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학 일반

“제네바는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 학교”

미션(cmc) 2009. 9. 3. 07:34

위협·모욕 이기며 경건한 규범 적용
‘세계 개혁신앙 본부’로 자리매김

“저는 부끄러움을 잘 타고 성격도 소심합니다. 역경에 맞설 자신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몸도 자주 아파 그 일을 하기엔 적합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서재에 앉아 책이나 읽고 글이나 쓸 사람입니다.”

키가 작고 다부져 보이는 사람이 폭포수 같은 말로 다시 매섭게 몰아붙였다. 

결국 날카로운 눈매의 젊은이는 하나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제 1차 제네바 종교개혁의 장본인이었던 기욤 파렐은 익명의 도망자로서 기독교 강요 초판을 집필했던 칼빈을 이렇게 스위스의 중심부 제네바로 끌어들였다. 그때가 칼빈의 나이 27세였다. 

   
  ▲ 제네바를 신앙의 도시로 구축하기 위해 강론을 펼쳤던 성베드로교회. 칼빈의 후예들이 지금도 경건한 삶을 추구하며 신앙을 다지고 있다.  
 
파렐이 기치를 든 제네바의 종교개혁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어두움을 넘어서 빛으로(post tenebras lux)” 라는 슬로건으로 성도의 자유를 구가하되 거룩한 삶을 추구했던 신교의 신앙은 온데 간데 사라지고 무질서와 방탕한 생활이 계속되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을 추종했던 제네바의 토박이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애국자임을 자처하며 프랑스에서 온 젊은 ‘이방인’을 원하지 않았다.

제네바에 첫 발을 내딛은 칼빈은 성베드로교회에서 강연을 시작했다. 그의 강의는 기품이 있었으며 심오한 기독교 교리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술집은 언제나 만원이었고, 카드놀이를 하는 도박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이 가득했다. 첩을 두는 행위나 매춘도 상습화 되어 있었다. 연일 무도회가 열리고 허영에 들 뜬 여인들은 비싼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다녔다.

이제 제네바에 참 교회를 세워가야 할 시기였다. 칼빈은 깃펜에 잉크를 적셔가며 ‘신앙고백서’를 집필했다. 그리하여 제네바 시민들이 성경의 말씀대로 믿고 살겠노라고 고백하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시의회에 넘겨 서약하도록 강요했다.

그럴수록 분노의 목소리도 높았다. 방탕한 삶을 좋아했던 소위 방종주의자들은 목회자들이 강요하는 신앙고백에 대해서 불평했고, 자칭 애국자들은 외국인들이 제네바를 뒤흔든다고 분노했다. 그러나 이 젊은 프랑스 청년은 단호했다. 그는 한 푼의 사례비도 받지 못했으나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출교권을 교회에 줄 것을 요구하고 성찬을 매 주 실시할 것을 의회에 제출했다. 거기다 자녀들에겐 요리문답을 가르쳐 신앙 안에서 교육할 것을 요청했다. 제네바에 참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칼빈은 초대교회의 모범을 ‘적용’하려고 온갖 정성을 기울였다. 칼빈은 성도들이 잘 듣도록 새로 마련한 성베드로교회의 높은 강단에서 수많은 회중을 향해 불같은 언어를 거침없이 토해냈다.

그러나 칼빈이 설득력 있고 명확한 어조로 제네바의 문제점을 지적할 때 마다 분노의 불길도 거셌다.결국 1538년 4월, 제네바에서 20개월을 머문 칼빈은 기욤 파렐과 쿠롤과 함께 제네바 정부로부터 추방을 당했다. 자신이 계획했던 꿈들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날카로운 눈매의 청년은 그렇게 제네바를 떠났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머문 것은 마르틴 부써의 목사와 동료들의 간곡한 요청 때문이었다. 그는 성니콜라스교회에서 사역했다. 스트라스부르그는 평화로운 도시였다. 제네바에서 보낸 것과 비교하면 단꿈과 같았으며, 폭도나 싸움은커녕 성례를 거행할 때 거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도 없었다. 시내를 조용히 관통하는 운하의 강물처럼 시민들의 생활도 평온했다. 

