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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는 삶의 길잡이/(잠22장6, 딤후3장16)

미션(cmc) 2011. 10. 26. 09:50

성서는 삶의 길잡이(잠22장6, 딤후3장16)

성경보눈/잠언22:6, 디모데후서 3:16-17

잠언22: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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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16-17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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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 가는 가을 잘 여문 곡식은 속이 알차듯 사람도 사람다우려면 양식이 풍부해야 한다. 마음이 알찬 사람은 말과 행동에 거리낌이 없다. 성서에는 삶의 지혜가 녹아있다. 성서는 펼치기만 해도 이로움이 있다. 그래서 개권유익(開卷有益)이라고 했다. 성서에는 가르침이 있고 넉넉한 마음의 여유가 있다. 그래서 선현들은 성서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고 해서 수불석권(手不釋卷)이라고 했다. 그 성서에는 미래로 가는 길이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역사에게서 묻고 현재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또는 미래를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문제는 역사를 알고 역사의 의미와 본질을 찾고자 하는 자이다.

이는 자기 삶의 의미를 묻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문제삼는 사람이라 하겠다. 사람들이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역사상의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이나 흥미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에 자취를 남긴 사람들의 인간관과 역사관에서 인간과 자아에의 통찰을 깊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는 인간에 의해서 이룩된다. 하나님은 그 시대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 그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부르신다(召命)

. 그리고 그에게 사명을 맡기심을 우리는 계약공동체 속에서 자명하게 보아왔다. 성서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예수의 생애 그리고 사도들의 활동을 기록한 문헌이 많다. 예수의 생애로 말하면 네 복음서에 다루어지고 있다. 즉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했으며 최후에 십자가에 달려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줄거리로 되어 있다. 성서를 읽는 방법에 우리들의 관심은 성서가 우리들의 현실을 현존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가, 그리고 우리들의 삶 우리들의 영혼에 관해서 무엇이 진리인가를 듣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는 전통적인 구약성서의 인간관을 간직하고 창조의 질서에 따라 사는 인간과 현실의 질서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인간을 준별(俊別)하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연민의 정으로서 새로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가르쳤다. 아니 예수 자신이 파란 많은 인간과 사귐을 가지면서 새로운 삶을 함께 살아갔던 것이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다. 창세기의 기자는 인간이 하나님의 모습으로 지으심을 받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해했고 따라서 어디까지나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했고 인간과 사귐을 갖고 그 품안에서 모든 자유를 부여했고, 만물을 지배하도록 위임하셨다

. 그 때문에 예수도 또한 인간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그런데 삶의 현장에서 인간은 어떤가? 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위선과 거만으로서 하나님과 적대하고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것처럼 교만해 지는가 하면 때로는 이 세상의 지배와 부귀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은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죄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게 된다. 예수는 이 비참한 인간의 현실을 가난한 자, 죄지은 자, 세리, 귀신들린 자, 병자, 사회의 밑바닥에 억눌린 민중에게서만 본 것이 아니라 부자, 바리새파 사람들, 율법학자 그리고 학자들 속에서도 찾아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있다는 의인일수록 오히려 중병에 걸린 자 임을 상기시킨다.

 

인간의 문제는 육체만의 문제거나 혹은 마음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 존재인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간관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군중들이 예수의 가족이 찾아온 것을 알렸을 때 예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이 누구냐?" 그리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라고 말하였다. 이것의 의미는 참다운 인간관계가 성립되고 새로운 삶의 참된 존재 방식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의 새로운 사귐과 새로운 공동체를 말함이다. 여기서 예수는 자신의 존재 방식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형과 새로운 삶의 길을 보여준다.

 

