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중에 침묵하는 믿음
(시 39:1-5)
(시 39: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 39: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시 39: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시 39: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지난 주일에 우리는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중에 버려두시는 몰인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고통 중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고통을 피할 수 없다면 오늘은 시편 39편의 말씀을 통해서 어떤 자세로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가? 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어느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자 한다면 그의 언행(言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그 자신의 언행 이상의 인격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그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정도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만일 정신을 차리지 않고 개념 없이 떠들다가는 반드시 치부와 허점이 드러나게 되며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말에 실수가 없으면 완전한 사람이라고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약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여기서 ‘실수’라는 말(ptaivw, 프타이오)은 ‘비틀거리다,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의 현재 능동형으로 지금 우리가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 또한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tevleio", 텔레이오스)은 ‘완성된, 완전한 perfect.’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사람은 누구나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실수를 최소화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습니까? 과연 그 최소화 방안이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오늘 시편 기자에게서 배워야 하겠습니다.
1. 언행을 조심하라.
(시 39: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여두둔 형식으로 부르는 노래]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편 기자가 특별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라는 말씀처럼 내 앞에서 나의 허물과 약점을 짚어내려고 칼을 갈고 있는 악한 원수 앞에서 무엇보다 특별히 조심해야 것이 두 가지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1) 행동을 조심해야겠다.
여기서 ‘행동’은 삶의 태도와 방식을 뜻하는 말이고, ‘조심하여’라는 말(rm'v;, 샤마르)은 ‘지키다, 준수하다, 주의하다’는 뜻의 미완료 동사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행동을 조심하겠다는 말일까요? 그것은 술을 마시지 않겠다, 노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보다 입을 조심하는 것만큼 행동을 조심해야 할 것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2)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
오늘 시편 기자는 그것을 가리켜 내 입에 ’재갈을 먹이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재갈’이라는 말(rm'v;, 샤마르)은 ‘입마개’라는 뜻이고, ‘씌우겠다’는 말은 미완료 동사로 계속해서 입조심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개인의 자존심이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좋았던 인간관계가 어그러질 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기자는 덕이 되지 않고 영광이 돌려지지 않는 부정적인 말만이 아니라 심지어 선한 말도 조심하기로 굳게 다짐을 하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말을 실수하여 그것을 거두어 드리지 못함으로 인한 근심 못지 않게, 얼마든지 말할 수 있지만 침묵하는 것도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시 39:2) 내가 잠잠하여 선한 말도 하지 아니하니 나의 근심이 더 심하도다
여기서 ‘잠잠하여’라는 말(!l'a;, 알람)은 ‘꽁꽁 묶다, 말을 못하다’라는 뜻의 완료상태이며, ‘근심이’ 라는 말(baeK, 케에브)은 ‘고통, 괴로움, 슬픔’에서 유래된 말이고, ‘심하도다’라는 말(rk'[, 아카르) )은 ‘자극하다, 괴롭히다’라는 뜻의 완료형으로 시편 기자가 매우 고통스럽게 되어 버렸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설령 지금 악한 원수 대신에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이나 허물이 없는 친구와 함께 지낼 지라도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은 아무리 강조를 할지라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겉으로는 친한 사이이기 때문에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상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말 한 마디 때문에 자존심을 상하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부부 싸움이 되고 그것이 확산되어 나중에는 성격차이라는 명분으로 이혼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막역하다고 하는 친구 사이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감정대로 생각 없이 말을 하다가 보면 그것이 자존심을 건드려서 결국은 친구가 아닌 철천지원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없는 말도 만들어 내고 보지 못한 것도 보았다고 하면서 눈에 불을 키고 나의 허물과 약점을 찾는 원수 앞에서 언행을 조심해야 함은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 앞에서 더욱 언행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돌아서서 말만 많은 예수쟁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의 명예나 인격에 손상이 가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잘못된 언행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를 정죄하고 비난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2. 인생의 본질을 직시하라
시편 기자가 그처럼 악한 원수들 앞에서 언행을 조심하고 심지어 선한 말도 잠잠히 침묵을 지키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본질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 당시 세상에서 하나님을 불신하고 우상숭배와 자기 권력을 유지하고 더 많이 더 높이 더 크게 되려는 사리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온갖 악을 서슴치 않고 범할 뿐 아니라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것을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시편 기자의 죄는 그에 비하면 깃털보다 더 가볍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악한 자들에게는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로지 시편 기자의 죄에 대해서만 징계하신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처사가 불공평하다고 얼마든지 원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시편 기자보다 더 선한 자가 비난과 책망을 한다면 얼마든지 달게 받을 수 있겠지만, 시편 기자보다 훨씬 더 악한 자들이 마치 자신은 무죄한 의인인체 하면서 시편 기자를 향해 욕을 퍼붓고 돌팔매질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 시편 기자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고 너무나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오죽하면 속에서 불이 난다고까지 하였을까요?
