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관점에서 본 예배
안인섭 (총신대 신대원, 역사신학)
예배와 관련하여 오늘날 한국 교회의 고민 중 하나는, 한국 사회가 문화적으로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 속에 살고 있는 한국 교회의 성도들이 감동을 얻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예배를 어떻게 인도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세대들은 교회의 전통적인 예배에서 큰 의미를 찾지 못하고 그것을 지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경향이 적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예배의 형태가 변화되어야 하는가의 주제는, 결국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예배 이해에 대한 일관성과 다양성의 문맥에서 설명된다.
한국 교회 예배의 현장을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바람직한 대안을 탐구하려는 학문적인 작업들은 끊임없이 시도되어 왔다. 그 중 의미있는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한국 교회 예배의 문제점을 ① 주일 공예배와 삶의 예배의 불균형 ② 말씀과 성찬의 불균형 ③ 예배 공동성의 부재로 요약하는 입장이 있다. 이 견해는 최근 한국 교회에 의해서 새롭게 도입되고 있는 예배의 문제점도 지적하고 있는데, 그것은 ① 미국 교회의 지나친 모방, ② 예배 신학적 미성숙, 그리고 ③ 예배와 전도 집회의 혼돈 등이라는 것이다.[1]
한편 오늘날의 예배가 필요한 모든 시설과 조건들을 갖추고 있음에도 영적 감동이 없음을 직시하면서, 그 이유는 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의 결여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예배란 한편의 설교를 듣고 복을 받는 수단이 아니며, 예배의 진수는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것이다.[2]
그런가 하면 한국 교회는 부흥 집회가 예배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예전과 설교의 균형이 상실되었으며, 하나님을 향한 뜨거움과 말씀을 경청하는 차분함이 부조화 되었고, 개혁주의 예배의 전통에서 멀어져 갔다는 분석도 제기되었다.[3]
이상의 의미있는 현실적 분석 위에, 필자는 한가지가 더 첨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화란의 저명한 실천신학자인 헤이팅크(G. Heitink)에 의해서 예리하게 제시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예배와 관련하여 앞으로 더 심층적인 연구가 되어야 할 주제는, “예배 시간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있는 것인지? 예배 중에서 무엇이 참예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지? 무엇이 예배 참석자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키는지?” 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현대 교회의 성도들이 “예배를 의미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지 못하다”라는 절박한 현실에서 나온 진지한 고민인 것이다.[4]
바로 이 시점에서 예배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 긴요하게 요청된다. 위와 같은 고민은 역사적으로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 흥미롭다. 16세기 유럽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기존의 전통적인 카톨릭의 예배에 대한 신학적 부당함과 실제적인 무기력감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참예자들은 단지 구경꾼에 불과했던 당시에는 이 로마 카톨릭교회 단 하나만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배의 개혁은 곧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기존의 로마 카톨릭의 예배를 개혁하려고 진력하는 과정에서, 전통적인 요소 중에서 수용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을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여기에 신학적인 전망이 개입된다. 예배에 시대적 변화와 각 지역의 문화와 사람들의 정서가 반영되어야 하는지, 즉 예배에서 본질적이고 복음적인 것과, 문화적이고 적용의 다양성 속에서 포용할 수 있는 것의 경계선이 어디인지의 문제가 예리하게 대두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었던 루터나 칼빈의 예배 개혁에 대해서, 그것 조차도 미온적이며 아직도 더 개혁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았는데, 대부분 급진적인 종교개혁 계열에서 나온 입장들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종교개혁 그룹들의 신학적 지도(map)를 정확하게 그려냄으로, 개혁교회의 예배에 대한 본질적인 관점은 무엇이며, 다양한 종교개혁 공동체들 속에서 보편성과 특수성, 그리고 역사적인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문제를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먼저 예배의 의미를 정의한 이후에, 교부 시대의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어거스틴의 예배에 대한 해석과 16세기 종교개혁 시대 예배 이해의 본질과 일관성과 다양성의 문제를 다룰 것이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는 개혁신학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칼빈(John Calvin)에게 초점을 두되, 동 시대의 다른 종교개혁 진영들과의 비교 연구를 통해서 개혁 교회 예배의 합의된 성격과 다양성의 문제를 논의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II. 예배의 의미
1. 신약과 구약의 예배 이해
로버트 웨버(R. E. Webber)에 의하면 구약에서 말하는 예배는 시내산 사건에 그 기본 틀이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 모으시며 그의 백성들이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께서 유대교의 제사를 종식시키시면서, 그리스도의 사건에 예배의 뿌리를 두셨다.[5] 한편 신약에서 레이투르기아(leitourgia)는 교회의 성찬의식을 위해서 사용되었는데, 그 이후에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교회의 인간적인 행위로서의 예배를 가리키는 말로 이해가 되었다. 이때 예배는 섬김과 봉사의 예전적 의미를 전제한다. 예배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일(opus Dei)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일(opus humanis)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인데, 하나님의 섬김과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섬김인 양면이 어우러진 사건인 것이다.[6]
이러한 예배의 성격은 다각도로 설명될 수 있는데,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놀라운 신비적 성격을 내포하면서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축제이기도 하다. 또한 섬김과 봉사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비의도적인 교육이기도 하고 결국은 종말론적인 성취를 대망하는 의미를 갖는다.[7]
2. 개혁주의의 예배 이해
필자는 이에 더하여 몇 명의 중요한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예배에 대한 이해를 첨언하고자 한다. 이 화란 개혁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예배의 특징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만남”에 초점을 두고 예배의 의미를 갈파하고 있다는 점이다.
