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야기이종찬 목사(주필)
콘스탄티누스와 기독교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오해가 있다. 첫째는 그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권력을 위해 기독교를 이용했다는 견해이고, 둘째는 콘스탄티누스 때문에 기독교가 타락하고 권력화되었다는 비판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한 시기는 전임 황제들, 소위 10대 황제 박해로 기독교가 사실상 와해된 시절이었다. 당시 천년 로마의 전통적 종교들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귀족들은 여전히 이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귀족들의 주요한 업무는 이교에 대한 제사와 봉헌이었던 시절 콘스탄티누스는 극소수에 불과한 기독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선택은 기득권자들인 로마 귀족과의 갈등을 자초해, 까닥하면 정치적 기반을 잃을 위험성을 내포했음에도 불구하고 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독교 선택은 종교를 이용한 정치적 행위가 아니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는 로마의 미래를 예견한 결단으로 기독교가 제국에 가져다 줄 변화를 확신한 긍정적 판단에서의 통찰력이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당시의 기준으로 분명 그리스도인이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로마 황제들의 가장 큰 임무 중 하나였던 최고 사제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밀라노 칙령으로 주어진 기독교 공인은 대사제로서의 직임을 수행한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에 특혜를 주었으나 이교도들은 박해하지 않았고 기독교를 국교로 삼지도 않았다. 여기에다 중세 기독교의 혼탁한 양상을 콘스탄티누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역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임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는 기독교도들을 중용했고 주교들이 권력화된 것도 분명한 사실이지만 모든 부정적 요소들은 부패한 이들의 책임임을 알아야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황제로서는 위대했으나 인간으로는 초라했다. 그는 끔찍한 실수들을 두 번이나 저지른다. 황후 파우스타와 첩에게서 낳은 장남 크리스푸스의 관계를 의심하고 아들을 처형한 것과, 얼마 후 아들 크리스푸스의 혐의가 모두 파우스타의 음모에서 나왔음을 알고 그녀를 목욕탕의 뜨거운 증기로 질식시켜 죽인 것이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생을 마칠 때까지 자신을 비관하며 탄식하였다고 전해진다.
337년 초 대제는 자신의 마지막을 감지하고 어머니의 고향 메레노폴리스에서 니코메티아의 주교 유세비우스에게 세례를 받는다. 이후로 337년 5월 22일까지 황제의 옷을 입지 않은 그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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