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학 일반

말씀·실천 균형 갖춘 열정의 신학자

미션(cmc) 2009. 9. 3. 07:32

노충헌 기자 mission@kidok.com

당대 최고 인문학 섭렵했던 지식 자양분 역할
개혁신학 정수 다양한 삶의 영역서 운동으로

칼빈이 비견될 수 없는 최고의 신학자이자 개혁교회의 시조가 된 바탕에는 그의 풍부한 인문학적 실력이 깔려 있다. 칼빈은 14세의 어린 나이에 마르쉐 대학에서 당대 최고의 학자로서 귀납적인 교수법을 창도한 꼬르디에를 만나 라틴어에 능통하게 됐다. 이후 몽떼뉴 대학에서 성경과 스콜라 신학을 배웠으며 오를레앙 대학에서는 법학과 헬라어를 공부했다. 그리고 부루주 대학에서 법학 공부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칼빈은 당대 최고의 교수들로부터 최고의 학풍을 섭렵했으며 이러한 자양분은 그가 이후 변증가요, 저술가요, 교육가요, 설교가요, 성경주석가요, 실천하는 신학자로서의 역할을 역동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했다.

   
  ▲ 칼빈이 불후의 명작이며, 전 생애에 걸친 저작이었던 〈기독교강요〉를 집필하고 있다. /그림제공=한국칼빈주의연구원.  
 
오늘날 한국의 신학대학원의 교육수준과 목회자들의 자질 문제가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지도자들은 목회자 예비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시키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이런 점에서 14세에 대학에 입학하고 23세에 세네카의 관용론에 대한 주석을 출간하고, 26세에 불후의 명저 〈기독교강요〉를 집필한 칼빈의 삶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풍부한 인문지식의 소유자

칼빈은 또한 노력하는 신학자였다. 칼빈은 특정한 신학 과목들을 듣기는 했으되 오늘날과 같은 프로테스탄트신학을 체계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었다. 당시 모든 신학교란 신부가 되기 위한 과정에 불과했을 뿐 신학 자체를 가르치는 곳은 아니었다. 칼빈은 독학으로 교부들의 신학저서들을 탐독했으며 당대 은밀히 출판되었던 루터란 신학서들을 통독하였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회심(subita conversio)를 거쳐 독자적인 개혁주의 신학을 확립했다. 칼빈이 얼마나 불요불굴한 노력을 다한 신학자였는지를 우리는 그가 〈기독교강요〉를 거듭하여 집필한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36년 초판 이후 1559년 5판까지 〈기독교강요〉는 필생의 역작으로서 계속해서 증보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앙교육서〉, 〈시편찬송가〉, 〈걸려 넘어지는 것들에 관하여〉, 〈거룩한 삼위일체론에 관한 정통신앙 변호〉 등의 저서를 끊임없이 발간했다. 칼빈의 성경 주석과 강의는 거의 성경 전체를 망라했으며 매주 7~8편의 설교가 강단에서 선포되었다. 신학자로서 칼빈은 또한 그 배운 바를 적용하는데도 열성을 다하였다. 그는 글을 쓰고 연구하는 모습을 잃지 않는 가운데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성으로 세우고자 앞장섰다.

동시에 칼빈은 성령의 신학자이기도 했다. 20세기를 주도하면서 서구 교회를 무너뜨렸던 자유주의신학자들은 이성의 위대함을 신봉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난도질했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이 변화 받고 새롭게 되는 것은 성경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내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일생을 말씀과 성령으로 살고 그것을 신학의 틀로서 조직했던 겸손한 신학자였다. 또한 그의 성령론은 중세 가톨릭의 권위주의적이고 의식적 전통이나 과격한 재세례파의 신비주의를 배격하는 성경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성령의 부분적 능력이나 기적만을 강조하여서 교회에 혼란을 주는 일이 적지 않게 문제가 되는데 칼빈은 “성령과 말씀은 결합한다”는 믿음으로 말씀과 성령의 균형을 추구했다.