판 더 란(J. H. van der Laan)은 예배의 의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예배의 의식은 우리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돕기 위한 모든 의식과 경건의 형식과 행동들”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예배 의식을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배 의식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게 된다. 따라서 판 더 란 교수에 의하면, 예배의 의식에 대한 연구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서로 교통하는 사건이, 예전적이고 경건한 행동들에서 발생될 때, 그 하나님과 인간과의 의사소통으로부터 독특한 성격이 도출되는 것이다.”[8] 예배가 지향해야 할 점이, 예배를 받으시는 창조주 되시고 구속주 되시는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참예자들 간의 만남이라는 해석은, 오늘날 형식화되고 무미건조해진 예배가 범람하는 현대 교회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하고 있다고 사료된다. 이것은 목회자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두어야 하는 것 중의 하나로서의 예배를 해석학적인 교통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예배와 관련해서 가장 강조되어야 할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교회의 전 예배 (즉 회중의 모임)를 “만남의 장소” 즉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장소”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난다. 그리고 찬양을 통해서, 성경을 읽고 들으면서 하나님과 만난다. 그런가 하면, 성찬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고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과 만나는 것이다.[9] 요약하자면, 딩어만 교수가 역설하듯이, 주일의 예배는 기독교인의 삶에서 독특한 형태이다. 이 주일 예배에는 주님과의 예배적인 만남과 성도들간의 서로의 만남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정리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예배에 있어서 의식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용꺼(H. Jonker) 교수에 의하면, 예배 의식은 신실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역동성에 의하여 가능성을 실제로 작용하게 하는 것이다. 예배 의식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펼쳐지는 장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와 성례는 서로 잘 부합되는 것이다. 말씀의 선포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은 동시에 정당한 성찬을 높이 평가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의 반향이기 때문이다.[10] 헤이팅크 교수는 말씀과 성찬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개신교 전통에서 말씀의 사역은 성례전의 거행으로부터 분리되어 발전되어 왔다. 그러나 요즈음은 교회의 연합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말씀의 사역뿐 아니라, 성례의 집례, 특히 세례와 성찬이 점점 더 중요하게 대두되고 있다는 것이다.[11]
III. 교부들의 예배 : 어거스틴을 중심으로
1. 개혁교회와 어거스틴의 중요성
4세기의 북아프리카 인물인 어거스틴의 신학을 연구할 때 놀라운 사실은, 그는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살았던 기독자였으며, 그의 신학은 사변적인 이론이 아니라 그 시대 속 평생의 목회 현장에서 배어 나온 실천적 산물이었고, 성경 중심적이고 교회 중심적인 방향성은 21세기에도 여전히 귀한 통찰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로마 카톨릭의 신학과 예배학에 있어서 중요한 귄위의 근원이 된다. 동시에 어거스틴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중세말의 왜곡된 로마 교회와 그 신학을 개혁하려고 할 때 그 중요한 정신이었던 근원으로(ad fontes)의 맥락과 관련해서 볼 때 종교개혁의 교회에 있어서도 중요한 권위와 자료(source)가 된다.[12] 종교개혁이 근원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의 근원은 두 가지 인데,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신학이다. 그럴때 교부들에 있어서 각 종파를 떠나서 가장 존경받고 그의 신학에 의지했던 권위있는 신학은 어거스틴이었다.[13] 그러므로 어거스틴의 예배학은 종교개혁의 후예인 한국의 장로 교회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어거스틴의 예배에 대한 이해
어거스틴은 그의 신국론 10권에서, 먼저 로마 철학과 종교를 비판한 후에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깊이있게 설명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를 라트레이아(latreia: 예배)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예배를 하나님께만 합당한 라트레이아(latreia)와 사도가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인에게 하듯이 순복하라고 권면할 때 사용했던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로 예배를 해석하고 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 라트레이아라는 예배는 성례전과 또한 삶을 통해서 드려져야 한다. 그러면서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예배는 “죽음 짐승의 제사가 아니라 통회하는 마음의 제사”라고 강조하고 있다.[14]
어거스틴은 참된 제사를 우리가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이루도록 해 주는 모든 활동으로 설명한다.[15] 어거스틴에 의하면, 교회는 신실한 자들의 성례전 속에서 계속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그 자신을 바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몸으로 제사를 드림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없음을 어거스틴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6] 따라서 예배를 삶의로서의 예배와 공예배로 이해하는 어거스틴의 예배 해석은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3. 어거스틴의 성례관
어거스틴은 기본적으로 교회를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보면서 구약 예언의 성취로 이해했다.[17] 어거스틴의 이 교회론에 있어서 성례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신자들은 교회에서 시행되는 성례에 참여함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이다.[18]
어거스틴은 세례를 출애굽과 연결시켜 해석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지나감으로 이 세상으로부터 철폐(the abortion of the sins)되고 구원을 얻음과 같이, 신자들의 세례는 죄로부터의 철폐와 구원을 의미한다는 것이다.[19] 그런데 성례의 유효성과 관련해서 어거스틴은 선한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 공히 비가 내리는 것처럼, 악인도 성례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악인들은 종말에 가서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교회 안에서 선인과 죄인은 세례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20] 칼빈은 그의 저작들 속에서 어거스틴을 인용하면서 세례의 유용성을 설명하고 있는데 주로 재세례파들을 논박하기 위해서 활용되고 있다는[21] 점이 눈에 띈다.
