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칼 빈 신 학

예배에 대한 기초적 이해/주승중(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미션(cmc) 2011. 7. 25. 10:54

예배학강의 2005-2

예배에 대한 기초적 이해

 

주승중(장신대 예배와 설교학 교수)

 

1. 왜 예배를 드리는가?

첫 시간에 우리가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전 세계에서 한국교회 교인들처럼 열심히 모여서 예배드리는 공동체가 없다. 우리는 주일예배부터 시작하여 주일 찬양예배, 수요예배(혹은 기도회), 금요일 구역예배 등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여기서 심각하게 던져 보아야 할 질문은 도대체 우리가 ‘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가?’ 하는 문제이다. 우리는 왜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마디로 그것은 구원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에서 건져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위에 보내셨는가? 눅 19:10에서 예수님은 그 분명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신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들을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함을 받았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엡 1:3-7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 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 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 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구원받았기에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된 것이다. 즉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구속의 결과이다.

히브리서 12:28을 보라.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즉 영원한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여기서 “섬기다”라는 말은 “라트레오우”라는 헬라어 동사로, “예배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12:28절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기 때문에,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예배함으로써, 우리를 예배하는 자들로 만드신 하나님께 은혜롭게 반응하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시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배의 근원은 바로 구원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어 시편 22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분명하게 예언하고 있는 말씀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구절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들의 대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 직접적으로 다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셔야만 했는가? 그에 대한 대답도 시편 22편은 분명히 이렇게 답하고 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얼굴을 그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그가 부르짖을 때에 들으셨도다”(22-24)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구속 사역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바로 찬양과 그를 경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25절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큰 회중 가운데서 나의 찬송은 주께로부터 온 것이니, 주를 경외하는 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자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지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 이 주의 앞에 예배하리라”(시 22:25-27)

 

결국 시편 22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구속의 결과가 바로 찬양이요, 경배라고, 즉 예배라고 말한다.

 

우리가 또 한 예를 들자면, 일찍이 마틴 루터는 누가 17:11-19의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고침을 받은 사건을 통해서 “진실된 예배”(True Worship)란 무엇인가 하는 설명을 한 바가 있다. 열 명의 문둥병 환자가 고침을 받았는데, 그 중에 딱 한 사람, 그것도 사마리아 사람만이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감사”하였다. 열 명이 구원함을 얻었는데, 그 중에 이 사람만이 하나님께 나아와 구원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식하시기를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결국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구원에 대한 최초의 반응이 바로 예배라는 사실이다. 즉 구원은 예배의 근원이다. 우리가 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가? 다른 많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2. 예배의 정의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인가? 우리가 예배가 무엇인가를 이해하려면 두 가지의 접근을 통해서 할 수 있다. 하나는 예배학자들이 예배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을 찾아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들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1) 예배의 용어들

이제 먼저 예배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몇 가지 살펴보는 가운데 예배의 의미를 알아보자

먼저 구약에서 나타나고 있는 용어들을 보면, “에바드”라는 단어이다. 이 말의 뜻은 “봉사” 또는 “섬김”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샤하아”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굴복한다” 또는 “자신을 엎드린다”는 뜻으로 숭배, 순종, 봉사의 종교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단어가 나타내고 있는 바 그 의미는 곧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그의 뜻을 따르며 섬겨야 할 존재라는 사실과, 경배와 순종의 생활이 예배 자들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 다음 신약성경에도 예배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있는바, 그 첫째는 “프로스퀴네인”이라는 단어이다. 이 말은 “절하다” “굽어 엎드리다” “입맞추다”라는 뜻으로서 예배드리는 자의 자세를 말해주고 있다. 그 다음은 “라트레이아”인데, 그 의미는 종으로서 상전만을 섬겨야 할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흔히 service 또는 worship으로 번역이 된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레이투르기아”인데, 이 말은 노동(ergon)과 백성(laos)이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희랍에서 시나 국가의 전체 이익을 위하여 실시하는 공익사업을 뜻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이 말은 예배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께 바치는 봉사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즉 이 단어에 의하면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인간들이 하는 노동 내지는 봉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후에 이 말은 특별히 기독교의 예전(liturgy)을 나타낼 때 사용하게 되었다. 즉 Liturgy는 신앙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을 공중 예배를 통하여 표현하는, 근본적으로 외향적인 표현 형식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그 외에 우리가 중요하게 보아야 할 두 개의 단어가 더 있는데, 그것들은 “Gottesdienst”라는 독일어와 “Worship”이라는 영어 단어이다. 먼저 “Gottesdienst”라는 말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뜻과 사람이 하나님께 봉사한다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 속에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신 하나님과(빌 2:7) 그러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섬김을 반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Worship”이라는 단어인데, 이 말은 “가치(worth)”라는 말과 “신분(ship)”이라는 두 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상대방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고, 가치와 존중을 돌린다는 뜻이다. 즉 이 말에 의하면 예배란 “하나님께 최상의 가치를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예배를 표현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단어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예배란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에 대한 우리들의 봉사 내지는 응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이 땅에 내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엄청난 일을 이루셨기에, 우리들은 그 분에게 최상의 가치를 돌리면서, 그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것이 바로 예배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사 놀라우신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고, 그 분께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린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예배 가운데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다시 한번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며,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현장에서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그 만남 속에서 감격과 감사가 넘쳐흐르게 되며, 그 결과(예배드린 결과) 우리는 전보다 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며, 더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2)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

