서운 파도에 대해서 기술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었다. "여호와여 주의 증거하심이 확실하고 거룩함이 주의 집에 합당하여 영구하리이다"(시 93 : 5).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그녀의 백성과 모든 백성이 알지 못하는 것에서 예배를 드리되 유대인만이 참되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고 말씀하신 것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요 4 : 22).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무력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의 도움이 없이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고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다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찾았으므로 필연적으로 공허와 오류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제 7 장
성경은 반드시 성령의 증거로 확인되어야 한다.그러므로 그 권위는1 확실한 것으로 세워지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의 신빙성이 교회의 판단에 기인된다는 것은 사악한 거짓이다
1.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지 교회에서 온 것이 아니다
더 나아가기 전에 우선 여기서 성경의 권위2에 대해 다소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준비시킬 뿐만 아니라 모든 의문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공포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되었을 경우 사람이라면 누구나 상식을 벗어나거나 인간성 자체가 결여되어 있지 않는 한, 그렇게 말씀하신 분에 대한 신뢰를 감히 비난할 만큼 비극적인 오만에 빠질 수는 없는 것이다. 현재 우리는 매일같이 하늘로부터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만 자기의 진리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신성(神圣)하게 보존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요 5 : 39 참조). 마치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하늘로부터 직접 듣는 것처럼 성경의 기원이 하늘로부터 유래되었다고 생각될때만 비로소 성경은 신자들로부터 완전한 권위를 얻게 되는 것이다. 실로 이 문제는 더 충분한 논의와 더 주의 깊은 고찰을 하기에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이 문제의 광범한 성격이 요구하는 중요성 보다 본서의 계획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해도 독자는 나를 양해해 줄 것으로 안다.
그러나 교회의 승인을 얻을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그 중요성을 가지게 된다고 하는 가장 유해한 오류가 현재 널리 유행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영원하시며 침범할 수 없는 진리가 인간의 결정에 의해 좌우된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다음과 같이 물을 때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께서 성경의 저자라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믿게 할 수 있는가? 성경이 오늘날까지 완전하게 또는 상하지 않고 깨끗하게 보존되어 왔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 만일 이러한 문제들을 위한 확실한 규칙을 교회가 규정하지 않았다면, 한 책은 귀중히 여기고 다른 책은 제거하도록 누가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따라서 성경은 얼마나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어떠한 책이 정경(政经)에 편입되어야 하는가는 교회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3 이와 같이 교회라는 이름 밑에서 무제한의 횡포를 즐겨 행하는 이 불경한 사람들은 교회는 모든 것에 대하여 권위를 가진다고 하는 이 한 가지 관념을 단순히 사람들에게 강요할 수만 있다면, 자타(自他)를 곤란에 빠뜨리게 하는 그 불합리에 대하여는 아무런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사실이어서 영생에 대한 일체의 약속이 사람의 판단으로 결정되고 또 그 판단에만 의존된다고 한다면, 그 영생의 확신을 찾고 있는 비참한 양심들의 상태는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한 답변을 얻을 때 그들은 그들의 동요하는 마음과 두려움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신앙이 만일 인간의 만족에만 의존하는 그런 불안정한 권위를 가진 것이라면, 불경건한 자들은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조롱할 것이며, 많은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얼마나 의심할 것인가!
2. 교회 자체는 성경의 기반 위에 서 있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자들은 사도 바울의 단 한 마디 말로도 훌륭하게 반박할 수 있다. 곧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었다."(엡 2 : 20)고 사도는 증거하였던 것이다. 만일 선지자와 사도의 교훈이 교회의 기초라고 한다면, 그것은 확실히 교회가 존재하기 이전에 벌써 그 권위를 갖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교회가 그 기원의 시작을 성경에서부터 가졌다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결정하지 않았다면 어떤 선지자와 사도가 쓴 책이겠는가 하는 것은 여전히 의심으로 남게 된다고 하는 그들의 교활한 반대도 또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선지자들의 글과 사도들의 교훈에 기초를 두었다고 하면, 그 교리가 어디서 발견되더라도 이 교회의 승인은 분명히 교회보다 앞서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가 없이는 교회 자체가 결코 존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4 그러므로 성경을 판단하는 권세가 교회에 속하며, 성경의 확실성이 교회의 결정에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거짓된 견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가 성경을 받아들여 이에 승인의 인장을 받아야 하는 것은, 의심스러운 점과 논쟁점들을 합법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경건의 의무로서 교회는 조금도 주저 없이 성경을 존경하는 것이다. 교회의 법규에 의존하지 않는 한,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느냐고 물을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흑암에서 광명을, 검은 데서 흰 것을, 쓴 것에서 단 것을 가려내는 일을 배울 수 있는가고 묻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 진리의 명백한 증거5를 마치 흰 것과 검은 것이 그 색깔이 다르고, 또한 단 것과 쓴 것이 그 맛이 다르듯이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이다.5
3. 어거스틴의 말을 반증(反證)으로 내세울 수 없다
참으로 교회의 권위가 복음을 믿도록 마음을 감동시키지 않으면 그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한 어거스틴의 말이 일반적으로 인용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6 그러나 그들이 이 말을 얼마나 나쁘게 또는 기만적으로 해석하였는가 함은 전후 문맥으로 보아 쉽게 알 수 있다. 어거스틴은 거기서 마니교도들(Manichees)을 의식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마니교도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를 아무 반론 없이 믿게 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들이 스스로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증명하지 못한 자들이었다. 사실상 그들이 마니(Mani)에 대한 신앙을 증진시키기 위한 구실로서 복음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만일 여러분들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종류의 설득력을 가지고 그를 여러분들의 의견으로 돌아오게 하겠는가?" 그는 여기에 더 첨가하여, "실로 나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자기가 만일 신앙에 대해 문외한이라면 교회의 권위로 강요당하지 않는 한, 복음을 하나님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이게 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할 때 인간의 말을 존중하였다고해서 그것이 무슨 이상한 일이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경건한 자의 신앙이 교회의 권위 위에 세워진다고 주장하지도 않았고, 복음의 확실성이 교회의 권위에 의존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증언이 불신자들을 재촉하지 않으면,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복음의 확실성을 그들이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그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히 확증하였다. 곧 "내가 나의 믿는 바를 예찬하고, 당신의 믿는 것을 비웃을 때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판단하고 또 어떻게 행동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확실한 것을 알도록 초청하고, 후에 가서는 불확실한 것을 믿으라고 명령하는 자들을 떠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아직 충분히 바로 볼 수 없는 것을 먼저 믿으라고 초청하고, 이 믿음으로 힘을 얻어 우리의 믿는 바를 이해하게 하는 자들을 따라야 하지 않겠는가?(골 1 : 4-11,23) 이제 우리의 마음을 내적으로 강화하며 조명하시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7
이상의 말들이 바로 어거스틴이 하고자 하였던 말이었다. 이 말에서 누구나 다 명백히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거룩한 인물이 의도한 바는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동의나 결정에 맡기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가 지적하고자 하였던 것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곧 하나님의 영으로 아직 깨우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대한 존경심으로 인해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갖추어 마침내는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힘써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교회의 권위는 복음의 신앙을 준비하게 하는 서곡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대로 그는 경건한 자의 확실성을 전혀 다른 기초 위에 두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마니교도들이 거절한 성경을 옹호할 생각으로 성경이 전체 교회의 승인을 얻었다고 마니교도들에게 자주 강조한 것을 나는 부정하지 않는다. 그가 다음과 같이 파우스투스(Faustus)를8 비난한 것도 바로 여기서 온 것이다. 곧 "그렇게 기초가 튼튼하고,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졌으며, 그렇게 영광스럽게 찬송을 받으며, 사도 시대로부터 오늘날까지 확실히 계승되어 온 복음의 진리를 그는 순종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경의 권위가 사람의 결정이나 제정에 의한다고는 결코 말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가 말한 것은 교회의 보편적인 판단을 제언한 것뿐이니, 그것은 이 문제에 있어서 매우 큰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반대자들을 능가할 수가 있었다. 신앙의 유익에 대하여(The Usefulness of Belief)9라는 어거스틴의 소책자를 읽기 바란다. 그러면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한 대로 믿음의 유익이란 바로 탐구의 단서를 제공해 주며 그 적절한 시초를 형성해 주는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견해로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확실하고 견고한 진리를 신뢰해야 할 것이다.
4. 성령의 증거는 다른 모든 증거보다도 강하다
바로 앞에서 말한 대로10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고 확신하기 전에는 교리에 대한 신앙이 수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11 따라서 성경에 대한 최고의 증거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사실에서 얻게 된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자신의 예민함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로부터 얻은 신앙을 자랑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성적인 증거를 고집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드러내어 전세계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복종하게 하려 하였다. 이제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주의하게 또는 거짓되게 부르지 않은 것이 정당한 일 뿐만 아니라 명백한 진리에 의해서도 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양심을 위하여 최선의 길이 마련되기를 원한다면 곧 영원히 의심되는 문제로 불안해하거나 동요하지 않고, 또한 가장 작은 말장난에도 놀라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나 판단 그리고 억측에서가 아니라 이보다 훨씬 더 높은 근원, 곧 성령의 은밀한 증거12에서 우리의 확신을 찾아야 한다. 참으로 우리가 이 점을 논하게 될 때, 만일 하늘나라에 어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하면 바로 그가 율법과 예언의 복음의 원저자(原著者)라는 사실을 쉽게 증명할 수 있는 것들은 많이 들 수 있다. 학식있는 사람이나 최고의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비록 반대를 일으켜서, 이 논쟁에서 자기네의 정신력을 모두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절망적으로 파렴치해지기까지 강퍅해지지 않는 한,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곧 성경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표시를 보게 된다는 것과 그리고 이 사실에서 성경의 교훈이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명백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후에 이 거룩한 성경의 모든 책들이 다른 모든 저작품에 비해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만일 순결한 눈과 건전한 정신으로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의 위엄은 즉시 우리 시야에 나타나서 우리의 당돌한 거절을 억제하여 우리들이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논쟁을 통해서 성경에 대한 확고한 신앙을 세워보려고 애쓰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다.13 나 개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내게는 특별한 재주나 특별한 웅변을 하는 데 남보다 뛰어난 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멸시하는 데 있어서 가장 교활한 자, 곧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데 기지와 기술을 나타내고자 하는 교활한 자들과 논쟁을 한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그들의 소란한 소리를 잠잠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들의 트집들을 논박하는 것이 유익한 일이 된다고 하면, 그들의 뒷전에서 비밀리에 수군거리는 그 거만한 자들을 나는 큰 어려움 없이 분쇄시킬 것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사람들의 비방에서 옹호했다해서 이것이 곧 참된 경건이 요구하는 확실성을 그들의 마음에 즉시 새겨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불신앙적인 사람들은 종교를 전적으로 견해에 불과하다고 보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것도 어리석게 혹은 경솔하게 믿지 않기 위해서, 모세와 선지자들이 영감으로 말한 것을 합리적으로 입증해 주기를 원하며 또한 그렇게 요구한다.14 그러나 성령의 증거는 일체의 이론을 훨씬 능가한다고 나는 답변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만이 자기 말씀의 합당한 증인이 되시는 것처럼15 그 말씀도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하여 확증되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받은 말씀을 선지자들이 충성스럽게 선포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에게 확신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사야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사 59 : 21).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고도 아무런 죄의 대가를 받지 아니하고 그대로 투덜거리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들을 반대할 만한 뚜렷한 증거를 갖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선(善)한 삶 가운데 더러 있다. 그것은 마치 성령께서 경건한 자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인장(印章)"이나, "보증"으로 불리어질 수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과 같다(고후 1 : 22). 왜냐하면 성령이 그들의 마음을 조명하시기 전에는 그들은 영구히 수많은 회의 속에서 흔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5.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고수하자. 곧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진심으로 성경을 신뢰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은 스스로 증명한다는 것이다.16 그러므로 성경을 증거나 도리에 종속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성경이 마땅히 지녀야 할 확실성은 성경의 증거에 의해서 얻게 된다.17 왜냐하면 성경이 그 자체의 위엄 때문에 존경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속에서 확증되기 전에는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조명을 받았기 때문에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판단에 따라 믿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적인 판단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인간의 사역을 통하여 흘러 나왔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가 하나님 자신의 위엄을 응시하는 것처럼 아주 확실하게 단정한다. 우리는 우리의 판단을 입증하는 어떤 논증이나 진실의 표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의 판단력과 짐작을 성경에 예속시킨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처럼 알지 못하는 것을 조급히 받아들였다가 그것을 엄밀히 조사한 끝에 곧 싫어하는 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확실한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하고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저 비참한 사람들처럼 습관적으로 자기 마음을 미신의 노예로 만들지도 않고, 하나님의 확실한 신적 위엄의 능력이 성경 안에서 살아서 숨쉬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되 인간적인 의지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생생하고, 보다 더 효과 있게 순종하도록 마음이 끌리게 되며 또한 순종의 불을 태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가장 올바르게 이사야를 통해서 선지자들과 온 백성은 다 자기의 증인이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가 예언의 가르침을 받아 하나님께서 추호의 거짓이나 애매한 점이 없이 말씀하셨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었다(사 43 : 10). 그러므로 이것은 아무 이론도 필요로 하지 않는 확신이다. 곧 이것은 최고의 이성으로 말미암아 입증된 지식이며, 실로 이 지식 안에서 우리의 마음은 어떤 이론에서 보다 더 안심하고 더 견고하게 쉴 수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하늘나라의 계시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감정이기도 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록 내 말이 그 문제를 올바르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긴 하지만 믿는자 개개인이 마음에서 경험하는 바를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다른 곳에서도 이 문제가 재론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여러 가지 논의를 생략하기로 한다.18 그러나 하나님의 영(靈)이 우리 마음에 인(印)치시는 신앙만이 참된 신앙이라는 것은 여기서 알고 지나가자. 겸손하고 순진한 독자들은 이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만족 할 것이다. 즉 이사야는 회복된 교회의 모든 자녀들에게 약속하기를,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사 54 : 13)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선민(选民), 곧 전체 인류 가운데서 그가 구별해 내신 자들에게만 이 유일한 특권을 주신다. 실로 참된 교리의 시작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는 민첩한 열망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의 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의 주위를 환기시켰다. 곧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갈꼬 누가 우리를 위하여 깊은 데로 내려갈꼬 네 마음에 이르지 말라 오직 그 말씀이 네 입에 있느니라"(신 30 : 12,14; 시 107 : 26 참조)고 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이 이해(理解)의 보화를 감추기로 결정하셨다면 일반 대중들이 그렇게 무지하고 어리석은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불합리한 일은 아닐 것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자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혀지기 까지는 나는 그들을 "일반 대중"이란 말로 부르기를 원한다. 더욱이 이사야는 예언의 교훈이 외국인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였던 유대인에게까지도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나서, 동시에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첨가 하였다.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사 53 : 1).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자의 수가 적은 것 때문에 마음의 괴로움을 느낄 때마다 그 반대로 마음을 돌려 "하나님의 비밀은 받은 자 외에는 아무도 이를 이해 할 수 없다"(마 13 : 11 참조)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도록 하자.
제 8 장
인간의 이성이 허용하는 한도내에서 성경의 신빙성은 충분히 증명된다
(성경의 독특한 권위와 감동, 그리고 고전성. 1-4)
1. 성경은 인간의 모든 지혜를 초월한다
성경에 대한 이러한 확실성이 인간의 판단보다 더 높고 더 강하지 않는 한 논증으로 성경의 권위를 수호한다든가 교회의 일반적인 동의로 그것을 확립한다든가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지원을 받아 확증한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초가 세워지지 않으면 성경의 권위는 항상 불확실한 채 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반면에 우리가 일단 성경을 그 존엄성에 따라 경건하게 받아들이며 일반적인 서적과는 달리 뛰어난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이전에는 마음에 성경의 확실성을 강하게 심어 주지 못하고 확신을 주지 못하던 논증들이 이제는 매우 유용한 도움을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지혜의 경륜이 얼마나 훌륭하고 질서있게 배열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세상적인 것을 조금도 풍기지 않는 이 교리의 천상적인 성격은 얼마나 완전하며, 이 교리가 그 모든 부분에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책에 위엄을 가져다주는 다른 특성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주의 깊게 생각한다면 이러한 사실로 말미암아 놀라운 확신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언어의 아름다움보다는 오히려 그 주제의 위엄에 의해 우리가 성경을 예찬하게 된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는 하늘나라의 그 숭고한 신비가 대부분 평범하고 겸손한 언어로 표현된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경이 더욱 화려한 웅변으로 꾸며졌다고 하면, 불경자들은 아마도 성경의 힘은 다만 웅변술의 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꼬아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세련되지 못하고 소박한 표현의 단순성 그 자체가 어떤 웅변보다 더 존경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성경의 진리의 힘이 너무도 강력하기 때문에 말의 기교가 필요 없다는 것 외에 또 무슨 결론을 내려야 하겠는가? 그러므로 고린도인의 신앙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고전 2 : 5)에 있다고 주장한 사도의 말은 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을 향하여 증거한 그의 설교는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고전 2 : 4)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진리는 외부적인 것에 의하여 유지되지 아니하고 진리 그 자체가 증명하게 될 때에 모든 의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인간의 저작이 아무리 기교 면에서 잘 다듬어졌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만큼 감동을 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성경의 이 특수한 힘은 분명해진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나 키케로(Cicero)의 글을 읽어보시라. 플라톤(Plat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s), 또는 그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책을 읽어 보라. 그것들은 놀라운 방법으로 독자를 매혹시키며 기쁘게 하고 감동을 주며 또 황홀하게 만들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읽은 후에는 이 성경을 읽는 데 전념하시오. 그리하면 성경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깊이 감동시키며 우리 마음에 스며들 뿐만 아니라, 골수에까지 새겨짐으로써 그 깊은 인상과 비교할 때에 웅변가들이나 철학자들의 힘은 거의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일체의 재능과 미덕을 훨씬 능가하는 이 성경은 신적인 무엇을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1
2. 문체가 아니라 내용이 결정적이다
사실 선지자들 중 어떤이들의 문체는 우아하고 명료하며 심지어는 화려하기까지 하므로 그들의 수사법은 어떠한 세속적인 저자들에 비해조금도 손색이 없음을 나는 인정한다.2 그리고 성령께서는 그러한 실례를 보여 주심으로써, 비록 다른 곳에서 소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웅변에서 자기에게 조금도 결함이 없다는 것을 보이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아름답고 즐거운 말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다윗과 이사야, 그리고 그와 같은 이들의 글이나 또는 거칠지만 문체의 소박함을 느낄 수 있는 목자 아모스나 예레미야 또는 스가랴의 글을 읽어 보면,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성령의 위엄이 어디서나 뚜렷하게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사탄이 거짓된 탈을 쓰고 단순한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히 잡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흉내낸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바 아니다. 이와 같이 사탄은 세련되지 못하고 심지어는 천박한 언어로써 나약한 인간들의 마음속에 교활하게 불경스러운 오류를 심어 우리 인간들을 속인다. 그리고 사탄은 언어의 진부한 형식을 사용하고 또 그것을 가면으로 쓰고는 자신의 사기 행각을 감추려고 한다.3 그러나 건전한 이해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한 허식이 얼마나 허망하고 불쾌한 것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성경에 관한 한, 완고한 사람들이 아무리 성경을 트집을 잡고자 해도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가득 차 있음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선지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인간의 한계를 훨씬 능가하지 않는 선지자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선지자들의 교훈을 무미 건조하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평가할 능력이 전혀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 성경의 고전성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상세히 다루었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주요한 요점들만을 택하여 전체의 문제를 요약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내가 이미 위에서 다룬 문제들과 함께 성경의 고전성 그 자체는 적지 않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회랍의 저작자들이 애굽 신화에 대하여 많이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모세 시대보다 훨씬 후대의 것 외에는 종교의 유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4 물론 모세도 새로운 하나님을 고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기네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받아들였던 것을 선언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더불어 맺은 그 언약을 그들이 생각하게 하는 것 외에 모세가 할 일이 무엇이었겠는가?(창 17 : 7). 모세가 듣지도 못한 것을 제시했었더라면 그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 생활로부터의 해방은 틀림없이 그들 모두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던 사건이었으므로 이 사건이 언급되었을 때에 모든 사람의 마음은 즉시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400년이라고 하는 연수(年数)에 대해서도 역시 그들은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창 15 : 13, 출 12 : 40, 갈 3 : 17). 모세가(그는 다른 모든 저자들보다 시간적으로 이렇게 훨씬 앞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교리의 전숭을 그렇게 먼 근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갔다고 하면 성경이 고전성에 있어서 다른 모든 책보다 얼마나 우수한 것인가를 우리는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4. 모세가 보여준 성경의 진실성
아마 어떤이들은 이집트인들이 자기네의 고대 기원을 세계 창조 이전 6천년까지 소급하는 것을 믿으려고 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속적인 저자들까지도 저들의 수다를 항상 조소하고 있으므로 여기서 내가 그것을 구태여 힘들여 논박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요세푸스(Josephus)는 아피온 반박문(Against Apion)이라는 저서에서 기억할 만한 증언을 고대 저자들로부터 인용하였다. 이 책에서 우리는 이 율법의 교리가 비록 읽혀지지도 않고 또 참되게 알려지지도 않았지만, 아득히 먼 시대로부터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유명하였다고 결론 지을수 있다.5
그리고 악독한 자들로 하여금 어떠한 의혹도 품지 못하게 하고, 사 악한 자들로 변명의 어떠한 기회도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위협에 대비하여 최선의 구제책을 강구하신다. 야곱이 약 300년 전에 영감을 받아 자기 자손에 대하여 언급한 것을 모세가 상기 하고 있지만, 그는 이때 어떤 방법으로 자기의 종족을 고귀하게 하였는가? 아니다. 그는 레위 사람으로서 자기 지파에게 영원한 오명의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예하지 말지어다"(창 49 : 5-6). 그는 분명히 자기 조상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기의 온 가문이 그와 같은 치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명예스러운 일에 대하여 침묵을 지킬 수도 있었다. 자기 조상이 전적으로 혐오의 대상이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였고, 자기 개인의 이해 관계에 대하여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면 자기 지파 사람들이 틀림없이 불쾌하게 생각하여 그들로부터 심한 미움까지 받게 될 것도 마다하지 않은 그였는데 그러한 모세를 어떻게 의심할 수가 있겠는가? 모세가 자신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의 그 사악한 불평을 기록할 때에(민 12 : 1), 육신의 생각에 따라 말하였다고 볼 것인가? 성령의 명령에 순종하여 말했다고 볼 것인가? 더욱이 그는 최고의 권위에 있으면서도 어찌하여 자기의 아들을 대제사장의 자리에 앉히지 않고 오히려 가장 낮은 위치에 떨어뜨렸던가? 나는 여기서 많은 예증들 가운데서 몇 가지만을 제시했을 뿐이다. 그러나 율법서의 도처에서 우리는 모세가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자임이 분명하다고 하는 충분한 확신을 뒷받침해 주는 많은 증거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적과 예언에 관한 반대설을 논박함. 5-10)
5. 이적은 하나님의 사자(使者)의 권위를 강화시킨다
모세는 수많은 주목할 만한 이적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이 이적들은 그가 말한 율법과 공포(公布)한 교리에 대한 확증들이다. 그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다는 것, 그곳에서 40일 동안 사람과의 교제 없이 있었다는 것(출 24 : 18), 율법을 선포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는 것(출 34 : 29), 사방에 번갯불이 번쩍이며 우뢰와 여러 가지 소리가 하늘에서 들려 오고 나팔 소리가 들려 오되 사람이 부는 나팔 소리가 아니었다는 것(출 19 : 16), 장막의 입구가 구름에 가리워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것(출 40 : 34), 고라, 다단, 아비람과 그 악당 전체의 무서운 파멸로써6 그의 권위가 기적적으로 변호되었다는 것(민 16 : 24), 그가 반석을 지팡이로 치자 당장에 물이 솟았다는것(민 20 : 10-11, 출 17 : 6, 고전 10 : 4 참조), 그가 기도를 하자 하늘로부터 만나가 내렸다는 것(민 11:9, 출 16:13, 고전 10:3 참조), 이러한 것들은 모세가 참된 선지자였다고 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아니겠는가? 내가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데 대하여 혹 누가 반대이론을 제기 한다면, 그러한 교묘한 이론(异论)에 대하여 나는 쉽게 답변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세가 이 모든 사건을 온 회중 앞에서 공포하였는데 어떻게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물론 모세가 회중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의 불신, 완고함, 배은 망덕, 그 밖의 여러 가지 죄를 책망하면서, 그들이 본 일도 없는 이적으로 직접 그들의 눈앞에서 자기 교리를 확신시켰다고 자랑할 수 있었을까!
6. 모세의 이적에는 논의할 여지가 없다
여기서 우리는 이 사실 역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이적에 대하여 모세가 말할 때마다 그것은 항상 조금이라도 무슨 기회만 보이면 온 회중을 선동하여 떠들썩하게 반항을 일으키게 할 수 있었던 그런 불유쾌한 상황과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통하여 충분히 확신하였기 때문에 그 이적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너무도 명백하여 세속적인 저자들도 모세의 이적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거짓의 아비는 그 이적들이 마술에 의한 것이라고 비방하였다(출 7 : 11, 9 : 11).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돌로 치라고 할 정도로 모세는 미신을 증오하였다(레 20 : 6).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이런 모세가 마술사였다고 억측할 수가 있겠는가? 분명히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대중들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명성을 얻으려고 열심히 속임수를 쓴다. 그러나 모세는 과연 어떠했는가? 그는 자신과 형 아론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할 뿐 아무것도 아님을 공언함으로써 일체의 비난의 표적들을 충분히 지워 버렸다(출 16 : 7). 그리고 일어난 사건 자체를 생각해 본다 해도 도대체 어떤 마술이 백성들의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하늘에서 그렇게 충분한 만나를 내려오게 할 수 있었겠으며 또 사람마다 그 날의 적량을 초과하였을 때에 그 만나를 부패하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불신으로 하나님의 벌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었겠는가?(출 16 : 19-20) 이 외에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으로 하여금 많은 엄격한 시험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사악한 자들이 더 이상 불평함으로써 어떠한 성공도 거둘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때로는 온 민중이 교만하고 무례하게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종을 넘어뜨리려고 그들 중 몇 사람들이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떻게 이때마다 모세가 속임수로 그들의 광포함을 피할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의 교훈이 모든 시대에 확신을 주었다는 사실을 그 결과가 명백하게 보여 주는 것이다.
7. 예언은 인간의 기대와는 다르게 성취된다
더우기 족장 야곱을 통하여 유다 지파에 최우위를 부여하게 한 것이 예언의 영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가 입증하는 대로 그 사실 자체를 생각해 본다면 아주 분명하게 될 것이다(창 49 : 10). 이 예언을 최초로 말한 자가 모세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나 그가 이 책을 기록한 지 400년이 지났지만 아직 유다 지파의 왕권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사울이 즉위한 후 왕권은 베냐민 지파에 머물렀던 것처럼 보인다(삼상 11 : 15).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삼상 16 : 13), 이때 왕권의 이양에 대한 무슨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던가? 양을 치는 평민의 가정에서 왕이 나오리라는 것을 누가 예상이라 할 수 있었을까? 더욱이 그 가정에는 7형제나 있었는데, 가장 나이 어린 막내 다윗에게 그러한 영예가 주어지리라는 것을 누가 생각조차 하였겠는가? 어떻게 그가 왕국을 통치할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가?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인간의 재간이나 노력, 혹은 사람의 생각에 의하여 결정된 것으로서 예언의 성취가 아니었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는 모호하지만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말한 바 있는데(창 49 : 10), 이 예언은 그 후 2,000년이 지나서 실제적으로 성취되었다. 이것이 그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하였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다른 예언들이 더 있지만 나는 여기서 이를 생략하겠다. 이 예언들은 건전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결같이 그 예언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하나님의 계시를 아주 분명하게 나타낸다. 요컨대 모세의 한 편의 노래는(신 32장)하나님을 분명하게 보여 주는 맑은 거울인 것이다.
8. 하나님은 예언자의 말들을 확증하셨다
그러나 다른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도 이것은 한층 더 명백하게 발견된다. 나는 여기서 단지 몇 가지의 실례만을 들고자 한다. 왜냐하면 전체의 실례를 든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사야 시대의 유다 왕국은 평화로웠고 심지어는 그들이 갈대아 사람의 동맹국이라 하여 스스로 안전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이사야는 그 도시가 파괴될 것이며 그 백성이 포로가 될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예언하였다(사 39 : 6-7). 그 당시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마침내는 실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오래 전에 예언한다는 것은, 아직 신적 영감에 대한 명백하고도 충분한 증거가 못된다고 치자. 그러나 이사야가 그들의 해방에 대하여도 동시에 예언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 예언의 근원이 하나님 이외에 도대체 어디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는 고레스라는 이름을 들면서(사 45 : 1), 갈대아 사람들이 이 고레스에게 항복하며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자유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고 예언하였다. 이 예언자가 그렇게 예언한 후로부터 고레스가 태어나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경과하였다.7 왜냐하면 이사야가 죽은 지 거의 100년이 지나서야 고레스가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당시에는 누구도 고레스라는 사람이 나타나 바벨론과 싸워 그 강대한 왕국을 정복하여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생활을 종식시킬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문자적인 수식도 없이 솔직하게 말한 이 이야기는 이사야가 사람의 추측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으로 하였다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해 주지 않는가? 그리고 백성들이 잡혀가기 얼마 전에 예레미야가 그들의 포로 생활의 기간이 70년이라는 것과 그들의 해방과 귀환에 대하여도 예언하였는데(렘 25 : 11-12, 29 : 10), 이 사실이야말로 그의 혀가 하나님의 영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한 증거들에 의해 예언자들의 권위가 확증되었다는 것과 그들 자신이 주장한 바가 바로 그들이 말의 신빙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실제로 성취되었다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부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사 42 : 9). 나는 여기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에 대하여는 생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들은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같은 시대에 예언하였으며, 그 예언이 마치 상호간에 말을 주고받는 것처럼 그 진술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다니엘은 어떠한가? 그는 약 600년 후에 있을 미래의 사건에 대하여 예언하되 그것이 마치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건의 역사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경건한 사람들이 그러한 일을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악한 자들의 지껄이는 소리를 충분히 억제할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증거가 너무도 명백해서 교묘히 반대할 여지를 조금도 펼 수가 없기 때문이다.
9. 율법의 전승(传承)은 신뢰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공박함에 있어서 자신의 재치의 예리함을 보이기 위해 도처에서 떠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모세나 선지자들의 이름이 붙여진 채 읽히고 있는 책들이 실제로 그들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누가 우리에게 보증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8 심지어는 모세가 실재의 인물이었던가를 감히 문제 삼는 자들까지도 있다. 그러나 만일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키케로 같은 인물이 실제로 있었던가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러한 어리석은 사람은 마땅히 주먹이나 채찍의 응징을 받아야 한다고 누가 말하지 않겠는가? 모세의 율법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놀랍도록 보존되었다. 비록 그 율법이 제사장들의 소홀함으로 인하여 잠시 파묻혀 있었으나, 경건한 왕 요시야가 이를 발견한 후부터는(왕하 22 : 8, 대하 34 : 15) 대대로 계속해서 계승되어 왔다.9 실로 요시야는 이를 공포할 때에 생소하거나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일반이 널리 알고 있었고 또 당시에 유명하여 잘 기억하고 있던 것이라고 하였다. 요시야는 그 원본을 성전에 보존하고, 사본을 만들어 왕의 서고에 두게 하였다(신 17 : 18-19). 다만 이러한 일들은 있었다. 곧 제사장들이 옛날의 엄숙한 관습을 따라 율법을 공표하기를 중단하였고 백성들이 율법을 읽는 버릇을 게을리 하였다는 것이다. 율법의 권위가 확인되지 않은 때나 그것이 갱신되지 않은 시대가 거의 없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인가? 다윗의 시편에 정통한 사람이 모세를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거룩한 저자들에 대하여 총괄적으로 말한다면, 그들의 저작은 오직 한 길을 통하여 직접 입에서 입으로 그 후손에게 전승되었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확실하다. 어떤이들은 그들의 말을 직접 들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들은 말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그 말을 듣고 배우기도 하였던 것이다.
10. 하나님께서는 신기하게 율법과 예언자를 보존하셨다
마카비가(家)의 역사에 나오는 어떤 구절을 가지고 성경의 확실성을 손상시키려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그 확실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생각하여 오던 것 중에 더 이상 바랄 것 없는 적절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그들의 거짓된 주장을 깨끗이 일소해 버리고 다음으로 그들이 우리를 향해 설치한 공격 무기로 그들을 역습할 것이다. 그들은 안티오쿠스(Antiochus)가 모든 성경을 다 불태우라고 명하였는데, 지금 우리가 가진 사본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겠느냐고 말한다(마카비전서 1:56-57). 그러나 그 사본들이 어떤 공장에서 그처럼 빨리 위조될 수 있었겠는가10 라고 나는 반문하고 싶다. 왜냐하면 박해가 끝나자 마자 즉시 그 책들이 나타났으며, 또한 그 교리에 대하여 교육을 받고 이를 익숙히 잘 알고 있던 모든 경건한 사람들이 아무런 논쟁도 없이 그 책들이 바로 성경이라고 인정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사악한 자들이 서로 모의나 한 듯이 파렴치하게 유대인들을 모욕했지만, 아무도 감히 유대인들이 성경을 위조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유대인의 종교를 어떤 것으로 생각하든지 그들은 모세가 그 책의 저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全)역사의 동의로 그 거룩한 유구성이 확증된 이 책들을 가리켜 날조라고 허튼 말을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개 같은 몰염치를 폭로하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그런 추악한 비방을 논박하는 데 이 이상 더 쓸데없는 수고를 하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보존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의 예상과는 달리 맹렬히 타고 있는 불길 속에서 끄집어내듯이 이 말씀을 가장 잔인하고 가장 야만적인 폭군에게서 건져내셨던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제사장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 지조를 주심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이 보물을 후손에게 전승하기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목숨을 바치는 것까지도 주저하지 않게 하셨으며, 또한 총독들과 군인들의 온갖 맹렬한 조사를 좌절시키기도 하셨던 것이다. 사악한 자들이 전적으로 파괴되었다고 확신하던 그 거룩한 기념비가 즉시 되돌아와서 이전의 위치에 다시 한 번 놓이게 되고, 더욱이 그 위엄이 높아지게 된 사실을 하나님의 이적적이며 주목할 만한 성업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 후 곧 이어서 헬라어 성경이 나왔으며 이것은 전세계에 보급되었기 때문이다.11
이적이 나타난 것은 하나님께서 안티오쿠스의 그 피비린내 나는 포고령 속에서 언약의 서판들을 건져 내셨다는 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거듭되는 재난으로 짓밟힘을 받고 기진맥진하여 마침내는 거의 멸절 상태에 이르는 그 속에서도 이 기록들이 손상되지 않고 본래대로 안전하게 보존되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당시 히브리어는 멸시를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알려지지도 않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종교를 돌보지 아니하셨더라면 히브리어는 완전히 없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그들이 얼마나 자기네 모국어를 순수하게 사용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당시의 예언서들을 보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비교해 보는 일은 율법과 예언자들의 고대성을 더욱 명백하게 증명해 주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율법서와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는 구원의 교리, 곧 그리스도께서 때가 되면 오시리라고 하신 그 교리를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하여 보존하셨던가?(마 22 : 37-40)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최대의 숙적인 유대인들 곧 어거스틴이 기독교회의 사서(司书)들이라고12 적절히 칭한 그 유대인들을 통해서였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들에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을 우리가 읽도록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단순성과 천적 특성 및 권위. 11)
11. 신약성경으로 넘어오게 되면 그 진리가 얼마나 튼튼한 지주(支柱) 로 확고부동한가! 세 복음서 기자는 그들의 역사를 낮고 비천한 문체로 기술하였다. 따라서 많은 교만한 사람들은 그 문체의 단순성을13 몹시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교리의 중심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주의하기만 한다면 복음서 기자들이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논하고 있음을 쉽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조금이라도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가복음 제 1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세 복음서의 기자들이 간단하게 요약한 그리스도의 설교는 그들의 기록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멸시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요한은 위엄 있게 책망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의 그 완고함을 벼락치듯 강하게 꾸짖는다. 그들 자신과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성경에 대한 일체의 존경심을 몰아내는 것을 최대의 욕망으로 삼고 있는 저 모든 트집쟁이들을 대중(大众) 앞에 나오게 하자.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읽게 하자. 그리하면 그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적어도 그들의 둔한 마음을 각성시켜 줄 무수한 말씀들, 아니 그들의 조롱을 억제하도록 그 양심에 무서운 낙인을 찍어 줄 무수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와 같은 방법을 쓰고 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저작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에 내재하는 하늘의 위엄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매료하여 완전히 사로잡아 버린다.14 그러나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교리를 이 세상 이상의 것으로 높이기에 충분하다.
마태는 이전에는 책상 앞에 앉아서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던 사람이며 베드로와 요한은 고깃배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이들은 한결같이 소박하고 무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느 하나도 이 세상 학교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이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잔인하고 살기가 등등한 원수였으나 이제는 회심하여 새 사람이 되었다. 갑작스럽고 뜻하지 않았던 이 변화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힘에 의하여 지난날 그가 반대하던 교리를 변호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들 개들이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임하셨다는 것을 부인하도록 내버려두자. 또한 심지어 그들이 역사를 불신하도록 놓아두자. 그래도 이전에는 일반 대중에게 비천한 자로 멸시를 받던 그들이 갑자기 하늘나라의 신비를 장엄하게 설교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사실 그 자체는 소리 높여 부르짖을 것이다.
(교회의 동의와 순교자들의 충성. 12-13)
12. 성경에 대한 교회의 불변적인 증거
이 외에도 교회의 승인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또 다른 훌륭한 이유들이 있다. 성경이 공포된 이후, 오랜 시대를 거쳐 사람들은 확고하게 또한 한결같이 성경에 순종하였다. 사탄은 온갖 교묘한 방법으로 전세계와 함께 성경을 억압, 전복하며, 혹은 인간의 기억에서 이를 전적으로 제거, 말살시키고자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성경은 종려나무와 같아서 점점 더 높이 자라며 공격할 수 없는 것으로 존속하여 온 것이다. 사실 탁월한 능력을 가진 궤변가나 웅변가 치고 성경을 반대하는 데 자신의 힘을 기울이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결코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모든 세력들이 성경을 파괴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여 스스로를 무장하였으나, 그러한 노력은 모두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만일 성경이 인간의 보호에만 의존했다고 하면 사방으로부터의 그 강력한 공격들을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이 사실로 말미암아 성경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이에 반항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자체의 힘으로 지금까지 널리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데 일치하였던 것은 한 국가나 한 국민만이 아니었다. 다른 면에서는 전혀 공통점이 없던 지구상의 여러 민족들의 거룩한 일치에 의해서 성경은 그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마음이 다르고 만사에서 생각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들을 크게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지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러한 일치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렇게 서로 일치한 사람들의 경건을 고려할 때에 적지 않은 중요성이 이에 더하여진다. 물론 그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의 등불로 삼아 빛을 발하게 하신 사람들의 경건을 말하는 것이다.
13. 순교자들은 성경의 교리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러면 그렇게 많은 성도들의 피로 확증되고 증언된 그 교리를 우리는 어떠한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순교자들은 일단 그 교리를 받아들이면 용감하고 대담 무쌍하게, 심지어는 큰 정열을 가지고 죽음을 당하는 것까지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담보를 치르고 우리에게 물려주었는데 우리가 어떻게 이를 확고부동한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성경이 많은 증인들의 피로 인쳐졌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증명으로서는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들이 죽기까지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되 잘못된 정신의 소유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이를 지나친 광신(狂信)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확고하고 견고하며 건전한 열심을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그것은 더욱 명백해진다.
이 밖에도 소수도 아니며 그렇다고 미약하지도 않은 여러 가지 이유에 의해서였다. 성경의 위엄과 권위가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확증되었을 뿐 아니라 또한 비방자의 간계에 대항해서도 훌륭하게 변호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성부께서 자신의 위엄을 성경에 나타내시며 성경의 존귀성을 모든 논쟁의 영역에서 지키시지 않는 한, 그들 스스로 견고한 신앙을 마련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확실성이 성령의 내적 확신 위에 세워질 때에만 비로소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하는 지식을 궁극적으로 일으킬 수 있게 된다. 실로 성경을 확증하려는 인간적인 증거는 그 주요하고 우선적인 증거에 대하여 부차적인 보호자의 역할만 한다면 결코 무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에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증거하려는 자들은 매우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이 아니고는 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경고한 바, 사람이 그렇게 큰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경건과 마음의 평안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한 것은 올바른 것이다.15
제 9 장
성경을 떠난 직접 계시로 비약하는 광신자들은 모든 신앙의 원칙을 파괴한다
1. 광신자들의 성령에 대한 잘못된 호소
더우기 성경을 떠나서도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어떤길이 달리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오류에 사로잡혀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광란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근에 경솔한 사람들이 더러 출현하여 아주 거만하게 마치 성령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것처럼 자랑하면서 성경 읽는 것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한편, 그들의 표현대로 죽은 그리고 죽이는 문자를 아직도 따르는 사람들의 그 단순성을 비웃고 있기 때문이다.1 그러나 성경의 교리를 감히 유치하고 천한 것이라고 멸시할 만큼 그들을 높은 자리에까지 오르게 한 그 영이란 도대체 어떤 영인가라고 나는 묻고 싶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그들이 대답한다면, 그 확신이야말로 참으로 웃음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리스도의 사도들과 초대 교회의 신자들이 다른 영으로 조명되지 않았음을 그들은 인정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더욱이 이들 중 한 사람도 그 영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들의 저작에서 훌륭하게 증명된 대로 보다 높은 존경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미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예언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네 위에 있는 나의 신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영토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 59 : 21). 이 말씀에서 이사야는 구약 시대의 사람들을 마치 글을 처음 배우는 어린이들처럼 외부적인 교리에만 묶어 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서 새 교회가 참되고 완전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곧 성령에 의해서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도 지배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예언자들이 침범할 수 없도록 결속시켜 놓은 것들을 이 악한 자들은 가증하고 참람되게 분리시켜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삼층천에 이끌려 다녀 온 후에도 계속하여 율법과 선지자들의 교리를 연구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후 12 : 2). 또한 그는 훌륭한 교사 디모데에게도 읽는 것에 착념(着念)하라고 권고하였다(딤전 4 : 13). 그리고 다음과 같은 성경에 대한 찬사는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 : 16-l7)고 말하였다. 성경의 효용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궁극적인 목적지에 인도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순간적인 것이라거나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악마적인 광란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또한, 그들이 주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영과는 전혀 다른 영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데 대해 답변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이 완전히 정신 착란증에 걸려 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자랑으로 여길 정도로 광신에 사로잡혀 있다고는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께서는 어떤 영을 약속하신다고 하셨는가? 실로 그 영은 "자의로 말하지 않는" 영으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과거에 말씀하신 것들을 저들의 마음속에 넣어 주시며 암시해 주시는 영인 것이다(요 16 : 13). 그러므로 우리에게 약속된 성령의 임무는 아직 들어보지도 못한 새로운 계시를 만들어 내거나 어떤 새로운 교리 자체를 날조하여 이미 받은 복음의 교리에서 우리를 떠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복음이 말하는 바로 그 교리를 우리의 마음에 앉혀 주는 데 있는 것이다.
