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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행18장1-4)

미션(cmc) 2011. 10. 24. 18:19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행18장1-4)

성경본문|사도행전 18장 01절 ~ 4절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요즘 한국교회의 문제 중의 하나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교회는 많고 교인들도 많은데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너무 작다는 것입니다. 지금보다 기독교인의 숫자가 훨씬 적었던 구한말에는 한국교회가 사실상 한국 민족을 이끌어 갔고 사회 변혁을 주도하였습니다. 3.1 만세운동에 대한 여러 평가들이 있지만 제 생각으로는 3.1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것이 그리스도인들이요,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었고 성도들이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지 40년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대표 33인 중에 반정도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즘 전체 인구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났지만 우리 주변의 사회에 아무런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저는 오늘 그 원인 중에 하나로 헌신된 그리스도인들의 부족에 있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헌신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초대교회가 한 시대를 바꾸는 능력을 가진 것은 모이는 숫자나 교회의 크기, 혹은 성도들의 지식 수준이나 부요함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능력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절대적인 헌신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우리는 요즘 사도행전을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로,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어 가는 발자취를 더듬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이 때 쓰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 지역, 또는 한 도시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요즘에 우리 가운데 초대교회와 같은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복음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헌신된 사람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위기는 바로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대한 헌신의 마음을 다시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사도행전 17장을 통해 바울이 아덴에서 복음을 증거한 것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아덴에서 도시에 가득한 우상보고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회당에서 또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당시 철학자들과 논쟁도 했습니다. 아레오바고에서 저 유명한 설교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덴에서는 제자도 세워지지 않았고 교회도 세우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아덴에서의 바울의 전도가 실패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고린도로 와서 복음을 전하였을 때에는 고린도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제자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덴에서의 전도와 고린도에서의 전도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왜 아덴에서는 많은 전도의 열매들이 일어나지 못했고 왜 고린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돌아오고 제자들이 일어나게 되었을까요? 혹시 아덴보다 고린도 지역이 복음 전하기 좋은 조건이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아덴에서는 핍박이 없었지만 고린도 지역에서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또 아덴이 철학의 도시라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도시입니다. 이 고린도는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들의 생활은 매우 부유했지만 도덕적으로는 심히 부패한 도시였습니다. 고린도에는 아프로디테(비너스)라는 신전이 있었고, 그 신전에는 1천명의 매음을 하는 성창(창녀)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탕한 사람을 가리켜 "고린도인 같은 사람"이라 할 만큼 고린도는 성적으로 음란하고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난 것은 바로 복음을 위해 헌신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복음에 헌신한 사람들이 소개되어 집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울과 같은 직업을 가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그리고 자기 집을 교회에 내놓은 디도 유스도, 또 회당장 그리스도보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베뢰아에서 헤어졌던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서 합류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과 함께 헌신된 사람들이 일어날 때 놀라운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바울도 중요하지만 복음에 헌신하여 바울을 도운 일군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우리 시대, 이 민족가운데 가장 필요한 사람이 헌신된 일군들입니다. 일은 하지 않고 자기 이름만 드러내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 묵묵히 민족을 위해 헌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그런 말을 했지요. "지금 우리나라엔 가마를 탄 사람이 필요하지 않고 가마꾼들이 필요하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고린도에서 일어났던 복음의 역사를 체험하려면 이런 헌신된 일군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헌신된 일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그런 헌신된 그리스도인의 모습, 특별히 부부가 함께 헌신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의 헌신은 바울이 유럽과 소아시아 그리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놀라운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이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 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굴라는 본도라는 지역출신입니다. 본도란 흑해 부근의 지역입니다. 그에 비해 브리스길라는 로마의 명문가 출신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라는 이름은 전형적인 로마귀족의 이름입니다. 또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황제입니다. 그는 유대인 말살정책을 폈던 로마의 황제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황제가 되고 난 이후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이 때 수많은 유대인들이 로마에서 쫓겨났고,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 시기에 로마를 떠나 고린도로 오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의 이름이 여섯 번이 나오는데 이들의 이름은 항상 함께 등장합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따로 불리워지지 않았습니다.

초대교회의 한 문서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우리 중에 가장 으뜸이 되는 부부의 이상형이었다"

흥미있는 것은 이 부부에 대한 언급이 여섯 번 기록에서 네 번은 아내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데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는 것은 아마 브리스길라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두드러질 정도로 활동적이었고 헌신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이 여기에 있습니다.

