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의 장로회
예장합동(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예장통합(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등은 원래 한 나무였습니다.
1907년에 장로교의 독노회 설립으로 출발한 한국장로교회는 1951년 고려파 장로교의 분립(고신), 1953년 기독교장로회의 분리(기장), 1959년 합동측과 통합측 장로교로 분열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2. 고신총회
1938년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나 이거 굴하지 않은 몇몇 목사님들이 1945년 재건노회를 조직하였으나 신학적 내용이 너무 극단적 배타보주주의라 하여 이에 반발한 목사님들이 1951년 5월 제36회 총회에서 별도의 고신조직을 만듭니다. 이것이 예장고신의 출발이죠. 고신은 예장과 합동하였다가 다시 나갑니다.
3. 예장과 기장의 분리
고신이 떨어져 나간 장로교는 1953년 성경해석에 있어서 신학적인 문제로 기장(기독교장로회)과 예장으로 분리됩니다. 김재준목사를 중심으로 한 목사님들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고등비평을 비롯한 성경무오설비판 등에 관하여 긍정적으로 받아들임으로 기존 목사님들과 갈등을 겪었고 박형룡박사 계열의 목사님들로부터 결국 떨어져 나가 독노회를 설립하고 한국신학대학교(한신대)를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4. 재건, 고신, 기장과 분리된 장로교
재건, 고신, 기장이 떨어져 나간 장로교는 1950년대 말에 이르러 당시 돈으로 3000만원 부정유출사건과 WCC탈퇴와 관련하여 또한번의 진통을 겪습니다.
당시 장로회신학교는 장소확보와 교사신축의 문제에 직면해 있었는데 이의 해결을 위해 교장이었던 박형룡박사가 남산의 땅을 불하해 준다는 거짓말에 속아 3천만원을 사기꾼 박호근에게 지출하였는데 결국 땅을 불하받지 못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또 WCC를 지지하는 측(한경직목사)과 그렇지 못한 측(박형룡목사)으로 관련하여 결국 1959년 48차 총회에서 WCC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갈라지게 되고 이것이 통합과 합동의 분열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게 한국 기독교 100년의 장로교 분열과정입니다.
그리고 현재 당시와는 신학적 주장이 많은 부분 달라지기는 했어도 그 색깔은 분명하다 볼 수 있습니다.
재건은 극보수,
고신은 약간 덜 보수... 주일날 뭘 사먹니 마니 하는 문제로 아직 다투고 있습니다.
예장합동은 칼빈주의적인 개혁주의요 보주주의 입니다. (총신과 수원에 있는 합신은 신학적 배경이 같습니다.)
예장통합은 약간 열려있는 편인데, 신학적 문제부터 사회 참여까지 .... 신학이 자유롭고 사회 참여에 적극적입니다. 자유주의적 색채와 보수주의적인 색채가 동업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기장측은 신학이 좀 많이 다른 편인데, 소위 많은 부분 자유주의 열린신학을 다 받아 들이고 있고 민중신학을 바탕으로한 사회참여 또한 보수주의와는 많은 부분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석탄절에 봉령사에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윤리종교화 시켰습니다.
이에 따른 신학교는
고신측: 고신대학교(부산),
예장합동: 총신대학교(사당동, 양지),
(예장합동 소속의 지방신학교는 칼빈대학교, 대신대학교, 광신대학교, 서울신학교, 수원신학교, 전북신학교가 있습니다.)
예장통합: 장신대학교(서울 광나루),
기장측: 한신대학교(수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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