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골 3:1-4)

미션(cmc) 2012. 3. 13. 06:38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골 3:1-4)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이제는 놀토가 시행되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족들과 더불어 주말에 야외에 놀러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 가족이 주일을 지키게 되면 그와 같은 재미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일마다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더불어 교회에 출석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쏟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무엇이 더 좋고 행복하고 무엇이 덜 행복한 것인지를 구분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는 보화를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결코 다른 무엇과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기 위해 천국을 여러 가지로 비유로 말씀하신 가운데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렇다면 오늘 성경에서 감추인 보화는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건강과 재산과 명예일까요?
설령 그 모든 것들을 다 소유했을지라도 언젠가 때가 오면 마치 안개처럼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내 생명을 다 바쳐서 값 주고 사야할 진정한 보화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을 우리에게 본보여 주신 분이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이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고귀한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을 구속 사역이라고 말합니다.
구속이라는 말은 값을 지불하고 산다는 뜻입니다. 과연 예수님은 무엇을 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값을 지불하신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피 값을 지불하실 정도로 고귀하게 생각하신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의 생명입니다.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우리가 자신의 신분, 직업, 처지, 외모, 행실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때 초라하게 느껴지고, 못마땅해서 자신을 비관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자신을 자학하는 삶을 살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나를 생각해도 그렇게 못 마땅한 사람인데도 예수님은 내가 예수님을 알기도 전에 믿기도 전에 나를 위해 고귀한 피 값을 지불하시고 당신의 소유로 나를 사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 결과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라는 큰 선물을 값없이 받았으니 그것이 곧 영한 생명을 보장 받은 것입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1. 위의 것을 찾는 삶
(골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여기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fronevw)은 ‘생각하다, 판단하다, 전념하다, 마음에 두다, -하고 싶어하다’는 현재 능동태 동명사로 항상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위에 것을 찾는 삶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매일 매일을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에 골몰하며 무엇에 집중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골 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든지 구원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이어야 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할 수 밖에 없는 세상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모든 동물들은 땅을 바라보고 걷지만 인간만 유일하게 두 발로 머리를 하늘로 향하고 걸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한 평생은 땅에 소망을 두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을 근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흙에서 나온 것을 먹고 살다가 흙으로 되돌아가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인생에 대해 사람이 먹기 위해 사느냐 아니면 살기 위해 먹느냐?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
물론 육신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처럼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하는 것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새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여 계시기 때문에 그 주님을 소망하며 살기 위해 먹고 마시고 입는 사는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적으로는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육신은 여전히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때가 되면 늙고 병들어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의 생명이 끝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영원하신 생명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늘나라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살 때 설령 우리에게 죽음이 올지라도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 화
그것은 마치 특전대원들이 생존 훈련을 받기 위해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한 상태로 정글에 던져져서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마시고 잠자리를 마련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다가 때가 되면 부대에서 헬리콥터를 보내어 구출하는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와 같은 극기 훈련을 받는 특전대원은 생존을 위해 땅에서 먹을 것을 찾지만 늘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나기를 고대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나라에 올라가셨을 뿐 아니라 그 하늘 나라에서 다시 오시마 약속하셨습니다.
(행 1:11)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늘은 결코 공허한 곳이 아니라 구름이나 해나 별만 있는 곳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기도하고 계시고 있는 곳일 뿐 아니라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곳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계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위의 것을 찾는 삶을 살 때 땅에 것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과 달리 그리스도와 영적인 교통이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의 위로를 경험하며,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공급받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삶을 위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찾을 수 밖에 없지만 아무리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살지라도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임을 잊지 말고 하늘에서 영생하시는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대망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골 3: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비록 땅에 살지만 그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며 위에 것을 찾고 위에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길만이 땅에 것을 생각지 않는 최선의 삶인 것입니다.

2. 땅의 지체를 죽이는 삶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뿐 아니라 장사한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죽은 나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 다시 살리심을 받아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마치 대형 교통사고로 내가 탔던 차가 폐차를 할 정도로 망가졌는데 그 차에 탔던 나는 사지가 멀쩡하고 별로 다친 데가 없고 몇 군데 찰과상을 입었다면 나의 생명은 덤으로 얻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은 언젠가는 죽어야 할 옛사람은 장사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사는 새 생명으로 거듭 태어나는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골 3: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그러나 옛사람이 죽고 새생명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땅에 사는 동안 아무런 욕심도 없고, 아무런 죄도 짓지 않는 완전히 성화된 사람처럼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지 육신까지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육신은 범죄한 아담으로부터 받은 몸이기 때문에 죄성이 잔재되어 있습니다.
그 잔재된 죄성이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땅에 지체요, 그 땅에 지체가 바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는 것들입니다.
세상에 이 같은 욕심이 전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 욕심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앞서간 신앙의 선진들이나 우리 주변에 성숙한 믿음의 경지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때로 이 같은 육신의 소욕을 이기지 못해서 넘어지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럴 때 마치 나는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그렇게 넘어진 사람들이 비난하고 비판하며 돌을 던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한번 나의 내면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나는 그와 같은 죄에서 정말 자유로운 사람인가? 한번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물론 그 대답은 아니요. 나에게도 그와 같은 죄성이 감추어져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건재한 것은 주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나도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을 붙잡는 삶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삶입니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골 3:6)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여기서 죽이라는 말(nekrovw)은 ‘죽음에 처하다. 의학적으로 병으로 인한 신체 일부를 위축시키고 쇠퇴시키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단히 기도함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고 날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박아 나의 옛사람을 죽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드는 삶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지체를 죽이는 방법은 그와 같은 죄악에 나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차단하고 그 대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나의 시간과 물질과 노력을 전환시키는 노력이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부활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시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를 막론하고 다 자기의 행위를 따라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도록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는 것입니다.

