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예루살렘 입성(종려주일)
성경본문: 마가복음 11:1~10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첫 날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그 분이 욕을 당해서 우리가 영광을 얻게 되고 그가 멸시를 받아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이르게 되고
그가 찔림을 받아서 우리의 아픔이 낫게 되었도다"
우리 기독교인이 가장 엄숙하고 감사하며 기뻐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
는 자격자가 아니고 주의 이름을 부를 만한 자격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아니며 온통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우리 주님이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받으신 것
입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무시를 당했습니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을 많이 만났는지 모릅니
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봉변을 당하는 것을 옆에서 보는 제자들
의 속이 터진 것은,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영권을 동원해서 그들을 능지처참하면 될 것 같
은데, 예수께서 그렇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주님이 그런 일을 하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
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존심이 있잖아요? 또한 그 분이 능력도 있잖아요? 그 분이 말을
하면 그대로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태복음 7장 29절에서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얼마나 멋있는 분입니까?
그러나 오늘은 그런 것을 하나도 볼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그저 질시와 수모를 당할 뿐입니다. 어떻게 삭은 가지가 부러지듯이 저렇게 쉽게 부러질 수 있을까요?
참으로 그 분은 이웃 나라가 꼼짝 못하던 다윗이 통치하던 시대 이상으로 샬롬(평화)을 주시기 위해 오신 평화의 왕인 줄로 알았는데, 저렇게 부러지는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무척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 길을 갈 뿐이었습니다.
화가 난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베었을 때 주님은 이것까지도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당부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번 한 주간 동안을 경건하고 의미있게 보냄으로써 신앙에 가장 보탬이 되는 주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오늘 아침에 어느 목사님이 기독교 TV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는데, 교회는 말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묵묵히 순종하는데서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따지는 곳이 아닙니다. 이권을 차지하는 곳이 아닙니다. 자기 주장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묵묵히 순종하며 사는 곳입니다.
하고 싶을 말을 다 하고 따지고 싶을 것을 다 따지면서 흑백논리를 따지는 곳이 교회가 아닙니다.
모세가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출14:13) 하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하시도록 배려하면서 맡기고 살아가는 곳이 교회 공동요 하나님 백성의 자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그런 마음으로 고난 주간 7일 동안 예수께서 가진 생각, 예수께서 가진 마음, 예수께서 행한 자세를 본받음으로써, 금년 한 주간이 여러분의 일생을 변화시키고 여러분의 가정을 빛나게 하고 우리 사회를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넘치는 주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 주님은 마태복은 21장 4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
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수 십 년 간 예수를 믿어도 이것을 받지 못하고 사는 불행한 신자가 되지 말고 하
나님의 큰 은총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고난 주간의 첫 날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역사가 일어난 날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을 일명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교만과 권력과 금력과 종교 지도자들로 꽉 차있어서, 예수처럼 나사렛 동네에서 태어난 서민 출신은 근접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는 대제사장이 교권을 휘두르는 자리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율사들이 법으로 약자는 무시함으로써, 강자들이 판을 치는 곳입니다. 권력으로 온통 들끓는 도시가 예루살렘입니다.
여기에 왜 예수님이 들어가야 합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들을 쫓아내야 할 예수가 거기에 무엇을 하러 갑니까?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들어가는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승리자로 들어가서 교만한 자는 겸손하게 하고 강자는 약하게 하고 불법 행위를 하는 권력층들을 회개케 해야 합니다. 참으로 예루살렘은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평양은 세계 모든 사람에게 공연을 하는 사람으로 꽉 차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이 평양에 오면 마치 크리스찬인 것처럼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설교를 듣습니다.
참으로 그들은 연극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에 아무 감동이 없으면서도, 마치 연극하는 사람처럼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처럼 찬송을 부르면서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지난 삼일절에 북한 사람들이 소망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을 불렀는데, 이북을 찬양하는 기자가 이런 글을 썼습니다. "북한의 찬송 소리에 남한이 울었다" 이 글을 쓴 기자는 굉장한 논란이 일어나자 해고 조치가 되었습니다.
평양 밖에서는 서민들이 먹지 못해서 아사하고 추위에 얼어죽었지만, 평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얼굴에 기름이 번들거립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북한을 방문하면 다른 곳을 가지 못하게 하고 꼭 평양에 있게 합니다.
