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말한다] (10)현대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무시무시한 자유'에 내몰린 현대인에 하나님 사랑 알게 하자
참된 복음의 진리 경험하지 못한 시대, 확고한 복음신앙과 회심 강조해야
▲ 김남준 목사(열린교회·총신대 교수) |
“점점 담장이 높아지고 있다. 하나였던 땅이 둘로 나뉘어 간다.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빙하에서 떨어진 유빙이 바다 위로 멀어져 가는 것처럼….” 오늘날 조국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대한 그림이다. 교회는 계속 세속화되어 가지만 세상에서 겉돈다. 교회는 세상을 받아들이는데 세상은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분명 교회의 정체성과 세상에 대한 영향을 강조하는 성경의 가르침과는 다른 상황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상).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
기독교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곧 기독교 사상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행동들은 일관성 있는 신념의 체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조국교회에서 이단들이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도 이러한 우리의 약점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조국교회가 성경교육과 함께 교리교육을 강조해야 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조국교회의 신자에게는 복음의 능력으로 굳게 서 있는 영적 준비와 함께 기독교 사상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가 꼭 필요하다. 더불어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시대사조와 대화할 수 있는 지적준비도 갖춰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시대를 이해하고, 거기서 “시대의 표적”(마 16:3)을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시대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믿는 바를 전달하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사고방식으로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믿고 소망하는 바를 변증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을 것을 성경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벧전 3:15).
그리스도의 양떼들은 자신의 시대 안에서 그 시대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시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 앎은 비판적이면서도 사랑을 동반한 앎이어야 한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빌 2:15). 이 말씀은 단지 교회와 이 시대를 선악의 대립구도로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구원받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세상이다.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이 시대는 어떤 시대인가?” 이 물음은 곧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정신(Weltgeist)의 특징을 묻는 질문이다. 현대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의 시대이다. ‘후기 근대주의’ 혹은 ‘탈(脫)근대주의’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모더니즘, 즉 ‘근대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근대주의’(Modernism)는 과학과 문화에 영항을 받은 새로운 사조로서 그 이전의 전통이나 권위에 의해 강요된 집단적 복종을 거부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삶의 주체로서 개인의 권리를 강조한다. 근대주의 시대를 도입한 사상이 바로 계몽주의(the Enlightenment)이다. 원래 ‘계몽’이라는 말은 시대보다는 개인이 관여했던 일련의 철학활동과 수행과정을 가리켰다. 그러한 활동들은 자연, 인문, 사회과학의 관심사 속에서 적용되었고 19세기에 와서야 이성중심의 세계관을 위한 지적활동을 특징으로 하는 시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르네 데카르트(R. Descartes)의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인간 주체에 대한 강조, 임마누엘 칸트(I. Kart)의 인간의 지식능력에 대한 비판과 자율의 강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뉴턴(I. Newton)의 자연세계의 질서를 수학적 법칙으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장자끄 루소(J. Rousseau)와 존 로크(J. Locke)의 정치철학, 찰스 다윈(C. R. Darwin)의 인류 진화론과 아인슈타인(A. Einstein)의 상대성이론 등에 입각한 상대주의를 중심으로 발달하여 철학은 물론 사회와 경제, 과학과 기술, 학문과 예술을 비롯한 종교와 문화전반에 걸쳐 커다란 계몽주의의 영향을 끼쳤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라고 부르는데 이는 현대가 기본적으로 근대의 특징인 ‘개인주의’와 ‘이별성’(異別性)을 계승하면서도 근대와 다른 시대정신을 따르고 있는 시대임을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개인의 판단을 중심으로 한다. 근대주의에서는 판단의 기준으로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였으나, 현대는 이성보다는 인간의 감성을 더욱 중요시한다. 현대는 이성의 신뢰성에 대한 비판 위에 서 있다. 가치의 근거를 묻는 것과 같은 철학적인 거대담론은 대체로 거부된다. 그것이 기득권층을 위한 이익을 동기로 구축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진리와 그것을 찾아가는 이성의 우위성을 부인하게 되므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무엇을 느끼느냐이다. 더욱이 과학기술의 진보와 함께 물질적 풍요 속에서 폭발적으로 발전한 감각문화는 이를 더욱 촉진하였다.
둘째로, 공동체의 이익보다도 개인의 행복과 평화를 더 우선시한다. 사회의 정의에 대한 관심도 대의보다는 개인의 행복에 집중되어 있다. 또한 현대인은 행복과 평안을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감각적 문화주의에 몰입함으로써 소비욕구의 충족을 위해 더욱 치열한 경쟁으로 내몰린다.
셋째로 도덕적 상대주의다. 근대주의 아래서 의심없이 받아들여지던 도덕의 근거들은 다시 의심받거나 거부된다. 도덕은 자체로서 선험적인 근거를 갖지 못하고, 인간의 행복과 이익에 유용한지를 묻는 물음에 직면한다. 현대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대적이지 않고 잠정적이고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그래서 절대기준으로서의 도덕은 거부된다. 이런 상대주의를 신학에 적용할 때 종교다원주의가 된다.