그 다음에 많은 예배학자들이 예배에 대해 정의한 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표현한다면 그것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Franklin Segler는 “기독교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나타난 하나님 자신의 인격적인 계시에 대한 인간들의 인격적인 신앙 안에서의 정성어린 응답이다”라고 정의를 내린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대한 정성어린 응답의 행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배의 기본적인 발걸음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는 믿음의 발걸음이어야 한다. 그래야 그 믿음을 가지고 거룩한 예배의 대열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참여가 감격 어린 응답적인 행위로 변화되고, 예배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자세로 전환하게 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예배의 깊은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1)고 말하면서, 바로 이것이 우리 인간들이 참으로 드려야 할 영적 예배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상과 같이 예배의 깊은 의미가 이해되어질 때, 유명한 장로교 예배 신학자인 Paul Hoon이 예배의 현장을 계시와 응답의 만나는 지점이라고 한 말을 이해하게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대화의 현장이 바로 예배라는 말이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응답”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의 영을 향한 하나님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즉 그는 기독교 예배를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의 응답’이라는 두 가지의 중심개념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루터교 신학자 Peter Brunner 역시 예배란 “우리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으로서, 우리는 기도와 찬송으로 그분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그 외에 다른 것은 행해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순종의 태도”로서의 기도와 찬양을 통하여 하나님께 감사함으로써 그 분의 역사하심에 올바로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장하기를 예배는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고, 자신의 은사에 우리가 응답하게끔 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그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 다음에 Evelyn Underhill은 성공회의 전통에 근거하여 “예배는 그것이 어떤 수준과 형태를 취하고 있던지 간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 예배는 다른 예배들과는 달리 “분명한 계시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포함한 “초자연적인 행동이며, 초자연적인 삶”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까지의 여러 전통의 예배학자들의 정의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예배에서 두 가지의 중심적인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세상에서부터 예배로 부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분께 응답하고자 함께 모이게 된다. 즉 기독교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이것이 바로 예배의 첫 번째 중요한 요소이다.

그 다음에 기독교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보여주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즉 앞선 모든 예배의 정의를 보면 인간 편에서의 응답 또는 만남이라는 단어가 아주 중요한 두 번째 요소임을 알게 된다. 즉 예배란 계시와 응답이 만나는 현장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본질적인 정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로 한 하나님과 예배자와의 교제 또는 만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개혁교회 예배학자인 John Burkhart는 “예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셨고, 하시고 계시며, 또 앞으로 하실 것에 대한 축제적 응답이다”(Worship is the celebrative response to what God has done, is doing, and promises to do)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장복 교수도 “예배란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수많은 은총에 감격하여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며, 감사하며 봉헌하려는 피조물의 응답적인 행위”라고 정리한다.

