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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어버이/(눅15장11-32)

미션(cmc) 2011. 10. 24. 18:07

하나님과 어버이(눅15장11-32)

성경본문|누가복음 15장 11절 ~ 32절

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현대 문화를 책임 사회라고 그렇게 말을 합니다. 자신이 맡은 일을 자신이 책임지고 이루어야 되는 그런 문화를 말합니다. 대통령이 된 사람은 대통령의 책임을 져야하고 또 저같이 이렇게 목사가 된 사람은 목사의 책임이 있는 것이고 교회나 정부나 어느 공동체도 각기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하다고 느낄 때는 내가 맡은 책임을 훌륭하게 잘 완수하였을 때이고 그 책임 완수를 훌륭하게 하지 못했을 때에는 불안감이 오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지고 있는 책임이 너무나 크고 무거워서 잘 감당할 수가 없다고 판단될 때 해결 방법이 있습니다. 책임지고 있는 자리에서 물러나면 됩니다.

때로는 한 나라의 대통령도 물러나는 때가 우리 역사에 보면 많이 있어왔고, 또 저같이 이렇게 목회를 하는 목사도 사표를 내고 사임하는 때도 많이 있고 사회 모든 분야에 똑같은 그런 문화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괴로움이 많고 힘든 일이라고 해도 죽을 때까지 사표를 낼 수 없는 직책이 있습니다. 아버지라는 자리요 어머니라고 하는 자리입니다. 이 자리는 괴롭다고 사표 낼 수 없고 힘들다고 그만 둘 수 없는, 끝까지 책임을 져야되는 쉽지 아니한 그런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어떻게 신학교 시절부터 제 목회 경력이 개척교회를 많이 하게 되었어요. 이렇게 갈보리교회 같은 좋은 교회에서 나를 오라고 한 적은 이번 밖에 없어요. 항상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그런 지역을 찾아가서 황무지 땅을 복음으로 개척을 하다보니까 나는 괜찮았어요. 사명감이 있으니까 … 가족들에게 참 미안했어요. 개척교회이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데 그곳을 개척하는 목사의 어려운 사정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다 짐작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만 아니고 다섯 개 개척교회를 하면서 젊은 시절이 다 갔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매우 기쁘고 나 때문에 세상에 교회가 그렇게 생겼다고 하는 자부심도 있고 그렇지만 이 가장의 책임을 다 하지 못한 죄책감은 큽니다. 이 한 가정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람은 가족들의 행복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개척교회 목사가 교인이 한 명도 없는 시골 산골에 들어가서 하니 가장의 책임을 다 할 수 있는 길이 없어요. 그래서 고생을 많이 시켰습니다. 개척교회 하러 갈 때 어떨 때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명도 없지만 주일은 돌아옵니다. 그러면 주일 날 또 목사는 예배를 드려야 하잖아요? 그러면 제 아내 하나 앉혀놓고 주일예배를 제가 설교를 해야 합니다. 지금 기억해 보면 그 예배드릴 때 서로 안쳐다보고 예배를 드렸어요. 뭐, 미안한 것도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도 쳐다보기가 힘이 들어요. 제 아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나는 저 쪽을 바

라봐요. 그리고 설교를 하는 거예요. 사실 그렇지, 한 사람 앉혀놓고 “회개하라!” 그러면 “같이 해야 될 것 아니오?” 그러면 할 말이 없지 않아요? 그런 일을 다섯 번이나 내 목회 인생에 거쳐갔으니 참 생각해 보면 구차한 소리지만 ‘굶어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만 해도 참 감사하다!’ 그렇게 생각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이 아버지란 직책도 사표 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 아내도 또 그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목사 아내로서 자녀들을 기르는데 불평도 못하잖아요? ‘이 자리를 내가 사표를 낼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을 거라고 내가 짐작을 합니다.