IV. 종교개혁시대 예배의 일관성과 다양성의 문제
1. 종교개혁의 시대적 배경과 예배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교회는 긴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 교회라는 단 하나의 교회만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 유일한 교회의 예배가 미사, 예배 의식, 성례관 등의 신학적 문제에 있어서 크게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교개혁은 중세 후기의 로마 카톨릭의 예배와 예전으로부터 성경적인 것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미사 중심적이고 모든 예전을 성례화했던 로마 카톨릭의 예배로부터 다시 말씀 선포의 의미를 되찾자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회중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라틴어 예배가 아니라, 참예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자국어로 예배를 드리도록 하며, 더 나아가 예배에 참여한 자들로 하여금 직접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찬의 잔을 다시 나누도록 하는 예배의 개혁이 바로 종교개혁의 예배인 것이다.[22] 그러나 개괄적으로 정리해 보자면, 중세말 종교개혁 전야는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간에 연속성과 단절성이 공존하는데, 제임스 화이트는 특히 “근대적 경건(Modern Devotion)과 같이 대중적인 경건은 개신교와 연속성 상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23]
2. 종교개혁 교회의 예배시 성찬을 집례하는 방식의 다양성의 문제
종교개혁 교회가 기존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배를 개혁했기 때문에, 개신교는 예배에 대한 자신들의 정체성을 새로 세워야만 했다. 바로 이 위치에 종교개혁 교회가 지향하는 예배의 다양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 단적인 예로서, 성만찬시 떡과 잔을 받을 때, 무릎을 꿇고 받을 것인가? 앉아서 받을 것인가? 아니면 회중이 앞으로 나와서 받을 것인가? 같은 종교개혁시대요 동일한 개혁파 안에도 이미 다양성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일정한 원칙 없이 중구난방식으로 예배의식이 존재했었는가? 일관성과 다양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만약 이 주제를 연구한다면, 그것은 현대 교회가 짊어지고 있는 예배와 관련된 과제에 큰 통찰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찬을 집례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양식”과 관련하여 칼빈의 제네바를 비롯한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도시들과, 16세기 아 라스코(A Lasco)가 이끌던 런던의 난민 공동체를 비교하되, 칼빈과 아 라스코의 ‘교회 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을 비교한다면 우리는 개혁주의 예배의 일관성과 다양성의 문제를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요한네스 아 라스코(Johannes A Lasco: 1499-1560)
16세기 폴란드 출신의 종교개혁자인 요한네스 아 라스코(Johannes A Lasco)는 역동의 시대에 유럽을 전전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불태웠던 지도자였다. 아 라스코는 1499년 폴란드 태생으로서 종교개혁에 가담하여 1542년에 독일 엠던(Emden)의 칼빈주의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으며, 1548년 크랜머(T. Cranmer)의 초청으로 영국에 건너갔다가 1552년에 런던 난민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유럽 대륙 여러 곳에 머물다가 1556년 남부 폴란드의 칼빈주의 교회로 돌아가 1560년에 세상을 떠났던 나그네와 같았던 종교개혁자였다. 이 아 라스코는 그리 낯익은 인물은 아니지만, 화란의 칼빈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위퍼(A. Kuyper)도 깊이 연구한 바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아 라스코(A Lasco)는 1,000명 정도되는 영국 런던의 난민 교회에서 국가의 통제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역을 했다. 따라서 그가 사도적 순결(Apostolic purity)이라고 확신했던 것들을 소신있게 추진할 수 있는 환경속에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 라스코(A Lasco)의 런던 공동체는 성찬에 참석하는 자들이 영적으로 충분히 준비되었는지를 면밀히 조사하는 엄격한 예비 단계(prescribed stages)가, 실제 성찬식이 있기 2주전의 공식 선포와 더불어 시작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24]
아 라스코의 교회 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은 "사도적 순결과 그리스도의 모범(puritatem Apostolicam et Christi exemplum)"을 의미했던 방식, 즉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제자들이 주의 테이블 주의에 둘러 앉아서 성찬을 거행하는 방식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런던 난민 교회 시절의 아 라스코에 의하면, 정지함(statio), 무뤂꿇음(genuflexio), 그리고 앞으로 나아감(ambulatio)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성찬 거행 방식들은, 비록 그 각각의 양식이 성찬의 유효성과는 관계없는 일종의 adiaphora라고 할지라도, 가능한한 시행하지 말하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아 라스코는 그 대안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거행하셨던 방식이었던 식탁에 앉음(accumbatio)이라는 방법으로 성찬을 시행해야 한다고 집요하리만큼 주장했다.