칼빈이 스트라스부르그에 머무는 동안 제네바는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칼빈과 파렐의 후임자인 목회자들은 시민들의 존경을 받지 못했으며 제네바 교회를 로마 가톨릭으로 복귀하려는 움직임도 거셌다. 마침내 제네바 시민들은 칼빈의 지도력 없이는 신교가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칼빈을 다시 부르게 된다.

   
  ▲ 칼빈이 살았던 제네바 캐논 11번지. 칼빈은 이곳을 오가며 종교개혁의 의지를 불태웠다.  
 
“우리의 좋은 형제요, 특별한 동료인 칼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영예를 진작시키고 그의 신성한 거룩한 말씀을 전하는데 당신 밖에 없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이 잘 알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신교의 체계를 세우는데 상당한 자유를 약속받고 1541년 제네바로 ‘개선’했다. 칼빈이 제네바로 돌아와 취한 첫 조치는 ‘제네바 교회법’을 작성하여 실시한 것이었다. 이 교회법령은 1561년 재작성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네바 교회헌법은 물론 개혁교회의 모델로서 사용되고 있다. 가르치는 박사, 설교하는 목사, 훈련하는 장로, 자선을 관장하는 집사의 직분론이 수립되었다. 이것은 신약 교회의 본을 다룬 것으로 각각의 직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직무를 덧붙였다. 또한 오늘날 당회의 기원이 되는 목사들과 장로들의 회(consistory)를 조직하는 법령이 되었다. 

칼빈은 매 주일 성베드로교회와 성제르베교회에서 강론하고, 목요일에는 치리회를 주재했다. 또 개인적으로 병자와 죄수를 방문하고, 교회법에 명한대로 교구에 속한 가정을 정기적으로 심방했다. 뿐 만 아니라 소책자와 소논문을 작성하여 보고했고, 공개강연을 통해 주석서를 교정하거나 성경을 한권씩 돌아가며 상세히 강해까지 했다. 거기다 혼인식과 세례식도 담당했다. 그렇다고 제네바 시민들이 전적으로 칼빈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제기되는 논쟁은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칼빈은 분노를 억제하며 ‘부드럽게 그러나 확고하게’ 일을 처리해 나갔다.

칼빈의 강의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으며, 제네바 시민은 물론 종교적 이유로 망명한 피난민들도 강의에 매료되어 교회는 늘 인산인해였다. 칼빈이 살고 있었던 캐논 거리는 하나님의 사자로서 삶을 전적으로 헌신한 성경 진리의 투사가 머무는 공간일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들이 마음 놓고 쉼을 얻는 그런 안식처였다.

칼빈이 제네바를 신앙의 도시로 구축하고 있을 당시 프랑스와 독일 등지에서의 종교박해는 갈수록 심해졌다. 프랑스의 박해와 독일 교회의 불화 가운데서도 칼빈은 교회간의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 쯔빙글리의 추종자인 볼링거와 루터파인 멜란히톤에게 편지를 보내고 만나서 결국 신교의 통일도 이루었다.

그렇다고 신앙의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 피에르 아모, 파브레가, 페렐, 방델, 자크 그루에 등 숱한 사람들이 칼빈에게 반기를 들었다. 제네바 개혁은 긴 투쟁의 연속이었다. 반대자들은 칼빈에게 ‘가인’이라 부르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개새끼, 칼빈!’ 등 심한 모멸감을 주며 난폭하게 굴었다.

위협과 모욕을 당하고 온갖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지만 칼빈은 도무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도 믿음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경건한 삶을 살 것을 엄격히 요청했다. 이러한 칼빈의 개혁은 강설과 요리문답, 그리고 권징을 통해 제네바 시민들에게 천천히 효력을 나타내고 있었다. 제롬 볼섹의 추방과 미카엘 세르베투스의 재판은 이와 같은 신앙의 논쟁을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소돔이었던 제네바를 하나님의 도시로 변화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칼빈이 개혁의 기치를 든 제네바는 이렇게 종교개혁의 도시로서, 세계 신앙의 본부로서 견고하게 자리매김해 갔다.

장로교의 창시자로서 칼빈에게 배웠던 존 낙스는 제네바를 가르켜 “이곳은 사도 시대 이래로 이 땅에 존재한 가장 완벽한 그리스도 학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559년 스코틀랜드로 돌아가서 그곳을 칼빈이 가르친 교리와 교회정치를 따르는 장로교회의 발상지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