오늘 성경말씀에는 똑같은 심정의 아버지 한 사람을 예수님이 예화로 소개하고 계십니다. 먼저 오늘 이 유명한 탕자 비유를 설교하시게 된 동기가 15장 1절, 2절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 유대인 사회는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또, 그들의 그 율법 개념으로 죄인이라고 구별해 놓은 사람하고는 자리도 함께 하지 아니하는 흑백 논리의 사회 규범과 문화를 가지고 이렇게 좀 이상하게 살았단 말입니다. 그런 신앙의 의식화가 가장 철저하게 정리된 사람들이 서기관들이요 바리새인들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규정해 놓고는 절대 자리를 함께 하지 아니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사신단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하고 말씀을 하시기를 즐겨하시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고 그래서 그런 광경을 보고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런 사람은 상대도 하지 말고 밥도 같이 먹지 말아야 되는데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이 날마다 저런 사람들만 데리고 …” 이렇게 비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비판을 들으시고 나서 예수님이 이 설교를 하시게 된 거예요.

“내가 설교를 하겠다!” 그래서 유명한 이 탕자 비유 기록 일지에 나타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속에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그리고 우리 육신 어버이의 마음이 잘 조명되어 있다고 판단이 되어서 오늘 같은 날은 이 말씀으로 아버지 마음속에 조명된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속에 조명된 어버이의 마음을 생각하는 그런 날로 우리가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말씀 중에 이 가정은 파탄이 나고 있습니다. 매우 비극적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 이유는 이 집에 작은아들이 매우 당돌한 요청을 아버지에게 했기 때문에 벌어졌습니다. 이 작은아들의 요청의 배경을 살펴보면 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의무적 관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당시 그 사회의 전통 문화는 아들의 권리가 인정되는 인간적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라는 사람의 의무가 뭐냐? 아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불해야 되는 그런 존재가 아버지다! 우리나라도 그런 분위기가 있지만 유대 사람들은 더합니다. 특히 이 아버지의 재산권이라고 하는 것은 이 물질적 능력은 당연히 아들에게 상속되어 지는 것이 문화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입니다. 이 아들은 그러한 현실의 자기 권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지금 아버지에게 가서 자기 권리를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그게 아버지의 의무 아닙니까?” 의무적 관계로 아버지를 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아들에게 두말도 하지 아니하고 그의 요구대로 그의 분깃을 분배하여 주었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자기 분깃을 요구하며 가출하겠다는 그 배후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없는 자유를 누리고 싶은 것입니다. 나의 자유를 가장 많이 방해하고 있는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성인이 된 나를 지금도 아버지가 일찍 일어나라, 늦게 다니지 마라, 돈 함부로 쓰지 말라... 이게 될 말인가? 이제 나는 넉넉히 내 인생에 대해서 내가 책임질 수가 있습니다. 간섭 좀 그만하고 이제 나를 놓아주쇼. 그리고 당연한 의무적 책임이 있는 아버지의 분깃을, 내 몫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렇게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소급해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은 죄 아래로 떨어졌는가?

그 이유는 아주 분명합니다.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라.”는 말에 유혹을 받아서 파렴치한 손을 내밀어서 하나님의 절대 권위에 침범을 했을 때 하나님이 이것만은 안 된다고 에덴에서 인간을 죄 아래로 떨어뜨렸습니다. 하나님 없는 자유를 인간이 누리고 싶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우리를 행복하게 해야 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 의무를 이행하십시오. 나는 이제 하나님의 간섭 없이 살아가고 싶습니다.

요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아주 멋진 Humanity한 말들을 많이 합니다.

“인간은 에덴에서부터 자율권을 시도한 성숙성이 있었다.”

그런 말을 또 합니다.

여성운동가 신학자들은 더 멋진 말들을 합니다.

“인간의 최초의 지성을 깨운 것을 여자다. 선악과를 먹었으니까!”

이런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인간의 모습은 세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인간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는 하나님의 찾음에 발견된 사람들이 여러분과 저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 두 번째, 그 중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인간 구원을 위해서 일을 하자.”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자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 세 번째, 영원히 하나님의 품을 떠나버리는 사람! 이렇게 분류가 됩니다.

지금도 성숙한 인간을 찬양하면서 하나님 없는 자유함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그 길을 끝없이, 끝없이 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작은 아들과 같이 생각을 합니다.

“인간 행복의 의무는 하나님이다! 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어 놓으시고 불행한 고난 속에 인간을 살게 하시느냐? 하나님이라면 당연히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말합니다.

“인간 불행의 모든 책임은 하나님이다! 자신이 없으셨다면 인간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무슨 이유로 나와 모든 인간을 세상에 이렇게 태어나게 하시고 불행한 삶을 살게 하시는가? 그러므로 마땅한 내 행복의 몫을 신이시라면 나에게 주십시오.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 없이 살아가겠습니다.”

