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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마1장18-21)

미션(cmc) 2011. 10. 26. 19:20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마1장18-21)

성경본문/마태복음 1:18-25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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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성대로 창조한 것은 인간과 함께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습니다.(창2:7) 여기 생령은 하나님께서 함께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사는 곳이 에덴이었습니다. 이곳이 바로 천국이요, 낙원이요, 행복의 동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것이 생기었습니다. 생기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주의 영이었으나 이제는 떠나게 되었습니다.(창6:3) 이것이 심판이요, 불행이요, 저주였습니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마1:23).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더라” (요1:14)

하나님께서 인간과 함께 살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탄의 신학이요 임마누엘의 구체적 증거입니다.

모든 인간은 태어난 후 영웅도 되고 유명인도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단 한 분 예수님은 탄생하기 전부터 언제, 어디에서, 무슨 목적으로 탄생하셔서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 자세히 예언 된 대로 탄생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창3:15절에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리라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여인의 후손으로 메시야가 올 것을 예언했는데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낳게 하시고" 라는 말씀은 창세기에 있는 말씀이 신약에 와서 응답된 것입니다.

또한 처녀의 몸에서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500여년 이사야 선지자에게 계시한 것을 (시 7:14) 마태복음 1장 4절에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예수께서 나실 때에 베들레헴에서(미 5:2) 낳실 것을 예언했는데, 요한복음 7장 42절의 성경에 말씀대로 베들레헴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은 30에 팔릴 것과 예수님의 일생에 관한 예언(사 53:50)이 마태복음 26장 27절에 응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그리스도 예수가 이 땅에 오시기 전에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셔서 어떻게 사시다가 어떻게 죽으시고 어떻게 부활하실 거신가를 계시했는데 성경대로 우리 예수님은 탄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계시된 종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을 입으시고 오신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호와 (Yahweh or Jehovah hw"hoy> )란 이름은 하나님의 기념칭호라 했다(호12:5). 이 기념은 언약의 기념이라 하겠다.

 

출 6:2,3에는 족장들에게 이 이름을 알리지 아니했다고 하는데 이는 맺을 언약의 모세의 시대에 와서 성취하겠다고 하는 뜻으로 이해한다. 왜냐하면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의 요가 여호와의 축소형이므로 모세가 태어나기 전에도 이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고 보아야하기 때문인 것이다.

여호와는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자'(I AM WHO I AM hy)가 되는데 히브리인들은 이 성스러운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고 주 (Lord)를 나타내는 아도나이(yn"doa)라 읽었는데 후에 '아도나이'의 모음을 '여호와(hw"hoy>)'의 자음에 그대로 붙여 발음하다 보니 '여호와'란 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우리 개역 성경의 '스스로 있는자'란 성호의 의미를 계시록이 잘 해석한 것으로 본다.

계 1:4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라 했고 계 1:8은 "알파와 오메가"라 하며 계 2:8은 "처음이요 나중"이라 한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불변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룬다는 의미를 강하게 표현하는 말이다.

이처럼 여호와란 이름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백성들과 같이 계시면서 반드시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기념칭호다.

그러므로 족장들에게 주신 언약의 최종목표인 메시야의 오심은 언약의 성취자 '여호와' 자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여호와' 자신은 성육신 하시어 친히 예수그리스도가 되심으로 언약을 성취하신 것으로 본다. 여호와는 이 땅에 오시기전 부터 자신을 백성들에게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내시므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신 사실을 구약역사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다.