2. 성령은 성경과 뜻을 같이할 때 인정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무슨 유익이나 만족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으며 성경에 유의해야만 한다는 것을 여기서 쉽게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복음의 빛이 나타난 후에는 물러갔다고 생각되었던 예언자의 교훈을 열심히 경청하는 사람들을 베드로가 칭찬한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벧후 1 : 19).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는 제쳐 두고 다른 교리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영이 있다고 하면 이는 마땅히 허망하고 거짓된 것으로 의심을 받아야 한다(갈 1 : 6-9).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그런가?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고후 11 : 14)하기 때문에, 가장 확실한 특징에 의해 그가 식별되지 않는 한 성령이 우리에 대하여 어떻게 권위를 행사하실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음성에 의해 가장 분명하게 우리에게 지시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을 하나님께로부터 구하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로부터 찾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파멸에 이르는 이 가련한 사람들은 예외이다. 더욱이 그들은 만물이 예속되어 있는 하나님의 영을 성경에 예속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은 마치 성령은 어디서나 동일하시고 자신과 일치하시며 만사에 시종일관 하시며 변함이 없으시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된다는 말과도 같다. 만일 성령이 인간이나 천사, 혹은 어떤 다른 무엇의 규범에 따라 판단된다고 하면 틀림없이 성령은 그 지위에서 격하될 것이며, 또한 그렇게 말하기를 원한다면 그러한 성령은 노예 상태에까지 떨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그 자신과 비교되고 자신 안에서 고려된다고 하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손상을 입었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종의 검토(检讨)를 받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에 대하여 자신의 위엄을 확립하고자 하시는 검토인 것이다. 우리로서는 성령께서 우리 속에 오셔서 임재하시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사탄의 영이 성령의 이름으로 침투하지 않도록 성령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형상대로 인식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시다. 그는 변하실 수도, 자신과 다를 수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분명히 그는 성경 안에서 일단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하실 것이다. 성령이 자신을 퇴화, 혹은 타락시키는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라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 한 이 말은 성령에 대하여 모욕적인 언사가 아니다.
3. 말씀과 성령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들은 우리가 죽이는 문자에 의존한다고 비난한다.2 그러나 이 일 자체에서 그들은 성경을 무시한 데 대한 형벌을 치르고 있다. 왜냐하면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6절에서 거짓 사도들을 대항해서 싸우고 있음이 아주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 거짓 사도들은 그리스도가 없는 율법을 추천하며, 주께서 "그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렘 31 : 33)하기로 약속하신 계약의 축복들을 사람들로부터 탈취하였던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은총과는 관계가 끊어져서 다만 귀에만 울릴 뿐, 마음에는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는 그런 문자는 죽은 글이며(고후 3 : 6), 따라서 주의 율법은 그것을 읽는 독자들을 죽인다. 그러나 그 문자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효과적으로 새겨지며 그리스도를 제시하기만 한다면,3 그것은 "영혼을 소생케 하고 우둔한 자도 지혜롭게 하는"(시 19 : 7) 생명의 말씀이 될 것이다(빌 2 : 16). 더욱이 사도는 같은 곳에서 자기의 설교를 "영의 직분"이라고 말하였다(고후 3 : 8). 의심의 여지없이 이 말의 의미는, 성령께서는 성경에서 보여 주신 자신의 진리와 아주 굳게 결속하여 계시므로 그 말씀이 당연한 존경과 위엄을 받을 때에만 비로소 성령이 자신의 권능을 발휘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말씀 자체가 성령의 증거로 말미암아 확증되지 않는 한, 우리에 대하여 큰 확실성을 가지지 못한다고 내가 앞서 주장한 것과4 조금도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일종의 상호 결속 관계를 통하여 말씀의 확실성과 성령의 확실성을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께서 빛을 비추어 주실 때에 우리의 마음에 말씀에 대한 완전한 신앙이 머물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형상을 따라 곧 그 말씀을 따라 그를 인식할 때에 우리는 속는다는 두려움 없이 성령을 마음에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로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이 임하면 즉시 말씀을 폐기할 생각으로 일시적인 전시(展示)를 위해 자신의 말씀을 인류에게 보이신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동일한 성령을 보내셔서 그 권능으로 말씀을 나누어주신 것은 그 말씀에 대한 효과적인 확증으로 자신의 일을 완성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리스도는 두 제자의 마음을 열어 주셨는데(눅 24 : 27,45), 이는 그들이 성경을 거절하고 자신의 지혜를 믿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성경을 알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 : 19-20)라고 데살로니가 사람들을 권면할 때에도, 그는 말씀을 떠난 공허한 사색(思索)으로 그들을 이끌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언이 멸시를 당해서는 안 된다고 즉시 덧붙여 말하였다. 이 사실을 통해서 그는 예언이 경시될 때에 성령의 빛이 소멸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암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저 거만한 광신자들은5 무엇이라고 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경솔하게 버리며, 또한 그 말씀에 결별을 고하면서도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자신들의 마음에 일어나는 몽상들을 아무 것이나 붙잡는 것만이 곧 유일하고도 탁월한 조명이라고 생각한 자들이 바로 저들이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와는 전혀 다른 절제(节制)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전적으로 진리의 빛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말씀을 주님께서 자기 영의 조명을 모든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시는 도구로 알고 있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알고 있는 영은 사도들 안에 거하였고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성령 이외의 그 어떤 다른 영이 아니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끊임없이 말씀을 듣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제 10 장
성경은 모든 미신의 잘못됨을 바로 잡기 위해 참되신 하나님을1이교도의 모든 신들과 대조하고 진실하신 하나님만을 정립하신다
1.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 교리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우주의 구조2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아주 명백하게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에서 더욱 생생하고 더욱 상세하게 계시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배웠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성경 가운데서 보여 주신 것과 앞에서 본 대로 자기 사역에서 자신을 묘사하신 것이 동일한지 아닌지를 생각해 본다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만일 누가 이 문제를 보다 충분히 다루고자 한다면 일은 실로 방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목록(目录) 정도를 마련해 주어 그것으로 특별히 성경에서 하나님을 찾을 수 있게 되고, 또한 그들의 탐구가 확고한 목적을 향하게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을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하신 그 특수한 언약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겠다(창 17 : 4).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원수였던 자들을 자녀의 반열에 아무런 공로 없이 받아들이셨을 때 벌써 자신을 구속주로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주 창조에 관한 지식에 머물고 있을 뿐 중보자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에까지는 오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잠시 후에 신약성경으로부터 몇몇 구절들을 인용하여3 창조주 하나님의 권능과 최초의 창조물을 보존하시는 그 섭리를 입증하는 것은 유익한 일이 되겠지만, 내가 지금 독자들에게 경고하고 싶은 것은 독자들이 자기에게 부과된 한계를 뛰어 넘지 않고 나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유의해 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으로서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우주를 어떻게 통치하시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실로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자비하심과 은혜 주시기를 좋아하시는 그의 의지는 성경 어디를 보아도 반복적으로 칭송되고 있다. 한편 하나님께서 엄격하신 분임을 보여 주는 실례들도 있다. 곧 하나님께서 관용을 베풀어 주심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자들이 계속해서 악을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행위에 대하여 공의로 징벌하시는 의로운 심판장이심을 나타내시기도 하는 것이다.
2. 성경에 따른 하나님의 속성은 그의 피조물들에게서 알 수 있는 속성과 일치한다
실로 성경의 어떤 구절들은 하나님의 특성을 더 명백하게 묘사하여 마치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4 모세가 하나님을 묘사할 때, 그는 분명히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간결하게 말하고자 하였다. 모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오라 여호라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子舆孙)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출 34 : 6-7). 여기서 우리는 두 번 반복된 그 위대하신 이름에서 하나님의 영원성과 자존성(自存性)이5 선언된 것을 보게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완전성이 언급되었는데, 이들 완전성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보다는 우리에 대하여 어떤 분이신가 하는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6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한 이와 같은 인식은 산 경험으로 되는 것이지 헛되고 막연한 과장된 공상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더우기 우리가 이미 본 대로 하늘과 땅에서 빛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완전성이 여기서 열거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곧 그것은 인자하심, 선하심, 자비로우심, 공의, 심판, 그리고 진리와 같은 것들이다. 그리고 권세와 능력은 엘로힘(Elohim)이라는 이름에 포함되어 있다.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충분히 나타내고자 할 때에는 그와 같은 명칭들을 사용하였다. 현재로서는 성경에서 여러 실례들을 찾지 않고도 시편 한 편만으로(시 145편) 충분하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완전성의 총체가 정확하게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생략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시 145 : 5). 더욱이 피조물에게서 볼 수 없는 것들은 여기에 전혀 묘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험이라고 하는 교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보여 주신 그대로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자 하셨는데, 비록 그 기록이 아주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히 위와 동일한 내용이다.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렘 9 : 24 참조, 고전 1 : 31). 특히 이 세 가지는 꼭 알아야 할 것들이다. 첫째는 인애로서, 우리의 모든 구원은 전적으로 여기에만 달려 있다. 둘째는 공평 혹은 심판(Judgment)으로, 이것은 날마다 행악자들에게 시행되고 있으며 심지어는 보다 가혹하게 저들을 영원한 멸망에 이르기까지 기다린다. 셋째는 정직 혹은 의(义, Justice)이다. 이것으로 신자는 보존되며 또한 가장 자애로운 양육을 받게 된다. 이러한 속성들을 알게 될 때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법을 충분히 갖추게 되는 것이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진리와 권세, 거룩하심과 선하심, 어느 하나도 빠뜨려진 것이 없다. 사실 인애와 공평과 정직에 관한 필수 불가결의 지식이 하나님의 확고 불변의 진리에 기초를 두지 않았다고 하면,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지식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공평과 정직으로 세계를 통치하신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의 선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면 그의 인애가 도대체 어디서 오겠는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모든 길은 인애와 공평과 정직이라고 하면(시 25 : 8-10) 여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성경에서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모든 피조물에 새겨져 빛나고 있는 지식과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 지식은, 먼저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다음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한다. 이 지식으로 우리는 완전 무결한 생활과 거짓 없는 순종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동시에 그의 선하심에 전적으로 의존하기를 배우게 된다.
3. 하나님의 유일성은 이교도들에게도 계시되었으므로 우상숭배자들은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일반적인 교리를 요약하고자 한다. 실로, 첫째 우리를 참되신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성경은 이교도의 모든 신들을 명백히 배척하며 거부하고 있음을 독자는 우선적으로 주의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하여 종교는 일반적으로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유일신 하나님의 존칭은 어디서나 알려졌으며 또한 존경을 받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많은 신들을 숭배하는 자들까지도 본래의 진정한 감정으로 말할 때에는 마치 유일신으로 만족이나 하는 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단수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지혜롭게 알아차린 져스틴 마터(Justin Martyr)는 하나님의 왕국(God's Monarchy)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여러 가지 증거를 들어 하나님의 유일성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하였다.7 터툴리안(Tertullian) 또한 그와 같은 것을 흔히 사용되는 구절로 입증하였다.8
그러나 인간은 그들 자신의 허망한 생각에 의해 한결같이 거짓된 허구에 끌려들었거나 또는 빠져 들어감으로써 그 지각이 모두 사라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천성적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지각하던 것은 다만 그들을 핑계할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게 되었다.9 왜냐하면, 그들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까지도 어떤 종류의 신들이 그들 중에 임재하기를 열망하고 기도시에 불확실한 신들에게 도움을 구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이 안정을 얻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음을 공공연히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그들이 하나님의 여러 가지 특성을 상상함에 있어서 쥬피터(Jupiter), 머큐리(Mercury), 비너스(Venus), 미네르바(Minerva) 및 그 외의 여러 신들에 대한 상상은 비록 교양 없는 민중들의 그것처럼 불합리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들 역시 사탄의 속임수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도피처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부패케 한 그 변절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다른 곳에서10 살펴보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박국은 일체의 우상을 정죄한 후에, "성전에 계시는" 여호와를 찾으라고 명하였다(합 2 : 20). 그리고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신자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신도 받아들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제 11 장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만드는 것은 불신앙적이다. 우상을 세우는 자는 누구나 일반적으로 참되신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이다1
(예배에서의 형상(形象) 배격에 대한 성경적 논증. 1-4)
1. 하나님에 대한 모든 가시적(可视的)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금하신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거칠고 우둔한 지성을 감안하여 보통 대중적인 방법으로 말하기 때문에, 참되신 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구별하고자 할 때에는 특별히 하나님을 우상과 대조시키고 있다. 물론 이것은 철학자들이 교묘하고 재치 있게 가르친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데 있어서 자기 공론(空论)에만 집착하고 있는 한, 우매하게 된다는 것, 아니 발광하게 된다는 것을 보다 더 잘 폭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어디서나 보게 되는 그 독특한 정의는, 인간이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일체의 신성을 무(无)로 돌려 버린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하여 유일하며 참된 증거가 되시기 때문이다.2
또 한편, 동시에 보이는 하나님의 모습을 갈망하여 나무, 돌, 금, 은, 그밖에 생명이 없고 썩어질 물질로 신(神)들을 조형화(造形化)하려고 하는 그와 같은 야수적인 우매가 전세계를 팽배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리를 고수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어떠한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형상화하게 되면 불경건의 허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손상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율법서에서, 자신에게만 하나님의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고 요구한 후 자신이 어떤 예배를 받아들이고 어떤 예배를 거절하시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즉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출 20 : 4).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기를 보이는 형상으로 표현하려는 우리의 방자한 행동을 억제시키셨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미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변질시키기 시작한 일체의 형태를 간단히 열거하셨다. 페르시아 사람들이 태양을 숭배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 미련한 이방인들 역시 하늘의 별들을 보고서 그것들을 신들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애굽 사람들에게는 동물이라고 하는 동물은 모두 하나님의 모습이 아닌 것이 없었다. 실로 희랍 사람들은 인간의 형태로 하나님을 예배하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는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3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들을 마치 하나는 종교, 하나는 나쁘거나 한 것처럼 서로 비교하지 아니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미신 숭배자들이 하나님을 그들 가까이 오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일체의 형상, 화상(畵像) 그리고 그 밖의 상징물들을 예외 없이 거절하셨다.
2. 하나님의 모든 형상적 표현은 하나님의 존재와 모순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금지령에 더하신 이유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먼저 모세의 책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호렙산 화염 중에서 너희에게 말씀하시던 날에 너희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하였은즉 너희는 깊이 삼가라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만들까 하노라"(신 4 : 15-18). 이렇게, 보이는 하나님의 형상을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임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분명하게 형상을 적대시하여 말씀하셨는가를 우리는 여기서 보게 된다. 예언자들 중에서는 이 문제를 가장 강조한 이사야 한 사람만을 예를들어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비물질적인 하나님을 물질적인 것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무생물로, 무궁하신 하나님을 나무 조각이나 돌, 혹은 황금 조각과 같은 것으로 만들 때 하나님의 위엄은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허상(虚像)으로 더렵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사 40 : 18-20, 41 : 7, 29, 45 : 9, 46 : 5-7).
바울도 또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 : 29). 이 말씀에서 명백한 것은, 인간이 세운 조상(雕像)과 하나님을 나타내려고 그린 화상(畵像)은 모두가 하나님의 위엄을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만일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늘로부터 외치신다고 해서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성령께서는 비참하고 맹목적인 눈먼 우상 숭배자에게도 이와 동일한 고백을 하게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이 인용한 세네카의 불평은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들은 거룩하고 썩지 아니하며 가히 침범할 수 없는 신들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나쁘고 가장 천한 물질을 사용하였다. 어떤 이들은 그 신들에게 인간의 형태를, 어떤 이들은 야수의 형태를 입혔으며, 또 어떤 이들은 남녀 혼성의 형태로, 어떤 이들은 몇 개의 다른 몸으로 형태를 입히고 그것들을 신이라고 불렀다. 만약 이런 것들이 생기(生气)라도 얻어서 우리와 마주치게 된다면, 아마 괴물로 여겨질 것이다4." 그러므로 여기서 다시 한 번 명백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미신으로 떨어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우상이 금지되었던 것이라고 하는 우상 옹호자들의 변명은 한낱 천박한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신 본질과 자연의 영속적인 질서에서 제시하신 것을 다만 한 국민에게만 국한시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실제로 바울이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드는 그 오류를 반박할 때, 그는 유대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아테네 사람들을 상대로하여 말한 것이다.
3. 신적(神的) 존재로부터 직접적인 표징이라도 형상적 우상을 정당화하지 못한다
실로 하나님은 결정적 표적들에 의해서 때때로 자신의 신적 위엄의 임재를 나타내 보이셨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대면하여 보이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지난날에 보이셨던 그 모든 표적들은 모두 다 인간의 교육을 위해서 적절히 고려된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의 불가해한 본질을 인간에게 명백하게 말해 주는 것들이었다. 즉 "구름과 연기와 화염"(신 4 : 11)은 비록 이것들이 하나님 영광의 상징임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굴레처럼 모든 사람의 마음을 제어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이상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른 사람에 비해 모세에게 더 친밀하게 자신을 드러내셨다(출 33 : 11).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그의 기도를 응답하지 못하고 단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출 33 : 20)고 하는 말씀을 받았던 것이다. 성령이 한번은 비둘기의 형태로 나타나셨다(마 3 : 16). 그러나 그 비둘기는 곧 다시 사라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 순간적인 상징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이 성령을 눈에 보이는 분으로 믿는 것을 경고 받고 그리고 다만 성령의 권능과 은혜로 만족할 것이요 그에 대해서 어떤 외부적인 형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모를 자가 누구이겠는가?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것은, 그가 장차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실 것에 대한 서곡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의 형태로 신격(神格)의 상징을 세우려고 하는 어떠한 구실도 유대인들에게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하에서 속죄소로부터 그 권능의 임재를 보여 주셨는데, 이 속죄소는 그 마음이 감격하여 자기를 초월하게 될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응시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즉 그룹은 그들의 날개를 펴서 그 속죄소를 덮었다. 속죄소는 휘장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속죄소가 안치된 장소는 들여다 볼 수 없도록 깊이 감추어져 있었다(출 25 : 17-21). 여기서 완전히 명백해지는 것은, 이들 그룹을 본보기로 해서 하나님과 성자(圣者)들의 형상들을 수호하려는 자들이야말로 광란의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로 나는 도대체 그 하찮은 작은 형상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묻고 싶다. 하나님의 신비를 나타내는 데 그것들은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룹들은 그들의 날개로 속죄소를 가림으로써 하나님을 직접 볼 수 없도록 사람의 눈과 일체의 감각을 무디게 하여, 인간의 만용(蛮勇)을 시정할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선지자들은 환상에서 "그 얼굴을 가리우고" 있는 스랍들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사 6 : 2). 이것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가 너무 찬란하여 천사들도 그것을 똑 바로 볼수 없으며 따라서 천사들에게서 비치는 그 희미한 섬광이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룹이 율법의 옛 후견기간(後见期间)에5 속하는 것으로 인정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룹을 우리 시대를 위한 실례로 끄집어 들인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왜냐하면 그런 유치한 시대, 말하자면 그러한 종류의 초보를 배우도록 의도된 시대는(갈 4 : 3) 이미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이교의 저술가들이 교황주의자들 보다 훨씬 더 능숙하다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다. 유베나리스(Juvenalis)는 유대인들이 흰 구름과 하늘의 신격을 예배한다고 비난하였다.6 그가 하나님의 어떤 형상이 존재를 부정한 것은 잘못된 것이요 경건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어떤 가시적인 형상이 있었다고 부질없이 꾸며대는 교황주의자들 보다는 더 진실하게 말하였다.7 그러나 이 국민은 마치 물이 큰 샘에서 맹렬한 힘으로 솟아오르는 것처럼 자신들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또는 재빠르게 계속 우상을 요구하였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천성이 얼마나 강렬하게 우상 숭배에 기울어져 있는가를 알도록 하자.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공통적인 실패의 죄를 유대인들에게만 전가시키고, 죄에 대한 허망한 유혹에 빠져 죽음의 잠을 자고 있다.
4. 우상과 화상(畵像)은 성경과 반대된다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쓰여진 말씀이 있다. 즉 "열방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시 135 : 15 참조, 115 : 4)고 하는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우상은 물질로 만들어진 것이요 신이 아니며, 그 형상은 금과 은으로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우리 자신의 이해력에서 생각해 낸 하나님에 대한 개념은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가 흙이나 돌보다도 금과 은을 들어 말한 것은, 그 물질의 광채와 가치가 우상에 대한 존엄을 더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그는 일반적으로 생명이 없는 물질로 신들을 만드는 것보다 더 바람직하지 못한 일도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지었다. 동시에 그는 이에 못지않게 다른 문제 하나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즉 순간 순간 덧없이 호흡을 하며 불안하게 살아가는 유한한 인간이 너무도 우매하고 무분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존영을 우상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일시적인 존재임을 고백하지8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금속(金属)이 하나님으로 간주되어 지기를 원하며, 자신이 신격의 창조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상의 기원이 인간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대체 어디서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저 이교 시인의 다음과 같은 조소는 가장 정당하다고 하겠다.
한때 나는
하나의 무화과 나무의 줄기, 쓸모 없는 나무 토막이었네.
일꾼은 나를 걸상으로 만들까 망설이다가
마침내
신(神)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네.9
이와 같이 순간마다 생명이 꺼저 가고 있는 이 지상의 인간이 자기의 재주로 하나님의 존영과 그 이름을 죽은 나무 줄기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저 에피큐로스학파의 시인은 재담을 늘어놓기는 하나 종교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기 때문에 그와 그 동류의 풍자를 묵살하기로 하자. 오히려 극도로 어리석은 자들을 견책한 예언자의 말을 통하여 자극을 받으며 각성하도록 하자. 즉 저 어리석은 자들은 동일한 나무로 자신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고기를 굽거나 삶기도 하며, 또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 자들이라고 그는 책망하였던 것이다(사 44 : 12-17). 그러므로 그는 다른 곳에서 그들을 율법을 범한 자라고 규정 지을 뿐만 아니라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깨닫지 못한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사 40 : 21). 왜냐하면 무한하시면 불가해하신 하나님을 5척의 키로 축소시키려는 것보다 더 부당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습은, 이 가공할 일이 비록 자연의 질서에는 거스리는 것이나 인간에게는 본래적인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이와 같은 언어로 미신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상은 "사람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하나님의 권위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사 2 : 8, 31 : 7, 37 : 19, 호 14 : 3, 미 5 : 13). 이 말씀으로 보아 인간이 고안해 낸 일체의 예배 형태는 가증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확립된다. 선지자는 시편에서 이와 같은 비난을 한층 더 맹렬히 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만사가 오직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지성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생명이 없고 무감각한 물질에게서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성의 부패가 일반적으로는 모든 사람들을, 특수하게는 각 개인을 그와 같은 광란에까지 몰고 가기 때문에, 마침내 성령께서는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시 115 : 8)라고 무서운 저주를 퍼부으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화상도 조상(雕像) 못지 않게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이것은 희랍인들의 그 어리석은 궤변을 반박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조각하지만 않는다면 그것으로 훌륭하게 자기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다른 국민들보다 더 방종하게 화상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조각가가 그를 위하여 어떤 조상을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예술가가 어떠한 것도 조형(造型)하는 것을 금지하셨다. 이는 그와 같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은 거짓이요, 하나님의 위엄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과 교부들의 주장으로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오류를 논박함. 5-7)
5. 우상에 대한 성경의 판단
우상은 무식한 사람들의 책이라고 하는 옛 속담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이 말은 바로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말이었다.11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이와는 전혀 다르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레고리우스가 성령의 학교에서 이에 대하여 배웠더라면, 결코 그러한 주장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우상의 도는 나무 뿐이라"(렘 10 : 8)고 하였으며, 하박국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이라"(합 2 : 18)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씀에서 우리는 인간이 우상으로부터 하나님을 배운다는 것은 다같이 무익하고 거짓 되었다고 하는 일반적인 교리를 결론지을 수 있다.
불경한 미신을 위해 형상을 남용한 자들이 선지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다는 것에 대해 만일 어떤 사람이 이의를 제기한다면,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교황주의자들이 확실한 원리로 결정한 것, 곧 우상은 책의 역할을 한다고 하는 주장을 예언자들이 전적으로 정죄한 것은, 모든 사람이 명백하게 아는 것이라고 나는 첨부한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참되신 하나님과 우상을 대립시키고, 결코 조화될 수 없는 것으로 대치시켰기 때문이다. 방금 내가 위에서 인용한 몇 구절에서 이와 같은 비교가 제시되었다. 유대인들이 예배한 분은 오직 유일하신 참되신 하나님이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하여 보이는 형상을 만든다는 것은 사악한 일이요 거짓된 일이다. 그리고 그러한 형상에서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는 자들이야말로 비참하게 속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우상에게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구하는 것이 거짓이요 허망된 것이 아니라면, 아마 예언자들은 그렇게까지 꾸준히 이를 정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즉 인간들이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이며 거짓 되었다고 우리가 주장할 때, 우리는 단지 예언자들이 가르친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6. 교회의 교리도 역시 부분적으로 달리 판단한다
이 외에도 라탄티우스(Lactantius)와 유세비우스(Eusebius)가 이 문제에 대하여 쓴 글을 읽어 보라. 형상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가 다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조금도 주저함 없이 주장하였다.12 어거스틴(Augustine)도 이와 마찬가지로 형상에게 예배드리는 것 뿐 만 아니라, 그 형상을 신으로 봉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명백하게 주장하였다.13 그러나 그의 말은 오래 전에 엘비타 교회 회의(The Council of Elvira)에서 제정된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중 제36장에는 "교회당 안에 화상(畵像)이 있어서는 안되며, 예배를 받든가 찬양받아야 할 것이 벽에 그려져서도 안된다"14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특별히 기억할 만한 것은, 이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바르로(Varro)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고 이에 찬동하고 확신 하였다는 사실이다. 곧 "신들의 조상을 최초로 소개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제거하고 그 대신 오류를 가하였다"15라는 말이다. 만일 바르로만이 이 말을 하였다면, 아마 그 말은 거의 권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이방인이 어둠 속에서 더듬어 이와 같은 광명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유형적인 형상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외를 감소시키고 오히려 오류를 더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의 위엄을 가질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한 것은, 우리를 충분히 부끄럽게 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것은 진실과 지혜로 말한 것임을 사실 자체가 입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 말을 바르로에게서 인용했지만 자신의 사상에 따라 그것을 진술하였다. 그리고 첫째로, 인간이 저지른 하나님에 대한 최초의 오류는 형상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 새로운 요소가 가해지자 오류가 증가된 것이 라고 그는 지적하였다. 둘째로, 형상의 어리석음과 그 둔하고 불합리 한 고안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성이 쉽게 멸시를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경외가 감소되고 심지어는 파괴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둘째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그런 것을 경험하지 않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므로 바르게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형상 이외의 다른 자료에서 배워야 한다.
7. 교황주의자들의 형상물(形象物)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교황주의자들이 조금이라도 수치를 느낄 줄 안다면, 형상물이 무식한 자의 책이라고 하는 속임수를 더 이상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의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게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양보하여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의 우상을 옹호하는 데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와 같은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이 만든 성자와 화상, 혹은 조상은 가장 음란한 실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일 아무라도 그들을 본받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체형(体刑)을 받아야 할 것이다. 실로 그들의 교회에서 동정녀의 조상이라고 여겨지기를 바라는 형상물보다는 오히려 창녀의 복장이 더 정숙하고 순수하게 보인다. 그들은 순교자들에게 좀 더 잘 어울리는 복장을 입힐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황주의자들이 우상은 일종의 성결의 책이라고 하는 그 거짓된 주장을 조금이라도 순수하게 보이기를 원한다면, 적어도 그들의 우상을 적당하게 장식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교회가 그 의무를 다했더라면 "교육받지 못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거룩한 곳에서 신자들을 가르칠 방법이 아니라고 우리는 또한 답변할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런 쓰레기 같은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교리를 거기서 배우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의 선포와 성례전을 통하여 한 공통된 교리가 모든 사람에게 제시되기를 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상을 생각하여 그 시선을 사방으로 두리번거리는 자들은 이 교리에 대해서 마음의 주의를 성실하게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지하여 다만 우상 이외에서는 배울 수 없다고 교황주의자들이 말하는 그 무식자들이란 대체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 바로 그들은 주님께서 자기 제자로 인정하신 자들이며, 하늘나라의 도(道)의 계시로 영광의 옷을 입힌 자들이며, 또한 천국의 구원의 신비로 교육받기를 원하는 자들이다. 실로 나는 오늘날도 그러한 "책"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묻고 싶은 것은, 그들이 이렇게 무식하게 된 것이 그들을 교육하기에 적합했던 그 교리를 탈취당한 데서 온 것이 아니고 어디서 왔겠는가? 실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르치는 임무를 우상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은 그들이 벙어리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이유가 없다. 바울은 이 복음을 진실하게 전파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갈 3 : 1)이라고 증거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받을 저주를 대신하여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갈 3 : 13), 자기의 육체를 희생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히 10 : 10), 자기의 보혈로 우리를 깨끗이 씻어 주시며(계 1 : 5), 요컨대 우리를 성부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다는 것을(롬 5 : 10) 충분히 또는 진실하게 배웠다고 하면 대체 무슨 목적으로 나무와 돌과 금, 은으로 그렇게 많은 십자가상을 교회 도처에다 세웠겠는가? 이 한 가지 교리만으로도 나무와 돌로 만든 천 개의 십자가상에서 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탐욕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는 오히려 금, 은으로 만든 십자가상에 그들의 마음과 눈을 더 집착하게 될 것이다.
(조각과 회화는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결과적으로 형상의 사용은 예배 부패의 기원이 된다. 8-16)
8. 우상의 기원 : 유형적인 신성(神圣)에 대한 인간의 욕구
다음으로 우상의 기원에 대한 잠언의 말은 거의 일반적으로 동의를 얻고 있다. 곧 우상을 처음으로 창시(创始)한 자들은 죽은 자를 존경한 자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죽은 자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들을 미신적으로 예배하게 되었다.16 나는 이 왜곡된 습관이 매우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다. 따라서 그것이 우상 숭배에 대한 인간의 갈망에 더욱 부채질한 도화선이라는 것도 나는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 악의 최초의 원인이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교의 저술가들이 자주 말하는 죽은자들의 형상을 신성시하려는 열망이 유행되기 전에 벌써 우상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라헬이 그 아버지의 우상을 훔쳤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사용하는 일을 흔히 있는 죄악으로 기록하였다(창 31 : 19).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은 말하자면 우상을 만들어 내는 영원한 공장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홍수 후에는 세계는 새롭게 갱신 되었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그들 멋대로 신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족장이 여전히 살아 있는 동안 그 자손들이 우상 숭배에 바쳤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얼마 전에 가장 무서운 심판으로 그 타락을 정화시킨 땅이 다시 우상으로 더럽혀지는 것을 노아는 쓰라린 고통 없이는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여호수아가 증거한 대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데라와 나홀은 거짓 우상을 섬긴 자들이었기 때문이다(수 24 : 2). 만일 셈의 자손이 매우 빨리 타락하였다면, 이미 조상 안에서 저주받은 함의 자손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해야 되겠는가?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겠다. 인간의 마음은 교만과 무모한 것으로 꽉 차 있어서 자신의 능력에 따라 감히 신을 상상해 내기까지 한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은 완만하게 어리석음과 무지에 완전히 젖어버리기 때문에 그것은 공허하고 허망한 환영(幻影)을 하나님으로 상상한다. 이러한 악에는 다시 새로운 악이 함께 하는 법이다. 즉 인간은 내적으로 상상한 하나님을 수공(手工)으로 표현해 보려고 애쓴다. 그러므로 마음은 우상을 잉태하고, 손은 그 우상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유형적으로 나타내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우상 숭배의 기원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실례가 입증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출 32 : 1)고 하였다. 그들은 실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수많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어떤 유형적인 상징으로 볼 수 없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 가까이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고국행진(故国行进)의 인도자가 바로 하나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이 인도한다고 인정하려 하였다. 우리는 일상 생활의 경험에서 육신은 항상 자기와 비슷한 허구를 얻고 나서는 무분별하게도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상(像)인 것처럼 위안을 얻는데, 이렇게 하기 전에는 그것은 결코 만족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가 창조된 이래 거의 모든 시대에 걸쳐서, 인간은 이 맹목적인 욕망에 따라 볼 수 있는 상징물들을 만들어 세우고 하나님께서 바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고 믿어 왔다.
9. 형상을 이용하고자 하면 마침내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된다
이런 종류의 공상에는 즉시 숭배가 따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형상 속에서 하나님을 본다고 생각하게 되면 역시 하나님을 형상으로 숭배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그들의 마음과 눈이 전적으로 우상에게 얽매이게 되고, 점점 무감각해져 마치 거기에 신적(神的)인 무엇이 있는 것처럼 그것들에 대해 완전히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지나치게 우둔한 생각에 물들기 전에는 우상 숭배에 뛰어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사실 그들은 그 우상을 신으로 간주한 것이 아니라, 신의 어떤 능력이 그것에 내주한다고 상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나 어떤 피조물을 상(像)으로 표현하여, 이를 예배하기 위하여 그 앞에 꿇어 엎드릴 때에는, 벌써 어떤 미신에 매혹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조상을 만들어 세우는 일과, 예배로 유도할 만한 비문이나 석비의 어떠한 봉헌도 금하셨던 것이다(출 20 : 25). 같은 이유에서 역시 제 2계명에는 예배에 대한 것이 첨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자마자 즉시 하나님의 권능이 그 형상에 부착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어리석어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나서는 여기에 하나님을 결부시키고,17 마침내는 그것을 예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단순히 우상만을 예배하든지, 하나님을 우상으로 예배하든지, 거기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 여하한 구실을 막론하고, 우상에게 하나님의 존영을 부여하는 것은 언제나 우상 숭배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미신적으로 경배 받기를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우상에게 무엇을 부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빼앗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참된 종교를 매몰시키고 전복하였던 그 저주받을 우상 숭배를 변호하기 위해 구차한 구실을 찾고 있는 자들은 이 점에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형상을 신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유대인들도 금송아지를 만들기 전에는(출 32 : 4),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손으로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셨다고 하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무분별하지는 않았다(레 26 : 13). 그러나 이것들이 그들을 바로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신이라고 아론이 말하자 그들은 이에 뻔뻔스럽게 동의하여(출 32 : 4,8),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을 금송아지에서 볼 수만 있다면, 해방자이신 하나님을 그대로 존속시키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인이 하나님을 나무나 돌로밖에 이해하지 못할 만큼 우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음이 내키는 대로 우상을 바꾸기는 하였으나 언제나 동일한 신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많은 형상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그 많은 형상의 수만큼 많은 신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그들은 매일같이 새로운 형상에게 봉헌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신들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우상 숭배자들이 구실로 삼았다고 어거스틴이 말한 그 변해서(辩解书)를 읽어 보라. 즉 민중들이 우상 숭배의 비난을 받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이 예배한 것은 보이는 형상물이 아니라, 그 형상물 속에 보이지 않게 내주하는 한 실재라고 답변하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소위 "순수한 종교"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우상이나 그 우상에 의해서 표현된 영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유형적인 형상물을 통하여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대상의 한 기호를 바라보았을 뿐이라고 진술하였다.18 그러면 어떻다는 말인가? 유대인이나 이방인 할 것 없이 우상 숭배자는 누구든지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은 생각을 유발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이해로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형상물을 통하여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친근한 이해가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이 일단 이렇게 하나님을 왜곡된 우상으로 즐겨 만들고 나서부터는 끊임없이 새로운 계교에 미혹되어, 마침내는 하나님이 우상을 통하여 그 권능을 나타내신다고까지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천지의 대주재시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이와 같은 형상으로 예배한다고 확신하였다. 한편 이방인들은 거짓된 신이기는 하지만 이 신들이 하늘에 거주한다고 상상하고 그들에게 예배 하였다.
10. 교회에서의 우상 숭배
이러한 일이 이전에는 행해지지 않았고, 그들에게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들은 어찌하여 우상 앞에 엎드려 부복하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기도하려 할 때, 하나님의 귀로 향하는 것처럼 우상에게 향하는가? 실로 어거스틴이 "우상을 바라보면서 그와 같이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사람 치고 그 우상이 자기의 기도와 예배를 받아 주리라는 생각과, 자기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리라는 희망을 품지 않는 자는 하나도 없다"19라고 한 말은 조금도 틀리지 않는다. 형상물 가운데서 어떤 것은 무시당하고 혹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존경을 받는가 하면, 어떤 것은 가장 엄숙한 방법으로 존영을 받고 있는데, 어찌해서 동일한 하나님을 모방해서 만들 상(像)들에게 이렇게 심한 차별을 둘 수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자기 집에 우상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우상들을 보기 위해 서원의 순례의 길을 떠나, 자기 몸을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가? 어찌하여 그들은 오늘날 마치 제단과 화상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살육과 유혈을 무릅쓰면서까지 형상물을 위해 싸우면서 우상보다는 오히려 유일하신 하나님을 쉽게 떠날 수 있는가? 그러나 나는 여기서 거의 무한하고 또 모든 사람들의 심정을 사로잡고 있는 일반 대중의 우둔한 오류들을 하나하나 열거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에 대해 특히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고자 할 때 고백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자 할뿐이다. 그들은 "우리는 결코 우상을 우리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유대인이나 이방인도 옛날에는 우상을 그들의 신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그들이 목석(木石)으로 더불어 간음한다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렘 2 : 27, 겔 6 : 4이하, 사 40 : 19-20, 합 2 : 18-19, 신 32 : 37). 그런데 이러한 행위가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려지기를 원하는 자들에 의해서 매일같이 행해지고 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을 나무와 돌로 만들어 놓고 육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다.
11. 교황주의자들의 어리석은 회피
그러나 그들이 아주 교묘하게 구별을 함으로써 회피하려 한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감추어서도 안 되지만 이에 대하여는 조금 후에 좀더 충분히 언급하게 될 것이다.20 그들은 형상물에게 표시하는 존경을 우상에게 봉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우상을 예배하는 것으로 말하지 않는다.21 왜냐하면 그들은 이런 말로써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도 둘리아(dulia) 곧 영광이라는 것이 조상이나 화상에게 돌려질 수 있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만 우상의 봉사자일 뿐 예배자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죄도 없다고 생각한다. 실로 이것은 마치 "예배하는 것"이 "봉사하는 것"보다 더 가벼운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더욱이 그들은 희랍어에서 피할 곳을 찾으려 하나 그것은 매우 유치한 방법으로 모순을 일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라트류에인이라는 말은 희랍인들 사이에서는 "예배하다"라는 뜻을 지니는 데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의 말은 "형상을 예배하고 있지만 예배는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내가 말에서 그들을 책잡으려고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그러나 그들이 순박한 사람들의 눈을 어둠으로 덮을 때,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변이라 해도 그들의 웅변술로는 결코 동일한 것을 가지고 두 개의 서로 다른 것이라고 입증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과 옛날의 우상 숭배자들과의 사실상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지적해 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간음하는 자나 살인자가 자기 범죄에 대해서 다른 별명(别名)을 붙인다 하더라도 죄책을 면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그들이 응당 정죄를 받아야 할 우상 숭배자들과 실제에 있어서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하면, 그들이 명칭을 교묘하게 고안해 내어 변명을 일삼으려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동기는 우상 숭배자들의 동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오히려 전체 악의 근원은 그들의 터무니없는 경쟁심에 있었다. 이 경쟁심으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과 다투어 그들의 기지(机智)로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상징들을 고안해 내고, 손으로는 그것들을 날조하였던 것이다.
12. 예술의 기능과 한계
그러나 나는 절대로 어떠한 상(像)도 허락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각이나 회화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까닭에, 이 양자를 순수하고 정당하게 사용하기를 나는 원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과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주신 이 은사가 불합리하게 남용되거나 우리를 파멸시키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인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법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금하셨기 때문이며(출 20 : 4), 또 그러한 일은 다소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만 이러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건전한 처술가들은 누구나 다 우상 숭배 행위를 한결같이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하나님을 유형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정당한 일이 아니라면 형상을 하나님으로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형상으로 예배한다는 일은 더욱더 정당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대상물 외에는 무엇이라도 회화로 표현하든가 조각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결론 짓는다. 즉 인간의 시야에서 멀리 초월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위엄이 보기에도 흉한 형상물로 말미암아 손상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가시적으로 표현 된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역사적인 것과 사건들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인 사건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형상 또는 형태이다. 전자는 교육하며 교훈하는 데 다소 유익을 주나, 후자는 내가 보는 바로는 쾌락 외에는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오늘날까지 교회내에 장식되어 있는 거의 대부분의 형상물은 후자와 같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그들의 이와 같은 형상물은 그들의 판단력과 분별력의 산물이 아니라, 어리석고 경솔한 격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상물의 대부분이 얼마나 사악하게 또는 꼴사납게 조형되었는지, 또한 조금 앞에서 말한 문제로22 화가와 조각가들이 이 작업에서 얼마나 방탕하게 탕녀의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비록 형상물의 사용이 어떠한 악도 내포하고 있지 않다 해도 교육을 위해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이다.
13. 교리가 순수하고 견고할 때에는 교회가 형상물들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위의 구별은 제쳐 두고라도 과거사의 표현이든 인간의 신체를 표현해 놓은 것이든, 어떠한 형상을 교회당 안에 두는 것이 과연 마땅한지에 대해 검토해 보자. 첫째로 우리가 만일 초대 교회의 권위에 감동을 받고 있다면 종교가 아주 번창하고, 순수한 교리가 우세하던 약 500년 동안 기독 교회에는 일반적으로 형상물들이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23 그러나 성직의 순수성이 점점 쇠퇴하여 감에 따라 교회를 장식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그 형상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여기서 그 형상의 최초의 창시자들이 어떤 이유로 그렇게 하였는지에 대하여는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전시대(前时代)와 후시대(後时代)를 비교해 보면, 독자는 형상이 없었던 전시대의 고결성에 비해 후시대가 심히 타락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겠는가? 이들 성스러운 교부들이 유용하고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던 것을 교회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없이 지내도록 그들이 허락하였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교부들은 형상물이 전적으로 무익하거나 혹은 거의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큰 위험성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심사 숙고한 끝에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그것들을 거절하였던 것이요, 그것들에 대한 무지와 나태 때문에 그대로 지나쳐 버린 것이 아니었다.