그러므로 예배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 앞에 뜨겁게 응답하는 만남의 현장”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예배란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고, 찾아주시며,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에 응답하는 행위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적인 은총이 주어지므로 죄인 된 인간들이 구속의 은총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며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 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또 하나님 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 10:19-22)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그의 백성 가운데 현존해 계시며, 그로 인해 우리들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그 하나님의 현존, 임재와 축복의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응답하고 봉사하는데 이것이 바로 기독교 예배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으로서 예배의 현장에 임한 사람은 무엇 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 와 있으며, 어떠한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여기에 서 있는지를 반드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예배 자는 맹종의 신앙인이 되기 쉽고, 또 그러한 자세 속에서는 하나님과의 깊은 의미 있는 만남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오늘 예배 자들이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이해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대로 예배란 하나님의 현존이 가장 뚜렷하며, 백성들과의 만남의 역사가 발생되는 현장이다. 즉 예배는 바로 계시와 응답의 가장 실감나는 현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육의 사건과 구속사건, 그리고 부활의 사건 속에서 보여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은 너무나 뚜렷한 계시이기에, 구속받은 인간들로부터 감격적인 응답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이 응답의 대열에 선 무리들은 언제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리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으며(What God has done), 무엇을 하고 계시며(what God is doing), 그리고 무엇을 하실 것인지를(What God will do) 분명히 깨닫고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님의 은총과 결부시키고, 그 인격적 하나님과의 만남을 이룬 사람만이 참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다.(요한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3. 예배와 신앙: 예배는 믿음의 외적인 표현

교회는 예배를 통하여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백한다. 즉 교회는 예배로 말미암아 그리고 예배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하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한마디로 예배는 교회의 믿음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To have a God is to worship God)이라고 하였다. 즉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의 신조, 내지는 신앙고백이 교회의 신앙을 가장 깊게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교회의 예배야말로 교회의 신앙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조라는 것은 예배를 통해서 교회가 증거하고 믿는 바를 고백하고 형성한 것이다. 그러나 예배는 교회의 믿음의 살아있는 형식이다(the living form of faith). 게다가 우리는 교회의 고백하는 믿음의 내용과 증거를 예배 안에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는 교회가 의미를 추구하는 모든 다른 형태의 행위들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인 것이다.

그래서 정장복 교수는 우리가 기독교 예배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세 가지의 중요한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첫째는 예배의 기본 성격과 그 의미를 신학적인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요, 둘째는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예배가 어떻게 발전되었고, 변천되어 왔는가를 찾아보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예배에 임하는 개인이 갖추어야 할 신앙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는 말하기를,

 

“예배 자들이 어떤 심성을 가지고 무엇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 아니라, 섬기는 신에 대한 불 경건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예전의 형태가 아무리 화려하고 장엄하더라도 그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참여자의 깊은 신앙이 없이는 한갖 불당의 장식처럼 보이게 되며, 아무리 유창한 말씀의 선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 또한 일종의 종교 강연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J. G. Williams는 “예배의 핵심은 신앙이다”라고 한 것이고, Robert Rayburn은 “예배란 언제나 신앙에 의해서 규정되어지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또 Cuthbert Hall은 말하기를 “예배는 믿음의 표현이요, 믿음의 행위이며, 또한 믿음은 예배의 뿌리이며 동기이기도 하다”(Worship is the expression and the action of faith, and faith is the root and the motive of worship)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신앙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죽음을 향하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불러주시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주신 사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확실한 믿음”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내가 지어야 할 십자가의 죽음을 대신 감수토록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대한 믿음이요, 신앙을 말한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하고 그분을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맞아들임은 물론이요, 대속의 죽음의 당하신 예수님에게 고개 숙여 감사하는 자세가 바로 신앙이다.

그런데 예배와 우리의 믿음의 관계를 볼 때 한 가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많은 개신교회들의 예배가 그 구조에 있어서 믿음을 보여주는데 있어서 확실하지가 않으며(unstructured), 초점이 없고(pointless), 그리고 굴절된(disoriented) 모습이 많이 있다는 사실이다. 즉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배가 우리의 신앙을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한국교회에는 그 신앙의 내용은 순복음적인 모습이 많은데, 그 신앙의 표현하는 예배의 형식은 거의 모두가 다 장로교적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예배는 장로교 예배나, 순복음교회의 예배나, 감리교 예배나 그 모습이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신약성서에 나타난 초대교회가 바로 이 면에서 다른 공동체와 달랐다. ecclesia라는 단어는 문자 그대로는 “사람들의 질서 있는 모임”을 말한다. 그러나 초대교회 교인들의 모임이 그 당시의 다른 모임과 다른 모임으로 만들게 된 것이 바로 초대교인들의 모임은 “예수의 이름으로 함께 모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예배가, 우리의 믿음을 나타내 보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정장복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예배와 신앙은 필연적인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배 없는 신앙이란 자기 수양에 불과한 것이며, 신앙이 없는 예배는 아무 의미를 가져올 수가 없다. 즉 교회를 이룩한 그리스도 인은 곧 거룩한 무리들로서 깊은 신앙의 소유자들이어야 하며, 그들은 그 신앙 때문에 예배하는 공동체로서 이 땅위에 존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할 때만이 그 무리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선별된 무리들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4. 예배의 정신: 영과 진리로 하는 예배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인가? 요한 4장 23절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참되게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면 어떤 마음과 자세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렇다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예배를 말하는 것인가?

