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학 일반

“원고를 심령에 새겨 설교했다네”

미션(cmc) 2009. 9. 1. 08:56

삶의 구체적 적용 이끌어 내는 ‘강해설교’ 강조
설교자는 겸손과 말씀의 권위 동시에 붙잡아야

   
  ▲ 칼빈이 바울 서신을 강론했던 제네바의 성베드로 대성당.  
 

<한국교회 김목사 편지에 대한 회신>

김목사, 편지 잘 받았소. 교회 성도를 향한 당신의 열정에 많은 감동을 받았소.

당신은 편지에서 “어떻게 하면 설교를 잘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만 내 대답은 늘 똑같다네. 설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일세. 김목사가 이 기본에 얼마만큼 충실했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보네.

자네도 읽어봤겠지만 내가 쓴 〈기독교강요〉에서 교회의 순수성은 설교에서 찾아야 한다고 밝혔네. 그만큼 설교가 바로 서야 교회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일세.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 설교를 보면 위기감을 느끼네. 설교는 홍수를 이루고 있지만 정작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점검해봐야 할 시기가 아닐까? 설교자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성도들에게 전해야 하건만, 오히려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으며 세속적이고 이성적인 것만 말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야 하네.

가장 큰 문제는 설교에 신학이 없다는 것이지. 제네바에서 사역할 때 나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에 초점을 맞췄네. 즉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셨으며, 여전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있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쳤지. 또한 율법을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공로와 성도의 구원도 중요한 부분이지.
그분의 의를 전가해 주시며 지금도 중보하시는 은총을 증거해야 하네. 주님께서는 화목케 하시는 분이며, 우리의 구원 과정 전체를 주장하심을 강조해야 하지. 오직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분의 의를 전가 받아서 영성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산다고 설명해야 하네.

진리의 전달과 함께 적용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네. 혹자는 내 설교 내용을 놓고 “강론과 적용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더군. 일전에 보내 준 〈고린도전서 주석〉 읽어 보았나? 거기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지.

“성경의 가르침들을 오늘날 교회의 요구에 따라 적절하게 그리고 예리하게 적용하는 것은 말씀을 강론하는 것과 동일하게 요구된다.”

김목사, 이번에는 내가 자네에게 묻겠네. 성경에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말씀이 있나? 자네 설교 내용을 보면 “사랑하라” “복 받아라” 라는 말은 많지만 회개와 경계의 말씀이나 종말에 대한 교훈에 대해서는 언급이 거의 없네. 말씀을 편식하면 교회와 성도의 건강이 허약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설교의 편식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강해설교일세. 내가 3년 만에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을 때 마지막으로 한 이사야 강론 바로 다음 구절부터 설교를 했었지. 이처럼 성경 전체를 강해해 나가겠다는 각오로 설교해 나가게. 그러면 오히려 말씀이 더 풍부해 질 걸세.

사실 나는 설교 방법론이나 테크닉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닐세. 그래서 저서 중에서 오늘날 설교학에 관한 이론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네. 요즘 목회자들은 너무 방법론만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보이네. 설교는 단지 청중을 움직이는 기술이나 커뮤니케이션 이론으로 좌우되는 것은 아니라네.

자네의 간청에 의해서 내 설교의 몇 가지 특징을 소개하겠네. 가장 큰 특징은 앞에 쓴 것처럼 강해설교를 한다는 것일세. 그리고 성경 본문을 읽은 후 언제나 간단한 개요와 함께 시작하지. 본문의 의미와 가치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것을 성도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네. 후대 설교학자들은 이를 ‘고대형식’이라고 부르더군.

설교는 용어의 선택이 중요하네. 나는 주로 일상생활적인 용어를 사용하지. 그리고 속담도 종종 섞네. 말은 되도록 함축성 있게 쓰며, 문장은 단문을 써야 청중이 이해하기 쉽다고 보네.

그렇다고 수사학적 표현을 남발했다고 오해하지는 말게. 나는 성경 밖에서 용어를 찾지 않았네. 오히려 성경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노력했지.

내게 이런 비평이 있네. “칼빈은 원고도 없이 설교를 했다. 준비도 없는 설교, 이게 말이 되느냐?”
그러나 나는 원고 없이 설교를 했지만 원고를 심령에 새겨서 설교했다는 점을 잊지 말게. 이렇게 말하고 싶네.

“우리는 끝까지 성경의 학도이어야 한다. 비록 하나님의 말씀 선포자로 임명되었을지라도 성경연구에 매진해야 한다.”

내가 원고 없이 즉흥적 설교를 한 것은 설교에 생동감을 주고 성령님을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의식 때문이었지 결코 준비가 안 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네.

하나님은 성경 가운데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설교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신다네. 내가 쓴 〈디도서 주석〉에서는 “목사는 두 개의 음성을 가져야 하는데 하나는 양들을 영접하고 모으는 음성이요, 다른 하나는 이리와 도둑을 밀어내고 좆아 내는 음성이다”라고 말했지. 설교를 통해 성도를 인도하며, 다른 측면에서는 진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미일세.

이밖에도 후대 학자들은 내 설교의 필수 요소를 명백성, 힘, 설득력이라고 정의하더군. 또 간결성과 유용성이라고 주장하는 소리도 들었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죄인인 우리를 말씀 선포자로 세우셨다는 것일세. 따라서 설교자는 겸손한 마음과 말씀의 권위를 동시에 붙잡아야 하네. 이를 위해서는 설교자 자신이 먼저 성령의 감화를 받아야 하네. 설교자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회중을 감화시킬 수 없네.
한국교회 강단이 다시 회복되길 소망하며. 칼빈.


 “교회 순수성은 설교가 좌우”

위기의 한국교회 강단, 칼빈 외침 주목해야

 

“한국교회에 위기가 왔다”는 말이 이제는 전혀 생소하지 않다. 왜 위기가 왔을까?

칼빈이 지적한 대로 교회의 순수성은 설교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에서부터 시작됐다”는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설문조사에 의하면 한국교회 목회자 3명 중 2명은 “설교를 준비할 때 타인의 원고를 어떤 형태로든 참고한다”고 밝혔다. 설교의 복제와 표절이 난무하다는 뜻이다.

또다른 문제점은 설교 횟수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거의 매일 설교를 한 칼빈도 2100편의 설교를 남겼다.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이 남긴 설교는 5000편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목회자 대다수가 일평생 동안 6000편 이상의 설교를 한다. 설교학자들은 “양적으로는 많지만 질적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설교 내용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본문과 다른 설교를 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단편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성공지향적 설교가 인기를 끌고 있다. 설교자가 말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설교 내용과 설교자의 삶이 괴리현상을 빚는 등 한국교회 설교는 총체적 위기를 맞고 있다.

열린교회 김남준 목사는 ‘칼빈탄생 500주년 기념 전국목사장로기도회’에서 “복잡한 예배순서 때문에 5분 설교가 등장했다”고 질타했다. 칼빈이 평균 1시간 이상 설교한 것과 비교해 본다면 너무 차이가 난다.

김남준 목사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설교가 신학적으로 문제된다는 얘기 들은 적 있나? 신학을 뺏기 때문이다”면서 “이런 식으로 설교하면 다음세대 교회는 망한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종교개혁은 예배의 개혁이며, 보여지는 예배가 아닌 드리는 예배를 추구였다. 칼빈은 가르치는 교회, 선포하는 교회를 강조했다.

위기를 맞고 있는 한국교회는 칼빈의 교훈을 비추어서 설교개혁이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