과거에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김일성 동상 앞에서 참배를 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신앙 양심에 어긋나기 때문에, 절을 하지 않은 사람은 추방을 당하거나 감금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이북의 체제는 탄탄하기 그지없습니다.
전세계에서 독재 일 번지가 북한입니다. 이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으며 기독교인들을 말살시켰습니다. 교회를 공장으로 만들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아오지 탄광에 보내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였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했는데, 이라크도 북한과 똑같은 나라입니다. 사담 후세인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사람입니다. 반체제 인사들을 축출하거나 불이익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것도 끔찍한 일인데, 예루살렘은 그보다 더 엄청나게 악한 도시였습니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은 지금보다도 더 강한 철권 정치를 하고 교권자들이 아부하면서 사는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건물은 있었지만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은 물건을 파는 사람으로 꽉 차있었습니다. 비둘기를 파는 사람과 돈 바꾸는 사람으로 꽉 차있었습니다
거기 어디에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거기 어디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멘 하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곳을 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기에 왜 갑니까?" 하고 말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막무가내로 가야된다고 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날아다니는 새도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었지만, 주님은 머리를 둘 곳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로지 가난한 자들고 같이 있었고 병든 자들과 같이 있었으며 버림받은 자들과 같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마 "아, 예수께서 이제야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려고 하는가 보다" 하고 착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은 왕이 되려고 간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예루살렘답게 하고 성전을 성전답게 하기 위해서 들어갔습니다.
메마른 성전에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찬양 소리가 있게 하기 위해서 들어간 것입
니다.
예수님은 예배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쫓아내고 이제 거기서 찬송 소리가 드높아지고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과 평안을 주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입성을 일명 승리의 입성이라고 합니다.
이제는 악이 악을 이기는 세상이 아니라, 악은 패배하고 선이 이겨야 합니다. 불신이 패배하고 믿음이 이겨야 합니다.
지금도 불 신앙은 돈이 안 들어가도 흉용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돈이 들어가고 시간이 걸립니다. 그래서 그레샴의 법칙처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고 악이 팽창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양화가 악화를 구축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
고통과 아픔과 실망으로 가득 찬 여러분이 유일하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곳은 교회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야 하고 찬송 소리가 울려 퍼지고 아멘 하고 화답하는 소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남다른 바가 있었습니다.
첫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이 새끼 나귀는 헌납된 나귀입니다. 돈을 주고 산 나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벳바게 건너 마을에 가면 아무도 타지 않은 새끼 나귀가 매여 있을 것이다 거기에 가서 그 나귀 새끼를 풀어 오는데, 만약 누가 뭐하고 하면, 주께서 쓰신다고 말하라"
제자들이 거기에 가보니 예수님의 말씀대로 나귀새끼가 있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자 주인이 나와서, "왜 나귀 새끼를 푸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주께서 쓰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더 이상 따지지 않고 나귀 새끼를 예수께 아낌없이 바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온몸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이 은혜를 받은 여러분은 나귀 새끼 주인처럼 나귀 새끼를 예수께 헌납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1장 5절에 보면,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를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나귀 새끼는 아무도 타보지 않은 순수한 나귀 새끼입니다.
이 나귀 새끼는 한 번도 다른 사람이 탄 적이 없기 때문에 고물차가 아니라 세단차입니다.
이것은 벳바게 건너편에서 가져온 세단차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서민처럼 들어간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 하는 대단히 당당한 모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습니다.
예수께서 타고 가신 나귀 새끼는 시원치 않은 나귀가 아니라, 아주 순수하고 남이 써보지 않은 나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주님 앞으로 나가는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주 깨끗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복잡한 마음을 가지면 승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순수해야 합니다.
디모데 후서 2장 20절과 21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아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것은 금그릇, 은그릇이라고 해서 귀히 쓰는 것이 아니라 비록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일지라도, 깨끗하면 주인이 쓴다는 뜻입니다.
오늘 주님이 타고 가신 나귀 새끼처럼, 여러분이 깨끗한 그릇이 되어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귀 새끼는 헌납된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헌금을 한 것입니다. 헌금은 어떤 조건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너무나 감격해서 바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나귀 새끼는 큰 재산이었는데, 나귀 새끼의 주인은 그 재산을 주님을 위해서 바쳤습니다.
