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통합예배와 예술의 사용에 대하여
[차례]
들어 가는 말
1. 다음 세대와 다른 세대
2. 커뮤니케이션과 성육신
3. 예배 갱신과 대중예술
4. 문화명령과 지상명령
5. 예배 문화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6. 예배 분위기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7. 예배 음악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8.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세대통합예배’(행복한 예배)
나가는 말
요즘 우리는 갑자기 예배갱신의 논쟁에 휘말려 있다. 꾸준히 갱신해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한꺼번에 해결하느라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기왕에 예배갱신을 하는 김에 세대 통합 예배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논의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세대통합 예배의 필요성과, 또 세대 통합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술, 특히 대중예술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활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한다. 그리고 본 교회에서 매 주일 밤마다, 12년이 넘게 드려지고 있는 세대통합예배(‘행복한 예배’)를 그 모델로 제시해 보려고 한다.
1. 다음 세대와 다른 세대
세대차이는 옛날 사사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신앙계승에 실패한 주요 원인이었다. ‘(삿
‘세대’의 사전적 정의는 ‘공통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여 공통의 의식이나 풍속을 전개하는 일정 폭의 연령층이다.’ 그러니까 ‘세대’는 같은 경험과, 같은 기억을 가짐으로, 정체성과 사고방식, 그리고 풍속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이다. 그러나 시간적(연령적)으로 차이가 나는 세대들이 직접 같은 시공(時空)에서 같은 경험을 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같은 기억을 갖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시간적으로 차이가 나는 세대 간에 같은 신앙을 계승하는 일은 곧 커뮤니케이션과 교육의 문제이다. 이스라엘의 앞 세대가 그 뒤를 이은 세대에게 신앙을 제대로 계승시키지 못한 것은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했다는 의미이다.
2. 커뮤니케이션과 성육신
커뮤니케이션이 실패 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가장 분명하고, 가장 중요한 원인은 세대 간의 문화의 차이에서 온다.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는 언어, 매체, 음악, 예술, 표정, 상징, 세계관, 풍습 등은 모두 문화의 자식들이다. 그러므로 문화가 다르면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된다. 그래서 ‘세대 차이’라는 말이 나온다. ‘세대차이’는 커뮤니케이션이 극복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장애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커뮤니케이션의 원형이다. ‘(요
오늘 날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도 어김 없이 ‘세대 차이’가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이다. 가정이든, 교회든, 학교든 마찬가지다. 어떤 교육 현장이건 ‘세대 차이’를 극복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것이 곧 교육의 성공 실패를 결정 짓는다. ‘쌍둥이도 세대 차이가 난다’라는 말은 문화가 그만큼 빠르게 변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말은 몸 담고 사는 문화가 다르면 서로 ‘외국인’, 심지어는 ‘외계인’이 된다고 할 만큼 서로 통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에 대한 교육과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하려면 당연히 같은 문화를 공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문화, 특별히 대중문화와 대중예술에 대한 포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를 필요로 한다. ‘예술은 곧 문화의 비전이고 세계관의 투영이기 때문이다(신국원, 2004, 87쪽)’.
3. 예배갱신과 대중예술
그런데 우리 보수주의 교회들의 문화에 대한 ‘소극적 신학’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세대 차이’가 갖는 중요성을 간과하게 했다. 그래서 ‘말씀(기록된)’만 큰 소리로 증거하면 ‘통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그러나 ‘큰 소리’가 아니라 ‘성육화된 소리’가 필요하다. 다시 말 해서 ‘세대 차이’가 충분히 극복된 커뮤니케이션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도이어베르트의 말대로 ‘문화는 신앙을 표현하는 도구’라는 관점에서 문화를 봐야 한다(신국원, 상게서. 107쪽). 오늘 날 예배 갱신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예배야 말로 커뮤니케이션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예배자가, 예배자와 예배자가, 그리고 예배자와 세상이 커뮤니케이션 하는 현장이 바로 예배이다. 그리고 교회는 예배를 통해 예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함께 경험하고, 같은 것을 기억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같은 정체성과 같은 문화를 공유하게 된다. 즉 예배를 통해 같은 세대를 만들어 내며, 세대와 세대를 통합한다는 말이다. 이 때에 ‘(대중)예술은 교회 공동체가 지향하는 비전과 세계관을 효과적으로 생산하며 투영해 내는 수단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로마노프스키, 신국원. 상게서. 92쪽).
4. 문화명령과 지상명령
문화명령(창1: 26-31)은 지상명령(마28: 16-20)으로 대치 되지 않는다. 문화명령은 지상명령으로 치유되고 회복되며 완성된다. 우리의 예배는 다만 지상명령에 대한 반응이나 결과만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예배는 문화명령에 대한 우리의 순종과 그 열매들을 구별하여 그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이다. 이 때 ‘교화와 연애’의 기능을 하는 예술은 ‘문화를 전수하고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하며 사회를 비평하고 삶을 축하한다’(신국원, 상게서. 92쪽). 그러므로 제임스 케리의 말처럼, 교회가 통합된 세대의 신앙공동체가 되려면, 문화, 특히 대중문화를 세대 간에 공유해야 하는데,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인 대중매체 (미디어)와 예술 형식,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내용 등을 서로 공유해야 한다 (신국원. 상게서, 62쪽).