아굴라는 아내 브리스길라가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헌신했습니다. 사실 글라우디오의 유대인 추방령은 유대인 남자에게 내려졌지만 로마의 귀족 출신인 브리스길라는 남편에게 헌신하고 남편을 따라 낯선 도시 고린도로 옵니다. 반면 남편 아굴라는 넒은 마음을 가지고 아내 브리스길라가 마음껏 활동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참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운 축복은 바로 고린도에 와서 사도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의 직업에 텐트 만드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사도 바울도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마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지 고민하다가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 부부를 만나게 되었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정확하게 말하지 않지만 아마 이 때 브리스길라 부부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만났던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로마에서 추방당하여 낯선 도시 고린도에 왔을 때 아마 그들의 심정을 그렇게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삶의 기반을 잃어버린 그들에겐 고린도에서의 삶이 위기로 다가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의 만남은 이들의 삶을 가장 가치있고,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린도로 오기를 잘한 것이지요. 쫓겨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 부부의 생애에 최고의 만남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는 너무 놀랍습니다.

말씀에 헌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과 만남은 이들 부부의 삶의 방향, 목적을 송두리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1년 6개월 정도 고린도에서 사역을 했을 때, 그 때 가장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부부였습니다. 이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갈수록 복음에 자신의 삶을 헌신해야 할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5절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보십시오 고린도에서의 바울은 말씀에 붙잡혀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 고전2:1-5에 보면 당시 바울이 아덴에서 고린도로 갈 때에 어떤 심정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 하였나니"

아마 바울은 아덴에서의 실패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고린도로 오면서 오직 예수만을 말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또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면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보십시오 이 성경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를 전도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이런 것들이 바울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전달된 첫 번째 사람들이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였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바울에게서 말씀으로 양육 받으면서 그들의 가슴은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찼습니다. 모든 것을 복음중심, 그리스도 중심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저는 이 부분이 참 좋습니다. 복음에 불타 올랐던 바울의 심정이 그대로 이들 부부에게 옮겨가고, 그리스도를 향한 바울의 헌신된 마음이 이들 부부의 가슴에 그대로 전달되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영적 전이"라고 말합니다. 영적 분위기가 그대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기도하게 되고, 헌신된 사람을 만나게 되면 함께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 부부가 얼마나 복음에 충격을 받았는지 사도행전18:24이하에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아볼로라는 인물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당시 학문과 성경에 능한 자였습니다. 언변도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브리스길라 부부가 아볼로의 설교를 듣기 되었습니다. 그의 설교는 논리적이었고 성경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분명히 예수에 대해 설교는 했지만 여전히 요한의 세례, 즉 윤리적인 설교에 그치고 맙니다. 이들 부부는 아볼로의 설교에 가장 중요한 복음이 빠졌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냥 듣기 좋은 소리에 "아멘"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없는 메시지,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선포되지 못하는 부분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아볼로의 설교에서 복음이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들 부부가 성경을 얼마나 정확하게 보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부분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아볼로를 초대하고 함께 교제를 하면서 그에게 "하나님의 도", 즉 정확한 복음에 대해 더 자세히 풀어 설명해 줍니다. 결국 이들 부분의 영향으로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의 좋은 설교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설교자는 아니었지만 평신도로서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먼저 헌신해야 할 곳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훈련 받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한다는 것은 말씀으로 양육받는 일, 예배에의 헌신, 기도에의 헌신, 제자훈련 등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헌신을 통해 좋은 믿음의 일군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말씀으로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직분을 수여한 일이 없었습니다. 말씀으로 훈련받고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들이 세상에 영향력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영향력을 잃어 가는 것은 말씀에 헌신한 사람들이 줄어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도전하고 싶습니다. 주일 아침에 교회 와서 드리는 예배 외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깊이 알기 위해, 살아 계신 하나님을 좀 더 깊이 체험하기 위해 1년이고 2년이고 시간을 바쳐 말씀을 배우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한 적이 있습니까?

교회와 영적 지도자에 대해 헌신하십시오

브리스길라 부부의 또 다른 헌신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 특히 바울에 대한 헌신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꿈이 있습니다. 교회는 이 꿈을 이루기 위해 세워졌고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교회에 헌신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헌신하는 것이었고 영적 지도자들에게 헌신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것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는 말씀에 헌신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복음이 증거되는 일에, 그리고 주님의 사역자들을 철저히 섬겨야 한다는 의식이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바울을 도와 로마가 복음화 되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게 됩니다.

