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백향목

면죄부 논쟁이야기 2

미션(cmc) 2018. 1. 13. 11:40

95개조 반박문 사건은 종교개혁의 시작이었고 새 시대 개막의 상징이었다. 이로써 역사는 중세가 아닌 근대로 건너오게 되었다. 루터의 글은 금속활자로 인쇄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누군가가 95개조 반박문을 면죄부 판매 책임자인 마인쯔의 대주교 알브레히트에게 보냈다. 당시 당황한 알프레히트 대주교는 이 문서 95개조 반박문을 교황에게 보내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확대된다.

면죄부 판매비용으로 성베드로 대성당의 건축비를 충당했던 레오 10세는 일개 수도사인 루터의 반박문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다음해인 1518년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누를 요량으로 독일 비텐베르크의 제후였던 프레드릭 현제(Fredric the wise)에게 압력을 넣었으나 프레드릭은 루터의 손을 들어준다.

이에 분노한 교황청은 1519년 7월 라이프치이에서 루터와 공개토론을 갖게 하는데 당시 루터는 이 자리에서 교황을 공격한다. 그의 공격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이며, 교황은 오류를 범하는 인간에 불과하다.” 토론 상대였던 명성있던 학자 애크(Johann Eck)는 루터의 사상이 1415년 6월 6일 화형에 처해져 콘스탄츠 호수에 뿌려진 후스와 같다며 루터를 이단으로 정죄한다.

이에 후스의 사상을 확인하고자 루터는 휴회를 청하고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와 이렇게 외친다. “맞다 나는 후스파이다.”(Ich bin Ein Hussite) 평생 200권의 저술을 남긴 루터는 그 첫째 논문인 ‘독일 귀족에게 고함’(Appeal to the German Nobility)에서 이탈리아 교황들과 종교귀족들의 부패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왜 독일인이 이탈리아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라고 했다. 이 글은 독일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우는 기폭제였다.

또한 그는 ‘교회의 바벨론 포로(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에서 교회가 교황의 포로가 되었다고 탄식하면서 각종 그릇된 요설로 기독교 신자를 노예로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On the Freedom of A christian)에서도 신자의 영적 자유와 신자의 외적 의무인 사랑을 강조한 루터는 네 번째 논문에서 수도원 서약에 관한 심판(Judgement on Monastic vows)에서 수도원 독신을 비판하고 결혼과 가정의 가치를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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