참예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떡을 떼기 위해서 식탁에 둘러앉는, “앉아서 시행하는 성례(Seated Communion)”라는 성찬의식은, 이미 1531년에 나타나는 보르숨 회중(congregation of Borssum)의 아퀼로몬타누스(Aquilomontanus: 1489-1548), 1528~30년의 엠던의 아포르타누스(Aportanus in Emden), 노르던의 레제(Rese in Norden) 등의 사례에서 간헐적으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아 라스코는 성찬을 집례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입장에 있어서 강력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유연성도 보여 주었다. 그가 대륙의 엠던(Emden) 교회의 지도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시기의 엠던의 교회 법령에는 이와같이 앉아서 거행하는 성찬의 예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25] 아마도 아 라스코는 무뤂을 꿇고 참예했던 대륙의 지역교회의 법령을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우리는 종교개혁 시대 개혁 교회 예배의 다양성을 보게 된다. 아 라스코는 런던의 난민 목회 시절에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중 하나인 성찬의 방식을 세움에 있어서 식탁에 앉음(accumbatio)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유럽 대륙에서 사역을 할 때는 대륙의 방식이었던 무뤂꿇음(genuflexio)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편 칼빈이 사역했던 제네바나 그 밖에 쮜리히 같은 스위스 도시들 또한 다양했다. 제네바의 경우, 1559년에 “목사가 떡과 잔을 나누어 주고, 회중은 경건한 마음으로 질서있게 그곳에 <가는것>을 권고한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칼빈의 경우에는 “앉아서 시행하는 성찬 의식”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accumbatio는 런던 교회 법령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아 라스코가 사도적 교회의 모델로 돌아가려고 했던 의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아 라스코는 유럽 대륙인 엠던에서 사역할 때에는 무뤂꿇고 떡과 잔을 받는 성례의 양식을 용인했지만,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보다 자유했던 런던의 공동체를 이끌던 시절에는(아마도 1550~1553경), 성경이 지지해 주며 사도적인 방식이라고 그가 믿고 있었던 식탁에 앉아서 떡과 잔을 받는 방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이다.
한편, 식사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잔과 떡을 나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방식대로 성찬을 시행하는 방식은, 아 라스코가 의식을 했던 하지 못했던 간에 재세례파의 영향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유익한 통찰이 있다. 종교개혁 시대에 철저한 개혁주의자였던 아 라스코는 성례와 관련해서는 재세례파들의 주장도 받아들여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주장했던 성례의 방식 조차도 런던의 난민 공동체나 대륙의 공동체에서 각기 다르게 적용했던 다양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아 라스코는 카톨릭적인 미사나 성찬에 대한 화체설의 입장은 신학적으로 철저하게 거부하는 일관성을 또한 보여주었다.
2)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노용(Noyon)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난민이 되었다가 1536년에 제네바에 부름을 받았다가 축출되었고, 마틴 부써(M. Bucer)의 배려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난민목회를 하다가(1538-1541), 1541년에 제네바에 다시 정착하여 1564년에 세상을 떠나기 까지 평생을 스위스에서 사역했던 국제적인 종교개혁자이다.
칼빈과 재세례파의 관계 연구로 유명한 네덜란드의 칼빈 연구가 발커(W. Balke) 박사는, 최근인 2003년에 출판된 “칼빈과 성경”(Calvijn en de Bijbel)이라는 책에서 왜 이 시대에 칼빈 연구가 필요한지를 서양 신학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발커 교수에 의하면, 칼빈의 신학은 16세기 이후 유럽과 북미 대륙에 있어서 거의 유일한 국제적인 신앙이었으며, 서양인의 신앙과 영적인 삶, 그리고 서양 사회와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칼빈 연구는 오늘날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이다.[26] 필자는 여기에 한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교회를 섬겼던 16세기 신학자이지만, 오늘 21세기에 한국과 아시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신학자가 바로 칼빈이라는 점이다.
칼빈은 1537년 다른 2인의 제네바 목사들인 엘리 꼬로(Elie Coraud)와 파렐(Farel)과 함께 시 의회에 제출했던 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eglise et du culte a Geneve)과 1541년의 교회 법령(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에서 매주 성찬식을 거행할 것을 의도했다.
