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번역과 신학 해설 및 신앙 적용] (5)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한 작정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모든 것은 하나님 뜻에 따라 존재하고 보존 통치된다
문병호 교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
1. 한 분 동일하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신격의 하나임 가운데 한 실체, 권능, 영원성을 지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인격이 있다. 실로 성부는 아무로부터도 아니시니, 나시지도 나오시지도 아니하신다. 성자는 아버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 성령은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2.3)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신 6:4), 스스로 계시는 분(출 3:14), 여호와이시다(출 6:2).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출 34:6). 오직 여호와만이 하나님이시며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다른 신이 없다(신 4:39).
이와 같이 자존(自存)하시고 유일(唯一)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신격(神格, deitas)이라고 한다. 신격은 ‘하나님의 하나님이심’을 뜻한다. 하나님의 본질(本質, essentia)이 여기에 있으며, 이것이 하나님의 실체(實體, substantia)이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이시다. 아들은 영원히 아버지와 ‘함께’ 계시고 아버지 ‘품 속에’ 계시며(요 1:1, 18) 아버지와 ‘하나’이시다(요 10:30).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아버지도 영이시고 아들도 영이시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님이시듯, 성령도 하나님이시다. ‘주’도(엡 4:5), ‘성령’도(엡 4:4), ‘한 분’ ‘하나님’이시다(엡 4:6).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하신 하나님이시나 고유한 위(位)로 계신다. 그 위의 격(格) 즉 위격(hypostasis)을 인격(persona)이라고 칭한다. 이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적 존재(subsistentia)를 뜻한다. 그러므로 ‘신격의 하나임 가운데’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인격이 있다’라고 고백한다.
성경 전체가 이를 증언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 26). 만물이 말씀과(요 1:3; 히 1:2; 11:3) 성령의 기운으로(시 33:6) 지은 바 되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구원의 주가 되신다. 성부는 뜻하시고 성자는 속량의 제물이 되시며 성령은 인치신다(엡 1:3-14).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셨다(마 28:19). 사도 바울이 전한 축복의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성부)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을 기원한다(마 28:19; 고후 13:13).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다(요 10:30). 아버지 안에 아들이, 아들 안에 아버지가 계신다(요 10:38). 아버지의 것은 다 아들의 것이니(요 16:15), 아버지가 아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마 11:27).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으로서 생명의 말씀이시다(요 1:4; 5:26; 요일 1:1). 그 말씀이 ‘아버지의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요 1:18). 그러므로 ‘성자는 성부에게서 영원히 나신다’(Filius a Patre est aeterne genitus)라고 고백한다.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롬 8:9; 빌 1:19), 하나님의 아들의 영(갈 4:6), 주의 영(고후 3:17), 진리의 영(요 14:6, 17; 16:13)이라고 일컫는 것은, 성부는 성자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시고(요 14:26), 성자는 아버지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을 보내시기(요 15:26)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성부에게서 그리고 성자에게서 영원히 나오신다’(Spiritus Sanctus aeterne procedens a Patre Filioque)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성자에게서’(Filioque)라는 라틴어의 발음대로 이를 ‘필리오케’ 교리라고 칭한다. 어거스틴은 이 교리를 수립하였고, 칼빈은 이를 받아들여서,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아들로부터 위격적으로 존재하신다’라고 말한다(기독교 강요, 1.13.18). 그러나 동방교회에서는 이를 받지 않고 동방교회 신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형성된 WCC(세계교회협의회)도 이 교리를 받지 않는다.
이와 같이 성자의 나심, 성령의 나오심(출래, 발출), 성부의 나심도 나오심도 아니심에서, 성부, 성자, 성령은 한 분 하나님이시나 각각 고유한 특성에서 구별되신다.