5. 예배문화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허도화는 그의 책, ‘한국교회예배사’에서 한국 교회 예배의 특징을 매우 비예전적이며, 구도자지향적이고, 부흥회 스타일의 자유스러운 예배였었다고 정리한다. 그리고 그것은 당대의 필요에 따른 예배 형태였고 또 우리 민족성에도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초대교회의 예배당 형태도 매우 한국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일정한 모양의 서구형 예배당으로 자리잡았고, 예배 형식도 ‘시대성’과 ‘토착성’ 그리고 ‘자유함’을 잃고 ‘의식화’, ‘고정화’ 되었다. 지금 예배갱신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5.1 개혁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유명한 이 말은 당연히 복음의 본질을 개혁하자는 것이 아니다. 늘 변하는 시공의 문화 속에서 복음의 본질을 지키며 또 그것을 세상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복음은 그 ‘문화의 옷’을 갈아입어야 함을 의미한다. 사실 오늘 날 보수 교단에서 예배 형태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은 거의 ‘문화적’인 문제이다. 이미 한국의 교회 대부분이 ‘현대적’ 예배를 드리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이미 거의 모든 교회가 ‘현대적’이다. 건물의 디자인과 건축부터, 그 안의 시설과 각종 시스템 등이 모두 현대적이다. 무엇보다도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들이 현대적이다. 현대인의 언어와 미디어를 사용하고, 현대의 상징과 이미지에 익숙하고, 현대의 옷을 입고, 현대의 악기와 현대의 음악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현대적 건물에서 현대의 언어와 감성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20세기, 아니 19세기나 17세기 문화의 예배를 강요하는 것은 아파트 문화에 젖은 요즘 사람들에게 조선시대의 양반 문화를 강요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문화를 교회의 담을 기준으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나누는 영지주의적 이원론은 대단히 위험한 사상이지만 여전히 ‘보수’ 교단 내에 강력한 영향력으로 남아있다. 교회의 담을 경계로 ‘하나님의 것’과 ‘세상 것’을 나누는 이분법은 거짓말쟁이 사단이 만들어 사람들에게 주입한 사상이다. 그것은 다음 몇 가지 진리를 가리는 것이다.
첫째 그것은 온 세상의 문화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진리를 부인한다. 문화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에게 맡기신 ‘창조의 발전’이다. 비록 죄로 큰 훼방을 받았지만 인간에게 주신 문화명령은 취소된 적이 없다. 세상의 어떤 문화가 심하게 뒤틀리고 오염되어 있어서 보기에 끔찍하더라도 그것을 통째로 사단에게 넘겨줄 수는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스스로 경건하다고 하는 많은 교인들이 칼 한번 뽑아보지도 않은 채 수 많은 문화의 영역들을 사단에게 넘겨 주고 교회 담 안으로 도망 와 버렸다(한스 로크마커, 2002, 25쪽). 둘째 그것은 어떤 문화건 죄로 오염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교회, 가정, 학교, 국가 등 모든 제도 문화 예술이 다 하나님의 것이면서 동시에 다 죄로 오염되어 있다. 사람이 거룩하게 구별한다고 해서 거룩해지지 않는다. 셋째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되지 못할 문화는 없다는 진리를 부인한다. 모든 문화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치료되고 회복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회복 못할 문화는 없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문화건 아주 버릴 것도 없고, 전혀 고칠 것이 없을 정도로 거룩한 것도 없다. 넷째 그것은 예배가 세상 만물과 모든 문화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예배는 만물이 하나님의 것임과, 만물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고 있고 장차 그것이 완성될 수 있음을 선포하고 경축하는 것이다. 예배는 그리스도께서 사탄에게서 빼앗아 온 성도들이 하나님을 예배 하듯,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모든 문화와 예술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할 일은 성경이 계시하신 예배의 본질을 굳게 지키면서 동시에 각 시대, 각 장소, 각 문화 속에서 그 본질이 가장 잘 담기고, 가장 잘 드러나도록 예배의 방법을 계속 반성, 조정, 갱신 시켜 나가는 것이다. (한스 로크마커, 상게서, 108쪽). 진짜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혼합주의는 교회가 대중예술의 형식 등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원론’과 같은 헛된 사상을 신학과 예배의 원리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5.2 현대화는 세속화인가?
예배의 형태를 현대화한다는 것은 곧 세속화를 의미하는가? 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현대화와 세속화를 이렇게 구별하고 싶다. 즉, 현대화는 교회가 주권 적으로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것이고, 세속화는 교회가 피동적으로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것이다. 현대화는 교회의 본질적인 것들이 세상 문화로 옷 입는 것이고, 세속화는 세상의 본질적인 것들이 교회의 문화로 옷 입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현대화에 성공한다는 말은 교회가 세상 문화를 충분히 평가하고 심판하고 변화시키고 새롭게 만드는 일에 성공한다는 뜻이다. 또 그것은 교회가 세대차이를 극복하고 '지금','여기'의 문화를 매개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자가 그리고 예배자와 예배자가, 그리고 교회와 세상이 서로 '의사소통' 하는 데 성공한다는 말도 된다. 교회의 현대화는 그 말씀이 '지금','여기'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들려지는 '복음'이 되기 위해 '성육화'(문화화) 하는 한 과정이다. 모든 상징들과 '표현방식'은 그렇게 '시대성'과 '공간성'을 갖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없이 현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현대화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속화된다. 교회의 담장을 기준으로 안과 밖을 나누고, 성과 속을 구분 짓는 행위는 로마 교회가 헬라 철학에서 차입했던 ‘차원의 혼동’에 불과하다. 그것은 물리적 차원으로 신학적 윤리적 차원을 대치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하며 찬양하며 기대하는 예배를 통해서 당대의 문화를 평가, 검증하고, 그 방향을 지시해주는 최종, 최고의 권위를 가지며, 또한 땅 위에 임한 천국의 군대로서 세상 문화를 그렇게 정복한다.
5.3 형식(양식樣式style)은 변해야 한다.
