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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는 ‘바른 교훈’이 ‘좋은 교훈’임을 늘 잊지 말아야6. 개혁주의 설교 ⑧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의 설교

미션(cmc) 2016. 7. 30. 07:59

설교자는 ‘바른 교훈’이 ‘좋은 교훈’임을 늘 잊지 말아야6. 개혁주의 설교 ⑧구속사적·구원론적 관점의 설교

초대 교회 설교는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 두 가지 사실을 핵심으로 삼아
주님이 스스로 제물되어 ‘드리심’과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을 함께 선포·증거해야


 

▲ 문병호 교수
(총신신대원·조직신학)

1. 목자와 삯꾼의 경계

목사는 강단에서 하나님이 성경의 본문을 통하여 친히 말씀하시는 것을 피를 토하듯이 전하여야 한다. 성도는 그 선포된 말씀을 생명의 양식이요, 길을 비추는 빛이요, 이생의 나그네 삶을 살아가는 지혜의 원천으로 삼아야 한다. 온전히 증거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며, “사람의 마음을 힘있게” 한다(시 104:15). 목사는 강단에서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외에 어떤 것도 전하여서는 안 된다. 설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구령(救靈)의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하며, 오직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7).

설교는 세상의 이치를 논하거나 사담(私談)을 일삼음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건전한 교양을 갖춘 일급 시민을 만든답시고 윤리나 도덕이나 처세술을 강론하는 것을 설교라 할 수가 없다. 설교의 목적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일점일획도 가감(加減)없이 선포하여 그 말씀을 듣는 자마다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게 하고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게 하는데 있다(딤후 3:15; 딤전 4:6). 설교는 시들고 떨어지는 풀과 꽃과 같은 것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야 한다(벧전 1:23-24; 딤후 1:10).

전하여야 할 때 전하지 않거나 전하여도 자기의 말을 전하는 자는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요(딤전 1:10) “삯꾼”이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요 10:12). 예레미야는 위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자기 속으로부터 나온 인생의 말을 중얼거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선지자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렘 6:13; 14:14). 에스겔은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지 아니하고 우는 사자가 음식물을 움킴 같이 사욕을 채우는 몽상가들이라고 질책한다(겔 22:25-26, 28). 이사야는 그들의 입이 진리에는 닫혀 있고 먹고 마시는 것만 탐한다고 꾸짖는다(사 56:10-12).
 
2. ‘좋은 교훈’과 ‘바른 교훈’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 떡을 구하는 자에게 돌을 주시거나 생선을 구하는 자에게 뱀을 주시거나 알을 구하는 자에게 전갈을 주시거나 하지 않는다(마 7:9-11; 눅 11:11-12). 하늘에 계시는 우리의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눅 11:13). 사람은 떡으로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마 4:4).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다 위로부터” 내려주신다(약 1:17). 성도는 강단의 설교를 통하여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는 진리와 지혜를 얻게 된다(갈 5:22-23). 인생의 도구를 세우셔서 말씀을 선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좋은 꼴을 먹게 하신다(시 23:3). 그리하여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신다(시 1:3).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바, 말씀을 들음이 없으면 기갈이 들어 말라죽고 만다. 떡과 생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은금의 보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잘 달리는 준마와 억센 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 때문에 성도는 죽어간다(암 8:11).

우리를 살리고 부요하게 하는 ‘좋은 교훈’은 ‘바른 교훈’이어야 한다. ‘바른 교훈’이 아닌 것으로 우리에게 ‘좋은 교훈’은 없다. 말세에 더욱 소동이 잦은 미혹과 불법의 영은 거짓에 속한 것을 진리인 양 가장하고, 모양만 내세워 그 속에 능력이 있는 체 사람을 속인다. 그러나 아무리 그 기세가 등등해도 바알과 아세라에 속한 거짓 선지자들의 외침에는 아무 능력이 없다. 기도하니 불도 내리고 비도 내리는 권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있었던 엘리야에게만 부여되었다(왕상 18:36-45). 기복주의나 심리주의나 문화주의나 윤리주의가 입 앞에 놓인 떡과 같이 좋아 보여도, 그 각각 자체로는 멸망의 도가 될 뿐이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온전한 말씀은 빛을 비추어 무능한 자도 깨닫게 하며 환난과 우환이 미친 자도 즐거움을 잃지 않게 한다(시 119:130, 143).

말씀을 전하는 자는 ‘바른 교훈’이 곧 ‘좋은 교훈’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일점일획도 변개하거나 더함이나 뺌이 없이 전할 때, 생명을 살리고, 생기를 부여하고, 생활을 온전하게 하는 복음의 능력이 온전히 역사함을 새기고 또 새겨야 한다. ‘좋은 교훈’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여 모든 것을 더함 받는 하나님의 질서를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마 6:33). 설교는 목양을 하는 목사에게 성례거행권, 치리권, 교사권과 함께 부여된 것이므로, 일과 때와 형편에 맞추어 회중에게 고유하게 주시는 말씀을 성령의 감동과 감화 가운데 전하여야 한다. 따라서 설교는 단지 주문을 외는 듯해서는 안 되며, 다른 사람의 설교를 되뇌듯이 해서도 안 된다.

