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가르치는 추수감사절
(출 34:22-24)
(출 34: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출 34:23) “너희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 보일지라” (출 34: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오늘은 한 해 동안 각자에게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는 추수 감사절입니다.
금년에는 예년처럼 형식적인 추수감사절이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감사할 것인가를 한 주간 전에 미리 교육을 받고 한 주간동안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 성령님의 은혜, 가정을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건강을 주신 은혜, 그리고 감사할 수 있는 주신 은혜를 매일 감사하는 일곱 번 감사운동’을 실천하여 습관화하고 일 년 내내 생활화함으로 감사를 체질화하자고 하였습니다.
그 증거로 매일 감사를 드리는 헌금통 일천여개를 자원하여 가지고 갔습니다. 실천하고 계시는 줄 믿고 실천하는 이들에게 더욱 감사할 일이 많아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마다 드리는 추수감사절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우리는 도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추수감사절이라는 말이 잘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추수감사절의 유래를 미국 교회 전통에서 따 온 것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예 화
1620년경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100여명이 넘는 청교도들이 대서양을 건너서 신대륙을 찾아왔습니다. 배를 타고 건넜으나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배 안에서 숱한 사람들이 죽고 살아남은 자들만이 땅을 밟게 되었습니다. 육지에 도착한 그들이 온갖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땅을 개간하여 그 해에 농사를 지어 첫 곡식을 하나님께 바치며 감사를 드렸는데 이것이 미국 추수감사절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 후 1941년 의회에서 추수감사절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고, 11월 넷째 주 목요일을 국가적인 감사절기로 지키며 오늘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 추수 감사절기에 미국 국민들은 직장도 쉬고 학교도 휴교하면서 그 어느 날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큰 축제의 절기로 보내고 있습니다.
물론 본받을 만한 좋은 전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형식까지 따를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다만 형식이 다를 뿐이지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추수를 마치고 조상신들에게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추석이라는 명절을 아직까지도 굳게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것도 감사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감사가 곡식을 열매 맺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익어가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아니라 추수와 무관한 죽은 조상이 신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조상신에게 감사하는 추석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우상숭배와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농촌이 아닌 도시에 산다고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농촌에서 생산된 것을 먹고 살기 때문에 설령 농사를 짓지 않을지라도 추수감사에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농촌에서 추수가 없다면 도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에 추수 감사는 시골 사람에게만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
그렇다면 오늘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참된 기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물론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향하는 개혁주의는 성경이 가라는데 까지 순종하고 따라 가는 것입니다.
1. 성경적인 유래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근거라고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 조상이 아닌 이스라엘 조상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의 추수감사절 전통처럼 우리와 별로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이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근거라고 말하는 까닭은 우리가 육신의 혈통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무관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우리의 영적인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말씀을 오늘의 우리 교회도 따르는 것입니다.
(출 34: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애굽에서 사백삼십년 동안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 유월절입니다.
초실절은 유월절이 지난 오십일 후에 첫 곡식을 수확한 것을 감사하여 지키는 명절로 오순절이라고도 합니다.
수장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년의 농사를 마치고 갈무리하면서 광야 사십년 생활을 기념하며 지키는 명절로 초막절 또는 장막절이라고도 하는데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유래입니다.
(신 16: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물론 출애굽의 역사는 단 한번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출애굽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유월절을 비롯하여 맥추절과 초막절을 자손 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 16:16)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신 16: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새 나라를 건국한 이후 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삼대 명절을 꾸준히 지켜 왔습니다.
(대하 8:13) “모세의 명을 좇아 매일에 합의한 대로 안식일과 월삭과 정한 절기 곧 일 년의 세 절기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드렸더라”
이와 같은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아니라 후일에 이방나라 사람들까지 지키지 아니할 때 재앙을 내리겠다고 요엘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지자 요엘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그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셔서 알곡과 쭉정이를 나누고 심판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슥 14:18) “만일 애굽 족속이 올라오지 아니할 때에는 비 내림이 있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아니하는 이방 나라들의 사람을 치시는 재앙을 그에게 내리실 것이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미 지나간 날 단 한번 있었던 유월절과 그것을 근간으로 하는 맥추절과 장막절을 자손대대로 지키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것은 과거를 추억하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게 하려는 과거 지향적인 의미 때문이 아니라 그와 같은 과거의 사건은 오늘 현재와 오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더 풍성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한 예언적인 명절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과거의 초막절보다 더 큰 명절은 어떤 것일까요?
2. 영적인 의미
구약 성경이 단순한 이스라엘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역사를 뛰어넘어 미래 신약 시대에 반드시 성취될 일에 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은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유월절의 예언과 성취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의 역사를 기념하는 유월절이 과거의 기념에만 그치지 않고 미래의 예언으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 예언을 어떻게 이루셨는가 하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이 신약 성경 가운데에도 유월절이라는 말이 66번이나 등장하는데 예수께서 그 유월절의 예언을 어떻게 성취하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눅 22: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하여 어린양을 취하라고 명령하였고 그 양을 잡아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먹음으로 애굽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과거의 유월절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와 같은 유월절이 없었다면 맥추절도 초막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초실절에 첫 결실이 적을지라도 출애굽한 것을 생각하면 감사한 것 뿐이고, 일년 농사를 다 마치고 풍족한 결실을 갈무리 하고나면 겨울이 와도 걱정꺼리가 없으니 더더욱 감사한 일입니다.
