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특별기고

[한국교회를 말한다] ⑫ 빛으로 산다는 것

미션(cmc) 2016. 8. 13. 08:02

[한국교회를 말한다] ⑫ 빛으로 산다는 것

위태롭게 떠 있는 세상에 하나님 은혜의 빛을 비춥시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섬김은 빛으로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는 것

 

김남준 목사(열린교회·총신대 교수)

젊은 시절, 섬에서 몇 달 간 공부하며 지낸 적이 있다. 어느 날 오후, 육지로 나가기 위해 배를 탔다. 아침부터 파도가 높게 일어 ‘배가 못 뜰 수도 있겠구나’ 했는데, 그래도 출항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목적지가 절반쯤 남았을 무렵, 회항 명령이 내려졌다. 해가 지자, 파도는 더욱 거세졌다. 배는 곧 뒤집힐 것처럼 큰 파도에 떠밀려 가랑잎처럼 흔들렸다. 천신만고 끝에 떠났던 항구로 되돌아왔을 때의 광경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온 천지는 칠흑처럼 캄캄한데, 반짝이는 등대의 불빛이 거친 풍랑의 바다에서 항해하던 여러 척의 배들을 안전한 항구로 인도하고 있었다.

진리 없는 실용주의 시대

오늘날 시대정신의 특징은 객관적 진리의 존재를 철저히 부인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진리가 내팽개쳐지고 도덕 그 자체가 상대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시대이다. 현대인은 기득권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수립한 인간 억압의 수단이 도덕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도덕을 통해서가 아니라 근거 없는 억압으로부터의 완전한 인간 해방을 통하여 성취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존 듀이(J. Dewey) 등에 의하여 전개된 실용주의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였다. 그들이 확산하고자 하였던 신념은 “절대적 진리는 없다”라는 것이었다. 실용주의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떤 가치를 따라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박탈해 버렸다. 러셀(B. Russell)은 “내 평생 과업은 진리를 허물어뜨리려는 것이었다”라고 했다. 절대적 진리란 없고, 진리를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실용주의적 정신은 새로운 가치관을 생산해 냈다. 그것은 바로 이웃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는 것만 아니라면, 용납되지 못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실용주의적이고 가치 상대주의적인 사상이 광범위하게 유포됨으로써, 인간은 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그 자유의 대가로 끊임없는 죄악과 방종, 방황과 고독, 철저한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간의 사고는 물질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사회는 더욱 더 치열한 경쟁구조로 나아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인간은 사회적 관계, 의무와 책임을 생각하게 하는 가치망(價値網)을 상실하였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모든 빛을 완전히 제거해 버리시고 그것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박탈해 버렸다면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우리 안에 희미하게나마 그 빛을 일부를 남기셨다. 이것이 바로 ‘본성의 빛’이다. 이 빛이 올바르게 발견되고 적용되기만 해도, 인간 사회에 나타나는 죄의 무모함과 광기, 그리고 맹렬함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성의 빛’이 계시의 빛에 의하여 지도받지 못할 때, 잘못된 세계관과 결합하여 다양하게 굽은 모습으로 인간의 삶과 지성 안에 표출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현대인의 쾌락주의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쾌락에의 탐닉은 단순한 악이 아니라 종교심리적 현상이다. 이렇게 쾌락에 탐닉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절대 가치에 대한 거부와 상대주의이기 때문이다.

빛으로 사는 길

성경은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上). 이 말씀은 현재직설법이다. 즉 앞으로 빛이 될 가능성이 있다거나 혹은 열심히 노력하여 빛이 되라는 당부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표지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절대로 없는 빛이 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 내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는 사실은 신자의 마음 속에서 어떤 식으로도 사라질 수 없는 빛이다. 그 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빛이며, 내적인 자질로부터 비롯되는 빛이다. ‘그 빛’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설명된다. 첫째로, 신학적 의미에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빛을 받음으로 빛이 된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경험하고 그분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림으로써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어 빛으로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윤리적 의미에서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이라고 표현하셨을 때 그것은 단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비관적 세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세상이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이시지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세계와 역사와 이웃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한 관계에 충실하게 사는 삶과 그 관계 너머에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일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섬김은 그 빛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건 (F. Bacon)은 <신기관론>(Novum Organon)에서 ‘동굴의 우상’이라는 말로 인간이 자기가 가진 지식을 절대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상태를 설명했는데 이는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의 비유를 기초로 한다. 동굴의 비유는 지하 동굴에서 일평생 사지와 목이 결박된 채 횃불이 만들어 낸 그림자만 보며 살던 사람들이 실체를 알게 되고, 이윽고 동굴로부터 올라와서 밖의 현실세계를 보게 되고, 그 지식을 가지고 아직도 동굴 속에 있는 무지한 이들을 일깨우기 위해 동굴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무지로부터 깨어나 동굴로부터 올라온 것을 ‘아나바시스’(anabasis), 그들을 구하러 다시 내려가는 것을 ‘카타바시스’(katabasis)라고 한다. 이것은 참된 것을 본 사람들의 숙명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다. 진리와 사랑이 그들을 구원하여 행복을 누리도록 불렀으나, 그들은 세상을 향한 또 다른 사랑 때문에 다시 내려간다.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은 곧 세상이라는 동굴로 다시 내려간 사람으로서, 동굴 밖에 존재하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경험한 사람의 정체성을 동굴 안에서도 보여 주어 동굴에 갇힌 사람들에게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보다 더욱 훌륭하고 행복한 삶이 있음을 알리며 산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윤리적 행동만이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효과다.

