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교수의 개혁주의 설교학] (11)설교자는 언제나 ‘학생’이어야 한다박태현 교수(총신대학교 설교학)
“설교자여, ‘무거운 책’을 읽으시오”
설교자란 모름지기 자신이 전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하고 정통한 사람일 뿐만 아니라, 은밀한 기도의 골방을 지키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앞서 주장하였다. 이제 설교자의 ‘독서생활’을 살펴보자. 설교자에게 책 읽는 습관은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올라 기도하신 것처럼, 설교자는 습관을 따라 기도의 골방뿐 아니라 서재에 들어가 독서해야 한다.
목회자의 서재는 많은 스승들을 모신 ‘학문의 전당’이요, 때때로 새롭고 낯선 논제에 대하여 치열하게 토론을 펼치는 ‘정신적 씨름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순히 전통에 매여 앵무새처럼 옛 것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새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전통과 옛 것을 무조건 진부하다는 이야기로 치부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통과 옛 것을 성경의 빛에 비추어 우리 시대에 직면한 도전과 환경에 적합하게 새롭게 해석하고 적용하자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화란의 개혁주의 신학자 바빙크(H. Bavinck)가 말하는 개혁주의의 올바른 정신이다.
신학이란 본질적으로 과거에 뿌리를 둔 보수적인 동시에 미래를 지향하는 진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독교회의 유구한 역사 가운데 앞서간 신앙 선조들의 지혜의 어깨 위에 서는 특권만 아니라, 동시에 후세대를 위하여 신뢰할 만한 든든한 어깨 받침을 놓는 사명과 특권을 지닌 개혁신학의 후예들이다.
목회자의 독서를 이야기하면서 필자가 이처럼 거창하게(?) 개혁신학을 운운하는 것은 진정한 독서 없이는 결코 참다운 목회란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이미 3주 전 ‘목회자는 말씀에 정통한 학자여야 한다’는 글에서 16-17세기 영국 청교도 목회자들의 ‘학식있는 목회(learned ministry)’를 소개하였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언제나 ‘학생(student)’이어야 한다. 학생이란 라틴어 ‘studere’에서 기원한 것으로 ‘애써 노력하다’, ‘열망하다’, ‘헌신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애써 노력하지 않거나 열망하고 헌신하는 자세가 없다면 학생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학생으로서 목회자는 능동적으로 책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로이드 존스(Lloyd-Jones) 목사는 목회자가 신학교 졸업과 동시에 신학 수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큰 실수라고 지적하면서 지속적인 독서생활을 충고한다. “설교자는 그의 생이 끝날 때까지 끊임없이 신학 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많이 읽을수록 더 좋습니다.” 책을 유난히 좋아하고, 학문적 실력도 갖춘 필자의 한 친구는 한 권의 책에서 단 한 줄이라도 배울 것이 있다면 책을 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끌려 필자는 한 동안 많은 책을 구입하고 수집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180도 바꾸었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좋은 책 한 권을 반복해서 읽고 소화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임을 깨달았다.
교회와 목회에 관하여 수십 가지의 책들이 수시로 쏟아져 나오는 기독교 출판의 홍수 시대에다, 더욱 분주해진 목회 환경으로 인해 제한된 시간을 지닌 현대의 목회자들에겐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적용할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목회자는 각종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익사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한 권의 좋은 책을 택하여 그 책을 완전히 내 것으로 삼기까지 반복해서 읽는 일이 필요하다.
더구나 필자는 개인적인 경험, 즉 바빙크의 『개혁교의학』을 번역하면서 좋은 책이 주는 큰 유익을 발견하였다. 좋은 책이란 하나의 주제를 성경적으로, 신앙고백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개괄할 뿐만 아니라 그 주제의 실천적 적용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다양하고도 많은 자료들을 하나의 논지에 맞게 배열하고, 또한 비평적으로 살펴서 그 장단점을 가려 분별력을 길러주는 것이 바로 좋은 책이요 훌륭한 책이다. 따라서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마치 사상의 깊은 샘에서 길러낸 차가운 냉수를 마신 것처럼 시원한 느낌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독서가 속된 말로 ‘설교에 써 먹기’ 위한 독서라면, 이는 고치기 힘든 ‘목회자의 직업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성경을 읽기보다 단지 설교하기 위해 성경을 뒤적이는 목회자의 ‘직업병’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실상 독서의 진정한 목적은 C. S. 루이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정보와 지식의 습득과 축적을 넘어 독자의 사고를 자극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편하게 소파에 앉아 읽기 쉬운 에세이보다 깊은 사고와 분석적 작업을 요구하는 무거운 책을 읽는 것이 더 낫다. 이것은 필자가 에세이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도 아니요, 독서의 즐거움마저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회중들의 영혼을 돌보는 막중한 책임을 맡은 설교자가 씨름해야 할 주된 작업인 신학적 주제를 전제하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얄팍한 책을 읽기보다는 무거운 책을 선호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로이드 존스 목사의 권면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독서를 계속하고, 대작(大作, the big works)들을 읽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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