사람은 무엇을 소유하는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모든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나 자신은 어떻게 되는가? 무엇이 삶의 만족이며 어디에 삶의 목적이 있는가? 라는 물음을 물을 때 우리는 보다 중대한 내용을 차지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자살을 하려는 사람은 이 세상의 물건이 필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산다고 하는 혹은 살겠다는 의욕이 있을 때 모든 물건은 필요해지지만, 생명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에게는 돈이나 지위나 명예가 아무 소용도 없게된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과 자신의 인격의 근본적인 회의와 질문을 던질 때 찾아오는 불안과 정신적 고통은 더욱 심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들이 이러한 정신적 과제, 그 과제를 해결 짓지 못한데서 오는 불안을 소유나 물질적인 것에 비하여 인간의 문제에서 오는 불안이라 부른다면 이러한 인간학적 불안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가 된다. 모든 예술도 그 해명을 위하여 나타났으며 온갖 학문과 사상도 그 해결을 위하여 있었는가 하면 예로부터 역사에 존경받는 모든 인물들이 이 인간학적 불안으로부터 어떻게 구출될 수 있을까 하는데 그 사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키에르케고오르를 비롯한 오늘의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의 중심불안을 문제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질문에서 오는 불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장차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귀착한다. 만일 이러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문제들은 그 자체가 의의를 잃을 것이며 인생의 깊은 불안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별로 큰 뜻을 갖지 않는다. 그들의 대부분은 정신적 깊이가 없는 자연인이며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는데 온갖 의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 있는 삶을 추수릴 줄 아는 사람은 값있는 문제를 가진 사람이며 값있는 문제란 모든 인간들이 그 깊이와 영원한데서 느끼는 정신적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얻기 위하여 꾸준히 노력해 보지만 어느 누구도 그 문제에 근본적인 해결을 얻는 사람은 없다. 왜 그럴까? 이러한 문제는 인간의 인간 됨의 문제이며 모든 인간이 다같이 생각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옛날 그리스에 재미있는 신화가 있다.

그 신화는 인간의 일생은 불안의 일생이며 우리들의 삶은 끝없는 불안의 연속임을 알려주는 인간의 운명을 비유한 신화이다. 아득히 먼 옛날 이 세상에는 신들만이 살고 있었다. 그 중에 '불안'이라는 한 신이 사람을 한번 만들어 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재료가 없으니까 땅을 차지하고 있는 신에게로 가서 흙을 좀 빌렸다. 그리고는 그 흙을 빚어서 사람을 만들었다. 사람의 형성은 되었지만 생명과 활동을 못하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신은 다시 영혼을 맡아 취급하는 신에게로 가서 생명과 호흡을 빌어 인간을 완성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때까지 별로 말이 없던 땅을 차지한 신과 영혼을 맡은 신들이 불안이라는 신에게 그 만들어진 사람을 각각 자기가 갖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안이라는 신은 다 되어진 사람을 보니까 욕심이 생겨났다. 할 수 없이 세 신은 가장 높은 신에게 재판을 청했다. 누가 이 사람을 소유할 것인가에 대한 재판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을 끝까지 다 들은 재판관은 "지금 너희들이 서로 이 사람을 가지겠다고 싸우지만 아직은 그대로 참고 있어라, 이 다음에 이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흙의 신' 너는 이 사람의 몸뚱이를 도로 찾아 가지며, '영혼의 신' 너는 그 영혼을 되찾아 가라, 그러나 이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은 '불안의 신' 네가 차지하거라"고 판결하였다. 그 때부터 오늘까지 인간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혼은 영계로 돌아가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불안 속에 머물게 되었다고 전래된다. 이것은 그리스의 신화이다.

 

누가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이러한 인간적인 불안을 해결 지어 주며 모든 근본적인 회의에서 풀어 줄 수 있는 책임을 맡은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예술이 그 문제를 취급하였으나 설명하는데 그쳤고, 철학이 그 뜻을 계승하였으나 문제의 해결을 주지 못했다. 기독교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요소로 믿음 곧 신앙을 제시한다. 그러나 믿는다는 일, 즉 신앙은 기독교인의 문제인 동시에 지식의 과제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기독교가 지식을 무시하거나 도덕을 배척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상과 학문, 자유와 도덕을 초월하는 신앙은 어떻게 주어지는 것일까? 우리들의 지성 감정 의지를 종합한 전인격이 성서적 실재 즉 신과의 인격적 접촉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이다. 신비로운 체험, 전생명을 바쳐 얻은 생활의 결과가 신앙의 바탕, 믿음의 근원이 된다고 믿고 있다. 옛날부터 신앙인들이 생활과 체험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게 보여 준 것이 바로 성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인간들이 지켜야 할 떳떳한 교훈과 진리이기 때문에 그 교훈과 말씀에 따라 절대로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나가는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여 주시는가에 따라 얻는 체험과 확실한 증거가 신앙의 내용이 되며 그 뜻을 이웃과 사회에 나타나게 한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어지도록 인간에게 믿음과 목적이 되게 하는 말씀이 곧 성서이다.

