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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6월 22일 경복궁에 서양식 군복을 입은 군주가 나타났다. 바로 고종 황제였다. 고종은 홍범14조 발표와 함께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가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면서 황제로 등극한 것이었다. 그리고 고종황제는 1899년 6월 22일 독일 군복으로 황제의 의상을 바꾸었다. 왜 하필이면 독일 군복의 황제 의상을 입었을까? 이는 당시 조선에서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공화제를 실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물론 독립협회는 공화제를 지향하고 있으며 박영효를 대통령으로 옹립하려 한다고 주장했지만 저들의 헌의 6조를 보면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고종은 군주가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프러시아 즉 독일과 같은 전제군주국을 희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원수에 직접 취임해 군대에 대한 통수권부터 장악하려 했다. 독일식 군복을 입고 나타난 고종은 바로 독일같이 강력한 군주권을 행사하고자 하는 의지에서였다. 1899년 8월 17일 대한제국은 국가운영의 원칙을 담은 9개조의 대한국 국제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당시 외형상 헌법 전문의 성격을 띤 것으로 자주독립국임을 공포한다. 물론 이미 1894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지만 황제가 입법, 행정, 사법에 관한 절대적 권한을 향유하고 있음을 선포한 외형상의 것이었다.
고종이 조선을 전제군주국으로 만들려고 한 것은 당시 청과 일본의 이중외압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과 내부적으로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겪었던 당시 20세기의 정치상황 때문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갈등은 여러 차례 정변, 즉 임오군란, 갑오정변, 갑오농민전쟁, 청일전쟁으로 표출되면서 급기야는 궁궐이 침범당해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는 참당한 지경을 만난다. 고종은 이렇게 무너지는 국가를 재건하려고 절치부심하면서 국가재정은 자신이 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탁지부와는 별도로 황실재정 담당기구인 내장원을 만들어 관리케 한다. 고종은 아관파천이라는 친위 쿠데타를 통해 친일적인 개화파 정부를 물리치고 정치적 주도권을 회복하면서 “구본신참”이라는 개혁의 원리를 표방한다. 옛것을 근본으로 하되 새로운 것을 참작한다는 구본신참 원리가 고종으로 하여금 머리를 깎고 독일풍의 군복을 입게 한 것이었다. 이렇게 고종은 풍전등화와 같은 조선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면서 아관파천 이후 근대화의 상징인 단발령을 폐지하는 이중 잣대의 고민 속에서 “구본신참”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제도만 바꾸었지 내면을 못 바꾼 조선은 결국 경술국치를 당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