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수 목사의 야고보서 강해 (13)] 온전한 믿음 | ||||||
“영혼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는 말씀은 야고보서의 요절이다. 믿음의 사람은 그의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다”고 했다. 믿음과 행함이 공존하지 않는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허탄한 사람 실천적 생활이 받쳐주지 못하는 사변적이며 구변적인 믿음은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는 죄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은 항상 “허탄한 자랑”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하나의 지식에 지나지 않는다. “귀신들도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고 떤다”고 했다. 결국 단순한 지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받게 하는 믿음이 아니다. 헛 것이요, 허무한 것이다. 허탄한 믿음인 것이다. 모양은 살아있으나 실상은 뿌리가 죽은 꽃과도 같다. 살아있는 죽음이요 죽어가는 삶이다. 믿음의 사람 야고보는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먼저 언급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히 11:17)고 하면서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고 말씀하였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모리아 산 번제단 위에 바치기까지 순종하게 만들었다. 이 같이 참된 믿음은 진실한 행함으로 기회만 있으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는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태어난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의 아들의 부활은 장차 오실 메시야 곧 하나님의 독생자의 부활을 내다보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살으심은 정죄에서의 자유를 받게 한다. 곧 율법도, 사단도, 자신의 양심도 정죄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때에 “의롭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바로 이같이 행함이 받쳐주는 온전한 믿음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 제단에서 독자 이삭의 목숨을 걸었듯이 기생 라합은 자신의 목숨을 걸었다. 그같은 믿음의 행위는 여리고성이 함락당할 때에 창에 붉은 줄을 매달게 만들었고 마침내 구원받게 했다. 이같이 온전한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동반한다. 야고보는 행함으로 구원받는 공로의 신학을 말함이 결코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써 구원받는 은혜의 신학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행위와 불가분리임을 밝히며, 율법무용론이나 율법폐지론을 주장하는 허탄한 사람들에게 행함으로 그 인격과 사역이 표현된 온전한 믿음의 사람들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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