'형식'은 ‘내용’을 담는다. 어떤 문화예술의 ‘양식’은 어떤 세계관을 담아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세계관의 내용과 주장을 가장 적절하게 담아낼 수 있는 ‘양식’이어야 한다. 한스 로크마커는 상게서에서 과거에 있었던 ‘형식적 법칙’(decorum)을 소개한다. ‘형식적 법칙’은 그 주제와 그 상황에 대해서는 그 형식, 유형, 표현을 택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무 쉽게 유행을 따름으로써 ‘형식의 한계’를 무시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특정한 양식을 고수하면서 엘리트인척하는 태도를 비난하며 쉬운 찬송가를 지어 교회에 큰 유익을 끼친 18세기의 아이작 왓츠를 (Isaac Watts) ‘멋진 예’로 든다.
예배의 형식이 현저히 예술적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예배의 예식은 ‘예배의 예식’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이 예배 양식의 전통이 보수 되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오늘 날의 예배 양식은 프란시스 쉐퍼의 말처럼, 반드시 21세기의 것이어야 하고, 또 한국적이어야 하고, 그리고 성경적 세계관(예배관)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 (쉐퍼. 2002. 66-67쪽).
어떤 이들은 구약 성전제사에 반드시 지켜야 할 절차가 있었던 것처럼 신약은 신약 나름대로 지켜야 할 새 절차를 규정해 주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약 성전 제사의 형식과 신약 교회 예배의 형식은 그 성질이 다르다. 구약 성전제사의 형식과 절차는 그것 자체가 예배의 본질이었다. 따라서 반드시 제사는 그 형식과 절차대로만 드려야 했다. 그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방식,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로만 성취된다는 것을 상징하고 예고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형식은 이미 본질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신약의 예배는 구약 제사의 모든 절차와 형식들이 이젠 더 이상 필요 없다는 것을 선포한다. 더 이상 그런 것을 의지해서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선언하고 그 자유와 행복을 경축하는 것이다(히9: 9,10).
그러므로 개혁교회는 '형식'의 계속적인 갱신을 통해서 자꾸만 왜곡되고 가려지려는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고 또 그것을 확장, 강화 시켜나간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까지 교회 예배는 시간에 따라, 공간에 따라 그렇게 다양하게 변화되어 왔다. 이렇게 교회는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의 모든 문화를 주권적으로 평가하고, 수용하거나 버리거나 갱신해 나간다. 특별히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서로 의논하면서 계속적인 예배갱신을 통해 세상 문화를 평가하고 영향을 주고 개혁해 나간다. 그러므로 예배는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거룩한 문화 모델’인 셈이다. 이것은 교회가 해야 하고 또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신나는' 싸움인 것이다(창1: 28). 특히 세대를 통합하여 드리는 예배가 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문화와 예술의 형식을 사용해야 한다. ‘계속적이고 전면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그리스도 자신은 전달되지 않는다(삐에르 바벵. 1993, 25쪽).
6. 예배 분위기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6.1 엄숙주의
물론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예배 개혁은 놀라운 성취를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예배 중에 말씀이 회복되었고, 자유가 선포된 것이다. ‘성경에 없는 것은 예식이 될 수 없다’는 칼빈의 말은 성도가 믿음의 양심에 따라 예배를 자유롭게 드릴 권리가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천주교가 만들어 놓은 각종 예배예식은 성도의 양심을 억압하는 ‘인위적인’ 규범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천주교가 해 놓은 ‘신성화(神聖化)’ 작업을 ‘비신성화’ 하는 운동이었다. 종교개혁가들은 천주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성지’, ‘성전’, ‘성의’, ‘성례들’, ‘성상들’, ‘성모’,’성미사’, ‘성음악’ 등 성도의 양심을 구속하는 모든 우상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칼빈의 후예들은 다시 인위적인 규범을 만들기 시작했다. 개혁주의교회들의 예배 형식 자체가 마치 성경이 제시하는 ‘규범’인 것처럼 주장하기 시작했다. 예배예식 하나하나를 성경 구절에 대응시킨 1660년, 리차드 백스터의 사보이 예식서에서 그 절정을 본다(Thompson. 1980, 375-384쪽). 물론 당시 새로운 예식서를 만들기 위한 치열한 노력 중에 나온 결과이긴 하지만, 리차드 백스터 식의 과도한 열심은 예식을 신성화하는 위험성을 갖는다.