그러나 칼빈은 인구가 약 10,000에서 12,000이나 되는 16세기 개혁 도시국가인 제네바라는 사회적 현실과, 교회와 국가 간에 존재했던 긴장 속에서, 제네바의 3~4개의 교구 교회에서 돌아가면서 매달 성찬식을 실시하자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성도들은 한 달에 한번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성찬을 어떤 방식으로, 몇 번이나 실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예배와 관련된 중요한 예배의 요소에 있어서 그의 목회적인 입장은 분명했지만, 동시에 제네바의 목회 현실을 고려할 줄 아는 안목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한편 종교개혁 교회의 다양성과 일관성과 관련하여, 권징(Church Discipline)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입장들도 주목할 만하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교회는 교회의 표지(notae ecclesiae)로서 말씀(the Word)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Sacraments)가 정당하게 집례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권징(Church Discipline)이 추가되었다. 칼빈보다는, 부써(Bucer)나 아 라스코(A Lasco)가 후자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마도, 아 라스코는 엠던(Emden) 시절에 쯔빙글리(Zwingli)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가 이전에 바젤(Basel)에서 공부할 시절, 즉 1524~25년에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징과 관련해서는 그가 런던에서 사역했던 시기에는 부써나 칼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거룩한 공동체(purified community)를 건설하기 위해서 교회 권징의 필요를 강조했는데, 그 배후에는 재세례파들(Anabaptists)과의 관계가 놓여있다. 칼빈의 “거룩한 공동체” 개념의 경우 역시 재세례파와의 관련이 크다고 할 수 있다.[27] 만약 재세례파들의 권징에 대한 개념이 종교개혁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재세례파들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세기 당시 재세례파는 소수파였고 그들의 급진성 때문에 종교개혁 흐름속에서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들이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교회의 권징을 중시하고,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성찬 예식을 추구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록 간접적인 방법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종교개혁의 주류 운동에 “촉매적인(catalystic)”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6세기 종교개혁 시대는 로마 카톨릭의 예배를 개혁하는 과정에서 개혁 교회 안에 일관성과 다양성이 존재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각각의 개혁 교회들은, 신학적인 급진성 때문에 시종일관 반대해 왔던 급진적인 종교개혁, 즉 재세례파의 공동체 개념이라고 하더라고, 그것이 성경에 지지를 받으며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면 과감하게 수용하는 포용성도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신학적으로 성경에서 벗어나 있었던 로마 카톨릭의 예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부하면서 가열차게 개혁해 나가는 역동적인 일관성도 가지고 있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3. 칼빈의 성찬론에 대한 다양성과 일관성
1) 루터와 쯔빙글리와의 관계속에서 살펴 본 칼빈의 성찬 이해의 다양성
L. Smits가 “Saint Augustin dans l'oeuvre de Jean Calvin”이라는 책에서 칼빈은 “유일한 책 한 권의 사람” (1559년에 나온 “기독교 강요”를 말함)이라고 말했지만, 그 기독교강요는 칼빈의 전체 작품들 (opera omnia) 중에서 칼빈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source)중의 하나일 뿐이다. 칼빈의 원문 저작 전집인 Calvini Opera의 경우 1559년 기독교강요는 전체 59권에서 단 한 권일 뿐이다.[28] 따라서 칼빈의 성만찬 신학을 바르고 정당하게 이해하려고 하면, 칼빈의 고린도전서와 공관복음서 주석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성만찬에 대한 해석을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1549년 이전에 칼빈은 고린도전서 주석을 기록했는데, 1546년에 라틴판, 그리고 1547년에 불어판이 나왔다. 1549년 이후에는 1555년부터 설교되어 1558년에 나온 칼빈의 19개의 설교문 (Sermons sur le dixieme et onzieme chapitre de la premiere Epistre de sainct Paul aux Corinthiens)도 중요하며, 마지막으로 1555년에 나온 칼빈의 공관복음 주석도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1559년에 나온 칼빈의 기독교강요 최종판에 등장하는 칼빈의 성만찬 신학이 이 모든 것에 종합적으로 비교 연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포괄적이고 심도있는 연구를 통해서 빔 얀서(Wim Janse) 박사는 한명의 신학자로서 칼빈의 성찬의 신학은 1536년부터 1564년까지 지속적으로 “역사적 발전(historical development)”을 했다는 점을 규명해 내었다. 이에 근거한다면 칼빈의 예배 이해도 일관성과 다양성 모두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얀서 박사에 의하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크게 세 시대에 걸쳐서 발전했는데, 첫째는 쯔빙글리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시대(1536-7)이고, 둘째는 루터적 성격을 보여주는 시대(1537-48)이며, 셋째는 다시 영성적인 경향을 보여주는 시대(1549-1550s)이다.[29] 칼빈의 성만찬 신학에서, 가장 기본적인 교리적 일치로서 정말 중요한 것은, 칼빈의 교회와 같은 스위스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독일어권 종교개혁주의자들 이었던 쮜리히(Zurich)의 설교자들과 토론한 이후에 성만찬 신학의 정확한 표현으로서 결론지어진 1549년의 Mutua consensio 즉 Consensus Tigurinus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의 성만찬 신학은, 1549년 이전에 기록된 칼빈의 작품들과 1549년 이후에 저술된 저작들은 사이에서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546년의 고린도전서 주석에서 칼빈은 성만찬시 그리스도의 몸은 루터파와 유사하게 실제적인 선물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스위스의 입장(즉 쯔빙글리의 견해)와 거리를 두고 있다. 빵을 받아 먹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을 받는 것이다. 빵을 쪼갬에 참여함에 의해서 우리는 그의 몸에 참여한다. 이 모든 것은 성령이 자신을 나타내심에 의해서 가능하다.
그렇지만, 1549년 이후인 1555년 이후에 나온 그의 설교에서 칼빈은 이전과는 발전된 해석을 보여주고 있다. 성례의 “선물”로서의 특징을 철회하고, 기념적이며 교회론적-윤리적의 측면으로 해석하고 있다. 성찬시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과의 연합함을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다는 것은 우리가 서로 연합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성례의 선물은 기념, 확신, 확인이라는 의미로서 믿음 안에서 매일 경험되는 확신으로 보았다. 특히 1558년의 칼빈의 설교를 보면, 성만찬과 관련된 문맥에서 압도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들이 “그때”, “~할 때”였다. 이것은 일상의 삶속에서 지속되는 신앙생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칼빈은 성찬에 참여함의 윤리적인 조건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헌신하지 못하도록 막는 장애물들을 깨뜨리기 위해서 노력하라고 칼빈은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신실하신 그리스도에게 열려질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칼빈 자신의 저작들에 근거해서 요약하자면, 칼빈의 전체 작품들이 보여주는 것은, “칼빈의 주의 만찬 교리”가 두 경향, 즉 루터의 성만찬적 실재론(sacramental realism)과 쯔빙글리의 영성주의적 상징주의(spiritualistic symbolism) 사이를 움직였던 성령론적(pneumatological) 견해였다는 것이다.[30] 그 의미는 이것이다. 칼빈은 종교개혁의 본질에 있어서는 타협을 불허하는 시종일관한 투사로서 로마 카톨릭의 화체설을 신랄하게 반대했지만, 마치 평생을 칼빈과 친밀한 교제를 유지했던 마틴 부써(M. Bucer)와 같이, 칼빈은 종교개혁 운동 내부에 있어서는,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조율하고 융화할 줄 알았던 유연성있는 신학자였다는 것이다.