어거스틴도 이러한 사실을 명백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즉 형상물을 숭고하고 높은 자리에 두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과 제물드리는 사람"의 주의를 끌게 되고 그것이 비록 감각과 생명은 없다 하더라도 생명 있는 지체와 감각 있는 것과 흡사해져, 유약한 마음을 감동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그것들이 살아서 호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24 그는 다시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우상이 수족(手足)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므로, 육체 안에 머물고 있는 마음은 그것이 자신의 육체와 너무나 비슷하게 보이기 때문에 우상의 형태도 감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조금 지나서 그는 또 이렇게 말하였다. "우상은 입과 눈과 귀와 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행한 영혼을 굴복시키는데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불행한 영혼을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며,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걷지도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25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상 예배 뿐만 아니라, 우상 그 자체에 대해서도 우리 자신을 지키라고 경고한 이유인 것 같다(요일 5 : 21 참조). 그리고 경건을 거의 전부 파멸시킬 정도로 지금까지 세계를 점령하였던 그 무서운 광란으로 말미암아 교회당 안에 형상물들이 세워지자마자, 소위 우상 예배의 표준이라는 것이 세워진 것을 우리는 너무도 많이 경험하여 왔다. 왜냐하면 인간은 우매하여 자신을 제재하지 못하고 오히려 즉시 미신적인 예배에 빠져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그 위험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교회가 그것을 고의적으로 사용한다고 생각할 때, 주께서 그 말씀으로 성별(圣别)하신 바 살아 있는 상징 이외의 어떤 형상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교회의 신성에는 전적으로 부적당하다고 생각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례와 성찬과 다른 의식들이다. 이것들은 인간의 지능으로 날조된 어떤 형상물 이상으로 우리의 눈을 강력하게 붙잡으며 생생하게 감동을 주는 것이다.
보라! 교황주의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게 되면, 어떤 것을 가지고도 대신할 수 없는, 곧 비교할 수 없는 소위 형상물들의 혜택을 찾게 될 것이다.
14. 니케아 회의(787년)에서의 형상물에 대한 유치한 논쟁
이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했다고 생각하지만, 니케아 회의(Nicene Council)가 내 주의를 끌기 때문에 다소라도 이에 대해서 더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기서 말하는 회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소집했던 저 가장 유명한 회의가 아니라, 이레네 황후(Empress Irene)의26 명령과 그 후원하에 800년 전에 개최 된 회의를 말한다. 이 회의에서 교회당 안에 형상을 설치할 뿐만 아니라 이 형상물에 예배까지 드리도록 결정하였던 것이다.27 내가 무엇을 말하건 이 회의의 권위는 반대편에 유리한 편견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야기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보다는 오히려 형상물에 더 큰 애착심을 가진 자들의 그 발광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하는 욕망만큼 나를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도록 하자. 오늘날 형상물의 사용을 옹호하는 자들은 니케아 회의가 그들을 지지한다고 끝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Carolus Magnus)의 이름으로 나온 반박서가 있는데 이 반박서는 그 문체로 보아 그 당시에 저술된 것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28
여기에 당시 그 회의에 참석했던 감독들의 의견과 그들이 사용한 증거들이 기술되어 있다.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John)은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라고 말하고(창 1 : 27),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형상물을 가져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또 그는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네 얼굴은 아름답구나"(아 2 : 14)라는 이 성구는 우리에게 형상물을 권하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는 마땅히 형상물을 제단 위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마 5 : 15)라는 말씀을 인용하였다. 더욱이 어떤이들은 형상들을 우러러보는 일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시 4 : 6)라는 시편의 말씀을 인증하였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비교, 강조하기도 하였다. 즉 족장들이 이방인의 제물을 사용한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의 우상 대신 성자들의 형상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여호와여 내가 주의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거하는 곳을 사랑하오니"(시 26 : 8)라는 말씀을 곡해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교묘한 것은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요일 1 : 1)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들어서만이 아니라 형상물들을 정관(静观)함으로써 알게 된다는 것이었다. 데오도투스(Theodorus) 감독도 이와 비슷한 통찰력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즉 "하나님은 성도들 안에서 찬양을 받으신다"(불가타역, 시 67 : 36)고 하였고, 다른 곳에서는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불가타역, 시 16 : 3)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틀림없이 형상물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들의 어리석음이야말로 혐오스러울 정도여서 그것들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조차 수치스럽게 생각된다.
15. 성경 본문에 대한 엉뚱한 오용(误用)
그들은 예배에 대해서 논할 때에는 반드시 야곱이 바로 왕을 축복한 것(창 47 : 10), 야곱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창 47 : 31, 히 11 : 21)한 것, 야곱이 스스로 세운 돌비에 기름 부은 것 등을 들추어낸다(창 28 : 18). 그러나 이들 중 세 번째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성경의 의미를 왜곡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욱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였다.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 : 5), "그 성산에서 경배할지어다"(시 99 : 9), "백성 중 부한 자도 네 은혜를 구하리로다"(시 45 : 12). 이 여러 구절들은 그들에게는 가장 적절하며 결정적인 구절들로 생각되었다. 만일 누가 형상의 옹호자들을 어리석은 자로 조롱하려고 한다 해도 아마 이 이상 더 그 어리석음을 들 수 있었을까? 미라(Mira)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의심의 여지도 제거하기 위해 그의 부감독의 꿈에 의해 형상물 숭배의 타당성을 확신하였는데, 그는 마치 그것을 직접 하늘로부터 받은 계시나 되는 것처럼 신중히 다루었다. 이제 형상물의 조장자(助长者)들은 우리에게 그 니케아 회의의 결정을 역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존경할 만한 교부들이 성경을 그렇게 유치하게 다루고 불경건하고 악랄하게 찢어 놓고도 자신의 신용을 전적으로 상실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16. 형상물에 대한 모독적이며 충격적인 주장
나는 이제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들이 이 가공할 만한 신성 모독을 감히 입 밖에 토해 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혐오를 가지고 그들에게 대항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악한 광태가 공적으로 폭로되고, 교황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고대의 주장들이 적어도 형상 예배로부터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모리의 감독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Bishop of Amoriurm)는 형상 예배를 싫어한 사람들에게 파문을 선언했다. 어떤 이들은 희랍과 동방 나라가 당한 일체의 재난은 형상 예배를 하지 않은 죄 탓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선지자들과 사도들과 순교자들의 시대에는 형상이 일체 없었는데 이들은 대체 무슨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만일 사람들이 황제의 상(像) 앞에 분향을 한다고 하면 성자들의 상에는 더욱더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부언하였다. 키프러스 섬의 콘스탄스의 감독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는 형상물을 경건하게 받아들인다고 공언하고, 앞으로는 생명의 원천이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똑같은 예배와 영예를 이 형상물에게 드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와 같이 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을 파문하고 마니교도나 마르키온과 동류로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이것이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의견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은 모두 합심해서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실로 동방 교회의 사절인 요한은 이에 열중한 나머지 형상 예배를 거절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 도시에 매음굴을 허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만장 일치로 모든 이단자보다 사마리아인들이 더 나쁘고, 이들 사마리아인들보다는 형상 반대자들이29 더 나쁘다고 결정하였다. 더욱이 그들은 이 소극(笑剧)이 박수 갈채 없이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30 다음과 같은 한 문구를 첨가하였다. 곧 "그리스도 상을 가지고 그것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기뻐 날뛰어라"라는 구절이었다.31 그러면 그들이 하나님과 인간을 동시에 속이려고 사용한 라트리아(la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어디에 있는가? 이 회의는 예외 없이 형상물을 살아 계시는 하나님과 동일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제 12 장
하나님은 우상과 구별되며 따라서 하나님만이 완전한 경배를 받으실 수 있다
1. 참된 종교는 우리를 유일신이신 하나님께 결속시킨다
더우기 우리는 이 책 첫머리에서1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냉랭한 공론(空论)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수반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드리는 방법에 대해서도 취급하였는데, 이것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 더욱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2 현재로서는 다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간단히 반복하고자 할 뿐이다. 즉 성경이 유일신을 말할 때에는 언제나 그 이름만 가지고 논쟁하지 않고, 하나님의 신성에 속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다른 것에 귀속 시켜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것으로 순수한 종교와 미신이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는 것이 명백해진다. 의심할 여지 없이 "종교"를 의미하는 헬라어 유세베이아 역시 정당한 예배를 뜻한다. 왜냐하면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는 맹인까지도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예배를 피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법칙을 준수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Cicero)는 "종교"(religion)라는 말을 아주 유식하게 렐레게레(relegere)라는 라틴어에서 끌어냈지만,3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부자연스럽고 당치 않은 것이다. 그는 선량한 예배자는 자주 읽고 또 읽어서 참된 것을 성실하게 숙고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오히려 방종과 대치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이 있는 것은 닥치는대로 다 생각 없이 그대로 붙잡고, 여기 저기 배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건이란 것은 확고한 기반위에 서기 위해서 적당한 한계 내에 스스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신이라는 말도 역시 규정된 방법과 질서에 만족하지 않고 쓸데 없는 수많은 공허한 것들을 모아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더 이상 어의(语义)를 생각하는 일을 그만 두더라도, 모든 시대에서 종교가 언제나 허위와 오류로 말미암아 타락되고 왜곡되었다는 것은 인정된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각없는 열심에서 나온 어떤 것을 허용한다고 해도 미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꾸며대는 핑계는 실로 어리석은 것이라고 결론을 짓는다. 비록 이러한 고백이 모든 사람의 입에서 나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러운 무지를 나타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이미 명시한 대로4 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존하지도 아니하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를 기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만일 인간이 자기를 가공적인 신과 혼동한다면 가혹하게 복수하시는 분이라고 선포하였다(출 20 : 5). 그래서 하나님은 인류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 합리적인 예배를 제정하셨다. 하나님은 율법에 다음 두 가지를 포함시키셨다. 첫째는 신자들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자신이 그들의 유일한 율법 수여자가 되게 하신 것이요, 둘째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당연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예배하는 규범을 제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그 용도와 목적이 다양하기 때문에, 앞으로 적절한 곳에서 이를 논하려고 한다.5 현재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다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한 굴레가 인간에게 씌어져 저들로 하여금 악한 예배에 빠지지 못하게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앞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하나님의 신성의 고유한 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께 귀속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영광은 박탈당하고 그에 대한 경의는 더렵혀진다는 사실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미신이 농간을 부리는 그 교활함에 대해 더욱 조심스럽게 경계하며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로 외관상으로 미신은 지고하신 하나님을 버릴 만큼 다른 신들에게 기울어지거나 또는 하나님을 다른 신들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하시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미신은 하나님에게 최고의 지위를 허용하면서도, 수많은 저급 신들로 둘러싸고는 이 저급신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기능을 행사하게 한다. 이렇게 은밀하게 또는 교활한 방법으로 해서 전적으로 한 분에게만 있어야 할 하나님의 영광은 여럿으로 조각이 나버리게 되었다.6 이와 같이 옛날에는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무수한 신들을 신들의 아버지와 지배자 밑에 두었다. 그리고 이 신들 각자는 그 서열에 따라 최고신과 함께 천지를 통치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세기 전부터 이 세상을 떠난 성자들이 하나님과 대등한 위치로 높여져서, 하나님 대신에 영광과 기도와 찬양을 받게 되었다. 실로 우리는 이러한 혐오스런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위엄이 그 빛을 잃게 되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그 위엄이 대부분 짓밟히고 소멸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최고의 권능에 대해서는 빈약한 의견을 다소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한편 우리는 그런 속임수에 넘어가 여러 신에게 이끌려 가는 것이다
2. 차이점이 없는 구별
사실상 그들이 말하는 소위 라트리아(lstria, 예배)와 둘리아(dulia, 봉사)의 구별은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천사와 죽은 사람들에게 드려도 아무 죄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려고 고안된 것이다.7 왜냐하면 교황주의자들이 성자(圣者)에게 돌리는 영광은 실로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로 그들은 전혀 차별 없이 하나님과 성자들에게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비난받을 때에는 예배(latria)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하나 상처를 받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고 우물쭈물 변명한다. 그러나 문제는 말에 관계된 것이 아니라 예배라는 사건 그 자체에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문제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무시하는 자들을 누가 용납하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그들의 구별은 마침내 하나님께만 "예배"(cultus)드리고, 다른 것에는 "봉사"(servitium)한다는 것으로 요약이 된다. 헬라어의 "라트레이아"(latreiva)는 라틴어의 "쿨투스"(cultus)와 같은 것을 뜻하고, "두레이아"(douleiva)는 "세르비투스"(servitus)를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러한 구별이 자주 등한시되었다. 설사 이 구별이 변치 않는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이 두 말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서는 문제삼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곧 두레이아(douleiva)는 봉사를 의미하고, 라트레이아(latreiva)는 예배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봉사가 예배보다 더 범위가 크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존경하기를 원하면서도 그를 봉사하는 일에 있어서는 어려울 때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자에게는 보다 큰 것을, 하나님께는 보다 적은 것을 돌린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대의 많은 저술가들은 그러한 구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구별이 적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아무 가치도 없다고 모든 사람이 생각한다고 하면,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3. 형상 숭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는 행위이다
그러한 세밀한 구별은 그만두고 문제 자체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깨우침을 받기 전까지는 어떠한 처지에 있었던가 함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dulia)하였더니"(갈 4 : 8)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라트리아" (latria)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미신이 변명될 수 있겠는가? 분명히 그는 사악한 미신에 "둘리아"(dulia)란 명칭을 붙임으로써 "라트리아"(latria)라는 말을 사용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 "둘리아"(dulia)를 정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 : 10)고 하는 이 말씀의 방패를 가지고 사탄의 공격을 물리치셨을 때에도 "라트리아"(latria)라는 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8 왜냐하면 사탄이 그리스도에게 요구한 것은 다만 엎드려 경배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9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이 천사 앞에서 무릎을 끓었다는 이유로 천사의 책망을 받은 일이 있는데(계 19 : 10, 22 : 8-9),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영광을 천사에게 드리고자 하였을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종교와 결합된 경건한 행위는 어떤 것이라도 신적인 경향을 띠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요한은 하나님의 영광을 손상시키지 않고 천사에게 무릎 꿇어 "절(knelt)"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실로 우리는 자주 인간이 예배를 받는 일에 대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행위는 말하자면 세속적인 경의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종교는 이와는 다른 의도를 지니고 있다. 종교가 일단 예배 행위와 결합되면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고넬료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다(행 10 : 25). 그의 경건은 하나님 이외의 존재에게 최상의 경배를 드릴만큼 그렇게 불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베드로 앞에 "엎드리어 절한 것"은 분명히 하나님 대신에 그를 예배하려는 의도에서 한 것이 물론 아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고넬료의 그러한 행동을 적극적으로 금하였다. 그것은 무엇 때문이었던가? 이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와 인간에 대한 예배를 분명히 구별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속하는 것을 무차별하게 피조물에게 옮기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모시기를 원한다면, 그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과, 그에게 속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스가랴는 교회의 회복에 관해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홀로 하나"라는 것을 명백하게 주장하였다(슥 14 : 9). 이 말이 하나님은 우상과 같은 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나님께서 어떠한 예배를 원하시는가에 대해서는 후에 적절한 곳에서 거론하게 될 것이다.10 왜냐하면 하나님은 율법으로 선과 의를 규정하고, 따라서 인간이 제멋대로 예배를 만들어 내지 못하도록 일정한 규범에 그들을 붙들어 두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문제를 뒤섞어 독자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이 올바른 일로 생각되지 않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겠다. 다만 어떠한 경건의 의식이 한 분 하나님 외에 다른 무엇에 드려지게 될 때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훼방하는 신성모독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미신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영광을 태양과 별들, 그리고 우상을 위해 생각해 냈다. 다음에는 야심이 뒤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은 것으로 썩어 없어질 인간을 장식하고 신성한 것은 모두 더럽히고 말았다. 그리고 최고의 존재를 예배하는 원리가 비록 남아 있다고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수호신들, 저급신들, 또는 죽은 영웅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제물을 바치는 것이 일반적인 습관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큰 오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하나님만이 독점하고 있는 것을 수많은 우상들에게 돌리고 있는 것이다.
제 13 장
성경은 창조 이후 하나님은 한 본체이시며 이 본체 안에 삼위(三位)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르친다1
(정통 교부들이 삼위일체 교리에 사용한 술어. 1-6)
1. 하나님의 본성은 불가해하며 영적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한하시며 영적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이는 일반 대중의 망상을 일축할 뿐만 아니라 세속 철학의 그 교묘한 이론을 논박하기에도 충분하다. 고대의 어떤이는 "우리가 보는 것과 또 보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시다"2라고 그럴 듯한 말을 했다. 이 말에 의하면 그는 세계의 모든 부분에 신성(神性)이 침투해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의 생각을 신중하게 하시기 위해 자신의 본질에 대하여 충분히 나타내지는 아니하셨을지라도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두 특성을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은 상상을 제거하시며 인간 마음의 교만함을 억제하시는 것이다. 확실히 하나님의 무한성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어 우리의 감각으로는 하나님을 측량할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영적인 본성은 실로 자신에 대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육적인 상상도 우리에게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하는 곳이 하늘나라에 있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그는 불가해하신 분이시면서 또한 땅 위에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우둔하여 완전히 세상에 빠져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우리들을 세상 위로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여기에서 마니교도들의 오류가 실패로 돌아가는데, 저들은 두 원리를 가정함으로써 악마를 하나님과 거의 동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3 이러한 오류가 하나님의 단일성을 파괴하며 그의 무한성을 제한한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로 저들이 감히 성경의 확실한 증거를 남용할 수 있었던 것은 저들의 무지 때문이었다. 이는 오류 그 자체가 저주받을 광란에서 생긴 것과 같은 것이다. 신인동형동성론자(神人同形同性论者)들은 하나님을 육체적인 존재로 상상하였는데, 이는 성경이 하나님을 입, 귀, 눈, 손, 발과 같은 것들을 가지신 분으로 자주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연유한다.4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해서도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아무리 지능이 낮은 자라도, 유모가 어린아이에게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그와 같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이해 못할 자가 과연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러한 표현 방식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분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우리의 미약한 수용 능력에 알맞게 적응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를 수행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 높은 위엄에서 훨씬 밑으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2.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우상과 좀더 정확히 구별하시기 위해 또 다른 특성을 통해 자신을 보여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동시에 명백하게 자신이 삼위로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러한 진리를 파악하지 못할 때, 우리의 머리에는 단지 하나님이라는 공허한 이름만이 맴돌 뿐 결국 참되신 하나님은 배제하게 될 것이다. 더우기 아무도 하나님께서 세 분이시라는 공상을 하지 못하게 하며,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5 여기서 우리는 일체의 오류에서 막아 줄 간명하고도 알기 쉬운 정의를 찾아야 하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위"(位, Person)6라는 말이 인간의 고안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여 맹렬히 비난하고 있으므로, 먼저 그와 같은 비난이 참으로 타당성이 있는가에 대하여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사도는 성자를 가리켜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히 1 : 3)고 하였는데, 그는 이때 틀림없이 성부를 성자와 다른 어떤 실재로7 보았다. 왜냐하면, 본체(hypostasis)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한다는 것은(어떤 이들이 해석한 대로, 마치 밀초 위에 찍은 도장과 같이 그리스도라 자기 안에서 성부의 본체를 재현하였다고 하는 것은) 조잡할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 안에 모든 것을 포함 하시되 부분적으로나 파생적으로가 아니고 아주 완전하게 포함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하나님의 본질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당치 않을 뿐만 아니라 불합리한 일이다. 그러나 성부는 비록 자신의 고유한 특성에 있어서는 구별되었지만 성자 안에서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그가 성자 안에서 자신의 본체를 나타내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충분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같은 구절에서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히 1 : 3)라는 말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리는 사도의 이 같은 말을 통하여, 성자 안에 있는 바로 그 본체가 성부 안에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성자에게도 본체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성자를 성부와 구별시켜 준다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논리가 성령에게도 적용시킬 수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곧 성령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명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성령을 성부와 구별된 분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의 구별이 아니다. 본질을 다양화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그대로 믿는다고 하면, 하나님께서는 세 본체가 있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은 이 말을 "위"(位, person)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이와 같은 명백한 문제를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까다로운 처사요 심지어는 완고한 일로 생각된다. 구태여 이 말을 직역하기 원한다면 "실재"(subsistence)라는 말로 부를 수는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와 똑같은 의미로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위"(位)라는 말은 라틴 교부들만이 아니라 희랍의 교부들도 사용하였는데, 아마 이 교리에 동의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prosopa, 얼굴)7a가 존재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희랍의 교부들이나 라틴 교부들은 비록 용어상으로는 어떤 차이점이 있겠지만, 그 실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완전히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3. "삼위일체"와 "위"(位)라는 같은 표현은 성경 해석에 용이하게 하므로 인정할 수 있는 표현이다
이단자들은8 "위"라는 말에 대하여 악담을 토하고 또한 어떤 까다로운 사람들은9 그 말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 그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부르짖고 있지만, 그러나 삼위가 존재한다는 것과 이 삼위의 각자가 바로 완전히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여러 분이 아니고 한 분이시라는 우리의 확신을 결코 허물어뜨릴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하며 성경이 보증하는 바를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는 그 용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얼마나 사악한 일인가?
분쟁과 논쟁의 온상이 될지도 모르는 외래어를 유포시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성경의 테두리 안에 우리의 사상과 용어를 제한시키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이라고 저들은 주장하고 있다. 왜냐하면, 외래어가 유포되면 우리는 말의 논쟁으로 극도로 지치게 되고 언쟁으로 진리를 상실하게 되어, 마침내는 추악한 말다툼으로 사랑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한 마디 한 마디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말과 다르다고 해서 모두 외래어라고 한다면, 그들은 실로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여 성경의 구조에 맞추지 않은 성경 해석을 전적으로 정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저들이 말하는 소위 "외래어"라는 것이, 신기하게 고안되어 미신적으로 변호되고 계몽보다는 논쟁을 일으키며 불순하고 무익하게 사용되고 또 거친 말투가 경건한 자들의 귀를 거스리게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 말씀의 단순함에서 떠나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진심으로 저들의 건전한 의견을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 때에도 하나님에 관하여 생각할 때와 마찬가지로 경건한 마음으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리석으며,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어떤 표준이 유지되지 않으면 안된다. 즉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의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고, 마음의 생각과 입으로부터 나오는 일체의 말을 여기에 순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성경의 내용들을 보다 명백한 말로 설명하는 것을 누가 못하게 하겠는가? 그러나 그 설명은 성경 자체의 진리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적당한 때에 사용해야 한다. 이 일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실례가 충분히 있다. 더욱이 교회가 "삼위일체"와 "위"라는 말을 전적으로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된 것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이들 용어가 새로운 것이라 하여 비난한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은 마땅히 진리의 빛을 무가치하게 만든 자로 정죄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진리를 쉽고 명백하게 하는 그 용어를 그는 비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교회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나 "위"(位)와 같은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회피하는 거짓 비난자들을 대항해서 진리를 주장하게 될 때에는 이러한 신기한 용어(만일 이와 같이 불려져야 한다면)는 특히 유용하다. 오늘날 우리는 순수하고 건전한 교리의 적들을 물리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인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교활한 뱀들을 용감하게 추적하여 붙잡아 짓밟아 버리지 않는 한, 비뚤어지고 사악한 마음의 소유자들인 저들은 교묘하게 빠져 달아나 버린다. 그리하여 고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논쟁에서 그릇된 교리를 대항하여 싸울 때에, 오류를 감추기 위해 장황설을 늘어놓는 불경한자들이 그 어떤 사악한 술책도 부리지 못하도록 그들의 의견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우스(Arius)는 성경의 명백한 증거를 대항할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는 마치 그가 당연한 일을 하기나 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도 다른 피조물과 같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기를 쉬지 않고 말하였다. 인간의 이와 같은 교활함을 인간들을 그 도피처에서 끌어내기 위해 고대의 교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는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며 그 본질이 성부와 동일하다고 선언하였다.
아리우스파가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동일본질)10라는 말을 극단적으로 증오하고 저주하기 시작한 이 사실에서 저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실되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고백하였더라면, 그들은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 본질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누가 감히 이 선한 사람들을, 사소한 용어 때문에 격렬한 논쟁을 일으키고 교회의 평화를 깨뜨렸다는 이유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논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 단순한 용어가 바로 순수한 신앙을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더럽히는 모독적인 아리우스파와의 사이를 구별지은 것이었다. 그 후에 사벨리우스(Sabellius)라는 사람이11 일어나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거의 중요하지 않다고 하면서, 이 명칭들은 구별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여러 속성을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이러한 종류의 속성은 아주 많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가 논쟁에 올랐을 때 그는 성부도 하나님이요, 성자도 하나님이며 성령도 또한 하나님임을 인정한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하나님은 다만 능력이시고 공의로우시며 지혜로운신 분에 불과하다고 말하여 위의 고백을 쉽게 회피해 버렸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성부란 성자를 말하며 성령은 성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아무런 순서나 구별도 없다고 하는 또 하나의 옛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중심에 경건을 소유한 당시의 훌륭한 학자들은 이 사벨리우스의 사악함을 무너뜨리기 위해, 한 하나님 안에서의 세 특성의 존재가 참되게 인정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사벨리우스의 그 사악한 교활을 대항하여 명백하고 단순한 진리로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한 분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 같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유일성 안에 삼위가 계신다는 것을 진심으로 확언하였다.
5. 신학적 용어의 한계성과 필요성
그러므로 이러한 용어들이 근거 없이 경솔하게 창안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들 용어들을 배척함으로써 경솔하고 교만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실로 나는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이시나 성자는 성부가 아니며 성령 또한 성자가 아니며 그들 각자는 서로가 어떤 특성에 의하여 구별된다고 하는 이 한 점에 일치하게 된다면, 이 용어들은 매장시켜도 좋다고 생각한다.
실로 나는 단순한 용어에 집착하여 완강하게 싸울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경건하게 이 문제를 취급한 고대의 교부들도 서로가 일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 개인적으로도 일관된 견해를 유지하지 못한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예로, 힐라리(Hilary)는 여러 회의에서 채택된 조문(条文)들을 무어라고 변명했던가?12 어거스틴은 얼마나 자유스럽게 이러한 문제들을 다루었던가?13 희랍 교부들과 라틴 교부들 사이에는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던가? 그러나 이 여러 차이점들 중, 여기서는 다만 한 가지 실례만을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라틴 교부들이 "호모우시오스"라는 말을 번역 하고자 하였을 때, 그들은 성부와 성자의 실체는 하나라는 것을 가리키는 "동일 본질"(consubstantial)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이리하여 "실체"(substance)라는 말을 "본질"(essence)이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였다.
제롬(Jerome) 역시 다마수스(Damasus)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세 실체가 있다는 말은 힐라리의 글에서 백 번 이상이나 발견하게 될 것이다.14 그러나 제롬은 "본체" (hypostasis)라는 용어에 대하여 얼마나 혼란을 일으켰던가!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데는 어떤 독(毒)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용어를 경건한 의미에서 사용했다 해도 그는 그것이 부적당한 표현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었을 것이다. 비록 그가 자신이 미워하였던 동방 교회의 감독들을 아무 근거도 없이 고의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비방하기보다는 오히려 이것을 성실하게 주장하였다 해도 그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확실히 모든 세속 학파에서 "우시아"(ousia)가 본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데는 공정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그는 보았는데15 이러한 견해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용법에 의해 끊임없이 반박되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하여 더욱 온건하고 정중하였다. 그는 "히포스타시스" (hypostasis)라는 말이 이런 의미에서 라틴 교부들에게는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희랍 교부들이 사용한 어법을 반대하지 않고 오히려 희랍 교부들의 용어를 모방한 라틴 교부들을 관대히 허용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16 그리고 소크라테스(Socrates)가 그의 삼부사(三部史, Tripartite History) 제6권에서 "히포스타시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은, 그것이 무지한 인간들에 의해 이 문제에 잘못 적용되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17 그러나 이미 위에서 말한 힐라리는, 경건한 마음속에 간직해 두어야 할 것들을 이단자들이 그들의 사악한 행위로 말미암아 인간 언어의 위험에까지 빠뜨렸다고 하여, 그들의 커다란 범죄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은 분명히 불법을 행하는 것이고,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한 것이며, 용납해서는 안 될 것들을 가정한 것이라고 솔직하게 공언하였다. 조금 후에, 그는 자신이 대담하게 새 용어를 제시한 데 대하여 충분히 변명하고 있다. 즉 그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고 하는 자연적 명칭들을 제시한 후에 즉시 첨가하여 말하기를, 이들 명칭 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구한다는 것은 곧 언어의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감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이해력의 한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18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갈리아(Gaul)의 감독들을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모든 교회가 받아들인 그 고대의 아주 단순한 신앙고백 이외에는 어떠한 신앙고백도 만들지 않았고,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며 또한 알지도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9 그리고 어거스틴의 변명도 이와 비슷한 데가 있다. 즉 그는 이와 같은 중대한 문제를 논하기에는 인간의 말이 빈곤하기 때문에 "히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부득이 사용하게 되었으나 이러한 용어로는 하나님께서 어떠한 분이시라는 것을 설명할 수 없고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것을 묵과하지 않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20
그리고 이 거룩한 교부들의 신중함은, 우리가 받아들인 용어에 대해서 보증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하여 마치 검열관과 같이 당장 독필(毒笔)을 휘두르지 못하게 하며 혹독하게 비난하지 못하게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저들이 교만과 완고함과 악의에 찬 교활에서 그렇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가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필요성을 그들로 하여금 신중히 고려하게 하며, 점차로 그 용어의 유용함에 익숙해지게 하자. 그들이 한편으로는 아리우스파에게, 다른 한편으로는 사벨리우스파에게 대항해야만 할 때, 논쟁을 회피할 기회가 없어지게 되면 자신이 아리우스의 제자나 사벨리우스의 제자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지 않도록 조심하게 하자.21 아리우스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는 창조되었으며 시초(始初)를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가 "성부와 하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비록 어떤 특수한 특권에 의해서라고는 하지만 다른 신자들처럼 성부에게 연합되었다고 은밀하게 자기 제자들의 귀에 속삭이기도 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그 본질이 동일하시다고 주장해 보라. 그러면 이 변절자의 가면을 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아니다. 사벨리우스는 성부, 성자, 성령의 명칭은 신격의 구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에게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면, 사벨리우스는 그것이 곧 세 신(神)을 말하는 것이라고 외칠 것이다. 하나님의 한 본질 안에 삼위가 있다고 주장하자. 이것은 바로 성경의 주장하는 바를 한마디로 말하는 것이 될 것이며, 또한 이러한 주장은 그의 공허한 다변(多辩)을 억제하게 될 것이다. 실로 어떤 사람들 가운데는 미신적 관습에 사로 잡혀 이 용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가 있겠지만 성경이 한 하나님이라고 말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본체가 하나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성경이 한 본질 안에 셋이 있다고 할 때에는 그것이 삼위일체의 세 위격을 의미한다는 것임을 아무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용어들이 아무런 관계없이 정직하게 고백된다면, 우리는 구태여 용어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줄로 안다. 그러나 용어에 대하여 집요하게 논쟁하는 사람들이 어떤 숨은 독소를 마음에 품고 있다는 것을 나는 오랜 동안 많은 경험을 통해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모호한 말을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고의적으로 그들에게 도전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이다.
6. 가장 중요한 개념의 뜻
그러나 나는 이제 용어에 대한 논의는 그만 두고 문제 자체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즉 내가 말하는 "위"라는 말은 하나님의 본질에 있어서의 한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은 다른 실재와 서로 관계를 가지면서도 교통할 수 없는 특성에 의하여 저들과 구별된다. 우리가 의미하는 실재라는 말은 본질이라는 말과는 다른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다.22 만일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일 뿐 아무런 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 1 : 1)라고 한 요한의 말은 잘못된 말이 될 것이다. 그 즉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첨가하였는데, 그는 여기서 우리에게 본질의 단일성을 상기시켜 준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부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실재의 관념이 명백해 진다. 즉 실재는 본질과 밀접하게 결속되어 있어 본질과 구별될 수는 없지만, 그러면서도 본질과 구별되는 특수한 표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 실재는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특성에 의하여 서로 구별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관하여 단순하게 또는 막연하게 언급할 때에는 이 말은 성부에 못지 않게 성자와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와 성자가 대조될 때에는, 언제나 각자의 특성에 의해 상호 구별되는 것이다. 셋째로, 각자에게 고유한 것은 어떤 것이라도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성부에게 속한 구별의 표지는 성자에게 속하거나 성자에게 옮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있다고 하는 터툴리안(Tertullian)의 정의를23 올바르게만 이해한다면 나는 불쾌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성자의 영원한 신격. 7-13)
7. 말씀의 신격
그러나 말을 더 발전시켜 나가기 전에, 나는 여기서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증명해야 하겠다. 그리고 나서 각자가 서로 어떻게 다른가의 차이점을 살피고자 한다.
확실히,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제시해 줄 때에 그 말씀을 다만 공중에 던져진, 하나님 바깥 편에서부터 나온 단지 일시적인 덧없는 소리로만 상상하는 것과 또 족장들에게 주신 말씀과 모든 예언이 다 이런 종류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불합리한 어리석은 일이다.24 오히려,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며 여기서부터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예언이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증거한 대로, 사도들(벧전 1 : 10-11)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위해 일한 후대의 모든 사역자들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예언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하였기 때문이다. 실로 그리스도께서 아직 육신으로 나타나지 않으셨던 까닭에, 우리는 당연히 말씀이 창세 이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것으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영감을 준 영(靈)이 말씀의 영이었다고 하면, 그 말씀은 진실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우주 창조 기사에서 이 말씀을 중재자로 제시함으로써 이를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창조 사역에서 이것이 있으라, 저 것이 있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모세는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는데(창 1장), 이 사실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광이 그의 형상에서 찬란하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남의 허물 찾기를 좋아하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은 "말씀"은 명령이나 계명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논의를 쉽게 피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보다 훌륭한 해석가들인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지음을 받았으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셨다고 가르친다(히 1 : 2-3 참조). 여기에서 우리는 말씀이 성부의 영원하시며 본질적인 말씀이신 성자의 명령 혹은 위임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실로 지혜롭고 진실한 사람은 솔로몬의 다음과 같은 말이 조금도 모호한 데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즉 솔로몬은, 지혜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와서 만물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을 통할(统辖)하였다고 소개한 것이다(잠 8 : 22). 그러므로 이를 하나님의 의지의 일시적인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분별없는 천박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자신의 계획과 심지어는 한층 더 은밀한 것까지도 나타내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 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하는 말씀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태초로부터 성부와 더불어 계속 일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써 모세가 간략히 언급한 것을 한층 더 명확하게 설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 사역에 참여케 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양자의 공유가 되게 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다. 그러나 요한은 이에 대해서 어느 누구보다도 명확하게 말하였는데 곧 "말씀"을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고 동시에 만물의 근원이시며 성부와 연합되어 있는 분이라고 선언하였던 것이다(요 1 : 1-3). 요한은 이 말씀에 견고하고 영원하신 본질을 부여하고 특수한 것을 귀속시켰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우주의 창조주가 되셨는가를 명백히 보여 주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로 불리는 것이 옳은 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 본체적인 말씀을 모든 말씀의 계시의 원천으로서 가장 높은 위치에 두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이 말씀은 불변하시며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하시고 동일하시고 또한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8. 말씀의 영구성
여기 몇몇 개들이 짖고 있는데, 그들은 말씀의 신성을 공공연하게 감히 부인하지 않지만 은밀히 그의 영원성을 훔치고 있다. 그들은 우주를 창조하시고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입을 여셨을 때 비로소 이 말씀이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25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경솔하게 하나님의 본체 안에 일종의 새로운 무엇이 생긴 것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외부적인 사역과 관계되는 여러 명칭들은 창조 사역이 있은 후에 그에게 적용되었다(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로 불린 것). 그러나 하나님에게 새로운 무엇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말하는 그런 명칭은, 경건한 마음은 인정도 용납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무슨 우발적인 일이 있었다고 하면 다음과 같은 야고보의 주장은 땅에 떨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 : 17)고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히 하나님이시요 후에는 만유의 창조주가 되신 바로 그 말씀이 시초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용납 못할 일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고 모세가 말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하나님 안에 어떠한 말씀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어리석은 말은 없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떤 시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추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는 전혀 다르게 결론을 지으려 한다. 즉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 1 : 3)고 말씀하신 그 순간에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서 뚜렷하게 드러났지만 그러나 말씀은 벌써 오래 전에 존재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약 얼마나 오래 전이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시작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 사람은 알게 될 것이다. 주께서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 : 5)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은 시간의 어떤 기간을 정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요한은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말씀이 우주 창조에 참여하기 전에 벌써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 : 1)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말씀은 시간의 시작 저편에서 벌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영원토록 그와 더불어 함께 존재하신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써 그의 영원성과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은 입증이 되는 것이다.
9.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더 나아가 나는 여기서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는 구속의 문제를 다룰 때까지 미루어 두고자 한다.26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신 바로 그 말씀이시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증거를 소개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된다. 시편 45편에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시 45 : 6)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27 이를 왜곡한 채 "엘로힘"(Elohim)이라는 명칭을 천사들과 최고의 권력자에게도 적용시켰다. 그러나 피조물을 위해 영원한 보좌가 세워진다고 하는 구절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하나님으로 불릴 뿐만 아니라 또한 영원한 지배자로도 불리는 분에게만 합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명칭은 어떤 부가어(附加语)가 없이는 결코 아무에게도 적용되지 않았는데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너로 바로에게 신이 되게 하였은즉"(출 7 : 1)이라고 하신 경우이다. 어떤 이들은 "바로에게"를 소유격 "바로의"라고 읽는데, 그것이야말로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비범한 탁월성 때문에 뛰어난 것이 자주 "신적"인 것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그러한 해석은 곤란하고 무리한 해석이며, 더욱이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해석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이 완고하여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의 특징적인 표지인 지상 대권을 가진 분으로 아주 분명하게 공표하였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 이름은……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사 9 : 6).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이에 반대하여, "이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가 그를 부르시는 이름이라"고 고쳐 읽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들은 성자를 다만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으로만 부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확립시키기 위해 명백한 표지들로 그리스도를 장식하는 것이 이 선지자의 의도일 뿐인데 이 구절에서 그렇게 많은 칭호들을 성부이신 하나님께 쌓아 올린다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조금 전에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리신 것과 같이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렘 23 : 5-6, 33 : 15 -16)고 한 예레미야서의 이 한 구절보다 더 명백한 말씀은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다른 명칭들은 다만 칭호에 지나지 않으며 입에 올리기에도 황송한 "여호와"라는 명칭만이 그의 본질을 나타내는 데 실질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일하신 성자만이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주지 아니하리라"(사 42 : 8)고 선언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실로 유대인들은 모세가 자신이 세운 제단에 이 명칭을 붙였고 에스겔도 새 예루살렘 성에 이것을 붙였다고 지적함으로써, 여기서도 애써 피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제단이 세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들어올리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이 예루살렘에 붙여진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 삼마라 하리라"(겔 48 : 35). 그리고 모세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출 17 : 15) 표현하였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다른 구절에 대하여는 더 큰 논전이 벌어지게 되는데, 예레미야는 "그 성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입으리라"(렘 33 : 16)고 하는 구절에서, 위와 똑같은 이름을 예루삼렘에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증거는 우리가 옹호하고 있는 진리를 모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더욱 지지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이 예언자가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참되신 여호와시오, 의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증거하였고, 여기서는 하나님의 교회가 그 이름을 영화롭게 할 수 있도록 이것을 명백하게 이해해야 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구절에서는 의의 근원과 원천이 설명되었고, 나중 구절에서는 의의 결과가 덧붙여 설명된 것이다.
10. 영원한 하나님의 천사
그러나 만일 유대인들이 이와 같은 증거로도 만족하지 못한다고 하면,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어떤 교묘한 이론을 내세워 피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거룩한 조상들에게 나타난 어떤 천사는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삿 6 : 11, 12, 20, 21, 22, 7 : 5, 9). 만일 이것이 천사의 임무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난제는 결코 풀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는 종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제물을 바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천사는 식물을 먹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다(삿 13 : 16). 실로 이 사실은 그가 바로 여호와라는 것을 입증한다(삿 13 : 20). 그러므로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이러한 표적을 통하여, 자신들이 본 것은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마노아는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삿 13 : 22)라고 외쳤다. 이에 대하여 그의 아내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더라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아니하셨을 것이요"(삿 13 : 23)라고 답변하였다. 이때 그녀는 자신들이 조금 전에 천사라고 불렀던 바로 그 분이 참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삿 13 : 18)라는 천사의 대답이 모든 의심을 제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아브라함이나 그 밖의 족장들에게는 나타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경배를 받은 것은 천사였다고 주장한 세르베투스(Servetus)의28 불신앙은 더욱더 가증하다 하겠다. 그러나 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은 이 최고의 천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이 말씀은 그때 벌써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다고 올바르고 지혜롭게 해석하였다.29 왜냐하면 이 말씀은, 아직은 육신을 입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기 위하여 말하자면 중보자로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사람들과의 친밀한 교제로 인해 그 분은 천사라는 칭호로 불렸던 것이다. 동시에 그 분은 자신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셨으며 하나님으로서의 형언할 수 없는 영광을 지속하셨던 것이다.
호세아도 이와 똑같은 진리를 말하였다. 즉 그는 야곱과 천사와의 씨름을 서술한 후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 : 5)고 하였다. 세르베투스는 이것을 다시 하나님이 천사의 모습을 취한 것임을 의미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마치 이 예언자가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창 32 : 29)라고 한 모세의 말을 확인하지 못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룩한 족장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 32 : 30)라고 고백하였다. 여기서 바울 역시 그리스도는 광야에 있었던 민중의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 : 4).30 왜냐하면, 그의 낮춤의 때가 아직 오지는 않았지만 그때 벌써 그 영원하신 말씀은 자기에게 정해진 직위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이제 스가랴 2장을 객관적으로 검토해 보면, 다른 천사를 파송한 그 천사가 바로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이 천사에게 지상 권능이 부여된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슥 2 : 3,9). 나는 우리의 신앙이 안전하게 채택할 수 있는 수많은 증거들을 더 이상 열거하지 않겠다. 물론 이 증거들은 유대인들의 마음에 거의 감동를 주지 못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와시라"(사 25 : 9)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말씀이 바로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해 다시 일어나신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두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에도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은,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말 3 : 1)라고 예언된 말라기서의 구절이다. 확실히 성전은 유일하시며 지고하신 하나님께 봉헌되었다. 그런데 선지자는 성전이 그리스도께 속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바로 유대인들이 항상 경배하였던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11. 신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신성 : 사도들의 증거
더우기 신약성경에는 수많은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모든 증거들을 전부 다 수집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몇 개의 증거를 간단하게 선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사도들은 이미 육신을 입으시고 중보자로 오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제시하고자 하는 증명들은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원하신 신성에 대한 적절한 증거가 될 것이다.