이들이 어느 정도 헌신했는지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18:18 이하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가게 되는데, 이 때 브리스길라 부부가 함께 동행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단순한 동행이 아닙니다. 아예 이사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한다고 했을 때 이들 부부는 자청하고 나선 것이지요. 그래서 고린도에서의 사업을 정리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기의 사업도 정리할 수 있는 이런 용기와 결단을 가졌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저는 이사하는 교우들 중에 "제가 이사하는 것은 그 지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섭니다" 아니면 "제가 이사하는 것은 교회에 좀 더 헌신하기 위해섭니다." 라고 신앙생활을 위해 이사한다는 분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습니다. 또 직장을 선택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앙생활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를 생각하면서 직장을 선택하는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직장은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직장이 주님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해 자기들의 삶의 현장까지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주님께 헌신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의 헌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고전16:19에 보면 바울이 로마에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아시아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 라고 기록합니다.

보십시오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브리스길라 부부도 로마에 있었습니다. 이 때도 그들의 집에 교회가 있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이들 부부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죽고 나자 다시 바울과 함께 로마로 온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또 롬16:3에 보면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4절에 계속 말하기를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이들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아마 이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이여 당신을 위해 우리가 목슴까지도 내어놓겠습니다. 이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교회 안에 브리스길라 부부와 같이 주의 종들에 대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그런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감사한 일지요. 제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복음 증거하는 일을 위해 미국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포기한 청년도 있었고, 오직 교회에 헌신하기 위해 직장을 옮긴 청년도 있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교회 예배에 참석한 어떤 젊은 부부는 목사님과 함께 평생 선교하는 일에 헌신하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돈버는 이유가 바로 선교하는 것이라고, "돈 벌어 선교비는 왕창 왕창 댈 테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당당하게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에 삶을 드릴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뒤에 있었던 이런 평신도들의 절대적인 헌신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헌신의 장애물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에 헌신하려할 때 많은 장애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장애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 헌신의 장애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기 중심적인 자세입니다.

어떤 한 곳에 헌신하려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주님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헌신의 자리에 서지 못하는 것은 자기계획, 자기 방법, 자기 생각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버릴 정도로 그리스도가 귀하고 자기 계획을 버릴 정도로 교회와 주의 종이 귀하게 보일 때 헌신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눅9:2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국에 어떤 농부 부부가 있었습니다. 두 사람 다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느 날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두 마리를 낳은 것입니다. 흔치 않는 일이지요. 그래서 두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중의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기로 했습니다. 아내가 묻습니다."두 마리 중 어느 것을 드리지요?" 잠시 생각하던 남편은 "나중에 크면 결정하십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몇 개월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사색이 되어 부엌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여보 무슨 일이 있었어요?"라고 물었지요 그러자 남편은 "방금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단 말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내가 "아니 어느 것이 하나님의 송아지인지 정해놓지 않았잖아요!" 라고 반문하자 남편은 "아니요 나는 항상 마음속으로 흰 놈이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생각하고 있었소 그런데 바로 그 놈이 죽었단 말이요!"

이게 사람들의 마음이지요. 늘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마음속에는 욕심과 탐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할 마음이 없습니다. 자기 이익에 빠릅니다. 손익에 대한 계산 때문에 헌신하기를 주저합니다. 분명한 것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는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 헌신에 장애 되는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한 염려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헌신에 주저하는 이유는 염려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합니다.

동안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언젠가 "신앙과 돈"이라는 주제로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 설교가 한국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 때 나온 단어가 "청부" 즉 깨끗한 부자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분은 설교에서 아주 강한 감동을 받은 것이 바로 십일조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100만원 십일조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보다 정확하게 십일조 하는 사람 100명이 더 필요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습니다.

많은 십일조 하는 사람들도 교회에 중요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것은 제대로, 정확하게 믿음으로 십일조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이 대강 십일조 합니다. 월정헌금처럼 십일조 합니다. 작년에도 십일조가 10만원이었고 올해도 10만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5년 전에도 이분의 십일조는 10만원이었습니다. 저는 이해가 안됩니다. 물질에 대해 정직하지 못한 것이지요. 정확하게 십일조 드릴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 헌신에 장애 되는 세 번째 부분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습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부부사이의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이 식어가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사랑이 불타오를 때는 아무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헌신자가 되기 위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사랑의 회복이 사명의 회복이며 헌신의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시험에 빠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함으로 헌신된 사람은 사단이 흔들 수 없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우리교회에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좋은 목사도 필요하고 직분자도 필요하고 은사 있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더 필요한 사람은 헌신된 사람입니다.

예배에 헌신한 사람, 기도에 헌신한 사람, 그리고 교회와 교회 지도자에게 헌신된 사람들을 통해 교회의 역사는 기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이 이 시대 헌신된 자로 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 처| 조재진목사(용두동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