우리는 요한 4장 1-26절에서 예배의 가장 중요한 기본정신을 배우게 되는데,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향하여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한다”(22절)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는 드리고 있었지만 예배의 참 대상을 알지 못한 체 예배드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을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어떤 부분은 알고 있었지만, 구원에 대한 모든 계시를 충분히 알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예배는 예배에서 요구되는 합당한 지식이 없이, 진리가 없이 열성적인 마음으로만 드리는 예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의 예배는 적극적으로, 감동적으로 드려졌지만, 예배의 내용은 옳지가 않았던 것이다. 즉 그들은 신령으로 예배를 드렸지만, 진리로는 예배드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유대인)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요 4:22)고 말씀하셨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는 정반대였다. 그들은 39권의 구약성서 전부를 받아 들였고, 구원에 대한 모든 계시를 소유하였다. 그들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령함이 부족했다. 마태 6:1-8에 의하면 그들은 냉담하고 율법적이며, 의식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즉 유대인들은 외양은 갖추고 있었지만 거기에 자신들의 영은 담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진리는 소유했으나 영은 비어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극단의 예배 형태를 바라보게 되는데, 즉 하나는 그리심 산에서 드리던 열광적인 사마리아인들의 예배와, 또 하나는 풀 한 포기 날 수 없는 껍데기만(형식) 남아 있어, 그 속에 생명력이 없는 메마른 이스라엘의 예배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 4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는 참된 예배가 되려면 이 두 가지가, 즉 신령과 진리를 겸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열광적이고 열심히 있는 적극적인 예배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예배도 진리 위에 기초한 것이라야 하며, 또 진리를 따라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예배 속에 뜨거운 마음으로 갈급해하는, 감격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열심도 있어야 한다. 결국 참된 예배는 이 둘의 균형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먼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어떤 예배인지를 생각해보자.

 

1) 신령(πνευματι: spirit)으로 드리는 예배

여기서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영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뜻이다. 바울은 롬 1:9에 보면 “내 심령으로(with my spirit)으로 ‘섬기는’ (리트류오: 예배하다)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라고 하여 자기의 심령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다윗은 시편 103:1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고 고백하면서 자기의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무튼 예수님은 인간의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면,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예배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인간의 본성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육신으로 예배를 드린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하기만 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루살렘 성전이나 그리심 산상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전에 가는 것이 곧 예배라고 생각했다. 이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주일 아침 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찬송을 부르고, 혹은 촛불을 밝히고, 혹은 성호를 긋고 통로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그런 행위가 예배 행위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관습은 예배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수단 자체가 진정한 예배일 수는 없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수단이 예배를 방해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주일 아침에 우리가 행하는 특정한 관행과 예배 그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심령이 함께 하지 않는 예배, 우리의 껍데기만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예배라면, 습관적으로 앉아 있는 예배라면, 그것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예배가 아니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이 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그래서 예배를 감정과 혼동하고 있다. 우리의 혼은 감정이 위치하는 자리이다. 그러나 예배는 육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거니와 더 나아가서 혼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에 때때로 감정이 고무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감정이 격해져 눈물이 흐르거나, 기쁨에 넘쳐 감격에 젖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만한 것인가를 묻는다면 언제나 그렇지 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안타깝게도 눈물이 흐르거나 기쁨이 넘쳐 감격에 젖기도 하는 현상은 진정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경우에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찬양을 부를 때는 감동하다가도, 말씀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나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의 본성과 흡사한 인간의 이(하나님은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진정 깨닫고 감사하고 감격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때에 이루어진다. 바로 이 점에 대해서 영국의 유명한 성경주석가인 윌리엄 바클레이(William Barclay)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진정하고 순전한 예배는 인간이 그의 영을 통해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할 때 이루어진다. 진정하고 순전한 예배는 어떤 일정한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의식이나 기도를 통해 드리는 것도 아니며, 어떤 예물을 가져와 바치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다. 진정한 예배는 인간의 썩지 않고 보이지 않는 부분인 영이, 역시 썩지 않으며 보이지 않는 분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께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신령으로,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가 신령으로 예배드리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위하여 성령께서 우리 심령에 들어 오셔야 한다. 고전 2:11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이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영을 자극해 주시고, 동기를 부여해 주시며, 우리의 영과 혼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며, 감격에 넘칠 수 있도록 열어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기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참 예배를 드릴 수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일단 구원을 받게 되면,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시며, 날마다 순간마다 교훈해 주시고,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감격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고전 12:3절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즉 성령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누구라도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깨달을 수 없고, 그렇다면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가 없다. 따라서 예배는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영, 성령님과 더불어 시작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이렇게 먼저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고 인도하셔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향할 수 있도록 도우시며,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은 모든 방해물들을 밝히 드려내 주셔서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어 깨끗이 물리친 마음으로 예배할 때 그것이 바로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2) 진리(αληθεια: truth)로 드리는 예배

