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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적 스트레스 해소법/(왕상19:5)

미션(cmc) 2011. 10. 26. 19:16

성서적 스트레스 해소법(왕상19:5)

성경본문/열왕기상 19:5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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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제목을 성서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라 했는데 저도 다른 사람의 설교를 많이 읽습니다만, 이런 설교제목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 누가 도용하게 되면 아마 로얄티를 받아야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다 스트레스를 해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오시지 못한 분들은 스트레스 해소에 지장이 있을 겁니다.

저희 현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해결해야 할 여러 가지 중요하고도 신간한 문제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게되면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빈부의 문제라든지, 인권, 불평등, 인종문제, 성차별, 그리고 전쟁등 이러한 것들이 사회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들이고 개인적으로 보면 경제생활, 인간관계, 자녀교육, 자기개발 우리의 건강문제, 이런 것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싫어하면서도 반드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곧 소위 우리가 말하는 스트레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설교를 준비하려고 하니까 학문적인 정의가 좀 필요한 것 같아요. 갑자기 심리학책을 찾을 수도 없고..그래서 제가 뒷집에 계신 김종옥 박사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김 박사님, 스트레스라는 것을 무어라고 정의하십니까?" 물었더니, 가만히 기다리라고, 내가 책을 좀 찾아보겠다고 해서, 책을 보지말고 머리에 들어가 있는 정의로 이야기해달라고 했더니 스트레스라고 하는 것은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외적인 조건을 내적으로 소화하지 못할 때 생기는 심리 적인 불안이다. 외적인 조건을 내적으로 소화하지 못할 때 생기는 심리적인 불안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내가 볼 때 정확한 것 같아서 인정을 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살아갈 때에 날마다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나 자신이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문제가 크고 작은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하고 결국은 나 자신의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서 스트레스가 생길 수도 있고 안 생길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이에 스트레스는 오늘날 모든 질병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인간관계를 파괴하는 아주 강한 힘이 되기도 합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은 한국 남성들의 1/3이 스트레스로 인해서 정신질환에 걸린 적이 있다고 보고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긴 연휴를 맞이했는데, 3300만 명이 대인구가 이동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즐거워야 할 설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고 있습니다. 방송을 통해서 보면 교통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사람들, 친척이나 혹은 윗사람들에게 선물해야 할 스트레스를 갖은 사람들도 있고 이런 문제뿐만 아니고 설을 준비하는 많은 주부들이 90%가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근데 스트레스 받는 자기들의 부인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스트레스 받는 남편들이 72%가 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거 심각해요. 설을 준비하는 부인들이 90%가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 스트레스를 받은 부인들을 어떻게 하기 위해서 72%의 남편들이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거죠.

 

결국은, 오늘 우리가 이런 스트레스를 당하면서 살아가는 현장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적인 생활과 문화적인 전통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스트레스를 날마다 해소해 나가면서 건강한 인격으로 성숙한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우리가 창조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 네 구절로 그 해법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열왕기상의 말씀의 배경은 이런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아합왕 때 심한 가뭄이 왔습니다. 왕비 이세벨은 이방의 나라인 시돈의 공주였는데 이 시돈은 바알을 섬기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이 가뭄을 해결하기 위해서 야훼의 예언자인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 약 한 450명이 각기 자기들의 신을 향해서 비가 내리도록 기우제를 드리는 경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알의 예언자들이 제물을 놓고 하늘은 향해서 열심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기우제를 드렸는데, 제물은 불에 타지 아니하고 그냥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제 엘리야 차례인데 엘리야는 제물에 물을 두서너 번 붓고 하늘을 향해서 기도했더니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모든 제물이 다 타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 엘리야가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 엘리야는 그 백성들을 시켜서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모두 끌고 가서 전부다 죽이라고 해서 처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을 안 이세벨이 이제 엘리야를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알고 엘리야는 도망을 쳐서 광야로 나아가서 상수리나무 아래 누워서 하나님에게

나의 생명을 거두어가 주십시오,

더 이상 무서워 살수가 없고 더 이상 살 의미도 없는 것 같다고 이마 그런 기도를 드렸겠지요. 그때 잠이 들었는데,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두 번씩이나 깨웠습니다.