칼빈은 루터주의자들과 동역이 필요할 경우에는 자신의 입장을 루터파의 그것과 조율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그러나 1549년 쯔빙글리주의자와 루터주의자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실패했을 때, 칼빈은 반대로 스위스의 쯔빙글리파에 우호적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러나 1560년대에 북독일에서 멜랑흐톤 주의자들에게 보다 많은 공간이 열렸을 때, 칼빈은 다시 1540년대와 같이 친-루터적인 접근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1562년에 Maximilian 황제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칼빈은 “많은 좋은 독일인들”이 프랑스의 성만찬 교리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루터적인 견해에 일보 양보하기 까지 했던 것이다. 칼빈은 이런 면에서 보면, 마틴 부써가 그랬듯이, “위대한 대화의 신학자(the great theologian of dialogue)”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2) 칼빈의 성찬론의 일관성
이상에서 우리는 칼빈의 성찬 이해에 대한 역사적인 성격과 그 다양성을 조명해 보았다. 그렇다면 칼빈의 성찬론의 일관성은 무엇일까? 칼빈의 모든 자료들이 일치하는 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칼빈은 지속적으로 신랄하게 반 카톨릭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는 것이다. 1549년 이전이나 이후나 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예배에 대한 칼빈의 공격은 시종일관 변함이 없다.[31] 칼빈의 비판은, 매일 미사의 희생제사, 빵과 포도주의 성체화,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화됨, 개인적인 미사, 죽은자들을 위한 미사, 비밀 고해성사, 그리고 교황제에 대한 정죄와 주의 “참된 기관”으로부터의 일탈 등이었다. 이런 칼빈의 강조는 칼빈 자신의 회중에게 우선적으로 목적되었는데, 자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숨어있는 니고데모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칼빈의 성만찬 신학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것은 “exhibitio(드러냄)”이다.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되시지 않으시면서도,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인간들에게 실제로 주시는 것이다. 이 exhibitio는 주의 만찬의 신비적인 측면뿐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은혜의 선물의 실체를 존중해 준다. 은혜의 실체와 초월 모두를 유지하기 위해서 칼빈은 쯔빙글리의 순수한 상징주의(pure symbolism)와 루터의 성찬 실재론(sacramental realism)이라는 양 극단적인 이론을 넘어섰던 것이다.
4. 칼빈의 “영적(spiritual)”이고 “잘 조직된(well-organized)” 예배
칼빈이 1536년에서 세상을 떠난 1564년까지 거의 평생(잠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난민 목회를 했던 1538년에서 1541년까지의 3년을 제외하고)을 목회하고 신학적 연구를 전개했던 제네바는, 로마 카톨릭의 종교적 박해와 사보이의 정치적 지배에서 방금 풀려난 신생 개신교 도시국가였다.[32] 외부로부터는 제네바를 로마 카톨릭으로 되돌리려는 음모가 중단없이 시도되고 있었고, 제네바 내부에서는 칼빈의 철저한 통치에 대한 반발이 거셌다. 이런 역사적 현실 속에서, 칼빈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예전을 버리고 전혀 새로운 교회를 세워야만 했던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받고 있었다.
칼빈은 그의 초기 시대부터 예배에 대한 관점이 서서이 발전하여 점차 잘 조직된 형태로 확립되어 갔다. 이때 중요한 개념은 “eglise bien ordonnee” 즉 “잘 조직된 교회(well-organized church)”이다. 이 용어는『제네바 교회 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eglise et du culte a Geneve, proposes par les ministres)』(1537년 1월 16일), 에서 비롯해서, 『교회 의식(The Church Order)』(1541년 9월 13일), 그리고 『교회 기도와 교회 찬송의 형태 (The Form of Church Prayers and Hymns)』(1542) 등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칼빈이 말하는 “잘 조직된 교회”를, “설교-중심적”인 예배나, “회중의 권징”, 혹은 교회의 “4중 직책”등의 개념으로 단순하게 축소시키기 보다는, “성경적인 사상”에 의해서 “철저하게 관통되고” “적절하게 조직된,” 조화롭게 연합된 교회의 몸을 가르친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33]
한마디로 칼빈이 말하는 예배는 “잘 조직된” 것이면서도 동시에 “영적인” 예배라는 균형 의식이 잘 나타나 있는 교회다. 이것은 “via media”로 요약될 수 있는 칼빈 신학의 일반적인 특징과 맥을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로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회론인 교황제도 중심의 교회라는 개념을 거부하면서도, 좌로는 만인제사장과 영적 교회론을 극단화 시키면서 교회의 제도적인 측면을 과격하게 허무는 재세례파들의 주장도 배격하는 것이다.