그리고 종교개혁자들은 천주교의 태산 같은 그림자에서 벗어나려고 서로 좌충우돌하다가 말씀 예전과 성례 예전이 균형 잡힌 초대교회의 예배로 돌아 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또한 지나치게 상징주의적이고 예전주의적이었던 천주교에 대한 반동으로 개혁교회는 지나치게 비예전적이고, 말씀에 치우친 주지주의적인 예배로 기울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아쉬운 점은 종교개혁이 예배 ‘분위기’의 갱신에는 손도 못 댔다는 것이다. 천 년 넘게 성당 안에서 키워져 온 로마 교회의 ‘엄숙주의’는 베드로 성당보다 더 컸고 교황보다도 더 높은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원래 사람들은 어느 시대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곧 경건으로 통하는 외길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 그래서 엄숙주의자들은 예배 시간에 가능하면 몸 짓을 줄이고, 감정을 억누르며, 느낌의 표현을 억제하는 것을 경건의 표준으로 삼는다. ‘예배 분위기는 엄숙해야 한다’는 이 보편적이고 오래 된 ‘고정관념’은 종교개혁자들이 극복했어야 할 가장 크고 낡은 전통이었다(웨스터민스터고백서의 예배모범을 비롯하여 청교도들의 예배 지침에는 예배를 엄숙하게 드리려는 노력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어떤 사람들은 분위기를 하찮게 생각한다. 그래서 예배의 분위기를 위해 음악을 바꾸고 인테리어를 하는 등의 일들을 인위적이고 쓸데 없는 짓으로 본다. 심지어 그것들을 ‘세상 것’을 교회 안에 들여 온다는 식의 터무니 없는 말까지 한다(인테리어 예술은 소중한 문화 창조의 열매이다.). 마치 그런 시도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을 방해라도 하는 것처럼 비난한다. 그러나 예배를 엄숙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바로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삐에르 바벵의 말처럼, 인간은 시청각 지향적이기 때문에 활자보다는 시청각일 때 커뮤니케이션의 효과가 놀랍게 향상된다. 그리고 시청각에서 ‘형상’(figure) 보다는 ‘바탕’(ground)이 커뮤니케이션의 성패를 좌우한다(책에서 글자는 형상, 종이, 종이 질, 디자인, 편집, 여백, 저자, 출판사, 배급소 등은 바탕이라고 한다. 대화에 있어서는 언어가 형상, 그리고 표정, 몸짓, 음성, 옷, 음악, 분위기 등이 바탕이다. 상게서. 19, 98쪽). 예배의 ‘명료성’을 강조한 칼빈의 전통은 언어로 된 설교에 집중한다. 물론 개혁교회의 예배에 있어서 말씀의 바른 선포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선포되는 그 말씀의 커뮤니케이션의 성공 실패는 ‘언어로 전달되는 설교’ 그 자체 보다는 그 설교자에 대한 청자의 신뢰나, 느낌, 설교를 듣는 환경이나 분위기, 설교자의 음성이나 억양, 표정 등에 의해 좌우된다. 아무튼 ‘예배의 분위기가 어때야 하는가?’ 라는 이 중요한 질문은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의해 결정된다. 잔칫집에선 웃어야 하고, 초상집에선 울어야 하기 때문이다.
6.2 가족 밥상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가? 예배의 본질에 대한 여러 학설들을 여기서 다시 소개하지 않겠다. 그러나 예배 예식의 정점인 성찬예식을 중심으로 한번 예배의 정의를 내려 보려고 한다. 예배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거룩한 자녀들이 함께 감사와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배는 ‘감사와 기쁨을 예식으로 갖춰 밥을 먹는 것’이다. 밥상의 분위기가 어때야 하겠는가? 장엄하고 엄숙하고 심각해야 하는가? 어떤 이들은 구약의 제사장(아론의 아들들)들이 다른 불을 드리다가 현장에서 즉사한 사건(레10: 1,2)을 떠 올리며 예배는 엄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순서를 틀리거나, 성경 읽기를 더듬거나, 유머를 하거나, 아이들이 울거나, 서로 보고 웃으면 대단한 불경 죄라고 여긴다. 이 정도면 세대 통합예배는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아론의 아들들은 당연히 죽임 당했어야 한다. ‘다른 불’을 드렸기 때문이다. 성전제사의 장소와 제물과 절차는 모두 예배의 본질이었다. 그래서 아론의 아들들 사건은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제사로만 구원 받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성전 휘장이 찢어지고, 주께서 친히 성전을 헐어버리시고 제사를 폐하여 버린 지금 새 언약의 시대에는 더 이상 예배를 두렵고 떨림으로 드리지 않는다(히9: 9,10). 우리의 예배는 더 이상 희생제사가 아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주신 밥상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밥상에는 물론 슬픔이 있다. 자신의 부족과 죄에 대한 애통이다. 하나님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지 않는 세상에 대한 탄식이다. 아직 하나님께로 돌아 오지 않고 있는 생명들에 대한 슬픔이다. 그리스도의 밥상에서 우리가 나누는 슬픔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를 멸시하고 외면하는 모든 불신과 악에 대한 슬픔이다. 그래서 예배엔 침묵과 엄숙함과 슬픔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슬픔은 기쁨의 그릇에 담긴 슬픔이다. 그 슬픔은 기쁨에 눌린다. 그리스도의 밥상에서 성도들은 모든 죄로부터의 용서와,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어 세상을 이길 힘과, 아직 세상에 있는 생명들을 구원할 새로운 의지와, 부활과 재림하심과 내세의 소망 등을 채움 받는 기쁨으로 감격하고 감사하고 행복해한다. 예배는 그래서 기쁨의 잔치이다. 초대교회의 모임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행2: 46,47), ‘큰 기쁨으로 늘 성전에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었다(눅24: 52,53).
그러므로 예배 분위기는 그 기쁨을 가장 잘 느끼고 또한 가장 잘 표현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삼하6: 12-23).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엄숙한 분위기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엄숙함은 부활보다는 죽음에 더 잘 어울린다. 부활이 주제인 곳에서의 분위기는 엄숙함 보다는 밝고 경쾌하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물론 엄숙하면 기쁨을 모른다는 말은 아니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도 믿음으로 주님의 영광을 보며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뜨거운 기쁨이 샘 솟듯 함을 느낄 수 있다. 엄숙함이 몸에 익은 사람들은 그래야 하나님께로 집중할 수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 엄숙함도 기쁨의 그릇에 담아야 한다. 아무래도 엄숙한 분위기는 심각해지기는 쉬어도 기뻐하기에는 장애가 된다. 가족 밥상의 분위기는 기뻐야 한다. 그리고 엄숙함을 좋아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엄숙해야만 경건한 것’이라고 믿는 엄숙주의는 하루빨리 교회를 떠나야 한다. 신약의 예배는 드디어 찢어진 휘장 가운데로 ‘새롭고 산 길’이 나타났다는 기쁨을 자유로운 예배를 통해 충만이 나타내야 한다.
