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교/이규왕목사

모자람이 없는 교회/(살전 1:6-8)

미션(cmc) 2015. 12. 7. 06:08

모자람이 없는 교회
(살전 1:6-8)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이 교회는 하나님의 편에서는 택하심과 부르심을 받은 신앙 공동체요, 예수님의 편에서는 주님의 몸이요, 성령님의 편에서는 임재하여 계신 전입니다.
또한 이와 같은 교회의 시작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인간이 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네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마 16장 16절에 약속하신 말씀대로 주님이 세우셨고, 주님이 주장하시는 신령한 곳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와 같이 거룩한 교회 안에는 천사가 아닌 유한한 인간들이 모였고,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죄인인 인간들이 주도적으로 교회를 이끌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한 것은 그와 같은 교회 안에서는 거룩한 예배와 기도가 지속적으로 행해지고, 또한 그 교회를 통해서 복음이 지역과 나라와 세계로 확산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와 성도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이와 같은 신비스러움을 경험한 성도는 세상 부귀권세를 통해서 맛볼수 없는 진정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을 경험하게 되고 더욱 충성하여야 하겠다는 결심과 각오와 다짐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1. 교회의 유형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 들 가운데 삼분의 일은 과연 이런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고 싶을 정도로 문제가 많은 교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러한 교회들을 내치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모범적인 교회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심정으로 그러한 교회들에게 회개하도록 권면하고, 변화를 촉구하고, 승리하기를 격려하시는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사도 바울이 살기가 등등하여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그 예수님으로부터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후 핍박자가 변하여 전도자로 변신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배신자요 배교자로 낙인이 찍혀 과거에 자기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정반대로 혹독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여러 지역에 교회들이 세워지는 대대적인 선교 사역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는 다 건강한 교회요 거룩한 교회라는 이름에 걸맞은 교회들로 부흥 성장하기만 하였을까요?
엄마가 산고 끝에 출산했다고 해서 어린아이가 다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아닌 것처럼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들이라고 할지라도 다 거룩하고 다 신령하고 다 부흥하고 성장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다 같이 바울 사도가 개척하여 세운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런 곳도 교회인가 싶을 정도로 문제가 많아 차라리 폐쇄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문제가 많은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어느 한 교회도 포기하지 않고 마치 장애우 자녀를 더욱 애틋하게 돌보는 엄마의 심정처럼 모든 교회들을 사랑했습니다.

2. 향기로운 교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나 하나가 아니라 나로 말미암아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이고 선교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선포하게’라는 말(ejxaggevllw, 엑상겔로)은 ‘비밀스러운 것을 알리고, 위대한 공적을 찬양한다’는 뜻으로 복음 전도를 뜻하는 말입니다.
물론 그와 같은 전도 행위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때로 우리는 마음에 부담을 갖고 전도를 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전도는 마치 꽃향기처럼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발생적으로 그 냄새가 주변에 퍼져나가면서 그 냄새를 맡는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것처럼 향기를 피우는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후 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고후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여기서 ‘냄새’라는 말(ojsmhv 오스메)은 좋든지 나쁘든지 간에 모든 냄새를 뜻하는 말이고, ‘향기’라는 말(eujwdiva 유오디아)은 좋은 이라는 유(eu)와 냄새)라는 오조(o[zw)라는 두 단어가 합쳐진 말입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냄새를 피우는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냄새는 꽃과 같은 향기이든지, 아니면 부패한 시신에서 풍기는 악취이든지 간에 냄새는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속성입니다.
오늘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가운데서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교회였습니다. 그 향기는 결코 교회 건물이 웅장하다든지 교세가 많다든지 교인들 가운데 사회적인 저명인사들이 많다는 말이 아니라 그 교회를 통해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향기인 복음의 향기가 널리 퍼져나가는 교회였습니다.
물론 오늘 성경의 데살로니가 교회도 다른 교회들처럼 인간들이 모인 교회이며 또한 눈에 불을 키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약점과 허물과 죄를 지적하기에 급급한 인간들에게 포위되어 있는 교회였습니다.
더구나 어느 교회보다 박해가 심한 교회이기 때문에 성도들이 개인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만도 벅찬 교회였습니다.
해아래서 완전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교회가 어찌 부족한 것이 없을 수 있을까요? 한두 가지가 아니라 온 통 부족한 것뿐이기 때문에 날마다 회개하기에 바쁘고 비난과 책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 불완전한 인간들이 모인 교회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는 주변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받을 만큼 인간적인 악취가 나는 부정적인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정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교회, 본받고 싶은 교회, 칭찬하고 싶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고린도 교회와 같은 지적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여기서 ‘아무 말도’ 라는 말(creiva 크레이아)은 ‘필요성, 결핍, 부족함’이라는 뜻으로
이 말은 책망이 아니라 조금 미흡하고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 지적할 것조차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모자람이 없는 교회’라고 정한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 교회는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아서 문제가 아닙니까? 사랑이 식어졌고, 거룩성을 상실했고, 화평을 잃어버렸고, 전도의 열정을 상실했고, 선교의 사명을 망각하고 말씀과 기도가 부재하여 겨우 목숨만 할딱거리는 중환자처럼 주일 예배 하나로 버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성경에 데살로니가 교회는 전도지를 들고 다니면서 열정적으로 전도하거나 타 지역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이 아름다운 꽃향기처럼 사방으로 퍼져나가서 다른 교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어느 교회보다 외적이 조건이 열악하고 어느 교회보다 신앙 연조가 짧고 어느 교회보다 가난하고 핍박이 많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렇게 모자람이 없는 교회가 될 수 있었는지 그 비결이 있다면 우리 교회도 반드시 닮고 배워야 할 모델 교회인 것입니다.

