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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은 시국 이야기를 할 때마다 입에 손을 대고 쉬쉬했지만 어느새 약장수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는 약장수가 아니라 ‘이인’이라고 했다. 시골에서는 독립지사나 혁명가를 그렇게 불렀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이인(異人)’인지 ‘위인(偉人)’의 사투리인지 풀지 못하고 있다. 읍내에서 순사에게 잡혀가는 것을 직접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고, 군자금을 구하러 온 독립군이라고 귀띔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동경 유학을 한 사상가라고 말하는 사람은 그가 안경을 썼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며, 어느 갑부의 친척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마 그의 금이빨을 보고 한 소리였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야기들로 잠자던 동네는 갑자기 소낙비를 만난 푸성귀 밭처럼 생기가 돌기 시작했고, 거기에 흥분까지 하게 된 것은 누군가 밀고자가 있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처음엔 면서기와 노름빚을 진 사람들이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 무렵 부쩍 싸움이 많아졌던 것을 보면 평소 눈을 흘기며 지내던 사람들을 입방아에 올렸던 것 같다.
그러다 감꽃이 지는 초여름 어느 날 갑자기 울리는 양철북 소리를 듣고 나는 “아저씨다!”라고 외치며 밖으로 뛰어나갔다. 하지만 약장수 북을 치고 있는 것은 동네 개구쟁이들이었다. 그 애들은 약장수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신나게 치는 양철북 소리가 울릴 때마다 감꽃이 하나둘씩 떨어지고 있었고, 그 너머로 “왜 이 북이 어때서”라고 북을 몇 번 두드리다 멋쩍게 웃던 아저씨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어쩌면 가짜 약을 팔러 다니는 사기꾼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이인들의 이야기가 소금처럼 필요했던 것이다.
“눈을 뜨면 그때는 대낮이리라”고 한 시구가 떠오른다. 내가 눈을 떴을 때 이미 그 아이는 식민지의 대낮 속에 있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정보가 채마밭에서 가꾼 무·배추라면, 약장수와 소금장수 이야기는 야생의 잡초 사이에서 캐낸 나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읍내에는 이미 일본 집 가게가 있었고 누나와 형은 학교에서 일본말을 배우고 있었으니 애라도 그걸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남의 양철북을 치고 다니던 애들에 대한 미움 이상의 분노가, 약장수 아저씨에 대한 연민이나 슬픔 이상의 외로움이 어디에서 오고 있는지를 그때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소금장수는 늘 밤길을 헤매다가 여우에게 속는다. 불빛이 반짝거려도 절대 오두막집 문을 두드리지 마라, 아무리 울음소리가 처량해도 색시(靑孀)의 손을 잡아서는 안 된다…. 늘 내 마음을 졸이고 나서야 소금장수는 번번이 죽을 고비를 넘기고 도망친다. 그 이야기를 입 밖에 내면 약장수 아저씨가 정말 구미호에게 간을 파먹힐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30년이 지난 뒤에야 나는 자전적 에세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에 그때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었다. 분명한 것은 그날부터 김삿갓과 소금장수와 장돌뱅이와 그리고 약장수들은 우리 곁을 떠나고 있었고, 내 이야기의 공간도 점점 좁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어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