이러한 논리가 내 마음속에 정립이 되면 이런 사람은 항상 반항적이고 투쟁적이며 불만이 떠나지 아니하는 그런 생애를 끝없이 살게 됩니다.

두 번째는 맏아들의 태도입니다. 우리는 보통 둘째 아들을 탕자라고 규정을 합니다. 실은 맏아들도 마찬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맏

아들은 아버지를 어떻게 보았는가? 율법적 관계로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맏아들은 지금까지 자신을 오늘 성경말씀에 나온 대로 아버지의 말씀을 한번도 거역하지 않았습니다. 아주 충실한 생활을 하여 왔습니다. 문제는 방탕한 둘째 아들에게 돌아가는 아버지의 혜택 때문에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가 생각하기는 이와 같은 아버지의 처사는 공정성을 잃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그 죄 값을 받아야 되는데 왜 죄 지은 자가 영광을 누려야 되느냐?’ 나같이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 마땅히 영광을 누려야 되는데 지금 이 아버지의 처사는 그 반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을 율법적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집의 재산을 절반이나 탕진하고 온갖 죄를 지은 저런 놈을 들어오지 못하게 내쫓아야지, 오자마자 비단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벌이다니 … 그러면 나도 나가서 작은아들과 똑같이 살다가 돌아와야 될 것이 아닌가?’ 이것이 율법으로 보는 관계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모태 신앙이 많이 있을 것으로 믿어집니다. 뱃 속에서부터 신앙훈련을 받아서 평생을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했고, 죄 안 짓고 살려고 얼마나 이를 악물고 절제 생활을 했는지 눈물겨운 신앙의 인생 여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청소년 시절에 그 시골 산골에서 별로 그 놀이 문화 이런 게 없잖아요? 뭐 해야 윷놀이나 한다던가 별로 놀게 없어요. 그러니까 시골 사람들이 화투를 많이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시골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어른들이 하는 화투 놀이를 많이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 보면 화투 짝 맞추는 거 재미있으니까 아이들하고 막 화투놀이하고, 할게 없으면 팔뚝 맞기 화투를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께서 설교를 하시는데 “화투놀이 하는 것은 죄다! 화투하지 마라!” 설교를 하셨어요. 강하게 하셨어요. 하지만 못하게 하는 것만 아니라 “화투 같은 것은 만지지도 마라!” 그렇게 설교를 하셨어요. 아, 그래서 그 설교를 듣고 ‘아, 그래야 되겠구나! 화투는 나쁜 짓이구나!’ 그렇게 생각을 해서 그 다음부터는 안했어요. 방바닥에 어쩌다 화투가 떨어져 있으면 만지지도 말라고 그러셨으니까 젓가락으로 집어서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 그랬어요.

우리 신앙 노력은 참으로 눈물겨운 신앙 경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많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목회 하는 이 목회자들도 보면 다양합니다. 저같이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청소년 시절에 소명을 받아서 이렇게 목회자가 된 그런 사람도 많이 있지만 중간에 그냥 깡패 출신, 그런 목회자들도 주변에 보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제 주변에도 그런 분들이 여러 분 계십니다. 그러니까 지나간 이야기니까 친구 간에 옛날 그 암흑가에서 놀던 간증들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거 들어보면 저 같은 사람이 생각할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저게 정말인가?’ 온갖 잡스러운 죄에서 밤낮을 보내던 시궁창 같은 그런 과거를 수도 없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분들이 훨씬 능력 있는 목회를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암흑가를 모르고 깨끗하게 살아온 목회자들은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이거 공정하지 않습니다. 아니, 저 같은 사람은 저희 형제 중에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집을 한번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저 사람에게 더 큰 은혜를 베푸시나이까?”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태 신앙인데 세상 죄를 실컷 평생을 짓다가 이제 환갑이 넘어서 예수를 믿는 저 사람을 더 환영하고 복되게 하시나이까? 그러면 나도 일찌감치 암흑가에서 죄를 실컷 짓다가 왔으면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시고 환영해 주실 것 아닙니까?” 이게 율법적으로 보는 관계입니다. 이 맏아들은 아버지를 그렇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탕자가 비단 옷을 입고 금가락지를 끼고 쇠고기를 파티를 받아야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은 그보다 열 배도 더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데, 아버지께서는 염소새끼 하나도 나한테 준 적이 없나이다.” 율법을 갖다가 대는 것입니다. 이 집의 아버지는 지금까지는 작은아들 때문에 고통스럽게 살아왔는데 이제부터는 큰아들 때문에 시달림을 받아야 될 괴로운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의무적이요, 율법적 관계로 아버지를 보았던 이 아들들에 비해서 아버지는 아들들을 어떻게 보았는가? 아버지는 아들들을 사랑의 관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도 아들들과 똑같이 의무적이나 율법적으로 아들들을 본다면 이 아버지는 아무런 책임도 없습니다. 실상 유대인의 문화는 아버지에게 절대 권한이 있습니다. 아들들에게 아무 것도 베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아버지는 너무 지나치게 관대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둘째 아들이 재산의 몫을 달라고 선뜻 떼어주는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돌아왔을 때 그의 마음은 옛날을 하나도 기억치 않고 있습니다. 이게 사랑의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그 동안 동네 사람들이 온갖 소문을 다 가지고 와서 아버지한테 괴로운 소문을 전합니다.