넷째로, 종교 없는 신비주의다. 근대주의는 종교를 부정하였다. 이는 종교의 실재가 이성에 의한 판단의 한계 밖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니체(Nietzsche)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을 때 예고했던 것처럼 “많은 신들이 비처럼 내리고” 있다. 그는 종교를 비이성적 신념의 체계로서 특정집단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보았는데, 헤겔(Hegel)이 인간 이성을 유토피아로 인도할 안내자로 본 것이나, 데카르트나 칸트가 인간을 언제나 이성적으로 사유할 능력을 가진 존재로 본 낙관 같은 것들도 근대주의의 정신을 대변하는 사상이다. 한스 큉이 예고한 바와 같이 “종교가 사멸하리라”는 것은 심각한 환상이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의 종교와 초월에 대한 관심은 단지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겪는 정신의 빈곤과 이에 대한 새로운 ‘보충방법’의 추구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현대정신이 기독교에 주는 함의
물질문명의 발달은 자원의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의 파괴로 인류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현대인들은 실제로 그 불안을 느끼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철학자들은 이러한 불안을 감지하고 있었다. 문명사회를 떠나 살았던 하이데거(M. Heidegger)의 테크놀로지 사회에 대한 경고나 “인류는 자신들을 섬기기 위해 발명한 기계들의 종이 되어가고 있다”라는 케네스 갈브레이스(J. K. Galbraith)의 한탄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엄밀한 과학주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뉴에이지(New Age) 운동이 각광을 받는 것은 테크놀로지 사회에 지쳐 신비주의를 찾는 현대인의 상반된 욕구를 보여준다. 그들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 사람들이다. 기독교 안에서 참된 경건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은혜가 사라짐으로써 이러한 욕구가 그릇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중심적’인 사고방식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객관적 진리의 근거로서 성경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자신을 정위하고 가치를 재설정해야 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교회에서 넘쳐나는 자기개발의 프로그램과 행복에 대한 구호는 이러한 현대사상을 따른 것이다. 이러한 프로그램과 구호 속에서 회개와 믿음에 대한 진지한 요청은 실종되어 버렸다. 이상하지 않은가? 오히려 이러한 시대상황은 조국교회가 확고한 복음신앙과 회심을 강조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진리(veritas)이다. 아우구스티누스(A. Augustinus)가 말한 바와 같이 진리의 가장 탁월한 효용성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 진리없이 세계와 인간과 사물, 심지어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영구불변의 객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인한다. 그것을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폭력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 밀턴(J. Milton)은 “진리는 사생아 같이 이 세상에 왔다. 그를 낳은 이는 언제나 오명을 뒤집어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이 고안해 낸 사상 중 영향력을 끼친 것들 가운데 폭력성을 가지지 않은 것이 어디 있는가? 어떤 점에서는 근대 이성 중심주의와 과학 테크놀로지, 과학 철학에 의한 과학에 대한 반성 자체가 이러한 폭력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진리를 사회의 전통에서 답습된 가치관 정도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고수하는 것 자체가 진리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리차드 로티(R. Rorty)가 “모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짜 맞춘 것이다”라고 한 것은 기독교를 포함해서 모든 전통적인 진리가 근거가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믿음으로 이루어진 사고의 체계이다.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계를 하나의 관점에서 서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한다. 성경은 인간이 이러한 신앙을 단지 이성의 설득에 의해 가질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믿음의 체계라고도 말할 수 있으니, 이는 기독교 사상이 성경 진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가치 체계임을 가리킨다.
한 사람이 자신을 가치 판단과 질서의 중심이라고 여기던 데서 돌이키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회심의 체험은 다양하기에, 극적인 경험이 반드시 회심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회심은 중생과 회심이 가져온 지성적 판단의 입각점과 사랑하는 대상, 그리고 사랑이라는 성향의 변화다. 중생을 통해 분여되는 영적생명의 본질은 인간 의지 안에 ‘새 마음’이 심기는 것을 의미한다(겔 36:23).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심으시는 하나님 사랑으로서 그의 삶이 영적 선을 향하게 하는 경향성 혹은 지향성이다. 이것은 회심을 통하여 그가 의식할 수 있도록 현실화된다. 이러한 영혼의 변화는 그의 인격과 삶 전체를 포괄한다. 이러한 변화 없이는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요 3:5).
헤르만 바빙크(H. Bavinck)의 말처럼,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갈망하면서도 그분을 떠나 도망치는 존재”다. 이 말은 또한 현대인들이 극단적 자유와 자율, 그리고 상대주의에 싫증을 느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간의 가치와 존재 근거의 모든 것을 부인해 버리고 도달한 ‘무시무시한 자유’에 현대인이 만족할 리가 없다. 이는 그들 안에 여전히 하나님을 알 가능성이 있고, 그분의 형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행 17:27). 시대가 이러할수록 더욱 복음의 본질에 충실한 교회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두운 시대에는 복음의 불꽃이 더욱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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