6.3 예배는 오직 드리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예배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기만 하는 것일까? 물론 '드리는 것’이야말로 중요한 예배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예배의 의미를 좁게 이해한 것이 아닐까? 예배를 드리는 것이냐 받는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하나님과 우리의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절대 받기만 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동시에 주시는 것이고, 주시는 것은 동시에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기도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기도 하고, 예배자끼리 서로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불신자들에게 증거하기도 한다. 쉽게 성찬식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성찬식은 예배 예식의 정점이다. 성찬예식의 중요한 목적은 네 가지이다. 하나님의 구원 은혜를 감사 찬양하고, 그 회복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된 은사들을 서로 나누고, 또한 불신자들에게 '주님의 죽으심'을 '세상 끝 날까지' 증거 하는 것이다(고전11: 23-26; 눅22: 14-20). 그러기에 불신자들을 하나님의 예배에 초청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다. 그 불신자들 때문에 예배가 망치지는 않는다. 이렇게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예배에 처음 참석한 불신자도 함께 예배 드리는 것이다.
6.4 예배는 정성으로 드린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정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드린다. 아직 예배를 정성으로 드리는 줄 아는 사람들이 있다. 예배는 정성으로 드리지 않는다. 오직 믿음으로 드릴 뿐이다. 정성으로 신을 감동 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정성에 감동되지 않으신다. 하나님을 감동 시킬만한 인간의 정성은 그 어디에도 없다. 교회의 예배가 필요로 하는 정성은 곧 믿음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예배가 이교도들의 예배와 다른 가장 중요한 이유가 된다. 인간의 구원이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만 얻는 것처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인간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만 드릴 수 있다. 인간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도 오염된 그릇에 불과하다(칼빈, ‘기독교강요’ 3부14장). 그 속에 어떤 보물을 담아도 더러운 냄새가 난다. 예배자의 입에 아무리 아름다운 찬송을 담아도, 예배자의 입에 아무리 열정적인 기도를 담아도, 예배자의 입에 아무리 뜨거운 설교를 담아도 예배자를 통해 나오는 그 모든 것에는 악한 냄새가 베여있다. 인간은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설교하다가도 죄를 짓고 기도하다가도 죄를 짓는다. 그릇 자체가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배자가 아무리 목욕을 하고 정성을 다 해서 하나님께 나가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엔 그 모든 것이 추하고 역겨울 뿐이다. 하나님께서 예배자들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저들의 양심에 발린 어린 양의 피다. 하나님은 예배자들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기뻐하신다. 누가 일부러 ‘안정성’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하겠는가? 그러나 원리적으로 정성과 믿음은 다르다. 예배는 믿음으로 드린다. 그리고 이런 입장은 예배신학과 예배갱신의 문제에 있어서 마치 배의 키처럼 예배 갱신의 방향을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신앙고백으로 예배의 현관을 들어 간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예배 드리는 어린이들에게 ‘예수 보혈’과 ‘은혜’ 보다 ‘조용한 태도나 자세’(정성)를 강조하는 것은 어리석다.
7. 예배 음악의 현대화는 필연적이다.
7.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천주교의 ‘종교개혁’을 가져 온 회의였다. 그 회의가 1963년에 발표한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은 종교개혁의 후예라고 자처하는 우리 개신교회를 부끄럽게 하고도 남는다. 물론 그 회의는 옛날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던 천주교의 기본 교리들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고 여전히 개혁의 대상이다. 그러나 동 시대와의 적응성을 추구한 예전의 갱신에 있어서는 ‘충격적’이란 말로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바티칸공의회는 교회가 시대에 적응하여 예전을 변화 시켜 나가는 것은 임무이며 동시에 권한이라고 강조한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개신교의 어떤 사람들은 이미 선배들이 떠났던 곳이고, 또 이제 뒤 늦게 깨어난 천주교가 막 떠나려는 그 곳을 서둘러 다시 찾아 돌아 가고 있다. 그것도 ‘경건한 열심’으로 말이다. 음악을 두고 어떤 장르나 시대를 기준으로 ‘거룩한’ 음악과 ‘세속적인’ 음악을 나눈다는 것은 대단히 어처구니 없는 짓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시대의 서구 음악이나, 특별한 장르의 음악만 받으신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원론적일 뿐 아니라 무속적이고 이교도적이다. 물론 누가 봐도 매우 왜곡되고 악으로 오염된 음악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에 놀라 ‘교회 밖’의 모든 음악을 덜렁 사단에게 내어주면 안 된다.
7.2 예술의 기능
문화의 비전이며 그 세계관을 투영하는 예술은 기술적으로는 다음 세 가지 기능을 한다. 자극과 증폭과 표현이다. 예술은 우선 사람의 직관과 감정, 그리고 상상력을 자극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앰프와 같은 증폭기의 역할을 한다. 조그만 소리가 엄청나게 커지는 증폭기처럼 사람의 직관 등은 예술을 통해 어마어마하게 증폭된다. 그리고 또 예술은 그렇게 증폭된 직관과 감정과 상상력, 그리고 영감과 느낌, 깨달음 등을 강렬하게 표현해낸다. 그냥 말 만으로도 생존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나 마음 깊숙한 곳에 있는 감정은 말로 다 담아낼 수 없다. 언어의 표현 그 너머에 있는, 그래서 언어로는 도저히 길어 낼 수 없는 그 깊은 곳에 있는 느낌과 감정들을 상상력을 가동하여 가능한 한 충분히 표현해 내는 기술을 예술이라고 한다. 미술, 음악, 시, 춤, 그리고 연극 등이 그것이다. 예술은 고차원의 상징이기 때문에 언어보다는 그 그릇이 훨씬 더 넓고 깊고 크다. 예술은 그래서 우리의 직관이나 감정에 작용을 하고 상상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참된 예술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 보게 하는 창문도 되었다가, 자기를 비춰 보는 거울도 되고,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것들을 당겨 볼 수 있는 망원경도 되었다가, 너무 작아 보이지 않는 것들을 커다랗게 볼 수 있는 현미경이 되어 주기도 한다. 그렇게 하면서 예술은 우리의 직관과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하여 풍성하게 하기도 하고, 그것들이 찾아낸 보물들을 담아 퍼내기도 한다. 이런 예술과 함께 하면서 사람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노래와 음악은 사람으로 하여금 심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기뻐하라고 주신 것이다. 예배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진지함이지 엄숙함이 아니다. 음악이나 춤, 연극 등 예술들의 종류나 그 기능들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경축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의 충만에 이를 수 없다.