끝없이 연구와 저술에 힘써

칼빈은 또한 실천하는 신학자였다. 칼빈은 말씀을 교회 안에만 가두어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생활의 모든 면에서 유일하고 최고의 법칙으로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중심’이라는 신앙관을 저술과 대학설립, 그리고 제네바의 개혁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펼쳤다. 지상의 세상은 본질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해 있다. 칼빈이 활동했던 16세기 제네바도 마찬가지였다. 칼빈은 제네바의 셍 피에르 교회에서 27년간 강단을 지키면서 설교운동을 일으켰으며 1559년에 제네바 아카데미를 설립해 개혁신학의 기치를 내걸고 후학들을 양성했다.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하여 14년간 온갖 모함과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신을 밀고 나갔으며 불의한 부자들을 비판하고 가난한 이들과 피난민들을 위해 그의 급여와 집을 함께 사용하는 실천적인 모습을 보였다. 고리대금을 금했고 주인과 노동자 모두가 정당하고 적절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부의 분배문제와 사회정의에도 앞장섰다. 자신이 속한 제네바를 변화시켜 거룩한 도시의 모델을 삼으려고 했던 칼빈의 마음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민족으로 삼아 세계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알리려했던 하나님의 마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말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더불어 겸손히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했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저술활동을 하면서도 사회와 민족복음화를 위해 실천했던 칼빈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신자들, 특히 신학자들과 사역자들에게 큰 경각심을 일깨워준다.


신학서로서 〈기독교강요〉 성경진리 함축 최고 교본

칼빈의 역작 〈기독교강요〉의 중심사항은 한 마디로 ‘위대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 제일주의와 절대주권을 강조하며 인간의 전적 무능 및 그리스도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1536년에 나온 〈기독교강요〉 초판은 신약 성경의 사분의 삼 정도 되는 작은 분량으로 절 구분이 없이 모두 여섯 장으로 이뤄져 있었다. 제1장은 하나님의 속성과 이신칭의 교리 등 기본적인 신학 주제들이 담겨 있었다. 제2장은 신앙의 개념과 조목을 다뤘으며 제3장은 올바른 기도에 대해, 제4장은 성례를 다뤘다. 제5장은 가톨릭의 성례를 비판했으며 제6장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해 설명했다. 칼빈은 이 책에서 신앙 고백적이고 요리문답적인 핵심 교리에 대해서만 기술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관용과 가톨릭의 잘못된 성례, 그리고 교회 권력과 시민정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기독교인의 자유와 같은 동시대인들이 관심을 가질 주제들에 대해 변증적으로 기록했다.

〈기독교강요〉는 1539년에 17장으로 대폭 증보되어서 개정판이 나온다. 이 책에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교리가 조직화되었다. 특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처음 두 장을 차지함으로 교리의 교훈적 요소가 전면에 부각됐다. 또 회개의 장이 신설되었는데 이는 가톨릭의 고해성사와 보속 등을 통한 공로사상을 비판하고자 함이었다. 오직 은혜를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은 회개를 교리적으로 설명함으로 개혁주의 구원론의 길을 열었으며 이신칭의의 교리와 선행에 대한 교리가 첨가됐다. 더불어 신구약이 실체는 동일하나 경륜에 차이가 있다는 입장을 밝혀 구약이 성경의 예비적인 부분이 아니라 성경자체라는 입장을 확립했다. 그리고 칼빈주의의 대표적 교리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를 다룬 장을 덧붙였다. 1543년에 출판된 제3판에는 교회론과 시민정부론에 대한 논쟁들이 광범위하게 추가됐으며 사도신경에 대한 해설 부분이 세 개의 장으로 삽입됐다. 1550년의 제4판은 성경 구절들과 교부의 작품들에 대한 인용이 풍부하게 나열된 특징을 보였다. 또 교회법에 관한 많은 단락들이 첨가된 것도 다른 점이다.

마지막 제5판 〈기독교강요〉는 이제 80장에 달하는 방대한 책으로 선보였다. 거대한 분량이 된 만큼 장은 몇 개로 묶여 ‘권’이 되어야 했다. 마지막 판에서 강조된 부분은 그리스도의 중보직과 중보사역에 대한 것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의 삶의 부유함을 부각시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독교강요〉에 대한 개신교계의 예찬은 무궁무진하다. 대개 성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나 역사적, 신학적으로도 성경에 버금가는 필독서라는 평가들이다. 그리고 그런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기독교강요〉가 가장 성경적인 책 가운데 하나이며 성경을 충실히 탐구한 책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