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겸손하신 왕/(요 12:12~19)

미션(cmc) 2012. 4. 1. 17:54

겸손하신 왕
(요 12:12~19)

(요 12:12)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요 12:13)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 12:17)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요 12:18)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요 12:19) “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예나 지금이나 지구상에 여러 나라와 민족들이 흩어져 살고 있고, 그 나라마다 백성들을 통치하는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왕이요, 대통령이요, 총리요, 원수요, 지도자들입니다.
대부분의 왕들은 자기가 그 나라의 최고라고 생각하고 백성들이 자기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폭군이 있었는가 하면, 정반대로 백성들을 잘 섬기고 사랑하는 선한 지도자도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왕이 바로 다윗이고 다윗이 그렇게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시편 여러 곳에 나타난 그의 고백처럼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가 아니라 자기 위에 영원하신 왕에 신 하나님이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74:12)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시 84: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신 까닭은 후일에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그와 같은 왕을 세상에 보내어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을 선지자들을 통해 약속하신 것이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에 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당대 최강국인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고 로마 제국의 시녀인 헤롯왕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헤롯은 어떤 왕이었을까요?

1)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당시 성경에 기록된 첫 번째 헤롯대왕은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후에는 포악해져서 자신의 아들들까지 왕위를 넘본다는 이유로 죽이는 폭군으로 변해갔습니다.
헤롯은 자기 주변의 사람들 가운데 정적이라고 생각되면 몰살시켰고, 또한 죽음의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 일예로 동방박사들이 찾아와서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가르쳐주지 않고 떠나버리자 두 살 미만 갓난아기들을 모조리 죽일 정도로 자신의 왕권 수호를 위해 백성들의 목숨을 파리만도 못하게 생각한 폭군이었습니다.