7.3 자기를 즐겁게 하라
예배자가 음악으로 자기를 즐겁게 하면 되는가? 어떤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기를 즐겁게 하는 죄를 짓는다고 비난한다. 그것은 세속화된 광신자들이 예배를 오락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분노한다.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인데 육신을 즐겁게 한다고 욕을 한다. 내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엄숙주의자들이 찬송을 하는 것이다. 왜 찬양을 하면서 감정을 절제하려고 애를 쓰느냐는 말이다. 우습지 않은가? 그것은 밥을 먹으면서 배부르지 않겠다고 하는 말과 같고 술을 마시면서 취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음악을 하는 목적은 우선 자기를 즐겁게 하려는 것이다. 축 늘어져 반응하지 못하는 자기의 감정과 직관과 상상력에 강력한 자극을 주어 벌떡 일어나 펄펄 뛰고 날게 하려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배자들로 하여금 공교한 연주와 기쁨의 노래를 하게 하신 것일까? 그것은 우리의 부족과 연약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의 말처럼 우리는 음악과 예술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기독교강요’ 3부 20장 31,32절. 물론 플라톤과 어거스틴의 전통을 따르는 칼빈은 예배의 ‘명료성’에 집착하여 예배 음악에 대해 대단히 소극적인 태도를 취한다(삐에르 바벵은 ‘교리적인 가르침보다는 음악을 통해서, 이성적이거나 지적인 논쟁보다는 감정적인 경험을 통해서 더욱 쉽게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상게서. 94쪽). 그리고 칼빈이 시편만을 예배 찬송으로 사용하려고 했던 것은 목회적 차원이었다고 본다. 그는 스트라스버그에서 십계명을 찬송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신약의 교회는 시편의 노래만 부르지 않았다. 또한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은 예배 시간에 누구나 자유롭게 찬송을 만들어 부를 수 있었다.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고전14: 26). 그러므로 오늘 날 예배 때 시편만 찬송으로 부르자는 주장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린 구원뿐 아니라 삼라만상을 소재로 하여 하나님께 올릴 새 찬송을 계속 만들 자유가 있고, 내용뿐 아니라 곡조도 얼마든지 새롭게 만들어 하나님을 찬양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우리는 음악의 자극으로 비로소 직관의 창문이 활짝 열리고, 감정의 샘이 힘 있게 터지고, 상상력의 세계가 역동적으로 펼쳐진다. 음악의 자극으로 그렇게 깊어지고 넓어지고 높아지고 뜨거워진 우리의 기쁨 그릇에 우리의 감사와 소망과 예배를 담아 드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그런 예배다. 하나님께서는 예배자의 감정이 충분히 깨어 함께 예배 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배자는 음악으로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걱정할 것 없다. 그 찬양은 당연히 하나님을 향한다. 엄숙주의자들은 걱정이 너무 많다. 그래서 자극적인 음악으로 뜨거워진 예배자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릴 까봐 전전긍긍한다. 예배자들이 열렬해졌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기쁨이 뜨거워졌다는 것인데 엄숙주의자들은 그것을 끝까지 의심한다. 실제로 분위기가 가라 앉았을 때보다 열정적일 때 훨씬 더 집중력이 강하다.
그러므로 감정에 자극을 주지 않으려는 사람은 음악을 할 필요가 없다. 감정에 자극을 주지 않고, 또 노래와 춤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지 않으려면 그냥 언어로만 해도 충분히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 아예 모든 음악을 거부했던 쯔빙글리처럼 말이다. 그리고 가끔 음악이나 아무 예술의 도움 없이 단지 머리만으로도 항상 열광적인 감정이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못한다. 시력이 약한 사람이 안경을 필요로 하듯이 우리의 직관과 감정, 그리고 상상력은 음악과 예술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수단들이 있으면 훨씬 더 풍성한 영감과, 감격과, 기쁨으로 예배할 수 있다. 감정과 몸짓을 멸시하는 것은 이교적인 사상이다. 세상에 이런 종교들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감정과 의지, 그리고 몸까지도 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받았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자들이 노래 하고 연주 하고 춤을 추는 이유는 우선 자기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물론 이 말은 예배의 목적이 아니라 예술의 기능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에 예배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소망을 담는다.