첫째로 특별히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예언된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었던가, 혹은 어느 날엔가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사도의 교훈이다. 만군의 주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사 8 : 14)라고 한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바울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롬 9 : 32-33).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만군의 주라고 선언한다. 다른 곳에서도 바울은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롬 14 : 10-11, 사 45 : 23)고 말한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이 말씀을 하셨고, 또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말씀을 자신 안에서 나타내 보이셨으므로, 여기에서 그가 바로 그 영광이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될 수 없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이 인용한 시편의 말씀 또한 분명히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말씀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 : 8, 시 68 : 18). 하나님께서 그 권능을 나타내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이방 나라들과의 싸움에서 당당하게 승리하게 하셨을 때, 그 위로 올라가심이 벌써 예표되었던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이 말씀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다 완전하게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요한은 이사야의 환상을 통하여 계시된 것은 성자의 영광이라고 증거하고 있다(요 12 : 41, 사 6 : 1). 물론 이사야 자신은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다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에서 사도가 성자에게 드린 하나님의 명칭들은 가장 영광스러운 것들이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1 : 26). 또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은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6 : 7)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가 이러한 명칭들을 그리스도께 적용한 것은 결코 남용이 아니다. 실로 시편에서 찬양된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께서 홀로 성취하신 것들이다. 일어나서 시온에 긍휼을 베푸신 분이 그 분이시며(시 102 : 13), 모든 나라와 모든 섬들의 지배권이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신 분이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시 97 : 1). 요한은 말씀이 항상 하나님이었다고 주장하였는데(요 1 : 1, 14), 어찌 그가 하나님의 위엄을 그리스도께 돌리기를 주저하였겠는가? 바울은 그리스도를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 : 5)이라고 불러 공개적으로 그의 신성을 주장하였는데, 어찌 그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심판대에 앉히기를 두려워하겠는가?(고후 5 : 10) 그리고 그는 자신이 이 문제에 대해서 조금도 모순이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하기 위해 다른 곳에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라고 기록하였다. 그가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면, 그는 바울이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홀로 모든 영광과 존귀를 마땅히 받아야 할 바로 그 분이신 것이다(딤전 1 : 17). 그래서 바울은 이 사실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공공연하게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빌 2 : 6-7).
그리고 요한은 불신자들이 그리스도를 이방 신이라고 트집잡을까 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요일 5 : 20)고 말하였다. 그러나 특별히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밖에 없으시다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한 한 증인에 의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하나님으로 불려야 할 것이다(신 6 : 4). 더욱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 8 : 5-6). 우리는 다시 바울에게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 3 : 16),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 20 : 28)고 하는 말씀을 듣는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바울이 전혀 인정하지 않은 제2의 신을 상상하겠는가? 그리고 경건한 사람들 모두가 이와 동일한 생각을 품고 있다는 데 대하여는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도마도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 : 28)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함으로써, 그 분이 바로 자기가 항상 예배드리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였다.
12.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사역하심 가운데 입증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 신성(神性)을 판단한다면, 한층 더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해질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태초로부터 성부와 함께 이제까지 일하신다고 말씀하시자(요 5 : 17), 주님의 다른 말씀에 대하여는 극도로 둔감했던 유대인들이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그리스도께서 신적 권능을 행사하신다고 느꼈다. 그 결과 요한은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요 5 : 18). 여기에 그리스도의 신성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는데도 이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리고 섭리와 권능으로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자신의 대권으로 만물을 지배하신 것들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만 속하는 일들이다(히 1 : 3). 그리고 그는 성부와 함께 세계 통치에 동참하실 뿐만 아니라, 피조물로서는 전혀 참여할 수 없는 다른 개개의 직무도 수행하셨다. 주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사 43 : 25)라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죄를 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그는 이 말씀에 따라 이 권세는 자기에게 속한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주장하셨으며, 이적을 통해서도 이를 증명하셨다(마 9 : 6).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사죄하시는 일을 담당하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죄권을 소유하셨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권능은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데로 결코 옮겨질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의 은밀한 생각을 살피시고 꿰뚫어 보시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리스도 역시 이 권능을 소유하고 계셨던 것이다(마 9 : 4, 요 2 : 25).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결론 짓게 된다.
13. 그리스도의 신성은 그의 이적을 통하여 입증된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이적에서 얼마나 명백하고 얼마나 확실하게 입증되어지고 있는가! 선지자나 사도들이 그리스도가 베푸신 이적과 똑같거나 그와 비슷한 이적을 행하였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사를 나누어 준 데 반하여 그리스도의 이적은 자신의 권능을 행사하셨다는 점에서, 그들의 이적과 그리스도의 이적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주님은 이적을 행하실 때, 성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가끔 기도를 하셨다(요 11 : 41).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주님 자신의 권능이 나타난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로 다른 사람에게 이적을 행할 것을 위탁하신 분이 어떻게 이적의 참된 창시자가 되지 못하겠는가? 복음서 기자가 기록한 대로,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문둥이를 고치며 귀신을 내어쫓을 권능을 주셨다(마 10 : 8, 막 3 : 15, 6 : 7). 더욱이 그들은 이와 같은 이적을 행할 때에, 그 권능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 주기 위해 이 사역을 수행하였다.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 : 6)고 말하였다. 혹 유대인들의 불신앙을 깨뜨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적을 행하셨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적들은 그리스도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따라서 그의 신성을 가장 완전하게 증거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5 : 36, 10 : 37, 14 : 11).
더우기 하나님을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의도 없고 생명도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것들을 자신 안에 소유하신다고 하면, 분명히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를 반대하여, 생명과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께로 주입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된다.31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구원 받은 분이 아니라 바로 구원 자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하면(마 19 : 17),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인간일 수 있겠는가? 나는 그리스도를 선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하지 않고, 선과 의의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 기자의 증언에 따라, 창조의 시초부터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요 1 : 4)으로 존재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와 같은 증거를 신뢰하여, 감히 우리의 신앙과 소망은 그에게 두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해서 누구든지 피조물을 신뢰한다고 하면 이는 신을 모독하는 불경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 : 1)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바울은 이와 같은 의미로 이사야서의 두 구절을 해석하였다. 곧 그 한 구절은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롬 10 : 11, 사 28 : 16)는 말씀이요, 다른 한 구절은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롬 15 : 12, 사 11 : 10)는 말씀이다. 그리고 "나를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요 6 : 47)라는 말씀이 자주 반복되고 있는데도 과연 이 문제에 대하여 더 많은 성경의 증거를 찾아야 할 이유가 있겠는가?
신앙에서 나오는 기도는 역시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이다. 어떤 무엇이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기도야 말로 특별히 하나님의 위엄에 속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지자 요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욜 2 : 32). 다른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잠 18 : 10).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므로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호와이신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스데반에게서 그러한 호소의 한 실례를 보게 되는데 그는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 : 59)라고 기도하였던 것이다. 아나니아가 사도행전에서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행 9 : 13- 14)라고 증거한 것처럼, 이와 같은 실례는 그 후 모든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신성의 충만하심이 그리스도 안에 육신으로 거하신다는 말씀(골 2 : 9)을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해, 사도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교리도 고린도인에게 소개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이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전하지 아니하였다고 고백하였다(고전 2 : 2).
하나님께서는 자신만을 아는 것으로 자랑을 삼으라고 명하셨는데(렘 9 : 24), 성자의 이름만이 우리에게 전해졌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우리의 유일한 자랑의 근거라면, 누가 감히 그분를 가리켜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할 수 있겠는가? 이 외에도 바울의 여러 서신 첫머리에 있는 인사말을 보면, 성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성자에게도 동일한 축복을 기원하고 있다(롬 1 : 7, 고전 1 : 3, 고후 1 : 2, 갈 1 : 3) 이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가 성자의 중재를 통하여 온다는 것뿐만 아니라, 성자가 성부와 동일하게 권능에 참여함으로써 성자 자신이 바로 그 모든 은사의 창시자가 되신다는 것을 세우게 된다. 이 실제적인 지식이 아무런 쓸모 없는 어떤 사변(思辨)보다 한층 더 확실하고 한층 더 견실한 지식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32 실로 경건한 마음은 자신이 생명의 깨우침을 받았으며 조명을 받았고 구원을 받았고 또 의롭게 되었으며 성화되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게 되며, 따라서 하나님과 더불어 항상 교통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영원한 신성. 14-15)
14. 성령의 신성은 하나님의 사역에서 입증된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신성에 관한 증거도 이와 같은 근원에서 찾아야 한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창 1 : 2)고 한 모세의 증거는 실로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 보고있는 이 세계의 아름다움이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유지 보존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답게 단장되기 전에 벌써 성령께서 저 혼돈된 덩어리를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주 여호와께서 나와 그의 신을 보내셨느니라"(사 48 : 16)고 한 이사야의 말을 아무도 교묘하게 해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그 일에 최고의 권능을 성령과 함께 공동으로 행사하시기 때문이다.33 여기서 성령의 신적 위엄이 찬란하게 빛나게 된다. 그러나 앞에서 이미 말한 대로, 우리를 위한 최상의 확증은 익숙한 경험에서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이 성령께 돌리는 것과 경건에 대한 확실한 경험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가 배우는 것들은 모두가 피조물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온 우주에 편재 하시어, 하늘과 땅 위에 있는 만물을 유지하시고 그것들을 성장케 하시며 그것들을 소생시키신다. 또한 성령은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기 때문에 피조물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물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그것들에게 본질과 생명과 운동을 불어넣어 주심에 있어서, 분명히 그는 하나님이신 것이다.
또한 만일 썩지 않는 생명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현재의 성장하는 어떤 생명보다도 더 우수하고 탁월하다고 하면, 중생케 하시는 능력의 원천이신 성령에 대하여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여러 곳에서, 성령은 빌려 온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자신의 능력에 의해서 거듭나게 하시는 창시자이시며, 중생뿐만 아니라 영생의 창시자이시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요컨대, 성령에게도 성자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특별히 신성에 속하는 기능들이 주어졌다. 피조물 중에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모사가 되지 못하지만(롬 11 : 34)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 : 10). 성령께서는 지혜와 말의 재능을 주신다(고전 12 : 10).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일은 자신의 역사에 의해서만 된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다(출 4 : 11). 이와 같이,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므로 우리를 향하신 그의 생명을 주시는 능력을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칭의는 성령의 사역이다. 능력, 성화(참조, 고전 6 : 11), 진리, 은혜, 그리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일체의 선이 다 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은사의 근원은 오직 한 분 성령이시기 때문이다(고전 12 : 11).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 12 : 4)라는 바울의 말은 특히 주의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것은 이 말씀이 성령은 모든 은사의 시초요 원천일 뿐만 아니라 그 창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표현해 주기 때문이다. 곧 이어 바울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느니라"(고전 12 : 11). 만일 성령이 하나님 안에 존재하는 실재가 아니라고 하면, 선택을 하고 또 의지(意志)한다는 것은 결코 그에게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명백하게, 신적 권능을 성령에게 돌리고 그가 하나님 안에 실재적으로 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15.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
실로 성경은 성령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라고 칭호를 회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에서, 우리를 하나님의 전(殿)이라고 결론을 내린다(고전 3 : 6-17, 6 : 19, 고후 6 : 16). 우리는 이 사실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신의 전으로 택하신다는 사실을 자주 약속 하셨지만 이 약속은 우리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에 의하지 않고는 결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말하였다. "만일 우리가 나무와 돌로 성령의 전을 세우도록 명령을 받았다 해도 이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이 받으셔야 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명령은 성령의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성령을 위해 성전을 세우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성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분명한 증거인가?"34 그리고 사도는 가끔 우리를 "하나님의 성전"(고전 3 : 16-17, 고후 6 : 16)이라 불렀고 또 어떤 때는 이와 똑같은 의미에서 "성령의 전"(고전 6 : 19)이라고 불렀다. 성령을 속였다고 하여 아나니아를 책망하면서 베드로는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 5 : 3-4)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이사야가 만군의 주를 말씀하시는 분으로 소개한 구절 중에서 바울은 말씀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가르치고 있다(사 5 : 9, 행 28 : 25-26). 실로 선지자들은 그들의 말이 만군의 주의 말씀이라고 변함없이 말하였고, 그리스도와 사도들은 이를 성령의 말씀이라고 하였다(참조, 벧후 1 : 21). 그러므로 탁월한 의미에서 모든 예언의 저자이신 성령이야말로 참되신 여호와라고 말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노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이사야는,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사 63 : 10)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마 12 : 32, 막 3 : 29, 눅 12 : 10)면, 이 말씀은 분명히 성령의 신적 위엄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며, 그 위엄을 범하고 훼손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옛날 교부들이 사용한 많은 증거를 일부러 생략하려고 한다. 저들은 우주의 창조가 성자의 사역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령의 사역이기도 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 : 6)라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편에서는 같은 말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이 보통이며, 이사야서에서는 "입술의 기운"(사 11 : 4)이 "말씀"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이 주장은 논거가 빈약하다. 그리하여 나는 경건한 영혼들이 안심하고 믿을 수 있는 몇 가지 증거들만 진술하기로 하였다.
(삼위의 구별과 일체성. 16-20)
16. 하나님의 동일성
더우기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그러나 많은 증거들 중에서 우리는 이 한 가지만으로 충분할 것이다.35 그 이유는 바울은 하나님, 믿음, 세례 이 세 가지를 그 하나에서 다른 하나를 추리할 수 있도록 연결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믿음이 하나이기 때문에, 주도 하나이며, 또한 그는 세례가 하나이기 때문에 믿음 또한 하나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세례를 통하여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종교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면, 우리는 자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도록 하신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실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 : 19)라고 하신 이 엄숙한 명령에서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는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성부, 성자, 성령 안에서 아주 명백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 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 한다는 사실이다.
실로 신앙은 여기저기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 논해야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바라 보며 이 하나님과 연합하고 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에서, 만일 신앙의 종류가 여럿이라면 신(神) 또한 마찬가지로 여럿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 쉽게 성립된다. 그런데 세례는 신앙의 성례전 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라는 사실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유일성을 우리에게 확증해 준다. 또한 우리는 여기에서,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시는 한 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를 떠나서는 세례가 허락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셨을 때, 이 명령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을 한 신앙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명백히 증거해 주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며 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고한 원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과 성령은 하나님의 본질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고 결론 짓는다. 아리우스파가 성자의 신성을 고백하면서도 하나님의 본체를 성자에게서 배제시킨 것은 가장 어리석은 행위였다. 마케도니우스파36 역시 이와 같은 광란에서 헤어나지 못하여, "영"(靈)을 다만 인간에게 부어진 은혜의 은사로만 이해하려 하였던 것이다. 지혜, 총명, 진리, 용기, 주님께 대한 경외, 이 모든 것이 성령으로부터 오기 때문에 오직 그만이 지혜, 신중, 용기, 그리고 경건의 영이시다(참조, 사 11 : 2) 그리고 은사가 여럿으로 나누어진다고 해서 성령도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도가 주장 한 대로 아무리 은사가 여러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같은 한 성령"(고전 12 : 11)으로 존재하시는 것이다.
17. 삼위성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그리고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의 다음과 같은 말은 내게 대단한 기쁨을 주는 구절이다. "나는 즉시 삼위의 광채에 둘러싸이지 않고는 유일성을 상상할 수 없다. 또한 곧바로 유일성을 상기하지 않고는 삼위를 분별할 수도 없다."37 그러므로 우리들의 생각을 혼란하게 만들어 하나로 즉시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그런 식의 위(位)의 삼일성(三一性)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실로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말은 실제적인 구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을 통하여 여러 가지로 지시되는 이 하나님의 명칭들을 무의미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구별이지 분할이 아니다. 이미 위에서 인용한 말씀들은(슥 13 : 7) 성자가 성부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부와 다른 분이 아니라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하실 수 없으며, 따라서 말씀이 성부와 구별되지 않는다고 하면 성부와 더불어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자는 자신을 성부와 구별하여,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요 5 : 32, 8 : 1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성부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같은 말씀을 하려는 데 있다(요 1 : 3, 히 11 : 3). 말씀과 구별되지 않고서는 성부는 이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지상에 오신 분은 성부가 아니라 성부에 의하여 보내심을 받은 바로 그 분이시다. 성부는 죽지도 아니하시고, 부활도 아니하셨고 다만 성부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구별도 성육신 때에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38 그는 이에 앞서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요 1 : 18)이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성자가 인성을 취하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기 전에는 아버지의 품속에 들어가지 않으셨다고 누가 감히 주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는 벌써 그이전에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으며, 자신의 영광을 아버지와 더불어 누리셨던 것이다(요 17 : 5).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심으로써 성령이 성부와 구별되신다는 사실을 암시하셨다(요 15 : 26, 참조, 14 : 26).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가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고(요 14 : 16), 또 다른 곳에서도 자주 그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다른 분"이라고 부르심으로써 성령이 자기와 구별된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18. 성부, 성자, 성령의 차이점
이 구별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사에서 비유를 든다는 것은 과연 타당한가 하는 데 대하여 나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옛날 교부들은 가끔 이 방법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소개하였던 그 유추의 전부가 매우 부적당하다는 것을 동시에 고백하였다.39 그리하여 나는 여기서 그러한 일체의 무분별한 행동을 두려워하고 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를 부적당하게 소개함으로써 사악한 사람에게 비방의 기회를, 무지한 사람에게 망상의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그 구별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다음과 같다. 곧 성부는 활동의 시초가 되시고40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실로 하나님은 지혜와 권능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으시며, 또한 영원에 있어서는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것을 찾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성부의 영원성은 또한 성자와 성령의 영원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부가 먼저 생각되고 다음으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을 생각하게 될 때에 삼위의 순서를 고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먼저는 하나님을, 다음으로는 그로부터 나온 지혜를, 그 다음으로는 그 계획의 작정을 수행하시는 능력에 대하여 생각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성자는 오직 성부에게만 발생되며 동시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생된다고 말한다.41 이 사실은 성경의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지만, 로마서 8장보다 더 분명하게 진술된 것은 없다. 여기서는 동일한 영이 아무 차별 없이 때로는 "그리스도의 영"(9절)으로, 때로는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11절)으로 불리고 있으나 그것은 조금도 부당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역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다고 증거하였으며(벧후 1 : 21, 참조, 벧전 1 : 11), 또한 성경은 자주 성령을 성부 하나님의 영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19.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더우기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오히려 성자는 성부와 함께 똑같은 영을 공유하시기 때문에, 성자가 성부와 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 따라서 성령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기 때문에, 성령은 성부, 성자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것도 증명해 준다. 왜냐하면, 그 모든 신적 성품이 각 실재 안에서 이해되며 따라서 각자가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부가 전적으로 성자 안에, 성자가 전적으로 성부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성자께서 친히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믿으라고 하신 말씀(요 14 : 10)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교회의 저술가들 역시 본질의 차이로 말미암아 하나가 다른 하나에서 분할된다고 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어거스틴이 말한 구별을 제시하는 이 명칭들은 각자의 상호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단 하나이신 실체 그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른 방법으로 생각 할 때는 다소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고대 교부들의 견해가 조화를 이룬다. 저들은 어떤 때는 성부가 성자의 기원이라고 하였으며, 또 어느 때는 성자가 신성과 본질을 스스로 소유한다고 함으로써 성부와 함께 한 근원을 가진다고 주장하였다. 어거스틴은 다른 곳에서 이 다양성의 원인을 아주 명백하게 설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며 성부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는 성자라고 불린다. 그리고 성부가 자신에 대하여는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성자와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에는 성부라고 불린다. 성자에 대하여 성부라고 불리는 한 그는 성자가 아니며, 성부에 대하여 성자라고 불리는 한 또한 그는 성부가 아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하여 아버지라고 불린 분과 자신에 대하여 아들이라고 불린 분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다."42 그러므로 성부와 아무 관련 없이 단순히 성자에 대해서만 말할 경우 그를 가리켜 자존하시는 분으로 말하는 것은 매우 타당한 주장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그분을 유일하신 근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그의 삼위일체론(On the Triniay) 제 5권 전(全)권에서 이 문제를 설명하였다. 숭고한 신비 속을 교묘하게 파고들어가 많은 공허한 사색의 주위를 배회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어거스틴이 진술한 그 관계에 만족하는 것이 훨씬 더욱 안전하다.
20. 삼위일체 하나님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두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43 즉 우리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는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특수화함 없이 언급될 때, 이 명칭은 성부를 지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자와 성령 또한 지칭한다. 그러나 성자가 성부와 연합될 때 양자는 상호 관계를 가지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위(位)들의 사이를 구별해 내는 것이다. 그러나 위들의 독자적인 특성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다. 예를 들면, 성부에게 시작과 근원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와 성자, 혹은 성부와 성령이 동시에 언급될 때, 하나님이라는 명칭은 언제나 성부에게 특별히 적용된다. 이와 같이 하여 본질의 단일성이 보존되고 그 정당한 순서가 유지된다. 그렇다고 이것이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조금도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여호와라고 증거한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사도들이 주장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 관계도 허락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또는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44
그런데 여호와라는 이름이 어떤 특별한 설명이 없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된 것은 바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고후 12 : 8).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는 그리스도의 응답을 받은 바울은 즉시 다음과 같이 부연하였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 12 : 9). 그런데 여기서의 "주"라는 말은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이 주라는 말을 중보자의 위격에만 국한시킨다는 것은 어리석고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 기도에서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전혀 구애를 받지 않는 절대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헬라어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라, 사도들이 "큐리오스"( , 주)라는 말을 보통 여호와라는 말 대신에 사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실례를 찾는다면 구태여 멀리서 구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베드로가 인용한 요엘 선지자의 말, 곧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 : 21, 욜 2 : 32)고 하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의미에서 주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이 명칭이 특별히 성자에게 적용된 경우가 있는데, 그 이유가 다르다는 것은 적절한 곳에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바울이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곧 이어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첨가하였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만으로 만족하자. 심지어 그리스도는 친히 하나님을 온전히 "영(靈)"(요 4 : 24)이라고 부르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전체적인 본질은 영적이시며, 이 영적인 사실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방해할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성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이 전체적 본질의 한 실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 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영이라고 불리고 있음을 또한 보게 되는 것이다.
(반(反)삼위일체 이단에 대한 논박. 21-29)
21. 모든 이단의 근거 : 모두에 대한 경고
더우기 사단은 우리의 신앙을 그 근본으로부터 뒤집어 엎기 위해, 부분적으로는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질에 관하여, 또 부분적으로는 위(位)의 구별에 대하여 언제나 커다란 분쟁을 선동하여 왔다. 사탄은 거의 모든 시대를 통해서 불경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선동하여 이 문제로 정통주의적 교사들을 괴롭혀 왔으며, 오늘날까지 그 타다 남은 불로 새로운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어떤 사람들의 그 왜곡된 헛소리들을 반박하는 것은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나의 특별한 목적은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인도하는 데 있었지, 강퍅하며 논쟁적인 사람들과 맞부딪쳐 싸우는 데 있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 우리는 지금까지 평화스럽게 해석되어 온 진리를 사악한 사람들의 모든 비방에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견고한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끝까지 특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만일 여기서 진실로 성경의 감추인 신비에 대하여 논할 경우가 있게 된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마땅히 냉정하고 아주 신중하게 사색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사상과 우리의 언어 그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허락하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그 적은 재능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본질을 측량할 수 있다는 말인가?45 매일같이 바라보면서도 그 태양의 구성 요소가 무엇인지도 아직 확실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실로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터에, 어떻게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본질을 규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기꺼이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자. 왜냐하면, 힐라리(Hilary)가 말한 대로 하나님만이 자신에 대한 유일한 충분한 증거이시며,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알려질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이다.46 그러나 그의 말씀을 떠나 다른 곳에서 그를 찾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신 그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 자신께 맡기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크리소스톰(Chrysostom)이 아노모에오스파(Anomoeans)를 반박하여 행한 설교가 아직 다섯 편이나 현존하고 있다.47 그러나 이 설교들은 그 건방진 궤변론자들의 횡설수설하는 입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이 문제에 있어서는 다른 모든 곳에서 행한 것 보다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들의 경솔한 행동에 대한 불행한 결과는, 우리로 하여금 이 문제를 난해하게 연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보다 알기 쉽게 연구하도록 하는 경고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우리 모두 힘써야 하겠다. 그러나 한 신성 안에 있는 성부, 성자, 성령의 구별이 파악하기 힘들다고 하여 그것이 어떤 사람들의 이해력에 기대 이상의 어려움과 고통을 일으킨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인간의 마음은 호기심을 충족시킬 때에는 미궁에 빠져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저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자.48 그리고 저들이 비록 이 신비의 고귀함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하늘에 속한 말씀에 스스로 복종하여 지배받게 하자.
22. 세르베투스의 반(反)삼위일체론
이 교리에 대하여 우리의 신앙의 순수성을 공격한 여러 오류들의 목록을 작성한다는 것은 지나치게 거추장스럽고 아무런 유익도 없는 헛된 일 이 될 것이다. 그리고 야수와 같이 헛소리하는 너무나 많은 이단자들이 하나님의 영광 전체를 전복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저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야말로 무식자들을 불안하게 하며 혼란하게 만드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실로 이 소수의 사람들로부터 즉시 많은 분파가 생겨났으며, 어떤이들은 하나님의 본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위의 구별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입증된 대로 한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 이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해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자도 성령과 구별되신다는 점 등을 확고하게 고수한다면, 아리우스나 사벨리우스 뿐만 아니라 고대의 모든 오류를 주장한 자들에 대하여도 문은 굳게 닫혀질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르베투스나 그의 부류들과 같은 광신자들이 일어나서 새로운 속임수로 만사를 혼란시키고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저들의 오류를 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삼위일체라는 말은, 세르베투스에게 있어서는 몹시 증오스럽고 혐오스러운 말이었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삼위일체론자를 가리켜 보통 무신론자라고 불렀다.49 나는 여기서 그가 삼위일체론자들을 공박하기 위해 생각해 낸 몰상식한 말들을 생략하려고 한다. 그 일로 이것은 그의 생각의 전체였다. 즉 하나님의 본질 안에 삼위가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님은 셋으로 나누어진 것이 되며, 이것은 하나님의 유일성과 모순되기 때문에, 공상적인 삼부조(三部组)가 될 뿐이라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위(位)란 하나님의 본질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표현해 주는 어떤 외적인 관념이라고 주장했다. 말씀과 성령이 원래는 하나요 동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하나님에게는 구별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으로 오심에 따라 그로부터 다시 다른 하나님인 성령이 유출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때때로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불합리한 주장에 대해 비유로 착색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며 그의 관념의 반영이고 따라서 성령은 신격의 그림자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그는 마치 우리 안에와 심지어는 나무나 돌 속에 동일한 영이 실질적으로 존재하여 하나님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나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분배의 양식에 따라 성자와 성령 안에 하나님의 일부분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성자와 성령의 신격을 파괴하였다. 증보자의 위에 대하여 그가 무슨 헛소리를 했는가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검토하고자 한다. 실로 "위(位)"를, 하나님의 영광의 가시적인 현현으로 보았던 이 기괴한 허구에 대하여 구태여 장황하게 반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50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여 놓았기 때문이다(요 1 : 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셨다고 하면(요 17 : 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광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재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우기 천지 창조 역사 이외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여기서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소개되었다. 모세는 혼돈한 덩어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창 1 : 2).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이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셔서 아주 조심스럽게 천지의 혼돈한 물질들을 유지하시며 또한 여기에 미와 질서를 가하셨다는 사실이다. 성령은 확실히, 세르베투스가 꿈꾼 것과 같은 하나님의 한 모양이나 표현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다른 곳에서는 자신의 불경건한 사상을 더 공공연하게 드러냈는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원한 이성을 통하여 자신을 위해 눈에 보이는 아들을 작정하심으로, 자신을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셨다고 하였다. 이 외에도, 세르베투스는 실재(实在)를 환상물로 바꾸어 이를 변형함으로써, 하나님에게 새로운 우연적인 특성들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거짓되게 첨가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가장 저주받아야 할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과 성령을 보통 피조물과 무분별하게 혼합시키고 있는데, 이들 각 부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는 공공연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신자들의 영혼은 하나님과 동질적이며 영원히 하나님과 공존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그는 다른 곳에서, 인간의 영혼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에게까지도 실질적인 신격을 부여하였다.
23. 성자는 성부로서의 동일한 하나님이시다
이 늪51에서 또 다른 비슷한 괴물이 나왔다. 어떤 악한들은 세르베투스의 불경건이 저지른 그 오명과 수치를 피하기 위해 삼위가 있다는 것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부만이 진실로 또한 당연히 유일한 하나님이시며 이 하나님께서 성자와 성령을 지으시고 이들에게 자신의 신격을 주입하셨다고 해석하였다. 실로 저들은 이 가공스런 말을 삼가지 아니하고, 여전히 성부만이 유일한 "본질의 수여자"52이시며 이와 같은 특징 때문에 성부는 성자와 성령과 구별되신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의 그 가식적인 논증의 최초의 주장점은, 그리스도께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실에서, 바로 말해서 성부만이 하나님이시라고 그들은 결론을 내렸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성자에게도 공통으로 적용되지만 성부가 신격의 원천이시며 근원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다 우월하므로53 탁월한 방법으로 성부에게 이 명칭이 적용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본질의 유일한 단일성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만일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면 그를 한 위격의 아들로 생각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하여 반대한다. 나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이 모두 진실이라고 답변한다. 즉,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만세 전에 벌써 성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참조, 고전 2 : 7), (아직은 중보자의 위격에 대하여 말할 기회가 이니다). 그리고 더욱이 명확함을 기하기 위하여 우리는 위격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부와 동등한 말로 이해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만일 성부 이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확실히 성자를 이 하나님의 품위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에 대하여 언급될 때에는, 언제나 참된 하나님의 명칭이 마치 성부에게만 속하거나 하는 것처럼 성부와 성자 사이에 어떤 대립이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분명히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참되시고 유일하신 하나님이셨으며(사 6 : 1), 이 하나님을 가리켜 요한은 그리스도라고 단정하였기 때문이다(요 12 : 41).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자기가 유대인에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거라고 증거하신 분도(사 8 : 14) 역시, 바울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유일하신 하나님이었다(롬 9 : 33). 또한 이사야를 통하여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사 45 : 23)라고 말씀하신 분도 유일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와 동일하신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롬 14 : 11). 이에 대하여 사도는 다음과 같은 증거들을 첨가하였다. 곧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 1 : 10, 시 102 : 25-26)는 구절과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 : 6, 시 97 : 7)라는 구절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게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를 그리스도께 합당한 명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시므로(히 1 : 3), 하나님의 고유한 것이 그리스도께 옮겨진다고 하는 궤변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명칭은 어디서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존재는 신격에 관한 한 자존하시는 분이 되기 때문이다. 그가 여호와라면 이사야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분이 바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 예레미야의 말 또한 주의할만하다 즉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렘 10 : 11).
한편 하나님의 아들이 우주 창조 때부터 신격을 소유하였다고 이사야가 자주 증거한 데 대해서도 시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물에게 존재를 부여케 하신 창조주가 어떻게 자존하지 않으시고 또 자신의 본질을 다른 곳으로부터 빌어 올 수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자가 자신의 본질을 성부에게서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자의 자존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이를 반대하고, 성자에게 여호와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그런데 만일 전체 본질이 성부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 본질은 분할할 수 있는 것이 되든가 아니면 성자에게서 옮겨질 수 있는 것이 되든가 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자가 본질을 빼앗기게 되면 다만 명목상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만일 이 허튼 소리를 하는 자들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하나님만이 존재하시며 바로 이 하나님이 성자의 본질 수여자이신 까닭에 하나님의 본질은 다만 성부에게만 속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의 신성은 마침내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나온 무엇이 되든가 또는 전체에서 끌어 낸 한 부분이 될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전제에 따라, 성령은 다만 성부만의 영이라고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이 오직 성부에게만 고유한 그 근원적인 본질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성자의 영으로 간주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이 다같이 성부와 성자의 영이라(롬 8 : 9)고 한 바울의 증거에 의하여 반박된다. 더욱이 성부의 위가 삼위일체에서 제거된다고 하면, 성부만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이외에 어떤 점에서 성자 성령과 다르다고 하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성부와는 다르다고 한다. 반대로 성부가 성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어떤 구별의 특성이 필요하다. 이 특성을 본질이라고 하는 자들은 본질, 아니 그것도 전체본질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참된 신격을 분명히 말살시키는 것이 된다. 확실히 성부는, 성자와 공통되지 않은 어떤 특수한 무엇을 자신 안에 소유하지 않는 한 성자와 다르지 않다. 그러면 그들은 성부를 구별시키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였던가? 만일 이 구별이 본질에 있다고 하면 성부가 이 본질을 성자와 공유하였는가 공유하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그들은 우리에게 답변해야 할 것이다. 실로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절반만 신이라고 날조하는 것은 가증스런 죄악된 행위가 되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본질을 비참하게 찢어 놓곤 하였다. 본질은 성부와 성자에게 다같이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공통된다는 사실은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이 만일 참이라고 하면, 본질에 관한 한 양자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만일 성부가 본질을 수여하고도 여전히 본질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그들이 해석한다고 하면, 그리스도는 상징적인 하나님이요 외형적인 명목상의 하나님일 뿐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 : 14)는 말씀대로 하나님께는 "존재한다"는 것보다 더 특수한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4.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성부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어떤 제한 없이 하나님을 언급할 때 언제나 그것은 성부에게만 적용된다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지만, 그와 같은 주장이 허위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의 여러 구절들을 통하여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인용한 여러 구절에서도 수치스럽게 그들의 무분별함을 드러내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성자의 이름이 성부의 이름 곁에 함께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은 상대적인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것은 성부의 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부만이 참되신 하나님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 성자는 자신이 바로 자기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반대는 한 마디 말로 물리칠 수가 있다. 실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신의 지혜를 발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중보자의 하나님이신 그가 그 위엄과 순서 때문에 특히 하나님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불합리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 나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논할 것이다.54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그때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가 만세 전에 성부로부터 나신 영원하신 말씀이었다는 이유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시키기 위해 중보자의 위격과 직책을 취하셨다는 사실에서도 그러하다. 그리고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성자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제거하고 있으므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알고 싶다. 곧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성자께서 말씀하셨을 때(마 19 : 17), 그가 자신에게서 선을 박탈하셨느냐 하는 점이다. 나는 성자의 인성(人性) 속에 있는 선은 무엇이나 은혜로 주어졌다는 사실을 그들이 반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성자의 인성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이 선한 것이냐 선하지 않은 것이냐 하는 점이다. 만일 이 말씀이 선하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그들의 불경건은 그들 자신의 유죄를 충분히 입증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그것을 시인한다면 그들은 또한 자멸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처음 생각할때는 그리스도께서 "선한 자"의 칭호를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으신 듯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의 주장을 한층 더 확증시켜 준다. 확실히 그것은 유일하신 하나님께 속하는 칭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일반적인 화법에 따라 "선한 자"로 인사를 받으셨을 때 그 거짓된 영광을 거절하시고, 자신의 선은 신적인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나는 또한, 바울은 하나님만이 썩지 아니하시고(딤전 1 : 17), 지혜로우시며(롬 16 : 27), 참되시다고(롬 3 : 4) 단정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어리석고 거짓된 썩을 존재의 수준에까지 끌어내리는 가고 묻고 싶다. 태초로부터 생명 자체이시며, 천사들에게 불멸성을 부여하신 그가 불멸의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신 그가 지혜로우신 분이 아니라는 말인가? 진리 자체이신 그가 참되지 않으시다는 말인가? 더욱이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당연한 예배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하여도 묻고 싶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무릎이 마땅히 자기에게 꿇기를 정당하게 요구하셨다고 하면(빌 2 : 10), 그가 바로 자기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예배드리지 말라고 율법으로 금하신 그 하나님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출 20 : 3). 만일 그들이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 : 6)고 한 이사야의 말을 다만 성부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증거로써 그들을 반박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그리스도께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 육신으로 높임을 받으셨으며 천지의 모든 권세가 그에게 주어진 것은 그가 육신을 취하셨다는 점에 있었다고 교묘하게 구별짓고 있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왜냐하면, 왕으로서 또는 심판자로서의 위엄이 증보자의 전(全)인격에 까지 미친다 하더라도 그가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 아니었다고 하면, 하나님을 자기 자신과 충돌시키지 않고는 결코 그와 같은 높이에까지 올려 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는 종의 형체를 취하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셨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이 논쟁의 해결을 훌륭하게 마무리지어 놓았다(빌 2 : 6-7). 실로 그가 여호와로 불리시고, 그룹들을 타시며(참조, 시 18 : 10, 80 : 1, 99 : 1) 온 땅의 왕이시며(시 47 : 2,6) 모든 시대의 왕이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이와 같은 동등성이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그들이 아무리 넋두리를 한다 하더라도, 이사야가 다른 곳에서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사 25 : 9)라고 한 말은 그리스도에게서 제거할 수는 없다. 이사야는 이 말씀에서, 자기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구원해 내실뿐만 아니라 교회를 그 완전한 수까지 회복시키시는 구속주 하나님의 강림을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부 안에 있는 하나님이었다고 다른 구실을 내세웠지만 그것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순서와 지위에 있어서 신성의 근원이 성부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성부가 성자의 신격의 원작자이기나 한 것처럼 본질이 성부에게만 고유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행위라고 단정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생각하게 될 때에 본질이 다양하게 되든가 아니면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만 이름만의 상상적인 "하나님"으로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성자가 하나님이지만 성부 다음가는 하나님이라고 하면, 성부에게 있어서는 비발생적이고 비창조적인 본질이, 성자에게 있어서는 발생적이고 창조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 1 : 26)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개한 모세의 글에서 우리는 위의 구별을 짓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비난자들이 우리를 조롱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만일 한 하나님 안에 위가 여럿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면, 모세의 이 언급이야말로 얼마나 무의미하고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 되겠는가를 경건한 독자들은 알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성부가 말씀하고 계시는 분들이 창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 곧 이 하나님 한 분 이외에는 창조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창조의 권능과 명령할 수 있는 권위가 성부, 성자, 성령에게 공통되게 속한다는 것을 저들이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지 않으시고 외부의 다른 행동자들에게 말씀 하셨다는 것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경의 한 구절만으로도 저들의 두 반론을 즉시 쉽게 제거할 수 있다. 즉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은 영이시니"(요 4 : 24)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성부에게만 한정시켜서 마치 말씀에는 영적 성질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영"이란 명칭이 성부와 동시에 성자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하면, 성자는 "하나님"이라는 특수화되지 않은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나는 결론짓고 싶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께 정당하게 예배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요 4 : 23).55 이 사실에서 또 다른 결과가 생기게 된다. 즉, 그리스도는 성부 밑에서 교사의 임무를 수행하셨기 때문에 성부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돌리셨는데, 이것은 자신의 신격을 폐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로 하여금 점차 그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는 점이다.