“당신 아들은 이제 거지꼴이 되었소. 내가 보았소. 내가 보니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주워 먹으면서 살고 있더이다. 가지고 나간 돈은 한푼도 없이 창기들에게 다 주어 버렸소.” 그렇게 고통스러운 소문을 다 듣고 있었는데 과연 소문대로 비참하게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얼마나 신속하게 행동을 했는지, 큰아들이 들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했기 때문에 큰아들의 불평을 사게 된 것입니다. 비단 옷과 큰 가락지를 장식했다는 말은 뭡니까? 옛날 부자 집 둘째아들의 권위 회복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아들의 추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원래의 모습대로 회복시켜 놓고 동네 사람들을 급히 초대하여 변함이 없는 권위 있는 아들의 모습을 자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많은 죄를 짓고 돌아왔지만 회개하는 즉시 “과거는 없어졌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때 아버지의 마음은 의무적이거나 율법적이 아닌 사랑 그 자체, 즉 법을 초월하는 관계입니다. 생각 같으면 괘씸 죄를 적용시켜서 한번 분풀이를 해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 아버지 속에 조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다 깨끗하게 청산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의 권위의 회복을 신속히 지켜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대로 하나님이 갚으신다면 누가 하나님 앞에 서리요? 이 불평하는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또 다른 선언을 하고 계십니다.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제 그 아버지는 자기 소유는 모두다 포기한 것입니다.

다만 두 아들이 모두 자기 곁에 있다는 그 하나만이 중요합니다. 그게 뭔가? 십자가입니다. “나는 나를 다 포기했다. 그러나 이 포기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를 사랑하는 자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다면 …” 그 하나만이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고 모두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그것만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이 아버지 속에 조명된 하나님! 오늘 같은 날은 교회가 어버이주일이라고 하는 이름을 내세워서 기념하는 이유가 바로 이 어버이 속에 하나님의 그림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를 보면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째서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

오늘 여기 지금 예배를 드리고 계신 분들은 거의가 다 제가 보니까 어버이 되신 것 같아요. 자녀들은 거의 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학생 시절에 은사 한 분을 잘 만나서 그분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나도 이 다음에 저 목사님과 같이 훌륭하게 살아야 되겠다!’ 하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신 은사님 한 분이 계십니다. 학생 시절에 나에게 Mentor와 그런 같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그는 모범 가장이요, 교회에서 매우 존경받고 제자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그런 목사님이셨는데 항상 겸손하셨어요. 그러니까 자기는 “나는 꼴찌요, 교회에서도 꼴찌 목사요 …”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가정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하나를 제가 기억을 합니다. 새해 첫날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새해 1월 1일이 되었으니까 새해를 맞이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사모님께서 부엌에 나가서 가족들에게 줄 떡국을 끓이고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데 목사님께서 “아, 여보시오! 오늘 같은 날 뭘 그렇게 새벽부터 밥을 하느라고... 다 쉬는 날이라 아이들도 다 집에 있고 그런데 그렇게 고생을 하시오? 이리 올라오시오!” “아, 아침이나 먹고 뭘 해야 될 것 아니에요?” “아, 그러지 말고 오늘은 내가 해라는 대로 좀 해요. 당신 날마다 부엌에서 그러지 말고 오늘은 예쁘게 화장도 좀 하고, 교회 집사님이 해주신 예쁜 한복도 있는데 그것도 입고, 아이들한테 세배도 받고, 또 교인들이 와서 세배할 지도 모르고 … 그렇게 밥 먹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나중에 좀 합시다.” 다른 때하고는 좀 이상하게 자꾸 우기시는 거예요. “아, 나도 이렇게 양복 입고 다 준비하고 있지 않소?” 그래서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사모님이 하셨어요. 그런데 그 사모님은 평소에도 참 미인이세요. 그래서 아주 곱게 차려입고 화장도 예쁘게 하고 또 한복을 입고 나니까 본래 미인이신데 참 돋보인다 말이에요.

