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교수의 개혁주의 설교학] (9)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설교는 경건한 기도로 수행된다
복음을 증거하는 설교자가 성경에 정통한 동시에 반드시 기도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교회를 돌보는 목양 사역에서 목회자의 말씀사역과 기도사역은 이미 성경에 기록된 사도적 전통이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 안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의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사도들은 자신들 사역의 우선순위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행 6:4). 구제사역이 그들에게 무가치하거나 불필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말씀사역이 구제사역보다 앞선다는 것을 인식했던 것이다.
필자가 약 20여 년 전에 목사고시를 볼 때, 헌법에 명시된 목사의 직무를 보고 적지 않게 놀란 적이 있다. 목사가 되면 당연히 설교사역이 최우선 과제라고 생각했으나, 양무리 된 “교인을 위하여 기도하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설교하는 일보다 우선적인 목사의 직무로 제시된 것이다. 물론 목회 전반에 요구되는 기도사역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사도행전 6장 4절의 순서를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기록된 사도들의 직무는 구약의 선지자 사무엘의 공적인 선언에 나타난 직무만 아니라 그 순서에 있어서도 매우 유사하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삼상 12:23). 예시한 구약과 신약 구절은 모두 기도의 직무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교훈하는 일에 앞서고 있다.
목회사역에 단순히 기도와 설교의 순서상의 우선순위를 고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목회자의 기도 생활은 설교사역과 깊은 연관을 갖는다. 16세기 청교도 설교자인 윌리암 퍼킨스는 <예언의 기술>에서 설교자의 설교사역과 동등한 위치에 기도사역을 두었다. “예언자(즉, 말씀의 봉사자)는 오직 두 가지 의무를 지닌다. 하나는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설교학자 블랙우드(A. W. Blackwood)는 모든 설교자가 자신의 방법으로 메시지를 준비해야 하고, 때때로 그의 목적과 재료들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지만, 결코 예외가 있을 수 없는 하나의 규칙을 언급하였다. 그것은 바로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진행하고, 기도로 마무리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의 기도는 설교사역 전반에 선택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할 절대적 필요조건이다.
설교 준비를 위하여 성경을 연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그 뜻을 밝히 비추어주시도록 기도해야만 한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그 손에 들고 있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그 눈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결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시편의 성도처럼 기도해야 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 개역한글). 동일한 맥락에서 칼빈도 <기독교강요>에서 설교자의 성경 이해는 오로지 성령의 사역에 의존한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비취는 태양빛과 같다. 하지만 그 태양빛도 눈먼 자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 모두는 본성적으로 눈이 먼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내면의 선생인 성령님이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 그 길을 예비하지 않는다면, 그 말씀은 우리의 지성을 뚫고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므로 옛적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영감으로 구원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 하나님께서 오늘날 설교자의 지성과 마음을 조명하시지 않는다면, 설교자는 구원의 진리에 관하여 어둠에 머물 수밖에 없다.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는 설교자의 기도는 단지 설교를 준비할 때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전달할 때도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 최초의 설교학 교과서인 <그리스도교 교양>을 저술한 힙포(Hippo)의 어거스틴(Augustine)은 기독교의 설교란 설교자의 언변이 아닌 경건한 기도로 수행되기 때문에 설교할 때에 반드시 기도할 것을 가르친다. “자신을 위해서 또 연설을 할 상대방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그는 발언자(發言者)이기에 앞서 탄원자(歎願者)가 되는 것이다. 말을 해야 할 시간이 임박하여 혀를 놀려 설교하기에 앞서 자신의 목마른 영혼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마신 바를 내놓을 수 있고 가득 채운 바를 퍼줄 수 있는 것이다.”(XV, 32). 고전 수사학에 능통하였던 어거스틴은 수사학적 기법보다 기도를 더욱 강조하였다. “에스더 여왕이 임금 앞에서 자기 백성의 현세적 구원을 위해 말씀을 드리기 전에도 기도를 올렸다면, 사람들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에 종사한 사람은(딤전 5:7), 이런 은혜를 받고자 얼마나 많은 기도를 올려야 하겠는가?”(XXX,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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