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오직 성령을 따라 /(갈 5:16-18)

미션(cmc) 2014. 11. 24. 17:53

오직 성령을 따라 

(갈 5:16-18)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행복한 가정, 복된 교회’라는 표어를 걸고 2014년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11월 첫 주를 맞이하였습니다. 곰곰이 뒤돌아보면 설교와 성경공부와 제자훈련, 사역자 훈련, 일대일 양육, 화요 성경공부, 특 새와 부흥회와 출애굽기 40일 캠페인을 통해서 많은 말씀을 듣고 배웠습니다.

 만일 우리가 더 이상 배우기 전에 그동안 듣고 배운 말씀을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교회에서 실제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였다면 놀라운 변화와 부흥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기는 많이 듣고 알기는 잘하면서 그대로 믿지 못하고 그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와 죄송함 때문에 이제 남은 기간만이라도 새해를 시작할 때처럼 초심으로 돌아가 금년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가장 절실한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처럼 성령 충만을 받아 내 힘과 의지로만이 아닌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1. 영적 싸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을 때가 훨씬 더 많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하면서 양심의 가책이 별로 없었고 단지 사람에게 그 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며 숨어서 죄를 범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경을 읽고 설교 말씀을 듣다가 보니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구분하는 잣대와 더불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과 미워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분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 앞에서는 하나도 거리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깊이 읽고, 설교 말씀에 경청하면서 그 말씀에 자신을 비쳐 볼 때 자신의 모습이 그 말씀과 너무나 거리감이 먼 것을 깨닫고 마음에 갈등과 더불어 자신에 대한 회의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죄스러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일까요?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지 오래고 저와 같은 성직을 가진 사람조차도 자유롭지 못한 보편적인 문제일까요? 과연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문제의 원인과 대안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는 그와 같은 갈등은 신앙의 수준이 낮은 초신자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의 수준 높은  사람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그의 고백과 탄식이 로마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탄식하기를 “나는 나를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속으로는 올바른 일을 해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내가 원하지 않는 짓, 내가 미워하는 짓만 저지르고 있습니다. 나는 내 행실이 잘못되었다는 것도, 내가 어기고 있는 율법이 선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러는 나를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이미 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게 이런 악한 일을 시키는 것은 내 속에 들어 있는 나보다 더 힘이 센 죄입니다. 나는 내 육신 안에 올바른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나는 나에게 올바른 일을 하게 할 수 없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되지가 않습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도 되지 않고 악한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써도 되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라면 문제는 분명해집니다. 죄가 아직도 나를 사로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나 스스로는 늘 올바른 일을 원하나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일을 해버리는 이것이 인생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속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고 싶어 하면서도 내 속 깊은 곳에 어떤 다른 것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분란을 일으켜 나를 누르고 아직도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죄의 노예로 만들어 버립니다. 나는 마음으로는 늘 기쁨으로 하나님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아, 나는 얼마나 비참한 처지에 놓인 인간입니까! 누가 이 죽을 수밖에 없는 노예 상태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까?”  라고 탄식하였습니다. 

 (롬 7: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에게도 그와 같은 마음에 갈등이 있었다면 오늘 우리들에게 그와 같은 갈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거나 믿음이 적었을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갈등이 점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알아가고 성경을 점점 더 많이 알아갈수록 느끼게 되는 것은 그동안 죄로 인해 마비되었던 영적인 감각이 회복되고 있다는 좋은 징조인 것입니다.

 점차 보편화되어가는 각종 성인병에 대한 가장 좋은 치료가 조기발견과 조기 치료라고 하면서도 왜 많은 사람들이 조기 발견은 고사하고 뒤늦게 발견을 하고 오진을 하기도 하는 이유는 초기에는 통증이라는 자각 증세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고 성령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설령 깨달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이길 만한 영적인 힘이 우리 속에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랬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의 은혜를 받게 되면 영적인 감각과 입맛이 살아나면서 내재되었던 죄가 드러나면서 마음에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며, 그것을 내게서 떨쳐 버리고 하는 과정이 바로 영적인 싸움의 시작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와 같은 영적인 싸움을 평생 계속하였음을 노년에 그의 고백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딤후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도 영적인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당부를 한 것입니다.

(딤전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딤전 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으로 선한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무엇으로 그와 같은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하였는지를 돌이켜 보면 그 비결을 알 수 있을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바로 그와 같은 영적 싸움의 원인과 승리의 비결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2. 영적 싸움의 승리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 하는 내용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아울러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라,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율법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하라는 말씀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말씀은 거역하는 부패한 존재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율법의 말씀을 우리의 이성과 의지로 실행에 옮기려고 하면 예수를 믿는 우리 속에 나의 의지와 상관이 없이 강한 거부감이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재된 육체의 소욕과 예수를 믿음으로 내주하시는 성령의 소욕 간이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씀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할 때 나의 이성과 의지와 결심으로만 하려고 하지 말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어떻게 생각하면 지극히 피상적이고 막연한 말씀처럼 생각되기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성령이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지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마치 그림처럼 자세하게 보여주신 말씀이 바로 출애굽기의 성막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 올리셔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이 지켜야 할 계명과 율법과 규례를 명하여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때만해도 사사건건 모세를 원망하고 출애굽을 불평하고 애굽을 그리워하기까지 했던 유치한 신앙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을 대비하여 성막을 준비하게 하시고 불순종한 죄를 속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시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속죄소 위에 친히 임재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 가를 수 없는 요단강이 홍해처럼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고 가나안의 족속들이 패배하여 그 땅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명령인 말씀을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욕망 때문에 자주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우리도 마음에 가책과 갈등이 일어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함으로 죄 사함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려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고 때가 되어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하셔서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내 속에서 꿈틀대는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지 말고 내안에 임재하셔서 나를 책망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깨닫게 하시고 이끌어 주시는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 때 내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할 수 있게 되고 나도 죄와 싸워 승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던 삶이었으나 이제는 오늘 설교 제목처럼 오직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한다고 하였습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말(peripatevw, 페리파테오)은 ‘돌아다니다, 걷다, 행하다’라는 뜻의 현재 능동형으로 이제후로는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때 결코 육신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이라는 말(a[gw, 아고)은 ‘인도하다, 데리고 오다, 이끌다’라는 뜻의 현재 수동태로 성령께서 강력하게 우리를 이끄실 때 적극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선한 목자와 같이 눈에 보이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제자들을 이끄시는 대로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아니하시는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 간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추상적인 이론에 그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과연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일까요?