25. 신성한 본질은 삼위에게 모두 공통된다
그러나 그들은 이 문제에 있어서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개체의 각자는 본질의 분리된 일부분을 공유한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성자, 성령의 본질이 비발생적인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성부는 순서상 처음이시며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56 자신으로부터 자기의 지혜를 낳으셨기 때문에, 모든 신성의 기초가 되시며 원천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무한정적으로 볼 때에 발생하신 분이 아니시며, 성부 또한 위(位)라는 점에서는 발생된 분이 아니시다. 또한, 그들은 어리석게도 우리의 이 견해가 사위일체(四位一体)를 뜻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은 그들의 머리로 생각해 낸 허구를 거짓되고 무고하게 우리에게 돌림으로써 우리가 마치 한 본질에서 삼위가 유출된다고 생각한 것처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우리의 여러 저작에서 명백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위를 본질에서 분리시키지 아니하고, 오히려 삼위를 구별하되 그 각자가 본질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한다는 사실이다. 만일 위가 본질에서 분리되었다고 하면 아마 그들의 추론에도 어떤 개연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그것은 유일신이 그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위들의 삼위일체가 아니라 제신(诸神)의 삼위일체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마치 우리가 세 하나님이 본질로부터 유래된다고 상상이나 한 듯이, 삼위일체를 구성함에 있어서 본질이 협력하였는가 아니하였는가 라고 묻는 그들의 그 무가치한 질문에 대답이 된다.57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없이도 삼위일체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들의 답변 역시 똑같은 우매함에서 나온 말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삼위일체의 부분 혹은 한 성원(成员)으로서의 구별을 짓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위들은 본질 없이 혹은 본질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성부는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부가 될 수 없으며 성자 또한 그가 하나님이 아닌 한 성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격은 절대적인 의미에서 자존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한다. 따라서 우리는 성자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자존하신다고 고백하는 것이요, 그의 위에 관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실로 그가 성자인 이상, 우리는 그가 성부로부터 오셨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그의 본질에는 기원이 없으나 그의 위의 근원은 하나님 자신이다. 옛날의 정통적인 저술가들은, 삼위일체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언제나 이 명칭을 오직 위에만 적용시켰다. 왜냐하면, 본질을 이 구별 안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리석은 과오일 뿐만 아니라 가장 큰 불경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가 본질, 성자, 성령의 셋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분명히 성자, 성령의 본질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러 부분은 서로 혼동하여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리하여 모든 구별은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성부와 하나님이라는 말이 동의어라고 하면, 성부는 이때 신격의 원작자가 될 것이며 성자에게는 그림자 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한 하나님과 두 피조물을 결합한 것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26. 성육신하신 말씀이 성부에게 종속된다는 것은 반증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본래 하나님이라고 하면,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들은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나는 한 위와 다른 위를 비교할 때, 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사용되지 않고 신격의 근원이신 성부에게 한정된다고 대답했었다.58 물론 이것은 광신자들의 허튼 소리와 같이 본질의 부여와 관련시켜서가 아니고, 순서의 원리에 의해서 그렇게 사용된다. 그리스도께서 성부에게 하신 말씀, 곧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 3)라고 하신 말씀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는 중보자의 위격으로 말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중간 위치를 취하셨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 때문에 자신의 위엄이 감소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가 자기를 비웠다고는 하지만(빌 2 : 7), 성부와 함께 가졌던 영광이 이 세상에 대하여 감춰졌을 뿐 전혀 상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도는 히브리서 2장에서 그리스도는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한 자였다고 하였으나(히 2 : 7,9), 동시에 그리스도는 땅의 기초를 세우셨던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주장하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히 1 : 10).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의 인격으로 하나님께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기에게도 속하는 그 신격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명칭 하에 두셨던 것이라고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요 14 : 28, 참조, 16 : 7, 20 : 17)고 말씀하셨을 때 이것은 영원한 본질과 관련하여 자신이 성부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제 2차적인 신격을 자신에게 돌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가 하늘나라의 영광을 얻어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과 함께 성부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기서 성부를 보다 높은 위치에 계시는 분으로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빛나는 광채의 그 완전함이, 육신을 입으신 자신에게서 볼 수 있었던 영광에 비해 휠씬 뛰어나 있음을 보셨기 때문이었다. 이와 똑같은 의미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께서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때라,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 : 24,28)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신격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멈추지 않고 처음부터 존재하신 그대로 영원히 존속한다고 할 것 같으면 성부, 성자에게 공통된 하나님의 유일하신 본질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그리스도는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높이 올리셨으며 동시에 자신이 성부와 하나이신 까닭에 우리를 자신에게까지도 들어 올리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성부에게만 한정시키고 성자에게서는 이를 배제한다는 것은 비합리적인 것이며 부당한 일이다. 이것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라고 선언하였는데(요 1 : 1, 요일 5 : 20), 이것은 아무도 그리스도를 성부보다 못한 제2류의 신격을 소유하신 분으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더욱이 이들 새로운 신(神)들의 날조자들이 그리스도를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즉시 그를 성부의 신격에서 배제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의심스럽다. 그들은 마치 유일하신 하나님 이외에도 참되신 하나님이 있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으며, 또는 이입(移入)된 신성이 어떤 신기한 허구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27. 반대자들은 이레니우스를 잘못 인용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유일하시며 영원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한 이레니우스(Irenaeus)에게서59 많은 구절을 수집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수치스러운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극단적인 부패를 보여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저 거룩한 인물이 옛날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그리스도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오히려 세계의 부패에서 생긴 일종의 유령을 상상하였던 광란자들을 다루고 있었으며, 또한 그들과 논쟁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레니우스는 전적으로 이 점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즉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아버지 이외에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과, 다른 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사악한 행위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이 높인 하나님과 다른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있을 수 없다고 그가 자주 주장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현재 다른 오류에 대하여 반대해야 할 경우, 옛날 족장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것을 진실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누가 그는 사실상 성부였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우리의 답변은 간단하다. 즉, 우리는 성자의 신성에 대하여 논쟁하는 동안에도 이것 때문에 성부를 전혀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독자들이 이레니우스의 이 의도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아마도 일체의 논쟁은 종식을 고하게 될 것이다. 더욱이 그의 저서 제3권 제6장을 읽으면 모든 논쟁은 쉽게 끝날 것이다. 그는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을 주장하고 있다. "성경에서 절대적으로 또는 아무 구별 없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신 분은 참으로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야말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이라고 불리셨다." 실로 전체의 취지에서 특히 제2권 제46장에서 밝혀진 대로, 그는 수수께끼나 또는 우화적으로 성부라고 불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논의의 기초라는 것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외에도 그는 다른 곳에서도, 선지자들과 사도들은 성자와 성부를 다같이 하나님으로 불렀다고 주장하고 있다(제3권 제9장). 후에 그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순종과 관련하여, 만물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하나님이시며 심판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만물의 하나님이신 자신에게서 그와 같은 권능을 받으셨는가를 진술한다(제3권 제12장). 다시 조금 후에 성자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모세의 손을 통하여 율법을 주셨고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던 분이라고 그는 단정하고 있다. 그런데 성부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다는 것이 이레니우스의 주장이라고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자가 있다고 하면 나는 그에게 그리스도는 유일하시고 동일하시며 또한 "하나님이 데만에서부터 오시며"(합 3 : 3)라고 한 하박국의 예언의 말씀이 성자에게 적용된다는 이레니우스의 가르침을 제시할 것이다(제3권 제18장, 제23장). 제4권 제9장에서도 이와 똑같은 목적으로,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신은 성부와 함께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읽게 된다. 그리고 같은 책 제12장에서는, 그리스도는 천지의 창조주이시며 유일하신 하나님인 까닭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는 설명하고 있다.60
28. 터툴리안을 인용하는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들이 터툴리안(Tertullian)을 그들의 옹호자로 채택한 것은 더욱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그의 표현 방법이 때로는 거칠고 모호한 데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옹호하는 그 교리 전체를 애매하게 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시되 그의 말씀은 분배 혹은 섭리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이 터툴리안의 견해인데, 곧 하나님은 본체의 단일성에 있어서 유일하심에도 불구하고 그 단일성은 분배의 신비에 의해 삼위로 배열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삼위가 존재하되 그것은 상태에 있어서가 아니라 품위에 있어서 그러하고,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 그러하며, 권능에 있어서가 아니라 현현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실로 그가 말한 대로 자기는 성자를 성부 다음가는 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다만 위를 구별할 때에만 적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는 어디선가 성자를 가시적인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문제의 양면을 논한 후에는 성자가 말씀인 한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터툴리안은 성부가 자신의 위(位)에 의하여 규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우리가 현재 부정하고 있는 그들의 날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였다. 그리고 터툴리안은 성부 이외에는 다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지만, 그러나 다음 구절의 설명에서 볼 수 있는 대로 그는 성부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부정한다고 해서 성자에 대하여 배타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위(位)의 구별에 의해 하나님의 단일성이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일관된 의도에서 우리는 쉽게 그의 말의 의미를 추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프락세아스(Praxeas)를 반대하여, 하나님은 삼위로 구별되지만 이것은 하나님을 한 분 이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그의 단일성이 분할되는 것도 아니라고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성부와 동일한 존재가 아닌 한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프락세아스가 거짓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터툴리안은 이러한 구별에 대해 강력하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거칠게 표현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말씀과 영을 전체의 부분으로 칭한 것은 아직은 용서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터툴리안 자신이 입증한 대로, 이것은 본체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위격에만 관계되는 배열과 섭리를 명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가장 사악한 프락세아스여, 그대는 이미 불리고 있는 이름 외에 또 얼마나 많은 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조금 후에 그는 다시, "저들이 성부와 성자를 그 이름과 위에 따라 믿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61 이상의 논의로 터툴리안의 권위를 이용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려는 자들의 그 뻔뻔스러움을 넉넉히 반박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9. 교회의 모두 정평있는 교부들은 모두가 삼위일체 교리를 확증하 였다
그리고 고대 교회의 저서들을 열심히 비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레니우스의 사상이 그를 계승한 사람들의 사상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순교자 저스틴(Justine)은 아주 먼 고대 교회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여러 점에서 우리를 지지한다.62 저스틴과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부른 데 대하여 저 사악한 사람들은 반대할 것이다. 힐라리(Hilary)는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으며, 영원성이 성부 안에 있다고 한층 더 예리하게 역설하였다.63 이것이 성자에게서 신적 본질을 박탈하는 것이 되는가? 아니 그와는 반대로, 오히려 그는 우리가 고수하는 바로 그 신앙을 옹호하는 데 전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힐라리가 자기네 오류의 보호자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해, 연결이 안 되는 산만한 문구들을 마구 수집하는 데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
만일 이그나티우스(Ignatius)의 말을 인용하는 것을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면, 그들은 사순절과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부패한 것들에 관한 법칙을 사도들이 만들어 냈다고 증명해야 한다. 이그나티우스의 이름으로 발표되어 온 그 수치스럽고 불합리한 것들보다 더 욕된 것은 없을 것이다.64 그러므로 속이기 위해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그들의 파렴치함에는 더욱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실로 고대인들이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하게 알게 된다. 즉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Arius)는 어떤 인정된 저자의 권위를 빙자하여 자신을 변명하지 않았으며, 회랍 교부나 라틴 교부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자기와 이전 학자들과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해서 변명하지 않았다. 이 악한들이 가장 적대시하였던 어거스틴이 고대인들의 저작들을 얼마나 조심스럽게 검토하였으며 얼마나 존경하는 태도로 그 저작들을 받아들였던가에 대하여는 말할 필요가 없다. 확실히 그는 작은 문제에 있어서도 교부들과 의견을 달리할 경우가 있을 때에는 그 의견을 달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논의에 있어서도, 다른 저자들에게 애매하거나 모호한 것이 있을 때에는 그는 이를 눈감아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반대하는 교리가 먼 옛날부터 아무런 이론(异论)도 없이 받아들여졌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하였다.65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가르친 것을 그가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명백해진다. 즉 그는 그리스도교 교리에 대하여(Christion Doctrine)라는 저서 제1권에서 성부 안에 단일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어거스틴이 그때 자신을 망각하였다고 주장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다른 곳에서 이와 같은 비난으로부터 자신의 입장을 해명하여, 성부는 아무에게서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신격의 시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현명하게도 그는 하나님의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돌려진다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작이 성부로부터 나오지 않는 한 하나님의 단일성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66
사탄은 온갖 궤변으로 오늘날까지 이 교리에 대한 순수한 신앙을 왜곡, 또는 모호하게 하려고 했는데 이제 나는 이상의 고찰이 이와 같은 사탄의 일체의 궤변을 충분히 물리쳤다고 경건한 독자들이 인정해 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독자들이 자신의 호기심을 제어하고, 필요 이상의 복잡하고 골치 아픈 논쟁들을 분별없이 추구하지만 않는다면 이 교리의 전체 내용은 충실하게 설명되었다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무분별하게 헛소리를 즐기는 자들에게는 조금도 만족을 주지 못할 것으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나는 내게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놓치지 않고 기민하게 다루어 왔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덕성을 열망하기 때문에, 별로 유익이 없다든가 독자들에게 무익한 고통을 주는 그런 여러 일에 대하여는 아예 손을 대지 않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도 성부가 항상 발생하는가 아닌가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논쟁할 필요가 있겠는가? 실로 발생의 계속적인 행위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는 영원부터 삼위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67
제 14 장
우주와 만물의 창조에 있어서까지 성경은 참하나님과 거짓 신들을 뚜렷한 특징들을 가지고 구별한다.
(세계와 인간의 창조, 1-2)
1. 우리는 인간의 사색으로써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의 진실한 의도를 살필 수도 없고 또 살펴서도 안 된다.
이사야가 거짓 신을 예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한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땅의 기초와 하늘의 운행을 보고도 참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사 40 : 21). 하지만 우리의 이해력이 더디고 우둔한 까닭에 신자들이 이교도들이 꾸며낸 거짓 형상(figmenta)에 빠지지 않도록 참 하나님을 더욱 더 명백히 묘사해야 한다. 철학자들의 판단에 있어서 가장 받아들이기 쉬운 서술, 곧 하나님을 우주의 정신이라고 하는 개념1은 허무맹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불확실성 속에서 혼돈하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좀더 상세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창조의 역사가 명백해지며, 교회의 신앙이 이것들을 근거하여서 모세가 우주의 형성자요 창조자로 표현한 분 이외의 다른 하나님을 찾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 창조 역사에는 제일 먼저 시간이 표시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연속되는 연륜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와 만물의 최초의 기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 지식이 특별히 유익한 점은, 그것이 옛날 애굽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 만연하였던 기괴한 이야기들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우주의 시초가 있음을 알려줌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고, 또 우리가 넋을 잃고 그것에 경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저 사악한 자들의 우롱에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우롱이란 어째서 하나님께서는 수천 년 전에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다 일찍이 천지창조를 하시려는 생각을 갖지 아니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기간을 헛되게 지내셨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직 6천년도 되지 않았는데 세계가 종말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째서 그처럼 오랫동안 천지창조의 시기를 연기 하셨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정당한 일도 아니요 이치에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이 그 이유를 깊이 캐어내려고 노력한다 해도 백 번이면 백 번 모두 중도에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의 겸손을 시험하시기 위해 고의적으로 감추어 두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도 유익한 일이 못 된다. 어떤 파렴치한 자가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고 어떤 경건한 노인에게 조롱 삼아 물었다. 이때 그 노인은 재치 있게, 하나님은 그런 호기심 많은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고 답변하였다.2
엄격하면서도 위엄 있는 이 경고는, 많은 사람을 자극하여 그들을 사악하고 유해한 공론(公论)으로 몰아가는 방종을 제어해 줄 것이다. 요컨대, 지혜와 권능과 의에 있어서 이해할 수 없으며 우리 눈으로서는 감히 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살아있는 형상을 보여 주는 거울로서 모세의 역사를 우리 앞에 두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노년이나 허약, 혹은 어떤 다른 결함 때문에 눈이 어두워지면 안경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무능함도 그와 같아서, 하나님을 찾을 때 성경이 우리를 인도해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즉시 혼란에 빠지게 된다.3 실로 방종에 빠져 있는 자들은 경고를 받고서도 그것을 묵살해 버리기 때문에, 무서운 파멸을 당한 후에야 비로소,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을 받아들이는 것이 모독적인 언사로 하늘나라의 일을 흐리게 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좋은 일인가 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거스틴이 사물의 원인을 찾되 하나님의 의지 밖에서 찾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을 범하는 행하는 것이라고 개탄한 것은 정당한 일이다.4 그는 다른 곳에서도, 공간과 시간의 끝없아 뻗쳐있는 것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똑같은 잘못이라고 조심스럽게 경고하였다.5 사실 하늘의 범위가 아무리 넓다 해도 그것은 여전히 어떤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만일 어떤 사람이, 공간이 하늘보다 백 배나 더 컸으면 하고 하나님께 아뢴다면, 이 무례한 언동에 대해 모든 경건한 사람이 혐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판단에 따라, 하나님께서 셀 수 없는 아득히 먼 옛날에 세계를 창조하시지 않은 것은 게으른 탓이라고 비난하고 있지만, 이것 역시 그와 같은 광란의 소행임에 틀림없다. 저들은 자기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세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이는 마치 하늘과 땅의 광대한 주위에는 이해할 수 없는 광명으로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독점할 만한 충분한 사물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도 같다. 또 이는 마치 6천년이라는 긴 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 매우 진지한 명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훈련시키시기 위한 충분한 증거를 보여 주시지 않으셨다는 말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제한하기를 원하시는 울타리, 말하자면 우리가 제멋대로 방황하며 헤매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가두어 두시기를 원하시는 그 울타리 안에 즐거이 머물자.
2. 6일간의 사역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선하심을 보여준다
이와 동일한 의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엿새 동안에 완성되었다고 기술한다(창 2 : 2). 이러한 사실에 의해 우리는 일체의 허구를 떠나서 창조의 사역을 엿새로 나누어 일하신 유일하신 하나님께 끌려가게 되므로, 그 창조 사역을 명상함에 전 생애를 바쳐도 싫증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든지 하나님의 사역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의력이 얼마나 변하기 쉬우며, 우리를 감동시키는 어떤 경건한 사상도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함을 알고 있다. 여기서 또한 인간의 이성은, 신앙에 순종하여 제7일의 거룩하게 구별하여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안식을 배워 환영하기 전에는 그와 같은 과정은 마치 하나님의 능력과 무관한 것처럼 불평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에 모든 선한 것을 아끼지 않고 주신 후에 아담을 창조하셨는데, 우리는 이와 같은 만물의 창조 순서에서 인류에게 보여 주신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6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을 아무것도 없는 텅빈 땅에 두셨다면, 또는 빛이 있기 전에 그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아마도 하나님은 인간의 복지를 충분히 마련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유익을 위하여 해와 별의 운행을 조정하시고 땅과 하늘과 물에는 생물로 채우시고 식량으로 풍부한 과실을 맺게 하실 때에, 앞을 내다보시며 열심히 일하시는 한 가족의 아버지의 책임을 다하심으로써 우리에 대한 자신의 인자하심을 보여주셨다. 비록 나는 여기에 대해 간단히 말했지만 이 문제를 보다 더 신중히 생각하기만 한다면, 모세가 창조주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확실한 증언이며 사신(使臣)이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나는 앞서서7 모세는 하나님의 본질뿐만 아니라 그의 영원하신 지혜와 영에 대해서도 말했으며 또한 모세가 이를 말한 것은 분명한 형상으로 자신을 인식시키기를 원하셨던 하나님 이외에는 어떤 다른 신도 상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말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생략하고자 한다.
(천사. 3-12)
3. 하나님은 만유의 주이시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충분히 논하기 전에8 먼저 천사에 관한 것을 잠시 언급해야 하겠다. 확실히 모세는 일반 대중의 무지에 고려하여, 창조의 역사 중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그가 천사를 하나님의 봉사자로 소개했을 때, 저들이 수고와 직분을 바쳐 봉사해야 할 분이 바로 저들의 창조주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결론지을 수 있다. 모세는 통속적인 방법으로 말했기 때문에 자신의 저작 첫머리에서 천사를 하나님의 피조물 가운데 넣어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사실은 성경이 여러곳에서 천사에 대하여 반복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을 우리들이 명백히 또는 확실히 가르치지 못하게 막지는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한 결코 그렇게 훌륭하고 고상한 표본이 생략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더우기 이 교리는 여러 가지 오류를 반박하는 데 매우 필요하다. 천사의 성질의 탁월성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기 때문에, 만일 천사를 한 분 하나님의 권위 밑에 예속시켜 억지로 그와 같은 지위에 처하도록 강요한다고 하면 그것은 천사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천사들은 신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잘못 생각되었다.
마니(Mani)#9 역시 자기 일파와 함께 일어나서 스스로 만들어 낸 두 원리, 즉 하나님과 마귀를 제기하였다. 그는 하나님을 선한 것들의 기원이라고 하고, 악한 성질의 창시자는 마귀이라고 하였다. 만일 우리의 마음이 이 광란에 미혹된다면 우주 창조에서 나타낸 하나님의 영광은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특성은 영원성과 자존성10 - 즉, 스스로 존재하는 것 -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속성들을 마귀에게 돌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마귀를 하나님의 칭호로 장식해 주는 것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며 저항하여 자기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는 그러한 주권이 마귀에게 주어진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전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마니교도의 유일한 기초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한 것을 창조하셨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 우주에 어떤 악한 성질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정통 신앙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과 사탄의 부패와 악의, 혹은 여기서부터 나오는 죄는 본성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본성의 부패에서 나오기 때문이다.11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 중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와 의의 예증을 보여 주시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므로 이 왜곡된 거짓사상을 반대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 시야가 미칠 수 있는 이상으로 우리의 마음을 높이끌어올릴 필요가 있다. 니케아 신경에서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주라고 부르면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쓸데없는 무익한 사색에 빠짐으로써 독자들이 신앙의 단순성에서 벗어나 방황하지 않도록, 경건의 규범이 명령하는 그 한계를 지키도록 계속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성령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항상 우리를 가르치고 있지만 그러나 덕을 세우는데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완전히 침묵을 지키든가 혹은 가볍게 또는 대충 그것들을 다루실 뿐이다. 그러므로 알아서 유익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는 기꺼이 단념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창조와 천사의 직능. 4-12)
4. 우리는 천사에 대하여 추상적 사고에 빠질 것이 아니라 성경의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도록 임명받은 하나님의 봉사자들이기 때문에 그들도 역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시 103 : 20-21). 천사들의 창조된 시간과 순서에 대해 무슨 논쟁을 일삼는 것은 열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완악하다는 증거가 아닐까?12 모세는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 : 1)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별들과 유성들 이외의 다른 종류의 천군들이 언제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는가를 열심히 묻겠는가? 이 이상 더 길게 논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의 모든 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 이외의 그 어떤 모호한 문제에 대하여는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심지어는 알려고도 하지 않도록 겸손과 진실에 관한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다. 더우기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덕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아내어 명상하도록 끊임없이 힘써야 하며, 호기심에 빠지거나 무익한 것들을 탐구하는 데 마음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소용없는 문제들이 아니라 건전한 경건과 자기에 대한 경외, 참된 신뢰, 그리고 성결의 의무와 같은 문제에 대하여 가르치기를 원하시므로, 이러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참으로 현명해지기를 원한다면, 쓸모 없는 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천사의 성질, 계급, 수에 대하여 가르치는 그 공허한 사색을13 떠나야만 한다. 내가 알기로는, 많은 사람들이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문제에 더 집착하고 그러한 일에 더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의 지시하신 방법을 따르는 것도 부끄러워하지 말자. 이렇게 할 때 우리는 그의 교훈으로 만족하고, 그가 일깨워 주신 그 전적으로 공허한 사변에서 떠날 뿐만 아니라 이를 몹시 증오하게 될 것이다.
디오니시우스(Dionysius)가 어떤 사람이든간에14 하늘의 천사계급(Celestial Hierarchy)이라는 책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매우 교묘하고 예리하게 논하였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좀더 엄밀히 검토해 보면 그 대부분이 서툰 말의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신학자의 임무는,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귀를 즐겁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확실하며 유익한 것들을 가르침으로써 양심을 강화하는 데 있다. 그 책을 읽는 사람들은 그 저자는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그는 자기가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자기 눈으로 실제로 본 것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고후 12 : 2) 바울도 그것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람이 자기가 본 그 은밀한 것을 말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증언하였다(고후 12 : 4).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리석은 지혜를 버리고 주께서 천사에 대하여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바를 성경의 그 단순한 교훈 안에서 검토하도록 하자.
5. 성경에 나타난 천사의 명칭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천사는 하늘의 영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봉사와 임무를 통하여 자신이 작정하신 바를 모두 수행케 하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시 103 : 20-21). 이와 같이 하여 이 명칭이 천사들에게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기 위하여 천사들을 중재(仲裁)의 사자(使者)로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들을 부르는 다른 명칭들도 또한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나왔다. 그들이 "천군"이라고 불리는 것은(눅 2 : 13) 호위병처럼 왕을 에워싸 왕의 위엄을 장식하며 이를 두드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또한 사병들처럼 지휘관의 신호에 항상 주의를 집중하여 언제라도 그 명령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을 지휘관의 신호만 떨어지면 즉시 일에 착수한다. 아니 이미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엄을 선포하기 위해 다른 선지자들도 그의 보좌의 모습을 기술하고 있지만, 특별히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대 위에 오르실 때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단 7 : 10)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권능과 능력을 놀랍도록 발휘하시며 선언하시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저들은 권세라고 불린다(엡 1 : 21; 고전 15 : 24). 하나님은 세계에서 그들을 통하여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시고 집행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때로는 정사(政事), 때로는 권세, 때로는 주관하는 자로 불린다(골 1 : 16; 엡 1 : 21; 고전 15 : 24). 마지막으로, 저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또한 보좌라고 불리기도 한다(골 1 : 16). 그러나 이 마지막 명칭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또 다른 해석이 있는데, 이것은 동등하게 적합한 해석이며 심지어는 더 나은 해석이기 때문이다.15 그러나 성령께서는 천사의 사역의 고귀함을 높이기 위해 이 명칭을 제외하고 앞의 명칭들을 자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적 위엄의 임재를 특별히 나타내 보이시기 위해 사용하신 이 기구들을 존경하지 않고 지나간다는 것은 옳은 일이 못 된다. 더우기 그들은 한 번 이상 신들이라 불려졌다(시 138 : 1). 이렇게 불려진 이유는, 그들의 사역에 있어서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마치 거울처럼 하나님의 신성을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자가 아브라함(창 18 : 1), 야곱(창 32 : 2,18), 모세와 다른 사람들(수 5 : 14; 삿 6 : 14; 13 : 10,22)에게 나타났다고 하는 성경의 언급에 대하여 고대 교회의 저자들은 그 사자가 바로 그리스도였다고 해석하였는데,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불쾌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자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더욱 자주 "신들"이라는 명칭이 그 모든 천사들에게 적용된다(창 22 : 11-12). 그것을 무슨 신기한 것처럼 보아서는 안 된다.왕들과 통치자들이 지고하신 왕이시며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라고해서 그들에게 존영(尊荣)이 주어진다고 하면, 이보다 더 큰 이유에서 그 존영은 마땅히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한층 더 풍부히 빛내는 천사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6. 신자의 보호자이며 도움을 주는 자로서의 천사
그러나 성경은 위로와 신앙을 강화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효과적인 교훈에 강조점을 둔다. 즉, 천사는 우리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분배자요 관리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천사들은 우리의 안전을 위해 밤을 새우고 우리를 보호할 책임을 지고 있으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여 주고 따라서 어떠한 재앙도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돌보아 준다고 상기시킨다. 성경의 다음 두 구절은 보편적인 것으로서, 첫째 말씀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적용되고, 둘째 말씀은 모든 신자에게 적용된다. 즉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네 모든 길에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저희가 그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시 91 : 11-12)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께 적용되는 말씀이요,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시 34 : 7)라는 말씀은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다. 이상의 두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지키기로 하신 자들의 보호를 천사들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이러한 이유에서, 주의 천사는 도망자 하갈을 위로하고, 그녀의 여주인과 화목하기를 명령하였다(창 16 : 9). 아브라함은 자기의 종에게, 천사가 그의 여행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창 24 : 7).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할 때, 지금까지 자기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신 주의 사자가 그들을 번창케 해 주시기를 기원하였다(창 48 : 16).
이와 같이 천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진(阵)을 보호하도록 명령을 받았다(출 14 : 19, 23 : 20).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원수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셨을 때에는 언제나 천사들을 사용하여 원수에게 보복할 자들을 일으키셨다(삿 2 : 1, 6 : 11, 13 : 3-20). 간단히 말하자면 이 이상 더 다른 실례를 열거할 필요가 없고, 다만 천사들은 그리스도를 섬겼으며(마 4 : 11), 그가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와 함께 있었다(눅 22 : 43)는 점을 말해 두고 싶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렸으며(마 28 : 5-7; 눅 24 : 5), 그가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해주었다(행 1 : 10). 이와 같이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우며, 우리를 해롭게 하는 자들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보복을 수행한다. 성경에서 본 대로, 하나님의 사자는 예루살렘을 그 포위에서 건져내기 위해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185,000명을 쳐서 죽였다(왕하 19 : 35; 사 37 : 36).
7. 수호 천사들
그러나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개개의 천사가 그들 각자에게 지정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감히 단언할 수 없다. 다니엘이 바사인들의 천사와 헬라인들의 천사를 소개할 때(단 10 : 13,20, 12 : 1), 특수한 천사들이 왕국과 지방의 수호자로 임명되었다는 것을 그는 명시하였다. 그리스도께서도 마찬가지로 어린이의 천사들이 항상 성부의 얼굴을 뵈옵는다고 말씀하신 바 있는데(마 18 : 10), 이것은 어린이의 안전을 위탁받은 어떤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사실 때문에 그들 각 사람에게 자기를 보호하는 특수한 천사가 있다고 단정해야 할지에 대하여는 나는 아는 바 없다. 그러나 확실하게 주장해야 할 것은, 한 천사만이 우리 각자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천사가 한 마음으로 우리의 구원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인 아흔 아홉보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사람의 죄인을 더 기뻐한다고 했는데, 기뻐하는 자들이란 사실 모든 천사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눅 15 : 7).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 16 : 22)라는 말씀 역시 많은 수의 천사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엘리사가 특별히 자기를 위해서 지정된 많은 불명거를 자기 사환에게 보여 준 것은 헛된 일이 아니었다(왕하 6 : 17).
다른 구절보다 한층 더 분명하게 이 점을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구절이 하나 있다. 즉, 감옥에서 나온 베드로가 형제들이 모여 있는 집의 문을 두드렸을 때 형제들은 두드리는 자가 베드로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의 천사라고 말하였던 것이다(행 12 : 15). 이것은, 각 신자에게는 그들을 지켜주는 천사가 각각 따로 있다고 하는 일반적인 관념에서 생각되어진 듯하다. 그러나 천사들 중 어느 한 천사가 베드로를 돌보도록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 때문에 그 천사가 베드로의 영원한 수호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데 우리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이와 비슷하게, 일반 대중들은 두 천사, 곧 선한 천사와 악한 천사가 있다고 상상하고는 그것이 마치 별개의 특성인 것처럼 각자에게 예속시킨다.16 그러나 알아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을 열심히 탐구한다는 것은 실로 무가치한 일이다. 모든 천군 천사가 자신의 안전을 계속해서 지켜준다는 사실에 대해 만족하지 못한다면, 한 천사가 자신의 특별한 수호자로 주어졌다는 것을 안다고 해서 무슨 유익이 있을지 알 수 없다. 우리 각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한 천사에게만 국한시키는 자들은 저들 자신뿐만 아니라 교회의 온 회원들에게까지도 큰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를 사방에서 후원하며 보호하는 천군들과 함께 보다 더 용감히 싸워야 한다는 것을 무익한 약속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과 같다.
8. 천사의 계급, 수, 모양
천사의 수와 계급을 감히 결정짓는 자들은17 도대체 무엇에 근거해서 그런 일을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다니엘이 미가엘을 가리켜 "대군"이라 부르고(단 12 : 1) 유다가 그를 "천사장"이라고 부른 것(유 1 : 9)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바울도 나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심판자리에 모으는 자가 바로 천사장이라고 말하였다(살전 4 : 16; 참조, 겔 10 : 5). 그러나 누가 이러한 몇 구절을 근거로 해서 천사들의 존귀의 정도를 결정짓고 각 천사들을 그 칭호로 구별지으며 그 위치와 지위를 각자에게 배정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두 이름, 곧 미가엘(단 10 : 21)과 가브리엘(단 8 : 16; 눅 1 : 19,26) 그리고 토비트의 역사에서 이에 하나를 더 가한다면 제3의 칭호(라파엘)가 있는데(토비트 12 : 15), 이 명칭들은 그것들을 갖고 있는 의미로 보아 우리의 능력의 약함 때문에 천사들에게 적용된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 문제를 미결로 남겨 두기를 원한다.
천사의 수에 대하여,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직접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 : 53)라는 말씀을 듣고, 다니엘로부터는 그 천사의 수가 "천천이요……만만이며"(단 7 : 10)라는 말을 듣는다. 엘리사의 사환은 "불병거가 산에 가득함"(왕하 6 : 17)을 보았으며, 천사들이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시 34 : 7) 있다고 기록된 것은 그 수의 막대함을 의미한다.18
영들은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만 성경은 우리의 이해력의 정도에 맞추어 그룹이나 스랍이라는 이름으로 천사들이 날개를 가진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이 일단 유사시에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리 우리를 도울 수 있도록 항상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데 이는 마치 번개가 하늘에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것과도 같다. 더우기, 천사의 수와 계급에 대해서는 종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완전한 계시를 알게 될 신비에 속하는 것으로 해 두자. 그러므로 너무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든가, 너무 확신 있게 말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9. 천사는 막연한 관념이 아니라 실체이다
그러나 침착하지 못한 사람들이 의심하고 있는 이 점에 대해서19 우리는 다음과 같이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즉, 천사는 "부리는 영(靈)"(히 1 : 14)이며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의 봉사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또 천사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그의 남은 일들을 수행하신다는 것 등이다. 고대 사두개인들은 천사라는 말을,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고무하시는 충동이나, 또는 그가 내뿜는 능력의 표본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행 23 : 8). 그러나 이 터무니없는 생각은 성경의 여러 증거와는 매우 반대되는 것으로, 어떻게 그런 유(類)의 무지가 그 백성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는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위에서 인용한 구절들, 곧 천사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계 5 : 11)이며,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마 26 : 53)라고 말한 구절, 그들이 기뻐한다는 구절(눅 15 : 10), 손으로 신자들을 붙들며(시 91 : 12; 마 4 : 6; 눅 4 : 10-11) 신자들의 영혼을 안식처로 인도하며(눅 16 : 22), 내 아버지의 얼굴을 뵙는다고 한 구절(마 18 : 10), 그리고 이와 비슷한 구절들에 대하여는 더 말하지 않더라도, 그 외에 천사는 실질적인 실체를 가진 영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논증하는 구절들이 또 있기 때문이다.20 그것이 아무리 곡해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율법이 천사들의 손으로 전해졌다고 한 스데반과 바울의 말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행 7 : 53; 갈 3 : 19). 이와 마찬가지로 피택자들이 부활 후에는 천사와 같이 될 것이며(마 22 : 30), 심판의 날은 천사들도 알지 못하고(마 24 : 36), 그날에 주님은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마 25 : 31; 눅 9 : 26)도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바울도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딤전 5 : 21) 자신의 훈계를 지키도록 디모데에게 명령한 바 있거니와, 그가 이때 의중(意中)에 둔 천사는 실체가 없는 성질이나 영감이 아니라 실재의 영이었다.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보다 더욱 뛰어나시다는 것(히 1 : 4), 세계는 천사들에게 종속되지 않았다는 것(히 2 : 5), 그리고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본성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취하셨다는 것(히 2 : 16) 등을 읽게 되는데, 이것은 천사들이 축복받은 영이기 때문에 이러한 비교가 그들에게 적절하다고 이해하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리고 동서(同书)의 저자는 신자들의 영혼과 거룩한 천사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에 소집될 것이라고 명백하게 기록하고 있다(히 12 : 22-23).
더우기 우리가 이미 인용한 여러 구절들에서는, 어린아이의 천사들이 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뵈오며(마 18 : 10), 그들의 호위로 우리는 항상 보호를 받게 되고(눅 4 : 10-11), 그들은 우리의 구원을 기뻐하고(눅 15 : 10), 그리고 교회에 베푸시는 하나님의 여러 모양의 은혜에 놀라고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경배한다고 하였다(히 1 : 6).21 천사들이 자주 사람의 모양으로 거룩한 족장들에게 나타나서 그들과 이야기를 하며 그들에게서 환대를 받았다는 것 역시 동일한 의미이다(창 18 : 2). 그리고 그리스도 자신도 중보자의 위격에서 얻은 탁월성 때문에 천사라고 불렸다(말 3 : 1). 여러 세대 전에 사탄에 의해 제기되었고 그 후 자주 새로이 일어나는 그 어리석고 불합리한 사상에 대비하여 순박한 자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이 점에 대하여 언급하는 것이 내게는 좋다고 생각되었다.
10. 신적 영광은 천사들에게 귀속되지 않는다
아직 남아 있는 문제는 천사들이 모든 축복의 관리자요 공급자라고 말함으로써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있는 미신에 대항하는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성이 범하기 쉬운 과오는, 어떠한 존귀도 천사들로부터 억제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만 속하는 것을 천사들에게 돌리는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해서 지난 여러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영광이 여러 면으로 빛을 상실하게 되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헤아릴 수 없는 존귀가 천사들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싸우고 있는 악 중에서 이보다 더 오랜 것은 없다. 왜냐하면, 바울은 천사들을 높임으로써 그리스도를 천사들과 같은 수준에까지 끌어내린 자들과 큰 논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천사들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일체의 축복의 창시자라고 매우 열심히 주장하였다(골 1 : 16,20).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자족할 수 없는, 그리고 우리와 동일한 샘에서 물을 긷는 자들에게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확실히 신적 위엄의 광채가 천사들에게서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하나님께만 속하는 것들을 모두 그들에게 부여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은 없다. 요한도 계시록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그는,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계 19 : 10, 22 : 8-9)는 천사의 대답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천사들을 이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째서 직접 자기 스스로가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천사들을 통해서 자신의 권능을 보여주시고 신자의 안전을 위해 대비하시며 자비의 은사를 전달하시는가를 고려한다면 우리는 이 위험을 잘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은 필연성에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천사들 없이는 그가 아무것도 하실 수 없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천사들을 그대로 두고 자신의 의지만으로 자신의 일을 수행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을 덜기 위해 저들의 도움을 받으시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사를 사용하시는 것은 우리의 약함을 위로하기 위함이며, 이 위로는 우리의 마음으로 선한 소망을 가지게 하거나 또는 안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사실 주께서 스스로 우리의 보호자라고 선언하신 이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많은 위험과 그렇게 많은 해로운 것들과 그렇게 많은 종류의 원수들에게 둘러싸여져 있음을 알게 될 때에 주께서 만일 우리의 능력에 따라 은혜의 임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하셨다면, 우리는 유약하기 때문에 분명히 때로는 공포에 사로잡히고 때로는 절망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보호자에게 명령하여 우리의 안전을 보살펴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들의 옹호와 보호 속에 감싸여 있는 한, 어떠한 위험이 닥쳐와도 우리는 모든 해악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그 순수한 약속을 받고서도 우리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시 121 : 1)하고 찾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측량할 수 없는 자비와 친절로 우리의 이 잘못을 고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위대한 은총을 무시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엘리사의 사환에게서 우리는 이에 대한 실례를 보게 된다. 그는 아람의 군대가 성을 에워싸 피할 길이 없음을 보자 자신과 엘리사가 마치 죽게 된 것처럼 그 마음이 공포로 가득하였다. 이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사환의 눈을 열어 보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자 즉시 사환은 자기와 그 선지자를 보호할 불 말과 불 병거, 즉 무수한 하나님의 사자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왕하 6 : 17). 이에 힘을 얻은 사환은 정신을 차리고, 조금 전만 해도 보기만 해도 거의 절망할 것 같았던 그 원수들을 대담하게 경시할 수 있게 되었다.
12. 천사때문에 우리가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을 방해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천사의 직무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든 우리는 모든 의혹을 극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소망을 더욱 더 굳게 확립하는 데 목표를 두기로 하자. 실로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돕는 자들을 마련해 두신 것은, 무수한 원수들이 마치 주의 도우심보다 우세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 : 16)고 한 엘리사의 말에서 위안을 찾게 하려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더욱더 가까이 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시기 위해 세우신 천사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그러나 하나님을 우리의 유일한 원조자로 바라보고 부르며 선포하도록 천사들이 그 손으로 우리를 똑바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들을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유일하신 중보자 그리스도께 붙들어 매어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우리의 몸을 맡기며 헌신하게 하여 그 안에서 안식을 누리게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또한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사들이 만군의 주께서 서 계시는 사닥다리로 사람을 찾아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야곱의 환상에서 기술된 것을 우리는 마음에 담아 깊이 고정시켜야 하기 때문이다(창 28 : 12).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요 1 : 51)고 하신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서만 천사들의 사역이 우리에게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의 종은 천사의 보호를 받으면서도(창 24 : 7) 천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께 위탁하고 기도하며, 아브라함에게 주의 자비하심을 베풀어주시도록 간구하였던 것이다(창 24 : 1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천사와 나누기 위해 천사들을 자신의 능력과 선하심의 사역자로 삼은 것이 아닌 것처럼, 또한 우리의 신뢰를 천사들과 자신이 나눈다는 의미에서 그들을 자신의 도우심의 사역자로 약속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가까이 하고자 하며,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자비심을 더욱 베푸시도록 할 목적으로 천사들에게 경배하는 저 플라톤 철학을 물리쳐야 한다.22 미신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우리 종교에 끌어들이려 했고 또 오늘날까지도 굽히지 않고 계속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마귀. 13-19)
13. 성경은 원수와 대항하도록 우리를 미리 무장시켜 맞서게 한다
성경이 마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의도는, 모두가 우리들을 깨우쳐서 저들의 간교한 술책과 계략을 경계하며 따라서 이들 강력한 원수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있고 강한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사탄이 "이 세상 신"(고후 4 : 4), "이 세상 임금"(요 12 : 31)으로 불리고, "강한 자"(눅 11 : 21; 참조, 마 12 : 29),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 : 2), "우는 사자"(벧전 5 : 8)로 언급되는 것은, 오직 우리들로 하여금 한층 더 주의하고 경계하며 마귀와의 싸움을 위해 더 많은 준비를 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가끔 명백한 말로 기록되곤 하였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 : 8)라고 말한 후 곧 이어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 : 9)는 권고를 덧붙이고 있다. 바울도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 : 12)고 경고한 후, 그렇게 크고 그렇게 위험한 싸움을 싸우는 데 적합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고 명령하였다(엡 6 : 13이하). 우리는 원수가 가혹하게 우리를 위협한다는 것을 미리부터 경고 받아 왔다. 이 원수는 무모할 정도로 대담하며, 전투적용맹을 가진 자이며, 가능한 모든 무기를 가졌으며, 전술에 노련한 자의 화신(化身)인 것이다.23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즉, 우리는 부주의와 무기력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24 오히려 그와 반대로 다시 불붙는 용기를 가지고 전투에서 우리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투는 죽을 때에야 끝이 나는 것이므로 우리는 스스로를 격려하여 인내하도록 하자. 실로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를 자각하고, 무엇을 시도하든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자.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권고와 힘과 용기와 무기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14. 사악함의 영역
더우기 성경은 이 싸움을 수행할 수 있도록 우리를 더욱 자극하며 격려하기 위해, 우리와 싸우는 원수의 수가 하나 둘 하는 소수가 아니라 군대이라고 말한다. 막달라 마리아도 일곱 귀신에게 사로잡혀 있다가 놓였다고 성경은 말한다(막 16 : 9; 눅 8 : 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일단 내어쫓긴후에 악한 귀신에게 다시 그 장소를 허락해 주면 그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그 텅 빈 장소로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12 : 43-45). 실로 어떤 사람은 "군대" 마귀에 붙잡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눅 8 : 30). 그러므로 이상의 여러 실례를 통해서 우리는 무수한 원수들과 싸워야만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의 소수를 멸시하여 싸우기를 게을리하며, 혹은 가끔 휴전이 되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태만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나 마귀에 대하여 자주 단수로 언급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의의 나라를 반대하는 악의 통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의 단체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는 것처럼, 불신앙의 무리들과 불경건 그 자체는 그들에게 최고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그들의 왕과 함께 묘사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 25 : 41)고 말씀하셨다.
15. 화해할 수 없는 투쟁
마귀는 어디서나 하나님과 우리의 대적이라고 불려지고 있는데, 틀림없이 이 사실은 마귀와의 부단한 싸움에 우리의 마음을 불붙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큰 관심사로 여긴다면 마땅히 우리는 우리의 모든 힘을 기울여 이를 소멸시키려는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그리스도의 왕국을 증언하는 일에 우리가 열심히 낸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자와 타협할 수 없는 전쟁을 치러야만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자신의 구원에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파괴하려고 함정을 파는 자와 화목해서도 안 되고 휴전을 해서도 안 된다. 창세기 3장에는 그러한 자에 대한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을 박탈하며 인간을 파멸에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1-5절). 복음서의 기자들도 역시 그를 가리켜 "원수"라고 불렀으며(마 13 : 28,39), 영생의 씨앗을 부패케 하기 위해 가라지를 뿌리는 자라고 기술하였다(마 13 : 25). 요컨대,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거짓말장이요"(요 8 : 44)라고 하신 사탄에 대한 그리스도의 증거는 그의 모든 행위에서 경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거짓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대항하고 흑암으로 빛을 가리며 인간의 마음을 오류에 빠지게 하고 증오심을 일으키며 논쟁과 싸움을 일으켜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나라를 전복하며 인류를 자신과 함께 영원한 사망으로 떨어지게 하려는 목적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그는 본래 타락하고 사악하며 악의로 가득찬 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공격하는 데 열중하는 그 성질은 극도로 타락한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 : 8)고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이다. 실로 요한은 마귀를 모든 흉악과 불의의 창시자요 지도자이며 설계자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16. 마귀는 하나님 창조의 타락한 피조물이다.