"엘리야야 일어나서 음식을 좀 먹고 물도 좀 마셔라." 이렇게 해서 그는 그것을 먹고 마셔서 피곤과 불안에서 이제 생기와 평안함을 되찾게 되고, 자기가 목표로 하는 거룩한 산, 호렙 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나라와 민족의 기근을 해결해 가기 위해 바알 종교와 싸우면서도 그는 인간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스트레스로 인해 지치고 더 이상 삶의 의혹을 갖지 못하는 그런 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그를 살리려고 천사를 통해서 음식을 보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다시 소생해서 자기 귀한 사명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열심히 감당하게 되다 보면은 우리가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그런 문제에 닥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피곤에 지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밥맛을 잃게 되고 음식을 멀리할 수도 있습니다. 소화불량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이라는 것은 우리에 생각에 따라서 먹고 안 먹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고 우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주시는 생명의 양식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한 미국 대사로 지낸 제임스 레이니 박사가 1979년 내게 에모리 대학에 갔을 때에 그 대학의 총장이었습니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한 10년 봉직하다가 피부병 관계로 인해서 도저히 한국의 기후가 맞지 않아서 다시 미국에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한국과 한국사람을 굉장히 사랑해요. 저도 사랑 받는 사람가운데 하나입니다만,

어느 날 저녁 제임스 레이니 총장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이목사 집에 밥과 김치가 있어요?"라고 ,대답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하니, 그래도 대학총장인데 밥과 김치만으로는 안될 것 같아 제가 조금 불고기를 재웠습니다. 전화 한지 10분만에 자전거를 타고 왔어요. 상당히 소탈하신 분이거든요.

그분이 사시던 총장공관은 무척 훌륭한 맨션이었는데, 우리가 살던 아파트와는 10분 거리였거든요. 그래서 밥과 김치와 불고기를 대접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실컷 드시고, 배를 두드리면서 아~속이 시원하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아까 말씀해드린 것처럼 그 날 에모리 대학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에모리 대학 이사회가 있었습니다. 그 이사회의 이사 가운데에는 유명한 코카콜라 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사회에서 현금으로 100억불을 기부했습니다. 이100억 이라는 돈은 미국대학 역사상 현금100억불은 최고의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무진장한 돈을 받은 만큼 스트레스도 그만큼 쌓인 것입니다. 그 날 우리 집에 와서 김치와 밥과 불고기를 먹고 배를 두드리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면서 기쁨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좋아하는 음식이나 고향의 음식, 어머님이 손수 지어주신 음식을 먹을 때, 신선함과 생기를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음식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때, 그것이 어떤 음식이건 간에 맛있고, 즐겁고 우리의 온 몸에 피로를 풀어주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약이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예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어린아이의 손으로부터 받아들고, 하늘을 향하여 축원하고 나누어줄 때, 그 사 오천 명 모이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고 생명을 되찾는 변화가 온 것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날마다의 양식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먹을 때에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고 삶의 의욕과 활력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무엘하6장14절의 배경은 이런 것입니다.

다윗 왕이 브레셋에 빼앗겼던 법궤 곧 하나님을 모시는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도중에 수레를 끌던 소가 갑자기 날뛰자 수레를 몰던 아비나답의 아들 우짜가 흔들리는 법궤를 보호하고자 손으로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더러운 손으로 거룩한 법궤를 만졌다고 진노하신 하나님은 우짜를 그 자리에서 즉사 시켰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너무 무서워 가까이 있는 오베데덤의 집으로 법궤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혼자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이 법궤가 있는 오베데덤의 집에 축복을 많이 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이 너무 기뻐서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고 오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법궤 앞에 살찐 송아지를 제물로 바치고, 그 앞에서 모시로 만든 메봇을 입고 그 앞에서 둥실둥실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모시로 만든 메봇이라는 것은 제사 때 걸치는 앞치마 같은 것인데, 다윗이 춤을 추고있는 것을 왕비인 사울의 딸 미갈이 보고,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체통이 참 볼만하더군요, 건달처럼 신하들의 여편네 앞에서 몸을 온통 들어내시다니".고 비웃었습니다.