 

사도 바울은 가르쳐주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로마 10:17). 이와 같이 성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켜 새 사람이 되게 한다. 그리고 성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항상 창조적이고 기여적인 삶을 갖도록 힘이 있으며 인생 행로에 새소망이 되어준다. 자나깨나 앉으나 서나 늘 성서 말씀을 생각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말씀이 그 마음에 가득 차서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하나님의 사람이요, 천국의 백성이다. 성서는 읽을 수록 그 마음이 맑아지고 거룩하여지고 높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지고 지혜로워지고 의로워지고 덕스러워져서 하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 모든 신앙 인물들은 성서는 꿀 송이 같이 달고 음식같이 탐하여 애독하고 탐독한 사람들이다. 기도의 사람 조지 뮬러는 매일 13장씩 1년에 신구약을 네 번씩 읽었고 그의 91회 생일기념에 이렇게 간증했다. "나는 성서를 150회 이상 읽었는데 어느 때나 큰 기쁨으로 읽었고 다 읽으면 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영국 왕 조지 5세는 전 국민의 신망을 받는 왕인데 그는 즉위 5년 기념식에서 말하기를

"나는 어머니 알렉산드리아 여왕의 교훈과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55년 간 매일 성경 한 장씩 읽었다"고 말했고, 미국 제2대 대통령 애덤스는 자기의 경험을 말하며 "성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누구든지 읽어야 할 책이요, 한 두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라 분주할지라도 매일 한 장씩 읽어야 할 책이다"고 했고, 길선주 목사가 감옥에서 묵시록을 3만 독해서 외웠다는 말은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는 구약 30회 신약 100회 요한1서 500회 읽었다고 한다. 이렇게 성서는 많은 위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러므로 성서를 읽지 않고는 신앙뿐만 아니라 근대 문명전반을 이해하지 못하며, 무식함을 면치 못한다. 단테의 "신곡", 밀톤의 "실낙원", 괴테의 "파우스트",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셰익스피어의 모든 작품 등 최걸작의 작품들은 다 성서에 그 근거를 둔 것이며, 성서 지식이 없이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그 외 음악가, 화가, 조각가 등의 예술작품이 다 성서를 바탕으로 한 걸작들임을 재삼 음미하고 정리해야 한다.

 

성서는 본질적으로 증거의 책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한편으로 성서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일깨워진 예언자와 사도들의 마음들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행위라고 인식한 사건들에 대한 인간의 증언들을 포함하고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성서는 성령이 우리의 심령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방법이 된다.

이와 같이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면서 사람의 말인데 이 두 가지가 모두 심각하게 받아 들여져야 한다. 성서는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즉 성서만이 그에 대한 유일한 권위 있는 역사적 기록을 갖고 있는 그리스도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엄격하게 신학적인 의미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나 이차적인 의미로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으로서의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그의 "의" 즉, "뜻"이 이루어진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위해 기도하라고 그리스도를 통해 가르쳐 주시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해 온 숱한 일꾼들을 예로 보여 주면서 우리를 훈련시키신다. 자유를 잃고 인권을 유린당한 애굽 땅을 벗어나 약속의 땅으로 가자고 용감하게 나셨던 모세 불의와 퇴폐의 땅을 벗어나 의와 사랑의 밝은 땅으로 가자고 간곡하게 외쳤던 아모스와 호세아 그리고 죄와 죽음 불안과 공포의 땅을 벗어나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따라 나가자고 외친 희망과 사랑의 사도 요한 등을 보이면서 성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시키시고 훈련시키시고 계신다. 여기에 성서가 우리를 강하게 끄는 힘이 있으며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로 읽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개인이나 가정 그리고 국가가 잘되려면 경제부흥이 되어야 하고, 경제부흥이 되려면 정치가 안정되어야 하며 정치가 안정되려면 사회질서가 잘되어야 하고, 사회질서가 잘되려면 도덕적 의식이 있어야 하고 도덕적 의식을 가지려면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 삶의 질이 높아지려면 성서가 그 삶의 바탕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성서를 우리는 생애의 길잡이로 삼아야 한다.

설교: 배성산 목사(샘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