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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공황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매주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해서 유명해진 프로그램 이름 역시 ‘노변담화(fireside chats)’였다. 그것이 최근 금융위기의 여파로 러시아에서 원유가가 급락하면서 수십만의 실업자들이 생겨나자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TV 앞에 나타나 그 ‘노변담화’를 재생하고 있다.
그런데 왜 ‘화롯불 이야기’를 한국 고유의 문화유전자로 고집하려 드는가. 그 이유를 알려면 앤드루 토머스가 『우리가 처음이 아니라네』(원제는 ‘We are not the first’)라는 책을 어째서 쓰게 됐는지, 그리고 왜 오늘의 센트럴 히팅 시스템이 서구의 발명품이 아니라 수천 년 전 한국의 온돌이라고 못 박아야 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면 당연히 지금 세계의 화두가 된 에너지 재활용의 원조가 한국의 화롯불이라는 것에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온돌의 구들을 덥히기 위해 불을 때고 난 뒤 타고 남은 그 불똥과 재를 다시 주워 담아 재활용한 것이 다름 아닌 한국의 화롯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한국을 소개하는 글에서 그 화롯불을 ‘불들의 납골당(納骨堂)’이라고 불렀다. 에너지의 재활용 단계를 넘어 “질화로에 재가 식으면”이라는 말은 한국의 소금장수 이야기와 그 정서를 담은 문화 유전자로 남게 된 것이다.
사학자들은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해 한국의 온돌문화가 고구려 때 생긴 것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보다 오래된 북방지역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도 온돌 모양의 구조와 구들이 발굴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온돌문화는 추운 북쪽에서 살던 한국의 조상이 남쪽으로 가지고 내려온 문화유전자의 하나다.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사람은 생물이 바다에서 처음 육지로 올라올 때 자기 몸 안에 바닷물과 그 생명 유지 장치를 그대로 가지고 왔으며, 그것이 우리를 키운 어머니 배 안의 양수였다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자궁 속에만 태고의 바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와 뼈 속에도 바다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소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이 글을 탄생 이전의 태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소금장수의 이야기로 유아 시절을 마무리 짓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외지로 떠날 때 우리는 여행 가방을 들고 나온다. 평소 집에서 생활하던 물건들을 챙겨 배낭에 담아 짊어진다. 어디를 가도 집에서 살던 것처럼 그 환경을 운반해 가는 것이다. 생물적 유전자가 바다를 떠날 때 바닷물을 가져왔듯이 북방의 겨울 나라를 떠날 때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 바로 ‘온돌’이라는 구들장이었고, 그 구들을 덥히던 아궁이의 불과 재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 질화로의 불이다. 로켓을 타고 외계로 가는 우주 비행사의 캡슐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정지용의 ‘향수’의 근원점인 화로를 에워싸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는 지붕 밑 정경이다.
지루한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면 화롯가 이야기는 돗자리 위에 모여 앉은 마루방 이야기가 된다. 높은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바람의 집 원두막 같은 남방의 주거공간이다. 그렇구나. 북에서 내려온 온돌이 남에서 올라온 마루방과 만나 삼세동당(三世同堂)의 초가삼간을 만든 것이 한국인의 집이구나. 다 쓰러져 가는 움막 같은 집일망정 남과 북의 주거 양식을 동시에 한 지붕 안에 담은 주거문화가 어디에 있는지 애들 말대로 나와 보라고 하라. 구들장이 식지 않는 한, 마루방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한, 그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남북을 통일한 것이다. 겨울에는 화롯가에서, 여름에는 돗자리 펴놓은 마루방 위에서 오순도순 둘러앉아 소금장수 이야기를 한다. 싸움하지 말라. 남북을 통일한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아직 이 땅에 살아있다.
이어령 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