오히려 양 극단의 교회 형태들을 피해가면서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교회론을 가지고 제네바 교회를 세워가려고 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와같이 성경에 근거한 “영적이면서도” “조직된” 균형잡힌 교회론이, 로마 카톨릭 주의나 재세례파 주의와 달리, 칼빈주의를 전 유럽과 미주에 역동성있는 교회 운동으로 확산시킬 수 있었으며,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다고 이해된다. 칼빈의 위대한 점과, 그의 가르침이 아시아 교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칼빈의 신학은 영적으로 복잡하고 어둡던 시기, 옛 것을 새것으로 대체 해야만 했던 교회적 사회적 격변기에, 예배와 교회와 인간 사회를 건강하게 세워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살아있는 신학이었던 것이다.
V. 나오는 글
오늘날 예배 인도자로서의 목회자는 다음의 질문에 직면해 있다. 어떻게 하면 감동적이고 은혜로운 예배를 인도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예배를 더 힘을 주어 강조할 것인가? 아니면 아예 새로운 스타일의 예배로 변혁해 나아갈 것인가? 어떤 것이 개혁 신학적으로 타당한 것인가?
본 논문은 현대 교회가 반드시 풀어가야 할 예배와 관련된 긴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역사적인 해답을 제시하려고 시도해 보았다. 필자의 중요한 전제는 이것이다. “예배는 하나님과 참예자들과 만남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 참석자들을 “구경꾼”으로 전락시킨다면 중세 말의 로마 카톨릭 교회의 오류를 다시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예배는 현대인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어야 하며, 또한 성도들 간에 뜨거운 만남이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참예자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혁신적(renovated)이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예배는 개혁주의적인 전통(Reformed tradition)에 충실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미 16세기 종교개혁 교회의 지도자들은,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목회적 고민들에 대해서 우리보다 먼저 더 진지하고 철저하게 사색했고 그 결과로 형성된 것이 개혁교회의 예배 전통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가장 성경적이고 이미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예배관이 개혁주의 예배 이해라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종교개혁 시대를 보다 깊이 들여다 보면 16세기 당시에 존재했던 세 흐름의 교회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그 스펙트럼 속에서 제일 우측에는 가장 전통적인 기존의 로마 카톨릭 교회가 존재한다. 한편 좌측 끝에는 급진적인 종교개혁 운동 즉 재세례파들이 위치하고 있다. 개혁 교회의 큰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은 이 두 극단의 흐름 속에서 중도의 길(via media)을 걷고 있었던 종교개혁자였다.
칼빈이 택했던 노선은, 생명력이 없는 카톨릭 교회의 제도적이고 경직된 예배 모델도 반대하면서, 동시에 재세례파들이 강조했던 극단적으로 비조직적이고 무질서한 예배도 배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예배를 연구하는 오늘의 우리에게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준다.
21세기 장로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하나님께서 아직도 일하시는 역동성 있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 예배는 영적(spiritual)이면서도 조직적(institutional, 즉 well-organized)이어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오직 “성경과 개혁신학의 원칙”에 근거한 “균형잡히고(well-balanced) 잘 교통되는(well-communicated)” 예배가 드려져야 할 것이다. 이 원칙에 근거한다면 예배의 세밀하고 구체적인 적용은 일관성과 다양성의 관계에서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제네바라는 작은 스위스 도시국가에서 칼빈이 구현하려고 했던 “Eglise bien ordonnee(잘 조직된 교회)”의 목표는, 여전히 21세기 한국과 아시아 교회에 중요한 방향이 되어야 한다. 한국 교회가 부흥했을 때는, “영적인 역동성과 생명력이 있는” 예배와 “잘 조직된” 예배가 조화롭게 균형잡힌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 교회가 이런 면모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만 있다면 한국 교회는 “영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칼빈의 교회론이 잘 적용된 성공적인 한 예로서 계속 성장하는 교회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
[1] 정일웅, 『한국 교회와 실천 신학』(서울: 이레서원, 2002), 198-203, 281-286.
[2] 황성철, 『예배학』(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98),13-16.
[3] 김영재, 『교회와 예배』(서울: 합동신학교, 1995), 45-72.
[4] G. Heitink, Practical Theology: History, Theory, Action Domains. Manual for Practical Theology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99), 289-290. 헤이팅크 교수의 이 저서의 원제는 Praktische Theologie 로서 본래는 1993년 Kampen에서 출판된 책인데 영어로 번역된 것이다. 교회 예배를 참여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가서, 앉아서, 보고, 노래하고, 듣고, 먹는(성찬을 말함) 행동들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형태를 어떻게 영적이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 수 있는지에 예배 인도자와 목회자와 신학자의 고민이 있는 것이다.
[5] R. 웨버,『예배학』, 김지찬 역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23-33, 35-48.
[6] 정일웅,『기독교 예배학 개론』, (서울: 범지출판사, 2005), 15, 17-18.
[7] 황성철,『예배학』(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1998), 25-30.
[8] G. Heitink, Practical Theology: History, Theory, Action Domains. Manual for Practical Theology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99), 288-289.