구약의 유월절 보다 더 큰 명절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약 성경에 예수님을 가리켜 어린양이라고 일컫는 말씀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특히 계시록에 많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할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의 문설주와 문 인방에 바르고 그 안에 온 가족이 들어가니 이스라엘 백성은 재앙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이와 같은 증언은 예수님이 온 인류를 사단의 손에서 출애굽시키기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흠 없고 점 없는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희생 제물은 흠과 점이 없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이에 죄 없으신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흠과 점이 없는 어린양으로서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 성도를 온갖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이를 종합해 볼 때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오늘 우리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표가 되는 말씀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그 큰 구원을 다 이루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3)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기업이 있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일년 농사를 추수하여 창고에 가득 채웠다고 할지라도 일년이 지나면 그 창고는 비게 되기 때문에 다시 곡식을 심고 가꾸고 거두는 수고를 해마다 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양이 되셔서 대속의 제물이 되어주셔서 구원을 받은 우리에게는 영원히 주리지 않는 하늘에 기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원한 장막이 되어 주심으로 영원히 주리지 않는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계 7:10)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15)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계 7:16)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이스라엘의 명절 특히 오늘 추수감사절에 해당하는 장막절이 그렇게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우리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성대한 유월절과 초실절과 장막절을 지켜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의 성경적인 근거인 것입니다.
3. 바람직한 감사
유명한 병원처럼 원인만이 아니라 처방까지 하여 환자를 고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감사의 형식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바람직한 감사가 어떤 것인지 그 의미까지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 잘못 생각하기 쉬운 것은 돈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기가 쉽지만 가난한 사람은 감사하라는 말씀이 부담이 되기 때문에 헌금에 대한 가르침이나 설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감사는 아주 공평한 감사이고 억지로 하는 감사가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리는 감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 16:10)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칠칠절을 지키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고”
여기서 ‘지키되’라는 말(hc;[ 아사)은 의무를 가리키는 와우 계속법으로 오늘 우리들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는 명령의 말씀입니다. 또 ‘주신대로’라는 말(@t'n:, 나탄))도 과거에 주신 것만이 아니라 미완료로 아직 주시지 않은 복까지를 포함합니다.
또 ‘헤아려’라는 말(hS;mi, 밋사)은 ‘충분하다’는 의미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말이 ‘자원하는’이라는 말(hb;d;n 네다바)도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자라고 덜 부담이 되고 가난한 사람이고 크게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부자가 더 감사하기가 부담스러울 수 있을 수 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많이 받은 것을 생각하지 않고 많이 감사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 모범적인 사례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세울 때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 모습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출 35: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그와 같은 모습이 후일에 또 성경에 등장하는데 그것은 다윗이 성전을 자기 손으로 건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에 준비하였던 성전 건축 예물을 하나님께 드릴 때 다윗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자원함으로 넘치도록 드렸습니다.
(대상 29:9) “백성들은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기뻐하였으니 곧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렸으므로 다윗 왕도 심히 기뻐하니라”
왜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물론 하나님이 주신 분복대로 힘을 다하는 것이라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신 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심을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렇게 감사하는 자에게 더 크고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명분 쌓기임을 오늘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출 34:24) “내가 이방 나라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네 하나님을 뵈려고 올 때에 아무도 네 땅을 탐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이 약속대로 가나안 족속들을 내쫓으시고 이스라엘 나라를 건설하게 하셨고, 이 약속대로 다윗의 지경을 넓히셨고 이스라엘 나라를 견고하게 하여 이방 나라가 감히 침략하지 못하게 하셨고 조공까지 되받게 하여주셨습니다.
(삼하 8:6)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추수감사절이 여러분들에게 부담이나 올무가 되지 않고 감사의 축제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출 34:22)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세말에는 수장절을 지키라”
여기서 지키라는 말(.gj 하그)의 뜻이 축제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께서 지난 한 해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마음 중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축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헌금을 해줄 것을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어 호소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교회는 모든 교회의 모 교회였으나 너무나 가난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특별 구제 헌금을 모금하였습니다.
다른 마게도냐 교회들은 매우 가난한 가운데도 동정심이 아니라 신앙심으로 최선을 다해 예루살렘 교회를 돕는 헌금을 작정하고 이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가장 부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인색하여 헌금을 약속하고도 일년이 지나도록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사도 바울은 인색한 고린도 교회를 걱정하면서 고린도 교회에게 당부한 세 가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받고 순종하면 다른 사람이 아닌 오늘 우리가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1) 기도하는 마음으로 미리 준비하라
2) 인색한 마음으로 드리지 말라
3)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드리라
바울 사도는 그와 같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비난이나 책망보다는 진정한 헌금의 자세와 그 축복에 대해서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추수감사절 아침 최고급 감사를 받아가지고 가는 성도들에게 1) 모든 은혜가 2) 모든 일에 3) 모든 착한 일에 항상 넘치게 하시는 축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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