그러나 마귀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의 본성에 속하는 이 사악함은 창조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타락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왜냐하면, 그에게 있는 정죄받아야 할 것들은 모두가 다 반역과 타락에서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가 현재와 같은 상태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과 전적으로 관계없는 것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였다.
주님께서도, 사탄은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라고 하시면서 그 이유를 "진리에 서지 못하기"(요 8 : 44) 때문이라고 설명하셨다. 마귀가 진리에 서지 못한다는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확실히 한때는 진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부름으로써, 전적으로 마귀 자신에게 돌려야 할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시키지 않도록 하셨다.
이상의 사실들은 비록 간단하고 또 명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위엄을 모든 비방으로부터 옹호하는 데는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마귀에 대하여 이 이상 더 많이 알거나, 혹은 무슨 다른 목적을 위해 안다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마귀의 타락과 그 타락의 원인, 방법, 시기, 성질에 대하여 일목요연하게성경이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또는 확실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불평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거나 혹은 아주 가볍게 언급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유익도 없는 공허한 이야기로 호기심을 만족시킨다는 것은 성령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덕을 세우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외에는 그 거룩한 말씀에서 아무것도 가르치시지 않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필요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마귀의 성질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간단한 지식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즉 악마는 창조시 본래는 하나님의 천사였으나 타락하여 자멸하였으며, 남을 파멸시키는 파멸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알아서 유익하기 때문에 베드로와 유다는 이를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벧후 2 : 4),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유 1 : 6)을 용서하지 아니하셨다. 그리고 바울은 택함 받은 천사에 대해 말한 바 있는데(딤전 5 : 21), 이것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 버림받는 천사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7. 마귀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
사탄과 하나님 사이에 불화와 반목이 있다고 하는것에 관하여 우리가 확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이 없이는 사탄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욥의 역사를 읽어보면,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에 스스로 나타났으며(요 1 : 6, 2 : 1), 따라서 먼저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않고는 어떠한 악도 감히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욥 1 : 12, 2 : 6). 또, 이와 같이 아합이 속임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사탄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위탁을 받아 자기 일을 수행하였다(왕상 22 : 20-22). 이러한 이유에서 사탄은 역시 사울을 괴롭힌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그가 그 불경건한 왕의 죄를 벌하기 위해서 채찍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었다(삼상 16 : 14, 18 : 10). 그리고 다른 곳에는 하나님께서 "벌하는 사자들"을 통하여 애굽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셨다고 기록되어 있다(시 78 : 49). 이상의 개개의 실례에 따라 바울은 불신자들의 눈이 어두워진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라고 증언하였다(살후 2 : 11). 그러나 조금 앞에서는 이를 사탄의 역사라고 불렀다(살후 2 : 9; 참조, 고후 4 : 4; 엡 2 : 2). 그러므로 사탄은 분명히 하나님의 권능하에 있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그를 섬기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실로 우리는 사탄이 하나님께 반항한다든가 사탄의 일과 하나님의 일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이 반항과 반대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는 지금 사탄의 의지나 노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는 본래 사악한 존재여서, 조금도 하나님의 의지에 순종하려고 하지 않고 아주 완강하게 불순종하며 전적으로 반항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하나님께 대하여 격렬하게 또 고의적으로 반항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사악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사악함이 마귀를 재촉하여,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신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행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권능의 고삐로 마귀를 잡아매고 제지하시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만을 행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창조주에게 순종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촉하실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18. 승리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자유롭게 악령들을 굴복시키며 그들의 활동을 지배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신자들과 싸우게 하심으로써 신자들을 훈련시키시고 그들을 기습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을 깨뜨리게 하시고 그들을 싸움으로 몰아 넣으시고 자주 피곤하게 만드시며 패배시키게 하며, 공포에 떨게 하시며, 때로는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게도 하신다. 그렇지만 악령들은 신자들을 정복하지도 못하며 박멸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악령은 불경자들을 정복하여 끌고 다니며, 그 영혼과 육체를 학대하고, 노예처럼 그들을 능욕하여 갖가지 수치스러운 행위를 일삼게 한다. 신자들은 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불안을 갖게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권고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 : 2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 : 8-9). 바울은 자기의 교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 "사탄의 사자를 주셨다"(고후 12 : 7)고 주장함으로써 자신도 이런 종류의 싸움을 면한 것이 아니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훈련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약속(창 3 : 15)은 그리스도와 그의 지체인 모든 신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들이 사탄에게 정복된다거나 압도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분명히 그들은 자주 근심에 빠지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을 잃지는 않는다. 심한 타격을 받아 쓰러지기도 하지만 후에 다시 일어난다. 상처를 받기는 하지만 치명적인 상처는 아니다. 요컨대, 그들은 전생애를 통해 수고하여 마침내는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한 개인의 행위에 국한시키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로운 복수로 다윗이 한때 사탄에게 내어준 바 되어, 사탄의 선동으로 인구 조사를 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삼하 24 : 1). 그리고 바울은 비록 마귀의 올무에 걸려 있는 자들에게도 아직 사죄의 소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딤후 2 : 25-26). 다른 구절에서 바울은, 위에 언급한 약속은 우리가 계속 싸워야 할 이 세상에서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며 이 싸움이 끝난 후 그 약속이 성취된다고 말하였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롬 16 : 20)고 그는 말하고 있다. 실로 이 승리는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있어서는 항상 완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세상 임금은 주님께 대하여 아무런 관계할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요 14 : 30).
더우기, 그 승리는 지금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우리에게는 부분적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연약한 육신을 벗어버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될 때에 완성될 것이다.
주님께서 친히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눅 10 : 18)고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왕국이 세워질 때에 사탄과 그의 권세는 무너지게 된다. 제자들이 그들의 전도의 효력에 대하여 보고했을 때, 이 답변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그것을 확인하셨다. 주님께서는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눅 11 : 21-22)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정복하셨으며(히 2 : 14), 교회를 해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모든 세력을 타파하셨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더라면, 교회는 매순간 몇백 번이고 파멸의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약하고 사탄의 광포의 세력은 그렇게도 강한데, 만일 우리의 인도자의 승리를 의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그 다양하고 끊임없는 공격에 대항하여 조금이라도 버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영혼에 대하여는 사탄이 그 어떤 권세도 행사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단지 자기 백성의 수에 넣지 않기로 하신 불경자들과 불신자들만을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추방당할 때까지는 아무런 문제없이 이 세상을 소유한다고 성경은 말한다(참조, 눅 11 : 21). 그는 또한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며(고후 4 : 4)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엡 2 : 2)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한 일로서, 불경자들은 모두가 다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이 하나님의 복수에 대행하는 사자들에게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 종속되었겠는가? 마지막으로, 저들은 저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나왔다고 한다(요 8 : 44). 왜냐하면, 신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것처럼, 불경자들은 타락하여 사탄의 형상을 지님으로써 당연히 그의 자녀로 인정되기 때문이다(요일 3 : 8-10).
19. 마귀는 어떤 상상이 아니라 실체이다
우리는 위에서 이미 거룩한 천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 속에서 일으키는 선한 영감 혹은 충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그 천박한 철학사상을 반박하였다.25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육신에서 오는 악한 감정 혹은 마음의 불안이 바로 마귀라고 생각하는 자들을 반박해야 한다.26 우리는 이러한 반박을 간단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적지 않게 그리고 명백하게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저들은 본래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유 1 : 6) "더러운 귀신" 또는 변절한 천사(마 12 : 43)라고 불려졌는데, 이때 그 이름은 충동이나 마음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각과 이해를 구비하고 있는 마음, 혹은 영(靈)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요한은 하나님의 자녀를 마귀의 자녀와 비교하였는데(요 8 : 44; 요일 3 : 10), 만일 이 "마귀"라는 말이 악한 영감 이상의 뜻을 가지지 못한다고 하면 그야말로 그것은 무의미한 비교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요한은, 보다 명백한 말씀을 첨가하여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요일 3 : 8)고 하였다. 유다 역시 "천사장 미가엘이……마귀와 다투어"라는 말씀에서, 악하고 배반한 천사를 선한 천사와 대립시켜 놓았다(유 1 : 9). 이것은 사탄이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타났다고 하는 욥의 기사와 일치한다(욥 1 : 6, 2 : 1). 더우기 그 중에서도 가장 명백한 구절들은, 마귀가 하나님의 심판에서 느끼기 시작하여 부활시에는 특별히 느끼게 될 형벌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마 8 : 29)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 : 41).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벧후 2 : 4).
만일 마귀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가 영원한 심판을 받도록 운명지어져 있으며 그를 위해 영원한 불이 준비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영광에 의해 지금 그들이 고통과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등의 표현들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 그러나 이 점은 주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들에게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지만 동시에 신기한 것만을 좋아하는 공상가들에게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의 증언은 저들에게 아무런 유익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의도한 바를 다 완수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불안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저들 자신과 저들보다 한층 더 단순한 사람들을 혼란케 하는 그러한 현혹에 대하여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을 무장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를 막론하고 그런 오류에 빠지고서도 원수가 없다고 스스로 생각함으로써 원수를 저항하는 일에 태만하거나 부주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창조에 관한 영적 교훈. 20-22)
20. 창조의 위대함과 풍요로움
한편 가장 아름다운 이 극장에서 도처에 표현된 하나님의 사역을 경건하게 즐기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말자.27 왜냐하면, 내가 다른 곳에서 말한 대로28 어디를 보나 눈에 띄는 것은 다 하나님의 사역임을 기억하는 일,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만물을 창조하셨는가를 경건히 명상하여 생각하는 일, 이러한 것들은 신앙을 위한 으뜸되는 증거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연의 질서에 있어서 첫째가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데 유익이 되는 것을 참된 신앙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모세가 간단하게 기록하였으며(창 1, 2장) 후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 특히 바실리우스(Basilius)나 암브로스(Ambrose)와 같은 사람들이 상세하게 설명한 우주 창조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29 이 창조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의 권능으로 하늘과 땅을 무에서 창조하셨다는 것, 이 권능으로 모든 종류의 생물과 무생물을 산출하셨다는 것, 놀라운 계열에 따라 각종의 무수한 사물들을 구별하셨다는 것, 각기 종류에 따라 거기에 적합한 성질을 주시고 임무를 정하시며 처소와 위치를 지정해 주셨다는 것, 만물은 부패하게 되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개의 종류가 마지막 날까지 보존되도록 그 길을 마련해 주셨다는 사실 등을 배우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은밀한 방법으로 어떤 피조물들을 배양하시되 끊임없이 그들에게 새 활력을 넣어 주시고 또 어떤 피조물에게는 번식력을 주시되 그것들이 죽을 때 그 종(种) 전체가 멸절되지 않도록 하시며, 천지를 놀랍도록 장식하시되 극도로 풍부하고 극도로 다양하고 극도로 아름답게 하여 마치 가장 정교하고 동시에 가장 풍부한 장식으로 꾸며지고 채워진 웅대하며 화려한 저택처럼 하셨다는 것을 배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처럼 화려한 미와 많은 위대한 은사들로 그를 장식하심으로써 자신의 모든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표본으로 삼으셨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우주 창조를 자세히 다루는 것이 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몇 가지 점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이미 독자들에게 경고한 대로, 이 문제에 대하여는 우주에 대한 기사를 충실하게 또는 성실하게 기록한 모세와 그외 사람들에게서 한층 더 충분한 지식을 찾는 것이 더욱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21.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역을 어떤 방향으로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을 어떤 목적에 적응시켜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깊이 논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대부분 이미 다른 곳에서 다루었으며30 따라서 현재의 목적에 관한 것은 두서너 마디로도 설명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의 그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권능과 공의와 선하심이 이 우주의 형성에서 어떻게 빛나고 있는가 함을 적절한 방법으로 설명하고자 할 때, 그 어떤 미사여구도 그와 같은 위대함에는 미칠 수 없을 것이다. 분명히 주님께서는 우리가 항상 이 거룩한 명상에 몰두해 있기를 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울에서 보는 것처럼, 모든 피조물에게서 하나님의 지혜, 공의, 선하심, 권능의 무한한 풍요함을 조용히 지켜볼 때, 그것들을 단순히 호기심으로, 말하자면 일시적으로 보아 넘길 것이 아니라 충분하게 생각하고 또 진지하고 충실하게 심사숙고하며 계속 그것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의 목적을 가르치는 데 있기 때문에,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이러한 문제들을 생략하는 것이 더 좋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자면 독자는 다음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첫째로 만일 누가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법칙에 따라 피조물에게서 보여 주신 그 명백한 권능을 아무 생각 없이 잊어버리고 그냥 넘겨 버리지 않는다면, 둘째로 누가 만일 마음에 감동을 받을 정도로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배운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천지의 창조주라는 것을 이해하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외관상 이 이상 더 아름다운 것으로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무수한 별들의 무리를 놀라운 질서에 따라 배치, 배열하시고 서로 어울리게 하신 그 예술가야말로 얼마나 위대한가 함을 우리가 생각할 때 비로소 이 법칙의 첫째 부분이 예증된다. 그는 어떤 별들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위치를 고정시켜 놓으셨으며, 어떤 별들에게는 한층 더 자유로운 운행을 허용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지정된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셨으며, 모든 별의 운행을 조정하여 별들로 하여금 낮과 밤, 달과 해(年), 그리고 계절을 구분하셨고, 우리가 항상 보는 대로 혼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날을 조화롭게 조절하셨다. 역시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을 보게 되는 것은 그처럼 큰 덩어리를 지탱해 나아가시며 천체를 신속히 운행하는 것과31 그와 비슷한 일들을 관찰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상의 몇 가지 예증만으로도 우주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을 아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충분히 밝혀 준다. 그렇지 않고 만일 내가 이 문제 전체를 설명하려고 결정하였다면,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끝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에서 나오는 수많은 이적,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수많은 증거는 우주에 있는 많은 종류의 사물의 수와 같으며, 실로 크고 작은 모든 존재하는 사물의 수와 같기 때문이다.
22.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에 법칙의 둘째 부분이 남아 있는데, 이것은 신앙과 보다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유익과 구원을 위해서 만물을 제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인식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우리 자신과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큰 은총에서 느끼며, 그리하여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32 바로 조금 앞에서 지적한 대로,33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창조의 순서를 통해 스스로 보여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엿새 동안 창조하신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창 1 : 31). 물론 하나님으로서는 창조의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동시에 또는 단숨에 완성하신다는 것이 그런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하시는 것에 비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섭리와 부성적(父性的)인 배려를 보여 주심으로써,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벌써 인간에게 유용하며 유익하다고 미리 아신 것들을 모두 준비하셨다.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는 이 가장 은혜로우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보고 계시는지 아닌지를 의심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망은이겠는가? 또한 우리가 아직 출생하지도 않았을 때 가장 풍부하게 모든 좋은 것들로 마련해 두신 것을 알고서도 이 하나님의 인자하심도 언젠가는 우리의 궁핍을 채워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에 떤다는 것은 얼마나 불경스러운 일인가? 이 외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관대하심에 힘입어 온 세상에 있는 것들이 다 우리에게 예속된다는 것을 모세에게서 듣는다(창 1 : 28, 9 : 2).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분명히 명목상의 빈 증여(赠与)로 우리를 조롱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안녕에 필요한 것은 그 어떠한 것도 결핍함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 결론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천지의 창조주로 부를 때마다 우리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의 분배는 그의 솜씨와 권능으로 된 것이며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져서 그의 성실한 보호 속에서 양육과 교육을 받고 있는 그의 자녀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축복의 충만함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대하고, 하나님께서도 구원에 필요한 것을 우리가 갖지 못한 채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완전히 신뢰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우리의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며, 우리에게 베풀어진 유익한 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으로 인식하고 이를 감사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인자하심의 아름다움에 의해 초대되었으므로 전심으로 그를 사랑하며 섬기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제 15 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 의지, 인간성의 원래의 모습에 대한 토론1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의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1-4)
1. 인간이 하나님 손에 의해 창조되었을 때 한 점의 죄도 없었다. 그러 므로 인간 자신의 죄를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
이제부터 인간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 해야 하겠는데,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함을 보여 주는 가장 고귀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처음에 말한 대로2 우리 자신에 대한 인식이 없이는 하나님에 대한 분명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에는 이중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우리의 모습은 어떠했는가에 대한 지식이며, 둘째는 아담이 타락한 후 인간의 상태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지식이다. 한편, 만일 우리가 이 비참한 파멸로 우리의 본성이 어떻게 부패되었고 어떻게 변형되었는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인간 창조를 이해한다 해도 그것은 그렇게 거의 유익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최초의 고결한 인간성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실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비참한 상태를 논하기 전에 먼저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어떠했는가를 인식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인간의 이 자연적인 악을 지적하는 가운데 그것을 인간 본성을 만드신 창조주께 책임지우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불경건은 모든 결함이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할 수만 있다면 이로써 그 자체의 충분한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난을 받으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과 싸우며, 마땅히 비난받아야 할 자기네 죄과를 하나님께 전가시킨다. 그리고 신격에 대해서 자기가 남보다 더 경건하게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하는 자들 또한 고의적으로 타락의 책임을 본성에 돌리므로 비록 애매하기는 하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본성에 어떤 결함이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수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육은 모든 구실을 다 찾아 이것으로 자신의 악에 대한 책임을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악한 의도를 열심히 반대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체의 간계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를 일체의 비난에서 변호하기 위해서 인류의 불행을 다루어야 한다. 우리는 나중에 적당한 자리에서, 아담에게 부여된 순결에서 인간이 얼마나 멀리 떠나갔는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3 우선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은 인간의 교만에 대하여 견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창 2 : 7, 18 : 27). 왜냐하면, "흙 집에 살며"(욥 4 : 19) 부분적으로는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한다는 것 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만든 그 그릇에 생명을 주시기로 계획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그릇이 불멸의 영혼이 거주할 수 있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아담은 당연히 창조주의 그 크신 관대함을 자랑할 수가 있었다.
2. 육체와 영혼의 차이
더우기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내가 아는 바로는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적이면서도 창조함을 받은 본질을 의미하며, 이것은 인간의 보다 고귀한 부분이다. 이 말은 가끔 "영"(靈, spirit)이라고 불린다. 이 명사들이 결합되는 경우에는 서로 그 의미를 달리하지만, "영"이라는 말이 단독으로 사용될 때에는 솔로몬이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라"(전 12 : 7)고 말한 것처럼 이 말은 "영혼"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영을 성부께 부탁하셨고(눅 23 : 46) 스데반이 그리스도께 자기 영혼을 위탁하였다는 사실은(행 7 : 59),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한 보호자가 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영혼이 "영"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호흡, 혹은 하나님께서 육체에 주입하신 힘일 뿐 실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상상한다. 그러나 그 사실 자체로 보나 성경 전체로 보나 저들은 어리석게도 큰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지나치게 세상에 애착을 갖고 사는 동안에는 우둔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실로 그들은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약 1 : 17), 흑암으로 눈이 어두워져서 죽음 후에도 생존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 빛은 흑암 속에서도 소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자기네 불멸의식에 그대로 머물게 된다. 확실히 양심은 선과악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에 응하는데, 바로 이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고 하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그렇다면 실체가 아닌 운동이 어떻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까지 들어설 수 있으며 자신의 죄책 때문에 스스로 공포를 느낄 수 있겠는가? 육체는 오직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의 두려움을 입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영혼이 실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에 관한 지식 자체는 이 세계를 초월하는 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충분히 입증해 준다. 왜냐하면, 일시적인 힘은 생명의 근원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 마음에 부여된 그 탁월한 여러 은사들은 신적인 무엇이 여기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즉, 이 모든 것들은 불멸적 실재에 대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짐승들이 소유하는 감각은 육체의 한계를 넘지 못하며, 혹은 육체에 속한 물질적인 것 이상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민첩함은 천지와 자연의 비밀을 찾아내며 이해와 기억으로 모든 시대를 알고 모든 사물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배열하며 또한 과거사에서 미래사를 추론하는 데, 이것은 분명히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무엇이 인간에게 감취어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4 우리의 지성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이해하지만, 육체는 전혀 그러한 개념을 형성하지 못한다. 우리는 옳은 것과 의로운 것 그리고 존경할 만한 것들을 파악하지만, 이것들은 육체적 감각에는 감취어 있다. 그러므로 영은 틀림없이 이 지성의 중심이다. 실로 사람을 혼미하게 하며, 생명마저 빼앗아 가는 듯이 보이는 잠자는 것 그 자체도 불멸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관념뿐만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감도 암시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저자들이 매우 화려한 언어로 훌륭하게 찬양 묘사한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나는 간단하게 다루었다.5 그러나 경건한 독자들에게는 이 단순한 주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와 구별되는 본질적인 무엇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가 "흙 집"에 살다가(욥 4 : 19), 죽을 때에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나 각각 몸으로 행한 행위에 따라 마지막 날에 보상을 받기 위해서 썩어질 것을 벗어버린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이상의 여러 구절들, 또는 자주 성경에 나타나는 그와 비슷한 구절들은, 영혼을 육체와 분명히 구별할 뿐만 아니라 "사람"이라는 명칭까지 그 혼에 붙여줌으로써 이것이 인간성의 주요 부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라고 신자들을 권고하면서(고후 7 : 1), 죄의 더러움이 머무는 두 부분을 지적해 준다. 베드로 또한 그리스도를 "영혼의 목자와 감독"(벧전 2 : 25)이라고 불렀지만,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영혼이 없었더라면 베드로의 이 말은 잘못된 말이었을 것이다. 만일 영혼이 자신의 고유한 실재를 가지지 못했다고 하면, 베드로가 말한 바 영혼의 영원한 구원(벧전 1 : 9) 혹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명령 그리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 : 11)는 주장은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와 똑같은 원리는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히 13 : 17)는 히브리서 저자의 말에도 적용된다. 바울이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고후 1 : 23)라고 한 사실도 이상과 똑같은 결론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영혼이 만일 형벌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다면 하나님 앞에 유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 역시,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20 : 28; 눅 12 : 5)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한층 더 명백하게 표현되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을 "우리 육체의 아버지"와 "영의 아버지"로 구별하였는데(히 12:9), 그는 더 이상 더 명백하게 영혼의 실재성을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영혼이 육체라는 감옥에서 해방된 후에 생존하지 못한다면 나사로의 영혼이 아브라함의 품에서 행복을 누리며 부자의 영혼이 무서운 고통 속에 있다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눅 16 : 22-23)은 불합리하다고 하겠다. 바울도, 우리가 육신에 그대로 머무는 동안에는 하나님과는 떠나는 것이요, 육신에서 떠날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동거하게 된다고 가르침으로써 이 점을 확언하였다(고후 5 : 6, 8). 크게 어렵지 않은 문제를 이 이상 더 길게 다루지 않기 위해서 나는 누가에게서 다음의 말만을 인용하여 첨가하고자 한다. 즉, 천사들과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은 사두개인들의 오류라는 사실이다(행 23 : 8).
3.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이 문제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는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서 얻을 수 있다(창 1:27)6.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인간의 외형에서 빛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 형상의 본래의 자리가 영혼에 자리잡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실로 나는, 인간의 외형이 우리를 동물과 구별하고 분리시키며 동시에 우리를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결합시켜 준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일 누구든지 "다른 짐승들은 땅을 내려다보도록 되어 있으나 인간은 얼굴을 똑바로 들고 하늘을 응시하며 별을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는7 사실을 하나님의 형상과 결합시키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 대하여는 격렬한 논쟁을 하지 않겠다. 그러나, 이들 외부적 특성에서 보여지고 또 번쩍이는 하나님의 형상이 바로 영적이라는 것을 확고한 원리로 삼아야 한다. 왜냐하면, 오시안더(Osiander)는8 자신의 저서에서 무익한 생각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가 그릇된 재간꾼임을 증명해 보였는데, 그는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육체와 영혼 양자에게 확대함으로써 하늘과 땅을 혼합하였던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은 그 형상을 인간에게 두었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그것은 아담이 비록 자신의 완전함을 그대로 보존하였다 해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대로 인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9 그리스도를 위하여 정해진 육체는 그것이 형성된 육체적 외모의 표본이요 전형이었다. 그러나 오시안더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형상이시라는 것을 어디서 찾아낼 것인가? 실로 나는 중보자의 위격에서 모든 신성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러나 순서상 앞서는 그 영원하신 말씀이 어떻게 성령의 형상이라고 불릴 수가 있겠는가?
요컨대, 성자가 성령의 형상으로 표현된다면 이때 성자와 성령의 구별은 없어지고 말 것이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는데, 어떻게 그가 성령과 닮았으며 어떤 특징과 어떤 모양으로 성령과 유사함을 표현하셨는가를 나는 그에게서 듣고 싶다. 그리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 : 26)고 하신 말씀은 성자의 위격에도 속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는 자신의 형상이시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것은 전혀 이유가 되지 않는다. 더우기 오시안더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면, 인간은 다만 사람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전형으로 하거나 표본으로 해서 형성된 데 불과하다. 이렇게 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그 원형은, 그가 육신을 쓰기로 되어 있는 한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고 가르친다.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형상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자들의 그 영리함은 한층 그럴 듯하지만,10 그러나 여기에도 역시 견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과 "모양"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주석가들 사이에 적지 않은 논쟁이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이 두 말의 차이점을 까닭 없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모양"이라는 말은 설명을 위해서 첨가된 것일 뿐 그 두 말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첫째, 말을 반복하는 것은 히브리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어서 그들은 한 가지 일을 두 번 연거푸 표현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둘째, 이 문제 자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까닭에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은 조금도 모호하지 않다. 따라서 이 두 말을 더욱 난해하게 철학적으로 해석하는 자들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다. 그들은 "젤렘"(zelem) 곧 형상이라는 말을 영혼의 실체에 적용하고, "데무트"(demuth) 곧 모양이라는 말을 영혼의 성질에 적용하기도 하며 혹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11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기로 결정하셨을 때, 그 표현이 모호했던 까닭으로, 설명을 위해서 "모양대로"라는 말을 추가하여 동일한 관념을 반복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시고, 그 속에 자기의 모양의 특징을 새겨 넣으심으로써 그 형상 안에서 자신을 반사하려 하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세는 조금 후에 이와 똑같은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지만 "모양"에 대하여는 전혀 말하지 아니하였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인간의 일부분이나 혹은 여러 가지 은사를 소유한 영혼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진 흙에서 그 이름을 받은 아담 전체라고 한 오시안더의 반대는 무익한 것이다. 건전한 마음을 소유한 독자라고 하면, 어느 누구도 그러한 반대를 무익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을 죽을 존재로 말한다고 해서 영혼도 죽음에 종속된다고 할 수는 없으며, 인간을 "이성적 동물"12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또한 이성이나 지성이 육체에 속한다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혼이 인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을 영혼과 관련시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앞에서 주장한 원칙을 고수하여, 하나님의 모양은 모든 종류의 동물을 훨씬 능가하는 인간성의 탁월성 전체에까지 확대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아담이 처음에 받았던 그 완전함을 의미한다. 아담은 처음에는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에서 기인된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의 주요 좌소가 가슴과 마음, 혹은 영혼과 그 능력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나 인간의 어느 부분에도, 심지어는 육체 자체에도 그 광채의 얼마가 빛나지 않는 곳은 없다. 확실히 하나님의 영광의 어떤 흔적들은 세계 도처에서 빛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고 말할 때 거기에는 인간을 모든 다른 피조물 이상으로 높이는 것 곧 인간을 범속(凡俗)에서 구별하는 무언의 대조가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천사들이 하나님의 모양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대로 우리들의 최고의 완성은 천사들과 같이 되는 데 있기 때문이다(마 22 : 30). 그러나 모세가 이러한 특수한 호칭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 것은 당연하였다. 그는 특별히 인간을 다만 눈에 보이는 피조물과만 비교하였던 것이다.
4. 하나님은 형상에 대한 참된 본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탁월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반영으로 간주되어야 할 기능들을 보다 명백하게 알지 못한다면, 아직 이 "형상"에 관한 정의는 충분히 내려졌다고 볼 수 없다. 참으로, 이것을 타락한 인간성의 회복에서보다 더 잘 알 수 있는 곳은 없다. 아담이 그의 원래의 상태에서 타락했을 때, 이 변절로 말미암아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소멸되거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아주 부패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다만 무섭도록 추한 것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구원의 회복의 시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되고 완전한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이유에서 제2의 아담이라고 불려진다. 바울은, 신자가 그리스도에게서 받는 "살려 주는 영"과 아담이 지음을 받을 때 받은 "산 영"을 대조하고(고전 15 : 45) 중생(重生)의 은혜의 부요함을 찬양하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것이 중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다른 중요한 점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다른 곳에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 3 : 10)고 가르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과 같은 권고와 서로 일치하는 데가 있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 : 24).
우리는 이제 바울이 이 갱신에 대하여 주로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가를 알게 된다. 그는 첫째로는 지식을 말하며, 둘째로는 순결한 의와 거룩함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 형식이 제유법(提喻法)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만 그러나 이 원리는 전복될 수 없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새롭게 하심에13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 자체에 있어서도 역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도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고후 3 : 18). 지금 우리는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완전하신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 형상과 같게 될 때에, 우리도 그와 같이 회복되어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된다.
이러한 주장이 확립되면 육체의 모양에 대한 오시안더의 공상은 즉시 스스로 소멸되고 만다. 그러나 바울이 남자만을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고전 11 : 7)이라고 하고 여자를 이 명예로운 지위에서 제외하고 있는 것은 전후 문맥상으로 보아 정치적 질서에 제한시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형상이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관계되는 것을 모두 다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한은 그와 똑같은 사실을 다른 말로 단정하여, 태초로부터 하나님의 영원하신 말씀 안에 있었던 "생명"이 바로 "사람들의 빛"(요 1 : 4)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의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특수한 은총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인간이 평범한 생명을 부여받지 않고 지성의 빛이 결합된 생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동물들과는 구별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동시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어떻게 창조되었는가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성의 완전한 탁월성으로, 이것은 타락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빛나고 있었으나 후에는 부패하여 거의 지워졌기 때문에, 파멸 후에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혼란하고 이지러지고 오염된 것뿐이다. 이것은 지금 부분적으로 피택자들에게서 보게 되는데, 그것도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한 자에게서만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은 장차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광채를 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형상이 어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영혼의 모든 기능을 논한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영혼이 오성과 의지와 기억을 내포한다고 해서14 그것을 삼위일체의 반영이라고 본 어거스틴이 이론은 결코 건전한 것이 못 된다. 또한 하나님의 모양이 인간에게 주어진 지배권에 있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도 개연성이 없다. 이것은 마치 인간이 만물의 상속자요 소유자로 정해졌다는 이 특징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형상은 당연히 인간의 내부에서 찾아야 하는 것으로,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실로 그것은 영혼의 내적 선(善)인 것이다.
5. 영혼 유출에 관한 마니교도의 오류
더 나아가기 전에, 우리는 마니교도의 망상을 공박할 필요가 있다. 세르베투스는 이러한 망상을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소개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창 2 : 7), 그들은 마치 무한한 신성의 어느 부분이 인간 속에 흘러 들어오기나 한 것처럼, 영혼을 하나님의 본질의 파생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악마적인 오류가 얼마나 우둔하며 얼마나 추악한 모순을 가져 왔는가를 지적하기란 쉬운 일이다. 왜냐하면 만약 하나님의 본질에서 인간의 영혼이 유출되었다고 하면,15 하나님의 본성은 변화와 고뇌뿐만 아니라 무지, 사악한 욕망, 허약, 그리고 각종 죄악에도 예속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간만큼 불안정한 존재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은 서로 반대되는 동기로 말미암아 동요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산란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무지로 인해 거듭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는 지극히 작은 유혹에도 넘어지는 존재이다. 우리가 알기에 인간의 마음은, 시궁창이자 각종 불결한 것들의 잠복처이다. 그러므로 만일 영혼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신성의 은밀한 유입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여러 불결한 것들을 모두 하나님의 본성으로 돌려야 할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실로 바울은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16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행 17 : 28)고 말한 바 있거니와, 이것은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특성에 있어서 그의 소생이다. 이것 또한 하나님께서 은사로 우리를 장식하시는 한에 있어서만 그러한 것이다. 동시에 창조주의 본질을 분할하여 각자가 그 일부분을 소유한다는 것은 극단의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에 새겨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혼도 천사와 마찬가지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틀림없는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창조는 유입이 아니라, 무로부터의 존재의 시작인 것이다. 영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요 육체를 떠날 때에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해서(전 12 : 7),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체에서 일부 뜯어 낸 것이라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오시안더는 이 문제에 있어서도 자신의 환상에 빠져 스스로 불경건의 오류에 말려들고 있다. 즉 그는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본질적 의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본체를 우리에게 부어 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측량할 수 없는 큰 능력으로 우리를 자신과 비슷하게 만드실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아무리 이 기만을 위장하려 해도 저들은 건전한 독자들의 눈을 가려 마니교도의 오류를 보지 못하게는 하지 못할 것이다. 또한 바울이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에 관해 이야기했을 때 우리는 그의 말에서, 인간은 본체의 유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의 은혜와 권능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추론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 : 18)고 하였다. 이 성령은 분명히 우리 안에서 일하시되, 우리를 하나님과 동일 본질로 만드시지는 않는다.
(아담의 타락 견해에서 비판받는 철학자들의 영혼관. 6-8)
6. 영혼과 그 기능
"영혼"의 정의를 철학자들에게서 찾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플라톤을 제외하고는 그들중 영혼의 불멸적인 실체를 올바로 주장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사실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가운데서도 이 문제를 다룬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분명하게 가르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의 견해는 보다 정확하였으니, 그는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17 다른 사람들은 영혼의 능력과 기능들을 현세의 생활에 너무 고착시키고, 육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였다.18
실로 영혼은 무형의 실체임을 우리는 이미 성경에서 배웠다.19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영혼이 공간적으로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해도 그것은 육체속에 거처하는 것 처럼 간주하여 거기에 머물며,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넣어 주고, 육체의 모든 기관을 각각의 행동에 적절하고 유용하게 할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을 다스림에 있어서도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며, 그리고 지상생활의 의무만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한다는 사실이다. 이 마지막 것은 타락 때문에 분명하게 지각되지는 않지만, 그러나 어떤 흔적이 새겨진 채 인간의 죄악 자체 속에서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명성에 대한 그렇게 큰 관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 수치심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수치심은 어디서 오는가? 명예로운 것을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실의 시초와 원인은, 인간이 의를 함양하도록 태어났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며, 여기에 바로 종교의 씨앗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이 천상의 생활을 명상하도록 지음을 받은 것처럼,20 또한 이에 대한 지식이 그 영혼에 새겨져 있다는 것도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완성되는 행복을 인간이 몰랐다고 하면 그는 사실상 지성의 가장 중요한 효용을 결여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혼의 주된 활동은 이것에 도달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그는 자신에게 이성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게 될 것이다.
사람에게는 감각적 영혼과 이성적 영혼이라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는 자들의 주장이 타당성이 있는 듯이 보여도21 그들의 추리에는 확고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그 경박하며 무익한 주장으로 우리 스스로가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모든 기관의 감각적 활동과 영혼이 이성적 부분 사이에는 커다란 모순이 있다고 저들은 말한다. 이는 마치 이성 그 자체는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전쟁터의 군대들처럼 서로 반대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은 인간성의 타락에서 오는 것이므로 영혼의 기능들이 둘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기능은 상호간에 충분한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기능에 대하여 정교하게 논하는 일은 철학자들에게 맡기기로 하겠다. 우리에게는 다만 경건의 덕을 세우기 위한 단순한 정의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실로 나는 저들의 가르치는 바가 참된 것이며, 알아서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배워서 유익한 것이며, 또한 능숙한 솜씨로 수집된 것임을 인정한다. 이에 나는 저들을 연구하며 저들에게서 배우기를 원하는 자들이 있어도 이를 금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나는 먼저 오관(五官)이 있음을 인정한다. 플라톤은 이를 차라리 기관(器官)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였으며, 이 기관에 의해 일체의 대상이 일종의 그릇처럼 공통 감각에 전달된다고 하였다.22 다음에는 공통 감각에 의해 이해된 것들을 식별하는 공상력이 따른다. 그 다음에는 보편적 판단을 포함한 이성이 따른다. 마지막으로는 오성(悟性)이 있는데, 이것은 이성이 산만하게 생각한 것을 집중적이며 조용한 명상 속에서 정관(静观)한다. 오성, 이성, 공상력 등 영혼의 세 가지 인식 기능과 일치하는 세 가지 욕구 기능도 있다. 첫째는 의지인데, 이것은 오성과 이성이 제시하는 것을 추구한다. 둘째는 분노로, 이것은 이성과 공상력에 의해서 제시된 것을 포착한다. 셋째는 욕망으로, 이것은 공상력과 감각에 의해 제시된 것을 파악한다.23
이상의 견해들은 참된 것이며 적어도 있음직한 것들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이 우리를 돕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 자신의 불분명한 데로 끌어넣을 것이 두렵기 때문에 이를 당연히 생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영혼의 능력을 여러 가지로 분류하여 기능이라고 말하고 이성이 없다고 해 어느 다른 기능의 지도를 받아 이성에 복종한다면, 하나를 욕구적이라 칭하고, 다른 하나는 그 자체 이성에 관여하기 때문에 이지적이라고 칭한다고 해도 나는 이를 강하게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행동의 원리, 즉 감각, 오성, 욕구가 있다는 것도 반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구분을 짓되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구분을 짓도록 하자. 이것은 분명히 철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구분이다. 저들은 매우 단순하게 말하기를 원하면서도 영혼을 욕구와 오성으로 구분하여 이 둘을 이중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저들은 가끔 후자를 관조적이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만으로 만족하고 적극적인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키케로는 이를 지력이라는 말로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24 때로는 그것을 실천적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선과 악을 이해함으로써 의지를 다양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이 구분에는 옳고 의로운 생활방법에 관한 지식이 내포되어 있다. 저들은 또한 전자(前者) 곧 욕구를 의지와 정욕으로 구분하고, 저들이 "불레시스( )"라고 부르는 욕구가 이성에 복종할 때에는 이를 "홀메( , 의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욕구가 이성의 멍에를 내던지고 방종에 빠질 때에는 "파토스( , 격정)"가 된다.25 이와 같이 저들은 항상, 사람에게는 자신을 적절히 다스릴 수 있는 기능으로서의 이성이 있다고 상상하고 있다.
7. 진실로 기본적인 능력으로서의 견해와 의지
우리는 지금 하는 수 없이 이런 식의 가르침에서 다소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철학자들은 타락에 대한 형벌에서 오는 인간성의 부패를 모르고 사람의 전혀 대립되는 두 상태를 부당하게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영혼이 두 부분, 곧 오성과 의지로 되어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로 하자. 실로 이 구분은 현재 우리의 목적에 편리한 것이다. 그리고 오성이 하는 일은 대상을 식별하여 대상을 각각 시인하든가 시인하지 않든가 하는 것이다. 한편 의지가 하는 일은 오성이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선택하며 추구하고, 오성이 부인하는 것을 거절하며 피하는 것이다.26 우리는 여기서, 마음 그 자체에는 활동이 없고 그것은 선택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사소한 논의에 붙들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27 그는 이 선택을 욕구적 오성이라고 불렀다. 무익한 문제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오성은 말하자면 영혼의 지도자요 지배자이며 의지는 오성의 명령을 항상 유의하며 자신의 욕망에 있어서 오성의 판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자. 이러한 이유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욕구에 있어서의 회피 혹은 추구는 마음에 있어서의 긍정 혹은 부정에 상응한다는 것을 진실하게 가르쳤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28 오성이 의지의 방향을 얼마나 확고하게 지배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다만, 이 두 기능 중 어느 하나에도 관계가 없는 힘이 영혼 안에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감각을 오성에 포함시킨다. 한편 철학자들은 이를 구별하여, 감각은 쾌락을 바라고 오성은 선을 추구한다고 한다. 여기서 감각적 욕구는 과도한 욕망 또는 정욕이 되고 오성의 경향은 의지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저들이 좋아하는 "욕구"라는 말 대신에 보다 흔히 쓰이는 "의지"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8. 자유 선택과 아담의 책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에서 각각 분간해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철학자들은 이 지도적인 부분을 "토 헤게모니콘(toj hgemonikovn, 지도력)"이라고 불렀다.29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의 통제아래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인간의 최초의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때문에 그의 이성과 지성, 분별력, 판단력은 지상생활을 지배하는 데 있어서 충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것으로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라갈 수도 있었다. 여기에 선택이 추가되어, 욕구를 조정하고, 모든 기관의 활동을 조정하며 그리하여 의지로 하여금 이성의 지도에 완전히 따르게 하였다.
이러한 완전한 상태에서, 인간은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지금 어떠한 일의 발생 여부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본성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밀한 예정의 문제를 여기서 소개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아담은 자기가 원하기만 했더라면 넘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그는 다만 자신의 의지로 타락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의지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 질 수 있었으며 따라서 항구적인 인내성을 받지 못했던 까닭으로, 그는 아주 쉽게 타락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선악을 선택하는 일은 자유로웠다. 그러나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파멸시킴으로써 자신의 축복을 부패시키기 전에는 그의 마음과 의지는 최고의 공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모든 유기적인 부분들은 순종할 수 있도록 바르게 조직되어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철학자들은 흑암 속에서 크게 헤매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폐허 속에서 건축물을, 흩어진 조각들 가운데서 균형이 잘 잡힌 구조물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선과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택이 없다면 인간은 이성적 동물일 수가 없을 것이라는 원리를 고수하였다.30 그들은 또한, 인간이 자신의 계획에 따라 생활을 조정하지 못한다면 덕과 악덕의 구별은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도 없었더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에게 감취어 있었으며, 따라서 인간이 천지를 혼동한다고 해서 놀랄 것은 없다. 그런데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 철학자들의 사상과 하늘나라의 교리를 절충함으로써 타락하여 영적 파멸에 들어간 인간에게서 여전히 자유 선택을 찾는 자들이야말로 분명히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며, 하늘과 땅 어디에도 그들의 이 절충 사상은 접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적당한 곳에서 보다 충분히 다루게 될 것이다.31 이제 우리는, 인간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그는 그의 모든 후손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으며, 아담의 후손은 아담의 부패한 상태에서부터 기원하여 유전적인 오염을 물려받았다는 것을 유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영혼의 각 부분은 올바르게 형성되었으며 마음은 건전하였고 의지는 선을 선택할 자유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32 만일 누군가가 아담의 의지의 힘이 약했던 까닭에 그것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아담의 신분 그 자체가 어떠한 변명도 물리치게해 줄 것이라고 나는 답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범죄할 수 없거나 범죄를 원하지 않도록 인간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고 하나님께 강요한다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실로 그러한 인간성은 한층 탁월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마치 이런 본성을 사람에게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불평한다는 것은 매우 악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뻐하심에 따라 자유롭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인내의 힘을 주셔서 그를 붙들어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취어 있다. 그리고 근신하여 이를 캐내지 않는 것이 우리로서는 지혜로운 일이다. 실로 아담이 의지를 행사하였더라면 그는 그 능력을 받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능력을 사용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의지의 행사가 있으려면 인내가 따르기 때문이다.33 그러나 아담으로서는 조금도 변명할 여지가 없으니, 그는 자신의 파멸을 자발적으로 초래하였을 정도로 아주 많은 힘을 받았던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평범하고 변하기 쉬운 의지를 주시어 그를 타락하게 하고 이 타락에서 자신의 영광의 기회를 얻으려고 할 필요가 없으셨다.