설교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 세상의 철학이나 논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체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한 예화나 예시 정도로 여기고 그것을 이용해서 설교자가 하고 싶은 속말을 하거나, 회중의 정서를 만족시키고 그들의 동의를 구하는 사설(私說)을 늘어놓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함으로서 참 교회의 첫 번째 표지(標識)가 되는 설교의 본질로부터 아주 멀어져 있다. 전하는 자가 없이는 들을 수 없다. 그러나 바로 전하지 않는다면 어찌 바로 들을 수 있겠는가? 성도는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다(히 11:6). 구원의 역사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고, 믿음은 오직 말씀과 함께 작용한다. 그리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한다(롬 10:8; 딤전 4:6). ‘좋은 복음’이라고 가장하여 ‘바른 교훈’을 멀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가로막는 죄를 짓는 것이다. ‘바른 교훈’이 없는 곳에 ‘좋은 교훈’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자(헤세드)와 사랑(아가페)을 베푸시되, 오직 진리(에메트, 알레떼이아)와 의(義, 체데크, 디카이오쉬네) 가운데 그리하시기 때문이다(시 25:10; 시 85:10; 요 14:6).

3. 구속사적 성취와 구원론적 적용을 함께 선포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의 요체는 그리스도시다. 교회는 말씀의 반석 위에 서야 하며, 그 반석은 곧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마 7:24-27; 고전 10:4).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위에 세워진다(마 16:18). 교회는 한 성령과 한 부르심 가운데 한 주를 섬기고 한 믿음 가운데 하나가 된다(엡 4:4-5). 각각의 성도가 모여 하나의 몸 된 교회를 이루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사도행전은 흔히 ‘성령행전’이라고 일컫지만, 또한 ‘설교행전’이라고 할 것이다. 주요한 전기(轉機)가 있을 때마다 그곳에는 설교가 나타난다. 오순절에 임한 보혜사 성령이 고난의 죽음을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부어주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라는 사실이 베드로의 설교로 분명히 선포되었다(행 2:23-36). 사람들은 그의 “말을 받고 곧 그의 설교를 듣고 믿고 세례를 받았으니 그 수가 삼천이 넘었다(행 2:41). 예루살렘 교회의 박해와 더불어 이방에 대한 선교가 본격화되는 바, 그 단초가 되는 스데반의 순교의 자리에는 그가 선포한 설교가 있었다(행 7:2-53). 또한 바울의 제1차 소아시아 선교 가운데 선포된 비시디아 안디옥 설교는 이방선교의 성격과 의의와 가치를 드러내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행 13:17-41). 이러한 초대교회 설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대속의 의를 다 이루셨다는 구속사적 성취와 그를 믿는 자마다 그 의를 값없이 전가(轉嫁)해 주신다는 구원론적 적용의 두 가지 사실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설교자는 이 두 가지를 언제든 함께 선포해야 한다. 첫째, 설교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오셔서 창세 전에 택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위하여 단번에 영원히 모든 의를 다 이루심을 필히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한 구원의 의를 다 이루셨다(요 19:30). 주님은 잉태 때부터 죽으실 때까지, 모든 고난을 당하시고 모든 율법에 순종하심으로, 일생동안 자신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준비하셔서, 자기를 믿는 거룩한 자들을 단번에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요 17:19; 히 5:9, 10:10, 14). 그리스도는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친히 이 땅에 내려오셨다(엡 5:2, 25; 갈 1:4).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를” 비우시고, “자기를” 낮추셨다(빌 2:7-8). 그리고 “자기 몸”을 주셨다. 그가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히 9:12). 자기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히 9:26, 28). 주님이 자기 자신을 드려 모든 언약과 절기와 제사를 완성하셨다. 주님이 자신을 주심은 생명을 주심이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요일 5:12). 이 생명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빈부나 귀천이나 노소나 혈통이나 민족이나 국가에 관계없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이므로 동일하다. 늦게 받으나 먼저 받으나 한 데나리온으로서 그것은 동일하다(마 20:1-16).

둘째, 설교자는 주님이 다 이루신 의가  값없이 성도에게 전가됨을 선포해야 한다. 전가는 우리의 것이 아니나 우리의 것으로 삼아주심을 뜻한다. 바울은 비시디아 안디옥의 설교에서 “이 사람[그리스도]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고 하여 의의 전가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됨을 천명하였다(행 13:39). 그것은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을 의미한다(롬 4:6).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뿐만 아니라 우리의 부족한 행위도 의롭다고 받아 주신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대속의 공로가 된다. 오직 그만이 유일하신 교회의 머리시며 중보자시며 영생의 주가 되신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 방식은 보혜사 성령의 임재이다. 보혜사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 혹은 “주의 영”이라고 불리는 것은(롬 8:9; 빌 1:19; 고후 3:17-18),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그 영을 부어주시며(행 2:33), 그 영을 받으면 그리스도가 속에 사시게 되며(갈 2:20; 고후 13:5; 골 1:27), 그가 가르치신 것과 행하신 것을 생각하게 되고(요 14:26), 그를 증언하며(요 15:26; 요일 3:24), 그의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면 그가 친히 행하시기 때문이다(요 14:13-14).

설교자는 주님이 단번에 영원히 다 이루신 ‘성취의 중보’와 그 의를 지금도 계속해서 전가해 주시는 ‘적용의 중보’를 함께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지금도 중보하시므로 우리는 그의 멍에를 메고(마 11:28)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함께 고난도 받는 자리에 기꺼이 서게 된다(롬 8:17).

설교자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대속의 유일한 제사를 아버지께 ‘드리심’과 이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보혜사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자기 자신을 우리에게 ‘주심’을 함께 선포해야 한다. 설교가 복음의 선포인 이상, 이 두 가지는 언제나 함께 증거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드려 모든 의를 다 이루신 그리스도가 그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심, 그리하여 우리가 그와 하나가 되고, 그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나고, 함께 살아가는 것, 이러한 ‘살아남’과 ‘살아감’이 모두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이 온전히 선포될 때에만, 우리는 참 설교를 거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