 

창 18장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사람모양의 세분 중 한 분이 곧 여호와신데 더욱이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이삭의 출생을 약속해 주셨다. 창 16:10에 하갈에게 나타난 사람모습의 사자가 13절에서 여호와와 동일시되고 있음에서 여호와의 현현을 가르친다고 하겠다. 삿 13:3 이하에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서 아들을 약속해 주셨으며 자기 이름을 기묘(펠레 삿 13:18)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기묘성을 뜻함이라 했는데 이 이름이 사 9:6의 예수님의 이름과 같아진다. 사 8:12의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란 여호와의 이름과 계 22:13의 예수님의 이름이 같다. 말 4:5의 예수님의 강림하시기를 가리켜 여호와의 날이라 한 것도 여호와의 성육신관을 뒷받침한다. 사도들도 여호와께서 오신다는 구약의 말씀들을 '메시야의 도래'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는데 '여호와'를 번역한 칠십인경의 '퀴리오스'(주)를 신약성경이 그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삼은 것도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었다고 본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언약의 성취자로 이 땅에 오셔서 임마누엘(Immanuel)의 예수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살피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을 구출할 때 곧 구속의 때에 이 이름을 계시하셨으니 곧 구속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홀로 계신 분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슬픔과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신 것은 인간의 비천과 가난과 처참한 환경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의미합니다. 임마누엘은 같은 입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말구유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사랑의 표현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셨다는 이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시요 나를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구체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겪으심으로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유혹도 아십니다. 인간이 눈물도 고통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고난에 같이 하시려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다는 것은 요한 서신의 독특한 주제이다.

요일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계19:13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행20: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더 예리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말이란?

운동이다, 살아있다. 전달이다. 오고 간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와 같다는 뜻이다.

 

1) 진리요 지혜요 지식이란 뜻이다.

말씀이란 무엇인가?

마음의 생각이나 사상이나 신앙이 입의 말로 표현된 것이다. 지식과 지혜과 있는 사람은 그 말이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이란 말은 최고의 진리, 지혜, 지식이란 뜻이다.

말에도 진실한 말이 있고 거짓된 말이 있다. 예수님은 진리이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혜요 지식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생각이나 사상이 고상해진다. 세상의 지혜로는 감당할 수 없게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세상의 모든 학문과 지식을 다 가진 것 그 이상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철학으로 경제로 안 풀리는 공식이 세상에는 너무 많다. 왜 우주는 이렇게도 넓고 광대한가? 왜 인간은 죽어야만 하는가?(진시황) 왜 인간은 돈을 가지고도 또 더 가질려는 무한대의 욕심을 갖는가? 이 모든 질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해결된다.

 

2) 말씀이란 의미는 능력이란 뜻이다.

인간의 말은 능력이 있다. 조용한 청중들 속에 한 마디의 말을 던지면 그 사람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지금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이 임마누엘은 바로 성령의 임재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임마누엘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임마누엘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임마누엘 신앙을 가져야 겠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은 몸을 입으시고 하나님의 장막을 이루신 것입니다. 장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처소입니다(출25:8)

하나님의 임재가 장막에 있었는데 장막 같은 인간의 몸에 머물러 계시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을 입고 오시므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으로 오신 것입니다.

마리아 몸에 임재하신 성령은 우리 안에 성령으로 임재하시고 우리의 몸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거하게 되신 것입니다. 성전 있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님은 자기 몸을 성전으로 삼고 아버지 뜻대로 살았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애통하는 인류와 함께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슬퍼하셨고, 우는 자와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위로하는 분이 되시기 위해서 몸소 모든 슬픔과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우리 사람과 함께 울고,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하고, 병든 자와 함께 교통을 겪고 자기를 바쳐 모든 희생을 겪으셨습니다. 우는 사람과 함께 울고,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하고, 병든 자와 함께 고통을 겪고 자기를 바쳐 모든 희생을 겪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굿간에 나신 것은 가장 가난한 이들과 같이 계신 것을 친히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의 집에 태어나 노동하셨습니다. 그리고 천대받는 지역에 태어나셨습니다. 풍해도 없는 인물로 태어나셨습니다. 굶기도 하셨고, 이것은 인간의 고통을 몸으로 겪으시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 임마누엘로 함께 하십니다.