2. 하나님의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뜻에 따른 작정
“하나님은 만세 전 영원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뜻에서 나온 가장 지혜롭고 거룩한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일은 무엇이든지 자유롭고 불변하게 정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시는 것도 피조물들의 뜻에 강압적인 힘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며 이차적 원인들의 자유나 우유성(偶有性)이 제거되지도 않고 오히려 견고해진다.”(3.1)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의 뜻에 따라 존재하고 보존, 운행, 통치된다. 하나님의 뜻은 절대적이고, 주권적이며, 불변하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자유롭게, 모든 것을 뜻하시고 이루신다. 하나님의 뜻은 가장 지혜롭고 선하신 하나님의 속성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추론하는 어떤 인과관계에도 얽매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의 계시, 창조, 구속의 필연성은 하나님 안에만 있고, 하나님만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어떤 필연성을 내세워 하나님께 당위를 요구할 수 없다.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가르쳤으랴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사 40: 13-14).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롬 11:36). 하나님은 머리카락 하나도 세시고 참새 한 마리도 허락 없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마 10:29~30). 인생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여호와가 모든 일을 작정하신다(잠 16:33). 여호와가 봇물과 같이 왕의 마음을 주장하신다(잠 21:1). 풍랑을 주시는 분도 그 가운데 구원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 없다(행 27:23~24, 34, 44). 하나님은 하늘의 군대도 움직이시고 땅의 모든 사람을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신다(단 4:35).
하나님은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나, ‘죄의 조성자’(aut[h]or peccati)는 아니시다. 하나님은 절대 선하시고 절대 거룩하신 빛이시니, 어둠에 속한 것이나 그 어떤 변화나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요일 1:5; 약 1:17). 사람은 자기의 형상에 따라 순전하게 지음을 받았으나(창 1:27; 2:7) 자기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악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다(창 3:6; 롬 5:12). 그러므로 그 죄는 전적으로 사람의 탓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친히 일하시되, 사람을 ‘보이는 손’으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요나를 강권적으로 사용하셔서 자기의 큰 일을 이루셨다(시 126:2~3). 사울을 부르셔서 바울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심지어 악인들이라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뜻과 권능에 따라 미리 아신 대로 법 없는 사람들인 헤롯과 빌라도의 손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셨다(행 2:23; 4:27~28).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악행으로 요셉이 애굽에 팔려가 후에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되게 하셨다(창 50:20).
3. 무조건적 작정
“하나님은 일어날 것이거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추정되는 모든 조건에 터 잡아 아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어떤 것을 그러한 조건들에 터 잡아 존재할 것으로나 일어나야 할 것으로 예견(豫見)하셨기 때문에 작정하신 것은 아니다.”(3.2)
하나님은 모든 것을 미리 작정하신다. 그 지식 가운데 모든 것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앉고 눕고 일어섬과 길가는 것과 말과 행위를 다 아신다(시 139:1~4). 하나님은 원인만 작정하시거나 결과만 작성하시지 않고 결과를 모두 개별적으로 작정하신다. 그러므로 인과관계를 내세워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항변할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구원에 이를 공로가 아무것도 없음을 미리 아시고 무조건적으로 선택하신다. 선택은 원하는 것이나 달음박질이 아니라 부르시는 이, 긍휼을 베푸시는 이로 말미암는다(롬 9:11, 16). 하나님이 에서는 미워하시되 야곱을 사랑하신 것은 자기의 뜻과 무조건적 은혜로 야곱에게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이다(롬 9:13, 18; 딤후 1:9).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선택이 행위보다 앞서고, 믿음보다 앞서는 것이다(살후 2:13).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을 고백할 뿐, ‘왜’를 물을 수 없다. 로마 가톨릭은 반(半)펠라기우스주의를 추종하여 하나님이 구원을 이룰 자질을 가진 자를 미리 아시고 선택하셨다는 예지예정론(豫知豫定論)을 주장한다. 이는 인본주의와 공로주의의 논법에 불과하다. 우리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거나 깨달음이 없는 생각으로 스스로 실족하지 말고 이성을 자극하는 말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믿음의 눈을 열어 주를 뵈어야 한다(욥 42: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5).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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