“아, 이게 참 좋지 않소?” 그러고 방에 들어와 가지고 당신 저 아랫목에 한번 앉아보라고 방석을 가지고 깔아 앉히고는 그 다음에 아이들을 보고는 “다 일어나라! 너희들 빨리 세수해라! 너희들 세배 안하냐?” “아, 그래야죠!” 그리고는 왔어요. 아들도 엄마 옆에 앉으라고 그러고, 딸들도 저 아래쪽에 앉히고 … 아, 그런데 가족들이 이상한 거예요.

“야! 아버지가 오늘 뭐하시는 거냐?” “몰라 … 아침부터 …” 뭐, 쫘악 앉혀놓고 이 목사님은 저 윗목에 가서 자기 아내와 아들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우시는 거예요. “아니, 왜 이러시는 거예요?” “아니, 그랬나? 내가 너무 좋아서 … 가만히들 있어봐 …” 그러면서 말씀을 이렇게 하셨어요.

“여보시오! 사랑하는 목사의 아내된 당신! 미안하오. 옛날에 당신은 우리 동네에서 제일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처녀시절을 보냈소. 처녀시절 당신의 별명이 부잣집 맏며느리 감이었소. 만약 당신이 그 말대로 그 인물을 가지고, 그 마음을 가지고 부잣집 맏며느리가 되었다든지, 이 사회 가족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기업에 시집을 갔다든지 한다면 당신의 생애는 얼마나 빛이 나고 얼마나 행복했겠소? 이 목회자의 아내가 되어서 평생을 고통스럽게 살았소.” 아들, 딸을 보고는 “사랑하는 아들, 딸아! 미안하다. 만약 너희들이 이 목사의 아들, 딸이 아니고 이 사회에서 실력 있는 그런 아버지의 집에 태어났다면 너희들이 얼마나 행복하고 힘있게 살았겠니? 이 아버지의 아들, 딸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마음 고생을 많이 하고 고통을 받았느냐? 이 아버지는 너희들에게 말할 수 없는 죄인이다. 내 죄를 용서해 줘라.”

그러면서 큰 절로 세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온통 집안이 “아니, 아침부터 왜 이렇게 사람을 울리느냐?”고 막 달라붙어 가지고 온통 울음바다가 된 거예요. “여보시오! 내가 평생을 살면서 목회자의 아내로 불평 한마디 안했소!” 아들, 딸이 “아버지! 아버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목사예요! 우린 그렇게 존경하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왜 이러세요?” 그런데 막 엉겨붙어서 울고 난리 치는데 교회 집사님이 세배를 하러 오신 거예요. 아, 그러니까 그런 일이 벌어졌으니까 ‘아, 이거 목사님 댁에 무슨 불편한 일이...'

여러분! 오늘은 어버이 날입니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그림자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어버이주일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나를 바라보고 있는 수없이 많은 그런 어린 인생들에게 이 아버지와 같이 사랑의 관계로 볼 수 있는 마음을 가질 때 이런 주일을 하나 지키는 보람과 가치가 있는 것이지, 다른 의미가 아니잖아요? 아버지 마음속에 들어있는 하나님, 하나님 마음속에 들어있는 어버이! 이 위대한 생명의 결부를 생각하면서 훌륭한 어버이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 처| 이필재목사(갈보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