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연수과/신학 일반

영국교회 개혁 동력 ‘청교도’를 낳다

미션(cmc) 2009. 9. 3. 07:36

'칼빈 500주년 기념 특별기획'

메리 여왕 박해 피한 종교개혁자들
칼빈 가르침 받고 귀국, 개혁 꽃 피워

1620년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The May Flower)에 탄 102명의 청교도들의 눈앞에 드디어 신대륙이 모습을 드러냈다. 3개월 이상 거센 파도를 견디며 찾아온 곳. 오직 성경의 기치에 따라서 교회 개혁과 국가통치의 이념을 실현하여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이 저마다 가득했다. 그날은 60여 년 전 시작된 영국 종교개혁의 새 흐름, 청교도 운동이 새로운 역사적 전기를 마련하는 날이기도 했다.

청교도 운동을 낳은 영국 종교개혁은 그 시작부터가 대다수 유럽 국가들과는 달랐다. 프랑스와 독일 등 대륙 국가들의 종교개혁이 성경의 참 진리를 깨달은 신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주도되었다면, 영국 개신교 운동은 통치자 헨리 8세에 의해 실현됐다. 헨리 8세(1491~1547)는 애초에 철저한 천주교회 신봉자였다. 그러나 1527년 왕비 캐더린과의 이혼을 교황청이 불허하자 그는 단교의 길을 택하고 반(反)로마 정책을 강화하여 1534년에는 의회를 설득해 ‘왕이 영국교회의 유일한 최고의 머리’이자, 이단과 악습을 교정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진다는 내용의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통과시킨다. 바야흐로 교회의 지배권이 교황청으로부터 국가의 왕으로 넘어간 것이다.

 

   
  ▲ 영국 청교도들은 웨스터민스터 사원에서 신앙고백서를 비롯한 장로교 기본 교리를 만든다.  
 
제네바의 칼빈은 영국의 종교개혁의 추이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다. 칼빈은 헨리 8세에 이어 1547년 9살의 어린 왕 에드워드 6세(1537∼1553)가 왕위에 올랐을 때 당시 영국의 섭정자 서머셋 공작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냈다. 1548년에는 〈디모데전서 주석〉을 써서 그에게 헌정했으며, 설교, 예배, 권징에서의 철저한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칼빈의 편지에 대해 서머셋 공작과 에드워드 6세는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며 ‘공동기도서’와 ‘42개조 신조’를 만들어 영국국교회 교리의 기초를 쌓았다.

 

청교도 운동의 잉태는 에드워드 6세에 이은 메리 여왕(1516∼1558)의 박해로부터 시작됐다. 그녀는 ‘피의 메리’(Bloody Mary)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1553년 즉위 이후 300여 명의 종교개혁자들을 화형에 처했다. 메리 여왕의 압제를 피해 800여 명의 개혁자들은 대륙으로 피신하는데, 이 중 230여 명이 제네바에서 칼빈의 가르침을 받는다. 이후 메리 여왕이 죽고 1558년 엘리자베스 여왕(1533∼1603)이 왕위를 계승해 중용 정책을 펴게 되자, 피신해 있던 개혁자들은 본국을 성경이 다스리는 언약의 나라로 만들고자 다시 귀국한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 내에서 개혁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개혁자들은 우선 영국 국교회 안에 있는 비성경적 요소를 제거하려 했다. 그들은 세례 받을 때 대부(god-father)를 세우는 제도, 성자를 기념하는 축성일(祝聖日) 준수, 십자가 성호 등을 미신으로 간주했다. 또 목회자의 복장 착용이 만인제사장주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으며, 성찬식에서 무릎을 꿇는 행위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했다. 영국 국교회 안에 있는 천주교회의 잔재를 제거하고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 하였으므로, 이들은 당시 사람들로부터 성경만을 고집하는 ‘고지식한 사람들’(Precisians), 또는 ‘청교도’(Puritan)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청교도들은 1563년 교회개혁의 청사진을 영국 국교회 최고 입법기관인 켄터베리 성직자회에 발송하였다. 그러나 개혁안은 불행히도 단 한 표 차이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청교도들은 움츠러들지 않고, 성직자들의 복장 거부 운동을 전개하는 등 자신들의 주장을 밀고 나갔다.

이 같은 청교도 운동에 대해 정부 당국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점점 조직적인 박해를 가하고자 하는 음모와 술책을 더하였다. 1566년 대주교 매튜 파커는 설교할 때는 주교의 허락을 받을 것, 논쟁적인 설교를 금할 것, 성만찬을 받을 때 무릎을 꿇을 것, 성직자는 사제 복장을 착용할 것 등을 모든 설교자들에게 명하였다. 청교도들의 불복이 이어졌고, 당국은 그들을 교회로부터 추방하거나 지위를 박탈했다.