7.4 악기를 쓰는 이유
‘예배 음악에 찬송은 하되 악기는 안 된다’는 사람들도 있다. 왜 찬송을 하면서 악기를 사용하지 말라고 할까? 악기 없이 찬송하라는 것은 반찬 없이 밥 먹으라는 말과 같다. 악기는 음악을 더 즐겁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도구다(대상15: 16). 그러므로 악기 없이 음악을 하라는 것은 손바닥으로 탁구 치라는 것과 같다. 예배 시간에 악기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 종류다. 하나는 전혀 사용하지 말라는 사람들이다. 이유는 역시 엄숙주의 때문이다. 악기가 엄숙한 분위기를 깬다는 것이다. 그런데 엄숙주의와 같은 길을 가면서 거기에 또 다른 이유를 더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구약 교회가 악기를 사용한 이유는 구약교회가 어렸기 때문이었고 신약 교회는 성숙한 교회이기 때문에 유치하게 박수나 춤이나 악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면 된다고 주장한다. 엄숙주의를 숭배하기 때문에 악기를 못 쓰겠다는 것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신약교회가 구약 교회보다 어른이기 때문에 더 이상 악기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안 된다. 주님의 교회 안에 있던, 그리고 앞으로도 더 풍성히 있을 모든 악기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했단 말인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신령과 진정’이란 말씀이 교회의 모든 예술을 다 삼켜 버렸단 말인가? 교회가 옛 언약 아래서도 그렇게 풍성한 악기를 누릴 수 있었다면 새 언약 아래서는 그 보다 훨씬 더 충분히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이나 이후나 지구가 그대로인 것처럼 사람의 본성도 바뀌지 않았다. 음악이나 악기는 성전제사 때문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 때문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전의 제사는 끝이 났으나 음악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신약 교회는 구약 교회보다 훨씬 더 공교하고 강하고 아름다운 음악을 위해 훨씬 더 다양한 악기들을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성전 제사에 악기들을 동원하실 때 그것들의 족보와 과거 때문에 고민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 같고 고민하면 하나님이 아니시다.
7.5 연극
연극이 예배 때 사용되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긴 연극과 예배는 서로 너무 생소해 보인다. 극렬하게 반대하는 이유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아주 극단적인 것이 위선자(hypocrisy) 라는 말이 바로 '무대에서 연기하는(배우)' 이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근거로 ‘배우=위선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와 위선자가 같은 어원을 갖는다고 해서 배우는 곧 위선자라는 논리는 말도 안 된다. 그리스어ὺποκρίτες가 배우란 말로 쓰이게 된 것은 그 말이 '위선자'란 뜻이어서가 아니라, '해설자', 혹은 '문답자' 등을 의미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해설자'는 곧 배우이기도 했다. 그리고 꾸미는 것이 모두 죄라면 세상에 있는 모든 문학과 예술은 다 사탄의 장난이란 말인가? 문학과 예술은 인간의 상상력을 밑천으로 하는 것인데, 상상력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연극은 사실 예배가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상징 예술이다.
원시 종교 제의가 연극의 모태라는 것은 연극에 대해 말하고 있는 모든 책의 첫 장 첫 줄에 나오는 상식이다. 모든 종교 제의 속에는 상징체계로서의 연극이 본질로 내재한다. 그리고 연극이라는 상징체계는 물론 소통(Communication)을 위한 것이다. 종교나 놀이, 그리고 연극이나 예술 등의 공통분모는 소통이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통하여 세 가지 대상과 소통하려고 한다. 첫째는 신과의 소통이다. 둘째는 자연과의 소통이다. 그리고 셋째는 공동체 안에서의 소통이다. 사람들은 연극이라는 상징체계로 표현되는 제의를 통해 늘 자기들을 불안하게 하는 '운명'이라는 것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초월하고 싶어 했고, 삶에서 받는 수많은 불안과 고통, 그리고 상처로부터 치유 받고 싶어 했다.
아득한 그 옛날에는 몇 안 되는 인간들이 광활하기 그지없는 대자연 속에서 생존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겨운 투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연을 소재로 삼아 신화를 만들고 그것을 제의나 굿, 또는 놀이로 표현하며 또한 그것들을 한 끈으로 삼아 자기들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으려 했다 (
그런데 연극의 기원이 세속적이라며 그것을 예배에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앞서 여러 번 강조했지만, 연극이 세상에서 잘 못 사용되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연극 자체를 죄악시하고 피하고 내치는 것은 너무 경솔한 짓이다. 정말 그러다가는 지구를 떠나야 할 것이다. 성전 제도나 제사의 기원이 세상이었고, 또한 그것이 연극적이라는 것은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흔히 성전 제사와 그리스도의 실제 제사와의 관계는 모형과 원형, 예언과 성취 등의 공식으로 설명된다. 그런데 그러한 구약의 제사가 연극적 상징을 최대한 동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연극을 탁월한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말이다.
실제로 하나님은 수시로 선지자들에게 연기할 것을 명령 하셨다. 하나님은 성전 안에서는 제사장들을, 그리고 성전 밖에서는 선지자들을 배우로 사용하셨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그 연기를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처절할 정도였다. 선지자 이사야는 삼 년 동안이나 벗은 몸 벗은 발로 지내야 했다(사20:1-4), 예레미야는 줄과 멍에를 목에 걸고 다녀야 했고 허리띠를 사서 절대 물에 닿지 않게 하고, 그 띠를 풀어 유브라데 물가의 바위틈에 감추었다가 또 여러 날 후에 다시 그 띠를 찾아낸다(렘13:1-10), 에스겔의 경우는 훨씬 더 심하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기 위해 계속 주제를 바꿔가며 연기를 해야 했다. 주의 권능으로 벙어리가 되기도 했고(겔3:22-27), 모형 성읍을 만들고 왼쪽으로만 누워 삼백 구십일 그리고 오른쪽으로 누워 사십 일을 지내야 했고(겔4:1-8), 쇠똥에 보리떡을 구워 먹기도 했고 (겔4:12,13), 머리와 수염을 깎기도 했고(겔5:1-4), 행구를 준비하여 이사를 하기도 했고 (겔12:3-7), 떨며 물을 마시고 근심하며 음식을 먹기도 했고 (겔12:17), 가마를 걸고 양을 삶기도 했고 (겔24:5), 심지어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그것으로 인해 슬퍼하지 않고 울지 않아야 했다 (겔24:15-17), 에스겔은 단연 돋보이는 연기자였다.