이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의 두 번째 특성에 대해서 말해보자. 예배는 하나님의 진리로 새롭게 된 마음의 분출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는 진리에 대한 응답으로 드려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예배란 진리 위에 기초된 응답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진정으로”라는 말은 “진리로”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진리란 무엇일까? 이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17:17에서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또 시편기자는 119편 142, 160절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주의 법은 진리로소이다.” “주의 말씀의 강령은 진리이오니”

이렇게 우리가 진리로 예배 드려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것을 기반으로 해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즉 우리는 성경의 계시를 근거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드리려면 그 분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하며, 그 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놀라운 구속의 사역을 통한 한없는 은혜를 깨달아야 하는데, 이 놀라우신 하나님과 또 그의 사랑과 은혜를 완전히 나타내 보여 주는 것이 바로 그 분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통하여 예배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응답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기독교 예배에 있어서 진리의 말씀이 그렇게도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초대교회의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예배드릴 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면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시간(골 3:16-17)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에 앞서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말씀이 저들 속에 풍성하게 거하여, 저들을 주장할 때 저들은 비로소 바른 찬양을 드릴 수 있게 되었고, 바른 기도도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가 이렇게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으려면, 우리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깊이 생각하며, 묵상을 하여야 한다. 주중에는 단 한번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도 않고, 기도하지 않다가, 주일이 되서야 먼지 묻은 성경책을 털고 나아오는 것은 참된 예배의 자세가 아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 말씀의 뜻을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일날 교회에 나와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다.

환언하여 우리가 진정한 예배를 드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매일 매일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이제 주일이 돌아오면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일어나서,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기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그런 마음이 되어야 한다.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하는 것을 묵상하는 중에 보냈다면 분명히 그는 예배를 사모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일을 맞이하여 예배드릴 때 우리는 분명히 참 된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로 드리는 예배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질서가 있는 가운데 드리는 예배이다.

그 다음에 진리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분께 나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αληθεια)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을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행 4:12). 그 분만이 진리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릴 수 있게 된다. 즉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는 것을 말한다.

 

5. 예배(신학)의 기본적인 원리들

1) 예배의 하나님 중심적인 원리

예배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이 만남 속에서 우리는 그의 인격과 행동들을 인하여 그를 찬양하고 찬미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러므로 제일 먼저 우리에게는 예배의 대상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오직 그만이 하나님이시오, 전능 자시오, 우주의 왕이시오, 만유의 주시다. 그리고 그 분은 역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구속하시기 위해서 역사 안에서 행동하신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은혜로운 이런 행위들로 인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성하신다. 그는 우리와의 계약관계에 들어가시며 자신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그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벧전 2:9) 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분명한 것은 교회는(우리들은) 무엇보다도 기이한 행동들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부름 받은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가 인간 중심적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게 된다. 절대로 예배에서 인간이 높임을 받거나 찬양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예: 학위 취득 기념예배, 회갑 예배, 교회 창립 기념예배, 출판기념예배)

 

