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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빼앗겼어도 아름다운 반도의 지형은 뚜렷하게 아주 분명하게 그 어린 멍든 가슴에 찍혔다. 그것이 토끼 모양으로 때로는 꽃이 만발한 무궁화 나무로, 혹은 육당의 ‘소년’지(誌)에서처럼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호랑이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한반도 지형은 로샤하의 잉크 자국 테스트 (Rorschach inkblot test)처럼 관찰자의 성격과 마음에 따라 제가끔 달리 보인다.
왕년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한반도의 지형을 주먹을 쥔 팔뚝으로 보았다. 중국대륙에서 불쑥 튀어나온 한반도가 일본열도를 공격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征韓論)이요, 러일전쟁 때 참모총장이었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의 일본생명선(生命線)으로서의 한반도론이었다. 그리고 대동아 전쟁 때의 생존권 이론이었다. ‘생존권(生存圈)’이란 말은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서 사용한 지정학 용어 ‘레벤스라움(Lebensraum)’의 번역어다. 하지만 최근 일본판 위키피디아에 오른 자료를 보면 주일 독일대사관 주재무관이었던 하우즈호파가 한국을 합방한 일본의 팽창주의의 성공을 보고 착안해낸 용어라는 것이다.
한 국가가 자급자족하는 데 필요한 자원과 영토는 인구가 불고 그 능력이 증대되면 자연히 늘어갈 수밖에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에 필요한 생존권은 확장될 수 있으며 동시에 그 확장은 국가의 권리이기도 하다는 침략주의의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는 무서운 말이다.
유럽의 후진국가로 출발한 독일은 외침과 분할 점거된 경험이 있기에 영미세력과 대결 생존권을 확보하겠다고 나선 것은 일종의 지정학적 운명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본은 대륙국가인 독일과는 다르다. 해양국가의 바다 덕분에 늘 그랬던 것처럼 일본은 세계를 제패한 몽골 대군의 침공에서도 비켜날 수 있었다. 생존권 이론을 들고 나와야 할 나라는 한국이면 몰라도 결코 일본은 아니다.
그래서 지각 있는 일본의 지식인들은 한반도의 지형을 주먹이 아니라 대륙의 앞가슴에서 나온 유두(乳頭)로 보았다. 일본열도는 그 한반도의 젖꼭지에서 흘러나오는 젖을 받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고 있는 아기의 형상으로 보고 그 주변의 ‘이끼’와 같은 작은 섬들을 그 젖 방울들로 본 것이다.
식민지 아이들은 황국화의 교육만을 받은 것은 아니다. 더러는 ‘토끼’를 기르는 법도 배웠다. 학교 뒷마당은 늘 조용했고 토끼장의 토끼들도 언제나 소리가 없었다. 토끼 당번이 되면 나는 구호도 군가도 들리지 않는 이 토끼사육장에서 조용히 명상할 수 있었다. 토끼똥을 치우는 사육장 청소만 빼고는 토끼풀을 뜯어 오는 것이나 토끼에게 풀을 먹이는 것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토끼 눈은 언제나 울고 난 것처럼 빨갛고 입은 찢겨 있는데도 소리를 낼 수 없다. 달 속에서 떡방아를 찧고 있는 토끼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침략자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했기에 두 귀가 많이 커지고 공격자의 이빨에서 도망쳐야 하는 뒷다리만 발달한 토끼였다. 새끼를 낳아도 자기 냄새를 맡고 포식자들이 찾아올까봐 떨어진 곳에서 혼자 잠자는 것이 토끼의 모정이라고 했다.
훨씬 뒤에 안 이론이지만 산업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늑대처럼 눈이 정면에 달린 짐승들이라고 했다. 스탈린이나 히틀러 형의 독재자들은 먹이를 좇아 오직 한 방향으로만 달리는 ‘파라노이어’(편집광, 집중형인간)형 인간이다. 그러나 21세기의 지식 정보시대는 토끼나 사슴처럼 눈이 양옆에 달려 사방을 보면서 도주할 수 있는 ‘스키조프레니어’(분열증, 멀티 분산형)의 인간형이 주도권을 잡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토끼 당번을 하던 심심한 오후, 나는 토끼를 철사로 찔렀다. 소리라도 질러야 그 아픔이 얼마나 큰지도 알 것이 아닌가. “외쳐라 토끼야, 토끼야 달려라.” 아마 나는 속으로 그때 그렇게 외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