제 16 장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세계를 권능으로 양육하시고 보존하시며 섭리로써 그 모든 부분을 다스리신다1
(철학자들의 의견과 달리,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주장된다. 1-4)
1. 창조와 섭리는 분리될 수 없다.
더우기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단번에 완성하신 순간적인 창조주로 삼는다는 것은 차디찬, 그리고 무미건조한 사상이다. 그리고 우주가 처음 시작될 때와 다름없이 그 후 영속적인 상태에 있어서도 똑같이 하나님의 권능이 빛나고 있음을 우리가 안다는 점에서 우리는 망령된 이교도들과 달라야 한다. 비록 경건치 못한 자들의 마음도 천지를 관찰할 때 창조주에게 그 생각이 미치지 않을 수 없게 되지만, 그러나 신앙은 그 자체의 특수한 방법으로 창조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하나님께 둔다.
우리가 앞에서 인용한 사도의 주장,2 곧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히 11 : 3)라는 말씀은 바로 여기에 속한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를 모르면 아무리 마음으로 이해하고 말로 고백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말의 뜻이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창조 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능에 일단 마주치게 될 때에 거기에 그대로 멈추게 된다. 기껏해야 그러한 일을 이룩하신 창조주의 지혜, 권능, 선을 판단하며 정관 할뿐이다(이것들은 이미 명백한 자명한 진리이며 원하지 않는 자들까지도 그렇게 하도록 한다). 더우기 육신의 생각은, 보존하며 조정하는 어떤 일반적인 활동이 있는데 여기에서 운동의 힘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육신의 생각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주신 힘이 있으며 이것은 만물을 유지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앙은 이보다 훨씬 더 안으로 들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즉, 하나님께서 만물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발견한 즉시 그가 만물의 통치자요 보호자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보편적인 운동에 의하여 천체와3 그 각 부분을 운행하시며,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만물은 하찮은 참새 한 마리까지도 유지하시고 양육하시며 보호하시는 통치자요 보존자이신 것이다(마 10 : 29). 그리하여 다윗은 우주가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고 간단히 진술한 후에, 즉시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시 33 : 6)라고 섭리의 영속적인 과정을 기술하였다. 곧 이어 그는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시 33 : 13)라는 말씀을 추가하였으며, 그 뒤에도 이와 똑같은 의미의 말씀이 따른다. 모든 사람이 그처럼 명확하게 판단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주가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사를 돌보신다는 것은 믿지 못할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피조물을 돌보신다는 확신이 없이는 우주가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무도 신중히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 가장 좋은 순서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우리를 인도한 것은 타당하다 하겠다. 일반적으로 우주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으로 생기를 얻는다고 철학자들은 가르치며 인간의 마음도 그렇게 느낀다. 그러나 저들은 다윗이 모든 경건한 사람들과 함께 도달한 곳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 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 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 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 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 104 : 27-30). 실로 저들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 : 28)고 한 바울의 진술에 동의한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바울이 주장하는 은총에 대한 진지한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인 사랑을 알게 되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돌보심을 조금도 맛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2. 운명이나 우연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차이점을 보다 더 명백히 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의 가르치는데로 하나님의 섭리는 운명이나 우연한 사건과는 정반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4 그런데 세상 만사가 우연히 발생한다는 견해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공통적인 신념으로 되어 왔으며, 오늘날 역시 모든 사람들은 그와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다. 이 부패한 견해로 말미암아 섭리에 대하여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확실히 흐려졌으며 뿐만 아니라 거의 매몰되다시피 되었다. 사람이 강도나 짐승을 만났다고 하자. 바다에서 갑작스런 강풍을 만나 파선을 당했다고 하자. 집이나 나무가 넘어져 압사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광야를 방황하다가 굶주림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자. 파도에 밀려 표류하던 중 마침내는 항구에 다달아 아슬아슬하게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했다고 하자. 인간의 이성은 이 모든 사건들을 그것이 번영이든 불행이든 모두 운명의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마 10 : 30)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은 자라면 누구나 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원인을 볼 것이며 하나님의 은밀하신 계획에 따라 만사가 지배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무생물들은 각각 본래 자신의 특성을 부여받았다고 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현재의 손으로 지배되지 않는 한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만큼 효력을 계속 부어 주시는 기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그것들을 이런 일 저런 일에 적절하게 사용하신다.
태양의 힘보다 더 놀랍고 더 빛나는 힘을 가진 피조물은 없다. 태양은 그 빛으로 온 지구를 비출 뿐만 아니라 그 열로 모든 생물을 양육하고 소생시키니 이 얼마나 위대한가? 그 광선으로는 땅에 풍요함을 불어넣지 않는가? 태양은 땅에 있는 씨앗들을 따뜻하게 하고 그것들이 파랗게 싹트게 하며 그것들을 키우고 강하게 하고 또한 신선한 자양분을 공급하여 마침내는 줄기를 일게 하지 않는가? 태양은 식물에 계속 따뜻한 온기를 공급하여 꽃을 피우고 다시 꽃에서 열매를 맺게 하며, 그 다음 뜨거운 열로 열매를 무르익게 하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수목이나 포도나무도 태양의 따뜻한 열로써 처음에는 싹을 틔우고 잎사귀를 내며, 다음으로는 꽃을, 그리고 이 꽃에서 다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위한 전적인 영광을 요구하시기 위해, 태양을 창조하시기 전에 먼저 빛이 있게 하시고 땅이 각종 풀과 과실로 충만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창 1 : 3,11,14).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은 태양의 창조 이전에 존재한 것들의 원리 혹은 필연적 원인이라고 간주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태양 없이도 스스로 일하시는 데 조금도 어려움이 없으셨다. 그리고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태양이 한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과(수 10 : 13), 히스기야 왕을 위해서 태양의 그림자가 십도 물러갔다는 것을(왕하 20 : 11; 사 38 : 8) 우리는 성경에서 읽게 된다. 그런데 이 몇 가지 이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태양의 매일의 출몰은 자연의 맹목적인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자신의 부성적인 은총을 새로이 기억할 수 있도록 태양의 운행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입증하셨다.
겨울이 지나면 봄으로, 봄 뒤에는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바뀌는 것보다 더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그러나 이 계절의 순서에는 매우 커다란 그리고 한결같지 않은 다양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새롭고 특별한 섭리가 매년, 매월, 매일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3. 하나님의 섭리가 만사를 지배하신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전능을 주장하시는 동시에 이 전능을 우리가 인식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전능이란, 궤변가들이5 상상하는 것처럼 공허하고 게으르며 거의 무의식적인 그런 것이 아니라 주의 깊고 효과적이시며 활동적이시고 계속 일하시는 그런 전능을 말한다. 실로 전능은 한번 정해진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강에게 명하는 그런 혼란한 운동의 일반적인 원리가 아니라 개개의 특수한 운동을 향해 작용하는 권능이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가 확실히 활동할 수 있으시되 때때로 일을 중단하시고 한가하게 앉아 있다든가 혹은 그가 이미 정해 놓은 자연의 질서를 일반적인 충동으로 계속 운행시키시기 때문이 아니라 천지를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기 뜻에 따르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만물을 조정하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편에는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 : 3)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계획된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을 철학자들의 방법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모든 운동의 기원이요 원인이기 때문에 그를 제1동인(动因)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6 이는 역경을 당했을 때 신자는,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통치가 이처럼 하나님의 모든 일에 확대된다면 이를 자연의 영향하에 둔다는 것은 유치한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 실로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자연 법칙에 의하여 만물이 자유로운 과정에 따라 생성되도록 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를 좁은 한계 내에 제한시키는 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그 영광을 박탈하는 것 못지 않게 자기들에게서도 가장 유용한 교리를 빼앗아 버린다.7 왜냐하면, 인간이 만일 하늘, 공기, 땅, 물 등의 운동에 예속되었다고 하면 아마 인간보다 더 비참한 존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각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선하심은 매우 무가치하게 약화될 것이다. 다윗은 아직 어머니의 젖을 먹는 어린아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웅변으로 찬양하기에 충분하다고 외치고 있는데(시 8 : 2)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즉시 하나님의 돌보심에 따라 준비된 젖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참으로 어떤 어머니의 젖은 풍부하나 어떤 어머니의 젖은 거의 말라 있다는 것은, 경험이 명백히 입증해 주는 것인 만큼 이것은 우리의 눈도, 우리의 감각도 피할 수 없는 일반적인 사실이다. 어떤 아기에게는 더 풍부하게 젖을 먹이시고, 어떤 아기를 위해서는 불충분하게 먹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바로 찬양하는 자들은 여기에서 두 가지 유익을 얻게 된다. 첫째, 하늘과 땅을 소유하시며 모든 피조물을 진심으로 순종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축복하시기에 풍부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점이다. 둘째, 유익은 저들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안전하게 쉴 수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하는 재난이 어디서 오든 그것들을 다 자신의 의지에 예속시키시고, 자신의 권위로 극도로 광포하고 또 온갖 장비를 갖춘 사탄을 억제하시며 우리의 안녕과 반대되는 것은 모두 그의 명령에 복종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위험을 만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느끼는 억제할 수 없는 미신적인 공포는 다른 방법으로는 조정할 수도 진정시킬 수도 없다. 만일 우리가 피조물에게서 위협을 받으며 강한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마치 그 피조물에게 우리를 해칠 수 있는 어떤 고유한 힘이나 있는 것처럼, 혹은 그것들이 우연하게나마 우리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것처럼, 또는 하나님께는 그것들의 해로운 행위를 물리치고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무서워 떤다고 하면, 이것은 미신적으로 겁을 먹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선지자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 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렘 10 : 2)고 명하였다. 확실히 그는 모든 공포를 다 정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주를 통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별들이 통치한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행복과 불행은 별들의 결정과 징조에 달려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공상한다. 따라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한 분 하나님이 아니라 별이나 혜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불신앙에서 피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즉, 피조물에게는 기이한 힘, 기이한 활동, 기이한 운동이 없으며,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지배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아시며 원하셔서 결정하시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8
4. 섭리의 본질
그러면 첫째로, 섭리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땅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하늘에서 팔짱만 끼고 지켜보시는 것이 아니라9 오히려 열쇠의 관리자로서 모든 사건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자들은 인식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섭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눈 못지 않게 그의 두 손에도 관련되어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에게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 : 8)고 하였을 때,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장래의 일을 예지하신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난국과 당황케 하는 일을 언제나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그 미지의 사건에 관한 걱정을 맡기고자 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섭리는 행위로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단순한 예지에 대하여 크게 떠벌리는 것은 지나친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 하겠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면서도 그것을 혼란되고 잡다한 통치로 보는 사람들의 오류는 그렇게 심하게 조잡하지는 않은 편이다. 그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운동에 의해서 천체와 그 각 부분을 회전시키시며 운행시키시되 피조물 하나하나의 활동을 특수하게 지도하지는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도 용납될 수 없는 오류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편적이라고 하는 이 섭리에는 모든 피조물이 우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나 인간이 그의 자유 선택에 따라 이쪽 혹은 저쪽으로 향하는 것을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그들은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다음과 같은 구별을 지어 놓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권능으로 인간에게 운동력을 불어넣어 주시고 이 운동력에 의해서 인간은 자신 안에 뿌리박고 있는 본성으로 행동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계획에 따라 스스로의 행위를 조정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하였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주와 인간사 그리고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스려지기는 하나 하나님의 결정에 따라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들 생각의 요점이다. 하나님은 게을러서 활동하시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에피큐로스 학파(이 질병은 항상 세계에 충분하다)와 이에 못지 않게 어리석은 사람들, 곧 하나님은 공중의 상반부(上半部)는 다스리시고 그 하반부(下半部)는 운명에 맡긴다고 공상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나는 말하지 않겠다.10 말 못하는 피조물들까지도 그 엄청난 광란에 대하여 충분히 부르짖고 있지 않는가?
("일반적" 섭리와 "특별" 섭리)
그러므로 이제 나는 (거의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견해를 반박하고자 하는데,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일종의 맹목적이며 애매모호한 운동으로 인정할 뿐 하나님께서 무한한 지혜로 만물을 지도하시며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배치하시는 사실들을 그에게서 박탈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견해는 하나님을 이름만의 우주의 통치자일 뿐 실재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지배력을 빼앗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묻고 싶다. 지배한다는 것은 지휘하는 것들을 결정된 질서에 따라 권위로 지배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라고. 그러나, 우주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제정하신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실 뿐만 아니라 그가 만드신 피조물 하나하나를 특별히 돌보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기만 한다면 나는 그들이 말하는 일반 섭리에 대하여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겠다. 마치 만물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일단 결정하신 것은 저절로 운행되어 나가는 것처럼 여러 종류의 사물이 자연의 은밀한 충동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 : 17). 그리고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 : 28)고 주장한 바 있다. 또한 히브리서의 저자는11 그리스도의 신성을 입증할 뜻으로,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 : 3)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해서, 의심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확실하고 명백한 성격의 증거로 확증된 그 특별 섭리를 부당하게 가르치고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확실히 내가 말한 바 있는 휘장으로 그 특별 섭리를 가리는 자들도, 많은 것들이 하나님의 특별 간섭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저들은 이것을 특수한 행동에만 잘못 국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개개의 사건들을 조정하시며 이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결정된 계획서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성경이 입증하는 특별 섭리의 교리. 5-7)
5. 하나님의 섭리는 또한 개개의 사건들을 지도하신다
운동의 시작은12 하나님께 있지만, 그러나 만사가 자연적 경향의 강요에 따라 자발적으로 혹은 우연히 발생한다고 상상해보자. 그러면 낮과 밤, 겨울과 여름의 서로의 변화는 하나님께서 그 각자에게 각각 일을 지정하시고 일정한 법칙을 제정해 주신 한, 즉 그것들이 순탄한 행로를 따라 계속 동일한 과정을 유지하여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한 달이 지나면 또 한 달이 오고, 한 해가 지나면 또 한 해가 오는 한, 하나님의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심한 무더위에 심한 가뭄이 겹쳐 땅의 농작물을 태워 버리며, 어떤 때에는 때아닌 비로 곡식이 해를 입고 또한 우박과 폭풍우로 불의의 재난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는 생각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날씨의 맑고 흐림, 그리고 추위와 더위에 대하여 그 기원을 별들의 근접과 다른 자연적 원인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별문제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부성적인 사랑이나 심판을 표시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에 어떤 통상적인 힘을 넣어 주시고, 이것으로 인류에게 식물을 공급하신다는 이유로,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분이라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매우 빈약하고 속된 허구이다. 이것은 마치 어느 해의 풍작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 아니며, 흉년이나 기근이 하나님의 저주와 복수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오류를 반박하기 위해 모든 논증을 수집한다는 것은 너무 지루한 일이니 하나님 자신의 권위로 만족하자. 하나님께서는 율법서와 예언서에서 이슬과 비로 땅을 적실 때마다 자신의 은총을 스스로 증거 하는 것이라고 거듭 말씀하셨으며(레 26 : 3-4; 신 11 : 13-14, 28 : 12), 또 그의 명령으로 하늘이 철과 같이 굳어지고(레 26 : 19), 곡식 밭이 충해와 다른 재앙들로 손상을 입게 되며(신 28 : 22), 우박과 폭풍우로 전답이 해를 당할 때마다(사 28 : 2; 학 2 : 17) 이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하고 특수한 보응의 표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만일 이 사실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이 없이는 한 방울의 비도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은 명확하다.
실로 다윗은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시 147 : 9)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찬양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근으로 동물을 위협하시기도 하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을 때로는 적게 먹이시고 때로는 더 많이 가장 좋아 보이는 음식으로 먹이신다는 것을 충분하게 선언하시는 것이 아닌가? 이미 위에서 내가 말한 대로, 이것을 특별 행위에 국한시킨다는 것은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성부의 뜻이 아니면 보잘 것 없는 작은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0 : 29). 하나님께서 명확한 계획에 따라 새들을 날게 하시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는 마땅히 선지자와 더불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높은 위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 113 : 5-6)
6. 하나님의 섭리는 특히 인간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우주가 특별히 인류를 위하여13 세워 졌음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통치에 있어서도 역시 이 목적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 : 23). 솔로몬도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 : 24)라고 말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되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움직인다고 그들로 말하게 하자. 만일 그 말이 사실이라고 하면 그 길을 선택하는 자유는 인간 편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권능이 없이는 인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선지자와 솔로몬은 권능뿐만 아니라 선택과 결정을 모두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저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른 곳에서 솔로몬은, 마치 하나님의 손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정하는 자들의 이 경솔함을 훌륭하게 책망하고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잠 16 : 1,9).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한 마디도 말할 수 없는 비참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어리석은 일이다.
실로 성경은 하나님의 결정이 없이는 세상에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가장 운명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들도 다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들면 부러지는 나뭇가지에 그 밑을 지나던 행인이 맞아 죽었다고 하자. 이보다 더 우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이와는 전혀 달리, 살해자의 손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출 21 : 13). 마찬가지로, 제비를 뽑을 때 맹목적인 운명에 맡기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시고, 그 제비의 결정권은 자신에게 있다고 하신다. 조약돌을 무릎에 떨어뜨리고 그것을 거기에서 집어 올리는 것은 그들 각자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는 가르치시고 우연으로 돌려질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다고 증언하셨다(잠 16 : 33). 솔로몬은 이와 동일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난한 자와 포악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잠 29 : 13; 참조, 잠 22 : 2). 솔로몬은 여기서, 가난한 자와 부자가 다같이 이 세상에서 섞여 살고 있지만 그들 각자의 처해 있는 상황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져 있으며, 따라서 온 인류에게 빛을 주시는 하나님은 결코 맹목적이 아니시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가난한 자에게 인내할 것을 권고한다. 왜냐하면, 자기 운명에 만족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지워 주신 짐을 벗어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선지자도, 어떤 사람은 비천한 자리에 처해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높임을 받는 것이 인간의 수고와 운명의 탓이라고 하는 경건치 못한 자를 꾸짖는다.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시 75 : 6-7). 하나님께서 자신의 재판장의 직무를 벗어버릴 수는 없기 때문에, 어떤 이들의 높임을 받고 어떤 이들이 멸시를 당하는 것은 정녕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한 것이라고 그는 여기서 논증한다.
7. 하나님의 섭리는 "자연" 현상을 조정한다
나는 또한 개개의 사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성격을 일반적으로 증거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바람을 일으켜 많은 메추라기를 자기 백성에게 보내주셨다(출 16 : 13 ; 민 11 : 31).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 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강한 바람을 보내 광풍을 일으키셨다(욘 1 : 4). 하나님을 우주의 통치자로 생각지 않는 자들은 이것을 사물의 통상적인 과정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이 없이는 바람이 일어나지도, 불지도 못한다고 추론한다.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구름과 바람의 행로를 원하시는 대로 지도하시며 이 가운데서 자신의 특별한 권능을 실제로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다고 하면,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시 104 : 3-4)라고 하신 말씀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바다가 강한 바람으로 거센 파도가 일 때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임재에 대한 강력한 증거임을 성경에서 보게 된다. "여호와께서 명하신 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시 107 : 25).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시 107 : 29). 다른 곳에서 그는 풍재(风灾)로 백성을 치셨다고 말씀하셨다(암 4 : 9).
이와 같이 또한 인간에게는 본래의 생식력이 주어져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는 자손이 없게 내버려두고 어떤 사람에게는 많은 자손을 주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것을 특별한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참조, 시 113 : 9). 이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시 127 : 3)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야곱은 그의 아내에게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창 30 : 2)라고 했다. 이 논의를 곧 끝맺는다면, 우리가 음식으로 양육된다는 것보다 더 평범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땅의 소산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이지만 또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신 8 : 3; 마 4 : 4)라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사람이 힘을 얻는 것은 풍부한 떡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하신 축복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14 반대로,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을 제하여 버리겠다"(사 3 : 1)고 위협하시는 것과 같다. 실로 일용할 양식을 위한 진지한 기도(마 6 : 11)는,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애로운 손길을 우리에게 먹을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양육하심으로써 한 가족의 가장 훌륭한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을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 이"(시 136 : 25)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시 34 : 15)라는 말씀과, 또 한편으로는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 34 : 16)라는 말씀을 성경에서 읽게 된다. 우리는 이 두 말씀에서,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순종하기로 되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어떤 모양으로든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확신하자. 여기서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 섭리는 피조물 가운데서 역사하여 자연의 질서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놀라우신 계획으로 본래의 명확한 목적에 순응하도록 그것들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운명, 우연, 우발성에 대한 토론. 8-9)
8. 섭리의 교리는 스토아 철학의 운명론이 아니다
이 교리를 비난하려고 하는 자들은 이를 스토아 학파의 운명론이라고 하여 비방한다. 어거스틴도 한때 이러한 비난을 받은 바 있었다.15 우리는 용어에 대하여 논쟁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운명이라는 말에 용인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울이 피하라고 가르친 망령되고 공허한 말 중의 하나이며(딤전 6 : 20), 또한 사람들이 이 비방하는 말로써 하나님의 진리를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이 운명론을 믿고 있는 것처럼 거짓되게 또는 악의에 찬 비난을 받고 있다. 우리는 스토아 학파처럼, 자연속에 포함되어 있는 인과(因果)의 계속적인 관계와 이와 밀접하게 관련된 일련의 연속에서 파생되는 필연이라는 것을 고안해 내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멀고 먼 영원으로부터 그가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지혜로 작정하시고 일단 작정하신 것을 지금은 권능으로 수행하시는 만물의 지배자요 통치자로 삼는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과 땅 그리고 무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계획과 뜻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다스림을 받아 지정된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독자는 물을 것이다. 아무 일도 운명적으로나 우연적으로는 발생하지 않는가? 나는 이에 대하여 대답한다. 대(大)바실(Basil)은,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은 이교도들의 용어로서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은 절대 그런 것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진실하게 말했다.16 왜냐하면, 모든 성공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하고 재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저주라고 한다면 인간사에는 운명이나 우연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이상적인 말임에 틀림이 없다.
"나는 아카데미 학파에 대한 논박(Against the Academics)이라는 나의 책에서 자주 운명이라는 말을 언급한 데 대하여 나 스스로 유감으로 생각한다. 물론 나는 이 말을 사용할 때 어떤 여신이나 혹 다른 것을 나타내려고 뜻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외부적 사건에 있어서의 우연적 결과를 나타내려고 한 것뿐이다.17 '포르튜나'(fortuna, 운명)란 말에서 '우연히'(forte), '아마'(forsan), '혹시'(forsitan), '어쩌면'(fortasse), '뜻밖의'(fortuito)라는 말들이 나왔는데, 이것들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이며 따라서 모두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관계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나는 이 말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은밀한 질서로 말미암아 조정되는 것이며 "우연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의 이유와 원인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실로 그렇게 말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운명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나는 후회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아주 나쁜 습관에 젖어 있어서, 당연히 "이것은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이다"라고 할 것을 "이것은 운명이 뜻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나는 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어거스틴은 만일 무엇이든지 모두 운명에 맡겨버린다면 세계는 목적 없이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그는 만사가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자유 선택으로 부분적으로는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진행된다고 주장했지만, 곧 이어 그는 인간은 섭리에 종속되어 있는 동시에 또한 섭리의 지배를 받는다고 충분히 논증하면서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한다는 것보다 더 불합리한 일은 없다는 원리를 취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되는 대로 발생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그는 또한 어떠한 우연한 일도 인간의 의지에서 기인된다는 것을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서 한층 더 명백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원인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자주 사용한 "허용"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로 이해되어야 하는가는, 하나님의 명령이나 허락이 없이는 어떠한 사건도 발생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는 만물의 최고의 원인이며 제일 원인이라고 그가 증명한 데서 가장 잘 나타날 것이다.18 확실히 그는, 한가하게 높은 망대에 앉아서 이것저것 허락하기를 즐겨 하시는 분으로 하나님을 공상하지는 않았다. 그가 간섭이라고 말하는 의지는 말하자면 현실적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원인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9. 모든 사건의 참된 원인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의 우둔한 마음은 하나님의 섭리의 높이까지 미치기에는 너무나 낮은 곳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어떤 구별을 지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는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확실한 분배에 따라 제정되었으나, 그것들이 우리에게는 우연적이라고 구별을 지으려고 한다. 즉 물론 이것은 운명이 세계와 인류를 지배하며 만물을 되는대로 상하로 굴러가게 한다는 그런 생각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런 어리석은 생각은 마땅히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들의 질서, 이유, 목적, 필연성은 그 대부분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감추어져 있고 인간의 생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님의 의지로 발생하는 것들도 운명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생각되든 우리의 인식이나 판단에 따라 평가되든, 그것들은 표면상으로는 다른 모습을 나타내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상인이 일단의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숲 속에 들어갔다가 잘못하여 일행을 잃고 헤매다 마침내는 강도를 만나 살해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죽음을 선견(先见)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작정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각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오랫동안 연장될 것인가를 하나님께서 선견 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 제한을 정하여 넘어가지 못하게 하셨다"(욥 14 : 5)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의 능력에서는 이 모든 것이 우연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그는 그런 죽음의 모든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볼 때 성질상 우연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섭리가 운명을 다스리시며 그 목적을 향해 운명을 지도하신다는 사실 또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똑같은 평가는 미래의 우발적인 사건에도 적용된다.19 일체의 미래사를 확실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마치 그 일이 이렇게 혹은 저렇게 되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 속에서 그 미래사를 붙잡고 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견하시지 않은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에 확고 부동한 신념으로 남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운명"이라는 말이 전도서에서 자주 사용되었는데(2 : 14-15, 3 : 19, 9 : 2-3,11)20 인간은 처음 보아서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제일 원인을 통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는 성경의 이 가르침은, 그 어떤 섬광이 흑암 속에서 항상 비취지 못할 정도로 인간의 마음에서 소멸되지는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블레셋의 점장이들도, 비록 의심하여 흔들렸을 망정 그들은 액운을 일부분은 하나님의 탓으로, 일부분은 운명의 탓으로 돌렸다. 그들은 "보아서 궤(柜)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삼상 6 : 9)고 말하였다. 어리석게도 그들은 점(占)에 속아 운명을 의지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자기들이 당한 불행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감히 생각하지 않으려고 자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 섭리의 고삐로 모든 사건을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시는 가는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실례에서 명백해질 것이다. 즉, 다윗이 마온 황무지에서 함정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나라를 침략하게 되어 부득불 사울은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삼상 23 : 26-27).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종의 안전을 염려하셔서 사울의 가는 길을 방해하셨다고 하면, 블레셋 사람들이 갑자기 또는 뜻밖에 싸움을 걸어 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일이 우연히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연으로 보이는 것도 신앙은 그것을 하나님의 은밀한 추진이었다고 인정한다.
언제나 똑같은 이유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변동이 하나님의 손의 은밀한 활동에서 온다는 것은 분명히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되지만, 그 필연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며 그 자체의 특수한 성격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뼈를 좋은 실례로 들 수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소유하셨던 만큼 온전한 사람이라면 그의 뼈가 부러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뼈를 부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하였다(요 19 : 33,36). 여기서 우리는 다시 상대적 필연과 절대적 필연, 마찬가지로 결과적 필연과 결과의 필연의 구별이21 학파들간에 분별없이 고안된 것이 아님을 본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자의 뼈를 부러질 수 있는 것으로 만드셨으나 실제적으로는 이를 부러지지 않게 하심으로써,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을 자기 계획의 필연으로 제안하셨던 것이다.
제 17 장
우리에게 베푼 가장 큰 은혜에 대한 섭리의 교리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과거와 미래의 언급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 해석. 1-5)
1. 하나님의 방법의 의미
더우기 인간의 성향은 쓸데없이 교묘한 것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이 교리를 유익하고 바르게 계속 사용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어려움에 말려들어 거의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무슨 목적으로 만물을 배정하셨는가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여기서 간단히 논의하는 것은 유익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와도 관계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섭리는 만물의 결정적 원리로서 이 섭리는 때로는 매개체를 통하여, 때로는 매개체 없이, 때로는 모든 매개체와 반대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시되, 특히 더욱 친근히 보호하기를 원하시는 교회를 지배하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경계하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있다. 그런데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가하지 않을 수 없다. 즉, 하나님의 자애로운 사랑과 자비 혹은 엄격하신 공의가 종종 섭리의 전 과정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모든 사건의 원인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가 운명의 맹목적인 충동에 의하여 운행된다고 하는 사상이 슬그머니 잠입하기도 하고,1 또는 육신의 생각이 우리를 선동하여 마치 하나님께서 인간을 공처럼 던져서 가지고 우롱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 항변하게도 한다. 실로 우리가 만일 정숙하며 침착한 마음으로 기꺼이 배우려 하기만 한다면 그 최종적인 결과는 마침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계획을 세우는데 최상의 이유를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주실 것이다. 혹은 자기 백성에게 인내를 가르치시며 혹은 저들의 사악한 감정을 바르게 하시고 방종을 억제하시고 혹은 자기 부인을 실천케 하시고 혹은 나태에서 일으키시며 또는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불경건한 자들의 교활함을 낮추게하시고 그들의 책략을 전복시키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실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원인이 감추어져 있으며 우리의 생각이 미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확실히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 부르짖어야 한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 : 5). 그러므로 우리가 비참할 때, 죄가 언제나 마음에 떠오르며 형벌은 우리가 회개하도록 자극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그리스도는 각자가 응당히 받아야 할 형벌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의 은밀하신 계획에 더 많은 권위를 두어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에 대하여,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 : 3)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불행이 출생에 앞선다고 하는 경우, 마치 무죄한 사람을 어떻게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자비하신 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냐고 우리의 본성은 소리친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밝으면 이 이적에서 아버지의 영광이 빛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고 그리스도께서는 증거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을 소중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해명하시지 않도록 힘쓰며 따라서 하나님의 은밀한 심판을 존중하여 그의 의지를 만사의 가장 공정한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짙은 구름이 하늘을 덮으며 어두어지고 심한 폭풍우가 일어날 때 침침한 안개가 우리의 눈 앞을 가리고 천둥이 귀를 때리며 공포로 우리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우리에게는 혼란해지고 뒤엉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에도 하늘은 여전히 평온하고 청명하다. 그러므로 세계의 이 혼란한 상태가 우리의 판단력을 빼앗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공의와 지혜의 순수한 빛으로 모든 소동을 가장 잘 고안된 질서로 조정하심으로써 통제하신다는 것이며 그들을 바른 목적으로 향하게 하신다고 우리는 추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확실히 이 점에 있어서 많은 사람이 방자하게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해명을 요구하고 그의 은밀한 계획을 조사하여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실에 대하여는 죽을 인간의 행동에 대해서보다 더 경솔한 판결을 내리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와 동등한 인간들에게는 겸손하여, 경솔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오히려 우리의 판단을 보류하기를 더 좋아하면서, 마땅히 경외해야 할 하나님의 감추어진 심판에 대해서는 거만하게 욕설을 퍼붓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불합리한 일이 무엇이겠는가?
2.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은 경건히 준수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자기를 지으신 이요,2 우주의 창조주로 생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두려워하며 공경하는 자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올바르고 유익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실에서 오늘날 공교롭게도 많은 개들이 이 교리를 독살스러운 이빨로 물어뜯으며 혹은 적어도 소리내어 짖고 있는데, 이는 저들은 이성이 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나님에게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들은 할 수만 있으면 맹렬히 비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의지를 포함하고 있는 율법의 훈계로 만족하지 않고 우주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3 실로 이것은 마치 우리의 가르치는 바가 다만 머리의 고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과 같고, 또 성령이 도처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명백하게 말씀하지 아니하시며 무수한 표현 형식으로 이를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소나마 살아있는 그들의 수치심이 그들을 억제하여 감히 하늘나라에 대한 모독을 토해 내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분방하게 날뛰기 위하여는 우리들과 싸우고 있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러나 우주에서 발생하는 것들이 모두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계획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주의 판단은 큰 바다와 일반이라"(시 36 : 6)고 하신 성경의 말씀은 무슨 뜻으로 기록되었는가에 대하여 저들은 답변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잘 설명되어 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뜻을 멀리 구름이나 깊은 바다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고 모세는 말하고 있다(신 30 : 11-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심연과 비교되는 또 하나의 은밀한 뜻이 있다는 것이 된다.4 바울 또한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롬 11 : 33-34; 참조, 시 40 : 13-14). 실로 율법과 복음은 우리의 감각을 훨씬 초월하는 신비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말씀으로 계시하기를 원하셨던 이 신비를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시기 위해 신자들의 마음을 "총명의 신"(사 11 : 2)5으로 조명하시기 때문에, 이제는 심연이 없었고, 다만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길,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는 등불(시 119 : 105), 생명의 빛(요 1 : 4; 참조, 8 : 12), 확실하며 분명한 진리의 학교가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우주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방법은 당연히 심연이라고 불리며, 이는 그것이 우리 생각에는 감추어져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경건하게 경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세는 몇 마디 말로 이 둘을 아름답게 표현하였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 : 29).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율법을 열심히 깊이 묵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바라 보도록 그가 우리에게 어떻게 명하는가를 보게된다. 욥기에도 역시 이 숭고한 교리가 기록되어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고 있다. 즉, 욥기의 저자는 우주의 구조를 상하로 두루 살피면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하여 장엄하게 논술하고 난 뒤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첨가하였다. "이런 것은 그 행사의 시작점이요, 우리가 그에게 대하여 들은 것도 심히 세미한 소리뿐이니라"(욥 26 : 14). 이런 방법으로 그는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 있는 지혜와 그가 인간에게 주신 지혜를 구별하였다. 그것은, 자연의 신비를 논할 때 지혜는 하나님께만 알려지고 "모든 생물의 눈에는 숨겨졌다"고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욥 28 : 21). 그러나 조금 지나서 그는, 하나님의 지혜는 탐구되기 위하여 일반에게 알려졌다고 부언하였으니,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욥 28 : 28)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뜻으로 어거스틴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최상의 질서에 따라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하여 하고자 하시는 모든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만 선한 의지로 율법에 의거하여 행동하지만, 그러나 다른 점에 있어서는 율법에 의거하여 움직여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는 불변의 율법이기 때문이다."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우주 통치의 권리를 쥐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이를 견실과 겸손의 율법으로 삼아 하나님의 최고의 권위에 복종하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의지를 의의 유일한 법칙이며 만물의 가장 공의로운 원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실로 우리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궤변 철학자들이 지껄이고 있는 절대적 의지, 즉 불경하게 또는 모독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권능을 분리시켜 놓은 그런 절대적 의지가 아니라,7 만물의 결정적 원리가 되는 섭리인데, 그 이유는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만, 이 섭리에서는 옳은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책임을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이러한 겸손한 마음을 가지는 사람들은 지난날의 불행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호마(Homer)의 작품에 등장하는 아가멤논(Agamemnon)이 "죄의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제우스신과 운명의 여신에게 있다"8 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 자신의 죄책을 하나님께 뒤집어 씌우지도 않을 것이다. 또한 운명에 의하여 유괴된 것처럼, 그들은 플라우투스(Plautus, 고대 로마의 희극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젊은이가 "만사는 불안정하며 운명은 그가 원하는 대로 인간을 몰아친다. 나는 나 자신을 절벽으로 끌고 가서 거기서 내 생명과 재산을 파괴하겠다"라고 한 것처럼 자포자기하여 자신을 파멸 속에 던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또 다른 실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악행의 구실로 삼지도 않을 것이다. 리코니데스(Lyconides)는 다른 희극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선동자였다. 나는 신들이 그것을 원하였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만일 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면 이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9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탐구하며 배우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이에 도달하려고 애쓸 것이다. 동시에, 저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갈 준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 교리에 대한 지식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는 것을 성실하게 보여줄 것이다.
불경스러운 사람들은10 어리석게도 불합리의 혼란을 일으켜 하늘과 땅을 거의 혼동시키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죽을 시간을 정해 놓으셨다고 하면 우리는 그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열심히 자신을 지켜도 소용이 없다. 어떤 사람은 강도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위험하다는 길로는 감히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이는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의사를 부르기도 하고, 또한 지치도록 약을 너무 복용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거친 음식을 삼가며, 어떤 이는 다 낡아서 무너져 가는 집에서 살기를 두려워한다. 요컨대, 그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든 방법을 고안해내며 열심히 그 길을 달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의지를 시정해 보려고 시도한 이상의 모든 치료는 헛될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삶과 죽음과 사, 건강과 질병, 평화와 전쟁, 그리고 인간이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대로 혹은 얻으려 애쓰거나하고, 혹은 피하려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확실한 작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그들은 또한 신자의 기도는 무익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그릇된 것이라고 결론짓고, 이 기도는 이미 영원 전부터 작정해 놓으신 것을 주시도록 주님께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그들은 미래와 관계된 모든 계획은 인간의 생각과 상관없이 자신의 원하시는 대로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반대되는 것이라고 하여 이를 부정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현재 발생한 것을 모두 하나님의 섭리의 탓으로 돌리고, 분명히 그 사건과 직접 관계 있는 인간의 책임에 대하여는 눈을 감아 버린다. 살인자가 한 선량한 시민을 죽였다고 하자.
그들은 이 살인자야말로 하나님의 계획을 수행한 자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다던가, 혹은 간음죄를 범했다고 하자. 그들의 말대로 하면, 주께서 예지하시고 정해 놓으신 것을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섭리의 대행자이다. 부모 중 한 분이 병들어 누워있는데, 아들이 치료를 게을리한 채 아무런 관심도 없이 그의 죽음만을 기다렸다고 하자. 그로서는 영원 전부터 그렇게 정해 놓으신 하나님의 뜻을 반항하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라고 해서 그들은 모든 범죄를 미덕이라고 부른다.
4. 하나님의 섭리를 구실로 인간의 신중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솔로몬은 미래일에 대하여 논하면서 인간의 생각을 하나님의 섭리와 쉽게 조화시켰다. 즉 그는,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 없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대담하게 계획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 : 9). 이 말씀은, 우리가 앞날을 준비하며 모든 문제를 정리할 때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지에 항상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삶의 한계를 정해 주셨으며 동시에 그것을 잘 돌보도록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는 생명을 보존하는 수단과 도움을 예비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위험을 미리 알 수 있게 하셔서 불의의 습격을 당하지 않도록 경계와 대책을 마련해 주셨다. 이제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명백해졌으며, 따라서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생명의 보호를 위탁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보호해야 한다. 그가 만일 우리에게 구조의 수단을 주시면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그가 우리에게 미리 위험을 경고하시면 우리는 무모하게 그 속에 뛰어들어서는 안되다. 하나님께서 대비책을 마련해 주시면 우리는 마땅히 이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위험도 그것이 운명적인 것이 아닌 한 우리를 해하지 못할 것이며, 그것이 운명적인 한 이에 대한 여하한 대비책도 필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벌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물리치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대비책을 마련해 놓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인간의 생각이 하나님의 섭리와 질서와 얼마나 일치한가를 검토해보자. 위험이 운명적인 것이 아니면 주의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피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위험을 경계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독자들은 결론지을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 위험이 독자에게 운명적인 것이 아니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경계하도록 명하시는 것이다. 생명의 보존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에 부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숙고하고 경계하는 기능을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아주 명백하다는 것을 이 어리석은 자들은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게으르고 태만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과하신 재난을 스스로 불러들이고 있다. 조심성 있는 사람은 자신을 보살핌으로써 임박한 재난을 해결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생각 없이 무모한 짓을 하여 파멸한다. 그런데 만일 우매와 신중이 다같이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들로 하여금 일체의 미래사를 의심스러운 사건들로 대항하게 하시며, 준비하셨던 예비책으로 끊임없이 반대하도록 하기 위해, 그것들을 감추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그 미래사들을 극복하게 하시거나 우리의 모든 염려를 초월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이미 말한 대로, 하나님의 섭리는 항상 노출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된 수단으로 표현하신다.