또한 성경은 드라마 같은 사건이나 이야기를 풍성히 담고 있다. 그것들은 요즘도 영화나 연극으로 재현되고 있다. 아가서는 남녀의 사랑을 노골적으로 그린 뮤지컬이고, 특히 에스더서 같은 경우는 하나님의 이름이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이야기이다. 그러고도 어떻게 성경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서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그 어떤 성경보다도 극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한낱 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아 보이는 그 책이 계시의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오늘 날 연극은 당연히 예배 중에서 설교의 도구가 될 수 있다. 특히 현대의 새로운 설교로 각광 받고 있는 이야기 설교는 그 구성과 전달 자체가 연극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연극이나 뮤지컬 등을 설교의 보조도구들로 거리낌 없이,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런 조도구들은 설교에 자신 없는 사람들이나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할 내용과 그것을 듣는 인간들을 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은유나, 이야기, 상징, 연극 등은 설교를 훨씬 더 선명하고 풍성하게 해준다.
8. 온 가족이 함께 드리는 ‘세대 통합 예배’(행복한 예배)
본 교회에서 주일 밤에 드리는 ‘행복한 예배’의 중요한 특징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온 가족이 함께 드린다. 둘째 현대 음악과 춤과 악기를 동원하여 노래한다. 셋째 설교를 위한 연극을 공연한다. 지난 12년 동안 매 주일 밤 연극, 뮤지컬 등을 통해 수 많은 생활 주제들, 교리(칼빈의 기독교강요), 성경인물들, ‘한 눈에 보는 역사’, 그리고 최근엔 7개월에 걸쳐 존 번연의 천로역정 등을 공연했다. 넷째 개인을 위한 세례와 성찬식을 거행한다(일 주일에 3명 이하). 본 교회에선 매월 한 번씩 주일 오전 예배 때 성찬식을 한다. 그리고 세례식(학습, 입교)은 매 주일 밤에만 한다. 세례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날짜를 정한 다음 24회에 걸쳐 교육을 받고 정한 그 날 밤 예배 때 간증을 하며 세례를 받는다. 온 교우의 기도와 축하를 속에서 개인적으로 세례와 성찬을 받는다. 대단히 감동적이고, 그것을 지켜 보는 아이들은 그럴 때마다 자기의 세례식을 미리 그려보곤 한다. 세대통합예배의 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섯째 서로를 위한 축복기도, 서너 가지 제목을 놓고 드리는 통성기도를 뜨겁게 한다. 매 주일 밤 이렇게 '행복한 예배'를 끝내고 나면 잔치를 치른 기분이다. 마음에 예배의 감흥이 강물처럼 남아 출렁거린다. 온 가족이 매 주일에 한번씩 이런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큰 행복이 아닌가?
나가는 말
예배는 교회 공동체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 사건을 재현해 내고, 경험하며, 또 그것을 기억해 내는 가장 중요한 현장이다. 그러므로 통합된 세대가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신앙의 계승에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오늘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 보는 것처럼, 어른과 아이들 세대가 늘 ‘따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앙의 계승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에 대한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대중문화는 교회와 경쟁하고 있다’는 로마노프스키와 조지 맥도웰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대중문화와 예술에 대한 교회의 접근 방향을 잘 제시해주고 있는 신국원의 글을 요약하면서 마무리를 하고 싶다(2004, 49-54쪽). 우선 무비판적으로 대중 문화와 대중예술을 교회 안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그렇다고 대중문화와 예술을 세상적이라고 구별하고 배격하는 것도 어리석다. 또 어중간한 입장에 서서 대중 문화와 예술을 다만 전도용으로 차용하려고 하는 것도 잘 못하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내용이 신앙적이기만 하면 ‘만사 OK’식이 되어 저질기독교예술, 주일학교수준의 유치한 기독교문화를 만들 뿐이다. 최선의 길은 분별력을 갖고 문화 속에 참여 하여 그것을 복음으로 변혁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확신과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자세를 견고히 해야 한다. 그러면 교화와 오락, 비판, 그리고 기독교 문화와 세계관, 경험과 전통 등을 다음 세대에게 전달 하고 계승하여 점점 더 강성해 가는 예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예배갱신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분출하는 이 시점에 세대통합 예배를 위한 진지한 논의와 그 대안이 마련되기를 한번 크게 소망해본다.
<도서목록>
김득룡 1985. 현대목회 예배학신강 서울: 총신대학출판부
Bard Thompson, 1980. Liturgy of the
랄프 마틴 1993. 초대교회 예배 (오창윤역, 서울: 은성, 1993)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편 2001. 복음주의예배학 서울: 요단
돈 E 샐리어스 2002. ‘예배와 영성 (이필은역, 서울: 은성)
허도화 2003. ‘한국교회예배사 서울: 한국강해설교학교출판부
알버트 월터스 1992. 창조 타락 구속 (양성만역, 서울: IVP)
한스 로크마커스 2002. 예술과 기독교 (김헌수역, 서울:IVP)
프랜시스 쉐퍼 2002. 예술과 성경 (김진선역, 서울:IVP)
신국원 2004. 변혁과 살롬의 대중문화론 서울:IVP
1999. 포스트모더니즘 서울:IVP
삐에르 바뱅 1993. 종교커뮤니케이션의 새 시대 (유영난역. 서울: 분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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