[9] G.D.J. Dingemans, Handboek praktische theologie: Als hoorder onder de hoorders, Een hermeneutische homiletiek (Kok: Kampen, 1991), 43-44.
[10] H. Jonker, Liturgische oriëntatie: Gesprekken over de eredienst (Wageningen: N.V. Gebr. Keunings Uitgeversmaatschappij), 44-45.
[11] G. Heitink, Practical Theology: History, Theory, Action Domains. Manual for Practical Theology (Grand Rapids, Michigan: Eerdmans, 1999), 289. 정일웅 교수는 개신교 예배가 말씀을 중심으로 한 것은 정당하지만, 예배 자체를 설교와 동일시하면서 성례전을 상실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면서, 한국 개신교가 말씀과 성찬이 함께 있는 예전을 확립하지 못했다고 반성하고 있다. cf. 정일웅,『기독교 예배학 개론』, (서울: 범지출판사, 2005), 323.
[12] H.A. Oberman, The Dawn of the Reformation: Essays in Late Medieval and Early Reformation Thought (Grand Rapids: Eerdmans Publishing, rep. 1992), pp. 8-12. ; 안인섭, Calvin’s Reception of Augustine’s Ideas on Church and State, (drs. Thesis) (Kampen: Theological University of the Reformed Churches in the Netherlands in Kampen, 1999).
[13] 다음의 책을 보라. L. van Ravenswaay, Augustinus totus noster : Das Augustinverstaendnis bei Johannes Calvin (Goettingen: Vandenhoeck&Ruprecht, 1990).
[14] Augustine, De Civitate Dei, X, 1-5.
[15] Augustine, De Civitate Dei, X, 6.
[16] Augustine, De Civitate Dei, X, 6. 31-32.
[17] Augustine, De Civitate Dei, XX, 9 “ego et nunc ecclesia regnum Christi est regnumque caelorum.”
[18] Augustine, Sermon 272.
[19] Augustine, Lectures of Tractates of the Gospel according to St. John, Tractate 45, John 10:1-10, 9.
[20] Augustine, De Baptismo Contra Donatistas, 4, 9, 13. CSEL 51. 237-238. 어거스틴의 성례관을 교회론의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자의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라. 안인섭, “어거스틴의 교회론,”『성경과 개혁신학: 서철원 박사 은퇴 기념 논총』(서울: 쿰란출판사, 2007), 509-546.
[21] 안인섭, “Calvin’s View of Augustine and the Donatist Church,” 제9회 세계 칼빈학회 발표 논문[The 9th 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 (Emden, Germanry, 2006. 8. 25.).
[22] 정일웅,『기독교 예배학 개론』, (서울: 범지출판사, 2005), 106.
[23] J. White, Protestant Worship: Traditions in Transition,『개신교 예배』 김석한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7), 29-33.
[24] A. Demura, “Calvin and a Lasco: A Comparative Study of Two Ecclesiastical Ordinances,” A paper which was presented in the 9’s International Congress of Calvin Research (
[25] A. Demura, “Calvin and a Lasco: A Comparative Study of Two Ecclesiastical Ordinances,” A paper which was presented in the 9’s International Congress of Calvin Research (
[26] W. Balke, Calvijn en de Bijbel (Kok: Kampen, 2003). 최근에 칼빈에 대한 연구들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축적되고 심화되면서, 칼빈의 모습에 대한 새롭고 발전적인 상이 제시되고 있다. 크게 보아 두가지 차원에서 칼빈에 대한 이해가 새롭게 제시되고 있는데, 첫째는, 칼빈에게 접근하는 방법론(methodology)이다. 칼빈의 신학을 이해할 때, 그의 생에 초기부터 말기에 걸쳐 저술되었던 그의 저작들을 총체적으로 면밀하게 검토함으로, “진정한 칼빈의 신학”을 찾아내는 것이다. 둘째는 이런 방법에 근거해서, 칼빈의 신학중 시종일관한 점은 무엇이고, 발전적으로 강조되거나 혹은 그 반대인 내용은 무엇인지를 발견함으로 칼빈에 대한 일방적인 오해나 추측은 배제하고 “칼빈, 그 자신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다.
[27] 안인섭, Augustine and Calvin about Church and State: A Comparison [Diss. Kampen Theological University] (2003), 245-250.
[28] Ioannis Calvini Opera quae supersunt omnia ( = CO). eds) G. Baum, E. Cunits and E. Reuss.
[29] W. Janse, “CALVIN’S EUCHARISTIC THEOLOGY: THREE DOGMA-HISTORICAL OBSERVATIONS,” A paper which was presented in the 9’s International Congress of Calvin Research (
[30] W. Janse, “CALVIN’S EUCHARISTIC THEOLOGY: THREE DOGMA-HISTORICAL OBSERVATIONS,” A paper which was presented in the 9’s International Congress of Calvin Research (
[31] 안인섭, “Calvin’s View of Augustine and the Donatist Church,” 제9회 세계 칼빈학회 발표 논문 [The 9th International Congress on Calvin Research] (Emden, Germanry, 2006. 8. 25.), 2-16.
[32] E. Cameron, The European Reform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1), pp. 2f.
[33] Shin Nomura, “Église bien ordonnée: Liturgical and Spiritual Aspects of Calvin's Worship,”「9’s Asia Congress on Calvin Research」(Taiwan, 2005),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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