2) 예배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원리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는 자신의 구속사역으로 인하여 영원토록 아버지를 찬미하는 분이시다. “교회의 예배는 항상 하나님께서는 인류가 하나님께로 이끌림 받도록 인류에게 다가 오신다”라는 성경 전체를 통하여 흐르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확신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 자신은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기독교의 첫째가는 진리이다(요 3:16, 엡 2:8-10). 그리고 이 진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이 바로 예배이다. 왜냐하면 예배는 교회의 행위이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1회적인 구원사건이기 때문이다. 골고다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욕을 당하시고, 부활에서 인간의 아들이 들림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행위가 곧 처음 예배였다. 예수님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제사장 적이며, 예전적 삶이었으며, 화해와 해방을 선포하는 구원의 삶이었기 때문에 참 예배는 예수의 삶, 십자가, 부활, 승천 그 자체였다. 그러기에 참 예배는 하나님 앞에 우리를 대신하여 드리는 예수님의 제사였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 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 4:14)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 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서 섬기는 이시라. 이 장막은 주께서 세우신 것이요, 사람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히 8:1-2)

따라서 예배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완전한 사역은 아버지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해서 뿐이다. 우리는 아버지께서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주셨음을 찬양한다. 아들의 사역은 아버지께 한번이자 영원한 제사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히 7:27),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신 아들을 통한 찬양과 감사의 제사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초대교회의 기도는 항상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려진 것이다.

 

3) 예배의 교회론 적인 원리

예배는 교회론 적이다. 즉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는 활동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 대한 예배요,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에, 교회를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사역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교회는 교회의 구속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사역들을 선포하고, 이야기하고, 설명하며, 즐거워한다.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할 것은 “개신교의 ‘믿음으로만’의 사상이 지나친 개인주의 신앙으로 해석되면서 예배를 개인의 신앙의 탄원이나 성취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배학자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은 특별히 미국의 개신교회안의 경건주의(pietism)에서 온 것인데, 개인주의적인 예배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을 선포하는 차원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계시를 개인적인 신앙체험으로 주관화하여 예배를 마치 개인 신앙의 증언으로 변질시키고 있다고 비판한다(Richard M. Spielmann, J. Coert Rylaarsdam 등). 사실 이 문제는 오늘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심각하게 보여지고 있는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4) 예배의 성령론 적인 원리

예배는 성령론 적이다. 즉 예배는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예배에 있어서 성령의 본질적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수 있게 하는데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역사를 성자 예수님을 통하여 실현시키셨고, 오순절 이후부터 주님의 재림까지는 성령을 통하여 완성시키고 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순간에 얻는 감동과 변화와 바른 삶의 인도들은 모두가 다 성령님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 빌헬름 한(Wilhelm Hahn)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예배 가운데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을 깨닫게 하고, 그 인간들로 현재적인 응답을 하도록 역사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예배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드리며, 말씀을 전파하고 특별한 은사를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예배 안에서 자유스러운 마음의 문을 열고 합당한 시간에 응답하도록 인도하신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예배를 도우시기 위해 우리의 영과 결합하시는 하나님의 영에 관하여 이런 시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예배에 있어서 성령님의 본질적인 기능은 우리로 하여금 예배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5) 예배의 선교론 적인 원리

교회 공동체의 신앙의 표현인 예배의 행위 속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는 중에 세상을 섬기려고 준비한다.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 전체를 아버지께 드리는 행위를 수반한다. 예배는 우리의 입술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더불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우리의 예배는 세상에 대한 섬김을 통하여 표현되어야만 한다. 교회는 그 자신이 그리스도를 선포할 때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사인으로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란 단순히 매주일의 단회적인 사건으로만 이해할 수 없다. 예배란 어떤 경우에라도 단절될 수 없기에 우리의 생활 속에서 지속되어져야 한다.