(시 39:3)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뜨거워서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불이 붙으니 나의 혀로 말하기를”
그 대표적인 사건이 시편 기자 다윗이 배은망덕한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다닐 때 시므이라는 자가 다윗을 동정하기는커녕 저주하고 악담을 하였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이 묵묵히 산비탈을 따라 가고 있는데도 뒤따라가면서 저주를 퍼붓고 감히 기름 부움을 받은 다윗을 향해 돌을 던지고 먼지를 날리기까지 하였습니다.
(삼하 19:21)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이르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말미암아 죽어야 마땅하지 아니하니이까 하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시므이를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범죄한 시편 기자를 시므이를 통해서 징계하시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마치 회초리를 맞는 심정으로 묵묵히 참고 견디었습니다.
만일 시편기자 다윗이 시므이를 감정적으로 대하였다면 벌써 목을 베었을 것이나, 시편기자는 그와 같은 시므이의 저주를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드렸기 때문에 시므이를 죽이지 않고 묵묵히 침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침묵 중에 시편 기자가 인생의 본질에 대해서 직시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죄인일 뿐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유한함과 연약함과 허무한 존재임을 직시하였습니다.
(시 39: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그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한 평생은 마치 손 한 뼘 길이만큼 밖에 되지 않는 짤막한 순간이며, 인간의 한 평생이 무척 길게 느껴질지 몰라도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지랑이와도 같이 한 순간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기 때문에 세상의 악한 자들 한시적으로 용납하심으로 세상에서 악한 자들이 득세를 하고 치부를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자비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면서 교만하기 잘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평생 헐떡거리면서 쌓아올린 부귀권세는 하나님이 단 한번 입으로 불어 버리시면 추풍낙엽처럼 산산히 흩어져 그것을 엉뚱한 사람이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시편 기자는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시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드러나지 않고 세상에서 벌을 받지 않은 죄악들에 대해서 언젠가 하나님이 반드시 계산하시는 날이 온다고 하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시편 기자는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시 39:11)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 (셀라)”
그러나 세상에서 범한 허물과 죄악에 대해서 한 올이라도 남김없이 다 계산하시는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시편 기자를 세상에서 구원하여 내시기 위한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유일한 소망은 부귀권세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참 소망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시 39: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악인들이 득세하는 것처럼 보이는 죄악된 세상에서 죄악에 물들지 살아가려면 연약한 자신의 의지나 결심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이 악한 자들에게 구원하여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지금까지는 악인들 앞에서 잠잠히 침묵만을 지켜 왔지만 주님 앞에서는 부르짖어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며 도우심을 구하였습니다.
(시 39:8) “나를 모든 죄에서 건지시며 우매한 자에게서 욕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소서” (시 39:12)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시편 기자가 지금 사악한 시므이와 같은 자들에게 모욕과 저주와 멸시를 당하고 있지만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생사의 주권이 오로지 하나님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기자는 나그네 인생길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어린아이처럼 매어 달려 기도하였습니다.