아마 여러분이라면 따졌을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기른 나귀 새끼인데 어떻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할까? 예수님이 너무 하신다" 그러나 벳바게 건너편에 있는 나귀 새끼의 주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귀 새끼를 내놓았습니다.
둘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서 나귀 새끼 위에 얹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겉옷은 체면, 위신, 위선인데, 주님 앞에 나갈 때는 이것을 벗어서, 얹어 놓아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나옵니다. 그는 예수께서 지나갈 때 소리를 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자 제자들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 잠잠하라 하면서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그를 불러오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로부터 "주께서 너를 부르신다" 하는 말을 들은 바디매오가 얼마나 반가웠으면 그의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께로 달려갔겠습니까? 주님 앞에 나오는 사람은 겉옷을 벗어야 합니
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겉을 보는 분이 아니라 속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베어서 길에 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가 얼마나 억센지 모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것을 잘라서 길에 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최고의 존경을 표할 때 종려나무 가지를 잘라서 펴거나 흔들었기 때
문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은혜를 받고 따라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의
소문이 온 성에 퍼지니라"(눅5:15) 하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금호제일교회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소문을 듣고 낮 예배에도 저녁 예배에도
철야 집회에도 꽉꽉 차는 전도의 불길이 붙을 때, 능력있는 교회, 승리하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넷째,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찬송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길거리에 나와서 예수님에게 최고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막11:9-11)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눅19:38)
이에 분개한 제사장과 율법주의자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 앞에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
다. "이 사람들이 무엄한 짓을 못하게 하소서 저들을 책망하소서"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리라"(눅19:4) 이것은 만약 사람들이 주님을 찬송하는 것을 제지하면 돌들이 찬양을 한다는 것입니다.
강릉중앙 교회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교회는 굵은 통나무로 지은 교회인데, 현대 문명에 밀려서 조한걸 목사님이 시무할 때에 통나무 예배당을 헐어버리고 새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그 나무가 너무나 좋은 나무라서 제제소 주인에게 팔았는데, 그 사람이 처음에는 백 만원을 주겠다고 하다가, 80만원으로 깍았으며, 결국 더 깍아서 60만원에 샀습니다.
제제소 주인은 그 나무로 경포대로 가는 언덕에 별장을 잘 지었습니다. 별장에 입주해서 첫 날 밤을 자는데, 새벽 4시 30분이 되자 별장 건물에서 찬송가 소리가 나왔습니다. 강릉중앙 교회에서 늘 새벽기도 때마다 부른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는 찬송이 울려나왔습니다. 집에서 "복의 근원 강림하사" 하는 찬송소리가 들리면, 예수 믿는 사람은 얼마나 좋아요?
그러나 그 주인은 그 찬송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릅니다. 아주 끔찍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사람이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부르는 찬송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그 주인은 아침에 교회로 달려가서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지금 우리 집에서 찬송가 소리가 나오는데. 웬 일입니까?" 그러자 조 목사님은 "잘 되었군요.
그것은 당신이 예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 집이 얼마나 비싼 집인가 하면, 당시에 삼천 만원이었습니다. 그러니 묵은 통나무로 얼마나 잘 지었겠어요?
집주인은 조 목사에게 "교회에서 이 집을 사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배당을 짓고 있어서 돈이 모자라는 형편인데 어떻게 그 별장을 삽니까? 그래서 그 교회에서 돈이 있는 분이 누굴까? 하고 찾았는데, 문방구를 하는 권사님이 생각났습니다 그 권사님을 찾아가서 아주 싸게 나온 집이 있는데 사라고 했습니다. 그 권사님은 목사님의 말에 절대 복종하는 분입니다.
집주인에게 집 값을 묻자, "삼천 만원 짜리 인데, 이천 오백 만원만 주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권사님이 안 산다고 하자, 이천 만원에 주겠다고 했습니다 또 안 산다고 하자 계속 집 을 깍아 주었는데, 무려 집 값이 천 이 백 만원까지 떨어졌습니다. 결국 이 백 만원을 더 깍아서 일 천 만원에 그 집을 샀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이 집을 산후에, 서울에 있는 모회사의 사장이 와서 그 집을 일억 원에 샀다
고 합니다.