이에 다윗은 "야훼께서 당신의 아버지 사울과 모든 가족을 제쳐 버리고 나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으니, 나는 하나님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요, 앞으로는 이보다 더 신나게 춤을 출 것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부터는 미갈과는 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이, 하나님을 모시는 법궤를 수도 이스라엘로 모실 때에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왕의 체통과 백성의 눈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마치 어린아이들이 부모앞에서 재롱떨 듯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에봇 하나만 걸친 알몸으로 덩실덩실 춤을 추었던 것이 아마 다윗의 마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충천한 자기 기쁨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지 못했던 자기의 죄의식을 다 털어 버릴 수 있었고 국사에 시달렸던 스트레스를 승화시키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는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오늘날 여러 가지 스포츠와 춤이 개발되고, 시설도 많아서 현대인들의 스트레스를 풀기에 좋은 시대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 마음에 깊이 쌓여있는 여러 가지 열등감과 불안감 혹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 느끼는 갈등이나 죄책감에서 비롯되는 스트레스까지 모두 해소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깊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현존에서 적나라한 모습, 솔직하고 순진한 마음으로 기쁨의 춤을 추는 그것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전통적이고 유교적인 체면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희노애락을 솔직히 표현하는 것이 경솔하고 상스럽다는 느낌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것보다는 억제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한국 여성들에게 한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체면문화의 노예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 자체가 율법주의 적인 체면문화에서 자유한 것 이였고, 실상 그는 하나님의 현존에서 춤을 추면서 살아가신 모델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또 삶을 돌보시며 풍성하게 하신다는 그 믿음 안에 있을 때에 우리의 날마다의 삶은 덩실거리는 춤의 연속이고 모든 불안은 자취를 감추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신약성서 에베소4장26절에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 들이 지켜야할 여러 가지 생활 법칙 가운데 하나로 화를 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인간의 약점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은 남이 비도덕적인 일을 할 때나 비상식적인 행동을 할 때, 혹은 나 자신을 향해 모독하거나, 불이익을 줄 때,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화를 낸다고 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에 오래 품고 있거나 그 일로 인해 미워하고 마음에 갈등을 느끼고 복수심을 갖게 되면 죄가 되기 때문에 화를 속히 풀라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그것은 우리 자신을 해치는 질병의 원인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부부 상담 원칙 가운데 부부가 서로 다투면, 그 날이 지나기 전에 서로 풀라고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서로 이해하려 노력하고, 관용하고 용서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화해의 길을 가급적 빨리 찾지 않으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쌓이고 쌓여서 자신의 육신 적이고 정신적인 건강을 해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겪는 사회문제나 인간 관계에서도 비롯되는 모든 스트레스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인 무교에서 대부분의 무당이 여성입니다. 이에 비해 남자 무당인 박수는 극소수인데, 그 이유의 하나는 전통적이고 지배적인 남성문화에 눌린 여성들이 남성문화에 보이지 않게 저항하는데, 직접적으로 저항하지 못하고 저항의 탈출구로 무당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최근 저는 카톨릭 수녀가 쓴 기독교와 무교의 연구라는 책을 한 절반쯤 읽었는데, 거기에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당에게 찾아오는 단골도 대부분이 여성들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대부분의 여성들이 한을 많이 가지고 있고 한을 풀어야 살아갈 수 있는 여건 속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당에게 가서 위로를 받고 축복을 받고 시원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발전하려면 남성지배문화가 남녀 공동 문화로 바뀌지 않으면 안됩니다. 남녀가 함께 인권과 사회진출 기회와 대등한 대우를 받는 사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부의 화가 쌓이면 온 가족이 불안해 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화가 쌓이면 그 사회가 마치 파선되는 배처럼 침몰하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 진출은 OECD국가 가운데 맨 꼴찌입니다. 개인의 스트레스가 사회적인 스트레스가 되는 것입니다.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도 말로써 순리를 해결하지 못하고, 멱살을 잡고 서로 싸우려 대어드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누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월드컵은 다가오는 데 손님을 맞을 우리 주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화난 사람의 얼굴을 하고 시무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 증후군입니다. 사회적인 질병입니다.