 3. 사모하고 구해야 할 것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육체의 욕심이 아주 다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직접 택하심을 받은 제자들이라고 해서 육신의 욕심에 대해 결코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님을 누구보다 예수님이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삼년 동안에 걸쳐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지만 제자들 간에 누가 높은가? 다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러한 제자들만 지상에 남겨두고 하늘나라로 가버리신다면  제자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증인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는 일조차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한 조짐이 제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심지어 돈을 받고 주님을 팔아버린 제자, 고난 앞에서 주님을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주님을 버리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제사 사역이 실패한 것처럼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심심당부를 하셨습니다.

(행 1: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그 약속은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말세에 남종과 여종과 늙은이와 젊은이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욜 2:29)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여기서 ‘그 후에’라는 시간은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는 중에 각 사람 머리위에 임하신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을 예언한 것입니다.

(행 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행 2: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행 2: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 사건 후에 예루살렘에 교회가 세워졌으며 성령의 불로 말미암아 변화를 받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을 치며 회개하고 주께 돌아온 사람들이 삼천 명이나 될 정도였습니다.

 그와 같은 변화는 베드로만이 아니라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래 이름은 사울이었고, 살기가 등등하여 이미 예루살렘 교회의 스데반 집사를 돌로 치고 교회를 폐쇄시킬 정도로 의기양양하였기 때문에 그냥 버려두면 다메섹으로 피신한 예루살렘 교인들까지 체포당할 위기에 놓였습니다.

 예수께서 그와 같은 사울을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택하시고 부르셔서 아나니아의 안수를 통해서 성령 충만을 체험하게 하심으로 핍박자가 변하여 예수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하는 사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그와 같은 사도 바울의 전도로 말미암아 갈라디아 교회가 세워졌으나 교회에 침투한 이단의 미혹을 받아 갈라디아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음을 듣고 그것을 수습하기 위해 오늘 성경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여 보낸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인 할례 문제를 가지고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고, 서로 헐뜯고 비난하고 사랑이 식어져 버린 냉랭한 교회가 되고 만 것입니다.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갈 5: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사도 바울이 복음으로 세운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이 떠난 후에 침투한 율법주의 자들 때문에 교회 안에서 가장 소중한 사랑을 상실한 갈라디아 교회를 치료하고 회복시키는 일에 가장 요긴한 것이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만일 한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서로 분쟁하는 것을 계속한다면 함께 멸망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분쟁한다면 그리스도인의 교회를 그 자신들의 손으로 파멸시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잔인한 짐승과 같이 서로 물고 먹으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은혜를 거절하시고 사랑의 성령께서 그들에게서 떠나시며, 또한 악령이 지배하리라는 것 외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율법 아래 사는 자가 반드시 맺을 수 밖에 없는 육체의 열매인 것입니다.

(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갈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아무리 한 하나님을 믿고 한 교회를 다닌다고 할지라도 마치 인간의 의지로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것처럼 할 때 도리어 육신의 법을 이길 수  없지만, 정반대로 율법의 문제가 발생하였을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말고 이제부터는 성령이 인도하신대로 따라야 한다고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 이유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느리는 반면에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기 때문에 비록 우리가 우리들의 타락한 본성의 세력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지 못할 지라도, 또 그 타락한 본성이 우리 가운데 남아있을지라도 우리가 성령을 의지한다면 그 본성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고 사도가 되고 목사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완전히 제거되지 아니한 육체적 욕심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비결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감동하시고 깨우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을 사모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그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것뿐입니다.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몸은 출애굽기의 성막처럼 성령의 전입니다. 그러한 성도들이 연합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룬 우리 교회도 건물이 아니라 성령을 모신 성도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거룩한 성령이 임재하시는 성령의 전입니다.

 성령의 임재와 능력은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는 데 있어 절대로  필요한 요소입니다. 이것을 배제하고는 아무리 많은 노력을 투자할지라도 교회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모인 성도들이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름으로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정욕을 억제하고, 성령의 인도에 온전히 자신을 복종시킬 때 육신의 정욕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그분께 간절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내어맡기기만 하면 우리의 죄악된 생각과 습성을 제하고 성결하고 정한 영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1) 죄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전에 나는 죄를 사랑하고, 죄와 짝하기를 즐겨하였지만 이제 성령의 충만을 받은 성도는 죄를 미워하며, 죄를 멀리하고, 죄를 대적하게 될 것입니다.


 2) 죄를 뉘우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육신 안에 죄가 거하기 때문에 그렇게 결심을 했지만 어느 순간에 무너질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우리에게 그 죄를 뉘우치며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이처럼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살 때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고, 철저하게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이유는 회개케 하시는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의 양심을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성령의 열매를 맺게하실 것입니다.

 (시1:3)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라는 말씀처럼 신앙에 뿌리를 성경 말씀에 깊이 내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처럼 앞서 인도하시는 성령님을 따르는 중에 내 믿음이 점진적으로 자라 꽃이 피고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누구도 감히 성령이 내게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