5.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사악함을 무죄로 하지 않는다
역시 그들은 경솔하게 또는 그릇되게 과거의 사건들을 모두 하나님의 들어난 섭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발생하는 사건들이 다 섭리에 좌우되기 때문에 절도나 간음, 그리고 살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의 간섭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주께서 빈곤으로 벌하고자 하셨던 자의 물질을 약탈한 도둑이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주께서 생이 끝나도록 하신 자를 죽인 살인자가 어째서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이런 자들이 다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들은 형벌을 받아야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는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부인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악한 성향에 의해 자극을 받고 오직 자신의 악한 욕망에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배우며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열심히 전진하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어디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선포하신 뜻을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행동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가 명령하신 것뿐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의 계명과 반대되는 일을 하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고집이며 범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를 원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그렇게 해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물론 나도 이를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으로 악을 행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러한 일을 우리에게 명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생각지 않고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반항할 정도로 방종과 정욕에 깊이 빠져 앞 뒤 분별없이 행동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악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명령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하고 무한하여 하나님은 악한 도구를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방법을 충분히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들의 이론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살펴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면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하면서 범죄자가 형벌을 받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도둑과 살인자 및 다른 행악자들이 다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정하신 심판을 수행하신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실이 그들의 범죄에 무슨 구실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부인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들은 그들과 동일한 불의에 하나님을 연루시킬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의로 그들 자신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결백을 밝히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을 비난할 수도 없다. 그들은 그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은 모두가 악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악한 생각을 합법적으로 사용하시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수단으로 해서 일하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태양의 열로 부패되고 노출된 시체의 악취가 어디서 오는가를 묻고 싶다. 그것이 태양 광선으로 말미암아 되어졌다고 모든 사람은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그 악취가 광선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11 이와 같이 악의 실질과 죄책은 사악한 인간에게 있다. 이럴진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악인의 봉사를 사용하신다고 해서 어떻게 그가 어떤 불결한 것과 계약을 맺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멀리서 하나님의 공의를 비방할 수는 있어도 이에 도달하지는 못하는 이 개와 같은 뻔뻔스러운 행동을 추방시켜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섭리의 방법에 대한 명상 : 섭리의 작용을 깨달을 때 오는 행복. 6-11)
6. 믿는 자의 위안이 되는 하나님의 섭리
그러나 이상의 여러 비방들, 곧 광인들의 헛소리는 섭리에 대한 경건하며 거룩한 명상으로 쉽게 쫓아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명상은 경건의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으로서, 이 명성을 통해서 우리는 가장 좋고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얻게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만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하여 발생되며 무엇 하나도 우연히 발생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물의 근본 원인으로 바라보며 2차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위치에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따라서, 하나남의 특별 섭리가 자신을 지켜 보호하시며, 따라서 자신에게 선과 구원을 가져다준다고 판명되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일어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인간에 대하여 그리고 다음으로는 다른 피조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가 양쪽을 모두 지배하신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확신한다. 그들이 선하든 악인이던, 인간에 관한 한 그 계획, 의지, 노력, 능력이 모두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원하시는 방향으로 향하게 하시며 또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그것들을 제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에 달려있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특별 섭리가 신자의 행복을 돌보신다는 증거하는 매우 분명한 약속들은 수없이 많이 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시 55 : 22).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살펴 주시기 때문이다(벧전 5 : 7).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 91 : 1).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 2 : 8). "나는 너의 방패요"(창 15 : 1). "너로 … 놋 성벽이 되게 하였은즉"(램 1 : 18), "내가 너를 대적하는 자를 대적하고 네 자녀를 구원할 것임이라"(사 49 : 15). 실로 성경역사의 주요 목적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길을 이처럼 열심히 돌보아 주심으로써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시 91 : 12) 하신다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반 섭리를 말하는 자들, 곧 하나님은 개개의 피조물들을 특별하게 돌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는 자들의 견해를 방금 위에서 거절한 것처럼,12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이 특별한 돌보심을 인식하는 것이다.13 이러한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후에(마 10 : 29) 곧 이어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셨다. 즉, 우리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여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철저하게 돌보신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마 10 : 31). 그리고 주님은 이 사실을 더 확대하여,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세신다고 확신시키셨다(마 10 : 30). 머리털 하나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떨어질 수 없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이상 더 무엇을 바랄 수 있겠는가? 나는 단순히 인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자신의 거할 곳으로 택하셨기 때문에, 교회를 다스리실 때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특수하게 표현하신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7. 번창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종은 이런 약속들과 실례들을 통해서 힘을 얻게 될 때에, 모든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조정되는 혹은 남을 헤치지 못하게 그들의 악의가 억제되든 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여러 가지 증거들을 접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 앞에서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의 눈앞에서도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기(출 3 : 21) 때문이다. 실로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원수들의 사악함을 분쇄하는 방법을 알고 계신다. 때로는 그들에게서 분별력을 빼앗으심으로써 그들이 건전하며 온건한 것을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만드신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합을 속이기 위해 사탄을 보내어 모든 선지자의 입을 거짓 영으로 채우게 하신 일이 있었다.(왕상 22 : 22). 또한 하나님께서는 젊은이들의 충고를 통해 르호보암의 정신을 흐리게 하였으며 마침내 르호보암은 자신의 미련함 때문에 그 왕국을 빼앗기게 되었다(왕상 12 : 10,15). 때로 그들에게 분별력을 주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놀라게 하시고 낙담케 하심으로써 그들이 생각한 바를 원하거나 계획하거나 혹은 수행할 수 없게 하신다. 간혹 그들이 자신들의 정욕과 광기가 자극하는 일을 행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경우에도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그들의 광포를 꺾으시며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게 하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치명적이었던 아히도벨의 모략을 사전에 분쇄하셨다(삼하 17 : 7,14).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모든 피조물들을 지배하시며 심지어는 사탄까지도 다스리신다. 그리고 이 사탄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허락과 명령이 없이는 욥에 대하여 감히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욥 1 : 12).
이와 같은 지식을 가지게 될 때 여기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결과를 보면, 번영할 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 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대한 염려에서는 놀라운 자유를 얻게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건 아니면 무생물을 통해서 도움을 받았건간에 일체의 번영과 인간의 욕망 전체를 전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는 마음에, "그들의 마음을 내게로 기울여 나를 사랑하게 하시고 그들을 나와 연합하게 하여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의 도구가 되게 하신 것은 분명히 주님이시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풍성한 열매를 거둘 때에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호 2 : 21-22)라는 말을 생각할 것이다. 그는 다른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축복만이 모든 번영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많은 증거들을 통해서 교훈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가지면 모든 역경에서 우리를 돕는다.
어떤 역경에 닥쳐올지라도 그는 즉시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손으로 인내와 마음의 평온을 그에게 가장 깊이 새겨 주실 것이다. 만일 요셉이 형제들의 배신을 계속 생각하였더라면 그는 형들에 대한 형제의 사랑을 보여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하나님께로 돌리고 그들의 불의를 잊었기 때문에 그는 온유와 관용을 보일 수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형들을 위로하기까지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니라"(창 45 : 7-8). "당신들은 나를 헤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 : 20). 욥이 자기를 괴롭힌 갈대아 사람들을 주시하였더라면, 그에게는 복수의 불길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을 주께서 하신 일로 여기고,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 : 21). 이와 같이, 시므이가 다윗을 협박하고 또 그에게 돌을 던졌을 때, 다윗이 사람들에게 눈을 돌렸더라면 아마 그는 부하들에게 자신이 받은 모욕에 대한 보복을 당장 명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시가 없이는 시므이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히려 부하들을 진정시키면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하신 것이니 그로 그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 : 11)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도 그는 자신의 지나친 슬픔을 억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하옴은 주께서 이를 해하신 연고니이다"(시 39 : 9). 만일 분노와 성급함에 대하여 이 이상 더 효과 있는 치료법이 없다고 하면, 하나님의 섭리를 명상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크게 유익할 것이며 그 마음에 항상 다음과 같은 생각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주의 뜻이니 마땅히 참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뜻을 반항함이 부당할 뿐만 아니라 주께서는 정당하고 유익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뜻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이상의 말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들로부터 우리가 부당하게 해를 받았을 경우, 우리의 고통을 악화시키고 우리 마음에 복수심을 자극시키는 그들의 사악함을 무시해 버리고 하나님에게까지 올라갈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원수들이 우리에게 어떠한 악을 행하였든지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며 그의 의로우신 섭리로 말미암아 비롯되었다는 것도 확실히 믿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
바울은 우리가 받은 상처에 대하여 보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엡 6 : 12), 영적인 원수 곧 마귀에 대한 것(엡 6 : 11)이라고 지혜로운 교훈을 주었는데, 우리들로 하여금 그 싸움에 스스로를 대비하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모든 분노의 충동을 진정시키는데 가장 유용한 교훈은, 하나님은 마귀와 모든 행악자들을 대항해서 싸우려고 무장하시며 우리의 인내를 연단시키기 위하여 경기의 심판자로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는 재난과 고난이 인간의 간섭 없이 일어날 때에는, 모든 번영은 하나님의 축복을 그 근원으로 하여 흘러나오고 모든 재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하는(신 28 : 2이하 : 15이하) 율법의 교훈을 상기하자. 그리고 우리는 이 무서운 경고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를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를 인하여 너희를 칠배나 더 칠지라"(레 26 : 23-24).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에서 우리의 아둔함을 죄라고 책망하고 계신다. 사실 우리는 인류의 공통된 이해에 따라 번영이건 재난이건 모든 사건을 다만 우발적인 것으로 생각할 뿐,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혜를 받고도 예배할 줄 모르며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도 회개할 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선한 일과 악한 일이 하나님의 명령 없이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예레미야와 아모스가 그들을 호되게 훈계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애 3 : 38; 암 3 : 6).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선언도 역시 이와 같은 목적을 지니고 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사 45 : 7).
9. 중재하는 원인을 경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사람은 제 이차적 원인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유익을 준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자들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을 그 인간적 친절에 대한 감사를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충심으로 그들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고 기꺼이 자신의 의무를 인정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또는 기회가 허락되는 대로 최선을 다하여 감사하기를 노력할 것이다. 요컨대 그는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사역자로 존경할 것이다. 그는 또한, 자기가 그들에게서 유익을 얻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손을 통하여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임을 알게될 것이다. 만일 이 경건한 사람이 태만하거나 경솔하여 무엇인가 손실을 입었다면 그는 이것이 주님의 뜻에 따라 발생된 것으로 결론을 내리겠지만, 역시 그 책임을 자신에게 돌릴 것이다. 만일 잘 돌보아줄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간호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고 생각하자. 그 사람이 이미 넘을 수 없는 한계에까지 도달했음을 알고 있다고 해도, 이를 이유로 그가 자신의 죄를 가볍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그 사람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그가 죽은 것은 자신의 게으름 때문이라고 자기의 탓으로 여길 것이다. 살인이나 절도범에게 기만과 고의적인 악이 개재되었을 때, 그는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여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범행에서 그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악이 각각 스스로를 명시하는 대로 양자를 똑똑히 응시할 것이다.
그러나 특별히 미래사에 관하여 그는 이런 종류의 이차적 원인들을 고려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안녕을 위해 사용할 인간적 도움이 없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의 원조를 청하는 데 있어서 그들과 상의하기를 중단하지 않을 것이며 게을리 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자기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모든 피조물은 주께서 주신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신적 섭리의 합법적 기구로 사용할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낙착될 것인가가 불확실하기 때문에(주께서 모든 일을 자기를 위해서 준비하신다는 것을 아는 일 외에는), 그는 지성과 이해가 도달할 수 있는 한, 자기에게 유익이 된다고 생각되는 것을 열심히 동경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획을 세울 때 자신의 의견대로 하지 아니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정당한 목표로 향하게 되도록 하나님의 지혜에 자신을 맡기고 복종시킨다. 그러나 그는 외부의 원조가 있으면 그것으로 안심하거나 또는 그것이 없다고 해서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두려워 떨 정도로 외부적인 원조를 신뢰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이 항상 하나님의 섭리만을 굳게 신뢰하고 있으며, 또한 현재의 일에 몰두한다고 해서 섭리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떨쳐버리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요압은 전쟁의 결과가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게을리 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부르심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더우기 그는 전쟁의 결과를 하나님의 결정에 의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삼하 10 : 12). 이러한 인식은 우리에게서 무모함과 자만심을 제거하고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도록 할 것이다. 또한 그는 우리의 마음을 참된 소망과 신뢰와 용기로 가득하게 하실 것이며,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위험을 조금도 주저함 없이 경멸할 것이다.
10.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하면 인생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마음에는 측량할 수 없는 행복을 보게된다.14 인간의 생활은 수 많은 악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무수한 죽음의 위기에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 이외의 일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수많은 질병을 담는 그릇으로서 사실상 몸속에 질병을 보유하거나 그 원인을 배양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수많은 형태의 파멸 원인에서 모면할 수 없으며, 죽음에 둘러싸인 삶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추위를 만나든 더위를 만나든, 인간은 위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므로 우리는 이외에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가 어디로 눈을 돌리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일체의 대상은 신뢰할 가치가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공공연하게 위협하고 절박한 죽음으로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배를 타 보라. 우리와 죽음 사이에는 단 한발자국의 거리가 있을 뿐이다. 말을 타 보라. 한 쪽발이 미끄러지면 우리의 생명은 위태롭게 될 것이다.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 보라. 지붕 위의 기왓장과 같이 많은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무기가 우리의 손에 있든 친구의 손에 있든 역시 해악이 기다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우리가 보는 사나운 동물들은 모두가 다 우리를 죽이기 위해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즐겁게만 보이는 정원에 몸을 감추려고 해도, 거기에도 때로는 뱀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옥은 계속 화재의 위험을 안고 있어, 낮에는 가난해지지 않을까. 밤에는 우리 위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위협을 느끼게 한다. 우리의 밭은 우박과 서리, 가뭄 그 밖의 재난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불모와 이에 따르는 기근으로 우리를 위협한다. 해독과 복병, 약탈과 공공연한 폭행에 대하여는 여기서 말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들은 때로는 집에서도 우리를 괴롭히고, 때로는 멀리까지 따라다닌다. 이러한 고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비참한 존재가 아니고 무엇인가? 왜냐하면, 살아 있으나 반은 죽은 것과 다름없고 그런 사람은 마치 예리한 칼날이 항상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는 것과 같은 허약한 마음으로 불안하고 활기 없는 한숨을 내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일들은 간혹 있을 뿐 언제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나 있는 일도 아니며 그렇다고 갑자기 있는 일도 아니라고 혹자는 말할 것이다. 나도 이 사실을 그대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들이 역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생애가 그들의 생애와는 다른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의 실례를 통해서 경고를 받기 때문에, 이런 사건들이 우리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와 같은 공포보다 더 무서운 재난을 달리 상상할 수 있겠는가? 더우기, 하나님께서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을 맹목적이며 무모한 운명의 공격을 받도록 내버려두셨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게된다. 그러나 여기서 나는 인간이 운명의 지배하에 있을 때 느끼게 될 그 비참함에 대해서만 말하고자 한다.
11.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게 만든다
더우기 하나님의 섭리의 빛이 일단 경건한 사람에게 비칠 때, 그는 지금까지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극단의 불안과 공포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근심에서 구원과 해방을 받게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운명을 당연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 자신을 담대하게 의탁하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이 받는 위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만사를 권능으로 보존하시고 권위와 의지로 지배하시며 지혜로 조정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일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발생할 수 없음을 아는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더우기,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시고 천사로 하여금 돌보게 하셨다는 것과 통치자인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지 않는 한 물이나 불이나 칼이 자신을 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것도 그에게 위로가 된다. 그리하여 시편은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그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91 : 3-6).
여기서 또한 성도의 영광스러운 확신이 솟아 나온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시 118 : 6).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 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혈육 있는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시 56 : 4).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시 27 : 1).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시 27 : 3),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시 23 : 4),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주를 더욱 찬송하리이다"(시 71 : 14). 그들이 이와 같은 굳은 확신을 가지는 것은, 세계가 우연히 도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은 어디서나 주께서 일하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그들의 행복이 사탄이나 행악자의 공격을 받았을 때 섭리를 기억하거나 명상함으로써 힘을 얻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그들은 곧 약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사탄과 모든 행악자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굴레를 씌운 것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의 억제를 당하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고 명령하시지 않는 한 우리를 해칠 어떠한 음모도 꾸밀 수 없으며, 또한 그것을 꾸민 후에라도 준비할 수 없고, 충분히 계획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행하는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사탄과 그 무리들은 하나님의 쇠사슬에 속박을 당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봉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있다는 것도 기억하도록 하자.
이러한 생각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넘치는 위로를 줄 것이다. 그들의 분노를 야기시키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 방향을 돌리고, 그것을 지도해 나가는 것이 주님께 속하는 일인 것처럼, 또한 그들이 자기들의 욕망에 따라 방종하게 기뻐 날뛰지 않도록 그 정도와 한계를 정하시는 것도 주님께 속한 일이다.
이것을 확신한 바울은 어떤 곳에서는 자신의 여행이 사탄의 방해를 받았다고 말하고(살전 2 : 18),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허락으로 되었다고 말하였다(고전 16 : 7). 사탄에게서 그 여행의 장애물이 왔다고 말했다면 마치 사탄이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를 뒤집어 엎을 수나 있는 것처럼 사탄에게 막대한 권능을 부여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을 그의 모든 여행을 허락하시는 주관자라고 말하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사탄은 그가 꾸미는 어떤 일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똑같은 이유에서 다윗은, 인생을 끊임없이 변전시키는 말하자면 회전시키는 각양의 변화 때문에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시 31 : 15) 라고 하면서 이 피난처에 자신을 맡긴다. 다윗은 "인생행로", 혹은 "때"라는 말로 단수로 기술할 수도 있었음에도 "시대"(times)란 복수어를 사용하여, 인간의 상태가 아무리 불안정하더라도 계속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르신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를 멸망시키기 위하여 군대를 연합하였을 때 유다 온 지방을 멸망시키고 황폐하게 하기 위해 밝힌 거센 불붙는 나무처럼 보였지만, 예언자는 이를 보고 그것은 겨우 연기가 나는 정도에 불과한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사 7 : 4)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바로가 부와 권력과 강한 군사력 덕분에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지만, 그러나 바로 자신은 바다의 악어로 비유되고 그의 군대는 고기로 비유되었다.(겔 29 : 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통솔자와 그 부하들을 갈고리로 잡아다가 그가 원하시는 곳으로 끌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요컨대,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이상 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만일 독자가 주의를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무지가 최대의 비참이라는 것과 이에 대하여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반대에 대한 답변. 12-14)
12. 하나님의 "후회"에 대하여
성경의 어떤 구절들이 방해가 안되었다면 섭리의 교리가 신자들에게 순수한 가르침과 위로를 준다는데 대하여는 이미 위에서 충분히 말하였다고 본다(왜냐하면, 어떠한 것도 천박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또한 이것을 만족시키기를 원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이 구절들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계획은 확고 부동한 것이 아니고 현상계의 상황에 따라 변화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첫째, 하나님께서 후회하신 것으로 언급된 실례가 몇군데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한탄하셨고(창 6 : 6),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삼상 15 : 11). 또한 자기 백성이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면 즉시 그들에게 내리기로 결정하셨던 재앙을 돌이키시겠다고도 하셨다(렘 18 : 8). 둘째, 하나님의 작정 중 얼마가 폐기되었다고 언급된 곳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통하여 40일 후에는 니느웨성이 멸망한다고 선언하셨지만, 그후 그들이 회개하자 이전보다 더 은혜로운 선언을 그들에게 내리셨다(욘 3 : 4,10). 하나님께서는 또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셨지만 히스기야의 기도와 눈물에 감동을 받아 그의 생명을 연장해 주셨다(사 38 : 1,5; 왕하 20 : 1,5).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결정으로 인간사를 결정하지 아니하시고, 각자의 공로나 또는 하나님 자신이 공평 타당하다고 생각하시는 데 따라 매년, 매일, 또는 매시간, 이런 일, 저런 일을 결정하신다고 많은 사람은 주장한다.15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곧 하나님께 무지, 오류, 무력을 돌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후회하심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고의적으로 또는 기꺼이 회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발생할 것을 알지 못하신다든가 이를 피할 수없으시다든가 혹은 조급하고 경솔하게 결정짓고 이를 즉시 후회하신다고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서 후회하신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께서 뜻하시는 바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성령은 후회를 말씀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기 때문에 변개치 않으신다는 것이다(삼상 15 : 29). 그리고 사무엘상 15장에서 이 둘이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양자를 대조해 보면 외관상으로는 모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충분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는데, 이때의 마음의 변화는 비유적으로 기술된 것이다. 곧 이어,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 : 29) 라는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불변성은 사실적으로 명백하게 선언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사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는 영원한 것이며 동시에 모든 후회를 초월하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도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까지도 이를 증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도 다음과 같이 외쳤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 : 19).
13.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돕고자 하나님의 "후회"를 말한다
그러면 "후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분명히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적인 용어에 따라 서술하는 다른 모든 표현방식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둔하여 존엄하신 하나님에게까지 미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그에 대한 묘사를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그 묘사가 낮추어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묘사를 낮추시는 방법은 자신의 존재하는 그대로가 아니고 우리가 그를 지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표현하신다. 하나님께는 마음의 혼란이 전혀 없지만 죄인에 대하여는 분노하신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노하신다고 말할 때, 언제나 그것을 하나님께 무슨 감정적인 동요가 있는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러한 표현은 우리 자신의 인간적인 경험에서 취해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는 항상 흥분하고 노한 사람의 용모를 보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후회"라는 말을 행동의 변화 이외의 어떤 다른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행동의 변화로 자신의 불만을 증거 하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변화는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것에 대한 정정을 뜻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 정정은 후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후회"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행동에 어떤 변화를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계획이나 의지가 번복된 것도 아니며 하나님의 결의가 변경된 것도 아니다. 인간이 보기에는 그 변화가 아무리 갑작스러운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은 영원으로부터 예견하시고 흡족해 하시며 작정하신 것을 끊임없이 방법으로 수행해 나아가신다.
14.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을 확고하게 실행하신다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 대하여 멸망을 선고하신 후 그들이 회개하자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것과(욘 3 : 10), 히스기야에게 죽음을 선고하신 후 히스기야의 생명을 더 연장하셨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작정이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사 38 : 5).16 폐기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암시되었다는 것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단순한 확언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결과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왜 요나를 니느웨 사람들에게 보내어 니느웨 성의 멸망을 예언하게 하셨는가?
또, 왜 이사야의 입을 통하여 히스기야에게 그의 죽음을 암시하셨는가? 멸망에 대한 예고가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사람들과 히스기야를 다 멸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들의 죽음을 미리 경고하여 그 죽음의 다가옴을 멀리서 알 수 있도록 하신 것은 어떤 다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목적이란, 그들을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그들을 회개케 하여 멸망을 받지 않도록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40일 후에는 니느웨가 멸망할 것이라는 요나의 예언은 실상 멸망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히스기야의 장수의 소망이 끊어졌던 것은 보다 오래 살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주께서 그와 같은 위협을 통해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을 회개케 하며, 그들의 죄값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피하게 하고자 하셨던 것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상황의 성질은 우리로 하여금 그 단순한 암시 속에 한 무언의 조건이 포함되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이 사실은 또한 이와 비슷한 여러 가지 실례에 의해 확증된다. 아비멜렉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하자 주께서는 그를 책망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네가 취한 이 여인을 위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가 남의 아내임이니라"(창 20 : 3). 그러나 이비멜렉이 변명한 후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 네가 돌려보내지 않으면 너와 네게 속한 자가 다 정녕 죽을 줄 알지니라"(창 20 : 7). 하나님께서 첫 번째 말씀에서 아비멜렉의 마음을 심하게 때리심으로써 자신을 만족하게 하려 하셨고, 두 번째 말씀에서는 자신의 의지를 명백히 표현하셨는데, 이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는가? 다른 구절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찾을 수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전에 선언하신 바를 취소하셨기 때문에 그의 최초의 목적이 폐기되었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형벌을 경고하심으로써 그가 용서하고자 하는 자들을 회개케 하실 때에, 이는 자신의 뜻을 변경하거나 자신의 말씀을 변경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영원한 작정을 가능케 하시기 때문이다. 다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한 음절씩 설명하지 않으시는 것뿐이다. 실로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진실한 것으로 존속되어야 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경영하셨은 즉 누가 능히 그것을 폐하며 그 손을 퍼셨은즉 누가 능히 그것을 돌이키랴"(사 14 : 27).
제 18 장
하나님께서는 불경건한 자의 일을 이용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순결을 유지하신다1
1. 단순한 "허용"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기쁘신 뜻에 따라 사탄과 모든 악인들을 굴복시키기도 하며 하시며 끌어내기도 하신다는 다른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한층 더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활동하시면서 어떻게 그들의 범죄에 의해 오염되지 않으시는지,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들과 더불어 일을 하시면서 어떻게 모든 죄책을 면할 수 있으시며 나아가서는 그가 사용하시는 자들을 어떻게 정당하게 정죄 하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은 육적인 생각으로서는 거의 이해할 수 없다. 여기에서 "행하는 것"과 "허용하는 것"의 구별이 생겨나게 되었다.2 왜냐하면, 사탄과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지배와 주권하에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어떠한 목적에도 그들의 악을 지도해 나아가시고 또 그들의 악한 행동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고 하는 이 난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거짓을 지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공의의 모든 그릇된 점을 밝히려고 부정하게 힘쓰지만 않는다면,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에 놀란 자들의 겸손함은 아마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와 명령으로 눈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맹목으로 인하여 후에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은 저들에게 불합리하게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런 일은 오직 하나님의 허용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속임수로 그 난점을 피하고 있다.3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명백한 말씀으로 자신이 그 일을 하신다고 주장하심으로써 그러한 핑계를 거절하신다. 하나님의 은밀한 명령이 없이는 인간으로서는 아무 일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시고 자신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결정하신 것 이외에는 그들이 무슨 일을 결정해도 인간으로서는 아무 것도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은 수없이 많은 명백한 증거들이 입증해 주고 있다. 앞에서 우리가 시편에서 인용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 : 3)라는 말씀은 분명히 인간의 행위와 관련된 말씀이다. 이 시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전쟁과 평화의 참된 조정자라고 한다면 그리고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없다고 한다면, 누가 감히 인간은 하나님 모르게 혹은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동안 맹목적 충동에 의해서 닥치는대로 무리하게 행동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제는 특수한 증거들에 의해 더욱 분명하게 밝혀지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들처럼, 사탄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난 것을 우리는 욥기 1장을 통해서 알고 있다(욥 1 : 6, 2 : 1). 실로 그 방법이 다르고 그 목적이 달랐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원하지 않으셨으면 사탄은 어떠한 일도 착수할 수 없었다. 그런데 경건한 인물을 괴롭히기 위해 허락이 공공연하게 첨가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그 시련의 장본인은 하나님이시며 사탄과 사악한 도둑들은 다만 그 대행자였다고 결론을 내린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니"(욥 1 : 21)라는 말씀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이 경건한 인물을 미치게 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스바 사람은 잔인하고 사악하게 침입하여 남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욥은, 자신이 모든 소유를 빼앗기고 빈곤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이나 사탄이 무엇을 꾀하든, 하나님께서 그 열쇠를 쥐고 계시며 그들의 수고를 돌려 자신의 심판을 수행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저 불신의 왕 아합이 기만당하도록 작정하셨다. 그러자 이 목적을 위해 마귀는 자기가 봉사하겠다고 하였다. 이 마귀는 모든 선지자의 입에서 거짓말을 하는 영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확실한 명령을 받고 보냄을 받았다(왕상 22 : 20,22). 아합의 무분별하고 미치광이와 같은 행위를 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것이, 단순히 허용만이라는 허황된 공상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심판자가 할 일을 작정도 아니하시고, 일을 수행하기 위해 사역자들에게 명령도 아니하시고, 다만 허락만 하신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이고자 획책하였으며, 빌라도와 그의 병사들은 그들의 광적인 욕구에 따라 행동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엄숙한 기도에서, 모든 불경자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행 4 : 28)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베드로가, 그리스도께서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행 2 : 23)이라고 설교한 것과 일치된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은 태초부터 모든 것을 아시는 분으로서 명확한 지식과 정하신 의지에 따라 유대인들이 행한 것을 결정하셨다고 말한 것이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도,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일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행 3 : 18)고 이와 같은 뜻의 말을 하였다. 압살롬은 근친 상간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히는 가증스런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처사라고 말씀하셨다. 곧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 : 12). 예레미야는 갈대아 사람들이 유대에서 행한 잔인한 일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었다고 말하였다(렘 1 : 15, 7 : 14, 50 : 25 및 그 밖의 여러 구절). 이러한 이유로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불려졌다(렘 25 : 9).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꾸중(사 7 : 18 혹은 5 : 26)과 나팔소리(호 8 : 1)와 권위와 명령으로 말미암아 불경자들이 전쟁의 자극을 받는다고 말씀하셨다(습 2 : 1 참조).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사람들을 진노의 막대기요(사 10 : 5), 손으로 휘두르는 도끼라고 하셨다(마 3 : 10 참조). 또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무너짐은 하나님 자신이 하신 일이라고 하셨다(사 28 : 21). 다윗은 하나님께 불평을 토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를 의로우신 심판장이라고 인정하였으며, 시므이의 저주는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삼하 16 : 10)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삼하 16 : 11). 우리는 성경의 역사에서 발생하는 사건마다 모두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자주 발견한다. 예를 들면, 열 지파의 배반과(왕상 11 : 31), 엘리의 아들들의 죽음과(삼상 2 : 34). 또 그와 비슷한 많은 사건이 있다. 성경을 적절하게 배운 사람이라면, 내가 많은 증거들 가운데서 다만 몇 개의 증거만을 제시한 것이 바로 간결을 도모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몇 개의 예증만으로도, 하나님의 섭리의 자리에 단순한 허용이라는 것을 대치시키는 자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이 지껄이고 있는가를 매우 명백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하나님은 망대 위에 앉아서 우발적인 사건들을 기다리고 있는 분이시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인간 의지에 좌우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2. 하나님의 충동이 어떻게 인간에게 전해지는가?
여기서 우리는 은밀한 충동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 솔로몬은 왕의 마음이 하나님의 기쁘심에 따라 임의로 인도된다고 하였는데(잠 21 : 1), 이 말은 확실히 인류 전체에 해당되는 말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이 말은 "우리 마음의 생각은 하나님의 은밀한 영감에 의하여 하나님의 목적으로 향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명히 사람의 마음속에서 내적으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그가 "제사장에게는 율법이 없어질 것이요 장로에게는 모략이 없어질 것이며"(겔 7 : 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욥 12 : 24; 참조, 시 107 : 40) 하신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계된 말씀들을 우리는 여러 곳에서 자주 읽게 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공포로 그 마음을 점령당하게 될 때 두려워한다는 말씀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아무도 모르게 사울의 진영을 떠났는데, 즉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었다(삼상 26 : 12).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의 마음을 어둡게 하시며(사 29 : 14), 저들을 쳐서 현기증이 나게 하시고(신 28 : 28; 참조, 슥 12 : 4), 잠자는 영으로 저들의 눈을 감기시며(사 29 : 10), 광기로 저들을 채우시고(롬 1 : 28), 저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신다(출 14 : 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분명한 증거를 요구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은, 마치 하나님께서 악한자들을 버리심으로써 사탄에게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처럼 이 여러 구절들 역시 하나님의 허용과 관계된 구절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해결은 너무도 어리석은 해석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들의 정신이 나간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하여 되어진 것으로 성령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롬 1 : 20-24).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으며(출 9 : 12), 또한 그 마음을 더욱 완강하고(출 10 : 1) 굳게 하셨으며(출 10 : 20,27, 11 : 10, 14 : 8)고 성경은 말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표현을 회피하면서, 어리석은 트집을 내세우는데, 즉 바로는 자신의 마음을 완고하게 했다고 다른 곳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출 8 : 15,32, 9 : 34) 그 마음을 완고하게 한 원인은 하나님의 의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에 의하여 행동하지만 동시에 스스로 일한다는 두 사실이 미처 서로 완전하게 모순된다는 말과 같다. 그러나 나는 저들의 반대를 반박한다. 왜냐하면, 만일 완고하게 하는 것이 단순한 허용을 지시하는 것이라면 본래 완고하게 된 동기는 바로에게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바로 왕이 수동적으로 완고하게 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빈약하고 어리석은 해석이겠는가? 이 외에도 어느 경우에도 성경은 그런 생트집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출 4 : 21)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뜻으로 모세는 가나안 주민들에 대하여 저들이 싸우러 나아간 것은 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수 11 : 20; 참조, 신 2 : 30). 다른 예언자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여호와께서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시 105 : 25)라고 반복하여 말하였다. 또한 이사야 선지자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그를 보내어 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하여 나의 노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사 10 : 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불경하고 완고한 인간을 가르쳐서 자발적으로 순종케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들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명령을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기나 하였던 것처럼 그들을 굴복시켜 자신의 심판을 시행하시고자 하신 것이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하나님의 명확한 결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는 사실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자주 사탄의 중재 활동을 통하여 악한자에게서 활동하시지만,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충동과 허용에 의해서 그에게 허락되는 한에 있어서만 자기 일을 수행한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사울은 악한 영으로 인하여 괴로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악령은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삼상 16 : 14)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 사실은 사울의 광란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복수에서 온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또한 사탄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한다고 성경은 말한다(고후 4 : 4). 그러나 유혹의 사역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면(살후 2 : 11), 진리에 순종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 거짓을 믿게 하는 이 일이 어디서 오겠는가? 첫째 이유에 의하면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겔 14 : 9)라고 하였고, 둘째 이유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롬 1 : 28) 가장 무서운 정욕에 사로잡히도록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복수의 근본적인 창시자이시고, 사탄은 다만 그 복수의 대행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앞으로 제2권에서 인간의 자유 의지와 그 예속을 다르게 될 때에 다시 논의해야 하기 때문에,4 나는 여기서 필요한 만큼만 간단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의지는 만사의 원인이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의 모든 계획과 일에 대한 결정적 원리로 삼으며, 하나님의 섭리는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선택자에게서 그 힘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유기자를 복종케 하기도 한다라고.
3. 하나님의 의지는 통일체를 이룬다
지금까지 나는 성경에서 명백하고 공공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들만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말씀에 악의에 찬 불명예의 낙인을 주저 없이 찍으려는 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비난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무지를 구실 삼아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내게는 다르게 보인다"느니 혹 "이런 문제에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느니 하는 식의 가벼운 한 마디로 하나님의 권위를 반대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교만이 달리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공공연히 저주한다면, 하늘을 향해 침을 뱉음으로써 얻는 유익이 무엇이겠는가? 실로 이와 같은 건방짐의 실례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시대마다 불경한 사람들과 참람된 사람들이 있어서 교리의 이 부분을 반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큰 소리로 떠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은 성령께서 오랜 옛날 다윗의 입을 통해 "주께서……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 : 4)라고 하신 그 말씀이 진리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윗은 방종한 사람들의 광기를 간접적으로 비난하였는데, 그들은 더러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논쟁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정죄할 권능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이와 함께 그는, 그들이 아무리 하늘나라에 대하여 참람된 말을 한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 비방의 안개를 깨끗이 거두셔서 자신의 의를 화려하게 빛내신다고 간단하게 경고하였다. 우리의 신앙도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기초하고 있어서 온 세상을 이기기 때문에(요일 5 : 4), 높은 곳에 서서 이들 비방의 안개를 경멸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첫째 반대는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께는 두 개의 상반되는 의지가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저들의 반대 내용이다. 그것은 율법에서 공적으로 금지하신 것을 그의 은밀한 계획에서는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답변하기 전에, 나는 독자들에게 이러한 트집이 나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을 목표로 한 것임을 거듭 경고해 두고자 한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경건한 욥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되어졌다(욥 1 : 21)고 확실하게 고백하셨다. 그가 도둑들에게 약탈을 당했을 때, 그들의 불의한 행동과 악행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채찍이었음을 인정하였다. 또 다른 곳에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삼상 2 : 25)고 말하고 있다. 다른 선지자도 역시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 : 3)라고 부르짖고 있다. 그리고 남의 흠잡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태한 허용에 의해서만 모든 일이 발생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이 만사의 창시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나는 이미 명백하게 입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빛과 어두움을 지으시고 평안과 환난을 지으신다고 말씀하신다(사 45 : 7). 그리고 자신이 시키지 아니하시면 재앙이 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암 3 : 6). 내가 저들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 원해서 하시는가 아니면 마지 못해 하시는가를 저들이 말하는 일이다. 그러나 모세가 가르친 대로, 우연히 자루에서 빠진 도끼에 맞아 죽은 사람도 하나님께서 시키신 대로 되어진 것이었다(신 19 : 5; 참조, 출 21:13 ).
이와 같이 누가에 의하면, 헤롯과 빌라도는 하나님께서 그의 권능과 계획에 의한 예정으로 이루시려고 작정하신 바를 행하기 위하여 공모하였다고 온 교회는 주장한다고 한다(행 4 : 28). 만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혀 죽음이 하나님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구속은 어디서 올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지는 그 자체 스스로 모순을 지니는 것도 아니고 변하는 것도 아니며 원하는 바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의지가 하나이며 단일하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이 여러 모양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정신적 무능력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행하실 바를 원하기도 하기고 원하지 않기도 하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방인의 소명을 "감추었던 비밀"(엡 3 : 9)이라고 말하고, 곧 이어서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각종 지혜"(엡 3 : 10)가 나타나 있다고 첨가하였다.5 하나님의 지혜가 "다양하게"(고대의 해석가들은 이를 여러 가지 형태로 번역했음) 나타난다고 해서, 마치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거나 스스로 모순을 일으키거나 하시는 것처럼, 우리 자신의 둔한 이해로 인해6 하나님 자신에게 무슨 변화가 있다고 꿈꾸어야 하겠는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금하신 바를 어떻게 이루어지도록 하셨는가를 이해하지 못할 때에 우리는 우리들의 정신적 무능력을 생각해야겠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빛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딤전 6 : 16)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곧 그것이 흑암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자. 그러므로 경건하며 겸손한 사람들은 모두 다 어거스틴의 다음과 같은 의견에 쉽게 동의한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인간은 가끔 선한 의도에서 원한다 그 예로, 선량한 자식은 자기 아버지가 살아 계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와 반대로 그가 죽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하신 뜻으로 원하시는 것을 인간은 악한 뜻으로 원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악한 자식이 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원하고 하나님께서도 이를 원하시는 경우가 있다. 즉, 전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을 원하지만 후자는 하나님께서도 원하시는 것을 원한다. 그러나 전자의 자식으로서의 경건은, 그가 비록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는 다른 것을 원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동일한 것을 원하는 후자의 불경건보다는 훨씬 더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와 일치한다.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나님께 합당한 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 각자의 의지가 향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과의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는데, 여기에 따라 그것이 시인되기도 하고 부인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악한 인간의 악한 의지를 통하여 자신의 의로우신 의지를 성취하시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전에, 타락한 천사와 모든 악한 자들이 태만하여 자기들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을 행하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저들은 전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에 반항하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의지는 저들에게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부르짖고 있다. "하나님의 행사는 크시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의지를 찾았다"(참조, 시 111 : 2). 그러므로 그 방법이야말로 놀랍고 형언할 수 없는 어려운 것이어서, 비록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지 아니하시면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허락지 아니하시면 하나도 그대로 되어지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 못해 허용하시지 않고 기꺼이 허용하신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악에서 선을 만드시지 않는 한,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악의 행위를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7
4.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하여 믿지 않는자의 행위를 이용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비난 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역시 다른 반대도 해결되거나 또는 스스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인데, 그 반대는 다음과 같다. 그것은, 만일 하나님께서 불경자의 행동을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계획과 의도까지도 주관하신다고 하면 결국 하나님은 모든 악의 창시자이시며,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작성하신 바를 수행하면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 때문에, 그들이 정죄를 받는다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말속에는 하나님의 의지와 그의 교훈이 잘못 혼동되어 있는데, 이 양자의 차이가 얼마나 큰가는 수없이 많은 실례들에 의해서 명백하게 보여지고 있다. 그 예로, 압살롬이 아버지의 후궁들을 더럽혔을 때(삼하 16 : 22), 하나님께서는 이 파렴치한 행위를 통하여 다윗의 간음죄를 벌하려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이유로 해서 그 사악한 아들에게 근친 상간의 죄를 명하신 것은 아니었다. 아마 다윗으로서는, 그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하여 말한 대로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하나님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지만(삼하 16 : 10-11), 그러나 그 뻔뻔스러운 개가 마치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고 있다는 것처럼 그 순종을 칭찬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의 말을 하나님의 채찍으로 인정하고 참을성 있게 그 징계를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확고하게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즉 하나님은 행악자들을 사용하셔서 자신의 은밀한 심판으로 작성하신 것을 성취하시지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교훈에 순종이나 한 것처럼 용서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실상, 그들은 자신들의 정욕에 따라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파괴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여로보암이 왕으로 선택된 것은(왕상 12 : 20), 인간의 사악한 행동은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은밀한 섭리에 의해서 지배된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고, 불신실하게 다윗의 가문을 배반한 것으로 인해서 국민의 경솔함과 광기가 정죄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로보암이 기름부음 받을 것을 원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호세아의 말 가운데 얼핏 모순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한 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알지 못하시며 또한 원치 않으시는데 그 나라가 세워졌다고 탄식하셨다(호 8 : 4).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분노함으로 여로보암을 왕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호 13 : 11). 여로보암의 통치는 하나님의 의지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한편 하나님께서 저를 왕으로 삼으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그 대답은 명백하다. 즉, 하나님께서 지워주신 멍에를 내팽개치지 않고는 백성들은 다윗의 집을 배반할 수 없었다는 것과 또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망은을 이처럼 벌하시는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반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다른 목적을 품으시고 정당하게 이 변절을 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여로보암도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왕국의 일부를 빼앗기 위해 대적을 일으키셨다고 성경의 역사는 말하고 있다(왕상 11 : 23).
독자들은 이들 두 사실을 주의 깊이 생각해야 한다. 백성들이 한 왕의 지배를 받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라가 둘로 나뉘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분열의 시작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선지자는 예언과 기름 부음을 통해 아무런 생각도 않고 있는 여로보암의 마음에 왕국 계승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확실히 이런 일은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바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의지에 반대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이 그렇게 이루어지도록 명하신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백성의 반역은 정당하게 정죄되고 있다. 저들이 정죄된 이유는, 저들이 하나님의 의지를 반대하여 다윗의 집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후 르호보암이 백성의 소원을 거만하게 멸시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말씀이 첨가되었다.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왕상 12 : 15). 신성한 통일이 분열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를 거스르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열 지파가 솔로몬의 아들에게서 떠났는가를 유의하기 바란다. 이 외에도 이와 비슷한 실례가 또 하나 있으니, 즉 아합의 아들들이 살해당하고 그의 후손이 모두 멸절당한 것은 백성들의 동의, 곧 저들의 조력에 의해서 된 것이었다(왕하 10 : 7). 참으로 예후는 "여호와께서……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왕하 10 : 10)라고 진실 되게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런 이유 없이 사라미라의 백성들이 이 일을 도와준 데 대해서 꾸짖고 있다.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왕하 10 : 9)라고 그는 묻고 있다. 만일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동일한 행동에 인간의 죄가 나타나는 동시에 하나님의 공의가 빛나고 있는가를 나는 이미 분명하게 설명하였다.
그리고 겸손한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어거스틴의 답변만으로도 언제나 충분할 것이다. "성부는 성자를 내어 주셨고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를 내어 주셨으며 유다는 주님을 관헌들에게 내어 주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있어서, 어째서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인간은 죄의 책임을 져야 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동일한 행동을 하지만 그러나 동일한 근거에서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8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충동에 따라 불법을 저지르는 때에도 하나님과 인간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주장에 만일 어떤 사람이 불만을 가진다면, 그들은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사악한 자의 마음속에서도 자신이 원하시는 바를 행하시되 그들의 공적에 따라 보응하시니, 어느 누가 이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9 그리고 확실히 유다의 반역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친히 성자를 내어 주시기를 원하시고 또 죽게 하셨다고 해서 하나님께 범죄의 책임을 돌린다는 것은 구속의 명예를 유다에게 돌리는 것에 못지 않게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이 다른 곳에서 정확하게 하나님께서 이 심문에서 묻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었던가 혹은 무엇을 하였던가가 아니라 무엇을 하려고 생각하였던가이며,10 그리하여 그들의 계획과 의지를 참작하려 하셨다고 올바르게 지적하였다.
이것이 조잡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의 이해력을 초월한다고 해서 성경이 명백히 입증하는 진리를 거절한 점에 있어서 자신의 완고함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는가를 잠시나마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아는 것이 인간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지 못하셨다면, 결코 예언자나 사도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것이 공공연히 선포되는 것을 비난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혜는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것을 비난하지 않고 공손하며 온순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만하게 조롱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떠들고 있는 것이 너무도 명백하기 때문에 이 이상 더 오랜 시간을 소비하여 반박할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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