3. 옛 사람을 벗어 버리는 삶
오늘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의 바람직한 세 번째 삶은 벗어 버리는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골 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은 성도는 과거 옛사람의 모습을 제하고 벗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옛 성품을 벗어 버려야만 그 빈자리를 그리스도의 좋은 성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우리가 죽여야 할 땅의 지체인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은 개인적으로 은밀히 범하기 쉬운 죄라면, 이제 말씀하고 있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범하기 쉬운 죄입니다.
예 화
우리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귀가를 하여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먼저 땀과 체취에 쪄들은 옷을 벗어 던지는 일입니다. 그래야만 새 옷을 갈아입을 수 있습니다. 만일 목욕하는 것이 귀찮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이 번거로워서 씻지도 않고 갈아입지도 않아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살아 가는데는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흔히 노숙자의 삶입니다. 그러나 어느 때 문제가 됩니까? 다른 사람과 만날 때 냄새를 풍기게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갈 수 없습니다. 따가운 눈총을 받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나 혼자 구원을 얻는 데는 별 문제가 없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말입니다. 아마도 우리 중에 이것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고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 화가 나면 옛날 성질이 폭발을 하여 난동을 피고 사고를 치기도 할 것입니다.
오늘 날 교회나 노회나 총회나 기독교인들이 모인 곳에서 분노와 악의에 가득찬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비방하는 말을 스스럼없이 뱉어 대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때로는 누구보다 열심히 잘하는 사람가운데도 분노와 악의에 찬 비방과 부끄러운 줄 모르고 욕설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그러한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교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전도는 먹히지 않게 되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을 주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되기 쉽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을 실족시키는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경고하신 것 중에 남을 실족시키는 죄가 얼마나 큰지를 연자 맷돌을 비유로 말씀하셨을 정도입니다.
(마 18: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므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 생명을 얻었고, 장차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 예수를 기다리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같은 죄악들을 마치 눈먼 바디매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겉옷을 벗어 던지고 주님께로 달려 간 것처럼 벗어 던지라는 것입니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그래야만 주님은 우리에게 새 옷으로 갈아입히시는데 그 새 옷이 바로 (골 3: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라는 말씀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입니다.
(골 3: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아마도 골로새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사상들은 알고 보면 다 그와 같은 거짓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거짓을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단을 가리켜 거짓의 아비 즉 거짓의 원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 하나님은 티끌만큼도 거짓이 없으시고 또한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은 성도들은 무엇보다 거짓을 미워하고 거짓을 벗어 버리는 일을 힘써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죽이는 삶이고,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거룩한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지 않는다면 우리가 육신을 지니고 사는 이상 어느 순간에 다시 옛 성품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설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입만 열면 악평을 늘어놓고 남을 비방하던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의 온유 겸손하신 성품을 본받아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만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귀의 자녀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 세탁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와 달리 매사에 오래 참을 수 있는 인내 할 수 있어야 하며, 지금까지 사소한 이해관계 때문에 거짓말을 하던 옛 모습을 미련 없이 벗어 버려야만 그리스도로 새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온전한 변화인 것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의 모습처럼 죄로 인해 망가진 우리를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다는 것을 아마도 귀가 닳게 들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행동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이 변하지 않고 잘못하고 있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마치 사회 정의인 것처럼 착각하는 현실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버리지 않으시고 본래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아름다운 인간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이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선한 삶이 곧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의도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 영적예배라는 것입니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날 때 비로소 그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국가도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마침내 여름 한 낱에 뜨거운 햇볕이 사람들의 옷을 벗기는 것처럼 악하고 더러운 세상의 때를 벗기고 새롭게 단장을 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갖 죄악과 거짓투성이의 우리를 변화시켜 다시 우리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체로 쓰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서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죽이는 삶이고, 악하고 더러운 것들을 벗어버리고, 거룩한 새 옷으로 갈아입고 하나님이 본래 지으신 거룩한 모습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지 않는다면 우리가 육신을 지니고 사는 이상 어느 순간에 다시 옛 성품이 다시 고개를 들고 일어설지 모릅니다.
내가 지금까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입만 열면 악평을 늘어놓고 남을 비방하던 옛 사람의 옷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의 온유 겸손하신 성품을 본받아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어야만 우리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국가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귀의 자녀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 세탁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온전히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는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몸으로 실천하는 선한 삶이 곧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의도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인 영적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변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새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일어날 때 비로소 그가 속한 가정과 교회와 국가도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