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설교'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삿16:23-30) |
포기하지 않는 믿음을 붙잡으세요 '이미' 끝난 인생의 삼손이 '아직' 남아있는 희망을 선택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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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간된 ‘하루가 소중했던 사람들’(김혜원)이란 책이 있습니다. 내용은 희대의 살인마 김대두를 위시한 아홉 명의 사형수에 관한 것들입니다. 한때 역시 사형수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천의 글도 눈에 띕니다. 저자는 이들과 주고받은 대화, 편지 등을 통해 ‘사형언도’후의 심리상태를 실감 있게 그리고 있습니다. 붉은 이름표의 사형수들은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심정이 됩니다. 그래서 특식도, 깨끗한 옷에도 예민한 반응을 보입니다. 교도관이 문을 따고 ‘나오라’는 소리를 그렇게도 싫어합니다. 왜냐구요. 사형수이기 때문이지요.
여기에 바로 그 사형수 한명이 등장합니다. 삼손입니다. 삼손, 그는 블레셋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장본인입니다. 이런 눈에 가시 같은 존재를 천신만고 끝에 ‘미인계’로 사로잡았습니다. 사형 외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오죽했으면 붙잡자마자 두 눈을 뽑아버렸을까요. 그만큼 증오심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눈 뽑힌 삼손, 놋줄에 묵힌 채 깊은 감옥에 던져졌습니다(삿16:21). 언제, 어떻게 사형이 집행될지 모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옥문이 ‘철커덕’하고 열렸습니다. 어디 론가로 끌려 나간 삼손, 볼 수는 없었지만 ‘와와’하는 엄청난 군중들의 야유소리에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나를 공개처형하려는 구나. 이제 끝났다!’ 백이면 백, 이렇게 직감하면서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 앞에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의 삼손은 어떻습니까. 세 가지 액션을 눈여겨보십시오. 첫째, 그는 자기 곁의 소년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합니다. “나로 이집을 버틴 기둥을 찾아 그것을 의지하게 해 다오”(삿16:26). 둘째, 버틴 기둥을 찾은 후, 그것을 양손으로 부여잡고, 온 힘을 다합니다(삿16:29). 셋째, 그 상황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여호와여, 이번 한번만 나를 생각해 하사,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삿16:28). 이 세 가지 액션은 분명, 삶을 포기한 자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의 행동, 그의 기도는 ‘한편 강도’의 그것과는 완전히 색깔이 다릅니다(눅23:42). ‘뭔가’를 시도하려는 듯 한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지 않습니까. 사실, 객관적으로 볼 때 삼손, 그는 ‘이미’ 끝난 인생입니다. 누가 봐도 끝났습니다. 하나님조차도 그를 떠나버렸잖습니까(삿16:20). 그런데 도전적인 것은 그 ‘절망적’ 상황 앞에서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랫배로부터 ‘아직’을 외칩니다. ‘내 인생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직은 아니다. 아직 포기할 수 없다.’ 진정 놀랍습니다. ‘이미’끝난 인생이 ‘아직’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좌표’는 어딥니까. 달란트의 비유에는 하나, 둘, 그리고 다섯 달란트 받은 자, 이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마25:13). 그런데 왜, 하나, 셋, 다섯 혹은 하나, 넷, 다섯 달란트가 아닐까요. 바로 이 부분이 묘미입니다. 먼저, 셋 중에서 주인공 즉 ‘평범한’ 나는 누구일까요? ‘두 달란트’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두 달란트인 ‘내’가 서 있는 위치는 어딥니까. 그렇습니다. 한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사이’에 서 있습니다. 왜냐구요. 두 달란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심히 보면 나는 한 달란트 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왜냐구요. 셋 혹은 넷이 아니라, 두 달란트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우리는 다섯보다는, 한 달란트 받은 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면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매사에 불평, 불만,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악하고, 게으릅니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원망합니다. 무엇보다 일을 하려하지 않는, 그래서 인생을 포기한 사람입니다(마25:24-30). 반면에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어떻습니까. 정 반대입니다. 부지런합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향하여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긍정적입니다. 바로 이 ‘두 사이’에 내가 끼여 있습니다. 아니, 한 달란트쪽과 더 가까운 곳에 내가 위치해 있습니다. 때문에 어린이들은 욕부터 배웁니다. 못된 짓에 더 흥미를 갖습니다. 그야말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그레샴의 법칙 그대로입니다. 왜냐구요. 두 달란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황에서의 주인공을 주목하십시오.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마25:17). 그렇습니다. 한 달란트의 영향권을 벗어나, 저 멀리 다섯 달란트 받은 자를 바라봅니다. ‘그같이’ 행동하고, 닮으려 합니다. 그 사람처럼 부지런합니다. 최선을 다합니다. 땀을 흘립니다. 원망,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넷이 아닌, ‘두 달란트’에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자 되기를 열망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달란트 비유’의 핵심입니다.
두 달란트인 오늘 우리는, 삼손처럼 ‘이미’와 ‘아직’ 사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 가까운 쪽에서는 ‘이미 끝났다. 포기하라. 손 털어라. 더 이상 헛수고 말라’는 사탄의 꾐이 확성기로 들려옵니다. 그러나 저 멀리 ‘아직’이라는 속삭임도 있습니다. ‘아직 끝이 아니야. 포기해서는 안 돼. 내일일은 알 수 없잖아. 무엇보다 하나님이 계시잖아.’ 이런 성령의 세미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지금 이 ‘두 사이’에 내가 끼여 있습니다(고후5:8). 어느 쪽을 선택해야합니까. 삼손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아직’을 붙잡습니다. ‘이미’가 아닌 ‘아직’을 외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그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아직’을 붙잡는 삼손에게 나타난 놀라운 은총을 보십시오. 첫째, 그를 도와줄 소년을 가까이에 두셨습니다(삿16:26). 천하의 삼손을 누가 끌고 나오며, 또 감시해야 정상입니까. 힘센 군인입니다(행12:6). 그런데 기이하게도 어린 소년이 그것도 ‘한 명’이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은혭니다. 둘째, 버틴 기둥을 가까이에 두셨습니다(삿16:27). 지붕에만 삼천 명이 있을 정도로 큰 집이 아닙니까(삿16:27). 그런데 그 집을 버틴 기둥 ‘두 개’가 양쪽 팔로 껴안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하나님도 가까이 오셨습니다(삿16:28).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것은 ‘떠나신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삿16:20).
여러분은 지금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미’쪽에 더 가깝게 서 있습니까(고후5:8). 그래서 포기하고 싶습니까. 주저앉고 싶습니까. 끝내 버리고 싶습니까.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이미’가 아닌 ‘아직’을 붙잡아야 합니다. 모세, 기드온, 바락, 입다, 다윗, 사무엘에 그러했습니다(출3:1,히11:32). 이와같이 ‘믿음’은 어떠한 상황일지라도 ‘아직’을 붙잡는 것입니다. ‘끼여 있는’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하고 있습니까. 가까운 쪽의 ‘이미’입니까. 아니면 멀리 있는 ‘아직’입니까. ‘아직’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당신편입니다. (설교노트)
모두들 너무 쉽게 인생을 포기하고 있다. 길가, 돌작 밭, 가시떨기 밭 너머에 비로소 ‘옥토’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마13:8). 조금만 더 참고, 최선을 다하면 옥토에 이르게 될 터인데, 그 고비들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이런 우리에게 삼손은 큰 도전으로 다가온다. 성경은 그를 ‘믿음의 선배’로 소개한다(히11:32). 그 이유는 단 하나, ‘이미’와 ‘아직’사이에서 ‘아직’을 선택했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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