3. 칭찬의 비결
데살로니가 교회가 그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그와 같이 아름다운 신앙을 꽃 피우고 향기를 발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었는가를 오늘 성경이 가르치고 있습니다.
(살전 1:6)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여기서 ‘많은 환난가운데’ 라는 말(qlivyi", 들립시스)은 외부적인 억압과 박해로 말미암아 데살로니가 교회가 겪은 고통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불과 세안식일만 복음을 전하고 급하게 떠나게 된 원인도 그와 같은 핍박 때문이었으며, 바울이 떠난 후에도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와 같은 고난을 겪어야만 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살전 2: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리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고 겨우 버티지 않고 넉넉히 이겼고 오히려 그것을 기쁨으로 견뎌냈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남다른 용기와 담력과 인내심이었을까요? 그러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은 그런 정도의 것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인간 한계 이상의 환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1) 성령과 말씀
(살전 1:5)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바울이 처음으로 데살로니가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의 상황을 회고한 부분입니다. '말로만‘하는 설교는 성령의 감화가 동반하지 않은 설교로 아무리 웅변적이고 수사적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사람의 마음속까지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큰 확신'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의 긍정적인 변화의 원동력은 사도 바울의 탁월한 말솜씨가 아니라 오직 성령과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다는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힘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난을 당할수록 그것을 내 힘으로 이기려고 노력하기보다, 먼저 기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 생활보다 더 좋은 방법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사람이 배우는 방법에는 읽고 배우고 듣고 배우고 보고 배우고 닮고 배우고 경험하여 배웁니다. 그 중에 가장 확고한 배움은 닮고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이 자랄수록 자연스럽게 다른 교회들에게 소문이 들려지게 되었고 다른 교회들이 보게 되었고 다른 교회들이 닮으려고 하였고 그 결과 본이 되는 교회가 된 것입니다.
(살전 1:7)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여기서 ‘본’이라는 말(tuvpo" 튀포스)은 ‘마치 인감도장 사본처럼 똑같이 닮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한 좋은 소문이 나는 꽃향기처럼 주변 교회와 지역 교회에 퍼져나가게 되었고, 우리 교회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고 닮아야 하겠다는 바람이 마게도니아 지역 교회들을 휘몰아치게 된 것입니다.
(살전 1: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결  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교회를 산위에 등대로 비유하셨습니다.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산위에 등대는 돋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경제나 정치보다 훨씬 더 발전하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갈수록 점점 더 칠흑같이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세상을 밝혀야 할 교회가 마치 불 꺼진 등대처럼 존재감을 잃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일수록 교회가 의기소침해 있을 것이 아니라 빛을 발하는 참된 교회로 거듭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교회의 소문은 참 중요합니다. 좋은 소문이 나야 합니다. 좋은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금번 중국 선교를 하나님의 은혜로 무사히 잘 다녀왔습니다. 반응이 매우 긍정적이었고 성장이 침체된 교회에 활력소를 부어주셨다고 고마워하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여러 성도들의 기도 도움이 있었기 때문임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중국 교회가 한국 교회를 와서 배우겠다고 합니다. 마치 오늘 성경에 데살로니가와 아가야와 마게도니아 지역의 교회들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본받기를 원한 것처럼 중국 교회가 우리 교회의 시스템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 지도자들을 나누어서 우리 교회에 보내어 교육과 훈련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의 선교는 복음만 전하는 선교가 아니라 주님의 몸된의 예배 교육 전도 봉사 섬김의 시스템을 통째로 전하는 총체적인 선교를 해야만 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 중국교회는 한국 목사나 선교사가 입으로만 가르치는 교육이나 훈련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과연 한국 교회가 그처럼 믿고 실천하는 교회인지를 보고 배우기를 원합니다.
이제 미래의 선교는 선교사나 목사만의 몫이 아니라 전교인들과 더불어 함께 해야 할 총체적인 선교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장하며 선교하기로 목표를 정해 놓은 우리 교회가 닮고 배워야 할 모델 교회가 바로 모자람이 없는 데살로니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나만 천국가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널리 선전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첫째,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에 사람의 말로 듣지 말고 설교 말씀을 듣고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둘째, 말씀을 듣고 가정과 직장과 교회 안에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라는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직분과 책임을 성실하게 감당하고 사랑의 꽃향기를 풍기는 모자람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셋째, 나 혼자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주일학교에서부터 장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서, 모든 성도들이 복음의 꽃향기를 발하는 선교의 모델이 되는 모자람이 없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바로 그와 같은 교회가 어두움이 점점 더 깊어만 가는 이 시대에 등대와 같은 교회요, 향기를 발하는 교회요, 소문난 교회요, 모자람이 없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