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4> 반도인 ③

미션(cmc) 2009. 6. 4. 10:01

이어령의 한국인 이야기 <44> 반도인 ③ [중앙일보]

보자기를 버리고 란도세르를 멘 아이들

대중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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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TV에 나와 어린 학생들이 퀴즈 문제를 푸는 것을 보면 교수 생활 50년 넘게 한 나도 풀 수 없는 문제를 어떻게 그리 신통하게 잘 맞히는지 얼굴이 뜨거워질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에게 물어보자. “란도세르가 뭐니?” 골든벨 장학생이라도 입을 다물 것 같다.

눈을 떠 보니 그렇게 갖고 싶었던 란도세르가 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밤차를 타고 오신 아버지의 선물이었다. 가슴에 끌어안는 순간 그윽한 가죽 냄새가 났다. 분명 그것은 시골 아이들이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무명 책보에 밴 김치 국물 냄새가 아니다. 책보를 풀고 매는 번거로움도 이제는 끝이었다. 상자에 뚜껑을 단 것 같은 란도세르 안에는 책·필통·도시락을 넣어 두는 칸들이 있어서 아주 편리했다. 두 손은 자유로울 것이고 등 뒤의 가방은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찬란할 것이다. 나는 도회지 아이처럼 뻐기고 걸으면 된다.

그러나 그 기쁨과 행복은 날이 갈수록 거품처럼 꺼져 가기 시작했다. 책보는 풀면 그만이다. 자리를 차지하지 않기 때문에 책상 서랍에 보자기를 접어 넣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가방은 책과 필통을 꺼내도 모양은 그대로다. 의자에 걸어 놔야 하는데 아이들이 지나다닐 때마다 걸린다. 툭툭 칠 때마다 내 가슴이 얻어맞는 것 같다. 흠집이라도 났는지 신경이 쓰인다.

그 “걸리적거리는 물건”을 메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어쩌다 어른들한테 살구나 옥수수 같은 것을 얻게 되어도 들어갈 곳이 없다. 둥근 수박도, 길쭉한 병, 네모난 각도 무엇이나 다 쌀 수가 있었던 책보가 아니다. 크기와 모양만이 아니다. 창에서 햇빛이 들어오면 아이들은 책보로 가릴 수 있었지만 딱딱한 표정을 하고 있는 란도세르는 아무 도움도 주지 않는다.

보자기는 싸는 것만이 아니라 깔고 가리고 매고 덮고, 요술보자기처럼 필요에 따라 변하고 상황에 따라 적응한다. 신축자재, 원융회통하는 것이 보자기의 생리요, 철학이다. 그래서 도둑이 담 넘어 들어올 때는 얼굴에 쓰고 들어오고 담 넘어 나갈 때는 싸 가지고 나가는 것이 바로 그 보자기다.

그래서 제임스 본드의 초기능 007가방을 만들어 낸 서양 사람이지만 굴뚝으로 들락날락하는 산타 할아버지만은 보따리를 메고 다닐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가방 든 산타클로스를 생각할 수 없듯이 보따리를 들고 다니는 제임스 본드를 상상할 수 없다. 문화와 문명의 차이 때문이다.

책보와 책가방은 도시와 시골, 부와 빈, 근대와 전통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젠더를 나누는 문명의 대위법이요, 그 기호(記號)였다. 자랑스럽게 메고 다닌 란도세르가 그저 책가방이 아니요, 동서양 100년 근대사의 폭약을 등에 메고 다녔다는 것을 어떻게 코흘리개 아이가 눈치챌 수 있었겠는가.

광활한 육지와 왕양한 바다에서 몰아닥치는 그 이질적인 많은 문화를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싸려면, 그리고 그것을 상황에 따라 싸고 풀려면 보자기 이상의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는가.

칼 차고 총 들고 싸우는 남자들에게는 란도세르 같은 배낭이, 갑옷같이 튼튼한 가죽가방이 필요하지만 쫓기는 아녀자들의 피란 보따리는 천으로 된 보자기 같은 것이어야 한다. 반짇고리 같은 것에 담겨 있는 일상의 자잘한 생활용품들은 란도세르 같은 칸막이가 필요 없다. 서로 어울리고 혼재하면서 쌈을 싸 먹듯이 그렇게 섞어서 지내는 거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가는 한국 여인의 뒷모습, 긁어 놓은 것 같은 회색 페인트의 흔적 너머로 어슴푸레 떠오르는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란도세르가 어떻게 내 등 뒤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 그 퀴즈 문제를 풀지 못하면 한국인이 무엇인지, 일본인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아시아와 서양이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란도세르라는 말 자체가 일어인지 영어인지 어느 우주인의 말인지 정체불명의 말부터 찾아가 보는 책가방 작은 여행을 떠나 보자.

이어령 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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