히브리서 13:15-16은 진실로 예배드리는 삶을 요약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 를 기뻐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대로 살다가 주일에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예배하는 삶의 연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참된 예배는 드려지지 않는다. 그러기에 히브리 기자는 우리에게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송의 제사를 항상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하는 삶의 연장으로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는 데”까지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먼저 공동 예배에 참여해야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주일날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우리로 하여금 나머지 육일 동안 예배하도록 우리를 고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 10:22, 25은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기 위하여 함께 먼저 모여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목적으로 함께 모일 때, 세상 가운데서 나눔과 의로운 삶을 살도록 격려 받는다. 우리는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서, 의인들의 회중 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시는 백성들과 함께 그래서 먼저 모여 예배를 드리고, 그리고 그 결과로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 위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예배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생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그래야 한다. 당신이 주일에 교회에 출석할 때에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음악이 좋지 못하거나, 분위기가 좋지 못하 거나, 또는 당신의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이 아니다. 당신이 예배할 수 없다면, 그것은 당신이 나 머지 육일 동안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예배는 우리의 삶 속에서 계속해서 드 려져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 한 번 함께 모일 때, 마음속에서 참된 찬양과 예배 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예배는 더욱 더 영광스러운 것이 되는 것이다”

J. G. Davies라는 예배학자(Worship and Mission)는 지금까지의 모든 예배신학이 내면화된 예배신학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예배는 본질적으로 선교, 특히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의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선교로서의 예배의 궁극적인 근거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모든 구원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는 모든 구원이 곧 선교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배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봉사 그리고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봉사(God's Service and Our Service to God: Gottesdienst)라고 했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우리도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선교에서 보아야 한다는 신학적인 논거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하나님께서 세계를 향해 하시는 활동을 선교로 해석하는 데서 출발한다.

Davies는 이런 신학적인 입장에서 세례와 성만찬을 예증 삼아 접근한다. 지금까지 내면화된 예배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두었고, 세례는 교회의 멤버 만들기 위한 것이었으며, 성만찬은 개개인의 삶을 지탱하고 보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여 왔으나, 이제는 세례는 교회나 목사가 주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인 치시는 사건이며, 성만찬은 목사나 사제가 집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집례 하는 것이라고 해석을 한다.

그러므로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다는 의미는 교회의 교적부에 교인으로 등록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고난 받으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하는 것이어야 한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고난을 드러내는 고난 받는 공동체에 보냄을 받는 의미가 바로 세례라는 것이다. 이렇게 세례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사역에 동참하는 안수의 행위라면, 성만찬은 그 안수의 의미를 계속해서 새롭게 갱신하는 행위이다. 세례가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고 그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성만찬은 그 헌신을 계속해서 새롭게 다짐하는 행위이다. 결국 그는 예배를 선교적인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은 증언이요, 섬김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드리는 예배는 세상에 대한 섬김을 통하여 표현되어지는데 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배가 하나님의 우리를 위한 일이었다면, 우리들이 그의 일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을 위한 대리 섬김은 곧 예배인 것이다. 그러므로 참 예배는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그것은 축도 후부터 시작된다.

 

6) 예배의 종말론 적인 원리

마지막으로 예배는 현세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인 소망을 기대한다. 특히 성만찬은 그의 오심, 이 시대의 종말, 새 하늘과 새 땅 등의 표지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참된 예배는 항상 예배자의 실존적인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 그것은 타락하고 부패한 세상 앞에서 믿음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게 하는 끊임없는 힘의 원천을 제공해 준다.

처음부터 교회는 본질상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공동체였기 때문에 시작부터 종말론적이다. 종말론적인 행위로서의 예배는 세례와 성찬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산다는 바울의 증언은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죽음 뿐 아니라, 부활에 이미 참여함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회개와 죄의 용서가 이미 종말론적인 현실인 것과 같이 세례는 죽음에서 새 생명으로 태어나는 종말론적인 약속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 뿐 아니라, 장차 오는 시대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치리에서 오는 것이다.

성만찬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다시 사는 종말론적 현실의 경험을 개개인의 경험과 신앙공동체에서 지속하는 행위이다.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은 새 예루살렘의 그림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미리 맛봄이며, 살아 있는 기억의 행위(anamnesis)이다. 여기서 주의 만찬은 계급간의 갈등, 권력투쟁, 인종차별 등 오늘의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긴장을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 안에서 새로운 용서와 화해의 시험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결국 예배와 예배하는 회중은 이 역사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보고 또 일하고 초청 받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예배에 있어서 종말론적인 행위는 기도 특별히 주기도문에서 절정을 이룬다. 주기도의 핵심은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하나님의 통치와 치리를 간구하는데 있다. 이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향한 간구였으며, 이는 예배 처음부터 반복된 기도였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간구하는 종말론적인 행위였다. 아울러 신약성서의 마지막 기도인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의 간구는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분께서 주의 이름으로 모인 두 세 사람 가운데 오시기로 약속하신 분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