임마누엘을 깨닫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전이요, 깨닫는 순간이 곧 하늘의 문이 열리는 때이다.

""임마누엘을 깨닫는 순간 외로움과 두려움과 실패의 돌 베개가 변하여 예배의 제단이 된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 베개 배고 잠 같습니다." 이 찬송은 야곱의 험악한 세월엔 험악한 일도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처음 그가 부모를 떠나 홀홀 단신으로 이역만리 삼촌 집을 찾아 도망 갈 때, 도망 가다가 빈들에서 돌 베개 하고 잠을 청해야 했을 때가 가장 고생스러웠을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돌 베개 배고 자던 야곱의 그 어둡고 무거운 상황은 갑자기 바뀐다.

"12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땅에,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나님이 저편 끝에 이 편 끝엔 야곱이 함께 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13절부터 설명이 나온다 조상의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도 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도 되신다.

 

살아 계신 하나님--아브라함, 이삭, 야곱, 먼저 간 허다한 성도들이 지금도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줄 믿는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인줄을 믿으시길 바란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예수 안에 있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는 영생의 존재가 된 줄을 믿으시길 바란다.

언약의 하나님 축복의 하나님 복의 근원이시다 아브라함의 복 이 복은 갈 3장,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미친 복이라.

임마누엘의 하나님 하나님과 야곱은 항상 동거, 동행하는 관계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임마누엘! 임마누엘을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통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임마누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찬송495,3)"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

(행7:55)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행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삶 어느 현장에서든지, 임마누엘 하나님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승리하여, 그 곳에 회개의문이 열리고, 치료의 문이 열리고, 형통의 문이 열리고, 구원의 문이 열리고-- 하늘의 문이 열리시길 축원한다.

임마누엘을 깨닫는 자는 자신의 돌 베개를 제단 기둥으로 드릴 수 있습니다.

돌 베개 눈물 젖은 돌 베개, 외로움의 돌 베개, 두려움과 불안의 돌 베개였다. 그러나 임마누엘을 깨닫고 난 후 돌 베개가 변하여 제단 기둥이 된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게신 후 변하여 새사람 되고"

옛사람이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 이제 임마누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변하여 자기의 돌덩이 같이 쓸모 없던 마음을 하나님의 전에 기둥으로 드리고 싶어한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 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되었네"

불평거리가 변하여 감사의 조건이 된다. 원망거리가 변하여 찬양의 조건이 된다.

병든 몸, 늙은 몸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하나님의 전에 기둥으로 쓰여질 수 있다.

배우지 못한 지식, 변변찮은 재주이지만 임마누엘을 깨닫고,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주 앞에 드릴 때, 그것들이 하나님 나라에 기둥 같은 열매들이 될 줄로 믿는다.

우리는 종종 외로움과 두려움, 피곤함과 실패 때문에 눈물 젖은 돌 베개를 배고 잠을 자야할 때가 있다. 바로 그곳에 우리 주님은 약속대로 임마누엘 하시는 줄 깨달으시길 바란다.

(찬송) 내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니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하늘나라로 임마누엘 하십니다.

인생은 모두 나그네일 뿐입니다. 잠시 우리의 동행자들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는 부모님들이 우리의 동행자가 되어 주었습니다. 학교도, 병원도, 놀이터에도 여행길도 동행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라면서 동행자의 파트너를 바꿉니다. 그러나 나그네길의 동행이 끝나는 날이 옵니다. 나그네 인생길이 끝날 때 내 손을 잡고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여 들어갈 임마누엘의 은혜가 있어야 겠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려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임마누엘이 되어 주시려고 하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 영광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특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막 위에 임하시는 구름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나타나심)를 의미합니다.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독생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삶의 전부가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고 오병 이어와 기적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으나 십자가의 죽으심에는 영광을 보지 못하고 도망을 쳤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말구유에서 나신 예수에게서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생에서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몸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막이 되어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