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5> 소금장수 이야기 ④

미션(cmc) 2009. 5. 8. 07:30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25> 소금장수 이야기 ④ [중앙일보]

구들 식으면 한국의 이야기도 식는다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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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롯불 이야기’가 한국인의 것이라고 하면 발끈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공자·석가모니를 한국인이라고 왜곡했다 해서 우리를 역사의 좀도둑으로 모는 중국·대만의 네티즌들이 아닌가. 그런 소리야말로 왜곡 전달된 것이니 맞서 싸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노변한담(爐邊閑談)’이란 사자숙어는 엄연히 중국에서 온 한자말이다. 더구나 일본의 ‘고타쓰’, 서양의 ‘벽난로’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세계 대공황 때 루스벨트 대통령이 매주 대국민 라디오 방송을 해서 유명해진 프로그램 이름 역시 ‘노변담화(fireside chats)’였다. 그것이 최근 금융위기의 여파로 러시아에서 원유가가 급락하면서 수십만의 실업자들이 생겨나자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TV 앞에 나타나 그 ‘노변담화’를 재생하고 있다.

그런데 왜 ‘화롯불 이야기’를 한국 고유의 문화유전자로 고집하려 드는가. 그 이유를 알려면 앤드루 토머스가 『우리가 처음이 아니라네』(원제는 ‘We are not the first’)라는 책을 어째서 쓰게 됐는지, 그리고 왜 오늘의 센트럴 히팅 시스템이 서구의 발명품이 아니라 수천 년 전 한국의 온돌이라고 못 박아야 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그러면 당연히 지금 세계의 화두가 된 에너지 재활용의 원조가 한국의 화롯불이라는 것에도 동의하게 될 것이다.

온돌의 구들을 덥히기 위해 불을 때고 난 뒤 타고 남은 그 불똥과 재를 다시 주워 담아 재활용한 것이 다름 아닌 한국의 화롯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일찍이 한국을 소개하는 글에서 그 화롯불을 ‘불들의 납골당(納骨堂)’이라고 불렀다. 에너지의 재활용 단계를 넘어 “질화로에 재가 식으면”이라는 말은 한국의 소금장수 이야기와 그 정서를 담은 문화 유전자로 남게 된 것이다.

사학자들은 『후한서(後漢書)』를 인용해 한국의 온돌문화가 고구려 때 생긴 것으로 소개하고 있지만, 그보다 오래된 북방지역 신석기 시대의 유적에서도 온돌 모양의 구조와 구들이 발굴되고 있다. 누가 뭐래도 온돌문화는 추운 북쪽에서 살던 한국의 조상이 남쪽으로 가지고 내려온 문화유전자의 하나다. 지금까지 내 글을 읽은 사람은 생물이 바다에서 처음 육지로 올라올 때 자기 몸 안에 바닷물과 그 생명 유지 장치를 그대로 가지고 왔으며, 그것이 우리를 키운 어머니 배 안의 양수였다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의 자궁 속에만 태고의 바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와 뼈 속에도 바다가 있으며 그것이 바로 소금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내가 이 글을 탄생 이전의 태아의 기억으로부터 시작해 소금장수의 이야기로 유아 시절을 마무리 짓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낯선 외지로 떠날 때 우리는 여행 가방을 들고 나온다. 평소 집에서 생활하던 물건들을 챙겨 배낭에 담아 짊어진다. 어디를 가도 집에서 살던 것처럼 그 환경을 운반해 가는 것이다. 생물적 유전자가 바다를 떠날 때 바닷물을 가져왔듯이 북방의 겨울 나라를 떠날 때 우리가 가지고 온 것이 바로 ‘온돌’이라는 구들장이었고, 그 구들을 덥히던 아궁이의 불과 재를 가지고 방 안으로 들어온 것이 질화로의 불이다. 로켓을 타고 외계로 가는 우주 비행사의 캡슐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이 정지용의 ‘향수’의 근원점인 화로를 에워싸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하는 지붕 밑 정경이다.

지루한 겨울이 가고 여름이 오면 화롯가 이야기는 돗자리 위에 모여 앉은 마루방 이야기가 된다. 높은 서까래가 그대로 보이는 바람의 집 원두막 같은 남방의 주거공간이다. 그렇구나. 북에서 내려온 온돌이 남에서 올라온 마루방과 만나 삼세동당(三世同堂)의 초가삼간을 만든 것이 한국인의 집이구나. 다 쓰러져 가는 움막 같은 집일망정 남과 북의 주거 양식을 동시에 한 지붕 안에 담은 주거문화가 어디에 있는지 애들 말대로 나와 보라고 하라. 구들장이 식지 않는 한, 마루방에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한, 그 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남북을 통일한 것이다. 겨울에는 화롯가에서, 여름에는 돗자리 펴놓은 마루방 위에서 오순도순 둘러앉아 소금장수 이야기를 한다. 싸움하지 말라. 남북을 통일한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들이 아직 이 땅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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