제재소 주인은 복을 주셨는데도, 찬송가가 무서워서 삼천 만원 짜리 집을 천 만원에 팔고 그 집을 산 권사는 일억에 팔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나무 값으로 받은 돈의 몇 배를 교회 건축헌금으로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집을 판 돈으로 버스 회사를 운영해서 벼락부자가 되었는데, 그 분이 지금 강릉중앙 교회의 장로님입니다.
이처럼 나무가 찬송을 부르고 돌들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들어가자 난리가 났습니다. 왜 난리가 났을까요? 그것은 성전에 들어가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을 뒤엎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교회에서 다 내쫓아 버리고 깨끗이 청소작업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칭찬을 받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본연의 일을 하셨습니다.
1) 소경을 고쳐주셨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소경들이 눈을 뜨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이 네 개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육안이요 하나는 영안이요 하나는 양심의 눈이요 하나는 지식의 눈입니다.
지식의 눈이 떠진 사람은 까만 것은 글씨고 하얀 것은 종이로 보입니다. 그러나 지식의 눈이 떠진 사람은 지식의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양심의 눈이 어두워진 사람은 양심이 없는 파렴치범이 됩니다. 영안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제일 먼저 눈을 고쳐주셨습니다. 여러분도 눈이 고쳐지는 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산의 합성교회에서 열린 삼남연회에 참석했는데, 구동태 감독에게 눈이 흐릿해서 잘 안 보인다고 하자 그 교회의 교인인 백내장 수술의 권위자를 소개해주었습니다. 내가 시간이 없다고 하자, 다음 날 오전 7시 30분에 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보면 뿌옇게 잘 안 보였는데, 수술을 받고 나자 잘 보입니다.
여러분은 신앙적인 백내장이 없기를 바랍니다. 백내장이 껴서 잘 안 보였는데, 백내장 수술 후 시력이 제대로 나왔습니다. 시력을 재보니 1.2였습니다. 제가 본래 눈이 제일 좋을 때가 2.0입니다. 그리고 1.5, 1.2였는데, 눈이 희미해지면서부터 마이너스 시력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수술을 하고 나자 시력이 1.2로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소경을 고쳐준 이유가 이것이구나!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하면 멍청이 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뻔히 망하는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처음 은혜를 받고 난 후 여러분의 심령이 열려서 그것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얼굴은 예쁜데 속을 들여다보니 가까이 해서는 안될 사람이었습니다. 도적 같은 사람이 많고 고양이 같은 사람이 많고 염소 같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욕이 생겼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속에 개와 같은 마음이 들어있는데, 그 사람에게 아, 위대하신 분이여! 하고 말하겠어요?
그러므로 오늘 소경이 고쳐주시는 축복을 받기 원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2) 절뚝발이를 고쳐주셨습니다
사실 여러분은 영적으로 보면 다 절뚝발이입니다.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세상 것을 좋아하고 어떤 때는 주여, 하고 하나님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신앙이 콱 들어가 있어야 뭐가 됩니다. 신앙이 떨어지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질이 됩니
다.
3) 온통 찬양이 넘쳤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적에게 뺏긴 진지를 다시 탈환했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아세요? 아미 이번 이라크 전쟁도 그랬을 것입니다. 영국군과 미군이 연합해서 이라크를 침공하여 수도인 바그다드 시내를 들어가서 후세인 동상을 넘어뜨리고 거기에 미국 국기와 영국 국기를 꽂았을 때 병사들에게는 아마 한없는 감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야, 승리했다!" 군인의 최고는 적진을 함락시키고 거기에 기를 꽂는 순간입니다. 등반대는 남이 올라가 보지 못한 산을 처음으로 올라가서 자기 나라의 국기를 꽂는 것이 최고의 영광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모함하고 시기하고 죽이려는 살기가 있는 예루살렘에 예수께서 당당하게 들어갔을 때, 예수를 반대하던 예루살렘의 제사장과 서기관과 정치 지도자들 앞에서 찬양이 울려 퍼지고 팡파레가 울려 퍼졌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승리뿐만 아니라 고난주간에 여러분의 승리가 되시기 바랍니다.
가난도 이기고 질병도 이기고 절망도 이기고 실패도 이기고 희망과 기쁨과 평화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높아지는 아름다운 고난주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 -
금호제일교회/장광영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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