(시 39:9)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시 39:13)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여기서 ‘용서하시고’ 라는 말(h[;v, 샤아)은 ‘뚫어지라고 쳐다 보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다’라는 뜻이고, ‘회복시키소서’라는 말(gl'B;, 발라그)은 ‘유쾌하게 하다’라는 뜻의 미완료로 건강을 겨우 회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유쾌한 상태가 되게 해달라는 미완료 동사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은 복권을 하고 마지막 숨지는 날까지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지켜 주셨고 그의 이름을 영화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시편 기자를 괴롭히던 악한 자들의 종말은 어떻게 되었으며, 고통 중에서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반면에 여호와 앞에서는 소리 높여 간절히 구원하심과 치료하심과 회복하심을 간구한 시편 기자는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시편 기자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삼천 명의 군대를 풀어 마치 사냥감처럼 몰아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왕이라고 손을 대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시므이는 나중에 어떻게 되었을까요? 훗날 시므이는 다윗이 시므이를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을 지키기 위해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이어 왕이 된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것이며, 만일 예루살렘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면 죽을 것이라고 경고하였으나 그 약속을 삼년 만에 깨었을 때 마침내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왕상 2:44) “왕이 또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네 마음으로 아는 모든 악 곧 내 아버지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왕상 2:46)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명령하매 그가 나가서 시므이를 치니 그가 죽은지라 이에 나라가 솔로몬의 손에 견고하여지니라”
3. 예수님의 본을 따르라
우리는 너 나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성적이기 보다는 감성적이기 때문에 악한 세상에서 이성적으로는 무엇보다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 있어서 어느 누가 감정을 자극하면 그것을 참지 못하고 폭발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기자처럼 감정을 억누르고 잠잠히 침묵을 지키려고 할 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시편 기자의 처지라면 이성으로 얼마나 감정을 자제하면서 잠잠히 침묵할 수 있을까요?
그러한 감정을 누구보다 잘 다스리고 침묵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그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의 감정으로 냉철한 이성적 신앙으로 다스릴 수 있기를 주께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영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마귀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다 알고 예수님을 두려워 벌벌 떨 정도였습니다.
(마 8:29)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후일에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정체를 깨닫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 제자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 것을 미리 다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인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기하여 거짓증인들을 세워 예수님을 법정에 고소하여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그들의 거짓을 낱낱이 밝혀 고발하실 수 있으셨고, 당신의 무죄함을 얼마든지 변호하실 수 있었고, 심지어 하늘에 천군과 천사를 불러 로마 정권을 뒤집어엎을 수도 있으셨습니다.
억울한 고통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당신이 침묵하시면 불리하게 되는 줄을 잘 아시면서도 묵묵히 침묵하셨습니다.
(마 26:63)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 까닭은 예수님이 침묵하셔야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수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을 다 이루시기 위해 모진 채찍과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묵묵히 침묵을 지키신 것입니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물론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님의 침묵은 결국 예수님을 억울하게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고, 고난을 받지 않게 되었고, 질병에서 나음을 입고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억울 하시다고 입을 열어 당신의 무죄함을 변호하는 일을 하셨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으셨을 것이나, 우리는 영원토록 죄와 고통과 사망의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들 앞에서도 잠잠히 침묵을 지키시고 십자가에 달려 마지막 죽으시기 까지 잠잠히 침묵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얻고 나음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의 기업을 상속받는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릭 워렌 은 “우리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우리가 침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일이가 있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설교를 수 없이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침묵하지 않고 너무 말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때로는 주여 삼창도 필요하지만 이제 부터는 기도하기 전 또는 기도한 후에 고요히 침묵하면서 주의 음성에 귀를 여는 법을 훈련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요한 중에 세미하게 마음에 울려 퍼지는 성령의 깨우침을 듣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은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흔히 무엇이라고 비난하였나요? 예수쟁이들은 말쟁이들이라고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말은 잘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싸잡아 비난을 하였습니다.
과연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일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수를 믿게 하신 것은 그와 같은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배우고 믿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으신 본을 본받아 그 발자취를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번도 죄를 짓거나 거짓말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게 억울하게 고소를 당하고 매를 맞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욕을 당해도 역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아도 복수하지 않으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시고 묵묵히 침묵하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음은 헛되지 않게 되었고 그 죽으심 때문에 우리는 구원을 받고 죄를 떠나 올바른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질병에서 고침을 받아 건강하게 되었고 죽음에서 구원을 받아 영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와 같은 구원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며 그 증거가 무엇일까요?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때문에, 양심적으로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것 때문에 때로 악한 자들에게 억울한 소리를 듣고 모함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게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분은 당연히 에수 그리스도이시지만 그와 더불어 기억해야 할 사람은 오늘 성경에 시편 기자 다윗을 본받아 고통 중에서 침묵하되 하나님 아버지께는 침묵을 깨고 입 벌려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본받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는 또 하나의 증표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침묵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살리셨고 위대한 구속의 사역을 다 이루셨습니다. 고통 중에 침묵의 기도를 통해서 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본받아야 할 여러 가지 중에 하나가 바로 고통 중에서 침묵하며 부르짖어 기도하신 그 모습입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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