정부 당국의 비우호적인 종교정책과 더불어 청교도 내의 분리주의 움직임도 극복해야 할 과제였다. 청교도 내에서는 1570년대 이후 장로정치 사상이 형성되어왔는데, 이는 교회의 위계질서와 교권을 강조하는 감독주의의 도전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청교도 내에서는 영국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이 요구하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자는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대다수의 청교도들은 교회 분리에 소극적인 입장이었다. 그들은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비록 교회가 타락했을지라도 교회를 떠나지 않고 그 안에서 개혁하고자 했다.

이 같은 분리주의 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여러 개혁자들에 의해 이어져왔다. 1603년 제임스 1세 등극 후 분리주의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일부 분리주의자들이 이주를 단행해 네덜란드에 자신들의 교회를 세웠다. 이후 네덜란드 라이덴에 정착한 분리주의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박해가 줄어들자, 1618년 영국으로 귀국한다. 이어 통제가 없는 곳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신대륙 이민 계획을 세우고, 1620년 신대륙으로의 항해를 시작한다. 영국에서 시작된 청교도 운동이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심겨지는 순간이었다.

영국 내에서는 1625년 제임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찰스 1세(1600∼1649)가 왕위에 오르면서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다. 당시 청교도 운동의 중심이었던 의회와 찰스 1세와의 갈등도 갈수록 첨예화됐다. 20여 년간 갈등이 계속되는 가운데 의회는 찰스 1세의 반대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1643년 7월 1일 역사적인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개회한다. 총회는 상원의원 10명, 하원의원 20명, 신학자와 목회자 121명으로 구성됐다. 총회에서는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자는 필요성이 제기돼, 1646년 11월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완성하고, 1647년 성인들을 위한 ‘대요리문답서’와 어린이 교육을 위한 ‘소요리문답서’를 작성한다. 칼빈으로부터 시작된 가르침이 숱한 박해와 시련을 넘어서서 장로교회의 기본 교리서로 열매 맺은 것이다.

 

'청교도 운동의 사상가들'

장로정치사상 주창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

 

   
   

 

카트라이트는 1550년 케임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존스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종교개혁을 알게 되고, 메리 여왕의 박해 때 대학에서 추방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등극해 중용정책을 펴자, 다시 신학 공부를 시작하고 1569년 케임브리지대학의 석좌교수로 임명받는다.

이때부터 카트라이트는 교회의 부정과 부패가 계급적인 구조에서 온다고 판단, 교계제도가 성경적인지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서 교회의 모든 제도를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축소할 것, 각 교구 안에 치리를 위한 장로를 세울 것, 설교할 능력이 없는 자를 목사로 세우지 말 것, 교인에 의한 목사의 선택 등 하나님의 법에 기초한 장로교적 교회체제를 제안한다. 또 대주교좌나 부주교좌 등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교직의 폐지와 성직의 동등성을 주장한다.

카트라이트의 교회정치 사상은 존 필드와 토머스 윌콕스에 의해 계승되었고, 그들은 1572년 〈의회에 주는 권면〉을 써서 영국교회가 장로정치를 채택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장로정치 사상은 윌터 트래버스에 의해 널리 확산되었고, 그 결과 1583년부터 영국 청교도들의 신앙과 교회 정치의 주류를 이루게 됐다.

 

<소명론>서 충성 주장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

퍼킨스는 1577년 케임브리지에 있는 크라이스트대학에 진학해, 1584년부터 1594년까지 교수로 활동한다. 1584년 케임브리지대학 안에 있는 성 앤드류 교회 설교자가 되어 160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씀 중심의 경건생활을 추구하는 영향력 있는 설교자로 활동한다.

다수의 저서를 남겼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교황청에 대항하여 쓴 〈개혁적 가톨릭〉, 기독교의 핵심교리인 예정론을 다룬 〈황금 사슬〉, 〈지난 시대의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소명론〉 등이 있다. 특히 〈소명론〉에서 퍼킨스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충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소명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일반적 소명’과 직업으로 부르시는 ‘특별한 소명’으로 나누고,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직업을 갖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소명의 목적은 부의 축적이나 명예와 권세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섬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으므로, 교회만이 아니라 병원이나 군대, 또는 작은 가게에서 일하는 것도 하나님의 섬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퍼킨스의 소명 사상은 현대 자본주의 정신의 기초가 됐다고 평가받는다.