우리 마음이 편해야 얼굴이 펴지고 웃음이 생길텐데 화가 마음을 지배하니까 그렇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임종은 하게 되어 카톨릭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이 노인 은 다른 사람의 죄는 잘 알고 있는데 자신의 죄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늘 기도 했습니까?"

"예"

"무슨 기도를 했습니까?"

"주의 기도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신부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기도문을 했느냐,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사하였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은 "예, 모든 사람의 죄는 다 사했는데 김아무개의 죄는 사하지 못했습니다" 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부가 "이제 죽으면 죄를 용서할 기회가 전혀 없으므로 지금 용서 해 주셔야 됩니다" 고 하자,

"예, 제가 이제 죽으면 용서하겠고, 다시 살아나면 용서하지 않겠다" 고 그렇게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노인은 죽을 때까지 김 아무개를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스트레스가 쌓인 채 세상을 떠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 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남을 용서한다면, 자기도 용서받을 수 있고 우리 마음의 무거운 짐을 벗어놓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마태복음6장34절의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말씀인데

예수께서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말라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 겪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그 전제조건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주시니 염려할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의 생활을 보면 내일을 위해 걱정한 적은 있는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공생활 이전에 가족을 부양할 때에는 어떠했는지 기록이 없으므로 알 수는 없지마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그는 의식주의 문제, 대인관계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날마다 최선을 다하여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 삶의 고백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삶이 과거 현재 미래 라 하는 시간적인 범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과거의 좋았던 기억도 또 쓰라린 실패의 기억도 지금 현재의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예감이 또한 우리를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가면서도 과거와 미래 때문에 상당히 삶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에 더하여 우리는 날마다 산더미처럼 밀린 숙제를 풀어야하는 상당히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인 부담을 안고 있습니다. 실상 그 날의 괴로움 자체만으로도 넘쳐나는데 우리의 과거와 미래의 스트레스 때문에 오늘의 문제를 해결할 시간도 마음의 여유도 갖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는 시간의 동물이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의 범주에 따라서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삶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오늘뿐입니다.

노인은 과거의 추억에 살고

젊은이들은 미래의 희망에 산다고들 하지만,

모든 인간들은 젊은이나 늙은이나 다같이 오늘만 살 수 있는 기회가,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유령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만이 우리가 생각하고 결단하고 행동하고 책임질 수 있는 시간이고 유일한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살아갈 때 과거를 치유할 수 있고 미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오늘 우리가 책임 있게 살아갈 때 내일을 염려하고 어제를 염려하지 아니하고 오늘을 염려하며 오늘을 성실하게 책임 있게 살아갈 때 과거를 다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미래의 불확실함이 확실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관심과 노력을 오늘에 집중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최선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성실함을 통해서 우리는 자기만족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마음에 가득 넘쳐서 우리의 육체적인 피로와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해소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

 

인생은 하루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간단한 시입니다.

아침에 깨어나 세상을 바라보며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 마음으로 하루 동안 살 수 있기를 잠들기 전 세상을 떠나며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 때 그 마음으로 다음 날 태어날 수 있기를..

인생은 결코 긴 것이 아닙니다. 하루 하루가 바로 인생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하고 있습니까?

계속 쌓아둡니까?

아니면 우리의 무의식 속으로 집어넣고 잊어버리고 마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생각한 성서의 4가지 말씀은 그 해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현대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주신 음식을 감사함으로 먹고 생기를 얻어라.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즐거운 춤을 춰라. 화를 품지 말고 그날그날 해결하라. 내일을 위해서 염려하지 말고 오늘에 충실해라.

이런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엄습해오는 복잡하고 어려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설교: 이계준목사 (신반포감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