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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아 공영은 제국주의 일본이 가진 원대한 허상이었다. 러일전쟁과 중일전쟁에서 침략으로 인한 전리품에 맛을 들인 일본은 아시아를 넘어 그 전쟁을 태평양 너머의 미국으로 확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일본의 병참기지가 되어 역사에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억압과 강탈의 시기를 보내야 했다.
제8대 총독으로 내한한 미나미 지로는 조선 통치의 두 가지 목표를 정한다. 그 하나가 일본 천왕이 조선 방문을 하게 하는 것과 조선에서 전쟁을 위한 징병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당시로는 실현 불가능한 이 일을 위해 총독 미나미 지로는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내세운다. 내선일체란 조선인과 일본인은 몸도 마음도 하나라는 저들의 간계가 담긴 식민시대의 허울 좋은 정치용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0년 제9대 총독으로 내한한 고노에 내각은 대동아 공영권을 주장했다. 대동아 공영권은 일본을 중심으로 만주국과 중국, 조선을 결합해 신질서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일본이 결정적으로 몰락을 향한 선택을 한 것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주일 아침이었다.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한다. 당시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350대의 전투기들은 소위 기습공격으로 미국에 큰 타격을 입힌다.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환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저들은 진주만 공격 1시간 전 말레이 반도 코타바루에서 상륙작전을 개시하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이었다. 계속해서 승리하던 일본의 전세가 기운 것은 1942년 6월 2박3일간 벌어진 미드웨이 해전이었다. 일본 해군은 이 전투에서 항공모함 6척 중 4척이 침몰했고 322대의 전투기가 바다에 떨어져야 했다. 당시 미국의 손실은 비행기 150대였다. 미국은 1945년 8월 6일에는 히로시마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시켜 결국 8월 15일 천왕이 연합국에 항복하는 것으로 전쟁은 끝이 났다.
당시 일본 천황은 항복 방송에서 자신들이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발생한 여러 나라들의 피해와 희생자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이후로 일본은 자신들이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 저지른 가학 행위를 망각한 채 종전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침략전쟁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하는 21세기 역사의 야만인들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