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스런 소명과 위험한 부담 안고 강단에 생명 던져라3. 개혁주의 장로교 말씀 주해 ③ 개혁주의 구약설교
구약 중시한 개혁주의 전통 바탕, 교회 공적 해석 담긴 역사적 문서들에 기초해 설교해야
‘오직 성경’은 여전히 유효한 원리…다양한 설교 방식 배워 자신의 설교 형태로 만들어야
1. 구약을 중시하는 전통
▲ 김지찬 교수총신신대원·구약 |
2. 거인의 어깨 위에 선 난쟁이로서의 겸손함
둘째로 개혁주의는 설교자란 교회사와 단절된 상태에서 직접 계시를 받아 성경을 설교하는 자들이 아님을 강조한다. 개혁주의는 설교자들이란 2000년의 역사적 기독교의 사도적 전통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견지해 오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탁월한 설교자라 하더라도 역사의 지평에서 보면 ‘교회사란 거인의 어깨 위에 선 작은 난쟁이’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설교를 결코 한 목사의 개인적인 성경 해석 행위로 보지 않고, 성경에 대한 교회의 공적 해석을 전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개혁주의 설교자들은 교회의 공적인 해석이 담긴 역사적 고백 문서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돌트 캐논(Dort Canon)을 가이드라인으로 삼으면서 구약 성경 본문을 설교해야 한다.
3. 문자적 의미의 중요성 강조
또한 개혁주의 설교자들은 구약을 설교할 때 중세의 4중 의미에 근거한 알레고리칼 설교(allegorical preaching)에 반대하여 문자적 해석(literal interpretation)을 중시 여겨 왔다. 특별히 종교 개혁자들은 성령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 가운데 역사한다고 믿었기에 설교와 성경 주석에 목숨을 걸었다.
그러나 문자적 의미로 구약을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구약 본문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현재적인 삶에 적용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야곱이 우물가에서 라헬을 만난 스토리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오늘 우리의 삶에 적실하게 설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후대 독자들에게 우물가에서 연약한 여인을 만나면 물을 대신 길어주어야 한다라는 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대와 중세 교회는 이를 알레고리칼하게 해석하여 성령의 우물에서 성령을 길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객관적인 문자적 의미에 정초하지 않은 이런 알레고리칼 해석은 주관적이고 끝내는 자의적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런 성경 해석에 기초한 교회는 건강해질 수 없음을 중세 교회가 증명해 보였다.
4. 성경 본문이 설교의 기준
그러다 보니 개혁주의는 문자적 의미를 중요시 여기게 되었고, 개혁주의 구약 설교에는 크게 세 가지 설교 타입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다: (1)모범적 설교; (2)구속사적 설교; (3)본문 중심의 설교.
오랜 동안 개혁주의의 설교는 모범적 설교(exemplary preaching)가 지배하였다.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의 본받아야할 점과 본받지 말아야 할 점을 지적하면서 도덕적 교훈이나 종교적 권면을 전하는 형식의 설교가 모범적 설교이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우리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지나치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설교를 낳게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나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에서 특별히 구약은 인간 중심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구원 역사라는 점을 강조하는 구속사적 설교(redemptive-historical preaching)운동이 20세기 전반부에 나타났고, 미국과 한국 교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을 연결시킬 때 성경 본문 자체의 깊은 주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몇 개의 도식으로 구속사적으로 설교하게 되면서 구속사적 설교 운동은 구약의 문자적 의미를 훼손할 뿐 아니라 설교자 마음대로 본문을 재단하는 프루크루테스의 침대가 될 수 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20세기 후반 이후 개혁주의 설교학자들은 모든 설교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성경 본문 자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다시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본문 안에 모범적 요소가 있으면 얼마든지 모범적으로 설교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informative)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가 따라야 할 하나님의 지령이 담긴 수행적 기능(performative)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보면 성경 본문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계획에서 나오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증거하고 있고, 지금도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기에 성경을 설교할 때는 항상 구속사를 염두에 두고 인간을 구속하려는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구속사적 설교를 하는 자들은 단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조직신학적인 틀이 아니라 성경 본문 자체에 속박되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런 점에서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라는 종교 개혁의 캐치 프레이즈는 개혁주의 설교자들에게 지금도 유효한 원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5. 본문의 장르를 염두에 둔 새로운 설교 방식을 고려해야