2) 성경에 나오는 두 번째 헤롯왕은 일명 '헤롯 안티파스' 인데 그는 헤롯대왕의 여러 아들 중 하나입니다.
헤롯은 사해 동쪽 '나바테아' 왕국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가 이혼하고 이복형제의 부인 헤로디아를 가로채서 결혼을 하였을 때 이를 비판하는 세례 요한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참수를 할 정도로 무자비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같은 헤롯의 일생은 이혼으로 말미암아 ‘나바테아’ 왕국과 전쟁에서 굴욕적인 패배를 하였으며, 후에는 조카인 '헤롯 아그립바' 에 의해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쫓겨나 유배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때 등장한 헤롯왕이 바로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왕권치하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구약에 약속하신 대로 다윗의 후손을 통해 겸손하신 왕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 겸손하신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 화
우리 조상들에게도 역대 왕들의 실록이 남아 있습니다. 조선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13년(태종 13)에 《태조실록》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 8)에 《정종실록》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 13) 《태종실록》을 편찬한 후, 이 3대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출판하여 춘추관·충주·전주·성주의 네 사고에 각 1부씩 보관하였다고 합니다.그 공통점 중에 하나는 궁중에서 얼마나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었는가 하는 것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장금을 비롯하여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역대 사극들의 소재가 모두 다 그와 같은 왕조들의 실록에서 나온 자료들을 기초로 하여 인기 작가들이 시나리오를 만들어 영상으로 만든 것들입니다. .
1) 교만한 역대 왕들은 화려한 왕궁에서 태어났지만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겸손하신 왕은 겸손히 말 구유위에서 태어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눅 2: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2) 겸손하신 왕은 왕궁이 아니라 나사렛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나셨고 서민들과 함께 동고동락하시면서 가르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마 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그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무지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현대 의학으로도 치료가 불가능한 각색 질병에서 치유함을 얻었고, 귀신의 권세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와 같은 예수님의 명성이 점차 사람들에게 확산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인기가 충천하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 12: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그 결과 당시 권력을 비호하여 기득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시기하게 되었고 자연히 예수님을 미워하고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여야 되겠다고 굳게 결심을 하게 된 결정인 동기는 나사로를 살리신 일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마다 예루살렘 근방에 있는 베다니 마을에 사는 친구 나사로의 가정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에 나사로의 누이들이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전갈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당장 달려가신 것이 아니라 매우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 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은 나사로의 가족들을 사랑하셨으면서도 즉시 달려가시지 않고 마치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시는 것처럼 지체하셨다가 나사로가 죽은 후에 뒤늦게 방문하셨습니다.
(요 11: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님께서 뒤늦게 나사로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나사로의 가족들은 더욱 슬픔에 젖어서 뒤늦게 오시는 예수님을 원망하면서도 놀라운 요구를 하였습니다.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예수님께서 뒤늦게 나사로의 가정을 방문하셨을 때 나사로의 가족들은 더욱 슬픔에 젖어서 뒤늦게 오시는 예수님을 원망하였을 때 예수님에게 놀라운 요구를 하였습니다.
(요 11:21)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요 11:22)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화답이라도 하시는 것처럼 마르다의 믿음처럼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 11:23)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즉시 나사로가 묻힌 무덤으로 가셔서 무덤을 덮고 있는 육중한 돌문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후 하나님께 기도를 하신 후에 무덤에 묻힌 나사로를 향해 마치 산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이 나사로야 나오라고 큰 소리로 부르셨습니다.
(요 11: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요 11: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그 결과 놀랍게도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가 무덤에서 살아나는 놀라운 기적이 있어났습니다.
그 소문은 순식간에 바람에 날리는 산불처럼 사람들의 입소문을 통해서 이스라엘 전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최고조로 달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를 살리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저격수들의 표적이 되어 죽으심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영적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서 죽일 죄를 찾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여야만 자기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전제를 세우고 무조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요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이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만 하면 당시 최고의 권력자들인 로마 총독 빌라도와 헤롯왕과 대 제사장 가야바가 서로 결탁을 해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음모를 꾸며 놓은 것을 예수님이 다 아시면서 예수님은 마치 기름을 지고 불에 가까이 다가서는 사람처럼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신 것이 오늘 성경 말씀입니다.
(요 12:10) “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요 12:11)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예수님은 이미 그 사실을 다 아시면서도 개의치 않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기 위해 제자들에게 나귀새끼를 준비시키셨습니다.
당시 왕들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와 성으로 입성할 때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전리품을 약탈해 온 왕은 머리에는 황금 면류관을 쓰고 몸에는 황금 도포로 치장을 하고 백마를 탄 채 위풍당당하게 입성하면 수많은 군중들이 정의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흔들면서 왕은 길에 깔아 놓은 붉은 양탄자를 밟으면서 입성을 하였습니다.
만왕의 왕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어떤 왕도 이기지 못한 질병과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이기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인간에게 최강의 적인 죽음조차 한 방에 물리치신 승리자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야 말로 역대 왕들처럼 화려하게 장식한 군마를 타고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셔도 좋은 왕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 왕들과는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1)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초라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셨습니다.
(요 12:14) “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물론 그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입성을 손꼽아 기다리던 예루살렘 성 사람들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초라한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의 교만한 왕과 차별화된 겸손한 왕으로 입성하실 것을 성경에 예언하신 말씀을 다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요 12:15)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예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이 구약 성경의 예언을 이루심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보내신 겸손하신 왕이심을 입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슥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부터 그의 공생에 그리고 그의 죽음까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한걸음 한걸음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뒤늦게야 그 말씀을 깨달았습니다.
(요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2)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조상 아브라함의 언약도 다윗의 옛 영광도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저 강대국의 통치 아래서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안전하게 사는 것이 그들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이런 역사적 현장에 나사렛 예수의 탄생과 그의 사역에 군중들이 설레며 희망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에게 주목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겉옷을 벗어 주님이 가시는 길에 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던 헤롯왕과 대제사장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이 그를 죽이고자 함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환호하는 군중들과 따르던 제자들이 등을 돌리고 배반할 것도 주님은 아셨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환호하던 군중들이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국권을 되찾고 왕국을 재건하려는 뜻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들의 마음이 싸늘해져가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겸손히 그 죽음을 받아드리시기 위해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악한 행동을 이용하여 도리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만인을 위한 속죄제사로 삼으심으로 만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구원 계획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다”(고전 1:25)고 하였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귀새끼를 타시고 겸손히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종려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 소리 치며 환호하던 백성들의 기대와 달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전 세계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구속의 은혜는 복음이 되어 전 세계에 전파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히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입성하신 길은 이런 의미에서 놀라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희생과 죽음의 길이요 고난과 형극의 길이었습니다. 이 희생으로 주님이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셨고, 구원을 완성하셨으며, 부활의 세상을 여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 그리고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로 무릎을 꿇게 하시고 하나로 통일케 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이제 종려 주일을 맞이하여 시작되는 고난 주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1) 겸손해야 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자신의 위엄과 영광을 과시하기 위하여 말이나 병거를 타고 개선 행진을 하지만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은 세상 적으로 눈으로 볼 때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연약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가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도 겸손인데 이제 나귀를 타고 가심으로 다시 한 번 겸손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예수님을 본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이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겸손하신 왕 예수님이 베들레헴 말 구유위에 나시고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 까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꺼이 자신을 드림으로 우리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 예수님을 닮아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달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면서 고난주간을 한 끼니씩 금식하면서 새벽을 깨우고 마음 중심으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찬송하면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대망하는 특새와 부흥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