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당나라 때 등장한 용어이다. 과거는 관료가 되는 길로 귀족으로 가는 관문이기도 하였다.
과거 시험을 위한 경쟁은 어린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옛날 어머니들은 태교를 하면서 시경(詩經)을 보았다. 유교경전인 사서오경은 글자 수만 43만1296자인데 이를 모두 암송했다. 저들은 암송 후에 다시 주석을 달고 시험문제의 해답 작성법도 배워나갔다. 과거시험은 입시경쟁을 낳는 등용문(登龍門)이었다. 등용문이라는 말은 잉어가 황하 상류에 용문이라는 급류를 타고 올라서면 용이 될 수 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만큼 과거 급제가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고려 시대에는 대략 2년에 한 번 과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33명 미만을 관료로 뽑았는데 11세기 무렵 고려 문치의 전성기였던 문종 때에는 문관의 정원이 532명이나 되었다. 오늘날 3대 고시라 할 사법, 행정, 외무고시보다 합격이 더 어려웠던 것이 그 시절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사회적 효과가 담겨 있었다. 그것은 과거 급제만 하면 환골탈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출세의 길이 열렸던 것이다. 이는 신라 시대에 있었던 골품제의 폐해를 극복한 것이기도 하였다.
고려의 과거제는 세습으로 이어진 고대사회의 골품제에서 진일보한 관료선발제도였다. 특히 과거는 경학과 문장으로 시문(詩文)과 시무(詩務) 등을 모두 시험하는 것으로 그 준비가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과거를 위한 사학의 발달은 관학 진흥으로 이어져 유학의 바람을 크게 일으키고 있었다. 이러한 과거제의 운영에는 고려만의 특징이 있었는데 그것이 고시관제도였다.
고시관은 ‘좌주’ 또는 ‘학사’라고 불리었다. 이들의 권한이 확대된 것은 인종 이후였다. 인종 때까지는 왕이 직접 시험을 치르는 복시가 시행되고 있었다. 이 복시가 폐지되면서 좌주와 학사들의 권한은 크게 확대되었다. 고시관의 주관으로 실시된 시험에서 합격하면 ‘문생’이라 불렀다. 과거에 급제한 문생들은 고시관인 ‘좌주’를 은문(恩門)이라고 부르며 평생 스승으로 모셨다. 이들 급제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등년’이라 부르며 모임을 만들었고 이 모임의 수장은 장원 급제자였다. 이러한 풍속은 고려사회 귀족들의 힘을 키우는 결과를 낳았고 왕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따라서 조선이 개국되면서 왕이 직접 시험을 치는 ‘지공거’시험관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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