마지막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최근에 들어서서 성경의 의미는 “장르에 묶여있다”(genre bound)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구약에는 내러티브(narrative; 스토리라고 해도 좋음)와 시, 그리고 지혜 문학과 묵시 문학 같은 장르들이 있는데 각 장르의 의미 창출 메카니즘이 다르기에 본문의 장르가 무엇인지를 염두에 두고 그에 맞게 설교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성경의 40%를 차지하고 있는 내러티브는 등장인물, 플롯, 어조, 분위기 같은 요소들의 유기체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몇 개의 도덕적이거나 신학적인 명제로 환원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러티브는 그 자체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강해 설교자들은 내러티브 본문조차도 도덕적이거나 신학적 명제들로 이루어진 소위 ‘3대지’ 로 설교하였다. 따라서 최근에는 내러티브 본문은 내러티브의 성격에 맞는 설교(소위 내러티브 설교, 스토리 설교, 귀납법적 설교)를 해야 한다는 설교학자들의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6. 설교자의 영광스런 소명과 위험한 부담을 안고
그렇다면 “어떤 설교가 좋은 설교인가” 라는 문제가 생긴다. 삼대지 설교가 좋은가? 내러티브 설교가 좋은가? 아니면 제목 설교가 좋은가, 강해 설교가 좋은가? 이런 질문에 대해 교계의 한 원로 목사는 “설교에는 두 가지 밖에 없다. 좋은 설교인가, 아니면 나쁜 설교인가?” 라고 일침을 놓았다. 물론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특정한 신학적 주제나 도덕적 이슈를 강조하는 제목 설교보다 성경 본문에 충실한 강해 설교가 좋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청중이 설교자의 의도를 간파해서 긴장감이 사라지기 쉬운 삼대지 설교보다는, 의미 지연을 통해 청중의 호기심을 자극함으로서 잘 들리게 하는 내러티브 설교가 더 좋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다 이런 주장은 실제 설교 현장에서 보면 공허한 이론으로 전락할 수가 있다. 아무리 강해 설교와 내러티브 설교가 좋다고 하더라도, 설교자가 실제로 강해 설교나 내러티브 설교를 잘 해야 “좋은” 설교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때로는 설교자에 따라 어설픈 강해 설교보다는 어쩌면 제목 설교가 더 나을 수도 있다. 강해 설교의 장점은 설교자가 성경 본문의 원래 의미를 잘 찾아내어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잘 적용하여야 비로소 살아나기 때문이다. 또한 탄탄한 플롯이 뒷받침되지 않은 내러티브 설교는 전통적인 3대지 설교보다 얼마든지 못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설교자들은 한가지 설교 형태에 매이지 않고 다양한 레퍼토리의 설교 방식을 가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때로 제목 설교는 특정한 절기나 계기에 명쾌하게 요점을 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얼마든지 장점이 있다. 3대지 설교도 분명한 설교의 논지와 세 개의 대지 사이에 균형과 발전이 있다면 얼마든지 교인들이 이해하기 편한 좋은 설교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한가지 설교 형식을 고집하게 되면 교인들은 피로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설교자가 3대지 설교만 늘 하다보면 교인들은 “셋째로”가 빨리 나오기를 바란다. 설교 시간이 다 지나가는데 “셋째로”가 안나오면 교인들은 초조함을 느끼게 된다. “셋째로”가 나와야 설교가 끝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3대지 설교는 설교자의 의중이 간파되기 쉽기에 청중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유지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개혁주의 설교자들은 내러티브 설교나 귀납법적 설교나 1인칭 스토리 설교나 주제 강해 설교 같은 다양한 설교 방식을 배워 자신의 설교 형태로 만들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한다.
물론 어떻게 보면 “늙은 사냥개는 새로운 사냥 기술을 배우지 못한다”는 속담도 있기에 나이간 든 설교자들이 새로운 설교 방식을 습득하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하지 않으면 설교의 능력 역시 퇴보할 수 밖에 없고, 인간을 구원하시는 가장 큰 도구인 설교가 약화되면 설교자는 존재 근거 자체가 약화될 수 밖에 없어, 자칫 퇴출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는 하나님 말씀이다”라는 개혁주의의 원리만큼 설교자의 영광스런 소명과 위험한 부담을 잘 보여주는 명제는 없다. 그러나 우리가 설교자로서의 소명과 부담을 잘 감당해 낸다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설교라는 인간의 일을 통해 인간을 구원해내시는 신적인 일을 이루어 내신다. 개혁주의 설교자여! 영광과 부담을 동시에 안은 채 설교 강단 위에서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진정한 말씀의 종이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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