조국교회가 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필수적이다. 첫째로, 사상적인 빛이다. 이는 진리의 체계로서의 기독교 사상을 소유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성경과 교리를 철저히 가르치는 교회와 이를 이해하는 신자들이 요구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은 그 사상의 빛으로 세상의 풍조와 조류들을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목회자의 설교와 가르침은 거듭난 세계관을 교육하는 가장 탁월한 수단이다. 교회는 부지런히 기독교의 진리를 성경과 신학으로써 가르쳐 그리스도인들을 사상적으로 무장시켜야 한다. 자기가 사는 시대의 문화를 생각 없이 흡수하며 일방적으로 영향을 받는 삶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평가할 수 있도록 지성적으로 훈련시켜야 한다. 이를 위하여 목회자는 참된 회심에 대한 부단한 강조를 통해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려는 고뇌어린 몸부림을 설교와 목회 속에 담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회심한 마음은 복음과 기독교 사상이 심겨질 수 있는 가장 좋은 토양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일을 위해 교회는 지난 시대 신학적 유산을 발굴하여 알리고, 우리 시대의 신학적 결과물들을 후세에까지 전해주는 일에 이바지하는 신학자들을 존중히 여기며 성경의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후고의 염려가 없도록 배려해야 한다.

둘째로, 윤리적인 빛이다.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약교회의 이상이었다(마 5:15, 빌 2:15). 이 이상은 사랑의 헌신으로 성취된다. 지성과 사랑은 교회가 이 세상과 다른 공동체임을 나타내는 두 가지 방편으로,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프란시스 쉐퍼(F. Schaeffer)의 지적과 같이 교회는 순결해야 한다. 세상과 다른 가치관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하나님 때문에 참으로 행복한 사회’가 교회임을 세상에 당당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금욕적 고행이나 공로주의로는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진정한 회심과 진리를 아는 지식,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오기 때문이다. 신자의 거룩한 생활은 엄위롭고 영광스러우셔서 온 땅과 만물들 위에 홀로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서 떨리는 두려움을 갖는 것과,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그 놀라운 은총에 감격하는 사랑을 누리는 것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오늘날 참된 회심과 그 회심의 은혜의 보존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체들에게 베푸는 용서가 영적인 자선이라면 나눔은 육적인 자선이니, 이를 통해 교회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준다(행 2:43-47). 교회의 윤리적 순결함은 악의에 찬 세상 사람들의 비난을 멈추게 하며, 세상으로 하여금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가치를 따라 사는 성도의 삶을 비웃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함

확고한 사상이 거룩한 윤리로 열매 맺게 하는 힘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이 은혜는 본질적으로 ‘사랑의 감화’로, 성경에서 ‘객관적 호의’로서 은혜와 함께 거룩한 삶의 유효적 원인으로 강조된다(롬 16:20, 갈 6:18). 성경과 교리, 신학과 사상에 대한 지성의 지식을 사랑과 헌신, 경건과 윤리로 이어지게 만들어 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다. 이것은 성부께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내려주시는 사랑의 감화다. 이 은혜로써 불신자는 회개하고 믿음을 가지며 신자는 자기사랑을 버리고 순전한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는 신자의 삶은 자기를 버리고 주를 따르는 것인데, 이는 한 번에 끝나는 싸움이 아니다(고전 15:31, 빌 3:12). 우리가 이미 받은 은혜에 자만하지 않고 가난한 마음으로 현재 부어주시는 은혜를 갈망하여야 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세상 사조가 풍랑 이는 바다라면, 사람들은 그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와 같다. 그리고 교회는 밤바다의 등대 같은 존재로 부름받았다. 하나님은 사상과 지식이 사랑의 감화로써 윤리와 선행으로 나타나게 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등대와 같은 존재로 산다. 선지자들은 평안한 때에 고통받는 자였고, 배부른 때에 굶주린 자였다.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부요하지 않은가? 성도들의 지성을 깨워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고, 은혜를 받게 하여 사랑으로 감화시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게 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은 너무나 소수이다. 생각과 뜻이 달라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미천한 존재이다. 하나님께 무릎을 꿇자. 간절히 한마음으로 기도하자. 교회의 신령한 번영과 이 세상 나라의 정의를 위해서 목회자들과 성도들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도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